All Chapters of 날 버린 재벌이 지 아들인줄 모르고 입양한댄다: Chapter 1 - Chapter 10

17 Chapters

제1화: 쫓겨난 밤

5년 전 늦은 가을밤, 서울 성북동 선진그룹 본가 대저택 앞에는 살을 에는 폭우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임신 6주 차 초음파 사진 봉투를 품에 안은 서연은 흠뻑 젖은 채 대문 앞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이가 딱딱 부딪혔다. 육중한 철문이 열리고, 감청색 수트를 입은 차도현이 우산을 쓴 수행원들을 대동한 채 걸어 나왔다."도현 씨…… 제발 내 말 한 번만 들어줘요. 나 딴 사람 만난 적 없어요. 이 아이, 진짜 도현 씨 아이예요."서연이 피가 배어 나오는 손끝으로 도현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도현은 망설임도 없이 서연의 손을 구둣발로 거칠게 쳐냈다."더러운 입으로 내 이름을 부르지 마."도현의 목소리는 낮고 딱딱했다. 그는 코트 안주머니에서 구겨진 비뇨기과 차트와 조작된 호텔 출입 사진을 꺼내 서연의 얼굴을 향해 내던졌다."선천성 무정자증. 난 의학적으로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야. 병원장 직인이 찍힌 이 차트가 거짓말을 한다는 건가?""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어요. 검사가 잘못된 거예요!""서린 호텔 스위트룸에 다른 사내와 드나든 사진까지 내 손에 들어왔어. 내 뒤통수를 치고 딴 놈 씨를 내 핏줄로 둔갑시켜 선진가 안주인 자리를 꿰차려 해?"도현의 얼굴에는 배신감과 확신이 뒤섞여 있었다. 눈앞의 차트와 사진이 모두 조작됐다는 사실을, 당시의 그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때 저택 현관 쪽에서 다이아몬드로 치장한 강 여사와 오유라가 입가에 웃음을 걸고 걸어 나왔다."도현아, 저런 천박한 사기꾼 년과 무슨 말을 더 섞니? 경비들 불러서 당장 끌어내라."강 여사의 표독스러운 목소리에 이어 오유라가 가증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서연 씨, 도현 씨가 불임 판정을 받고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알면서 어떻게 이래요?"서연은 울음을 참으며 도현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도현은 차갑게 등을 돌렸다."두 번 다시 내 눈앞에 띄지 마. 다음에 또 이따위 사기극을 벌이면 네 아버지 목숨줄부터 끊어놓을 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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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네 핏줄

처치실의 차가운 백색 형광등 아래, 서연의 심장이 바닥 끝까지 곤두박질쳤다. Rh 음성 AB형. 그것은 서연의 피가 아니었다. 5년 전 자신을 폭우 속에 내던지며 "더러운 딴 놈 씨"라고 저주를 퍼부었던 남자, 차도현의 피였다."교수님, 혈액원에는 재고가 정말 없나요?"서연이 떨리는 손으로 교수의 가운 소매를 붙잡으며 애원했다. 교수는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었다."혈액원에도 아이와 항원 조합이 맞는 적혈구·혈소판 제제가 거의 없습니다. 72시간 안에 1차 성분수혈을 못 하면 출혈과 다발성 장기 부전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가족을 포함해 적합 공여자 검사도 동시에 진행해야 합니다."72시간. 아이의 생체 신호가 깜빡이는 모니터 화면에는 카운트다운처럼 숫자가 줄어들고 있었다. 서연은 산소마스크를 쓴 채 가늘게 숨을 헐떡이는 우진의 작은 이마를 쓸어내렸다. 아이는 열에 들뜬 와중에도 서연의 손을 놓지 않으려 작은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엄마…… 울지 마. 나 안 아파……."맑고 깊은 눈동자. 온갖 모욕과 가난 속에서도 서연을 버티게 해준 유일한 가족이자 전부인 아이였다. 서연은 눈가를 훔치고 아이의 손을 더 단단히 잡았다.'절대로 내 아이를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아.'***그날 오후, 선진그룹 총수 집무실. 차도현은 넥타이를 반듯하게 맨 채 데스크 위에 놓인 이사회 보고서를 무표정하게 훑고 있었다. 맞은편 소파에는 명예회장 미망인 강 여사가 찻잔을 내려놓고 매섭게 말했다."도현아, 주총이 다음 달이다. 명색이 그룹 총수 자리에 올랐으면서 직계 후계자 하나 없다는 게 말이 되니? 유라와 약혼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결혼식을 미뤄!"도현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어머니, 몇 번을 말씀드립니까. 전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입니다. 후계 문제는 재단을 통해 검증한 아이를 정식으로 입양해 해결할 겁니다.""입양?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의 자식을 선진가 호적에 올리겠다고?"강 여사가 기가 찬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지만, 도현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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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VIP 결연 지원

