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제48화. 같은 시간의 기록돈은 흔적을 남긴다.그것이 도해림이 계약과 재무의 세계에서 오랫동안 벼려온 가장 날카로운 무기이자 원칙이었다. 기업을 옭아매는 수많은 함정을 설계하고 해체해 온 그녀에게, 장부 위를 맴도는 수많은 숫자들은 곧 그 기업이 감추고 싶어 하는 가장 내밀한 민낯이나 다름없었다.대표실의 무거운 정적 속에서 해림은 태블릿과 모니터 여러 대를 동시에 띄웠다. 한쪽 화면에는 조금 전 한지수의 음성에서 확인했던 '안전시험 수치 불일치'의 데이터 묶음을, 다른 한쪽 화면에는 화재 당시 에이온 연구소의 연구비 및 시험비 관련 비용 집행 기록들을 빼곡하게 나열했다.갑자기 외부 은행의 전산망을 해킹하거나 불법적인 계좌 조회를 시도할 이유는 없었다. 그녀가 과거 화재 사고 조사 과정에서부터 합법적으로 확보해 둔 에이온 내부 회계 자료와, 안전시험 관련 비용 집행 기록만으로도 분석할 데이터는 충분히 차고 넘쳤다. 해림은 안전시험 전후의 비용 처리 항목들을 먼저 좁힌 뒤, 한지수가 무엇을 이상하게 보았는지 역으로 추적해 들어갔다.해림의 첫 번째 목적은 단순한 회계 감사나 횡령범 찾기가 아니었다. 돈의 장부를 샅샅이 뒤져 최종 수령인의 이름을 캐내는 것은 지금 단계에서 성급하게 할 일이 아니었다.'거대한 에이온의 자금 흐름 속에서, 한지수라는 철저한 연구원은 대체 왜 하필 이 특정한 돈을 콕 집어 이상하다고 판단했을까.'해림은 철저하게 한지수의 시선으로 돌아가, 그가 남긴 질문의 궤적을 역으로 더듬기 시작했다.해림이 한지수의 말을 단서로 추려낸 비용 기록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완벽하게 정상적인 회사 지출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안전시험 보조금], [외부 장비 대여 및 의뢰비] 같은 그럴싸하고 합리적인 명목들. 서류의 양식은 깔끔했고, 첨부된 증빙 자료도 표면적으로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 일반적인 재무팀
Last Updated: 2026-10-21
Chapter: 제47화. 죽은 사람의 목소리해림은 아주 깊고 차분한 숨을 들이마시며, 마우스 포인터를 그 이질적인 파일의 이름 위로 천천히 올려놓았다.클릭.화면 중앙에 검고 건조한 형태의 재생 인터페이스가 떠올랐다. 단순한 시스템 로그나 발췌된 문서 파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육성이 고스란히 담길 수 있는 음성 파일이었다.해림의 손이 잠시 허공에서 멈췄다. 그녀는 재생 버튼을 곧바로 누르지 않았다.아무리 자신의 직감이 강하게 특정 방향을 가리키고 있어도, 해림은 그것을 섣불리 진실로 취급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파일의 속성값을 열어, 화재 전후의 생성 기록과 서버의 중간 저장 경로를 짧고 집요하게 대조했다.최소한 현재 확인 가능한 기술적 흔적만으로는, 이 파일이 화재 당시 저장된 원본일 가능성을 뒷받침할 명백한 근거가 충분했다.해림은 마침내 재생 버튼을 눌렀다.짧은 잡음과 함께, 스피커 너머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이상합니다. 같은 시험 항목인데, 보관된 원자료와 제가 현재 확인한 안전시험 수치가 서로 일치하지 않습니다.]한지수였다.해림의 시선이 재생 중인 파일 위에 차갑게 멈춰 섰다.음성 속 한지수의 목소리는 공포에 질려 벌벌 떠는 내부고발자나, 누군가에게 쫓기며 마지막 유언을 남기는 자의 절박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그것은 빠르고 긴장되어 있으면서도, 철저하게 자신이 발견한 데이터의 오차를 짚어내는 연구원 특유의 업무적이고 건조한 말투에 가까웠다.해림은 즉시 자신이 과거 확보했던 시스템 로그와 안전장치 해제 기록을 화면 반대편에 띄웠다. 한지수의 음성은 결코 허공에 떠도는 막연한 주장이 아니었다. 그가 목소리로 남긴 '안전시험 수치의 불일치'는, 해림이 이미 확인해온 시스템 이상 기록과 함께 다시 검증해야 할 또 하나의 정황이었다.
