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다음날 이태와 함께 회사에 무거운 발걸음으로 출근한 시아가 종이컵에 물을 조금 따라 들고 다녔다. 주여는 유독 그날따라 자리를 많이 비웠다. 시아가 초조해져서 입술을 앙 다물었다. 속절없이 시간이 흐르고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주여를 마주할 수 있던 시아는 다시금 물컵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지금이라도 해야 해.’주여가 등을 돌린 사이 주여의 등에다 뿌려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헌데 그날따라 이태가 시아의 앞을 막아섰다. 주여를 가리는 커다란 몸뚱이 덕에 시아가 물을 뿌리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러댔다. 이태가 아침부터 이상한 시아의 태도에 손을 올려 시아의 이마를 짚었다.“대리님, 어디 아픕니까?”시아가 신경질적으로 손을 뿌리쳤다.‘아차!’“아무것도 아니에요. 호호.”시아는 속으로 예민했던 자신을 한 번 탓하고는 이태를 피해 재빨리 자리로 돌아갔다. 책상 위에는 아침에 받아놓은 물이 종이컵에 담겨 있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초조해 보이는 시아를 도윤이 이상하게 여겼다.“신 대리님, 진짜 괜찮으세요?”시아가 거짓 웃음을 지으며 괜찮다고 했지만, 마음속에서는 이미 어떻게든 물을 부어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져 오고 결국 그녀는 컵을 든 채 주여에게 향했다.‘누가 부딪혀 줬으면!’시아가 눈을 감고 하늘을 향해 기도했다. 제발, 신이 계시다면 이 부탁을 들어주세요.그러나 하늘은 무심하게도 아무도 보내주지 않았다. 시아는 짐을 챙기는 주여를 보고는 마음이 다급해져 어깨를 손으로 잡고 종이컵의 물을 다급히 그녀의 가슴 쪽으로 뿌려버렸다.“김 과장님!”“신 대리님!”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물을 맞은 주여가 그대로 얼어버렸다.[퀘스트 성공 : 악녀력 +1]이태가 부장실 밖으로 나와서 상황을 살폈다. 전 직원이 보는 앞에서 시아가 누가 봐도 일부러 물을 뿌렸다. 이태는 눈을 찌푸리고 일단 주여의 상체에 양복 재킷을 둘러주었다. 시아가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죄송하다는 말만 되풀이하며 중얼거렸다. 이태는 이 상황이 시아
“지훈의 소방서 앞까지 온 시아는 구석에서 걸음을 우뚝 멈춰 세웠다. 주여가 지훈을 불러서 무언가를 주고 있었다.‘딩.’[퀘스트 성공 : 재회]분명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지훈이 인기척을 느끼고 시아 쪽을 바라봤다.“시아 씨?”시아가 재빨리 몸을 전봇대 뒤로 숨겼지만 늦었음을 깨닫고 헤헤 웃으며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신 대리님?”주여가 놀라서 시아를 불렀다. 그리고,“부장님?”뒤이어 나오는 이태를 보고 두 번 놀랐다.“두 분이 여기 어떻게?”주여가 놀라서 묻고 시아는 변명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태의 얼굴은 썩어 있었다.‘재회가 전남친이랑 재회였어?’시아가 웃으면서 허공에 살기를 뿌렸다. 악녀 이것들 미친 거 아냐? 시아가 속으로 심한 욕을 해대고 있을 때, 이태가 나서서 말했다.“가던 길에 주여 씨가 보여서 인사하려고 잠깐 와봤습니다.”손을 내밀어 지훈과 악수를 나누고는 시아의 옆으로 와서 양복 재킷을 벗어 덮어주었다. 주여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아, 그러면 신 대리님이랑 같이 어디 가시던 거예요?”지훈의 귀가 쫑긋 열렸다. 시아가 손을 휘저으며 우연히 만났음을 강조했다. 주여가 작게 웃으며 알았다고 했다.“시아 씨, 그러면 저 이제 퇴근인데 저녁 같이 드실래요?”지훈이 시아에게 식사 제안을 했다. 시아가 거절하려고 하는 순간 이태가 한발 먼저 나서서 말했다.“저랑 먹기로 해서 안 됩니다.”지훈이 그제야 이태를 마주보며 눈에 불을 붙였다.“저는 시아 씨한테 여쭤본 건데요?”중간에서 시아가 곤란해졌다. 주여도 앞에 있어서 이태와 단둘이 식사하기도 이상했다. 그래서 시아는 또 한 번 고장이 났다.“아, 저번에 갔던 곱창집 갈까요?”지훈과 사귀고 있을 때 다 같이 모였던 밥집을 이야기했다. 다들 경악해서 시아를 쳐다보았다. 시아가 하늘을 보고 웃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쟤 미친 거 아냐][에러 난 듯][새로고침해!]다행히 주여의 수습으로 곱창집으로 가게 되지는 않았다. 평범하게 닭갈비집을 간 그들
