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하지 않았어요?”소정남은 재빨리 말했다.“조사하지 않았어요. 효진 씨가 말했잖아요, 효진 씨가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내가 모든 것을 낱낱이 손에 쥐고 있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당신과 관련된 일이기만 하면 따로 조사하지 않아요. 그저 예정 씨가 당신 집에 있을 거로 추측했어요. 예정 씨는 효진 씨와 가장 친한 사이라 걱정거리가 있을 때마다 효진 씨를 찾아가곤 하잖아요.”“예정이 우리 집에 있는 건 맞아요. 태윤 씨에게 말해줘요, 예정이는 우리 집에서 한동안 있을 거라고. 당분간 집에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그러자 소정남은 대답했다.“알겠어요. 내가 곧 전할게요. 여보, 나한테 할 말 또 없어요?”“태윤 씨의 일은 경험이라 생각해요. 따라 배우지 말고요.”그는 웃으며 말했다.“걱정 마요. 반면 소재로 삼고 있어요. 태윤이는 예정 씨를 화나게만 하는걸요. 난 당신을 화나게 하는 일은 절대 안 해요. ”“나도 당신에 대해서는 안심이에요. 정남 씨, 사랑해요. 죽을 만큼 사랑해요.”“저도요.”심효진은 말했다.“먼저 태윤 씨에게 전해요. 조급해 안달이 나고 있을 거예요. 분명히 예정이를 끔찍하게 사랑하는데 항상 작은 일로 다툰다니까요. 나 이만 샤워하러 갈게요.”소정남은 아쉬워하며 전화를 끊고는 바로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구가 전화를 받자 그는 입을 열었다.“네 와이프가 또 내 와이프를 독차지하고 있어.”“당장 우리 예정 씨를 데리러 갈게. 네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게 말이야.”전태윤도 하예정이 심씨 집안에 있을 거로 추측했다.처형에게 먼저 물어봤는데 동생이 집에 없다고 하니 무조건 심효진의 집에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성소현 쪽에는 묻지 않았다. 만부득이한 경우가 아닌 이상 그녀에게 연락할 생각이 없었다.“우리 효진 씨가 말하는데 자기 집에서 며칠 묵을 거라고 했어. 일 없으면 방해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전태윤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내 와이프인데 당연히 내 옆에 같이 있어야지. 나 당장 데리러 갈 거야.
하예정은 몸을 돌려 심효진의 볼을 살짝 꼬집고는 말했다.“이제 진짜 잘 거야. 안 뒤척일게.”심효진은 그녀를 끌어안고 위로했다.“너흰 부부잖아. 태윤 씨도 널 아주 사랑하고 있으니 이 정도의 모순은 곧 풀릴 거야. 마음 편히 자. 잠을 잘 자야 삶의 우여곡절을 마주할 힘이 생기잖아.”“네가 있어 다행이야. 기분이 나쁠 때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있어 너무 좋아.”“우리 얼마나 오랜 친구인데. 나도 기분 안 좋으면 너한테 하소연하잖아. 빨리 자, 너무 생각하지 말고.”하예정은 그에 가볍게 응했다.친구의 위로에 하예정은 천천히 꿈나라로 들어갔다.전태윤이 심씨네 집에 도착했을 때 사방은 고요했다. 모두 이미 꿈나라로 들어간 모양이다.그는 심씨네 집 앞에 차를 세웠다.차를 세운 후 그는 아내에게 다시 전화했다.하예정은 이미 잠든 데다 휴대폰도 무음 모드라 전화를 받지 못했다.그는 어쩔 수 없이 심효진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녀는 휴대폰 벨소리에 잠에서 깨어나 누구에게서 온 건지도 보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누구시죠? 무슨 생각이에요 도대체? 한밤중에 웬 전화죠? 당신은 안 자도 난 자야겠어요! 잠을 방해하는 것이 얼마나 무례한 일인지 몰라요?”“...효진 씨, 저예요.”“누구라고요? ...태윤 씨?”전태윤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네, 저예요.”그녀는 바로 옆에 있는 하예정을 향해 보았다.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살금살금 일어나 창문으로 다가가 커튼을 살짝 열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는데 정말로 전태윤의 차가 자기 집 앞에 멈추어 있었다.“한밤중에 쉬지 않고 웬 전화에요?”“지금 효진 씨 집 앞이에요.”“아, 그래요?”“효진 씨, 예정이 잠들었어요? 불러줄 수 있어요? 집으로 데려가려고 왔어요.”심효진은 말했다.“지금이 몇 시인데요. 예정인 이미 잠들었어요. 이틀 후에 다시 데리러 와요. 우리 집에서 며칠 묵고 내 약혼식을 마친 후에 집에 돌아갈 거라고 했어요.”전태윤은 잠시 침묵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아직
