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현은 큰 오빠가 갔다가 다시 오는 줄 모르고 예준하와 함께 호텔 1층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예준하는 그녀에게 주스 한 잔 시켜주고 본인은 커피로 주문했다.“지금 커피 마시면 저녁에 잠이 와?”성소현은 디저트 몇 개 더 시켰다.“응, 우리 같은 사람들은 업무량이 워낙 많다 보니 커피 없인 새벽까지 못 버텨.”그는 업무 일정이 꽉 차서 매일 밤늦게까지 일해야 한다.만약 인생의 중대한 일을 해결할 기회가 생긴다면 그는 당연히 시간을 짜내서 한가한 대표님으로 되려 할 것이다.“소현아.”두 사람이 막 얘기 나누려던 찰나 성기현이 들어왔다. 그는 창가 쪽에 앉은 두 사람을 향해 걸어오며 여동생을 불렀고 고개 돌려 큰오빠를 본 순간, 성소현은 마치 나쁜 짓 하다가 가족에게 걸린 듯한 착각이 들었다.‘아니지, 방금 호텔 입구에서 마주쳤잖아. 오빠는 나랑 준하가 커피 마시는 걸 알고 있었어. 마음 찔릴 것 없다고.’그녀는 이렇게 생각하며 대범하게 큰오빠에게 의자를 빼주었고 오빠가 자리에 앉자 넌지시 질문을 건넸다.“오빠, 뭐 마실래?”“대표님.”예준하가 가볍게 웃으며 인사했다.성기현은 그를 힐긋 쳐다보다가 여동생에게 말했다.“나 방금 차 많이 마셔서 지금은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 그냥 앉아있으면 돼.”성소현은 자신이 주문한 디저트를 오빠 앞으로 내밀었다.성기현은 디저트를 입에 대지도 않았다. 그는 오직 여기 앉아 둘 사이를 훼방하려는 속셈이었다.예준하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라 성기현도 그를 좋게 보고 예진 그룹과 협력할 의향도 있다. 하지만 예준하가 전씨 그룹을 선택했고 그 뒤로 성기현도 예준하와 더 깊은 교류가 없었다. 만약 예준하가 관성의 유능한 청년이라면 성기현은 달갑게 여동생과 그를 만나게 해 줄 것이다.다만 아쉽게도 예준하는 A시 사람이고 두 도시는 거리가 매우 멀어 자차로 고속도로를 달려도 무려 일여덟 시간이나 걸린다.하나뿐인 여동생을 그렇게 멀리 시집보내고 싶지는 않았다.하여 두 사람이 아직 감정이 무르익기 전에 자연스럽게
중요한 건 여동생이 예준하와 나름 잘 어울리고 있다.“저는 우리 예진 그룹의 관성 쪽 사업을 책임지고 있어 관성에 장기적으로 머물러요. 여기 정착하는 거나 다름없죠. 가끔 예진 리조트에 돌아가면 손님 같은 기분이 든다니까요. 엄마는 제가 예진 리조트를 호텔로 여기고 두 밤 자면 바로 가버린다고 자주 말씀하시더라고요.”성소현은 손을 테이블 밑에 내리고 큰오빠를 툭툭 찌르더니 오빠 곁에 다가가 나지막이 말했다.“오빠, 준하 씨한테 왜 자꾸 사적인 질문만 해? 너무 뜬금없잖아, 두 사람 친한 것도 아니면서.”그녀와 예준하도 자주 만나다 보니 조금 익숙해졌을 뿐이다.성기현은 동생을 빤히 쳐다봤다.‘얘가 정말 예준하에게 관심이 하나도 없나? 내가 지금 미리 염탐해 주는 거잖아.’성소현이 전태윤에게 적극 구애하다가 결국 상처만 남은 채 남들의 웃음거리로 전락한 것만 생각하면 성기현은 가슴이 아팠다. 동생이 예준하에게 딴생각이 없는 것도 이해가 됐다. 괜히 또 짝사랑이 될까 봐 그러겠지.예준하도 딱히 어떠한 감정을 드러내진 않았다. 아무래도 성기현이 너무 앞서간 듯싶었다.생각을 마친 성기현은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두 남자 모두 대기업 대표이긴 하지만 예준하가 전씨 그룹과 깊이 협력하고 있어서 성기현은 그와 일적인 얘기를 하지 않았다. 경계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하지만 그렇다고 자리를 떠난 것도 아니다.성기현은 동생이 주스와 디저트를 다 먹을 때까지 줄곧 옆에 있었다.“소현아, 오늘은 예정이랑 함께 투자건 의논하지 않아?”성기현은 동생에게 이젠 갈 때가 되었다고 눈치를 줬다.성소현은 시계를 보더니 오빠에게 대답했다.“오늘 안 가. 내일 다시 예정이랑 효진 씨 찾아갈 거야. 오빠 회사 안 바빠?”“바빠.”‘다 널 지켜주기 위해서잖아.’“오빠 바쁘면 먼저 가서 일 봐. 난 준하 씨 데려다줘야 해.”“네가 데려다준다고?”성기현은 한심하다는 듯이 물었다.이때 예준하가 겸연쩍게 웃으며 한마디 끼어들었다.“제가 소현 씨 차 타고 왔거든요.”