악녀들이 비밀 단톡방에 모였다.[52번도 사라졌다고?][해시태그 건 애잖아!][우리는 왜 여기서 못 벗어나는 거지?][퀘스트를 잘못 냈나?][지금 쟤는 누가 봐도 완벽한 여자 주인공인데!][여자 주인공의 ‘자리’를 뺏어야 되는 거 아니야?][남주를 나중에 뺏었어야 했다고?][몰라. 그럴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지.][으… 아니라면 신시아가 우릴 죽일 거야.]그녀들이 두서없이 떠들어댔다. 시아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잠을 자고 있었다. 악녀들이 밤이 새도록 토론을 하는 사이 날이 밝아왔다.시아가 오랜만에 팔을 하늘로 뻗어 기지개를 켜며 개운하게 깨어났다. 분명 똑같은 방에 똑같은 하루인데 이상하게 따뜻한 기운이 몽실몽실 떠다니고 있었다.시아가 깨끗하게 세안을 마치고 치명 시리즈를 꺼냈다.‘저번에 샀던 걸 이렇게 쓰다니.’나시 하나를 걸치고 그 위로 구멍이 뻥뻥 난 레이스로 된 옷을 걸쳤다. 짧은 면 반바지를 입고 빨간 립스틱을 발랐다. 입술을 뻐금거리며 거울 앞에서 얼굴을 꼼꼼히 체크했다.시아가 당당하게 이태가 사준 명품백을 들고 출근길에 나섰다. 집 앞에 이태가 마중 나와 있었다. 이태의 눈이 찌푸려졌다.“왜! 왜요!”이태가 미간을 손으로 짚었다. 고개를 흔들며 목소리를 깔았다.“그러고 갈 겁니까?”“네!”이태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진심으로 저 여자가 황당해하고 있었다. 여기서 제일 황당한 건 이태인데! 이태는 시아가 자신의 인내를 시험하는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시아 씨, 출근복으로 너무 살이 많이 보입니다.”“괜찮아요!”이태는 해맑은 시아의 얼굴에 할 말을 잃었다. 하고 싶은 많은 말들을 목 밑으로 꾹 눌러 담고 이태가 조수석을 열었다.“….타십시오.”시아가 쫑쫑 걸어서 조수석에 쏙 들어갔다. 이태가 머리가 아파와 한숨을 내쉬며 운전석으로 들어갔다. 시아는 안전벨트를 매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이태를 쳐다보고 있었다.이태가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어쩔 수 없이 회사로 출발했다
시아가 고개를 숙인 채 부장실에서 나와 자리로 돌아갔다. 퇴근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태와 같이 퇴근할 생각에 손가락이 멋대로 꼼지락거렸다. 옆자리에 도윤이 손가락으로 시아의 어깨를 톡톡 쳤다. 시아가 도윤을 바라보자 도윤이 티슈를 입가로 가져가 주변을 정리했다.“이런 건 좀 잔인한데.”도윤이 슬프게 웃으며 말했다. 그의 손이 조금 떨려왔다. 시아가 얼른 휴지를 낚아채 고개를 숙였다.“미…미안!”도윤은 큰 손으로 시아의 머리를 흩트리고는 업무를 이어갔다.거울을 보며 꼼꼼히 얼굴을 정돈한 시아가 목을 가다듬고 다시 일을 하기 시작했다. 퇴근 시간이 되자 사람들이 하나둘 짐을 챙겨 자리를 떠났다. 이태가 오늘은 좀 바쁜 듯하여 시아가 부장실의 문을 두들겼다.‘똑똑.’“부장님, 저 먼저 가볼게요.”서류 사이에 파묻힌 이태가 알겠다며 시아를 엘리베이터까지 데려다줬다. 문이 닫히기 직전 주변을 둘러본 이태가 재빨리 시아의 이마에 입맞춤을 하고 손인사를 했다. 놀란 시아가 양손으로 이마를 만지며 입을 크게 벌렸다.‘저 인간이! 누가 보면 어떻게 하려고!’이태가 놀란 시아의 얼굴을 떠올리며 다시 부장실로 향했다. 입에서 걷잡을 수 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누가 볼까 급하게 고개를 숙여 주먹으로 가려보지만 뒷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저 인간 연애하네.’시아는 오랜만에 지하철에 올라타서 이리저리 부딪혔다. 그동안 차만 타고 다녀서 그런지, 낯선 사람과 몸이 닿는 감각이 영 불편했다.[배가 불렀네][차 한 대 사지 그래?]시아가 질투하는 채팅창을 손으로 휘저어 없애버렸다. 무심코 손이 입술로 갔다. 부장실에서의 달콤했던 키스가 떠올라 혼자 얼굴이 달아올랐다. 집으로 걸어가는 내내 시아의 손이 입술을 만지작거렸다.‘부장님은 남자주인공인데.’‘퀘스트를 다 해내면 내가 만나도 되는 건가?’핸드백을 올려놓고 몸을 침대 위로 날렸다. 시아가 핸드폰을 들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연락 온 것이 없었다. 시아가 천천히 몸을 씻고 나와 핸드폰을 확인했다.