차도현 일행이 선진의료원 로비로 들어서자 정장 차림의 경호원들이 동선을 비웠다. 병원장과 진료부장들은 걸음을 맞추며 그날 일정을 보고했다.선진그룹의 젊은 총수. 기둥 뒤편에 선 서연은 굳은 자세로 숨을 죽인 채 멀어져 가는 도현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5년이 흘렀어도 그날 밤의 빗소리와 남자의 경멸은 어제 일처럼 선명했다.'네 피가 흐르고 있어, 차도현.'네가 짓밟고 버린 네 친아들이, 지금 5층 병실에서 너와 똑같은 희귀 혈액을 구하지 못해 숨이 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너는 꿈에도 모를 것이다. 서연은 떨리는 손가락에 힘을 주어 품에 안은 결연 지원 서류철을 으스러지도록 쥐었다.도현의 일행이 VIP 전용 엘리베이터 안으로 완전히 사라지자, 서연은 곧장 3층 장학재단 지원사업팀 창구로 발걸음을 옮겼다.***"한서연 보호자님, 서류는 확인했습니다만……."접수 담당 팀장이 난색을 보이며 서류철을 넘겼다."선진재단 '난치성 환아 VIP 결연 및 희귀혈액 공여자 연계 프로그램'은 단순한 의료비 지원 사업이 아닙니다. 해외 공여망과 장기 치료까지 묶인 사업이라 차도현 총수님이 직접 서류를 검토하고 대면 면담에 참관하십니다.""알고 있습니다. 필요한 추가 검사나 자격 서류가 있다면 무엇이든 즉시 제출하겠습니다."서연의 목소리는 단호하고 흔들림이 없었다."아이의 면역 수치와 골수 억제 진단서, 항체 검사와 HLA 자료까지 전부 첨부했습니다. 72시간 안에 적합 성분수혈이 들어가지 않으면 다발성 장기 부전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팀장은 연구 보고서처럼 정돈된 자료를 훑어보고 작게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내일 오전 10시, 본관 7층 VIP 면담실에서 긴급 지원 심사가 있습니다. 장기 결연 안내도 함께 진행되지만, 치료 지원 여부부터 먼저 심사합니다. 총수님이 직접 참관하시니 시간 맞춰 와 주세요.""감사합니다. 반드시 시간 맞춰 참석하겠습니다."서연은 접수증의 ‘치료 우선’ 표시를 다시 확인했다.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돌아섰다. 내일이면 5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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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쇼윈도 후계자

