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9화

Author: 두담
예서는 BH그룹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닌데도 건물 안을 자기 집처럼 익숙하게 드나들었다.

반면 설희는 원호의 아내로 3년을 살고도 BH그룹 본사에 온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가슴이 찢어질 만큼 아팠을 일이다. 지금은 잠깐 숨이 막히는 느낌만 들었을 뿐 곧 괜찮아졌다.

설희는 곧 핸드폰을 꺼내 조태광에게 전화했다.

조태광은 의외라는 듯 물었다.

[너 출입카드 없어?]

“네.”

조태광은 이마를 문질렀다. 설희의 사생활까지 캐묻지는 않았다.

[내 지인한테 내려가라고 할게. 어차피 조항은 다 협의했으니까 1층에서 바로 서명받으면 돼.]

“네. 번거롭게 해서 죄송해요.”

설희는 1층 로비 소파에 앉았다. 허리를 곧게 펴고 조용히 기다렸다.

그때 회전문 밖에서 또 다른 여자가 들어왔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여자는 설희를 발견하자 곧장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 여우 같은 년! 네가 그 인간이 밖에 숨겨 둔 여자지? 감히 우리 집까지 찾아와? 오늘 너 죽는 줄 알아!”

설희가 고개를 드는 것과 동시에 여자가 생수병을 통째로 끼얹었다.

피할 틈도 없이 차가운 물이 머리부터 쏟아졌다.

아침에 봤던 조태광의 아내였다.

여자는 아침부터 조태광의 차를 계속 뒤쫓았고, 설희가 남편이 밖에 따로 두고 만나는 여자라고 확신한 상태였다.

달려들어 설희의 셔츠 앞단추를 몇 개나 잡아 뜯었다.

“뻔뻔한 불륜녀 같으니라고! 사람들 다 보세요! 요즘은 남의 남편 건드리는 여자들이 본처 집까지 찾아와서 행패를 부린다니까!”

BH그룹 1층은 원래 오가는 사람이 많았다.

여자가 소리를 지르자 주변 시선이 한꺼번에 몰렸다.

설희는 벌어진 셔츠 깃을 손으로 가리고 여자를 밀어냈다.

“저는 조태광 이사님 수행비서예요. 불륜 관계 아닙니다. 다음부터는 사실부터 확인하고 사람을 몰아붙이세요.”

하지만 화가 머리끝까지 난 여자는 아무 말도 듣지 않았다. 다시 손을 뻗어 설희의 머리카락을 잡으려 했다.

설희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곁눈으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것이 보였다.

맨 앞에는 원호가 있었고 옆에는 예서가 있었다. 뒤로 BH그룹 임원 몇 명이 따라 나오고 있었다.

원호는 이쪽을 무심하게 바라봤다.

예서는 놀란 듯 입을 가렸다.

“무슨 오해가 있는 거 아니에요?”

여자는 설희의 옷자락을 붙들고 목이 터져라 울었다.

“불륜녀! 천박한 년! 딱 봐도 남자 홀리게 생겼잖아! 너 조태광이랑 회사에서도 뒹굴었지? 내가 그 인간 곁을 10년도 넘게 지켰는데 결국 돌아온 게 이거야!”

설희는 미간을 찌푸렸다. 떠밀린 탓에 한 발 뒤로 비틀렸다.

“아니라고 말했잖아요.”

여자는 한참 울다가 갑자기 바닥에 무릎까지 꿇었다.

“제발 조태광한테서 떨어져 줘. 내가 이렇게 빌게.”

여자는 로비 바닥에 이마를 대며 거듭 고개를 숙였다. 아내가 남편의 불륜 상대라고 믿는 여자에게 무릎을 꿇고 떠나 달라고 비는 장면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주변에서 핸드폰을 꺼내 촬영하는 사람까지 생겼다.

설희는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와 더 실랑이하고 싶지 않았다. 여기 계속 서 있어 봐야 더 망신만 당할 뿐이었다.

자리를 벗어나려던 설희는 원호가 이미 지나쳐 가는 모습을 봤다.

원호 옆의 예서는 목을 살짝 들고 웃으며 원호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아주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이었다.