관성중학교 교문 앞.세단 몇 대가 바깥의 큰 도로에서 교문 앞 골목길로 굽어 들어오더니 학교에서 몇백 미터 떨어진 곳에 주차했다.선두의 경호차에서 경호원 한 명이 내려와 뒷좌석 차 문을 열어주며 차갑게 말했다.“아가씨, 관성중학교에 도착했습니다.”여운초는 말없이 옆에 놓인 시각장애인 지팡이를 집어 들고 옆자리에 놓인 몇 가지 선물까지 어루만졌다.선물은 여씨 사모님이 준비한 거라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여운초는 잘 모른다.여씨 사모님이 꽃가게에서 그녀를 데려왔다.두 번째 차는 여씨 사모님 전용차였다. 그녀는 도어를 내리고 방금 그 경호원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운초한테 말해. 차에서 내려 앞으로 3백 미터 가면 왼쪽 첫 번째 가게가 하예정 서점이라고.”경호원은 알겠다며 공손히 말한 후 다시 경호차 앞으로 걸어갔다. 여운초는 이미 몇 가지 선물을 들고 차에서 내렸지만 제자리에 서서 방향을 잡지 못했다.그녀는 중학교1, 2학년, 그리고 3학년 첫 학기까지 관성중학교를 다녔는데 졸업을 앞두고 특수 학교로 전학 갔다. 바로 그때 실명했으니까.전학한 이후로 그녀는 십 년 동안 관성중학교에 돌아오지 못했다. 학교를 증축하여 새로운 강의동, 기숙사동 등 건물을 많이 지었고 현재는 관성의 특목중학교 중 하나로 꼽힌다.예전에도 교문 앞에 상가가 꽤 많았는데 학교 앞에서 가게를 열 수 있는 사람은 호락호락한 자가 아니라고 했다. 배후에 후원자 없이는 아무나 교문 앞에 가게를 열지 못한다.전씨 일가의 사모님이 이곳에서 몇 년 동안 서점을 연 것도 전씨 일가가 뒷받침해 주기 때문이다!“아가씨, 여기서부터 서점까지 300미터 떨어져 있어요. 서점은 왼쪽 첫 번째 가게에요.”경호원은 여씨 사모님의 말을 그대로 여운초에게 전달했다.“여운초, 내 말대로 동생 대신 가서 싹싹 빌어. 운별이가 무슨 잘못을 했든 걔는 영원히 네 친여동생이야!”여씨 사모님이 싸늘한 말투로 여운초에게 말했다.그들 부부는 전씨 그룹에 찾아가 전태윤을 만나고 싶었지만 매정하게 거절당
그렇게 겨우 여운초를 살려뒀지만 엄마의 책임을 다하진 못했다. 분명 제가 낳은 아이이면서도 이 딸에게 사랑의 감정이라곤 생겨나지 않았다. 전남편이 죽은 후 여운초는 아직 철도 안 든 어린애라 한창 엄마한테 애착할 때지만 아이가 울면서 안아달라고 해도 듣는 척을 안 할 뿐만 아니라 짜증 나면 발로 걷어차기까지 했다.그 광경에 가정부도 식겁할 따름이었다.하지만 아무리 싫어하고 때리고 욕해도 어린 여운초는 끝까지 울면서 엄마를 찾았다.“엄마, 안아줘요.”전남편이 죽은 후 그녀는 더 이상 연기할 필요가 없어 여운초를 안아주는 건 더더욱 불가능했다.가정부에게 시켜 여운초를 안아가라고, 제 눈앞에서 사라지라고 했다. 큰딸 얼굴만 보면 짜증이 밀려왔으니까.여운초는 부모님의 장점만 쏙 빼닮았다. 친아빠 같기도 하고 여씨 사모님도 많이 닮았지만 사모님은 끝까지 이 아이를 싫어했다.가정부는 여운초와 함께한 시간이 길어 이 아이에게 감정이 생겨났다. 여씨 사모님이 갑자기 화내고 또 여운초를 발로 차버릴까 봐 그 후론 사모님만 집에 계시면 가정부가 갖은 방법으로 운초를 달래 밖에서 놀게 했다. 어떻게든 사모님과 마주치는 일이 없어야 한다.안 그러면 여운초는 또 울면서 엄마한테 안아달라고 응석을 부릴 테니까.그렇게 서서히 여운초는 엄마의 품을 갈망하지 않고 종일 함께 있는 가정부와 더 가깝게 지냈다.다만 여씨 사모님은 여운초와 가정부가 모녀처럼 가까워진 걸 보더니 가정부를 바로 해고했다. 여운초는 울며불며 가정부를 해고하지 말라고 빌었고 심지어 무릎까지 꿇었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여씨 사모님은 그토록 여운초를 미워했다.왜냐하면 그녀는 여운초의 친아빠를 사랑하지 않으니까. 그녀가 사랑하고 결혼하고 싶은 사람은 줄곧 현재 남편이지만 부모님이 유독 그녀의 전남편을 마음에 들어 하셨다...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결혼했으니 둘 사이에 태어난 딸 여운초에게도 애정이 생기지 않기 마련이다.여운초는 엄마의 표정을 볼 수 없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 속에 원한과 사악함이
여운초는 예전에 점원에게 부탁해 자신의 보폭을 재어달라고 했다. 앞이 보이지 않고 보폭이 작아서 1미터를 네 걸음 걸어야 하니 300미터 거리면 정확한 숫자는 몰라도 최소한 1200보는 걸어야 한다.여운초는 속으로 묵묵히 걸음 수를 세며 아주 느리게 걸어갔다.여씨 사모님은 그녀가 빨리 걷든 늦게 걷든 신경 쓰지 않았다.도어를 올린 후 여씨 사모님은 남편에게 전화했다.“여보, 나 지금 운초 시켜서 예정의 가게로 보냈어요.”여 대표가 알겠다고 대답했다.“운초한테 잘 말해야 운별이를 위해 사정해 줄 거야.”“내가 하라는 일 감히 안 할 리가 있겠어요?”여 대표는 말문이 막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여보, 사람 좀 더 찾아봐서 운별이 일단 꺼낼 수 있을지 알아봐 봐요. 걔가 어릴 때부터 예쁘게 자라서 그 안에서 어떻게 그 고생을 겪겠어요? 안에서 고생할 것만 생각하면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진다고요. 