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권 비서, 지금 제정신이에요?! 무슨 짓을……!"
서경이 질겁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남편 앞에서 고개를 숙이던 남자가 맞는지 믿기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공손히 귀가 시간을 알리던 목소리가 낯설게 들렸다.서경은 열린 드레스룸 문으로 눈길을 주었다가 다시 태하를 바라보았다.
남편의 비서가 제 앞에 이렇게 서 있을 줄은 몰랐다. 문밖에는 사람 소리 하나 없었다. 당장 나가라는 말부터 해야 했다. 하지만 등 뒤는 차갑고 단단한 대리석 세면대 벽이었다.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었다.
태하는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남자의 커다란 양손이 세면대 상판을 짚으며 서경의 가녀린 몸을 양옆에서 가두었다.남자의 탄탄한 가슴팍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체온과 서늘한 시더우드 향이 서경의 온몸을 옴짝달싹 못 하게 결박했다.
가까이서 마주한 태하의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그녀의 영혼까지 집어삼킬 듯 짙고 어두운 심연이었다.서경의 가파른 숨결이 남자의 스리피스 수트 조끼 깃에 닿았다.
숨소리마저 얽혀드는 극도의 밀착이었다."사모님은 왜 언제나 그딴 버러지 같은 남자 밑에서 스스로를 갉아먹고 계십니까."
태하의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서경의 귓전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목소리에는 억눌린 지배욕과 묘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상무님은 사모님 탓을 하며 밖으로 돌았지요. 그건 핑계입니다. 사모님 잘못이 아닙니다."
"선 넘지 마요, 권태하 비서! 당신은 강진우 상무의 돈을 받고 일하는 고용인일 뿐이에요!"
서경이 떨리는 손으로 남자의 가슴팍을 밀었다.
태하는 곧바로 상판에서 손을 떼고 한 걸음 물러섰다."알겠습니다. 여기서 멈추겠습니다."
서경은 열린 문과 남자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나가라고 하면 그는 나갈 참이었다. 그러나 방금 들은 말이 마음에 걸렸다.
"남편 때문이라고만 생각해요?"
태하는 고개를 저었다. 서경이 먼저 그의 소매를 붙들자 그제야 다시 가까이 왔다.
남자의 기다란 손가락이 서경의 떨리는 턱끝에 가볍게 닿았다. 은빛 무테안경을 벗어 가슴 포켓에 꽂아 넣는 남자의 맨얼굴에는, 잔혹할 정도로 수려한 야성의 살기가 서려 있었다.남자의 짙은 눈썹과 붉은 입술이 서경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 말씀은 잊지 않겠습니다."
태하의 엄지손가락이 서경의 메마른 아랫입술을 지그시 쓸어내렸다.
전기에 감전된 듯 찌릿한 전율이 서경의 척수를 타고 뇌수까지 번개처럼 치달았다.남자의 손끝은 화상이라도 입을 것처럼 뜨겁고 거칠었다.
서경의 메마른 붉은 입술 사이로 통제할 수 없는 얕은 탄식과 가쁜 신음이 새어 나왔다."상무님이 밖에서 누구와 있든, 그 책임을 사모님께 돌릴 수는 없습니다."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서경의 귓바퀴에 남자의 거칠고 뜨거운 숨결이 용암처럼 쏟아져 내렸다."오늘 밤, 사모님이 원하시는 만큼만 곁에 있겠습니다."
"하…… 읏."
서경이 거친 숨을 토해내며 눈을 질끈 감았다.
태하는 서경이 소매를 놓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다가왔다.남자의 커다란 손이 서경의 가느다란 허리를 단숨에 낚아채더니, 그녀의 몸을 번쩍 안아 올려 드레스룸 중앙의 원목 아일랜드 수납장 위에 거칠게 앉혀버렸다.
실크 잠옷 자락이 사락거리며 허벅지 위로 아슬아슬하게 말려 올라갔다.
차가운 대리석 상판의 감촉과 남자의 델 듯이 뜨거운 손길이 맞물리며 서경의 전신을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리게 만들었다.쾌락과 배덕의 낯선 전류가 온몸의 신경을 타고 번져나갔다.
