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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는 오빠, 밤에는 주인님
낮에는 오빠, 밤에는 주인님
Author: 케사르

1화. 오빠는 여기서만

Author: 케사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02 21:48:12

“일 년이면 됩니다.”

윤해원은 테이블 위의 숫자를 다시 보았다.

12억 8천만 원.

일 년 안에 갚으라는 뜻이라면 굳이 이 자리에 불러 앉힐 필요도 없었다. 한 달에 일억씩 모아도 모자라는 돈이었다.

“분할 상환안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차태헌.

태원그룹 전략기획본부장. 새로 채권을 인수한 태원에셋파트너스의 실질적인 결정권자이자, 경제면에서 몇 번이나 본 얼굴이었다.

그런 남자가 일개 보증채무자를 직접 만나고 있었다.

“아니.”

해원은 다시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채권양도 통지서.

급여 및 예금채권 압류 예고.

원금에 지연이자와 비용까지 합산된 최종 채무액.

종이를 넘길 때마다 아버지가 남긴 회사의 마지막 흔적이 숫자로 바뀌었다. 태헌은 왜 보증을 섰느냐고 묻지도, 갚을 능력이 있느냐고 확인하지도 않았다.

이미 답을 전부 알고 있는 사람처럼 해원이 서류를 다 읽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럼 일 년 안에 이 돈을 전부 갚으라는 뜻입니까?”

“갚지 않아도 돼.”

해원의 손이 멈췄다.

태헌은 테이블 위의 서류가 아니라 해원을 보고 있었다.

“일 년 동안 내 것이 되면.”

낮고 평평한 목소리였다. 농담을 던진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끝나는 날 채권을 소멸시키지.”

해원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되묻는다고 뜻이 달라질 말도 아니었다.

“내 것이 된다는 게 무슨 뜻이죠?”

“말 그대로.”

“사람을 담보로 잡겠다는 겁니까?”

“담보는 돌려받을 생각으로 잡는 거고.”

잠깐의 틈.

“나는 일 년 동안 쓸 생각이야.”

모욕감보다 먼저 계산이 움직였다.

돈을 빌린 사람은 아버지였지만 보증서의 서명은 해원의 것이었다. 상속을 포기한다고 없어지는 빚이 아니었다. 개인회생을 신청하더라도 급여와 신용, 회사에 숨겨온 사정까지 전부 드러난다.

그때 테이블 위에 뒤집어둔 휴대전화가 짧게 울렸다.

엄마였다.

[토요일 여섯 시야. 너무 격식 차리지는 말고.]

곧 사진 한 장이 더 도착했다. 연한 청색 원피스를 입고 거울 앞에 선 엄마가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이거 괜찮니? 명우 씨가 너 꼭 보고 싶대.]

상견례까지 사흘.

아버지와 이혼한 뒤 누구도 만나지 않던 엄마가 처음으로 자기 옷을 물었다.

해원은 답장 대신 휴대전화를 뒤집어놓았다.

태헌의 시선이 잠시 그 위에 머물렀다.

“거절해도 됩니까?”

“물론.”

“그러면?”

“월요일부터 원래 절차가 시작되겠지.”

급여계좌가 묶이고, 오피스텔 보증금에 압류가 들어온다.

그 뒤에도 엄마가 아무것도 모를 가능성은 없었다.

해원은 손가락 끝으로 채무액이 적힌 줄을 한 번 눌렀다.

울어도 줄어들지 않는 숫자였다.

화를 내도 없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조건을 전부 말씀하세요.”

그제야 태헌의 입가가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럴 줄 알았어.”

태헌은 서랍에서 두툼하지 않은 서류철을 꺼냈다.

첫 장에는 ‘채무 조정 및 조건부 면책 합의서’라고 적혀 있었다. 그 아래에 붙은 부속 합의서는 제목조차 없었다.

해원은 먼저 날짜를 확인했다.