그 모습을 본 설희의 걸음이 멎었다.

그 틈을 타 조태광의 아내가 탁자 위 꽃병을 집어 들고 던졌다.

“죽어! 이 더러운 년아!”

원래도 몸이 좋지 않던 설희는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희미한 정신 속에서 누군가 빠르게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헛것을 보는 줄 알았다.

하지만 더 확인할 힘이 없었다. 이마에서 따뜻한 액체가 흘러내려 시야를 흐렸다.

...

설희는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병원이었다.

병상 옆을 지키고 있던 사람은 조태광이었다.

조태광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그 사람이 너한테 따라붙을 줄은 몰랐어. 이번에는 내 문제에 자네가 말려든 거라서 미안하다.”

조태광은 몹시 피곤해 보였다.

“나 밖에 다른 여자 없어. 그런데 아내가 도저히 믿질 않아. 몇 번이나 설명해도 계속 의심하고 싸움을 걸어.”

“나도 버티다 못해 이혼 얘기를 꺼냈는데, 그 뒤로는 오히려 밖에 여자가 있으니까 이혼하려는 거라고 확신하더라. 회사까지 찾아와서 난리 친 지 2년 됐어.”

“BH그룹에서 나온 뒤 처음엔 다른 대기업으로 갔는데, 그 사람이 찾아와 소동을 벌이는 바람에 세 군데에서 연달아 일을 그만뒀어. 그래서 지금 회사까지 내려온 거야.”

설희는 그제야 이해했다. BH그룹 임원까지 했던 사람이 왜 지금 같은 중견 회사에 있는지 이상했는데, 이유가 따로 있었다.

“이사님이 저 병원에 데려온 거예요?”

조태광은 고개를 저었다.

“경찰 연락을 받고 온 거야. BH그룹 쪽에서 누가 신고한 것 같아.”

설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을 잃기 전에 원호를 본 것 같기도 했다.

‘정말 지독한 버릇이네.’

‘이제 사랑하지도 않는다면서, 그런 상황에서도 원호를 떠올리다니.’

“오 비서, 치료비는 내가 다 냈어. 합의금 천만 원도 네 계좌로 보냈고. 이 정도 선에서 정리해 주면 안 될까?”

설희는 사소한 일까지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성격은 아니었다. 조태광을 바라보니 사람 전체에 기운이 빠져 있었다.

3년 전 조태광은 혈기 왕성하고 자신감이 넘쳤다. 36살에 BH그룹 임원까지 올라갔던 사람이다.

겨우 3년이 흘렀는데 훨씬 늙어 보였다.

몸이 늙었다기보다 마음이 닳아 버린 사람처럼 보였다.

아내가 정말 남편의 직장을 계속 망가뜨리는 데 집착해 왔다면, 조태광에게는 떼어 낼 수 없는 거머리처럼 느껴질 만했다.

“이사님 아내분은 지금 어디 계세요?”

“경찰서에 있어. 네가 깨어나서 진술하기를 기다리는 중이고.”

설희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계좌에는 실제로 천만 원이 입금돼 있었다.

당장 돈이 필요한 설희에게 천만 원은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알았어요. 합의할게요. 경찰에도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전달할게요. 대신 아내분께 꼭 말씀해 주세요. 저와 이사님은 직장 상사와 직원 관계뿐이에요.”

조태광은 미간을 찌푸리며 머리를 눌렀다.

“그 말이 통했으면 진작 이렇게까지 안 왔지. 앞으로 마주치면 그냥 피하는 게 나아.”

설희의 머리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심각한 부상은 아니었다.

다친 건 싫었지만 천만 원이 생겼다는 생각에 자신도 황당할 만큼 손해는 아니라는 계산이 들었다.

설희는 저녁 무렵 퇴원했다. 핸드폰을 꺼내 근처 매물부터 검색했다.

지금 손에 있는 돈은 모두 합쳐 1,200만 원 정도였다. 아껴 써야 했다.

병원 입구에 선 설희는 지금 집을 보러 다니기에는 오늘 시간이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호텔에서 하루 자는 게 낫겠네.’