남편 강진우에게서는 3년 동안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원초적인 압도감이었다.태하가 서경의 벌어진 허벅지 사이로 거침없이 자신의 단단한 몸을 밀착해 들어왔다.
남자의 수트 재킷이 서경의 얇은 실크 잠옷 위로 비벼지며 서걱거리는 농밀한 마찰음을 냈다.쿵쾅거리는 두 사람의 심장 박동이 하나의 미칠 듯한 광기 어린 리듬처럼 요동치기 시작했다.
거친 숨결이 서로의 입술을 스치며 타올랐다."사모님."
태하가 서경의 목덜미로 뜨거운 입술을 내리누르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남자의 뜨거운 혀끝이 쇄골의 여린 살결을 지그시 핥아 올리며 진한 자국을 새겼다.목덜미를 파고드는 거친 치열에 서경의 허리가 아치형으로 꺾여 들었다.
"사모님, 저를 보십시오. 마음이 바뀌면 말씀하셔야 합니다."
둘만의 서약에서 1년여가 흐른 뒤, 두 번째 맞는 화창한 봄날, 영국 런던 리치먼드 힐 대저택.정원 가득 만개한 순백의 화이트 로즈 가든 위로 따스한 5월의 햇살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그사이 대한민국과 글로벌 재계의 판도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눈부시게 격변했다.낡고 썩은 과거의 잔재는 완전히 소멸했고, 새로운 질서가 황금빛으로 자리 잡았다.한서경 총괄대표가 이끄는 명진글로벌은 유럽 명품 하우스들과의 독점 유통망을 완벽하게 장악하며 세계 10대 패션·유통 제국으로 우뚝 솟아올랐다. 미국 포브스(Forbes)지는 한서경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기업인 1위’로 선정하며 1면 표지를 장식했다. 과거 재벌가의 억압 속에서 목석이라 조롱당하던 여인은, 이제 세계 경제를 움직이는 최고의 거물로 군림하고 있었다.그녀의 한마디에 글로벌 패션 시장의 주가가 출렁였다. 세상은 그녀를 ‘살아있는 여왕’이라 부르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반면 파멸의 늪에 빠진 자들의 말로는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청송교도소에 수감된 전남편 강진우는 정신건강이 크게 악화되어 치료를 받고 있었다. 판결을 뒤집어 보겠다던 기세도, 서경을 불러내려던 집요함도 오래 버티지 못했다.남자는 여전히 벽을 긁어댔고, 전남편의 권세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오만방자하게 며느리를 짓밟던 시어머니 조 여사는 노숙인 쉼터를 전전하며 매일 며느리의 이름을 부르짖다 치매 진단을 받고 요양병원에서 지내게 됐고, 내연녀 유채은 역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었다. 그들이 서경에게 전해 달라던 부탁도 더는 그녀의 일상을 흔들지 못했다.***정원의 푸른 잔디밭 위, 하얀 파라솔 아래서 한서경이 평화로운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그녀의 품 안에는 천사처럼 곤히 잠든 생후 3개월 된 건강한 사내아이가 안겨 있었다. 두 사람의 뜨겁고 숭고한 사랑의 결실이자, 제국의 유일무이한 후계자였다.아이의 하얀 뺨 위로 부드러운 봄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아이를 바라보는 서경의 미소에는 한없는 자애로움과 평온이