이게 다 여운초 때문이에요. 그년이 운별이를 해쳐서 하예정과 갈등을 빚게 한 거라고요. 운별이도 억울함을 당해서 하예정 그년에게 복수하려 했는데 계획을 제대로 세우지 못하다 보니 그년한테 약점 잡힌 거예요. 여운초 이년 진짜 확 죽어버렸으면 좋겠어요! 대체 왜 안 죽는 거예요? 이 빌어먹을 년은!”“여보.”여 대표가 전화기 너머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지금은 화풀이할 때가 아니야. 당신이 속상하고 딸 걱정하는 거 나도 이해해. 마음 아픈 건 나도 마찬가지야. 일단 운초가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자. 하예정 그년이 끝까지 기소하겠다고 나오면 그때 다시 방법을 연구해 봐.”여씨 사모님은 마음속 원한을 꾹 짓누르고 알겠다며 대답했다.“일 봐요, 그냥 당신한테 얘기하느라고 전화했어요.”말을 마친 여씨 사모님은 전화를 끊었다.하예정은 여운초가 온 걸 몰랐지만 그녀를 따라다니던 두 명의 경호원은 서점 문 앞에 의자를 두 개 옮겨와 앉아있다가 곧바로 여운초를 발견했다.그리고 암지에서 사모님을 지키고 있던 동료들도 곧장 문자를 보내 여운초의 신분을 확
곧이어 누군가가 재빨리 이리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걸음 소리를 들어보니 여자인 듯싶었다.“운초 씨.”목소리가 조금 익숙한 게 하예정인 것 같았다.“운초 씨.”하예정이 황급히 달려와 허리 숙여 그녀를 부축했다.“괜찮아요 운초 씨?”“네, 괜찮아요.”진짜 하예정이었다.‘경호원 한 말이 틀렸네. 만약 300미터 거리라면 예정 씨가 이렇게 빨리 올 수 없어.’하예정의 서점은 아마 이 근처인 듯싶었다.심효진은 얼른 여운초의 시각장애인 지팡이를 줍고 영양보조제 두 박스와 화장품 기초세트 두 개가 들어있는 선물 봉투까지 챙겨 들었다.하예정은 그녀에게 왜 여기 왔는지 묻지 않고 일단 심효진과 함께 부축해서 서점으로 돌아갔다. 여운초를 의자에 앉힌 후 그녀는 선물 봉투를 보면서 질문을 건넸다.“여 사모님이 오라고 했어요?”“네.”여운초가 나지막이 대답했다.심효진은 그녀에게 온수 한 잔 따라서 손에 쥐여줬다. 여운초는 심효진에게 고맙다고 말했다.“여긴 심효진이고 제 절친이에요.”하예정이 그녀에게 심효진을 소개해줬다.여운초는 심효진이 물을 건넨 방향으로 고개 돌려 활짝 웃었다.“반가워요, 효진 씨.”심효진은 그녀의 예쁜 얼굴을 바라보며 이렇게 예쁜 소녀가 시각장애인이라는 게 참 안타까웠다.여운초가 물을 다 마신 후 하예정이 담담하게 물었다.“사모님이 운초 씨더러 운별 씨 대신 와서 사정하라던가요? 왜 본인이 직접 오지 않았대요?”“전태윤 씨가 저희 부모님을 예정 씨 가게로 못 오게 하셨어요. 전씨 그룹으로 찾아갔는데 만나주지 않으셨고요.”여운초는 숨김없이 다 털어놓았다. 비록 가족이라 해도 굳이 그들 부부를 위해 숨길 필요는 없으니까.“이 일은 나로 인해 벌어진 일이니 반드시 내가 나서서 수습해야 한대요. 예정 씨, 이번 일은 확실히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에요. 내가 예정 씨를 번거롭게 했어요. 이 사건에 휘말리게 해서 정말 죄송해요.”여운초는 하예정을 향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그녀가 줄곧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 보니 하예정은
하예정은 이미 이 사건을 경찰에 신고해 경찰서에서 알아 처리하도록 했다. 절대 사적으로 여씨 일가에 손해배상금을 받을 일이 없다.무너져버린 차는 여씨 일가에서 새 차로 배상하면 받겠지만 반드시 같은 브랜드의 새 차여야 한다.그 차는 작년 가을에 사서 이제 고작 반년밖에 운전하지 못했다.여운초는 묵묵히 은행카드를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하예정도 잠시 침묵하다가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운초 씨, 내가 끝까지 여운별을 기소하면 운초 씨는 집에서 잘 지낼 수 있어요?”“조금 힘들긴 하겠죠. 하지만 난 그 집에서 늘 그렇게 지내왔어요. 예정 씨가 운별이를 기소하든 안 하든 다들 나한테 항상 같은 태도였어요.”여운초가 차분하게 대답했다.“예정 씨 하고 싶은 대로 해요. 나 신경 안 써도 돼요. 이번 일은 어쨌거나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에요. 예정 씨는 날 도와주고 구해주기 위해 운별이를 건드렸고 운별이는 또 돈을 써가면서 사람을 불러 예정 씨 차를 가로막고 다치게 했죠. 그건 엄연히 운별의 잘못이에요. 잘못을 저질렀으면 벌을 받아야죠. 내가 운별이 대신 사정하면 예정 씨가 날 도와준 은혜를 배신하는 거나 다름없어요. 고모 이외에 이렇게 날 도와준 사람은 십 년 만이에요.”그녀는 차라리 그때로 돌아가 여운별과 싸우더라도 절대 여운별을 위해 하예정에게 기소를 포기해 달라고 사정하고 싶진 않았다.그녀의 마지막 한마디에 하예정은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여운초는 재벌가에 태어났지만 전혀 누리지 못했다. 친아빠는 일찍 죽고 친엄마는 웬만한 새엄마보다 악독해 모성애라곤 전혀 없다.하예정은 여운초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운초 씨를 처음 본 순간부터 옛 친구처럼 친근감이 들었고 빨리 친구 맺고 싶었어요. 앞으로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지 말만 해요.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무조건 도울게요. 도울 수 없으면 사람을 불러서 방법을 생각해서라도 도울게요.”전이진은 참을성이 대단했다. 이렇게 오랫동안 꿈쩍하지 않았으니 말이다.하예정이 남자였다면 일찌감치 여운초를