Last Updated: 2026-10-21
Chapter: 제46화. 원본이 머문 곳서버.그것은 연구소 현장을 직접 확인한 뒤, 해림이 떠올린 다음 경로였다.제로파트너스 대표실의 불빛은 밤이 깊도록 꺼지지 않았다. 해림은 차서록의 집무실을 박차고 나온 이후, 그에게 어떠한 연락도 취하지 않았다. 평소라면 복잡한 데이터 교차 검증을 앞두고 자연스럽게 그에게 의견을 구하려 손이 뻗어 나갔을 타이밍에도, 해림의 손끝은 허공에서 차갑게 멈춰 섰다.그녀는 더 이상 차서록이 안전하다고 골라놓은 통제된 정보의 한계 안에 자신의 판단을 가둘 생각은 없었다.해림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화재 당시 현장의 설비에서 발생했던 무수한 이상 데이터들. 그리고 누군가의 책상 위에서 '한지수의 과실'이라는 단일한 결론으로 묶여버린 공식 사고 조사 보고서.해림의 시선은 두 문서의 내용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데이터들이 생성되고 취합된 '경로의 기술적 흔적'을 집요하게 파고들기 시작했다.갑자기 존재하지 않던 비밀 지하실이나 한지수 개인의 은밀한 시스템을 상상하는 치기 어린 추리는 그녀의 방식이 아니었다. 해림은 철저하게 자신이 이미 과거에 손에 쥐고 있던 시스템 로그와, 공식 보고서에 첨부된 발췌본 파일들의 기술적인 속성값을 나란히 대조했다."원자료가 보고서로 바로 넘어간 게 아니야."적막한 대표실에 침묵을 깨는 건조한 중얼거림이 울렸다.같은 사고 시각대에 생성된 데이터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현장에서 발생한 원격 접근 및 장치 해제 로그들의 최초 저장 경로와 공식 보고서가 취합한 자료들의 경로 사이에는 미세한 불일치가 존재했다.이는 누군가 일부러 증거를 조작했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기업과 연구소의 복잡한 인프라 구조상, 화재 당시 연구소 설비와 안전 시스템에서 뿜어져 나온 막대한 원자료가 공식 조사를 위한 최종 발췌본으로 만들어지기 전에, 내부의 다른 데이터 수집 서버를 한 번 더 거쳤다는 명백한 흔적이었다.해림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서버가 별도로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가 범죄나 은폐의 증거는 아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 중간
Last Updated: 2026-10-21
Chapter: 제45화. 당신이 고른 정보차서록의 집무실.해림은 별도의 연락도 없이 그 문을 열었다. 책상 앞에 서 있던 단정하고 빈틈없는 모습의 차서록이 시선을 들어 그녀를 마주했다.어떤 일상적인 안부나 인사는 오가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를 가로지르는 서늘한 공기만이, 한 번 벌어진 신뢰의 균열이 아직 닫히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해림은 그를 향해 곧바로 가장 날카로운 질문을 찔러 넣었다."당신이 화재 전에 추적하던 태성 내부 이상징후. 지금 내가 찾는 화재 당시의 원자료 흐름과 관련 있습니까."숨길 것도, 돌려 말할 것도 없는 직구. 서록의 시선이 아주 미세하게 굳어졌다.하지만 그는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관련 없습니다"라며 얄팍한 거짓말로 그녀를 기만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가장 잔인하고 차가운 진실 하나만을 골라 그녀에게 돌려주었다."그 질문에는… 관련 여부까지 포함해서 지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그 한마디에 해림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거짓말이 아니라는 사실이 해림을 더 분노하게 만들었다. 무엇을 숨겼는지도 모르고, 심지어 지금 자신이 파고드는 사건과 관련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 차서록은 여전히 그녀가 무엇을 알아야 하고 무엇을 몰라야 하는지, 자기 자신이 결정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보호와 조사 보안 때문이라고 했었죠."해림이 평소보다 한 발 더 멀리 물러서며 지나치게 공식적인 어조로 말했다."불완전한 정보를 내게 넘겨서 내 판단을 위험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고. 하지만 차서록 씨, 당신이 뭔가를 말하지 않기로 선택할 때마다, 나는 결국 당신이 안전하다고 골라놓은 정보 안에서만 선택하게 됩니다."서록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적어도 그 자리에서 반박은 돌아오지 않았다."당신은 항상 내 행동이나 선택을 막지 않는다고 했죠. 하지만 정작 내가 판단을 내리는 데 필요한 눈을 가려버린다면, 그게 통제와 뭐가 다릅니까. 불완전한 정보라도, 그걸 어떻게 판단하고 무엇을 감당할지는 내가 정합니다. 당신이 아니라요."해림의 날카로운 지적에 서
Last Updated: 2026-10-19
