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밤 열 시가 지나고 열한 시가 되었다.
거실 시계의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이경은 소파에 앉아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남편에게서 연락은 없었다.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 그녀는 결국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길게 이어졌다.
“왜?”
재혁의 목소리 뒤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직 밖이에요?”
“응. 무슨 일인데?”
이경은 식탁 위의 케이크를 바라보았다.
“오늘 무슨 날인지 기억해요?”
잠깐 침묵이 흘렀다.
“이경아, 나 지금 사람들하고 있어.”
“알아요. 그런데 오늘이 우리 결혼기념일이라서…….”
“그런 건 나중에 챙기면 되잖아.”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화기 너머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재혁아, 아직도 통화해?”
이경은 숨을 멈췄다.
유세린이었다.
재혁이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 대답했다.
그러더니 다시 이경에게 말했다.
“늦으니까 먼저 자.”
통화가 끊겼다.
이경은 한동안 휴대전화를 귀에 댄 채 앉아 있었다.
식탁 위에서는 촛불을 켜 보지도 못한 케이크가 천천히 실온에 녹고 있었다.
그녀는 결국 냉장고 문을 열었다.
케이크를 넣으려다가 안쪽 선반에 놓인 반찬통들을 보았다. 모두 재혁이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이경은 갑자기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다섯 해 동안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 적이 얼마나 있었을까.
결혼 전에는 매운 음식을 좋아했다. 밤늦게 수술을 마치면 동료들과 얼큰한 찌개를 먹으러 가는 것도 즐거웠다. 여행을 간다면 사람이 많은 도시보다 바다가 보이는 작은 마을을 선호했고, 휴일에는 책을 읽거나 아무 계획 없이 걷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재혁은 매운 음식을 싫어했다.
여행은 늘 호텔 시설이 좋은 곳으로 갔고, 휴일에는 남편의 일정에 맞추어 움직였다.
그렇게 살다 보니 이제는 자신이 무엇을 좋아했는지조차 가끔 헷갈렸다.
이경은 케이크를 냉장고에 넣었다.
그리고 불을 끄고 침실로 들어갔다.
남편의 베개는 아직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녀는 침대 한쪽에 누워 오래도록 문 쪽을 바라보았다.
새벽이 가까워졌을 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경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재혁이 돌아온 것이었다.
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와 거실로 나갔다.
“재혁 씨…….”
재혁은 술 냄새를 풍기며 재킷을 벗고 있었다.
“왜 안 자?”
“기다렸어요.”
그가 짜증스럽게 한숨을 쉬었다.
“기다리지 말랬잖아.”
이경은 입술을 깨물었다.
“오늘이 결혼기념일이라서…….”
“그래서 뭐?”
그녀는 말을 잃었다.
재혁은 시계를 풀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기념일 하루 못 챙기면 죽어? 꼭 사람 피곤하게 만들어야겠어?”
이경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저는 그냥…….”
“또 울어?”
그가 얼굴을 찌푸렸다.
“너는 왜 맨날 울기만 해? 내가 집에 들어올 때마다 죄인 된 기분 들게 하는 것도 지겨워.”
이경은 황급히 눈물을 닦았다.
“미안해요. 안 울게요.”
재혁은 그녀를 지나쳐 침실로 들어갔다.
이경은 거실에 혼자 남았다.
남편이 벗어 놓은 재킷에서는 낯선 향수 냄새가 났다.
그녀는 재킷을 집어 들었다가 멈췄다.
옷깃 안쪽에 길고 밝은 갈색 머리카락 한 올이 붙어 있었다.
이경은 그것을 떼어 내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자신의 머리카락은 검은색이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침실에서는 재혁이 샤워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경은 머리카락을 휴지에 싸서 버렸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남편의 재킷을 옷걸이에 걸었다.
그날 밤 그녀는 침대 끝에 누워 소리 없이 울었다.
재혁은 등을 돌린 채 잠들었다.
이경은 남편의 등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그의 어깨에 손끝이 닿으려는 순간 재혁이 몸을 뒤척였다.
“좀 가만히 있어. 피곤하니까.”
그녀는 황급히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이불을 입가까지 끌어 올렸다.
울음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한참 뒤 재혁의 숨소리가 고르게 변했다.
이경은 그제야 침대에서 내려왔다.
욕실에 들어가 문을 닫고 세면대 앞에 섰다. 거울에는 눈이 벌겋게 부은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는 수도꼭지를 틀었다.