우진의 말에 서연의 손이 잠깐 굳었다. 서연은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 보이며 아이의 작은 손을 꼭 쥐었다."우진아, 그냥 지나가는 아저씨였을 뿐이야. 신경 쓰지 말고 푹 자자, 응?""응, 엄마."우진은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불을 덮었지만, 아이의 깊은 눈동자에는 여전히 어른 못지않은 총명한 기색이 감돌고 있었다. 서연은 아이가 잠들 때까지 곁을 지키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우진아, 널 절대로 빼앗기지 않아. 그 남자의 손에 결코 널 넘겨주지 않을 거야.'이를 악물고 버텨온 5년이었다. 도현에게서 필요한 것은 우진을 살릴 공여 검사와 재단 승인뿐이었다. 그 외의 어떤 것도 그 남자에게 허락할 생각은 없었다.***같은 시각, 선진의료원 본관 12층 VIP 접견실. 탁 트인 통유리창 너머로 서울 시내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최고급 스위트룸. 도현은 묵직한 가죽 소파에 다리를 꼰 채, 비서실장이 올린 결연 대상 아동 서류철을 넘기고 있었다."이번 분기 결연 신청 아동 48명 가운데 인지검사와 추천서, 보호 환경을 종합해 5명을 우선 면담 대상으로 추렸습니다."서류 맨 위에는 붉은색 ‘긴급 치료 우선’ 띠가 붙은 파일이 한 권 끼워져 있었다. 도현은 이름을 확인하려 했지만, 그때 접견실 문이 열렸다.비서실장의 보고에 도현의 날카로운 턱선이 서늘하게 굳어졌다."성적만 좋은 아이를 찾는 게 아니야. 낯선 환경에서도 자기 판단을 할 수 있고, 장기적으로 후계 교육을 버틸 아이여야 해."도현의 말이 차갑게 떨어지자 실장은 짧게 고개를 숙였다. 그때, 접견실 문이 요란하게 열리며 명품 원피스를 화려하게 차려입은 오유라가 들어섰다. 그녀의 손에는 고급 가죽 백과 함께 두툼한 추천서가 들려 있었다."도현 씨! 아직도 그 골치 아픈 입양 서류 보고 있어요?"유라가 생글생글 웃으며 도현의 곁으로 다가와 소파 팔걸이에 자연스럽게 손을 얹었다."우리 병원 재단 이사진 조카 중에 진짜 똑똑한 영재가 있거든요. 굳이 근본도 모르는 고아나 서민 아이들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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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눈빛이 멍청한 아저씨

도현은 곧장 엘리베이터로 향했다."총수님, 5시 이사회 임원 보고 일정이…….""10분 뒤로 미뤄."도현은 비서실장의 다급한 말을 단칼에 자르며 1층 로비로 향하는 전용 버튼을 눌렀다. 수행원들의 밀착 경호를 단호히 물린 채, 도현은 홀로 1층 중앙 정원 유리 온실 휴게실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온실 한가운데 자리 잡은 원목 테이블. 주변의 뇌신경외과 교수들과 의사들이 웅성거리며 둘러선 가운데, 헐렁한 환자복을 입은 네 살배기 우진이 턱을 괸 채 체스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도현은 수트 주머니에 한 손을 넣은 채 아이의 맞은편에 섰다. 큰 체구가 드리운 그림자가 체스판 위로 길게 내려왔다. 하지만 우진은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아이는 하얗고 가느다란 고사리손으로 백색 폰을 집어 들어 거침없이 전진시켰다."그 자리는 함정이다."도현이 낮게 훈수를 두었다."상대 룩의 사정거리 안으로 스스로 기어 들어가는 악수(惡手)야. 나이트를 먼저 움직여서 중앙 진형을 장악했어야지."틀렸을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는 말투였다. 그때, 우진의 작은 손이 허공에서 뚝 멈추었다. 아이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도현을 올려다보았다. 쌍꺼풀 없이 길게 뻗은 눈매가 도현과 놀랄 만큼 닮아 있었다. 우진은 한동안 도현을 올려다보다 턱을 살짝 비틀고 한숨을 쉬었다."저 아저씨는 눈빛이 참 멍청하네."주변에 선 의료진의 얼굴이 굳었다. 차도현 면전에서 저런 말을 할 사람은 어른 중에도 드물었다. 도현의 미간이 좁혀졌다."……뭐라고?""아저씨는 눈앞의 한 수만 보고 뒤에 숨겨진 세 수는 전혀 못 보잖아."우진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비숍을 사선으로 밀어 상대 킹 앞에 내려놓았다. 탁. 체스판 위의 판도가 순식간에 뒤집혔다. 도현이 '악수'라고 폄하했던 폰의 전진은, 사실 상대 퀸의 탈출로를 원천 봉쇄하기 위한 치밀한 미끼였다.비숍과 폰의 연계로 흑색 킹은 세 수 만에 움직일 곳을 잃었다. 체크메이트. 도현도 바로 읽지 못한 수를 네 살배기 아이가 먼저 봤다."다시 보여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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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기시감

