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월요일 아침, 미온개발 사옥의 회전문 앞.
예원은 손가락에 끼워진 백금 반지를 엄지로 한 번 쓸어내리고는 걸음을 내디뎠다.
주말 내내 그녀를 뒤흔들었던 혼란들, 텅 빈 서재, 남편과의 180일 별거 계약, 그리고 권시혁이라는 미지의 변수.지금 예원에게 필요한 것은 상처받은 아내로서의 도피처가 아니었다.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단단한 기반, 즉 자신의 커리어였다.오전 10시, 브랜드전략팀 회의실.
거대한 스크린에는 미온개발이 하반기 사활을 걸고 추진 중인 대형 복합공간 브랜드, '루센(LUCEN)'의 마스터플랜 조감도가 띄워져 있었다.
단순한 상업 시설을 넘어,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 자체를 큐레이션하는 혁신적인 공간.지난 1년간 예원이 밤낮없이 매달려 기획안을 다듬고 또 다듬었던 피땀 어린 결과물이었다.며칠 뒤. 미온개발의 루센 프로젝트 협업 시스템에 새로운 알림이 떴다.[LUCEN 1F POP-UP ZONE_수정 설계안]아크온의 지난 설계안을 공식적으로 반려한 지 정확히 사흘 만에 도착한 자료였다.예원은 모니터 화면을 응시하며 조용히 첨부파일을 열었다.그 사흘 동안 권시혁에게서는 사적인 연락이 단 한 통도 오지 않았다.반려 사유에 대한 감정적인 항의 전화도, 서운함을 내비치는 개인적인 메시지도, 일정 지연을 무기 삼아 실무진을 통해 들어오는 우회 압박도 없었다.자신의 설계가 반려당했다는 사실을 자존심 상해하며 사적인 호감을 빌미로 결정을 흔들어보려는 시도는 철저할 만큼 존재하지 않았다.예원에게 도착한 것은 오직 약속된 검토 일정에 맞춰 정식 경로로 접수된 새로운 도면과 운영 시뮬레이션 자료뿐이었다.오후에 열린 수정안 검토 회의.조명을 낮춘 회의실에서 시혁은 프로젝터 화면에 새로운 3D 렌더링을 띄웠다."지난 회의에서 지적된 운영 가변성을 기준으로 1층 안을 다시 검토했습니다."사과나 감정적인 토로는 섞여 있지 않았다. 시혁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건조했다."세 가지 핵심 운영 시나리오를 적용해 시뮬레이션을 다시 돌려봤습니다. 기존 안에서도 운영 자체는 가능했지만, 팝업 교체 주기가 짧아질수록 고정 구조물이 브랜드 콘텐츠의 선택을 제한하는 비율이 커졌습니다. 그 부분은 설계 측에서 예상했던 것보다 운영 효율에 미치는 영향이 컸습니다."적어도 예원에게는 단순히 자신의 요구에 맞춰 설계를 접은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시혁은 실제로 운영 시뮬레이션을 다시 돌렸고, 예상보다 영향이 컸던 지점을 구체적인 수치와 수정안으로 설명하고 있었다.화면이 바뀌며 수정된 평면도가 나타났다."루센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핵심 곡면 구조는 축소하여
며칠 뒤, 미온개발 본사의 루센 프로젝트 메인 회의실.조명을 낮춘 회의실 내부에는 대형 프로젝터가 뿜어내는 백색광만이 선명하게 감돌고 있었다.며칠 전 좁은 자재 샘플실에서 우연히 닿았던 손끝의 낯선 감각이나 한 걸음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사적인 거리는 거짓말처럼 지워져 있었다.회의 테이블 너머, 레이저 포인터를 쥔 채 프레젠테이션 화면 앞에 권시혁은 다시 완벽한 아크온의 대표 건축가였다."1층 메인 로비와 이어지는 브랜드 팝업 및 이벤트 존의 2차 설계안입니다."화면 위로 유려한 곡선이 돋보이는 3D 렌더링 이미지가 떠올랐다.시혁은 대형 곡면 벽과 고정형 전시 구조물을 활용해 공간 자체에 강렬한 건축적 아이덴티티를 부여하는 방향을 제시했다.동선을 하나의 거대한 갤러리처럼 유도하여, 방문객이 루센에 들어서는 순간 공간의 정체성을 시각적으로 각인시키겠다는 명확한 의도였다.건축적으로는 나무랄 데 없는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예원의 시선은 화면 속의 화려한 렌더링 이미지 대신, 태블릿에 띄워둔 운영 시뮬레이션 데이터와 면적표 위를 빠르게 오가고 있었다."권 대표님."시혁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예원의 차분하고 단단한 목소리가 회의실의 공기를 갈랐다."1층 팝업 존의 고정형 전시 구조물 비중이 지나치게 높습니다."회의실에 모인 실무진들의 시선이 일제히 예원에게 쏠렸다. 예원은 태블릿 화면을 프로젝터로 연동시키며 구체적인 데이터를 근거로 짚었다."이 안대로 가면 공간의 첫인상은 확실히 강렬해질 겁니다. 하지만 루센의 1층은 한 번 완성해 놓고 감상만 하는 고정형 쇼룸이 아닙니다. 연간 15회 이상 입점 브랜드와 팝업 콘텐츠가 교체되는 유기적인 공간이에요. 브랜드마다 요구하는 동선과 집기 면적의 편차도 큽니다."예원의 지적은 날카로웠다.