물이 쏟아지는 소리에 묻혀 울음이 터졌다.
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 부분도 담당 부서에 전달하겠습니다.”두 사람이 떠난 뒤 이경은 서류를 다시 읽었다.종이 위의 글자들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재혁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네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인지 잘 생각해.'그 말이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늦은 오후, 이경에게 연구지원 부서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서 교수님, 제출된 연구 발표 자료와 관련해서 확인할 사항이 있습니다.”이경은 손에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았다.“어떤 사항인가요?”“민재혁 교수님 측에서 연구 발표 자료를 먼저 제출하셨습니다.”그녀는 잠시 말을 잃었다.“이미 제출했다고요?”“네. 연구 기여와 자료 사용 범위에 관해 확인이 필요한 부분이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이경은 모니터를 바라보았다.조금 전까지 재혁은 그녀에게 일을 크게 만들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자신은 발표를 중단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제출된 자료를 확인할 수 있을까요?”“관련 절차에 따라 확인하실 수 있도록 안내드리겠습니다.”전화를 끊은 이경은 의자에 기대었다.몸속의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그녀는 남편이 이혼을 요구했을 때조차 언젠가는 대화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랑이 끝났다고 해도 함께 보낸 시간까지 모두 거짓은 아니었을 거라고.하지만 재혁은 아내가 어떤 연구를 해 왔는지 알고 있었다. 그 연구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였는지도 알고 있었다.그런데도 자신의 이름을 앞세워 자료를 제출했다.이경은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바라보았다.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던 그녀는 천천히 반지를 빼냈다.손바닥 위에 놓인 작은 금속 고리가 차갑게 빛났다.결혼식 날 재혁이 직접 끼워 준 반지였다.그녀는 그날을 기억했다.재혁이 자신의 손을 잡고 평생 함께하겠다고 약속했던 순간을.이경은 서랍을 열었다.반지를 넣으려다가 잠시 멈췄다.아직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 했던 말은 실수였다고, 자신이 잘못
대신 그는 아내가 이혼 문제로 감정이 격해져 공동연구 발표를 방해하고 있다고 말했다.“저도 이런 말씀까지 드리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병원 연구 일정에 차질이 생길까 봐 걱정됩니다.”그는 통화하는 동안 몇 번이나 한숨을 쉬었다.“아내가 요즘 개인적인 문제로 많이 예민해져 있습니다. 연구실에서도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일이 있어서요.”상대방이 무슨 말을 했는지 재혁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네. 저도 최대한 조용히 해결하고 싶습니다. 다만 연구 자료 관리에 문제가 없는지는 확인해 주셨으면 합니다.”통화를 끝낸 그는 곧바로 비서에게 연락했다.“서이경 교수 연구실의 자료 접근 권한부터 확인해 주세요. 공동연구 자료가 외부로 유출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고 전달하면 됩니다.”비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실제로 유출 정황이 확인됐습니까?”재혁의 얼굴이 굳었다.“그래서 확인하라는 겁니다. 문제가 생긴 다음에 움직일 생각입니까?”비서는 더 묻지 않았다.재혁은 전화를 끊고 의자에 기대었다.이경이 자신의 이름을 문제 삼을 줄은 몰랐다.늘 남편의 기분을 먼저 살피던 여자였다. 그가 목소리를 높이면 먼저 사과했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면 자신의 주장을 접었다.그런 여자가 오늘은 여러 교수 앞에서 자신을 반박했다.재혁은 그 장면을 떠올릴수록 화가 치밀었다.“감히 나를 망신시켜?”그는 책상 위에 놓인 이혼합의서를 바라보았다.아직 이경의 서명이 없는 서류였다.재혁은 그것을 집어 들었다가 거칠게 내려놓았다.“끝까지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군.”그의 시선이 다시 휴대전화로 향했다.이번에는 인사 담당 부서의 번호를 눌렀다.“서이경 교수의 다음 연구 평가 일정이 언제인지 확인해 주십시오. 그리고 최근 연구 실적 제출 현황도 함께 보고 싶습니다.”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연구 운영과 관련된 문제입니다.”전화를 끊은 재혁은 입술을 비틀었다.이경이 연구를 지키겠다고 나섰다면, 그 연구가 얼마나 쉽게 흔