“서명한 날부터 삼백육십오 일.”

“그래.”

“그동안 원금과 이자는 동결되고, 계약이 끝나면 채무 전액을 소멸한다.”

태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적혀 있다는 듯 해원이 다음 문장을 읽기를 기다렸다.

“중도에 제가 계약을 끝내면 면책 합의도 취소.”

“그날까지 줄어든 빚은 없어.”

삼백육십사 일을 버티고 마지막 날 그만두어도 12억 8천만 원은 그대로 돌아온다.

해원은 부속 합의서로 넘어갔다.

차태헌이 직접 내린 명령에 복종한다.

지정한 시간과 장소로 간다.

계약 관계를 제삼자에게 공개하지 않는다.

짧은 문장들이었다.

정확해서 오히려 해석할 여지가 없었다.

“명령의 범위는요?”

“내가 정해.”

“그럼 무엇이든 시킬 수 있다는 뜻입니까?”

“네가 무엇이든 할지는 네가 정하고.”

해원이 시선을 들었다.

“거부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한 번의 명령을 거부할 수도 있고, 계약을 끝낼 수도 있어.”

“대신 빚이 돌아오겠죠.”

“선택에는 결과가 있으니까.”

공평한 선택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선택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해원은 다시 문서를 읽었다.

제삼자에게 양도할 수 없고, 다른 사람을 계약 이행에 참여시킬 수도 없었다. 해원의 직업과 가족을 직접 훼손하는 명령은 제외되어 있었다.

“사람을 소유한다는 계약은 법적 효력이 없어요.”

“알아.”

태헌은 지나치게 쉽게 인정했다.

“그런데도 서명하라고요?”

“네 몸을 법원에 청구할 생각은 없어.”

그의 손가락이 첫 장의 채무 면제 조항을 짚었다.

“법적으로 효력이 있는 건 이쪽이고.”

“그럼 부속 합의서는 무슨 의미죠?”

“네가 선택했다는 기록.”

“왜 저입니까?”

처음으로 거래 조건이 아니라 자신에 관해 물었다.

태헌은 잠시도 고민하지 않았다.

“갖고 싶으니까.”

그 말뿐이었다.

언제부터인지, 무엇을 보고 그랬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해원은 가족 관련 조항에서 손을 멈췄다.

“제 어머니에게는 절대 알리지 마세요.”

“네가 먼저 말하지 않는 한.”

“채무를 이유로 어머니나 어머니가 만나는 분에게 접근해서도 안 됩니다.”

태헌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펜을 들었다.

계약 및 채무를 이유로 계약 당사자의 가족에게 청구하거나 개입하지 않는다.

그가 직접 문장을 적고 서명했다.

“됐어?”

해원은 추가된 조항을 두 번 읽었다.

엄마는 여기서 빠진다.

엄마가 겨우 시작한 결혼도, 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볼지도 이 방 안의 거래와는 무관해진다.

적어도 일 년 동안은.

해원은 펜을 들었다.

이름 석 자를 쓰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윤해원.

태헌이 그 아래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차태헌.

해원은 펜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앉아.”

몸이 먼저 멈췄다.

아직 의자에서 완전히 떨어지지 않은 채였다.

해원은 태헌을 바라보다가 다시 앉았다.

태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상을 돌아온 그가 해원 앞에 멈췄다. 가까이 서자 의자에 앉은 해원의 시선보다 그의 허리가 먼저 들어왔다.

“거기 말고.”

태헌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바닥.”

해원은 방금 서명한 계약서를 보았다.

종이 위의 ‘복종한다’는 문장은 납작했다.

무릎을 꿇으라는 말은 그렇지 않았다.

바닥에는 짙은 회색 카펫이 깔려 있었다.

무릎이 닿아도 아프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가장 모욕적이었다.

해원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한쪽 무릎을 먼저 굽히고, 이어 다른 쪽을 바닥에 댔다.

