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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첫사랑 대역이었다
남편의 첫사랑 대역이었다
Penulis: 썸머 워터 멜론

1 화

Penulis: 썸머 워터 멜론
결혼 7년 차가 돼서야 정가을은 남편 서동하가 자신을 첫사랑의 대역으로 여기고 있다는 참담한 진실을 마주했다.

또한 그 첫사랑은 다름 아닌 그의 형수 이시연이었다.

더 충격적인 한 가지, 이시연이 서동하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한다.

정작 서동하만 모르는 사실, 그는 불임이었다!

바람난 더러운 남자는 더 이상 남겨둘 필요가 없으니 정가을은 단호하게 이혼을 요구했다.

하지만 서동하의 반응은 가관이었다.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낮고 차가운 목소리로 그녀를 몰아세웠다.

“시연이를 잠깐 안아줬다는 이유로 이혼하자고? 결혼이 그렇게 우습냐? 내가 호구로 보이냐고? 가을아, 아무리 내가 널 사랑한다고 해서 이렇게 어리광부리고 결혼을 장난으로 여기면 안 돼. 이혼 같은 소리, 다시는 입에 올리지 마. 내 허락 없인 절대 안 돼.”

‘뭐? 사랑?’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어느 하나 믿을 바가 없다더니 그녀는 이제야 뼈저리게 실감했다.

며칠 전...

“동하야, 시연이 곧 귀국한대. 너 아직도 이혼 안 하고 뭐 하는 거야? 설마 그 대역 정가을한테 진짜로 마음이라도 생긴 건 아니지?”

서동하의 사무실 문이 덜 닫힌 터라 정가을은 그 틈새로 자신의 이름을 들었다. 순간 문을 밀고 들어서려던 손이 멈칫했다.

‘이혼이라니? 대역은 또 뭐야?’

차마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사무실 안에서 서동하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난 처음부터 줄곧 시연이만 사랑했어.”

“그럼 그렇지.”

지선우, 서동하의 절친한 친구가 덧붙였다. 그의 목소리엔 노골적인 경멸이 담겨 있었다.

“정가을은 그냥 시연이 대역이자 잠자리 상대일 뿐이잖아.”

합법적인 아내였던 자신이 고작 대역에 잠자리 상대라니!

어젯밤, 그녀의 품에서 열렬히 사랑을 속삭이던 남자, 밤새도록 ‘가을아’라고 속삭이며 뜨겁게 포옹하던 남자, 그녀의 귓가에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던 남자가 지금은 반박은커녕 딴 여자를 사랑한다고 입을 나불거리다니.

결국 그는 이시연만 생각했고 이시연의 이름만 불렀으며 사랑하는 사람 또한 이시연뿐이었다.

정가을은 그에게 단지 7년을 함께 잔 ‘이시연 대역’이자 ‘잠자리 상대’에 불과한 것이다.

거대한 허무함이 그녀를 덮쳤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는 심장을 바늘로 찌르는 것 같았고 칼로 도려내는 날카로운 고통으로 변해갔다.

너무 괴로운 나머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사무실 안에서 잠자리 상대라는 타이틀에 잠시 불편함을 느꼈던 서동하였지만 미처 말을 잇기도 전에 지선우의 다음 질문이 쏟아졌다.

“근데 왜 이혼 안 하냐고?”

서동하가 답했다.

“할아버지께 받아야 할 주식이 있거든. 그것까지 내 손에 넣어야지.”

“이미 너한테 준 거로 아는데?”

지선우가 궁금하다는 듯 되물었다.

정가을은 손톱이 부러질 정도로 손가락을 꽉 움켜쥐며 간신히 평정심을 유지했다. 그녀는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그동안 야금야금 준 게 전부야. 나머지는 할아버지가 가을이랑 결혼식 올리면 결혼 선물로 주겠다고 하셨어. 이제 얼마 안 남았어. 딱 3개월이면 끝나.”

서동하의 목소리에는 마침내 이 지긋지긋한 연극이 끝난다는 안도감, 그리고 이시연과 함께할 미래를 향한 기대가 섞여 있었다.

정가을의 눈시울이 서서히 붉게 물들었다.

심장이 날카로운 칼날에 꿰뚫린 듯 뻥 뚫려 차가운 바람만이 끊임없이 밀려들었다. 손발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고 몸은 속수무책으로 떨려왔다.

과거, 불같은 사랑을 퍼붓던 서동하가 자신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해왔던 때가 떠올랐다.

하지만 정가을은 늘 마음 한구석에 걸리는 존재가 있었다. 바로 서동하의 소꿉친구 이시연.