고모는 신의가 최근 A시에 자주 나타난다고 들어서 신의에게 조카의 눈을 보일 생각이다. 신의가 아니라 그 신의의 제자라 해도 제발 한 번만 조카의 눈을 봐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신의 사제는 고모의 마지막 동아줄이다.오랜 시간 치료를 받으며 그녀는 사실 아주 조금 보이긴 하지만 여전히 시각장애인이나 다름없다. 그래도 다시 시력을 되찾을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날아갈 것 같고 병 치료에 임할 자신이 생긴다.다만 이 일은 고모 이외의 그 누구에게도 감히 알릴 수 없다.어찌 됐든 그녀는 지금 여전히 시각장애인처럼 앞이 잘 안 보이고 아예 안 보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앞이 안 보이는데 가게 안에 다른 사람이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여운초가 웃으며 답했다.“아까 들어올 때 그분들 발소리를 들었어요. 발걸음이 묵직한 게 남자 같아서 예정 씨 경호원일 거로 예상했어요.”하예정과 심효진은 서로를 마주 봤다.시각장애인은 청력이 뛰어난다더니 정말 그랬다.하예정은 경호원 두 명을 불러와 여운초의 말대로 하라고 분부했다. 그녀는 경호원이 너무 과격해서 여운초를 다치게 할까 봐 친히 당부했다.“겉보기만 거칠게 하면 돼요. 꼭 자제해요, 운초 씨 다칠라.”여운초는 앞이 보이지 않지만 귀엽고 작은 얼굴이 남자의 보호 본능을 자극한다.하예정은 도련님 대신 그녀를 잘 보살피고 싶은 충동까지 생겨났다.“저희 힘 조절 잘하겠습니다.”두 경호원은 여운초를 서점 밖으로 ‘몰아냈고’ 그녀가 챙겨 온 선물 봉투도 전부 들고 나왔다.곧이어 그녀를 여씨 사모님 차 앞에 끌고 가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한 경호원이 선물 봉투를 그녀에게 내던졌고 다른 한 경호원은 ‘꺼져’라고 괴성을 질렀다!그 경호원은 쓸데없는 말이 많은 편인데 차가운 말투로 쏘아붙였다.“우리 사모님이 아무리 잘해주면 뭐해. 당신 때문에 사모님 차까지 망가졌어! 그럼에도 뻔뻔스럽게 찾아와 용서를 빌어? 파렴치한 것, 당장 꺼져!”두 경호원은 곧장 자리를 떠났다.여씨 사모님은 두 경호원이 떠난 후에야
“할머니, 제가 뭐가 똑똑해요, 전 진짜 멍청해요. 할머니야말로 대단하신 분이죠.”전이혁은 할머니께 아부하는 멘트를 던졌다.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아부라고 할 수 없는 게, 할머니는 정말 대단한 인물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전씨 가문 자손들은 이미 충분히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할머니의 손바닥 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할머니는 마치 삼장법사였고 자손들은 손오공 같은 존재로 손오공이 아무리 강해도 삼장법사 앞에선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할머니, 저 진짜 꼼수 같은 거 부리지 않아요.”“그건 네 사정이고. 어떻게 하든 네 마음대로 해. 할머니는 이미 너에게 신붓감을 골라줬고, 대시하든 포기하든 그것 역시 너에게 달린 일이야. 1년이면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줬다고 생각한다.”“하지만 한 가지 경고할게. 지금까지 우리 전씨 가문에는 일편단심인 남자만 있었을 뿐 양다리를 걸치는 남자는 없었어. 네가 전씨 가문의 가풍을 망가뜨리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전이혁은 최대한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알겠어요, 할머니. 저 이제 운전해야 해요. 도착해서 또 이야기 나눠요.”“그래, 운전 조심하고.”할머니는 전이혁에게 안전을 당부하고 전화를 끊었다.전화를 끊은 뒤, 할머니는 곧장 양씨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양 집사, 내 생선은?”할머니는 자신이 잡은 생선을 혹시 다른 사람이 먹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양씨 아저씨는 웃으며 대답했다.“어르신께서 구운 생선은 냄새가 정말 좋아요. 아무도 어르신의 생선을 뺏어 먹으려 하지 않으니 안심하세요.”그들 몇몇 자식들 따라 직원 숙소에서 지내는 할머니들은 전씨 할머니가 좋은 분인 걸 알고 함께 수다도 떨고 낚시도 하지만 전씨 가문의 중심인 전씨 할머니의 권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은 전씨 할머니의 물건을 건드리는 일은 없었다. 혹시나 건드렸다가 이곳에서 일하는 자식들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었으니까.서원 리조트의 모든 직원은 훌륭한 대우와 복지를 받고 있었다. 산기슭에 지어진 숙소는 혼자인