택시를 부르려던 때 검은 차 한 대가 천천히 설희 앞에 멈췄다.

창문이 내려가며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수씨?”

“아주버님?”

원호의 형, 영신이었다.

영신은 차에서 내렸다. 설희의 이마에 감긴 붕대를 보자 미간을 좁히고 손을 뻗었지만 설희가 자연스럽게 피했다.

“어쩌다 다친 거야? 원호는 같이 안 있어?”

영신은 늘 부드럽고 친절했다. 설희에게도 잘해 줬기에 설희는 이 사람을 믿는 편이었다.

“아주버님, 저 원호 씨랑 이혼하려고요.”

영신의 눈에 읽기 어려운 기색이 짧게 스쳤다.

영신은 차 문을 열어 주었다.

“일단 타. 지금 지낼 곳은 있고?”

설희는 뒷좌석에 앉아 창밖을 바라봤다.

“회사 근처에 집 하나 구하려고요.”

“여온로 근처지? 거기 내가 가진 집이 하나 있어. 비어 있으니까 거기 들어가 살아.”

“아주버님, 말씀은 고맙지만 괜찮아요.”

“나한테까지 무슨 사양이야. 안 쓰는 집 많아.”

계속 거절하면 오히려 유난을 떠는 것 같아서 설희의 눈가가 조금 뜨거워졌다.

“그럼... 고맙게 쓰겠습니다.”

영신은 손을 들어 설희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창문은 아직 열려 있었다.

멀리 큰 나무 아래에 차 한 대가 오래 멈춰 서 있었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내 겨울이 끝나면   제30화

    원호는 침대 옆에 앉아 설희의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설희가 왜 우는지는 알 수 없었다.“무슨 꿈을 꾸는 거야?”원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설희가 대답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이럴 때만 두 사람 사이에 날 선 대립이 없었다.원호는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나왔다. 설희는 똑바로 눕지 않고 옆으로 돌아 몸을 잔뜩 웅크린 채였다. 마치 자신을 보호하려는 자세처럼 보였다.원호는 침대에 누워 설희를 힘으로 끌어와 품에 안았다.예전의 설희는 원호 품에 파묻혀 자는 걸 좋아했다. 새벽에 깨서 옆자리가 비어 있으면 집 안을 돌아다니며 원호를 찾기도 했다.당시 원호는 너무 바빴다. 밤새 전화를 붙들고 일하는 날이 많았고, 설희의 잠을 깨울까 봐 단지 안을 걸어 다니거나 베란다로 나가 통화하곤 했다.설희는 원호를 찾아내도 아무 말 없이 곁에 붙어 함께 걸었다.이제는 원호 품에 있는 걸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오히려 불편해 보였다.원호가 몇 번이나 몸을 돌려 자신 쪽으로 안으려 해도 설희는 웅크리며 제 몸을 끌어안았다.화가 난 원호가 침대 옆 조명을 켰다. “지금 자는 척하는 거야?”하지만 설희는 정말 잠들어 있었다. 열 때문에 뺨에 붉은 기가 올라와 있었고 긴 속눈썹은 얌전히 내려앉아 있었다. 잠든 모습이 아주 유순해 보였다.그 모습을 본 원호는 몸을 멈췄다. 마음이 금세 약해져 아무 말 없이 조명을 껐다. 뒤에서 설희의 허리를 감싸안은 채 그대로 잠들었다.설희가 눈을 떴을 때는 아래쪽이 조금 불편했다.몸을 조금 움직이자 연고가 닿은 곳에서 서늘한 감각이 느껴졌다.옆으로 돌아누운 뒤에야 바로 곁에 누군가 있다는 걸 알아챘다.설희는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꿈이 아니었다. 원호가 정말 같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지난 3년 동안 설희는 잠결에 수도 없이 눈을 뜨고 옆으로 팔을 뻗었다. 하지만 침대 반대편은 언제나 텅 비어 있었다.처음에는 무너질 듯 괴로워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혼자 회복하는 법을 배웠다.이제는 혼