— "둘이 따로 있었어?"수화기를 넘어온 재헌의 목소리는 낮고 집요했다.오직 그 단 하나의 사실만을 확인하겠다는 듯이 팽팽하게 날이 선 음성이었다.예원의 귓가에 닿은 휴대전화 너머로 짧은 정적이 맴돌았다. 예원은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아니,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는 쪽이 정확했다.과거의 문예원이라면 그 서늘한 질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입술부터 뗐을 것이다.현장 사람들이 방금 전까지 함께 있었다거나, 동선과 마감재를 확인하다보니 잠깐 둘만 남게 된 것뿐이라고.행여나 남편의 심기를 거스르거나 불필요한 오해를 살까 두려워, 자신이 놓인 상황을 구구절절 해명하기 위해 애썼을 것이다.'누구와 있었는가'를 묻는 남편의 질문에 성실하게 답을 바치는 것은, 오랫동안 예원에게 굳어진 부부 사이의 당연한 의무였으니까.하지만 지금 예원의 머릿속을 채운 것은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까'가 아니었다.'왜 이걸 묻지?'예원은 자신이 처한 물리적 상황을 변명하는 대신, 집요하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 차재헌이라는 사람의 모순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그녀는 동요 없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재헌아. 너 아까부터 묻는 게 이상한 거 알아?"— "뭐?""분명 루센 프로젝트 일 때문이라고 했잖아. 대표가 직접 남을 일이냐고, 업무 범위를 지적했고."예원은 조금 전부터 이어졌던 대화의 궤적을 차분하게 되짚었다."그런데 네 질문은 계속 권시혁 씨와 내가 몇 시까지, 얼마나 가까이, 어떤 상황에서 같이 있었는지에만 맞춰져 있어. 현장 진행 상황이 궁금한 게 아니라, 그저 내가 그 사람과 둘이 있었는지가 확인하고 싶은 거잖아."수화기 너머에서 흠칫 숨을 삼키는 듯한 기척이 느껴졌다.그 뒤로
다음 날 오후, 미온개발 본사.오전 내내 밀려 있던 루센 프로젝트 관련 부서 회의를 마친 예원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모니터 옆에 올려둔 휴대전화의 화면이 밝아지며 진동이 울린 것은 그때였다.[차재헌]어젯밤 통화 이후 하루 만에 다시 뜬 이름이었다.예원은 하던 작업을 멈추고 가만히 화면을 내려다보았다."내 일정 보고할 의무 없어."라고 선을 긋고 끊어냈던 어제의 통화가 떠올랐지만, 마음은 오히려 차분했다.그녀는 일정을 방어했다는 사실에 굳이 큰 의미를 부여하거나 되새기지 않은 채, 무미건조한 손길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어."— "바빠?"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재헌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화가 났다거나 어제의 통화를 따져 묻기 위해 벼르고 있는 어조가 아니었다."아니, 회의 끝나고 서류 정리하는 중이야."— "어제, 루센 현장에 늦게까지 있었다며."예원의 서류를 넘기던 손끝이 아주 잠시 멈췄다.어제 위치를 묻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건만, 재헌은 이미 사실의 일부를 알고 있는 상태였다."그걸 어떻게 알았어?"— "어쩌다 루센 쪽 얘기가 나와서 들었어. 어떻게 알았는지가 중요한 건 아니잖아."예원에게는 재헌이 정보의 출처를 대수롭지 않게 뭉뚱그려 넘기려는 것처럼 들렸다.그의 말대로 출처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예원은 목소리의 높낮이를 바꾸지 않고 담담하게 대답했다."그랬어. 프로젝트 관련해서 현장 확인할 게 있었으니까."사실을 부인하거나 핑계를 댈 이유는 없었다.그러나 예원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수화기 너머에서는 아주 짧고 미묘한 뜸 들이는 시간이 이어졌다.&