두 사람은 함께 아침을 먹은 후, 방을 나섰다.그러자 집사는 전태윤이 다음에 올 때 묵을 수 있도록 스위트룸을 원래 상태로 정리하기 시작했다.도아영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서 다시 잠을 청했다.전이혁은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고, 할머니가 전화를 받자 물었다.“할머니, 지금 어디 계세요?”“리조트에 있어. 무슨 일이야? 할머니 보고 싶어? 그렇다면 와서 할머니랑 같이 밥 한 끼 먹자.”그러더니 할머니는 한 마디 덧붙였다.“지금 생선이 막 익었어. 냄새 진짜 좋다.”전이혁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아침부터 생선 구워 드세요?”“너한테 말한 거 아니야. 친구들이랑 얘기 중이었어. 아침부터 생선 구우면 안 돼? 그리고 지금 아침도 아니잖아. 아홉 시도 넘었네, 해가 중천에 뜨려고 하고 있어.”“오늘 날씨도 풀렸고, 할머니는 친구들이랑 낚시 갔다가 지금은 잡은 생선 구워 먹고 있어. 소풍하는 느낌이라 꽤 괜찮아.”전이혁은 그 모습이 쉽게 그려졌다. 산 아래에는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고 물 아래에는 물고기와 새우들이 헤엄치고 있었다.할머니는 가끔 몇몇 직원들의 어머니들과 함께 낚시하곤 했었다. 냇가에는 큰 나무 한 그루 있었는데 그 아래에는 돌로 된 테이블이 몇 개 있어 할머니의 한마디면 집사는 바비큐 그릴을 가져와 그들이 직접 구워 먹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할머니가 말하길, 그들은 먹는 것보다는 굽는 과정을 더 즐겼다. 비록 직원이 구워줄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다른 사람이 구워주는 건 맛이 없다며 투덜대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 먹지 못할 때면 남은 건 직원들에게 나눠주기도 했었다.서원 리조트의 직원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할머니는 권위를 내세우며 직원들에게 막 대하지 않고 옆집 할머니처럼 따뜻하게 대해준다는 사실을.“할머니, 생선 더 잡아서 구워주세요. 저 지금 갈게요.”전이혁은 결심한 듯 할머니에게 진실을 털어놓으러 갈 생각이었다.“네가 와서 직접 잡아. 손질까지 하면 할머니가 구워줄게.”그러더니 할머니는 전이혁에게 물었다.“
“여긴 호텔 맞고, 당연히 아영 씨가 묵던 방일 수가 없죠. 어제 아영 씨가 취해서 방에 데려다줬는데 눕자마자 토하더라고요. 침대랑 바닥까지 모두 엉망이 돼서 어쩔 수 없이 다른 방으로 옮겼어요.”전이혁은 다시 자리에 앉더니 도아영에게 말했다.“아영 씨 술 취하면 정말 감당하기 힘들어요. 앞으로 술 좀 줄이는 게 좋을 것 같네요.”도아영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뗐다.“제가 전이혁 씨랑 함께 많이 마신 건 알겠는데 그 뒤로는 기억이 하나도 안 나네요. 그런데 그 술 진짜 맛있었어요. 제가 해주시로 돌아갈 때 한 박스만 챙겨줘요. 기분 안 좋을 때 집에서 한두 잔 마시려고요.”“아영 씨가 그 정도로 술이 부족하진 않을 텐데요?”전이혁은 도아영의 집에 좋은 술이 부족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는 도아영의 말이 전혀 믿기지 않았다.“맞아요. 술이 부족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전이혁 씨가 준 술은 부족하죠.”전이혁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그래요. 아영 씨가 돌아갈 때 한 박스 챙겨줄게요. 그리고 관성 특산물도 좀 챙길 테니 같이 가져가요. 어찌 되었든 먼 길 왔는데 헛걸음하게 하면 안 되니까요.”도아영은 웃으며 대답했다.“맞아요. 헛걸음하게 만들면 안 되죠.”그러더니 그녀는 전이혁의 옆으로 다가가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전이혁 씨, 여기 꿀 있어요? 머리가 아파서 그러는데 저 꿀물 좀 타 주면 안 돼요?”“아까는 참을 만하다면서요?”전이혁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일단 세수 좀 하고요. 그리고 타 줄게요. 아영 씨도 세수해요.”“목욕할 거면 아영 씨 방에 가서 해요. 여긴 우리 형이 자주 묵는 스위트룸인데, 아영 씨니까 형이 허락한 거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형수님이 부탁해도 절대 안 된다고 했을 거예요.”전이혁의 큰형과 형수님은 도아영이 할머니께서 정해준 자신의 신붓감이라는 걸 알고,이미 도아영을 가족이나 다름없이 생각하고 있었다.어젯밤, 전이혁이 그런 말을 했을 때 도아영은 살짝 기분이 상했었다. 하지만