이경은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재혁의 손이 세린의 어깨 위에 놓여 있었다. 세린은 그 손을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더 가까이 기대었다.이경은 갑자기 자신이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낯설게 느껴졌다.남편에게 버림받은 아내가 남편과 그의 연인 앞에서 자신의 연구를 지켜 달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그녀를 질투에 사로잡힌 여자처럼 바라보고 있었다.이경은 손에 들고 있던 발표 자료를 정리했다.“연구 관련 자료는 정식으로 확인하겠습니다. 원본 파일과 수정 기록, 연구 승인 서류, 분석 과정에 참여한 사람들의 기여 내용을 모두 확인할 거예요.”세린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었다.이경은 그녀를 바라보았다.“유세린 선생님도 실제로 어떤 부분에 참여하셨는지 정리해 주세요.”세린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재혁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너 지금 우리를 연구윤리위원회에 신고하겠다는 거야?”“필요하면 정식 절차를 밟겠습니다.”재혁의 얼굴이 붉어졌다.“서이경!”그가 큰소리로 그녀를 불렀다.이경은 몸을 움찔했다.오랫동안 익숙해져 있던 반응이었다. 남편이 목소리를 높이면 먼저 잘못한 일을 찾고, 상황을 진정시키기 위해 사과하던 습관이었다.하지만 이번에는 사과하지 않았다.“제 연구를 허락 없이 발표하지 마세요.”그 말을 남기고 이경은 회의실을 나왔다.문이 닫히기 직전, 세린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재혁아, 이경 씨가 정말 신고하면 어떡해?”이경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이경이 복도 끝으로 사라지자 세린은 손에 들고 있던 커피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조금 전까지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재혁아, 나 때문에 당신까지 곤란해지는 건 싫어.”재혁은 짜증스럽게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네 잘못 아니야. 이경이가 괜히 일을 키우는 거지.”세린은 대답하지 않고 발표 자료를 바라보았다.첫 페이지에는 자신과 재혁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처음 이 자료를 봤을 때 세린은 놀랐다. 분석이 예상보다 정교했고,
이경은 잠시 말을 잃었다.그녀는 남편에게 연구비를 달라고 한 적이 없었다. 연구에 필요한 승인과 자료 사용 절차를 거쳤고, 수많은 시간을 들여 직접 분석했다.그런데 재혁은 자신이 남편이었다는 사실만으로 그 모든 노력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있었다.“저는 당신 이름을 빌려서 연구한 적 없어요.”재혁이 비웃었다.“그래. 이제 와서 혼자 잘났다는 거지?”그는 발표 자료를 집어 들었다.“이경아, 현실적으로 생각해. 네가 그 연구를 발표한다고 누가 그렇게 관심을 가지겠어? 제대로 된 지원도 못 받으면서 몇 년을 붙들고 있을 거야?”이경은 남편을 바라보았다.“그래서 당신 이름으로 발표하려고 했어요?”“내가 발표하면 더 많은 사람이 보겠지. 세린이도 해외 연구 경험이 있으니까 도움이 될 거고.”이경의 손이 천천히 움켜쥐어졌다.재혁은 그 표정을 보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너는 계속 연구하면 되잖아. 굳이 이름 하나 가지고 일을 크게 만들 필요가 있어?”“이름 하나요?”이경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흔들렸다.“당신한테는 그게 이름 하나예요?”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인 발표 자료를 집어 들었다.자신이 직접 정리한 표와 그래프가 있었다. 환자의 상태가 나빠지는 과정을 수없이 되짚으며 작성했던 분석이었다.“저는 이 연구를 하면서 몇 번이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어요. 결과가 맞지 않으면 원자료를 확인했고, 해석이 잘못됐을 가능성이 있으면 다시 분석했어요.”이경은 잠시 숨을 골랐다.“당신이 집에 들어왔을 때 제가 컴퓨터 앞에 앉아 있으면 그만 좀 하라고 했잖아요. 그렇게까지 해서 뭐가 달라지겠느냐고.”재혁은 입을 다물었다.“그때는 아무 가치도 없다고 하더니, 이제는 당신 이름으로 발표할 만큼 중요한 연구가 된 거예요?”재혁의 턱이 굳어졌다.“말 다 했어?”“아직요.”이경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유세린 씨 이름은 왜 들어가 있어요?”재혁은 잠시 시선을 피했다.“세린이도 검토에 참여했어.”“어느 부분을요?”“외부 연구 동향이랑 발