시선이 태헌의 구두 끝과 같은 높이까지 내려갔다.

태헌은 곧바로 손을 뻗지 않았다.

해원이 스스로 완전히 자리를 잡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제야 두 손가락이 턱 아래에 닿았다.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앞으로 내 명령에 대답할 때는 알겠습니다가 아니야.”

해원은 그의 손가락이 닿은 자리에 힘을 주지 않으려 애썼다.

“그럼 뭐라고 합니까?”

“누구 말을 듣는지 붙여.”

부속 합의서 마지막 줄에 적혀 있던 사적 호칭이 떠올랐다.

해원은 입술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태헌은 재촉하지 않았다.

턱을 든 채로, 해원이 스스로 말할 때까지 기다렸다.

“네.”

목소리가 생각보다 작았다.

해원은 다시 말했다.

“네, 주인님.”

태헌의 엄지가 턱 아래를 한 번 천천히 눌렀다.

“잘하네.”

그 손은 곧 떨어졌다.

굴욕적이어야 했다.

실제로도 그랬다.

그런데 ‘잘하네’라는 짧은 인정이 몸 안의 전혀 다른 곳에 남았다.

태헌이 다시 책상으로 돌아가 검은색 휴대전화를 가져왔다.

“받아.”

해원은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으로 전화기를 받았다.

화면이 켜졌다.

연락처도, 메시지도 없었다.

저장된 번호는 하나뿐이었다.

태헌이 자기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었다.

해원의 손 안에서 짧은 진동이 울렸다.

화면에 발신자명이 떠올랐다.

주인.

“계약 기간에는 항상 켜둬.”

태헌이 말했다.

“울리면 받아.”

사흘 뒤.

해원은 엄마와 함께 태원가 본저의 현관을 통과했다.

현관에서 기다리던 직원이 두 사람의 외투를 받아 들었다. 이름을 묻지도 않았다. 안쪽의 긴 식탁에는 이미 네 사람분의 자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엄마와 자신이 이 집의 손님으로만 취급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오히려 낯설었다.

“긴장돼?”

해원이 묻자 한수경이 작게 웃었다.

“조금.”

수경은 웃으면서도 해원의 손을 놓지 않았다. 연한 청색 원피스는 사진으로 봤을 때보다 잘 어울렸다.

아버지와 이혼한 뒤 누군가를 만나러 가며 이런 표정을 짓는 엄마를 본 적이 없었다.

“명우 씨는 좋은 사람이야.”

“알아.”

“본 적도 없으면서 뭘 알아.”

“엄마 얼굴 보면 알지.”

수경의 웃음이 조금 더 깊어졌다.

해원은 따라 웃었다.

가방 안쪽에는 검은 휴대전화가 들어 있었다.

전원이 꺼지지 않았는지 벌써 세 번이나 확인한 전화였다.

“오느라 고생했습니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와 함께 차명우가 직접 현관까지 나왔다.

기사를 통해 본 태원그룹 회장과는 인상이 달랐다.

그는 해원보다 먼저 수경을 바라봤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윤해원입니다.”

“수경 씨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명우는 해원의 직업도, 아버지 회사도 먼저 언급하지 않았다.

“이런 자리가 부담스러웠을 텐데 와줘서 고마워요.”

도움을 주겠다는 말도, 이제 한 가족이니 편하게 굴라는 말도 없었다.

해원이 경계할 만한 선 앞에서 정확히 멈추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 말할 수 없었다.

자신에게 12억 8천만 원의 빚이 있다는 것.

그 빚을 없애는 대가로 어떤 계약을 했는지.

엄마가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딸이 어떤 물건이 되었는지.

“아들도 곧 내려올 겁니다.”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명우가 말했다.

“회사 일이 조금 늦어졌다고 해서.”

해원은 별다른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식탁에 앉은 뒤에도 대화는 수경과 명우가 주로 이어갔다. 두 사람은 해원에게 결혼 날짜나 앞으로의 호칭을 강요하지 않았다.