전이혁은 얼른 도아영을 부축하더니 살짝 귀찮다는 듯이 물었다.“아영 씨, 또 왜 그래요?”“저... 화장실... ”도아영은 눈이 풀린 채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화장실 가고 싶어요?”도아영은 비틀거리며 제대로 걷기도 힘든 상태였고 전이혁의 표정은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 도아영을 혼자 화장실에 가게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남자인 자신이 부축해서 데려가는 것도 난감한 일이었다.도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전이혁은 급히 그녀를 부축하며 다시 한번 물었다.“혼자 괜찮겠어요?”도아영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녀는 이미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를 정도로 심하게 취해 있었다.도아영의 상태를 보아하니 전이혁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부축해 화장실로 데려가야 했다. 전이혁은 가면서도 입으로는 끊임없이 투덜거렸다.그는 도아영을 화장실로 들여보내고 도망치듯 밖으로 뛰어나왔다.전이혁은 도아영이 나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10분이 넘도록 나오지 않았고, 노크를 해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결국, 전이혁은 걱정된 마음에 문을 살짝 열어 안을 들여다봤지만 무슨 일인지 도아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어? 어디 간 거야?’전이혁은 의심스러운 마음에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가 보았다. 그 결과, 도아영은 화장실 문 옆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러니 문틈 사이로 도아영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이 여자 진짜!”도아영의 모습을 보자, 전이혁은 앞으로 절대 그녀에게 술을 많이 마시게 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전이혁은 앞으로 자신이 도아영과 함께 밥을 먹게 된다면 그녀에게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자신 말고는 도아영이 다른 누구와 함께 얼마나 마시든, 그건 전이혁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전이혁은 안으로 들어가 도아영을 안고 나온 뒤,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그는 원래 방으로 돌아가 쉴 예정이었지만, 도아영의 상태를 보아하니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결국 그날 저녁,
한편 호텔에서 도아영을 돌보던 전이혁은 전창빈의 메시지를 확인하더니 단독으로 그에게 음성 메시지로 물었다.[너 그 먼 곳까지 가서 가정 요리사를 하려고?]전창빈은 소파에 앉아 답장을 보냈다.[안 될 건 없지? 선우씨 가문의 가정 요리사 자리는 도전적이잖아. 내가 합격할 수 있을지 시험해 보고 싶었어. 다행히도 형 동생이 모든 경쟁자를 물리쳤지 뭐야. 난관을 하나둘씩 돌파했어.]전이혁이 회답했다.[요리사 하나 뽑는 걸 대통령 선거처럼 하는구먼. 얼마나 있을 계획이야? 설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명절에는 안 오려고?]전창빈이 답장했다.[설날에는 아마 못 갈 것 같아. 여기 주인이 날 해고하면 그때나 갈 수는 있겠는지.]전이혁이 피식 웃었다.[네 실력으로는 해고당할 리가 없잖아. 네가 주인을 해고하는 게 더 말이 되겠다. 이해가 안 가. 왜 그 먼 곳까지 가려고 한 거야? 넌 사업도 있는데... 어디서 요리하든 다 마찬가지일 텐데 굳이 몇천 리나 떨어진 곳까지 갈 필요가 있나? 거기 추울 텐데 너 괜찮겠어?]전창빈이 대답했다.[우리 추위를 못 타본 것도 아니고. 형도 할머니에 의해 눈이 수북이 쌓인 산으로 버려지지 않았어? 내 얘긴 그만하고... 형은 어때? 우리 미래의 형수님께 구애하기 시작했어?]‘난 벌써 움직이고 있는데 형이 아직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내가 나중에 민아 씨와 함께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러 갈 때 형은 대체 어쩌려고?’전창빈은 속으로 생각했다.전씨 할머니의 지팡이가 전창빈의 등짝을 때리지 않는다면 해가 서쪽에 뜨는 거나 다름없을 것이다.[말도 마라. 정말 귀찮아. 큰형수님이 오늘 저녁에 우리한테 밥 사주셨어.]전창빈이 웃으며 회답했다.[하하! 괴로웠겠네.][내 말이. 할머니께서 나에게 정해주신 그 여자분이 큰형수님을 찾아가 하소연했더니 큰형수님이 우리 두 사람에게 밥을 사주신 거 있지.][형이 우리 형수님한테 무슨 짓이라도 했어?][아직 너의 형수님이 아니거든!]전이혁은 전창빈의 호칭을 정정했다. 그는 도아영과
