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질문은 순애에게 한 것이 아니었다. 입 밖으로 나와 버린 자신의 기대를 하윤은 부끄러워했다. 순애는 못 들은 척 창틀의 먼지를 닦았다.“하윤 씨, 추우실 텐데 이불은 두꺼운 걸로 가져다드릴게요.”“아주머니.”“네.”“전 이 집에서 그 사람 기다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안 한 사람이 아니에요.”순애가 천천히 돌아보았다. 하윤은 손을 내려다봤다. 손톱 옆에는 물감이 남아 있었다. 그림을 그리던 시간도, 시혁을 사랑하던 시간도 전부 자신의 것이었다.“그런데 오늘은…… 제가 누군지 저도 모르겠어요.”순애는 말없이 하윤 옆에 섰다. 두 사람 사이로 난방기에서 낮은 소음이 흘렀다. 하윤은 그 침묵이 고마웠다. 위로를 듣는 순간 무너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복도 끝에서 집사가 낮게 말했다. “대표님 차량이 들어왔습니다.”하윤은 고개를 돌렸다. 기다리던 남편이 돌아왔다. 그런데 안도감보다 두려움이 먼저 올라왔다. 그가 오늘 자신을 어떻게 부를지, 이제는 확신할 수 없었다.***시혁이 현관에 들어섰을 때 유리는 먼저 달려 내려갔다. 그녀는 그의 코트를 받아 들며 다정하게 웃었다. 하윤은 이층 난간에서 그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예전에는 자신이 하던 일이었다. 퇴근한 시혁이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면 하윤은 두 손을 뻗어 매듭을 풀어 주었고, 그가 피곤한 얼굴로 이마를 기대 오면 잠시 그대로 안아 주었다.오늘 시혁은 유리가 손을 뻗자 아무렇지 않게 코트를 맡겼다.“시혁 씨, 제가 괜히 방을 바꾸자고 해서 집안이 시끄러워졌어요.”“무슨 일 있었어?”“하윤 씨가 많이 속상하신가 봐요. 저는 다른 방 써도 되는데…….”하윤은 계단을 내려갔다. 시혁이 자신을 보자 눈썹을 찌푸렸다.“왜 아직 짐이 남아 있어?”그 첫마디에 하윤의 걸음이 멎었다.“당신도 알고 있었어요?”“뭘.”“내가 안방에서 나가야 한다는 거.”시혁은 유리의 어깨를 감싸며 대답했다. “유리가 지내기 편한 방이 필요해. 네가 잠깐 옮기면 되는 일이잖아.”“잠깐?”“말꼬리 잡지 마.”“
하윤은 접시를 부드러운 천으로 감싼 뒤 스케치북 사이에 넣었다. 유리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곧 다시 새 가구 사진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윤의 세계를 이루던 물건 하나가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하윤에게는 그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두 시가 조금 지나자 운반 작업이 시작됐다. 하윤이 거절했던 서랍까지 직원들이 열려고 했고, 정숙은 집사에게 ‘사람이 못 들어가면 물건부터 빼라’고 지시했다. 복도에는 옷걸이가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포장 테이프가 찢어지는 소리가 뒤섞였다.하윤은 문 앞에 서서 한 상자씩 확인했다. 스케치북과 물감, 사진은 직접 챙겼고, 직원들에게는 자신의 허락 없이 서랍을 열지 말라고 거듭 말했다. 그 와중에 한 남자가 침대 머리맡에서 작은 상자를 집어 들었다.“이것도 폐기입니까?”그 안에는 두 사람이 함께 골랐던 찻잔이 들어 있었다. 한쪽에는 하윤이 그린 작은 나무가, 다른 쪽에는 시혁이 장난처럼 적은 글씨가 있었다. ‘늦게 와도 같이 마시기.’하윤은 상자를 받아 들었다. 결혼 첫해 시혁과 함께 쓰던 찻잔이었다. 늦은 밤에도 두 사람은 이 잔을 마주 놓고 앉았고, 그는 하윤이 차를 식힐 때까지 기다려 주곤 했다. 지금은 같은 방에서 그 잔을 챙길 시간조차 재촉받고 있었다.지금 그녀의 손에 남은 것은 그 밤의 찻잔뿐이었다. 유리는 상자 안을 들여다보고 코웃음 쳤다.“이런 것도 가져가세요? 오래돼서 금 간 것 같은데.”“제가 쓰던 거예요.”“시혁 씨가 다시 쓸 일은 없을 것 같은데.”하윤은 찻잔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그래서 제가 가져가요.”그때 옷장에서 옷걸이 하나가 떨어졌다. 직원이 급히 주우려다 하윤의 흰 블라우스를 밟았다. 유리는 그것을 보더니 직원에게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어차피 저런 건 버릴 거잖아요.”하윤은 블라우스를 집어 들었다. 시혁이 처음으로 그녀를 자기 회사 행사에 데려갔던 날 입은 옷이었다. 사람들 앞에서는 비서라고 소개받았지만, 돌아오는 차 안에서 시혁은 그녀의 손을 잡고 미안하다고