명우가 묻는 것은 일이 바쁜지, 음식은 입에 맞는지 같은 것뿐이었다.

긴장이 조금씩 풀릴 무렵 다이닝룸 문이 열렸다.

먼저 보인 것은 손이었다.

길고 반듯한 손가락이 문 가장자리를 밀었다.

사흘 전 해원의 턱을 들어 올렸던 손.

검은 휴대전화를 건넸던 손.

해원의 손가락이 물잔을 쥔 채 굳었다.

차태헌이 다이닝룸으로 들어왔다.

집무실에서 보았던 정장보다 조금 편한 차림이었다. 넥타이를 풀고 셔츠 단추도 하나 열어두었다.

그런데 해원을 보는 눈만은 달라지지 않았다.

놀람도, 당황도 없었다.

“늦었습니다.”

태헌이 명우에게 짧게 사과했다.

명우가 그를 수경 쪽으로 불렀다.

“인사해. 내 아들 차태헌이야.”

수경이 환하게 웃었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태헌은 수경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사이 해원은 겨우 물잔에서 손을 떼었다.

“그리고 이쪽은 수경 씨 딸.”

명우가 해원을 바라봤다.

“윤해원 양.”

태헌의 시선이 다시 해원에게 닿았다.

그가 테이블을 돌아와 손을 내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해원은 그 말을 이해하는 데 몇 초가 걸렸다.

사흘 전 자신을 바닥에 무릎 꿇린 남자가, 처음 보는 사람처럼 손을 내밀고 있었다.

태헌의 거짓말을 밝히는 순간 자신이 무엇까지 설명해야 하는지도 함께 떠올랐다.

해원은 결국 그의 손을 잡았다.

“윤해원입니다.”

손바닥이 맞닿았다.

태헌의 손은 사흘 전과 같은 온도였다.

악수가 끝나기 직전, 엄지가 해원의 손등을 한 번 눌렀다.

가족들에게는 보이지 않을 만큼 작게.

계약을 잊지 말라는 것처럼.

태헌이 해원의 맞은편에 앉았다.

식사가 다시 시작됐지만 해원은 음식 맛을 느끼지 못했다.

태헌은 수경의 질문에 예의 있게 답했고, 명우가 꺼낸 회사 이야기도 평소처럼 받아냈다.

해원에게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 무관심이 오히려 두 사람 사이에 있는 것을 더 선명하게 만들었다.

“두 사람 나이 차이가 어떻게 되지?”

명우가 문득 물었다.

“태헌이가 서른다섯입니다.”

수경이 해원을 보며 계산했다.

“그럼 일곱 살 차이네.”

그녀의 얼굴에 조금 안심한 듯한 웃음이 번졌다.

“태헌 씨가 오빠네.”

해원의 손이 멈췄다.

“이제 태헌 오빠라고 해야겠어.”

수경은 아무것도 모른 채 딸과 태헌을 번갈아 보았다. 명우도 재촉하지 않고 웃고 있었다.

태헌만 대답을 기다렸다.

집무실에서 해원이 ‘주인님’을 입에 올릴 때까지 바라보던 것과 같은 눈이었다.

해원은 엄마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태헌…… 오빠.”

입안에 남은 호칭이 낯설었다.

태헌은 잔을 내려놓았다.

“천천히 익숙해지죠.”

가족들에게는 배려처럼 들릴 말이었다.

해원에게는 아니었다.

“그러면 식사 끝나고 태헌이가 집을 좀 보여주면 되겠군.”

명우가 말했다.

“수경 씨가 들어오면 해원 양도 자주 올 텐데.”

“그러죠.”

태헌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그 순간 가방 안에서 짧은 진동이 울렸다.

해원은 테이블 아래로 손을 넣어 검은 휴대전화를 꺼냈다.

발신자는 하나뿐이었다.