“저는 앞으로 큰아가씨의 평가에 근거해서 요리 방법을 조정해 나갈 거예요. 그렇게 해야만 실력을 키울 수 있을 테니까요. 제가 만드는 모든 요리를 큰아가씨께서 만족해하시면 제가 여기에서 졸업할 수 있겠네요.”강진은 웃으며 대답했다.“그렇게 되면 큰아가씨께서 당신을 놓아주지 않을걸요.”‘평생 선우민아 씨를 위해 요리해 드리는 건 기쁜 일이지.'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고 싶었지만 전창빈은 꾹 참았다. 이런 말은 입 밖에 내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면 오해를 살 수 있으니까. 설령 전창빈이 선우민아에게 애정 공세를 하는 것이 두 번째 목표라고 해도 이런 생각을 드러내서는 절대로 안 된다.선우민아가 가업을 운영한다는 건 그녀가 매우 유능한 인물이라는 증거다. 이렇게 강한 강한 여성은 쉽게 넘볼 수 없는 상대이다.전호영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는 너무 힘들어서 하예정의 도움을 받은 끝에야 지름길을 택할 수 있었고 고현의 마음을 얻었다.강진은 그 말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걸 깨닫고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전창빈 씨, 오늘 오후 내내 바쁘셨는데 일찍 쉬세요. 내일 아침 큰아가씨를 위해 아침식사를 준비해야 합니다. 가장 일찍 아침을 드시는 분은 큰아가씨와 민기 도련님입니다. 민기 도련님은 학교에 가야 해서 일찍 식사하시고 큰아가씨는 매일 민기 도련님을 학교에 데려다주신 후 회사에 가시니까 두 분은 늘 함께 식사하시는 편이에요. 하여 아침 7시쯤이면 큰아가씨와 민기 도련님의 아침을 준비하시면 됩니다. 다른 분들의 아침은 9시 이후에 준비하시면 돼요.”전창빈이 말을 건넸다.“그 시간대면 아침과 점심을 함께 드시는 거네요.”“어르신과 사모님은 그렇죠. 점심 무렵에 일어나셨다가 식사 후에는 외출하셔서 저녁에야 돌아오세요. 때로는 안 오시기도 하는데, 그럴 땐 제가 미리 알려드릴게요. 안 오시는 날은 창빈 씨가 쉬는 거나 마찬가지죠. 그냥 자신의 배만 채우시면 돼요.”여기에서는 사실상 선우민아 자매만 아침을 먹는 셈이다.“큰아
동생 선우정아가 어이없어하는 모습을 보며 선우민아는 미소를 지었다.“알았어. 지금은 네가 전창빈 씨를 좋아하지 않는다 치더라도 앞으로 어떻게 될진 모르는 일이니까. 앞으로 매일 여기 와서 식사해. 전창빈 씨와 접촉할 기회도 많아져야 그에 대해 더 잘 알게 될 거 아니야. 만약 그가 정말 괜찮은 사람이라면 거리가 멀어도 너희 부모님께서도 어쩔 수 없이 동의하실 거야. 혹은 전창빈 씨에게 우리 지역에서 사업을 하게 하고 여기서 집을 사도록 하든가.”선우정아는 또 벙어리가 되어버렸다.선우민아가 이렇게 말하는 걸 보니 선우정아는 앞으로는 감히 그 집에 밥 먹으러 가기도 어려울 것 같다고 여겼다.선우민아가 자꾸 자신이 전창빈을 좋아한다고 오해하고 있지 않는가.전창빈은 미래의 아내는 지금 미래 처제가 자기를 좋아한다고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전이혁은 강진을 따라 숙소로 돌아갔다. 강진은 웃으며 축하의 말을 전했다.“전창빈 씨, 이제 우리는 동료가 되었군요. 오래 함께 일했으면 좋겠습니다.”선우씨 가문의 여러 집안이 같은 대저택 안에서 함께 살고 있었지만 집안마다 독립된 공간이 있었다.선우민아의 요리사는 자주 교체되는 편이었기에 강진 역시 1년 정도는 함께 일할 사람을 원했다.요리사와 친해지기도 전에 퇴직하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전창빈도 웃으며 말을 이었다.“저도 집사님과 오래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 앞으로 제가 요리들을 더 연구해서 큰아가씨께서 제 요리만 먹고 싶어 하도록 해야겠네요.”“큰아가씨께서 창빈 씨 요리만 고집하게 만들면 정말 대단한 거예요. 요리 대회에 나가면 ‘요리의 신'이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을 만큼요.”선우민아의 입맛을 사로잡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전창빈은 웃으며 말했다.“‘요리의 신' 같은 건 관심 없어요. 저는 단지 제 요리 실력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서 손님들을 만족시키고 싶을 뿐이죠.”전창빈은 그가 고용한 요리사들에게는 항상 조언을 해주곤 한다. 본인이 잘 배워야 현재 이끌고 있는 요리사들도