Chapter: 제44화. 보고서 밖의 현장해림은 자신이 한 번 죽었던 장소, 아니, 법적으로 죽었다고 기록되었던 그 장소의 입구에 다시 섰다.연구소의 익숙한 복도로 걸음을 내딛자, 매캐한 연기 냄새가 코끝을 스치는 듯한 짧고 감각적인 플래시백이 일었다. 손끝이 찰나 굳어졌지만, 해림은 그것을 공포나 트라우마로 부풀리지 않았다. 그녀는 과거의 끔찍했던 기억에 파묻히러 온 무기력한 생존자가 아니었다. 문서를 넘어선 진짜 증거를 확인하러 온 사람이었다.해림은 태블릿에 띄워 둔 공식 사고 조사 보고서의 도면과, 현재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연구소 내부의 구조를 번갈아 응시했다. 보고서에 기록된 최초 발화 지점, 불길의 확산 경로, 그리고 보고서에서 한지수의 책임 판단과 연결된 관련 설비의 물리적 위치.그녀는 자신이 이미 과거에 파악해 두었던 화재 시스템의 원격 접근 로그와 비정상적인 안전장치 해제 기록을 명확한 기준점 삼아, 공식 보고서의 건조한 문장들을 실제 공간의 동선에 하나씩 대입하기 시작했다."동선이 맞지 않아."해림의 차가운 목소리가 조용한 복도에 울렸다. 공식 보고서는 한지수가 안전 수칙을 위반하고 시스템의 수동 제어를 지연시켜 초기 진압에 실패했다고 서술했다. 하지만 해림이 직접 눈으로 확인한 설비의 위치와 비상 대응 동선을 대조해보면, 보고서의 주장은 현장의 물리적 구조와 묘하게 덜컥거리며 어긋나 있었다.단순히 한지수가 제어판 앞에서 망설였거나 대응 수칙을 어겨서 막대한 피해가 커졌다고 보기에는, 시스템의 이상 기록이 가리키는 범위와 화재의 확산 속도가 훨씬 빠르고 치명적이었다. 보고서가 설명하는 '한 사람의 무능력한 대응 실패'라는 납작한 논리 하나만으로는, 이 거대한 건물을 순식간에 삼켜버린 화재의 폭발적인 진행 과정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었다.보고서 밖의 현장이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화재 당시 현장에는 한지수의 과실만으로는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 요소가 남아 있었다. 한지수의 대응 실패만으로는 현재 확인되는 사고의 폭발적인 진행을 충분히 설명하기 어
Last Updated: 2026-10-19
Chapter: 제43화. 결론의 근거결론은 이미 활자로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문제는, 그 결론이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였다.제로파트너스 대표실. 해림은 넓은 책상 위에 화재 당시 작성된 공식 사고 조사 보고서를 모조리 펼쳐두었다. 그녀는 수백 장에 달하는 문서의 비극적인 서술이나 자극적인 피해 묘사에 감정적으로 이입하지 않았다. 지금 그녀가 하는 일은 독서가 아니라, 철저한 해체 작업이었다.해림은 빈 태블릿 화면에 세 개의 항목을 나누어 띄웠다.보고서가 내린 최종 결론.그 결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첨부된 근거 자료.그리고, 한지수에게 과실 책임을 묻게 된 보고서의 논리 구조.해림은 확인된 사실과 아직 검증되지 않은 부분을 철저하게 따로 분리하여 표시해 나갔다.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가설을 세우거나 성급한 음모론을 제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기존의 결론이 정말로 논리적인 뼈대를 갖추고 성립하는지, 그 기초부터 다시 단단하게 두드려 확인하는 일이었다.그녀는 이 세 가지 요소를 뼈대만 남기고 완전히 분해하여, 하나의 거대한 증거 사슬 형태로 다시 배열하기 시작했다. 한지수 가족이 안고 있던 억울함이나, 그가 평소에 성실했다는 여동생의 생활적인 증언은 이 사슬 안에 끼워 넣지 않았다. 가족의 기억은 해림에게 조사를 다시 시작할 '의심의 이유'를 던져주었을 뿐, 그 자체가 증명력을 가진 물증은 될 수 없었으니까. 이제부터는 그 의심을 오직 검증 가능한 사실과 데이터로만 치환해서 증명해야 했다.해림은 과거 자신이 힘겹게 확보해 두었던 화재 시스템의 이상 로그와 예약 자료들을 다시 화면 한쪽에 띄웠다. 이미 화재가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음을 증명했던 그 파편화된 자료들을 기준점 삼아, 공식 보고서의 문장들을 하나씩 대조해 나갔다."이 결론은 무엇으로 증명됐지?"해림의 서늘한 시선이 보고서의 핵심 요약본을 지나, 뒤쪽에 첨부된 근거 자료 목록으로 향했다. 보고서는 한지수가 안전 수칙을 위반하고 시스템 수동 제어를 지연시켰다는 것을 사고 악화의 주원인으로 꼽고
Last Updated: 2026-10-19
Chapter: 두 사람의 서명결혼식은 라비엔에서 열렸다.황궁 대예배당도,대신전의 중앙 성소도 아니었다.에버하르트 성의 작은 예식실이었다.엘로이즈는 자신의 이름으로 이곳을 골랐다.카시안도 동의했다.그날 아침,집무실 책상 위에는 두 가지가 놓여 있었다.혼인 헌장 최종본.그리고 작은 반지함.엘로이즈는 반지함부터 열었다.비어 있었다.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것이었다.한때는 아무것도 넣지 않기 위해 남겨 둔 상자.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간직했던 것.오늘도 아직 비어 있었다.엘로이즈는 그대로 뚜껑을 닫았다.예식실에 들어가자 카시안이 기다리고 있었다.제복은 입지 않았다.황실을 상징하는 망토도 없었다.그에게 왕관은 없었다.필요하지도 않았다.카시안이 그녀를 보고 웃었다.“왔어.”엘로이즈도 그의 앞에 섰다.“네.”하객석에는 익숙한 얼굴들이 있었다.에버하르트 전 공작.세라피나.북부에서 다시 수도와 라비엔을 오가게 된 로웬.새 아스트라 운영위원들.베아트리체도 가장 뒤쪽에 앉아 있었다.초대장은 카시안이 직접 보냈다.국정에 의결권은 없었고,카시안의 삶에도 더 이상 답을 정할 권리는 없었다.대사제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그에 대한 교리 심판과 법적 책임 심사는 아직 계속되고 있었다.모르텐의 재판도 마찬가지였다.모든 일이 오늘을 위해 완벽하게 끝난 것은 아니었다.그래도 오늘 결혼할 수는 있었다
Last Updated: 2026-10-19
Chapter: 에버하르트의 이름으로겨울이 끝날 무렵,아스트라 장기운영 보고서가 라비엔에 도착했다.엘로이즈는 첫 장만 오래 읽었다.넉 달.지역별 철수는 모두 정상적으로 작동했다.안전 상한을 넘긴 사람은 없었다.북부는 자체 유지량을 먼저 확보한 뒤 남은 출력만 보냈고,두 차례의 지역 이탈에도 다른 지점으로 부담이 자동 전가되지 않았다.문제도 있었다.폭설 때 연락이 늦어진 지역이 있었고,교대 인력이 부족한 지점도 있었다.완성된 체계는 아니었다.그래도 사람 하나를 의자에 묶지 않고 겨울을 넘겼다.엘로이즈는 마지막 장에 적었다.〈차기 운영안에 교대 인력 확충 및 지역 감사 보완 필요.〉그리고 보고서를 덮었다.오늘 그녀가 처리할 문서는 따로 있었다.정오가 되자 에버하르트 성의 대회의실 문이 열렸다.라비엔의 관리들.가신들.각 마을의 대표들이 자리를 채웠다.카시안도 뒤쪽에 앉아 있었다.중앙 비상조정관도,전 황태자도 아니었다.초청 명단에는 단순히 적혀 있었다.〈카시안 발렌티스 — 승계자의 개인 초청객.〉에버하르트 공작이 중앙으로 나왔다.그의 앞에는 세 가지가 놓여 있었다.가문의 인장.영지 장부.공작위 승계문.“엘로이즈 에버하르트.”“네.”그녀가 앞으로 걸어갔다.아버지가 물었다.“이 땅과 이 이름에 따르는 권리와 책임을 받겠느냐.”전생에도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황후가 되기 전이었다.그때 그