“시혁 씨는 제가 고르는 거면 다 좋대요.”“그 애가 너한테는 어릴 때부터 그랬지.”하윤은 난간을 붙잡았다. 정숙이 자신의 취향을 물은 적은 거의 없었다. 새 커튼을 달고 싶다고 했을 때도 ‘네 마음대로 하지 말라’고 했던 사람이, 유리 앞에서는 집 전체를 바꿔도 좋다고 웃고 있었다.유리가 하윤을 발견했다. “하윤 씨, 잘됐네요. 시혁 씨가 퇴근하면 저녁 같이 먹기로 했어요. 혹시 오늘은 식탁 준비 안 하셔도 돼요. 저희끼리 나갈 거라서.”하윤은 입술을 떼지 못했다. 유리는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피더니 더 상냥하게 말했다.“그동안 시혁 씨 챙기느라 고생 많으셨죠? 이제는 제가 할게요.”“그 사람은 누가 챙겨야 하는 어린애가 아니에요.”“네?”“그리고 제가 그 사람 곁에 있었던 이유는…… 일해서 돈 받으려고 그런 게 아니었어요.”정숙이 찻잔을 세게 내려놓았다. “이제 그만해. 손님 앞에서 질척거리지 말고.”하윤은 숨을 들이마셨다. 손님이라는 말이 유리가 아니라 자신을 가리키는 것 같았다.“제가 질척거리는 건가요? 남편이랑 살던 방에서 쫓겨나는데도 아무 말 하지 말아야 해요?”정숙이 벌떡 일어났다. “네가 여기서 큰소리칠 자격이 있어?”유리가 곧장 정숙의 팔을 붙잡았다. “어머님, 괜찮아요. 하윤 씨가 아직 정리가 안 되셨나 봐요.”하윤은 유리를 바라보았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과 달리 입가에는 아주 작은 미소가 남아 있었다. 하윤이 무슨 말을 해도 정숙이 대신 화를 내 줄 것이라는 확신이 보였다.“유리 씨.”“네?”“울고 싶으면 울어요. 그런데 제 앞에서 모르는 척은 하지 마세요. 지금 누가 누구 방을 빼앗는지 당신도 알잖아요.”유리의 표정이 굳었다. 정숙은 손바닥으로 탁자를 쳤다.“당장 위로 올라가! 더는 네 목소리 듣고 싶지 않으니까.”하윤은 돌아섰다. 뒤에서 유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제가 괜히 왔나 봐요”라고 말했고, 정숙은 그런 소리 하지 말라며 달랬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하윤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줄도 몰랐
“이건 누가 작성했어요?”집사는 난처한 표정으로 정숙을 바라보았다. “사모님 지시로…….”“어떤 사모님이요?”말이 튀어나온 뒤 하윤 자신도 놀랐다. 집사는 대답하지 못했다. 하윤은 종이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이름을 부르지 않고도 누군가의 자리를 빼앗을 수 있는 집이었다.방 안에서는 업체 직원이 서랍을 열고 있었다. 하윤이 다가가자 남자는 놀라 손을 뗐다. 서랍 안에는 시혁이 생일에 선물했던 얇은 잠옷과 하윤이 직접 수놓은 손수건이 들어 있었다.“제 속옷 서랍을 왜 남이 열어요?”“죄송합니다. 전부 포장하라고 해서…….”“닫으세요. 지금 당장.”남자는 얼굴이 붉어진 채 물러섰다. 그런데 뒤쪽에서 유리가 말했다.“아, 그건 따로 버려 주세요. 새 방에는 새 물건만 두고 싶어서요.”하윤이 돌아섰다. “제 물건을 왜 유리 씨가 버려요?”“하윤 씨 물건이니까 챙기시라고 했잖아요. 남겨 두면 버릴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어요.”“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 사람이 입던 옷을 직원들 앞에 펼쳐 놓고…….”“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요?”유리는 눈시울을 붉혔다. 그 모습을 본 정숙이 곧장 들어왔다.“또 무슨 짓을 한 거니, 하윤아?”“제 속옷 서랍까지 남이 열게 하셨어요.”“집 정리하는데 서랍을 안 열고 어떻게 치워?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유리한테 화풀이하지 마.”하윤은 목이 메었다. 정숙에게는 하윤의 수치심이 사소했고, 유리의 눈물 한 방울이 더 큰 사건이었다.“어머님, 제 물건은 제가 정리할게요. 사람들 내보내 주세요.”“오늘 안에 끝내. 안 그러면 그대로 버릴 테니까.”그때 박순애가 문 앞으로 왔다. 그녀는 한 손에 면장갑을 들고 있었다. 하윤은 순애의 시선이 열린 서랍을 향했다가 급히 내려가는 것을 보았다. 오래 이 집에서 일한 사람조차 하윤이 당하는 모욕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아가씨, 제가 작은 물건부터 도와드릴까요?”정숙이 돌아보았다. “아가씨? 여기서 누가 아가씨야?”순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하윤이 한 발 앞