  • 내 겨울이 끝나면   제29화

    “내가 어떻게 알아?”원호는 설희의 손을 잡고 있었다. 이마에는 아직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재우도 원호가 다급하다는 걸 알아 우선 체온부터 쟀다. 열은 없었다. “따뜻한 물에 설탕 좀 타서 가져오라고 해. 저혈당이야.”원호는 바로 도우미에게 당이 든 따뜻한 물을 가져오라고 했다.재우가 계속 설희의 상태를 살피는데 설희가 작게 울면서 아래가 아프다고 중얼거렸다.흰 의료용 장갑을 끼고 있던 재우가 그 말을 듣자 원호를 바라봤다.원호는 드물게 난처한 기색을 보이며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못 참았어.”재우는 아무 말 없이 이불을 걷어 상태를 확인하려 했다. 원호가 바로 손목을 움켜잡았다.“어딜 보려고?”재우는 미간을 좁혔다가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고 연고 하나를 꺼냈다. “하루에 세 번 발라. 찢어진 데가 심한지 먼저 확인하고, 가벼운 상처면 금방 나을 거야.”“원래 몸이 약한 데다 몇 년 전 교통사고 후유증도 아직 남아 있어. 요 몇 년 제대로 먹지도 않은 것 같으니까 당분간 몸부터 회복시켜.”원호는 연고를 받아 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재우가 돌아간 뒤 원호는 먼저 대야에 따뜻한 물을 받아 왔다. 수건으로 설희의 몸을 꼼꼼히 닦아주었다. 마지막에 이불을 걷고 아픈 곳을 직접 확인한 뒤 연고도 발라 줬다.눈으로 보기에는 크게 다친 곳이 없었다. 저혈당 증세까지 겹쳐 울고 몸부림치며 할퀸 모양이었다.원호는 그제야 안도했다. 이것저것 챙기고 나니 밤 열두 시가 가까워져 있었다.도우미가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원호는 수건으로 설희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닦아주고 있었다. 깨지기 쉬운 물건이라도 다루듯 손끝까지 정성스럽게 닦았다.지금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얼마 전에 전부 새로 바뀌었다. 이전 도우미들은 모두 내보낸 뒤였다.“대표님, 설탕물은 더 필요하세요?”“됐어. 치워.”원호는 설희를 바라봤다. 안색이 한결 나아진 걸 확인한 뒤에야 수건을 대야에 내려놓았다.도우미는 오래 쳐다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바로 그릇을

  • 내 겨울이 끝나면   제28화

    설희는 어이가 없어 원호를 바라보았다. “곧 이혼할 거야. 당신이 이혼 서류에 서명만 안 하고 있을 뿐이지. 우리 결혼한 지 3년인데 얼굴 보고 산 날보다 따로 지낸 날이 더 많아.”“당신도 대부분의 시간을 밖에서 예서랑 보냈잖아. 그렇게 진예서를 못 놓겠으면 내가 자리 비켜 주겠다는데, 당신은 기꺼이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니야?”원호는 설희의 차분한 얼굴을 보다가 팔을 잡아 거칠게 끌어당겼다. “지금 질투하는 거야?”3년 전부터 설희가 울고 소리치며 따질 때마다 원호는 늘 이런 태도였다. 두 사람 사이의 문제를 정면으로 풀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설희가 통제력을 잃고 망가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데 익숙한 사람처럼 굴었다.설희는 지쳤다. 더는 다툴 힘도 없었다.“배원호, 당신이 진예서랑 침대가 부서지도록 뭘 하든 이제 나랑 상관없어. 내가 원하는 건 단 하나, 이혼이야.”말이 떨어지자 턱에 날카로운 통증이 번졌다.앞좌석에 있던 천현은 이미 자리를 비운 뒤였다. 차 안에는 두 사람만 남아 있었다.원호의 눈은 폭풍이 몰아치기 직전의 고요처럼 위험했다. 설희가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듯했다.원호는 설희의 목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눈가가 붉어진 걸 보자 손에 들어간 힘을 천천히 풀었다. “예전에는 내가 회식 때문에 조금만 늦게 들어와도 개처럼 내 옷 냄새를 맡았잖아. 다른 여자 향수 냄새라도 날까 봐.”“그때는 나를 그렇게 꽉 붙잡고 살더니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해? 정말 그렇게 빨리 이혼하고 싶어?”입가에는 웃음이 걸려 있었지만 눈에는 웃음이 없었다. 뒤엉킨 감정 속에는 분명 증오까지 섞여 있었다.설희는 오히려 황당했다. ‘배원호가 무슨 자격으로 나를 미워해?’3년 동안 설희를 구름힐에 내버려 두고, 해온재에는 다른 사람을 숨겨 두고, 예서와 밖에서 붙어 다닌 쪽은 원호었다. 명목뿐인 아내 설희는 강문시 사교계의 웃음거리가 됐다. 모두가 설희를 나쁜 여자라고 욕했지만, 원래 그 자리의 마땅한 주인은 설희였다.설