영국 런던 리치먼드 힐(Richmond Hill), 템스강이 굽이쳐 흐르는 언덕 위의 고풍스러운 대저택.가을의 황혼이 하늘을 핏빛과 황금빛으로 물들이며 강물 위로 눈이 부실 정도의 영롱한 금빛 윤슬을 흩뿌리고 있었다. 한국에서의 모든 끔찍했던 과거와 악연의 매듭을 단칼에 베어내고 돌아온 두 사람의 앞에는, 오직 고요하고 웅장한 대자연의 축복만이 가득 차 있었다. 시끄러운 하객도, 위선적인 재벌 사교계의 계산도, 번쩍이는 카메라 플래시도 없는 오직 두 영혼만의 신성하고 순수한 결혼식이었다.강바람을 타고 스며드는 젖은 잔디 냄새와 붉은 장미의 향기가 테라스를 가득 채웠다. 세상의 그 어떤 화려한 호텔 예식장보다 더 거룩하고 성스러운 둘만의 성역이었다.서경은 문득 입을 열었다가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곳에는 그녀에게 말을 재촉할 하객이 없었다. 누군가 써준 인사말을 외우던 결혼식과는 달랐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어디서 시작할지 잠깐 망설였을 뿐이었다. 태하는 먼저 말하지 않고, 그녀의 손이 자신을 향해 뻗어 오기를 기다렸다.야외 가든 테라스의 하얀 대리석 난간 앞. 서경은 군더더기 하나 없는 심플하고 우아한 오프화이트 실크 슬립 드레스를 입고 서 있었다. 가을바람에 부드럽게 흩날리는 흑발, 그리고 노을빛을 받아 투명하게 빛나는 그녀의 살결은 세상을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여왕의 모습이었다.그녀의 맞은편에는 넥타이를 매지 않은 채 화이트 실크 셔츠의 단추를 가볍게 풀어헤친 권태하가 마주 서 있었다. 남자의 깊고 서늘했던 흑안은 지금 이 순간, 온전히 서경을 향한 숭배와 헌신적인 사랑으로 깊게 젖어 있었다. 서경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는 5캐럿 블루 다이아몬드 반지가 영롱한 빛을 발했다. 서경이 손을 움직일 때마다 반지 위로 붉은 노을이 스쳐 갔다.“태하 씨.”서경이 먼저 손을 뻗어 남자의 넓고 단단한 가슴팍 위에 하얀 손바닥을 얹었다.남자의 셔츠 너머로 쿵쾅거리는 묵직한 심장 박동이 서경의 손끝을 타고 전신으로 번져나갔다.“새벽 2시에 그
경북 청송군 진보면, 경북북부제1교도소(청송교도소) 특별접견실.두꺼운 방탄유리 너머의 차가운 철제 의자에는 수용번호 ‘7140’을 가슴에 단 강진우가 웅크려 앉아 있었다. 면도도 하지 않아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란 파리한 뺨, 깊이 푹 꺼진 눈가, 그리고 자해를 시도해 하얀 붕대로 칭칭 동여맨 손목이 사시나무 떨듯 경련하고 있었다. 한때 강남 일대를 주름잡던 오만방자했던 재벌 3세의 몰골은 온데간데없고, 그곳에는 절망과 광기 속에 썩어가는 한낱 중범죄자 독방 죄수만이 남아 있었다.남자의 옷깃은 구겨져 있었고, 손목을 감싼 붕대 가장자리가 조금 들떠 있었다. 남자의 손톱 밑에는 벽을 긁어대다 낀 피딱지가 덕지덕지 엉겨 붙어 있었다. 교도관 둘이 양옆에서 남자의 어깨를 경계하며 감시하고 있었다.철컥.무거운 철제 문이 열리고, 한서경이 걸어 들어왔다. 순백의 최고급 맞춤 화이트 슬랙스 수트에 심플한 블랙 힐을 신은 서경의 자태는, 한 줄기 성스러운 빛처럼 차갑고 눈부셨다. 그녀의 네 번째 손가락에는 서울의 테라스에서 태하가 끼워준 5캐럿 블루 다이아몬드 반지가 영롱한 푸른빛을 발하고 있었다.유리창 너머의 어둠과 서경이 뿜어내는 눈부신 후광이 극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그녀의 걸음걸이마다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가 접견실의 적막을 지배했다.