주인.

화면 위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오빠는 여기서만 불러.]

해원은 반사적으로 맞은편을 보았다.

태헌은 명우와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두 번째 메시지가 도착했다.

[식사 끝나면 동관 이층까지 따라와.]

곧 마지막 문장이 나타났다.

[거기서는 제대로 불러.]

태헌의 손가락이 식탁 위를 한 번 두드렸다.

해원은 검은 화면을 쥔 채 그 손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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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짱이
어디든 따라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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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성재는 이틀 만에 방법을 찾아왔다. "다음 달 입찰까지 안 기다리셔도 됩니다. 금융사 쪽이랑 따로 얘기해서 윤해원 건 포함해서 몇 건만 먼저 넘겨받는 걸로 했습니다. 묶음 정리를 빨리 하고 싶은 건 그쪽도 마찬가지라서요." "조건은요?" "그렇게까지 당기시면 값은 조금 더 쳐줘야 합니다. 입찰로 갔으면 덜 줬을 겁니다." "상관없습니다." 성재가 잠깐 말을 멈췄다. 수익이 안 나는 채권을, 값을 더 주고, 서둘러서 사겠다는 의뢰인이었다. 그래도 성재는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럼 진행하겠습니다." 일주일 뒤, 성재에게서 전화가 왔다. "윤해원 건 넘어왔습니다. 오늘부로 태원에셋파트너스가 채권자입니다." 태헌은 책상 위에 펼쳐둔 서류를 덮었다. "수고했어요." "추심은 기존 일정대로 이어갑니까? 전 채권자 쪽에서 독촉을 몇 번 넣은 기록이 있습니다. 그대로 이어받으면 다음 단계가 지급명령이고요." "기존 추심은 전부 멈추세요." "독촉도요?" "네. 연락도 하지 말고, 서류도 보내지 마세요." 성재는 이번에도 이유를 묻지 않았다. 대신 확인할 것만 확인했다. "채권양도 통지는요? 그건 보내야 합니다. 채권자가 바뀌었다는 건 알려야 하니까요." "그건 정상적으로 보내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그 뒤로는 그냥 들고만 계시는 겁니까?" 태헌은 잠깐 생각했다. "압류 예고 서류는 준비해 두세요." 전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멈추라고 하시면서요?" "보내지는 말고. 서류만 만들어서 저한테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 채무자 연락은 제가 합니다." 통화가 끝났다. 해원의 채권은 이제 태헌이 통제할 수 있는 곳에 있었다. 추심을 멈춘 건 진심이었다. 다른 채권자가 해원의 회사로 서류를 보내거나 월급을 건드릴 일은 없었다. 그 권한을 가진 사람이 태헌으로 바뀌었으니까. 그리고 압류 예고 서류는 해원에게 보낼 게 아니었다. 해원 앞에 놓을 서류였다. 태헌은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 낮에는 오빠, 밤에는 주인님   119화. 내가 가져오면