Last Updated: 2026-10-18
Chapter: 이번에는 내가 묻겠습니다혼인 헌장 초안은 사흘 동안 네 번 바뀌었다.카시안이 먼저 추가한 조항이 있었다.〈배우자의 공적 지위는 혼인을 이유로 승계·확대되지 않는다.〉엘로이즈가 읽고 물었다.“전하를 위한 조항입니까?”“둘 다를 위한 거야.”카시안이 말했다.“네가 공작이 된다고 내가 라비엔에서 권리를 얻는 것도 아니고.”그는 다음 줄을 짚었다.“내가 공직을 맡는다고 네가 그 책임까지 같이 져야 하는 것도 아니니까.”엘로이즈는 그대로 두었다.그녀가 추가한 것은 다른 조항이었다.〈공적 이해관계가 충돌할 경우 각자는 독립된 당사자로 판단하며, 혼인 관계를 협상의 근거로 사용하지 않는다.〉카시안이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것도 좋아.”“반대할 줄 알았습니다.”“왜?”“부부가 공개적으로 다른 편에 설 수도 있다는 뜻이니까요.”카시안은 잠시 생각했다.“그럴 수도 있지.”“전하와 제가 서로 반대되는 정책을 지지해도요?”“응.”“제가 전하의 안건을 막아도?”“그럼 설득해야겠지.”그가 말했다.“남편이라서 따라오라고 할 수는 없잖아.”엘로이즈는 마지막 수정 표시를 지웠다.그날 오후,법무관이 형식 검토를 마친 초안을 돌려줬다.황실 혼인법과 충돌하는 조항 없음.에버하르트의
Last Updated: 2026-10-18
Chapter: 결혼보다 먼저 정할 것책임 심의가 끝난 다음 날,엘로이즈는 라비엔으로 돌아갈 준비를 시작했다.수도에서 더 처리해야 할 일은 많지 않았다.아스트라 장기운영 규정은 시행 단계에 들어갔고,카시안의 중앙 비상조정관 임기도 시작됐다.세라피나의 교리 심의는 대신전 내부 절차로 넘어갔다.남은 것은 각자가 맡을 일이었다.엘로이즈에게도 있었다.에버하르트 공작이 보내온 문서였다.〈라비엔 공작위 승계 절차 개시 요청.〉엘로이즈는 마지막 장에 서명했다.이제 공식적인 후계 절차를 시작할 수 있었다.그날 오후,카시안이 찾아왔다.“바빠?”“지금은 아닙니다.”그는 맞은편에 앉았지만,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엘로이즈가 먼저 물었다.“무슨 일입니까?”“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그 말에 엘로이즈는 펜을 내려놓았다.“물어보세요.”카시안은 천천히 말했다.“언젠가 나랑 결혼하고 싶어?”엘로이즈는 대답하지 않았다.놀라서가 아니었다.언젠가는 나올 질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다만 그 질문을 들은 순간,전생의 결혼이 먼저 떠올랐다.황후가 되기 위한 교육.황실로 옮겨진 재산 관리권.공식 행사에서 먼저 불리던 남편의 이름.에버하르트보다 발렌티스가 앞섰던 모든 순간.카시안이 덧붙였다.“지금 하자는 뜻은 아니야.”엘로이즈가 그를 봤다.“알고 있
Last Updated: 2026-10-17
Chapter: 기록에 남는 이름최종 책임 심의는 공개로 진행됐다.엘로이즈는 방청석에 앉았다.오늘은 조사자가 아니었다.이미 제출할 기록은 모두 제출했다.심의위원장이 첫 장을 읽었다.“베아트리체 발렌티스 황후.”회의장 안이 조용해졌다.베아트리체는 피고석이 아니라 증언석에 앉아 있었다.황후의 관도 쓰지 않았다.“영아 교체 승인.”다음 장.“카시안 발렌티스의 생모 기록 폐기 승인.”다음.“황자의 적법한 지위를 명료하게 하라는 포괄적 정치 지시.”그리고 마지막.“원문과 다른 신탁 공표본을 사전에 확인하고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음.”위원장이 말했다.“네 사실 모두 최종 확인됐습니다.”베아트리체가 고개를 들었다.“이의 없습니다.”변호인이 움직였지만,그녀가 손을 들어 막았다.위원장이 물었다.“최종 진술하시겠습니까?”“하겠습니다.”베아트리체는 방청석을 보지 않았다.“당시 제국에는 황자가 필요했습니다.”익숙한 말이었다.“황실의 피를 가진 아이가 있었고, 죽은 제 아이의 자리는 비어 있었습니다. 나는 그 둘을 하나로 만들었습니다.”누군가 숨을 삼켰다.“신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내가 문장을 쓰지는 않았습니다.”그녀가 말했다.“하지만 그 거짓이 내 선택을 지켜 준다는 것을 알았고, 막지 않았습니다
Last Updated: 2026-10-17
Chapter: 남기로 한 사람세라피나가 성녀직에 관한 입장을 발표하겠다고 한 날,대신전 앞에는 평소보다 많은 사람이 모였다.엘로이즈는 본전 안쪽 회의실에 앉아 있었다.세라피나의 앞에는 두 장의 문서가 놓여 있었다.하나는 성녀 사임서.다른 하나는 새로 작성된 직무 선언서였다.대사제가 물었다.“결정했습니까?”“네.”세라피나는 사임서를 먼저 집어 들었다.한동안 바라보다가,옆으로 밀어 놓았다.“저는 성녀직에서 물러나지 않겠습니다.”회의실 여기저기에서 작은 움직임이 일었다.엘로이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세라피나가 두 번째 문서를 펼쳤다.“하지만 이전과 같은 성녀로 남지도 않겠습니다.”대사제의 표정이 굳었다.“무슨 뜻입니까?”“성녀가 아스트라의 최종 제물이 되는 것을 당연한 의무로 규정한 모든 해석을 거부하겠습니다.”그녀는 한 줄씩 읽었다.성녀의 신력은 대신전의 소유가 아니다.아스트라 참여 여부는 성녀 본인의 동의를 필요로 한다.안전 상한과 철수권은 다른 참여자와 동일하게 적용한다.성녀라는 이유로 거부권을 제한할 수 없다.그리고 마지막.〈성녀의 사명은 희생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희생이 정당한지 묻는 데에도 있다.〉대사제가 낮게 말했다.“전통을 다시 정의하겠다는 겁니까?”세라피나는 고개를 저었다.“제가 혼자 정의할 권한은 없습니다.”그녀가 답했다.&ldq