온실 입구를 가르는 다급한 외침에 우진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엄마!"아이는 체스 말을 내려놓고 가느다란 링거대를 덜컹거리며 입구 쪽으로 종종걸음 쳐 달려갔다. 도현이 흠칫하며 급히 몸을 돌렸다.하지만 입구 쪽으로 몰려든 보호자들과 의료진들의 인파에 가려, 아이를 와락 품에 안는 여자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오직 눈물에 젖은 채 아이의 작은 어깨를 토닥이는 가녀린 뒷모습만이 찰나의 순간 스쳐 지나갔을 뿐이었다.여자는 아이를 안아 들고 소아 병동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졌다. 도현은 닫힌 문을 바라봤다. 자신과 닮은 눈매, 몇 수 앞을 보는 습관, 독한 향을 바로 알아챈 예민한 후각까지 자꾸 마음에 걸렸다.'단순한 우연이 아니야.'도현의 입술이 바싹 말라붙었다. 그는 즉시 코트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정 실장."- 예, 총수님."방금 1층 온실에 있던 502호 환아. 결연 신청서에 포함된 진료정보 열람 동의 범위 안에서 자료를 확인해. 3분 안에."- 바로 확인하여 보고드리겠습니다.***12층 총수 집무실. 도현은 데스크 위에 도착한 보안 승인 차트를 뚫어지게 응시했다.[환아 기본 정보]- 성명: 한우진 (만 네 살)- 진단명: 급성 면역 이상 및 중증 골수 억제- 특이 혈액형: Rh 음성 AB형 (초희귀 혈액)- 가족력 및 특이 소견: 복숭아 단백질 및 일부 향료 성분에 중증 과민 반응 의심차트를 내리던 도현의 손이 멈췄다. Rh 음성 AB형의 초희귀 혈액. 그리고 극소량의 복숭아 단백질에도 기도가 붓는 중증 과민 반응. 차씨 집안에서 여러 차례 나타났고, 도현 자신도 어릴 적 같은 증상으로 응급실에 실려 간 적이 있었다. 5년 전 기억이 차례로 떠올랐다.'선천성 무정자증. 넌 아이를 가질 수 없어.'친모 강 여사가 들이밀었던 병원장 직인의 진단서. 그리고 오유라가 건넸던 스위트룸 출입 사진들. 그때는 의심하지 않았던 자료들이 처음으로 수상해 보였다. 도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차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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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4세 천재의 도발

도현은 태블릿 화면의 이름을 다시 확인했다.[보호자: 한서연 / 환아: 한우진 (Rh 음성 AB형)]5년 전 서연은 분명 자신의 아이라고 말했다. 도현은 그 말을 듣지 않았고, 병원 직인이 찍힌 진단서와 사진만 믿었다. 자료가 조작된 것이라면 임신한 서연을 내친 책임은 누구에게도 돌릴 수 없었다.그는 시간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면담은 다음 날이었지만, 아이가 어떤 상태인지 한 번만 더 보고 싶었다.도현은 수행원들의 밀착 경호를 전부 물리친 채, 홀로 소아 병동 5층 격리실로 향했다.***502호 격리실 앞 복도에는 소독약 냄새만 맴돌았다. 서연이 환아 추가 혈액 검사 서류를 제출하러 간호사실로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도현은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병실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침대 위에 웅크려 앉은 네 살배기 우진은 링거를 꽂은 손으로 태블릿 화면을 넘기고 있었다. 화면에는 서연이 아이에게 보여주려고 만든 색색의 분자 퍼즐과 약물 결합 모형이 떠 있었다. 도현은 문을 두드렸다."들어가도 되나?"침대 위의 우진이 태블릿에서 눈을 떼고 문 쪽을 봤다."엄마 금방 오는데.""잠깐만 묻고 나가겠다."우진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은 입구에서 손을 소독하고 방문기록지에 이름과 시각을 적었다. 관계 칸에는 ‘재단 지원 심사 담당’이라고 썼다."왜 왔어?""네 상태가 어떤지 궁금해서.""그러면 엄마한테 먼저 물어봐야지."도현은 대꾸하지 못했다."맞아. 그게 먼저였어."우진은 그제야 태블릿을 조금 돌려 보여줬다. 화면의 퍼즐은 서연이 야근할 때 종이에 그려주던 모양을 앱으로 옮긴 것이었다."엄마가 빨간 조각은 여기랑 안 맞는대. 나는 다른 길 찾는 중이야."도현이 손을 뻗으려 하자 우진이 태블릿을 품 쪽으로 당겼다."말로만 물어봐. 내 거 만지지 말고.""알겠다."도현은 비어 있는 식판을 봤다. 복숭아 그림이 붙은 젤리만 그대로 남아 있었다."저건 왜 안 먹었지?""복숭아는 냄새만 나도 싫어. 간호사 선생님이 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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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면담실의 문