    수요일 저녁, 해원은 호텔 근처 마트에서 장바구니 두 개를 꽉 채웠다. 이번 주 저녁은 자기가 사기로 했다. 매일 밖에서 사 먹거나 룸서비스를 시키는 건 돈도 돈이지만 질렸다. 데우기만 하면 되는 반찬 몇 가지, 즉석밥, 과일, 생수. 계산대에서 봉투를 받고 나서야 들고 가기 무겁다는 걸 알았다. 카드키로 문을 열고 들어가 봉투를 내려놓았다. 냉장고를 열자 캔 두 개가 이미 자리를 다 차지하고 있었다. 해원은 반찬통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겨우 세 개를 밀어 넣고, 나머지는 포기했다. 태헌은 여덟 시가 넘어 들어왔다. 책상 위에 줄지어 놓인 반찬통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이게 다 뭐야." "저녁이요. 이번 주는 제가 산다고 했잖아요." "사 온다는 게 이런 뜻이었어?" "사 먹는 것도 사는 거죠." 태헌이 웃으며 재킷을 벗었다. 둘은 소파 앞 낮은 테이블에 반찬통을 펼쳐놓고 앉았다. 전자레인지가 없어서 데우지도 못한 잡채는 조금 굳어 있었다. 그래도 해원은 오랜만에 밥 같은 밥을 먹는 기분이었다. "오늘 늦었네요." "회의가 길어졌어. 너는?" "저도 오늘 좀 피곤했어요." 해원은 젓가락으로 잡채를 뒤적이다가 한숨을 쉬었다. "다음 달 예식 하나가 신부 어머니 쪽이 엄청 까다로워요. 이번 주에만 컨셉을 세 번 바꾸셨어요. 팀장님이 오늘 그 건을 다른 플래너한테 넘기자고 하셨거든요. 제가 너무 많이 들고 있다고." "그래서?" "제가 한다고 했죠." "왜." "처음부터 제가 맡은 거니까요. 중간에 사람 바뀌면 신부님만 더 힘들어지고. 그리고 다른 사람한테 넘기면 그 사람이 또 처음부터 시달려야 하잖아요." 해원은 말하면서도 스스로 한심하다는 듯 웃었다. 피곤하다고 투덜대면서 그 일을 자기가 다시 가져온 셈이었다. 태헌이 해원을 보고 있다가 무심하게 말했다. "넌 예전에도 그러더니." "예전에요?" 해원이 고개를 들었다. "언제요?" 태헌의 젓가락이 잠깐 허공에 머물렀다. 아주 짧았다. "계약할 때도 그랬잖아." "

  • 낮에는 오빠, 밤에는 주인님   118화. 처음 기록

    태헌은 조사 업체에 한 가지를 더 물었다. 윤해원의 채권이 지금 어디에 있고, 언제 어디로 넘어가는지.답은 이틀 만에 왔다.해원의 보증채권은 아직 원래 대출을 내준 금융사가 가지고 있었다. 회수를 포기한 다른 부실채권들과 함께 묶음으로 매각될 예정이었다. 입찰은 다음 달 초. 어느 회사가 가져갈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보고서 끝에는 짧은 설명이 붙어 있었다.매각 후 새 채권자는 독촉 및 법적 회수 절차 즉시 진행 가능.태헌은 그 문장을 오래 봤다.채권 매입 회사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잘 알았다. 싸게 사서, 받아낼 수 있는 만큼 받아낸다. 독촉을 시작하고, 지급명령과 압류 절차를 밟고, 결국 급여나 계좌까지 건드릴 수 있었다. 이런 묶음 채권을 사는 회사들은 대부분 그렇게 했다. 그게 그 회사들의 일이었다.모르는 회사의 누군가가 해원의 이름이 적힌 서류를 들고 그녀에게 돈을 갚으라고 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기한을 정하고, 독촉하고, 그녀의 월급과 집에 손을 대는 장면.싫었다.이유를 따져보면 이상한 감정이었다. 해원을 직접 본 건 한 번뿐이었다. 그것도 그녀는 그를 하객 한 명으로 지나쳤다. 말이라고는 식사는 이층이라는 안내 한 마디를 들은 게 전부였다. 그런 여자의 채권을 누가 가져가든 태헌이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게다가 아버지가 만나는 여자의 딸이었다. 이대로 가면 동생이 될 여자였다. 손대면 안 되는 이유로는 그거 하나면 충분했다.예식장 비상계단에서 느꼈던 게 무엇인지 태헌은 이제 정확히 알았다.해원이 아버지가 만나는 여자의 딸이라는 사실은 그의 관심을 꺾지 않았다. 반대였다. 언젠가 가족들 앞에서 동생이라고 불러야 할 여자, 손대면 안 되는 여자라는 사실 때문에 더 원했다.태헌은 그 욕망이 비뚤어졌다는 것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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