Last Updated: 2026-10-16
Chapter: [외전 5화] 내일도 보는 사이외전 5화. 내일도 보는 사이금요일 밤 열 시 십삼 분.두 사람은 서윤의 작업실 앞에 서 있었다.태오가 데려다주겠느냐고 묻지 않은 첫날이었다.서윤이 택시를 잡으려 하자 자연스럽게 말했다.“제가 데려다드리겠습니다.”“그래요.”그게 전부였다.허락을 받아냈다는 안도도, 선을 넘었다는 긴장도 없었다.차 안에서는 별것 아닌 이야기를 했다.서윤이 다음 주에 들어갈 현장.태오의 자문사에서 처음으로 받은 장기 프로젝트.점심으로 먹었던 국수가 생각보다 맛없었다는 이야기까지.작업실 앞에 도착하자 태오가 차에서 내려 문을 열었다.서윤이 그를 올려다봤다.“내일 뭐 해요?”“오전에 운동할 생각입니다.”“그다음은?”태오가 잠시 생각했다.“별일 없습니다.”“그럼 나랑 화분 보러 갈래요?”이번에는 그의 대답이 바로 나왔다.“좋습니다.”서윤이 눈을 가늘게 떴다.“안 물어보네요.”“뭘 말입니까?”“제가 정말 같이 가고 싶은 건지.”태오가 웃었다.“같이 가자고 먼저 말했으니까요.”“많이 늘었네.”“교육비가 비쌌으니까요.”서윤이 웃음을 터뜨렸다.백십억짜리 농담은 이제 두 사람 사이에서 꽤 자주 쓰였다.“그럼 내일 열한 시.”“어디로 가면 됩니까?”“우리 집 앞으로 와요.”태오가 아주 잠깐 멈췄다.서윤이 곧바로 말했다.“또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화분 사러 갈 거예요.”“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얼굴이 했어요.”
Last Updated: 2026-08-10
Chapter: [외전 4화] 이번에는 연애부터외전 4화. 이번에는 연애부터서윤이 태오의 사무실을 찾은 것은 처음이었다.작은 기업 자문사라고 했지만 생각보다 더 작았다.대표실도 따로 없었다.유리벽 안쪽의 가장 평범한 책상이 태오 자리였다.“진짜 여기서 일해요?”“네.”“대표인데?”“대표가 제일 넓은 방을 써야 할 이유가 없어서요.”서윤이 피식 웃었다.“사람이 너무 바뀐 거 아니에요?”“불편합니까?”“또 물어본다.”태오가 입을 다물었다.그때 회의실에서 나오던 직원 하나가 두 사람을 발견했다.순간 표정이 굳었다.서윤의 얼굴을 알아본 모양이었다.“대표님, 혹시 사모님께서—”“한서윤 대표님입니다.”태오의 정정은 빨랐다.직원도 바로 고개를 숙였다.“죄송합니다. 한 대표님.”서윤은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받았다.하지만 엘리베이터에 탄 뒤 태오에게 물었다.“사모님이라고 불리는 거 싫어할까 봐 바로 고친 거예요?”“그 호칭은 지금 사실이 아니니까요.”“예전에는 사실이었고?”태오가 잠시 침묵했다.“법적으로는요.”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과거를 아름답게 포장하지도 않았다.그렇다고 없던 일로 만들지도 않았다.둘은 근처의 작은 와인바로 갔다.서윤이 먼저
Last Updated: 2026-08-09
Chapter: [외전 3화] 놓지 않아도 되는 손세 번째 금요일에는 서윤이 장소를 골랐다.호텔도, 유명한 레스토랑도 아니었다.작업실에서 십 분쯤 떨어진 작은 야외 정원이었다.태오가 입구의 안내판을 바라봤다.“여기였습니까?”“왜요. 싫어요?”“아닙니다.”그가 정원 안쪽을 바라봤다.“한서윤 씨가 만든 곳이라서요.”개장한 지 한 달 된 소규모 복합문화공간이었다.태오는 그 사실을 알고도 먼저 찾아오지 않았다.서윤이 보여 주겠다고 말하기 전까지 기다렸다.“궁금하지 않았어요?”“많이 궁금했습니다.”“그런데 왜 안 왔어요?”“당신이 일하는 곳까지 제가 마음대로 들어가는 건 싫었습니다.”서윤은 잠깐 그를 바라보다 먼저 걸었다.“오늘은 내가 초대한 거예요.”“네.”“그러니까 마음대로 봐도 돼요.”태오는 그제야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정원 한가운데에는 낮은 수로가 있었고, 돌 사이로 늦여름 풀들이 자라고 있었다.예전의 서윤이 만들던 정원과 달랐다.화려한 꽃이 채우던 자리에는 바람이 드나드는 여백이 남아 있었다.식물과 돌 사이의 빈 공간마다 늦여름의 공기가 천천히 지나갔다.무언가를 끝까지 채워 넣지 않아도 완성된 정원이었다.“달라졌네요.”태오가 말했다.“뭐가요?”“예전에는 중심을 먼저 만들었습니다.”서윤이
Last Updated: 2026-08-09
Chapter: [외전 2화] 허락하지 않아도 되는 것금요일 오후 여섯 시 오십칠 분.서윤이 식당 앞에 도착했을 때 태오는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정확히는 입구에서 세 걸음 떨어진 곳이었다.서윤이 그를 보자마자 물었다.“왜 안에 안 들어가 있었어요?”“같이 들어가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그것도 물어보려고 기다린 건 아니죠?”태오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서윤은 한숨처럼 웃었다.“설마.”“먼저 들어가도 되는지는 못 물어봤으니까요.”“차태오 씨.”“네.”“이러다 나중에는 숨 쉬어도 되냐고 묻겠어요.”태오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농담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얼굴이었다.서윤은 먼저 식당 문을 열었다.“들어와요. 이건 허락 안 받아도 돼요.”예약한 자리는 창가였다.지난번 카페와 달리 이번 식당은 태오가 골랐다.서윤이 메뉴를 펼치며 말했다.“여기는 왜 골랐어요?”“작업실에서 가깝고, 예약할 때 알레르기나 못 먹는 음식이 있는지만 물어봐서요.”“내가 예전에 좋아하던 식당은 피한 거고요?”“네.”“왜요?”“다시 좋아하는지 모르니까요.”서윤은 메뉴 너머로 그를 바라봤다.“그럼 오늘부터 다시 알아가려고요?”“그럴 생각입니다.”“조사하듯이?”“그건 자신 있습니다.”서윤이 웃었다.“그건 좀 무섭네요.”태오도 이번에는 농담인 것을 알아들었다.식사가 시작된 뒤 서윤은 일부러 예전에는 잘 먹지 않던 매운 요리를 주문했다.태오가 물을 건네며 말했다.“매운 거 싫어하지 않았습니까?”“요즘은 좋아해요.”