선우민아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저런 사업을 가진 사람을 네가 정말 좋아한다면 작은아버지와 숙모도 반대하지 않으실 거야. 다만 전창빈 씨가 관성 사람이라 우리랑 거리가 너무 멀어. 작은아버지와 숙모는 네가 먼 곳으로 시집가는 걸 아쉬워할 수도 있을 거야.”선우정아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언니! 제가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요? 저는 정말 그런 마음 없단 말이에요. 오히려 저는 그분이 언니랑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우리 자매 일곱 명 중 언니가 맏이라 당연히 언니가 먼저 시집가야죠. 제가 언니를 앞지를 순 없잖아요.”착각인지 정말 본 건지, 선우정아는 전창빈이 선우민아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특별한 시선이 느껴졌다.그리고 전창빈은 사실 정말로 선우민아를 위해 온 거였다.아니, 정확히는 선우민아의 까다로운 입맛을 만족시켜주기 위해 온 것이다. 그녀를 만족시킬 수 있다면 다른 손님들도 분명히 만족시킬 수 있을 테니까.선우정아는 생각했다. 선우민아처럼 입맛이 까다로운 사람은 많지 않을 거라고.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동생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우리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잖아. 게다가 사촌 자매이기도 하기 때문에 네가 나보다 먼저 시집간다고 해도 전혀 문제가 안 되거든. 나는 당분간 시집갈 생각 없어. 만약 고려한다 해도 이 지역의 사람일 거야. 생각해봐, 민기와 민수는 아직 몇 살밖에 안 됐는데 애들이 커서 사업을 이어받을 수 있을 때까지 적어도 20년은 더 기다려야 되잖아. 이 20년 동안 우리 자매는 계속 회사를 떠받쳐야 해. 만약 우리가 먼 곳으로 시집가면, 누가 회사를 이끌겠어? 셋째와 넷째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지 지켜봐야 할 거야 아니야.”셋째 동생과 넷째 동생도 이제 성인이 되어 사업을 배우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거대한 가업을 떠받칠 능력이 되지 못했다.하여 선우민아는 자연스레 먼 곳으로 시집갈 생각이 없었다. 시집을 간다 해도 A시의 남자에게 시집갈 것이다. 그래야 시집가서도 친정 회사를 계속 관리할 수 있으니까.앞으로 선우민기
전창빈이 말했다.“행동으로 보여드리죠.”선우정아는 눈썹을 치켜들며 웃었다.“전이혁 씨는 정말 자신만만하신가 봐요.”선우민아는 선우정아를 한 번 흘겨보더니 전창빈에게 물었다.“그럼 언제부터 출근 가능하세요?”“이 자리를 위해 온 만큼 언제든지 가능합니다.”선우민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내일부터 정식으로 출근하세요. 강 집사님께서 이미 숙소를 준비해 뒀을 테고 월급은 내일부터 계산됩니다. 한 달의 수습 기간이 있고 수습 기간 중 급여는 일당으로 지급됩니다. 공짜로 일을 시키진 않을 거예요.“누구든 마찬가지로 하루 일하면 하루 급여를 계산해 주었다.“집사님께서 어제 이미 숙소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급여는 어떻게 계산되든 상관없습니다. 전 도전을 위해 온 거지 월급을 위해 온 게 아니니까요.”전이혁은 돈이 부족한 게 아니었다. 아내만 부족할 뿐...“좋아요. 지금은 숙소로 가서 쉬세요. 우리 집에서의 하루 세끼 준비 시간은 집사님께서 알려주실 거예요. 아침을 제외한 점심과 저녁 식사 준비 시간은 변함없어요.”선우씨 가문의 사람들 아침 식사는 각자 일어나는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딱히 정해진 시간이 없었다.전창빈이 대답했다.“알겠습니다. 집사님께 여쭤보겠습니다.”그는 다시 모두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자리를 떠났다.전창빈이 떠나자 선우민아도 일어서서 가족들에게 말했다.“저는 아직 처리할 일이 있어서 나가봐야 할 것 같아요. 민기한테는 주말에 데리고 나가주겠다고 전해주세요.”선우민기는 그녀보다 스무 살이나 어렸기 때문에 남동생을 아들처럼 키웠다.선우민기는 선우민아를 무서워하면서도 잘 따랐다.선우정아도 그녀의 언니를 따라 일어섰다.“저도 일 보러 갈게요.”한경주가 딸에게 당부했다.“접대할 때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마. 몸에 해로워.”“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5년 전의 제가 아닌걸요.”선우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회사를 막 이어받았을 때 그녀는 많은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그땐 위엄도, 경험도 없었고 회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