문간에 선 서연의 얼굴이 하얗게 굳었다. 약봉지와 검사 서류를 떨어뜨린 서연은 곧장 달려와 우진의 앞을 가로막았다."내 아이한테서 떨어져!"서연이 도현의 가슴을 세게 밀쳤다. 도현은 두 걸음 물러났다. 서연은 떨고 있었지만 우진 앞을 비키지 않았다."서연아……."도현이 힘겹게 서연의 이름을 불렀다. 5년 만에 그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을 듣자 서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그 더러운 입으로 내 이름 부르지 마. 5년 전에 당신이 내 얼굴에 침을 뱉으며 했던 말이야."서연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병실 문을 매섭게 가리켰다."당장 나가. 내 아이가 숨 쉬는 이 좁은 공간에 당신 같은 파렴치한의 그림자조차 닿는 거 역겨우니까."도현은 침대 뒤에서 자신을 무표정하게 응시하는 우진과,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아이를 감싸는 서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정말…… 내 핏줄인 건가.'도현은 우진과 서연을 번갈아 봤다. 묻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지금 여기서 꺼낼 수는 없었다."아까 질문은 내가 잘못했다. 네 허락 없이 우진이에게 아버지 이야기를 묻지 말았어야 했어.""알았으면 나가요.""……내일 오전 10시, 본관 7층 긴급 지원 심사에서 보자."도현이 고개를 숙인 채 병실을 빠져나가자, 서연은 곧바로 우진의 산소 줄과 링거부터 확인했다."아저씨가 뭐 물었어?""아빠 어디 있냐고."서연의 손이 잠깐 멈췄다."우진아, 대답하기 싫은 말은 안 해도 돼. 그건 우진이 잘못이 아니야.""응. 난 엄마만 있으면 돼."그 말을 듣고서야 서연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자 우진이 손을 뻗었다.문밖으로 나간 도현은 간호사실에 멈춰 502호 출입은 반드시 보호자 확인을 거치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병실 안으로는 돌아보지 않았다. 우진이 작은 손으로 서연의 젖은 뺨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엄마, 울지 마. 내가 저 나쁜 아저씨 뼈 때려줬어."서연은 아이를 꼭 끌어안고 한동안 숨을 고르지 못했다.'우진아, 엄마가 반드시 널 살려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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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딴 놈의 씨