Last Updated: 2026-08-08
Chapter: [외전 1화] 다시 묻는 사람카페 문을 먼저 연 사람은 서윤이었다.태오는 뒤따라 들어왔지만 자리를 고르지 않았다.창가와 안쪽 테이블 사이에서 서윤이 잠시 둘러보자 그가 물었다.“어디가 좋습니까?”서윤은 웃을 뻔했다.삼 년을 함께 살았던 남자가 처음 만난 사람처럼 물어보고 있었다.“창가요.”두 사람은 창가에 마주 앉았다.태오가 종이봉투에서 메뉴 카드를 꺼내 테이블 가운데 놓았다.“뭘 마실래요?”그 질문에도 서윤은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예전의 태오라면 묻지 않았을 것이다.그녀가 아침마다 마시던 커피도, 싫어하던 향도 알고 있었으니까.“내가 뭘 마시는지 알잖아요.”“알았죠.”태오가 메뉴를 내려다봤다.“삼 년 전의 한서윤 씨가 뭘 마셨는지는.”서윤의 시선이 멈췄다.“지금도 같은지는 다시 물어봐야 할 것 같아서요.”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서윤은 메뉴를 넘겼다.“오늘은 라테요.”태오가 고개를 끄덕였다.“저는 아메리카노로 하겠습니다.”“그건 그대로네요.”“네. 바꿀 이유가 없어서.”“모든 걸 바꾸려고 애쓰는 줄 알았는데.”태오가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잘못한 것과 원래 좋아했던 것까지 전부 버리는 건 다른 일이니까요.”서윤은 처음으로 소리 내 웃었다.아주 짧았지만 태오의 눈이 멈췄다.그는 그 웃음의 의미를 묻지 않았다.주문한 음료가 나온 뒤에도 둘은 한동안 평범한 이야기를 했다.서윤의 새 작업실.최근 맡은 호텔 정원 프로젝트.태오가 요즘 하고 있는 일.그는 태경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Last Updated: 2026-08-08
Chapter: 계약서 없는 시작여섯 달 뒤.차명환은 증거인멸 교사와 사문서위조 교사, 업무상 배임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윤재헌은 자신이 보관한 지시 기록을 제출했지만 실행자로서의 책임을 피하지 못했다. 정현수와 강유라 역시 각자가 관여한 범위에 따라 재판과 조사를 받았다.한기석도 예외가 아니었다.협박을 받았다는 사실은 참작될 수 있었다.그러나 한미정이 쓰러진 것을 알고도 채무 약정에 서명하고, 딸을 계약의 대가로 넘긴 선택까지 지워 주지는 못했다.서윤은 아버지의 사과문을 받았다.읽었지만 답하지 않았다.용서하지 않겠다는 선언조차 더는 그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한미정의 원본 녹음은 재판부에 증거로 제출됐다. 사건과 관련된 구간만 법정에서 검증됐고, 딸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비공개 상태로 봉인됐다.서윤은 어머니의 목소리를 세상의 구경거리로 만들지 않았다.태경의 이사회는 최대주주와 경영진의 이해관계를 분리하는 내부 통제안을 통과시켰다. 회장실 비상 권한은 폐지됐고, 주주 정보 접근과 전자 서명 복구에는 외부 감사인의 승인이 필요해졌다.태오는 그 과정에 직함으로 참여하지 않았다.대표이사도, 전무도, 후계자도 아니었다.자신의 의결권으로 개편안에 찬성한 뒤 주주석에서 일어났을 뿐이었다.백십억 원의 상환도 개인 자산으로 마쳤다.그가 잃은 것은 아버지가 허락한 자리였다.그가 남긴 것은 누구에게도 맡기지 않은 자기 이름이었다.서윤은 태경과 관련된 마지막 합의서를 검토했다.[한서윤에 대한 채무·혼인·비밀유지 관련 모든 부속 약정의 효력 부인.][향후 어떠한 명목으로도 권리 포기 또는 침묵을 요구하지 않음.]그녀는 서명하지 않았다.서윤의 외부 변호인이 의아한 표정
Last Updated: 2026-08-07
Chapter: 제114화 보여주지 않은 것「문예원 씨에게도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화면 위로 짧게 떠올랐다 사라진 알림창.예원은 자신이 읽은 문장을 머릿속으로 다시 한번 더듬어 확인했다.명백하게 자신의 이름 석 자가 적혀 있었다.순간, 주변의 공기가 서늘하게 가라앉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제 이름을 왜 알고 있죠?"예원의 물음에 시혁 역시 굳은 얼굴로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모르겠습니다.""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저한테 확인하고 싶은 게 있다면서 제 이름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거네요."예원은 시혁이 거짓말을 한다고 느끼지 않았다.적어도 지금은 제보자가 누구인지, 자신의 이름을 어떤 경로로 알게 되었는지 그도 정말로 모르는 듯했다.하지만 그 사실과 별개로, 예원은 자신이 이 불쾌하고 기묘한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제외되기를 원하지 않았다."제 이름까지 나온 일이에요. 확인되는 게 있으면 저한테도 알려줘요."예원의 또렷한 목소리가 회의실을 울렸다.시혁은 잠시 그녀의 눈을 마주 보았다.그 시선에는 예원을 향한 염려와, 알 수 없는 발신자를 향한 날 선 경계심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잠시 뒤 시혁의 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시혁은 화면을 확인하고 짧게 말했다."아까 그 번호입니다."그가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손가락을 움직였다.예원은 화면에 무언가 새로운 창이 열리는 것만 어렴풋이 보았다."새로 온 자료예요?""그런 것 같습니다."시혁이 짧게 대답하며 화면을 응시했다.그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이며 몇 줄의 텍스트를 읽어 내려갔다.그러나 예원이 앉아 있는 맞은편 자리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글자들이 나열되어 있는지, 어떤 내용이 열렸는지 전혀