그가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심씨 일가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하예정은 반드시 그와 함께 집에 돌아갈 테니까.전태윤은 이렇게 생각하고는 문 넘을 준비를 했다.심씨 집안의 개 두 마리가 구석에서 그를 주시하고 있는 것은 모른 채.그가 문 위로 올라가 문을 넘어가려고 밑을 바라보자 큰 개 두 마리가 머리를 높이 들고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놀란 그는 하마터면 그대로 떨어질 뻔했다.그도 근처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개를 키우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차를 몰고 집 문 앞을 지나갈 때 다른 집에서 기르고 있는 개들이 짖는 소리를 들었다.하지만 심씨네 집에서도 개를 키우고 있다는 것은 생각 못 했다.그가 차를 심씨 집안의 문 앞에 세울 때 다른 집 개들은 짖는 것을 멈추었고 심씨네 집에서도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그래서 심씨 집의 개가 소리 없이 잠복해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조용한 개가 사람을 문다고... 그가 밑을 보지 않고 바로 뛰어내렸다면 두 개한테 물렸을지도 모른다!멍멍!녀석들은 전태윤이 뛰어내릴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제야 짖어대기 시작했다.전태윤은 집안의 불이 켜진 것을 발견하고 서둘러 문에서 뛰어내려 자신의 차 앞으로 돌아와 차에 기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담배를 찾아 피려다가 담배를 찾지 못했다.그는 하예정이 담배 냄새를 좋아하지 않아서 담배를 거의 끊은 탓에 아예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누구세요?”심효진 어머니의 목소리가 울렸다.그녀는 방문을 열고 나와 정원의 불을 모두 켰다. 개들이 문밖을 향해 정신없이 짖어대는 것을 보고 계단을 내려가 살펴보려 했다.전태윤은 그제야 대문 가까이 다가가 나은서에게 인사를 했다.“아주머니, 저예요, 태윤이에요.”나은서는 그제야 그를 보았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떻게 오셨어요?”“예정이를 집에 데려가려고 이렇게 늦은 시각에 염치를 무릅쓰고 찾아왔어요.”그녀는 문으로 다가갔지만 문을 열어주지는 않았다.“예정이는 머리가 아프다며 일찍 누웠어요.
전태윤은 나은서가 집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 것을 묵묵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는 심씨 집 앞에서 한참을 서있다가 차로 돌아왔다.차에 돌아와서도 몇 분 동안 가만히 앉아있더니, 결국 차를 몰고 떠나갔다.다음 날 아침 일찍 전태윤은 심씨 집으로 달려갔다.심씨 집 마당의 대문은 열려있었고 개 두 마리는 목줄에 묶여있었다.전태윤은 조금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아무래도 늦게 온듯싶다.그가 차를 세우고 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마당을 청소하던 효진의 어머니가 빗자루를 들고 다가왔다.“효진이랑 예정이, 예진이 가게로 갔어요.”“...간 지 얼마나 됐죠?”“20분 정도 될 거예요. 예정이가 일어나자마자 예진이 가게에 가서 우빈이를 데리러 가겠다고 해서 일찍 나갔어요.”전태윤은 나은서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말했다.“당장 처형의 가게로 가겠어요.”나은서는 가볍게 응했다.전태윤은 곧 심씨네 집을 떠났다.그는 가는 길에 하예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처형, 좋은 아침이에요.”“좋은 아침이에요. 무슨 일이죠? 아, 예정이를 찾는 거예요? 예정이랑 효진이 지금 우리 가게에서 아침을 먹고 있어요.”하예진은 그들 부부가 또 다퉜다는 것을 몰랐다. 그녀는 일이 바빠 바로 휴대폰을 동생에게 건네며 말했다.“태윤이한테서 전화가 왔어.”휴대폰을 하예정에게 건네준 후 그녀는 또 서둘러 일하러 갔다.하예정이 전화를 끊으려 하자 전태윤은 전화 저편에서 급히 말했다.“여보, 전화 끊지 마. 내가 잘못했어, 응? 내가 잘못했어! 당신 혼자 두고 가지 말았어야 했어, 내가 잘못했어.”하예정은 듣고만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여보, 나 무시하지 마. 나 피하지 말아줘 제발. 우리 이따가 얘기 좀 해. 고향에 내려가서 프로젝트 진행 상황을 보고 싶으면 내가 같이 갈게.”하예정은 마침내 담담하게 말했다.“전 도련님께서는 바쁘실 텐데, 제가 어찌 감히 전 도련님의 시간을 허비하겠어요? 저와 함께 가줄 필요 없어요.”“여보, 내가 잘못했어.”아내의 비꼬는 말을 들