그녀는 집안, 외모, 재능 삼박자를 고루 갖춘, 그야말로 첫사랑 여신이라 불릴 만한 완벽한 여자였다.

정가을은 마음속에 영원한 첫사랑을 품고 사는 남자와는 연애도, 결혼도 할 생각이 없었다.

하여 이 남자가 99번째로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했을 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시연 씨가 동하 씨 첫사랑이자 마음속의 여신 같은 존재가 아니었나요?”

“아니야, 그런 거. 우린 그냥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친구 사이일 뿐이야. 가을이 너야말로 내 첫사랑이라니까.”

정가을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서동하의 눈빛이 얼마나 확고하고 진실했던지. 그녀를 향한 시선은 뜨거운 직진이었으며 진심으로 사랑하는 듯 보였다.

정가을은 마침내 그를 믿어주고 고백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어떻게 이런 일이! 집에서는 그녀에게 모든 것을 맞춰주고 밖에서는 누구보다 젠틀한 남자라고 믿었는데 정작 자신을 7년이나 속였다니.

억누르고 있던 분노가 마침내 봉인 해제된 화산처럼 머리로 치솟았다.

정가을은 머리가 띵하게 울리며 뜨거워졌다. 당장이라도 사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가 서동하의 뺨을 후려치고 싶었다.

그때, 지선우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너희 할아버지가 정가을 별로 안 좋아하셨잖아. 대체 왜 결혼식을 다시 올리는 걸 찬성하신 거야?”

“얼마 전에 시연이가 또 무슨 과학 기술 신예상을 받았거든. 할아버지도 시연이가 결국 국내로 들어올 걸 잘 아시겠지. 그러니 걱정하시는 거야. 내가 아직 시연이한테 마음이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시연이보단 가을이를 받아들이는 게 낫다고 생각하시는 분이야. 게다가 우리한테는 지율이도 있잖아. 그래서 나랑 가을이 결혼식을 다시 올리자고 하신 거고.”

“정가을을 명분상 내 사람으로 확실히 만들어두면 설령 내가 시연이를 사랑해도 결혼식까지 치른 마당에 뭘 어쩌겠어? 선을 넘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시겠지. 앞으로 시연이랑 다시 이어지기가 쉽지 않을 테니까.”

지선우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너 진짜 정가을이랑 결혼식 다시 올릴 거야? 그래서 시연이가 급하게 귀국하는 거였네!”

“아니라니까. 말이 되는 소릴 하라고.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서동하의 목소리에는 노골적인 경멸감이 묻어났다.

“내 신부는 오직 시연이뿐이야! 둘이 그렇게 닮았는데 메이크업 받고 면사포까지 쓰면 누가 누군지 구분이나 하겠냐?”

“대단하다, 서동하. 역시 너답네.”

지선우가 박수를 치며 낄낄 웃었다.

그 시각, 정가을의 심장은 차가운 물 속으로 곤두박질치고 가슴이 조여와 숨이 턱 막혔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서동하가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결혼식의 모든 세부 사항을 체크하려던 이유를 말이다.

웨딩드레스와 결혼반지 디자인까지 직접 참여하며 그녀는 일절 손대지 못하게 했는데 듣기 좋아서 서프라이즈인 거지, 아니 어쩌면 상반되는 의미로 이런 어마어마한 서프라이즈가 또 있을까!

애초에 그녀를 위한 결혼식이 아니었다니.

그동안 설레는 마음으로 결혼식을 기다렸던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하게 느껴졌다. 바보도 이런 바보 멍청이가 따로 없었다.

지선우는 잠시 웃음을 멈추고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근데 시연이는 왜 미리 귀국하는 거야? 지금 돌아오면 너희 집에서 곱게 봐주지 않을 텐데.”

정가을은 그 질문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서동하의 가족들이 이시연을 곱게 봐주지 않는다는 걸까?

아무래도 그녀가 알지 못하는 다른 사연이 있는 듯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서동하의 말은 정가을의 심장에 그대로 박히는 거대한 쐐기였다. 숨을 쉬는 것조차 불가능할 만큼 고통이 온몸을 짓눌렀다.

“아이가 생겼거든. 혼자 외국에 있으니 챙겨줄 사람도 없고 내내 마음이 쓰여서.”

이시연이 임신했다고?

서동하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기쁨과 설렘이 묻어났다. 그 뉘앙스만으로도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불 보듯 뻔했다.

“정가을이 눈치채고 소란을 피우면 어쩌려고 그래? 결혼식도 엎어질 테고 그럼 할아버지한테 주식도 못 받는 거 아니야?”

사무실 안, 서동하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꾸했다.