Last Updated: 2026-10-21
Chapter: 제113화 사라지지 않은 원본"당신은 늘 오늘만 말하네요."예원의 서운함이 담긴 짧은 문장이 행사장 구석의 공기를 갈랐다.시혁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예원은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자신이 방금 내뱉은 말이 마음에도 없는 원망이나 가벼운 투정처럼 들리지 않기를 바랐다."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닙니다."시혁의 낮은 목소리가 뒤늦게 돌아왔다."알아요."예원은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그래서 더 서운한 거예요."대화는 거기서 멈췄다.시혁은 예원의 감정을 가볍게 치부하지 않았고, 예원 역시 그가 무책임하게 현재로 도망쳤다고 비난하지 않았다.하지만 예원이 기다렸던 '미래'에 대한 대답은 끝내 돌아오지 않은 채, 두 사람 사이에는 해소되지 않은 묘한 감정적 거리가 맴돌았다.다음 날, 미온개발 회의실.루센 프로젝트 실무 회의가 끝난 뒤, 예원은 랩톱을 정리하며 맞은편의 시혁을 의식했다.공적인 공간에서는 한없이 반듯한 파트너.어제의 감정적인 엇갈림이 있었음에도 시혁은 업무에 있어서만큼은 조금의 빈틈도 보이지 않았다.예원 역시 마찬가지였다.그때,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시혁의 휴대전화 화면이 짧게 켜졌다.무심코 화면을 확인하던 시혁의 손이 그 자리에 딱딱하게 굳었다.예원은 랩톱을 덮으려던 손을 멈췄다.늘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던 시혁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갑고 날카롭게 돌변해 있었다."무슨 일 있어요?"예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시혁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낮게 대답했다."예전 사건과 관련해 연락이 왔습니다."예원의 손끝이 미세하게 움찔했다.예전 사건.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Last Updated: 2026-10-21
Chapter: 제112화 오늘만 말하는 사람대답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예원의 올곧은 시선 끝에서, 시혁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예원은 그가 자신의 질문을 들었다는 것을 알았다.재헌과의 180일 계약이 끝난 뒤에도 두 사람이 함께할 수 있겠느냐는 물음.말로 꺼내고 나니 막연하던 기대가 비로소 현실의 날짜와 맞닿았다.예원은 쉽게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시혁이 어떤 대답을 하든 직접 듣고 싶었다.시혁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예원 씨."예원은 대답하지 않았다.그가 이어 할 말을 묵묵히 기다렸다."지금은…… 우리, 오늘만 생각하면 안 되겠습니까?"예원이 미래를 물었는데, 시혁은 오늘을 이야기하고 있었다.그 단순한 어긋남이 예원에게는 예상보다 깊게 닿았다.시혁의 목소리는 차갑지 않았다.오히려 예원은 그가 말을 고르느라 애쓰는 것처럼 느꼈다.하지만 그가 왜 오늘이라는 말을 택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다만 자신이 물은 날짜가 그의 대답에서 빠져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오늘이요."예원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지금 예원 씨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은 분명합니다."시혁의 대답은 분명했다.지금 함께 있고 싶다는 말만큼은 망설이지 않았다.예원은 그 확신에 마음이 놓이면서도, 동시에 자신이 기다리던 말이 빠져 있다는 것을 느꼈다."그럼 그 이후는요?"예원의 물음에 시혁의 시선이 다시 한번 아래로 가라앉았다.예원은 그의 말을 무책임하다고 단정하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아직 오지 않은 날들에 대한 대답이 없는 것은 분명했다."지금 당장 약속해 달라는 뜻은 아니에요."