비좁은 자재 샘플실 안을 가르며 날카로운 진동 소리가 울려 퍼졌다.예원의 시선이 손에 들린 휴대전화 액정 위로 떨어졌다.화면 위에서 점멸하고 있는 세 글자, [차재헌].불과 몇 초 전까지 권시혁의 체온이 닿았던 손끝의 낯선 감각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당도한 이름이었다.예원은 발신자 이름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다른 남자와 좁은 공간에 함께 있다는 사실을 들킨 것 같은 죄책감이나 당혹감은 아니었다.그저 묘한 타이밍이었다.조금 전까지 완전히 단절되어 있다고 믿었던 법적 남편이라는 현실이, 이 작은 기기 하나를 통해 너무도 쉽고 당연하게 자신의 사적인 시공간으로 틈입해 들어오려 한다는 사실이 기묘하게 느껴졌다.시혁은 예원의 휴대전화 화면을 들여다보거나 누구냐고 캐묻지 않았다.그는 들고 있던 마감재 샘플 보드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한 걸음 더 물러났다.예원에게는 그 짧은 움직임이 자신이 통화할 공간을 남겨주는 것처럼 느껴졌다.예원은 짧은 심호흡과 함께 통화 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 "어디야?"인사조차 생략된, 너무나도 익숙하고 당연한 질문이 수화기 너머에서 흘러나왔다.다급한 용무가 있거나 화가 잔뜩 난 음성이 아니었다.늘 그래왔던 것처럼, 아내의 위치를 묻는 것에 어떤 거리낌도 없는 평온한 어조였다.과거의 문예원이라면 그 질문을 듣는 순간 아무런 의심 없이 대답했을 것이다.'루센 현장이야.' '지금 퇴근하는 길이야.' '누구와 같이 있어.'남편이 자신의 행방을 묻는 데에 어떤 자격이 필요한지, 그가 왜 자신의 현재 위치를 알아야만 하는지 단 한 번도 반문해 본 적이 없었다.부부라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그 오래된 습관을 의무로 여기며 살아왔으니까.질문을 받
루센 현장 실사가 마무리되고 며칠 뒤.예원과 시혁은 현장 사무실 뒤편에 마련된 작은 자재 샘플실에 들어와 있었다.벽면 양쪽으로 마감재 샘플 보드와 사인물, 각종 자재 박스가 천장까지 빼곡하게 쌓여 있는 탓에, 통로는 성인 한 명 반 정도가 간신히 지나갈 만큼 비좁았다.적어도 예원은 그 비좁은 거리를 처음부터 크게 의식하지 않았다.며칠 전 사적인 저녁 식사 이후 시혁을 향한 경계가 조금 느슨해졌고, 현장에서 그의 판단을 묵직하게 신뢰할 수 있다는 사실도 이미 확인했기 때문이었다.예원은 선반 위를 훑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어제 요청한 메인 라운지 미디어 월 마감 샘플이 이쪽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텍스처를 먼저 확인해 보는 게 좋겠어요.""A구역 선반 쪽에 있을 겁니다."시혁 역시 평소와 다름없는 건조하고 이성적인 태도였다. 두 사람은 도면과 자재 리스트를 대조하며 비좁은 통로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아, 저기 있네요."예원의 시선이 눈높이보다 조금 높은 선반 위에 놓인 짙은 회색의 샘플 보드에 멎었다.그녀가 까치발을 들며 그것을 향해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도면을 확인하던 시혁 역시 예원이 찾던 것과 같은 샘플 보드를 향해 동시에 손을 뻗었다.가죽 장정된 두꺼운 보드 모서리 위로, 두 사람의 손이 겹쳐졌다.아니, 정확히는 얽히거나 겹쳐진 것이 아니었다. 아주 찰나, 두 사람의 손끝이 가볍게 스치듯 닿았을 뿐이었다.예원의 움직임이 일순간 멎었다. 닿은 건 정말이지 손끝뿐이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짧은 찰나에 닿은 타인의 온도가 지나치게 선명했다.늘 서늘하고 이성적이라고만 생각했던 권시혁이라는 존재가, 처음으로 체온을 가진 한 '남자'로 감각되는 낯설고 강렬한 순간이었다.당황한 예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