“정가을은 절대 모를 거야. 결혼한 지 7년인데 그동안 내 사랑을 의심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거든.”

문밖의 정가을은 몸이 휘청였다. 얼굴은 이미 끔찍할 정도로 하얗게 질렸고 수중의 서류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구겨져 있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무엇을 떠올렸는지 그녀의 입가에 소리 없는 웃음이 번졌다.

그 웃음에는 처절한 슬픔과 지독한 조롱이 뒤섞여 있었다.

서동하는 자신이 ‘중증 희소정자증’ 진단을 받았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건 사실상 불임이나 다름없었다!

결혼한 지 1년이 지나도 아이가 생기지 않자 서씨 가문에서는 정가을에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혹여나 가문의 대가 끊길까 봐 걱정하며 검사를 받아보라고 제안했었다.

그녀는 겉으로는 순순히 응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서동하도 함께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도록 했다.

다만 이런 일은 워낙 은밀한 문제였기에 의사인 친구에게 부탁해 검사를 진행했고 결과가 나오자마자 친구는 그녀에게 가장 먼저 연락을 해왔다.

남자의 자존심을 배려해야겠다고 생각한 정가을은 스스로 검사 결과를 가로채 서동하에게는 보여주지 않았다.

당시 친구는 희소정자증이라도 아이가 아예 안 생기는 건 아니라면서 위로했지만 사실 그 확률은 로또 당첨만큼이나 희박했다.

그 후로 정가을은 정성을 다했다. 몸에 좋다는 약선 요리를 공부하고 유명한 의원을 찾아가 지어 온 약을 남편과 함께 먹었다. 운동을 같이하고 규칙적인 생활과 식단을 짰으며 금연과 금주, 밤샘을 멀리하게끔 온갖 노력을 다했다.

하늘이 도운 걸까? 정가을은 기적처럼 아이를 가졌다.

그 후로 몇 년, 회사가 커지면서 서동하는 잦은 출장과 밤샘 작업, 술자리와 간접흡연에 찌들어 살았다. 그 모든 것은 정자를 죽이는 치명적인 요인들이었다.

반면 이시연은 해외에 거주했으니 서동하가 1년 내내 그녀를 만날 수 있는 횟수는 손에 꼽힐 정도였다.

그러니 이시연의 배 속에 든 아이가 정말 서동하의 핏줄인지조차 의문이었다.

소중한 첫사랑 여신한테 보기 좋게 배신을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가을은 마음 한구석에 묘한 쾌감이 번졌다.

‘꼴좋네! 7년 동안 뻔뻔하게 날 속이고 결혼 생활을 기만해온 대가야. 바로 네가 받아야 할 업보라고, 서동하!’

그때, 사무실 안에서 서동하의 당부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입 조심해. 가을이 알면 큰일 나! 진실을 알아서 상처받게 하고 싶지도 않고 시연이를 원망하는 것도 원치 않아.”

“동하 너는 너무 착해서 탈이야. 네가 걔한테 뭘 빚졌는데? 정가을, 걔는 그냥 시골에서 올라온 촌뜨기잖아. 집안 배경도 없고 가진 것 하나 없는 애가 대도시에서 사람 노릇 하며 살려고 기를 쓰는 거 하늘의 별 따기나 마찬가지 아니냐? 널 만난 건 조상들이 덕을 쌓은 덕분이지 걔가 도대체 뭐가 힘들다고 상처를 받아?”

지선우의 말투는 오만함 그 자체였다. 굳이 보지 않아도 꺼드럭거리는 태도와 경멸 어린 표정이 선했다.

“너 아니었으면 정가을이 서창 그룹 같은 대기업에 어떻게 들어가? R&D 본부장은 무슨! 고급 차 몰고 별장에 살면서 명품 두르고 가정부들까지 부리는 삶? 걔 인생에 꿈도 못 꿀 일이야. 그동안 네가 잘해준 걸 생각해.”

“매사에 걔 말만 듣고 무슨 집안 단속하는 마누라처럼 굴면서 담배 끊어라, 술 마시지 마라, 밤마다 통금까지 정해놓고 말이야. 시골 출신이라 그런지 아주 까다롭고 가식적이었어. 몸에 좋다고 그 쓴 약을 같이 먹자면서 강요하는 게 어디 있냐? 어느 회사 대표가 너처럼 살아? 정가을은 눈치라도 있으면 고마운 줄 알고 분수를 지켜야 해.”

‘하... 집안 단속?’

담배도 술도 밤샘도 죄다 정자를 죽이는 독이었다.