Last Updated: 2026-10-19
Chapter: 제111화 그날 이후에도"왜 말 안 해요?"예원의 질문이 행사장 한구석의 공기를 갈랐다.감정을 억누르며 스스로 말을 삼켜버린 시혁을 향해 던진 직설적인 물음이었다.시혁은 오랫동안 예원의 두 눈을 깊게 마주 보았다.방금 전까지 그가 끝내 뱉어내지 못한 감정의 무게가 짙은 눈동자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쉽게 꺼낼 수 있는 말이 아니라서요."낮게 가라앉은 대답이 조심스럽게 돌아왔다.예원은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곧바로 되받았다."나도 쉽게 들으려던 거 아니에요."시혁의 시선이 예원의 얼굴 위에서 잠시 멈췄다.그의 단단한 턱에 미세하게 힘이 들어갔다."알고 있습니다."시혁은 더 이상 다른 변명을 덧붙이거나 말을 잇지 않았다.비록 그가 구체적인 사랑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는 않았지만, 예원은 그가 어떤 진심을 삼켰는지 이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그런데 정작 그 말을 듣고 나면 무엇이 달라질까.예원의 머릿속에 전에 없던 낯선 감각이 번졌다.두 사람은 서로를 원한다는 마음을 말보다 행동으로 확인해 왔다.루센 프로젝트의 위기 앞에서 시혁은 예원의 판단을 지지했고, 재헌이 그녀를 아내로 소개한 자리에서는 자신의 감정 때문에 예원이 불편해지지 않도록 거리를 지켰다.예원은 그에게 먼저 다가가 마음을 물었다.그런데 이제는 오늘의 확신을 넘어 내일의 시간을 함께하고 싶어졌다.오늘도 자신을 바라보고, 내일도 만나고, 그다음 날에도 지금과 같은 마음으로 온전히 곁에 있어 주는 것.그것은 단지 현재의 마음을 확인하는 것을 넘어, 두 사람의 감정이 계속 이어질 거라는 굳건한 약속을 바라는 일이었다.그때, 공식 행사의 주요 식순이 모두 끝났음을 알리는 안내 멘트가 라운지를 울렸다.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정리하며 행사장 밖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소란이 잦아드는 행사장 가장자리로 나란히 걸음을 옮기며, 예원은 두 사람 사이에 단단하게 놓인 현실적인 경계를 다시 한번 떠올렸다.차재헌과 맺은 180일 계약.서로의 사생활에 간섭하지 않고 외부 교제를 허용하기로 한
Last Updated: 2026-10-19
Chapter: 제110화 하지 않기로 한 말"자격을 준다면요?"질문은 낮았지만,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선명하게 공기를 갈랐다.시혁의 눈동자가 순간 미세하게 흔들리더니 이내 깊게 가라앉았다.그는 예원의 도발적이고 주체적인 초대를 피하거나 적당히 넘기지 않았다.얽힌 시선 사이로 숨 막히는 긴장이 무겁게 내려앉았다."그 말."시혁의 목소리가 억눌린 듯 갈라졌다."가볍게 듣고 싶지 않습니다.""가볍게 한 말 아니에요."예원은 물러서지 않았다.시혁이 조심스레 선을 긋고 서 있다면, 자신이 먼저 그 선을 지워줄 생각이었다.하지만 시혁은 예원이 내어준 자리를 덥석 차지하며 성급하게 다가오지 않았다."예원 씨가 제게 어떤 자격을 주려는 건지 압니다."그의 시선이 예원의 입술 끝에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짙은 눈을 향해 올라왔다."하지만 제가 바라는 건, 단지 질투하고 화를 내도 된다는 허락만은 아닙니다."예원의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질투를 표현할 권리, 그 이상을 원한다는 선언이었다."그럼 뭔데요?"시혁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그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예원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두 사람이 처음 관계의 규칙을 정할 때, 명시적으로 합의했던 단 하나의 금지어가 있었다.'사랑한다는 말은 아직 하지 맙시다.'그때는 그 말 없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재헌과 맺은 180일 계약과 얽힌 현실 속에서, 오히려 그 단어를 배제하는 것이 서로를 안전하게 지키는 방어막이라고 여겼다.감정의 끝을 확인하지 않는 선에서 머무르는 것.그것이 스스로 다치지 않는 방식이었다.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안전선이라 믿었던 그 규칙이 이제
Last Updated: 2026-10-18
Chapter: 제109화 화낼 자격"화났어요?"질문은 짧고 직설적이었다.행사장 한구석, 수많은 사람의 대화 소리와 은은한 음악 소리가 보이지 않는 장막처럼 두 사람을 에워싸고 있었다.예원은 피하지 않고 시혁의 눈을 마주 보았다.모두가 자신을 차재헌의 아내로 바라보던 그 밝고 소란스러운 공간에서, 예원이 유일하게 대답을 요구하는 사람은 권시혁이었다.이번에는 긴 침묵이 이어지지 않았다.시혁이 천천히 시선을 내리며 낮게 입을 열었다."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습니다."건조하지만 분명한 인정이었다.아무렇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하거나, 애써 감정을 포장하지 않은 대답.그 짧은 문장 속에 담긴 무게가 예원의 귓가를 스쳤다.질투.혹은 그와 비슷한 결의 묵직한 불편함이었다.예원은 그의 대답을 곱씹으며 다시 물었다."그런데 왜 아무 말도 안 했어요?"시혁은 재헌의 소개를 듣고도 예원에게 다가오지 않았다.그렇다고 지금 와서 불편함을 쏟아내지도 않았다.시혁의 시선이 잠시 행사장 너머를 향했다가 다시 예원에게 돌아왔다."그 사람은 아직 예원 씨 남편이니까요.""알아요."예원의 즉각적인 대답에 시혁의 눈동자가 한층 더 깊게 가라앉았다."그 사실을 제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잖습니까."틀린 말이 아니었다.예원이 사적으로 어떤 선택을 내렸든, 별거와 외부 교제를 허용한 계약이 존재하든, 공식적인 서류상 그녀는 여전히 차재헌의 아내였다.시혁은 그 굳건한 현실의 굴레를 부정하거나 억지로 부수려 들지 않았다."제가 화를 낼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자격.그 단어가 예원의 호흡을 아주 미세하게 멈춰 세웠다.예원은 시혁의 단단한 얼굴을 가만히 살폈다.그 말은 자신이 아무런 법적 권리가 없으니 체념하겠다는 식의 비겁한 자기비하가 아니었다.감정이 없다는 뜻은 더더욱 아니었다.오히려 그것은 철저한 통제와 절제에 가까웠다."그렇다고 당신이 아무 감정도 없는 사람처럼 굴 필요는 없잖아요."예원의 목소리에 아주 희미한 파동이 일었다.시혁은 대답 대신 잠시 시선을 내리깔았다.그의 크
Last Updated: 2026-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