덜컹—!진우가 미친놈처럼 철제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방탄유리창을 두 손바닥으로 쾅쾅 내리쳤다.“서경아……! 한서경! 네가 드디어 왔구나! 제발 날 여기서 꺼내줘!”인터폰 수화기 너머로 쏟아지는 남편의 피맺힌 고함과 비참한 애원.남자는 눈물과 콧물을 쏟아내며 차가운 유리창에 제 이마를 짓이기듯 비벼댔다.“내가 다 잘못했어! 무릎 꿇고 빌게! 네 발가락이라도 핥을게! 이혼만은 제발 취소하고 선처 탄원서만 써줘! 매일 밤마다 온몸이 썩어 들어가는 것 같아! 여기서 12년을 썩다간 나 진짜 미쳐서 자살할지도 몰라! 살려줘, 서경아!”추악하고 비참한 구걸.서경은 인터폰 수화기를 천천히 귀에 대며, 입가에 서늘한 여왕의 조
영국 런던 첼시, 사치 갤러리(Saatchi Gallery) 야외 중앙 광장.전 세계 50여 개국 주요 글로벌 패션 매거진과 방송사 취재진의 수백 대 카메라 플래시가 일제히 폭죽처럼 눈이 멀 정도로 쏟아져 내리는 런던 글로벌 패션 위크 VVIP 갈라 디너 레드카펫.수많은 할리우드 톱스타들과 유럽 왕실 귀족들, 그리고 세계 유력 재벌 총수들이 자리를 빛내는 화려한 무대 중앙으로, 칠흑처럼 짙은 최고급 롤스로이스 팬텀 리무진 한 대가 미끄러지듯 멈추어 섰다.도어맨이 차 문을 열자, 먼저 완벽하게 재단된 영국식 블랙 턱시도를 차려입은 권태하가 성큼 내렸다.곧게 편 단단한 어깨, 서늘한 은빛 무테안경 너머로 뿜어져 나오는 거대 자본의 황제다운 기품에 취재진의 감탄 어린 탄성이 터져 나왔다.태하가 정중하게 손을 뻗어 차 안의 여인을 조심스럽게 에스코트했다.차에서 내린 한서경의 모습이 온전히 드러난 순간, 셔터 소리가 일순간 멎을 듯한 숨 막히는 침묵이 광장 전체를 지배했다.등 라인이 엉덩이 골 직전까지 아찔하게 파여 매끄러운 척추선이 고스란히 드러난 짙은 에메랄드빛 백리스 실크 드레스.걸음을 옮길 때마다 깊은 옆트임 사이로 하얗고 탄탄한 각선미가 은밀하게 드러났고, 가녀린 목선에는 심플한 5캐럿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눈부신 광채를 뿜어냈다.우아하면서도 위험할 정도로 매혹적인 자태였다.“Who is that stunning lady?! Look at her back!”“Look here, Madam Han! Mr. Kwon! Please look at camera one!”외신 기자들의 폭발적인 함성과 플래시 세례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동양인 여성 총수가 뿜어내는 서늘하고도 압도적인 귀티와 관능에 서양의 호사가들이 넋을 잃었다. 서경은 여유롭고 매혹적인 여왕의 미소를 지으며 곁에 선 태하의 단단한 팔짱을 부드럽게 꼈다.두 사람의 완벽한 실루엣은 플래시 세례 속에서 한 폭의 명화처럼 빛났다. 남자의 단단한 팔뚝 너머로 전해지는 뜨거운 온기가
런던 리치먼드 빌라의 마스터 드레스룸.전면 대형 전신 거울 앞에 선 한서경의 모습은 그야말로 숨이 멎을 듯 파격적이고 아름다웠다.과거에는 남편의 강요와 시댁의 엄격한 눈치 때문에 목과 쇄골을 꽁꽁 싸맨 답답한 옷만 입어야 했던 그녀였다.‘정숙하고 얌전해야 한다’며 숨조차 쉬지 못하게 옭아매던 시댁의 위선적인 족쇄.하지만 오늘 밤 서경이 선택한 것은, 등 전체가 아찔하게 파여 매끄러운 척추 라인이 엉덩이 골 직전까지 고스란히 드러나는 짙은 에메랄드빛 백리스 실크 이브닝드레스였다.잘록한 허리선을 타고 매끄럽게 흐르는 최고급 실크 자락, 그리고 걸을 때마다 하얗고 탄탄한 허벅지가 은밀하게 드러나는 깊은 옆트임.