서동하는 이미 중증 희소정자증이었으니 만약 그녀가 방치했더라면 그 희박한 정자마저 진작에 무정자증으로 변해 대가 끊겼을 것이다!

다만 오늘부로 정가을은 다시는 그를 위해 잔소리하지 않을 것이다.

마음껏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밤을 지새워서 완전히 불임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것, 그게 바로 이 남자가 받을 응당한 대가였다.

그렇게 되면 그녀의 아들 서지율이 서창 그룹의 유일한 후계자가 될 테니까.

정가을은 심호흡을 거듭하며 목 끝까지 차오르는 역겨움을 삼켰다. 수중의 서류를 꽉 쥔 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히 몸을 돌렸다. 아무도 그녀가 이곳을 다녀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정가을은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이혼을 결심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자신의 최대한 이익을 쟁취해야 했다.

집도, 차도, 돈도 악착같이 챙겨야 한다.

7년이라는 청춘을 바쳤는데 빈손으로 쫓겨날 수는 없을 터였다.

무엇보다 아들 서지율의 양육권은 반드시 확보해야 했다.

서동하의 친형은 식물인간 상태였고 아이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서동하 본인마저 중증 희소정자증이니 서씨 가문에서 대를 잇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따라서 양육권을 얻기 위해서는 서씨 가문에 서동하의 중증 희소정자증 사실을 계속 숨겨야만 했다.

이혼 후 양육권을 손에 넣으면 정가을은 아들의 성을 바꿔버릴 생각이었다.

그리고 오래전 보관해둔 서동하의 불임 검사 결과서를 이혼 선물로 그에게 보내줄 요량이었다.

이 남자가 기뻐하든 말든 정가을 자신은 분명 통쾌함을 느낄 터였다.

하지만 화려한 상류 사회의 이혼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재산 분할, 회사 지분, 그리고 아이의 양육권까지 모든 것을 고려한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정가을은 곧바로 송재혁에게 연락했다.

그녀의 친구 외삼촌인 송재혁은 현재 탑티어 로펌에서 가장 젊은 파트너 변호사로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다.

송재혁은 흔쾌히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었고 며칠만 더 참으라며, 절대 서동하의 의심을 사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서동하의 재산을 파악할 사람을 붙이고 M국 쪽에도 의뢰해 서동하의 외도 증거를 확보하겠다고 약속했다.

순간, 정가을은 후회가 밀려왔다. 왜 방금 휴대폰을 챙겨오지 않았을까? 녹음이라도 해두었다면 증거 자료로 쓸 수 있었을 텐데.

전화를 끊자마자 송재혁에게서 이름과 전화번호 하나가 도착했다.

그녀가 직접 요청했던 사립 탐정이었다.

이혼은 하더라도 모든 진실을 밝혀야 했다. 더 이상 바보처럼 속고만 살 수는 없었다.

정가을은 곧바로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오해준 씨, 안녕하세요. 송 변호사님 소개로 연락드렸습니다. 네, 최대한 빨리 부탁드려요. 비용은 얼마든지 상관없습니다.”

그때 비서가 노크하고 들어왔다. 출장 항공권이 모두 예약되었다는 보고에 정가을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혼을 앞두고도 저딴 놈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울화가 치밀었다.

‘젠장! 서창 그룹이든 R&D 본부장이든 이제 지긋지긋해. 다 때려치울 거야.’

그녀는 사직서를 내기로 결심했다.

정가을은 초인적인 실행력을 발휘했다. 사직서를 출력해 서류 속에 끼워 넣고는 다시 서동하의 사무실로 향했다.

그녀는 고위 임원이었기에 사직 처리를 위해서는 서동하의 서명이 필수였다. 무단으로 퇴사할 경우 업계 블랙리스트에 올라 재취업도 어려워질 터였다.

마침 지선우가 사무실을 나서려다 정가을과 마주쳤다.

그의 눈가에 장난기가 가득했고 하얀 치아가 드러나도록 웃으며 그녀를 불렀다.

“가을 씨, 저녁에 애들이랑 술자리 좀 잡았는데 동하한테 두 시간이라도 좀 더 찔러줄 수 있나요?”

정가을의 머릿속에 방금 들었던 지선우의 비웃음이 떠올랐다. 대역에 잠자리 상대, 시골 촌뜨기...

앞에서는 깍듯이 굴고 뒤에서는 가차 없이 씹는 인간. 서동하의 친구답게 지선우 역시 위선적이었고 모두가 인정하는 연기파 배우였다.

‘그래, 너희들이 연기한다면 나도 맞춰줘야지. 서동하, 지선우, 준비 단단히 하고 있어. 제대로 본때를 보여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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