정숙은 대답 대신 집사에게 명령했다. “상자 가져와. 방 주인이 직접 치우기 싫다니 우리가 해야지.”방 주인이라는 말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아무도 되묻지 않았다.***한 시간 뒤, 안방 바닥에는 하윤의 물건을 담을 빈 상자가 줄지어 놓였다. 백유리는 침대 끝에 걸터앉아 새 침구 견본을 펼쳐 놓고 있었다. 하윤이 밤마다 잠들던 자리였다.“이 침대는 버려요.”그 말에 하윤의 발걸음이 멎었다. 유리는 매트리스를 손끝으로 눌러 보더니 업체 직원에게 말했다.“누가 쓰던 건지 모르겠지만 찝찝하잖아요. 시혁 씨도 새 걸 좋아해요.”“그 침대는 제가 고른 거예요.”하윤이 다가가자 유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럼 더 바꿔야겠네요. 저희가 쓸 방이니까.”“저희요?”“시혁 씨하고 저요. 곧 결혼할 사이잖아요.”유리는 마지막 말을 일부러 또박또박 발음했다. 하윤의 시선이 침대 머리맡으로 옮겨갔다. 작은 액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비밀 혼례를 마친 날, 시혁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찍었던 사진이었다. 정숙이 친척들을 초대하는 날이면 숨겨야 했던 사진이지만, 둘만 있을 때만큼은 늘 같은 자리에 있었다.“거기서 일어나요.”“왜요?”“제가 자는 자리예요.”유리는 눈을 깜박이다가 웃었다. “하윤 씨, 이상하게 말씀하시네요. 시혁 씨가 지금도 여기서 하윤 씨랑 같이 자요?”하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시혁이 마지막으로 이 침대에서 자신을 안았던 밤이 떠올랐다. 퇴근이 늦어진 그가 침실 문을 열었을 때, 하윤은 불을 끄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시혁은 그녀의 눈가에 닿은 머리카락을 넘겨 주며 왜 안 자느냐고 물었다.‘당신 기다렸어요.’‘나 때문에 잠도 안 자고?’‘보고 싶어서요.’하윤이 먼저 그의 목을 감아 입술을 맞췄고, 시혁은 짧게 숨을 들이마신 뒤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의 셔츠 단추가 손가락 아래에서 미끄러졌을 때, 하윤은 웃으며 다시 입을 맞췄다. 그날 밤 두 사람은 서로를 원한다고 말했고, 시혁은 하윤이 먼저 손을 뻗을 때마다 기꺼이 손을 잡았다
새벽 네 시가 넘도록 서하윤은 잠들지 못했다. 화장대 위에 놓인 향수병은 뚜껑을 닫아 두었는데도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강시혁이 그녀에게 어울린다며 골라 준 향수, 자신이 그 향기를 좋아한다고 믿게 만들었던 남자. 어제야 하윤은 그 향수가 백유리의 취향과 겹친다는 사실을 알았다.머리카락도, 옷차림도, 그가 좋아한다던 사소한 버릇까지 하나씩 떠올리다 보니 잠옷 소매에 밴 향조차 견디기 어려웠다.침대 오른쪽은 비어 있었다. 시혁이 돌아오지 않은 밤이 드문 일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빈 베개가 낯선 사람의 자리처럼 보였다. 하윤은 이불을 끌어당겼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아직도 그의 체온을 기다리는 몸이 미웠다.아침 일곱 시 반, 잠결에 금속성 소리가 들렸다. 복도에서 바퀴가 굴러가고 남자들이 가구 치수를 확인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윤이 가운을 걸치고 문을 열자 줄자와 태블릿을 든 낯선 직원들이 침실 앞에 서 있었고, 그 가운데 백유리가 새 침대 사진을 넘기고 있었다.“아, 일어나셨어요? 잠깐 비켜 주실래요? 침대 치수를 재야 해서요.”하윤은 문을 가로막았다. “누가 제 방에 들어오라고 했죠?”“제 방이 될 거니까요.”유리는 대답을 마치고 나서야 실수한 사람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아직 말씀 못 들으셨어요? 어머님이 오늘 안으로 옮겨 주신다고 하셨는데.”직원들의 시선이 하윤의 가운과 맨발에 머물렀다. 잠에서 깨어난 여자가 자신의 침실 앞에서 방문객처럼 취급받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뒤쪽의 남자 하나가 어색하게 기침했다.“여긴 제가 삼 년 동안 쓴 침실이에요. 다들 나가 주세요.”“삼 년이나요?”유리는 놀란 얼굴을 꾸미며 침대 안쪽을 바라보았다. “시혁 씨는 혼자 지낸다고 했는데. 아, 그러면 하윤 씨가 방 관리를 하셨나 봐요.”“무슨 뜻이에요?”“그냥요. 제가 모르는 사정이 있는 것 같아서.”말끝이 부드러울수록 하윤의 손끝은 차가워졌다. 그때 계단에서 윤정숙의 구두 소리가 올라왔다. 정숙은 아침 인사도 없이 업체 직원들에게 손짓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