민재혁.유세린.자신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서 교수?”재혁이 그녀를 발견했다. 그의 표정이 잠깐 굳어졌다.하지만 곧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회의 중인데 무슨 일이야?”이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스크린에 표시된 그래프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저 자료는 어디서 받으셨어요?”재혁이 미간을 찌푸렸다.“무슨 뜻이야?”“지금 발표하고 있는 분석 자료요. 제가 작성한 연구 초안입니다.”회의실 안이 조용해졌다. 몇몇 의사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세린은 회의실 한쪽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이경과 눈이 마주치자 부드럽게 웃었다.“이경 씨, 오셨어요?”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한 목소리였다.이경은 그 웃음을 바라보았다.며칠 전 세린은 남편이 밤새 자신을 간호해 줬다고 말했다. 이경이 고열로 앓고 있던 밤이었다.그 여자는 이제 남편의 옆자리에 앉아 그녀의 연구 결과까지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하고 있었다.“이 자료의 원본은 제 연구실에 있습니다. 분석 과정과 수정 기록도 모두 남아 있고요.”재혁은 발표용 리모컨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서이경,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제 이름이 빠져 있는 이유를 묻고 있어요.”재혁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참석자들을 한 번 둘러보았다.“연구라는 게 원래 혼자 하는 일이 아니잖아. 공동연구 자료를 가지고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굴어?”이경은 남편을 바라보았다.“공동연구라면 각자의 기여를 정확하게 표시해야죠.”“지금 여기서 그걸 따지겠다는 거야?”“네. 이 자료를 외부에 제출하기 전에 확인해야 합니다.”재혁은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나가서 얘기해.”이경은 움직이지 않았다.“아직 검증이 끝나지 않은 결과도 포함되어 있어요. 이 상태로 최종 결과처럼 발표해서는 안 됩니다.”세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이경 씨, 오해가 있으신 것 같아요.”그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저희도 연구를 빨리 발전시키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재혁이가 이경 씨 연구를 얼마나 높이 평가
한참 뒤 그녀는 눈물을 닦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오전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확인해야 할 연구 자료가 남아 있었다.***이경이 진행하던 연구는 수술 후 합병증의 위험 신호를 조기에 발견하기 위한 것이었다.그녀는 수술 전후 환자의 상태와 검사 결과가 어떻게 변하는지 분석하면서, 기존 방식으로는 놓치기 쉬운 위험 신호를 찾아내려고 했다.연구를 시작한 것은 몇 해 전이었다.한 환자의 상태가 갑자기 악화된 날이었다. 수술은 계획대로 끝났고 수술 직후에도 특별한 이상은 없었다. 그러나 몇 시간 뒤 환자는 예상하지 못한 합병증으로 중환자실에 들어갔다.그날 이경은 밤새 환자의 기록을 다시 읽었다.분명 어딘가에 신호가 있었을 것 같았다. 의료진이 그 변화를 더 일찍 알아차렸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수도 있었다.그 질문은 오랫동안 그녀를 붙잡았다.연구를 진행하는 동안 실패도 많았다. 처음 세운 가설이 맞지 않아 분석을 다시 시작했고, 일부 자료에서는 기대했던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통계적 의미가 있어 보였던 지표가 다른 조건에서는 충분한 설명력을 갖지 못하기도 했다.그럴 때마다 이경은 원자료로 돌아갔다. 환자의 상태와 검사 시점, 치료 과정에서 달라진 조건들을 다시 확인했다.연구가 느리게 진행되는 것은 답답했지만, 결과를 서둘러 발표하는 것보다 정확하게 확인하는 일이 중요했다.그런데 남편은 그녀의 연구를 이해하지 못했다.'그걸 해서 뭐가 달라지는데?'재혁은 집에서 논문을 읽고 있는 이경을 볼 때마다 그런 말을 했다.'당신은 맨날 환자하고 논문밖에 모르잖아. 집에서도 병원 일만 생각할 거면 결혼은 왜 했어?'그 말을 들으면 이경은 컴퓨터를 덮었다.남편이 싫어하니까. 함께 보내는 시간이 부족하다고 서운해하니까.그녀는 연구 자료를 새벽에 확인하는 날이 많아졌다. 재혁이 잠들면 조용히 일어나 거실로 나왔고, 아침 식사를 준비하기 전에 분석표를 수정했다.그렇게 쌓아 온 시간이 몇 년이었다.이경은 연구실 컴퓨터를 켰다.모니터에 익숙한 논문 초안이 나타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