  • 내 겨울이 끝나면   제27화

    예전 같았으면 설희는 바로 말대꾸했을 것이다. 원호가 성가시다고 생각하면서도 한마디는 받아쳤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원호를 몇 번 쳐다보는 것조차 역겨웠다. 설희는 손을 다 씻고 일어나 그대로 가려 했다.오늘 제대로 먹은 게 없어서인지 저혈당 증세가 올라왔다. 갑자기 눈앞이 어두워지며 그대로 쓰러질 뻔했다.예상했던 통증은 오지 않았다. 원호가 설희의 허리를 붙잡아 품에 안았다.원호의 값비싼 수트에도 흙물이 묻었다. 급히 차에서 내리느라 우산조차 챙기지 못해 가는 빗줄기가 두 사람 위로 떨어졌다.운전석에 있던 천현이 그 모습을 보고 바로 내려 우산을 펼쳤다.원호가 타고 다니는 차는 롤스로이스였다. 차량에 전용 우산이 기본으로 들어 있었는데, 따로 사면 가격이 2천만 원에 가깝다는 말까지 돌았다.설희는 머릿속의 어지럼증이 조금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손을 들어 원호를 밀어내려 했다.하지만 원호는 오히려 더 세게 끌어안더니 거의 끌다시피 차 안으로 데려갔다.“놔!”몸싸움하던 중 설희가 들고 있던 노트북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액정이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설희의 몸이 굳었다. 바로 고개를 숙여 확인했다. 조금 전부터 전원조차 들어오지 않던 노트북은 이제 더 처참하게 망가져 있었다.원호는 그 틈에 차 문을 닫았다. 설희가 굳은 표정으로 노트북만 확인하자 손을 뻗어 가져갔다.“내 노트북 건드리지 마!”설희는 제 것을 빼앗길까 경계하는 사람처럼 노트북을 끌어안고 차갑게 원호를 노려봤다.그 눈은 원수를 보는 것처럼 서늘했다.원호는 그 시선을 받고 잠시 굳었다. 곧 속에서 불길이 치솟듯 화가 올라와 힘으로 노트북을 빼앗았다.설희는 거의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달려들어 되찾으려 했다. 하지만 기운이 없어서 원호가 한 손으로 막는 것조차 뚫지 못했다.원호는 설희보다 노트북을 잘 알았다. 몇 군데만 확인하고도 하드웨어까지 완전히 망가졌다는 걸 알아챘다.“못 고쳐. 다음에 새 걸로 사.”몸부림치던 설희가 그대로 멈췄다. 입꼬리를