서경의 우윳빛 투명한 피부와 에메랄드의 짙은 보석빛이 극명한 대비를 이루며 치명적이고 오만한 관능을 뿜어냈다.거울 속에 비친 서경의 눈동자는 더 이상 눈물에 젖어 있지 않았다. 자신의 매혹적인 관능을 자각한 여왕의 시선이었다.서경은 어깨를 펴고 거울 앞에서 한 번 돌아섰다. 드레스 자락이 발목에 걸리는지 확인한 뒤, 옷깃을 끌어 올리려던 손을 내렸다. 누군가의 눈치를 살피느라 바꿔 입을 필요는 없었다. 오늘은 자신이 고른 옷으로 나가고 싶었다.사각, 사각.드레스룸 문이 열리며 완벽한 블랙 턱시도를 기품 있게 차려입은 권태하가 걸어 들어왔다.거울 너머로 에메랄드 드레스를 입은 서경의 파격적이고 눈부신 뒷모습을 마주한 남자의 흑안이 순식간에 맹수처럼 짙게 가라앉았다.남자의 무테안경 너머로 칠흑 같은 눈동자가 번뜩였고, 호흡이 눈에 띄게 거칠어졌다.완벽하게 절제되어 있던 남자의 포커페이스가 단숨에 무너져 내렸다.“사모님.”태하가 성큼 다가와 서경의 드러난 매끄러운 등줄기에 크고 뜨거운 손바닥을 얹었다.남자의 손끝이 척추 마디마디를 따라 쓸어 내려갈 때마다 살결 위로 짜릿한 전류가 흘렀다.“오늘 밤은 제 집중력이 시험받겠군요. 드레스가 잘 어울리십니다.”남자의 낮고 은밀한 귓가 속삭임에, 서경은 과거처럼 수줍어하거나 부끄러워하는 대신
얼마 뒤, 영국 런던 히드로 공항을 빠져나온 전용 의전 차량이 도착한 곳은, 템스강의 굽이치는 물결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리치먼드 힐(Richmond Hill) 언덕 위의 고즈넉한 빅토리아풍 프라이빗 대저택 빌라였다.가을의 짙은 물안개가 정원의 붉은 단풍나무와 고풍스러운 석조 아치 기둥을 부드럽고 몽환적으로 감싸 안고 있었다.거실 한가운데에는 붉은 참나무 장작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벽난로 속에서 따스한 황금빛 온기를 뿜어내고 있었다.재벌가의 치열했던 암투와 남편의 지옥 같던 폭언, 그리고 세상의 번잡한 시선이 완벽하게 차단된 오직 두 사람만의 성역이었다.공기 중에는 젖은 흙냄새와 함께 벽난로 장작의 은은한 온기가 스며 있었다.서경은 부드럽고 두툼한 크림색 캐시미어 카디건을 걸친 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얼그레이 홍차 잔을 손에 쥐고 창밖의 템스강을 바라보았다.지난 3년 동안 단 하루도 다리를 뻗고 편히 숨 쉬며 잠들지 못했던 지옥 같은 긴장의 세월들이 아지랑이처럼 흩어지는 기분이었다.온몸을 짓누르던 무거운 피로가 따뜻한 차 한 모금과 함께 사르르 녹아내렸다.서경은 찻잔을 내려놓고 창문에 비친 제 모습을 잠깐 바라봤다. 누군가 들어올 소리에 대비해 어깨를 세울 필요가 없었다. 문 쪽으로 기울어 있던 몸을 돌려, 이번에는 강물이 흘러가는 방향을 끝까지 따라갔다.“춥지 않으십니까, 사모님.”뒤편에서 조용하고 묵직한 발소리와 함께 권태하가 다가왔다.남자는 편안한 블랙 캐시미어 니트에 슬랙스를 입고 있었지만, 그 단단한 어깨와 훤칠한 피지컬은 여전히 숨 막힐 정도로 매혹적이었다.남자의 손에 들린 앤틱 크리스털 글라스 안에서 최고급 싱글몰트 위스키가 황금빛으로 찰랑였다.“아니요. 여기선 문 열리는 소리에 놀라지 않네요.”서경이 돌아보며 부드럽고 투명한 미소를 지었다.그녀의 눈가에는 과거의 처연하고 차가웠던 얼음 가면 대신, 사랑받는 여인 특유의 맑고 눈부신 생기가 피어나 있었다.남자와 마주 선 지금 이 순간이 마치 꿈결처럼 평화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