면담실 안이 조용해졌다. 재단 이사들과 의료원장은 서로 눈치를 봤다. 도현의 턱이 굳었다. 그는 두려움을 인정하는 대신 5년 전처럼 냉소부터 꺼냈다. 손끝으로 서류철을 툭 밀었다."돈이 떨어져서 딴 놈 씨를 내 재단에 팔러 왔나, 한서연?"서연의 얼굴에서 남아 있던 기대가 사라졌다."선진의료원장 직인이 찍힌 내 선천성 무정자증 진단서는 위조될 수 없는 공식 기록이야. 5년 전처럼 또 이따위 얄팍한 사기극으로 내 발목을 잡고 선진가 핏줄 행세를 하겠다는 건가?"아이의 얼굴이 자신과 닮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5년 전의 선택도 함께 무너질 것 같았다. 도현은 그래서 더 잔인한 말을 골랐다.서연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상처받은 기색을 보이는 대신 도현을 똑바로 바라봤다."사기극?"서연이 짧게 웃고 테이블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내 아버지가 중환자실에서 숨을 거두던 그날 밤, 당신 어머니 강 여사가 산소호흡기 치료비 지원을 일방적으로 끊어버린 것도 내 사기극이었나?"도현의 손에서 만년필이 미끄러졌다."……뭐라고? 산소호흡기 지원을 끊었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모르는 척 발뺌하지 마. 너나 네 어머니나 내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파렴치한 살인자들일 뿐이야."서연의 또렷하고 단단한 목소리가 면담실에 울렸다."내 아이는 네 더러운 선진가 돈을 구걸하러 온 게 아니야. 난 재단 규정에 명시된 공여자 검색과 긴급 치료 지원을 요구했을 뿐이야."서연은 도현의 코앞으로 서류철을 거칠게 밀어붙였다."당장 서명해. 의료진이 잡은 72시간 가운데 이미 절반이 지나가고 있으니까."의료원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총수님, 친자 여부와 긴급 치료 지원은 별개입니다. 지원 규정상 지금 결재해도 사후 심사에 문제가 없습니다."서연이 곧바로 말을 받았다."당신한테 아빠가 되어 달라는 게 아니야. 재단 총수로서 규정대로 처리하라는 거야."도현은 의료원장을 돌아봤다."지원 승인이 나면 해외 공여망은 바로 열립니까?""예. 현재 병원 재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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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뺨과 찢겨진 서류

서연에게 그 망설임은 5년 전과 다르지 않았다. 아이의 치료와 친자 여부는 별개라는 설명까지 들었는데도 도현은 펜을 움직이지 않았다. 남아 있던 기대가 끊겼다.5년 전과 똑같았다. 설명을 듣고도 믿지 않았고, 가장 급한 순간에 손을 멈췄다. 서연은 성큼 다가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긴급 수혈 승인 서류철을 제 손으로 거칠게 낚아챘다."서연아, 잠깐 기다려 봐. 확인해야 할 게 있어……."도현이 당황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서연의 손목을 붙잡으려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짝 하고 뺨을 치는 소리가 면담실에 울렸다.서연의 손바닥이 도현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도현의 고개가 돌아갔고, 이사진과 비서실장은 굳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서연의 손끝은 떨렸지만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다.서연은 서류철에서 ‘장기 결연 및 입양 검토 동의서’를 뽑아 두 번 찢었다. 치료 지원 신청서는 테이블 위에 그대로 남겼다."내 아이를 당신 후계자 후보로 올리지 마."서연은 찢은 종이를 도현 앞에 내려놓았다."치료 지원은 규정대로 처리해. 그마저도 못 하겠으면 내가 다른 길을 찾을 테니까."서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음문을 열어 면담실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힌 뒤에도 누구 하나 먼저 말을 꺼내지 못했다. 도현은 얼얼하게 타오르는 뺨을 손으로 감싸 쥔 채, 바닥에 하얗게 흩어진 서류 조각들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환아: 한우진 / 질환: Rh 음성 AB형 긴급 수혈 필요]'살인자…… 산소호흡기를 끊었다고……?'서연이 남긴 말은 하나씩 사실 확인이 필요한 질문으로 바뀌었다. 왜 아버지 치료 중단을 자신은 몰랐는지, 왜 서연의 연락이 끊겼는지, 누가 진단서 원본을 보관했는지. 도현은 처음으로 자신의 기억보다 기록을 먼저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도현은 찢긴 결연 동의서와 그대로 남은 치료 지원서를 내려다봤다. 우진의 이름 옆에는 혈소판 수치와 남은 시간이 적혀 있었다. 그는 비서실장을 불렀다."정 실장. 5년 전 비뇨기과 원본 기록과 수정 로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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