  • 내 겨울이 끝나면   제26화

    설희는 노트북을 품에 안고 수리점으로 향했다. 사라진 문서를도 되살릴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수리 기사는 노트북 안을 한참 살펴보다 미간을 찌푸렸다.“고객님, 이 문서는 디스크 전체를 암호화한 다음 포맷한 흔적이 있어요. 웬만한 전문가가 와도 복구하기 어렵습니다.”“저보다 실력이 좋은 분이 데이터를 일부 살려 낸다 해도 원본 암호를 풀 수가 없어요. 안에 정말 중요한 자료가 들어 있었나요? 꼭 필요한 게 아니라면 포기하시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설희는 머릿속에서 큰 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목이 바짝 말랐다.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정말 복구가 안 되나요?”수리 기사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게다가 이 노트북은 출시된 지 꽤 오래됐어요. 지금은 완전히 구형이고요.”이 노트북은 설희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 원호가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모아 사 준 것이었다.그때 두 사람은 형편이 너무 어려워 동전 하나도 아껴 써야 했다. 그래서 선물을 받았을 때 설희는 기쁘기보다 마음이 아팠다. 당시에 원호는 두 사람의 생활비와 등록금, 각종 학비까지 감당하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설희는 그 노트북을 줄곧 소중하게 다뤘다. 지난 3년 동안 여러 차례 켜 보기는 했지만 늘 안방에 두었고 밖으로 가지고 나간 적도 없었다.실수로 물 한 방울이라도 떨어지면 오랫동안 정성스럽게 닦아 냈다.수리 기사가 계속 점검하던 중 화면이 갑자기 완전히 꺼졌다.“고객님, 이 정도면 적어도 9년은 된 제품이에요. 지금까지 큰 고장 없이 버틴 걸 보면 당시에도 200만 원이 훌쩍 넘는 고급 모델이었을 겁니다.”“지금 형편이 아주 어려워 보이시지도 않는데 새로 하나 장만하시는 게 나아요.”설희는 입술만 달싹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멍하니 점검비를 결제한 뒤 노트북을 품에 안고 밖으로 나왔다.바깥은 어느새 어두워졌고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강문시는 이 계절이 돌아오면 비가 잦아 공기까지 눅눅하고 후텁지근했다.설희는 길

  • 내 겨울이 끝나면   제25화

    설희는 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뒤에 있는 책상을 손으로 짚지 않았다면 그대로 주저앉았을 것이다.가슴도 아팠다. 감정이 너무 크게 요동치면 정말 속까지 메스꺼워지는 모양이었다.안색이 지나치게 창백해 보였는지 원호는 설희를 더 자극하지 않았다. 대신 다가와 설희를 부축했다.“됐어. 네가 거짓말한 건 넘어갈 테니까 이제 예서랑 그만 부딪쳐.”설희는 한 손으로 책상을 짚은 채 원호를 거칠게 밀어냈다.원호는 두 걸음쯤 뒤로 밀렸다. 얼굴에는 서늘하고 위태로운 기운이 옅게 번졌다.설희는 노트북을 품에 안았다. 눈물을 억지로 참으며 그대로 문밖으로 나가려 했지만 원호가 팔을 잡아 다시 끌어당겼다.“어디 가?”설희는 한마디도 섞고 싶지 않았다. 원호의 발등을 힘껏 밟았다.통증에 원호의 손이 바로 풀렸다.설희는 노트북을 안고 밖으로 나왔다. 아래층 거실을 지나는데 소파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보였다.누군가 비웃듯 입을 열었다.“어이, 드디어 원흉이 내려오시네. 무슨 낯으로 다니는지 모르겠다. 수청 누나를 저렇게 만들어 놓고 이제는 사람 뺨까지 때려? 원호 형이 막아 주니까 그렇지, 아니었으면 진작 가만 안 뒀어.”“변변찮은 집안 출신이라 그런지 하는 짓도 딱 그 수준이네. 머릿속에는 하루 종일 남자 생각밖에 없으니까 보는 여자마다 경쟁자로 보이지.”“...”그대로 나가려던 설희는 그 말을 듣고 걸음을 멈췄다. 성큼성큼 소파 앞 테이블로 다가갔다.민혁이 바로 일어나 예서 앞을 막았다. 어두운 표정으로 설희를 노려봤다.“뭐 하려고?”설희의 표정은 고요했다. “내가 보는 여자마다 경쟁자로 보인다고 했지? 좋아. 진예서, 맹세해 봐. 배원호 안 좋아한다고.”“배원호한테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네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평생 불행해질 거라고 맹세해.”민혁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이마에 핏줄이 설 만큼 화가 치밀어 본능적으로 손을 들려다가, 곁눈질로 원호가 내려오는 걸 봤다.공중에 올라갔던 손이 그대로 멈췄다. 민혁은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