“신 대리님은 남고 도윤 씨는 나가보세요.”이태가 권력으로 찍어 눌렀다. 도윤이 유치한 행태에 기가 차서 혀를 차고는 부장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태가 시아에게 천천히 다가와 손으로 어깨를 털어주기 시작했다.“부장님, 뭐 하시는 거예요!”“더러운 게 묻었습니다.”시아가 이태의 손을 낚아챘다.“진짜 조심해주세요. 회사 조용히 다니고 싶다고요!”이태가 잡힌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뜸을 들인 뒤 대답했다.“알겠습니다.”시아는 두 번 세 번 약속을 받아낸 뒤 부장실 밖으로 나섰다. 이상하게 모두가 시아를 쳐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지만 기분 탓이려니 하고 자리에 앉았다.“그래서 오늘 점심은 어디에 앉을 건데요?”도윤이 소근소근 시아에게 물었다.“닥.쳐.”시아도 웃으며 소근소근 욕했다.갑자기 자리를 바꾸겠냐. 점심시간이 되자 당연하다는 듯 도윤의 옆자리로 가서 앉았다. 이번엔 이태의 눈이 세모가 되었다. 도윤이 그를 비웃으며 시아의 입에 간식으로 나온 바나나를 먹여주었다. 젓가락을 쥔 이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신 대리님은 아무거나 잘 받아서 드시네요.”시아가 흠칫 놀라 황급히 주여를 살폈다. 다행히 주여는 이 대화에 크게 개의치 않아 보였다.“아, 이제 안 먹을게요. 호호호.”눈치껏 시아가 이태를 달랬다. 그의 예의 있는 말투에 희한하게 질식사할 것 같았다. 시아가 대충 밥을 먹다 말고 식판을 정리하러 일어섰다. 이태가 뒤따라 나갔다.도윤도 따라 나가려는데 주여가 도윤의 손을 잡고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도윤이 허탈한 듯 주저앉으며 웃었다.“과장님도 눈치챘어요?”주여가 바나나를 입에 물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탕비실로 들어간 시아를 이태가 쫓았다.“부장님! 지금 엄청 티 난다고요!”몸을 휙 돌린 시아가 이태에게 따지고 들었다. 이태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시아에게 다가갔다.“무슨 티를 냈다는 건지 모르겠는데요?”시아가 당황해서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이태는 놓치지 않고 더욱더 시아에게 밀착해서 다가갔다.“그러니
이태의 집으로 가는 차 안은 적막했다. 이태가 무언가를 생각하며 허공을 응시하듯 운전했다. 시아는 딱히 할 말도 없어 애꿎은 핸드백만 꽉 껴안았다. 무거운 침묵이 끝나고 이태가 주차했다. 안전벨트를 풀고 달려 나가 조수석 문을 열었다. 시아가 이태의 손을 잡고 차 밖으로 나왔다. 이태가 조심스럽게 시아의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이태가 현관으로 가서 도어락을 열며 시아에게 보란 듯이 비밀번호를 공개했다. 최소한의 가구만 있는 이태의 삶에 시아가 한 걸음 내디뎠다.“침대 있는 방에서 주무십시오. 저는 소파에서 자겠습니다.”시아가 손사래를 쳤다.“아뇨, 아뇨. 제가 소파에서 자겠습니다.”이태가 시아의 양팔을 잡고 진지하게 대꾸했다.“시아 씨, 침대에서 주무십시오.”그의 무언의 눈빛에 시아가 작게 네, 하고 대답하고는 침대방으로 들어갔다. 이태는 피곤한지 한숨을 내쉬고는 손으로 미간을 잡았다. 시아는 침대에 털썩 드러누우며 상황을 정리했다.‘그러니까, 지금 부장님이 남자친구고 나는 부장님 집에서 자고 같이 출근하는 거야?’손으로 이불을 한 움큼 움켜쥐었다. 가슴 언저리가 간질간질해서 몸을 침대 위에서 뒹구르르 굴러댔다.‘똑똑.’밖에서 이태가 방문을 두드렸다.“네!”화들짝 놀란 시아가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시아 씨,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시아가 침을 꿀꺽 삼켰다.이태는 시아를 데리고 식탁으로 가 앉혔다. 물을 한 잔 따라주고 맞은편에 앉아 그녀의 양손을 움켜쥐었다.“시아 씨, 앞으로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 미리 말해줄 수 있습니까?”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문제가 있습니까?”스무고개를 하기 시작했다.“네.”“무언가를 하고 계시기는 하는군요. 그렇다면 혹시 시아 씨에게 위험한 일입니까?”시아는 곰곰이 생각했다. 위험한 일이기도 하지만,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시아의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이태가 다른 질문을 던졌다.“시아 씨에게 위험하지 않다면 ‘원한다’고 말해주실 수 있겠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