그녀는 전태윤을 향해 확신하지 않는 듯한 어투로 인사를 건넸다.“전태윤 씨인가요?”전태윤의 눈은 반짝였다. 여운초는 발소리만 듣고도 누군지 알아냈다.“운초 씨.”그는 낮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운초 씨는 이진에게 꽃을 가져다주러 온 거예요?”여운초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이진 도련님이 제 가게에서 꽃을 주문해서 지금 가져다주러 왔어요.”전태윤은 그녀에게 물었다.“혼자 왔어요?”“네.”전태윤은 순간 전이진이 못된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운초의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혼자 꽃을 가져오라고 하다니... 하지만 그는 뭐라 말하지 않았다.이건 전이진의 일이기에 그저 옆에서 구경만 하면 되었다.“제가 위층으로 데려다줄까요?”“고마워요, 저 혼자 갈 수 있어요.”그녀는 두 번이나 온 적이 있기에 길을 기억했다. 다른 사람의 안내 없이도 전이진의 사무실을 찾을 수 있었다.전태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먼저 사무실 빌딩으로 들어갔다.그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듣고서야 여운초는 비로소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두 명의 프런트가 그녀에게 인사를 하자 그녀는 미소로 회답하였다.10분 후.여운초는 전이진의 사무실 앞에 서서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는데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그녀는 잠시 서있다가 다시 문을 두드렸다.이번에는 문이 열렸다.전이진은 그녀의 맞은편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이진아.”그녀는 전이진에게 꽃다발을 건네며 웃으며 말했다.“자, 여기 네가 산 꽃다발. 6만 원이야.”그는 꽃다발을 받지 않고 안으로 걸어들어가며 그녀에게 말했다.“들어와.”여운초는 잠시 머뭇거리다 안으로 들어갔다.“문을 닫을 수 있으면 닫아줘.”그녀는 말에 따라 문을 손으로 더듬어 만진 후 그를 도와 문을 닫아주었다.“이리 와서 앉아.”전이진은 소파로 가서 앉으며 그녀에게 자리를 권했다.그녀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따라 천천히 걸어가 소파 등받이를 더듬으며 자리를 찾았는데 갑자기 따뜻한 큰
“아니.”여운초는 담담하게 말했다.“그 사람들이 상의한 대책은 나한테 안 알려줘.”그녀는 지팡이를 집어 들었다. 그날 밤 엄마가 지팡이를 방구석에 내팽개쳤고 다음 날 도우미가 그녀에게 돌려줬다.사모님 방문 입구에서 주웠다고 했는데 아마도 엄마가 지팡이를 내던진 듯싶었다.여운초가 지팡이를 건네자 전이진은 그녀가 자신의 머리를 칠 줄 알고 본능적으로 지팡이를 덥석 잡았는데 뜻밖에도 여운초가 손을 놓았다.전이진은 그제야 그녀가 지팡이를 그에게 건넨다는 걸 알아챘다.“이 지팡이 속에 빈 부분이 있는데 그 안에 녹음 펜이 숨겨져 있어.”여운초는 여전히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전이진은 두 눈을 반짝였다. 달라진 그녀의 눈빛을 발견하고 나서야 장난기를 거두었다.그는 지팡이를 높게 들고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기다가 텅 빈 부분을 힘껏 비틀고 아래로 향하자 정말 안에서 녹음 펜 한 대가 떨어졌다.“그 별장은 원래 내 건데 아직 내가 통제할 순 없어. 내 집이지만 내겐 위험한 존재야. 꽃필무렵도 내 가게이긴 하지만 가고 오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위험해. 곰곰이 생각한 끝에 네 사무실이 제일 안전한 것 같아.”그래서 전이진이 또 전화해 그녀에게 직접 꽃 배달을 시켰을 때 아무런 불평불만 없이 곧바로 지팡이를 챙기고 온 거였구나.전이진 앞에서 까밝히기로 한 것도 그녀가 전이진을 믿고 있단 표현이다.어쨌거나 그가 여운초의 목숨을 구해줬으니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다.어떤 의도로 그녀에게 접근하는지는 몰라도 목하 그녀가 두 번째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전이진이다.또 믿을만한 한 명은 바로 하예정이다.“이 녹음 펜에 다 뭐가 녹음됐어? 지팡이에 넣어둔 지는 얼마나 됐어?”여운초는 잠시 침묵한 후 그에게 대답했다.“연회에 가기 전에 엄마가 날 데리고 참석할 걸 알고 몰래 지팡이에 넣어뒀어. 뭐가 녹음됐는지는 나도 몰라. 집에서도, 가게에서도 감히 녹음 펜을 꺼낼 엄두가 안 났거든.”전이진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너 뭐 아는구나.”“아빠의
그녀가 친아빠의 죽음을 의심하니 그들도 여운초를 죽이려는 것이다. 어차피 여 씨네 저택에서 큰딸 여운초는 투명인간과도 같으니 아파서 죽었다 해도 끝까지 추궁할 사람은 없다.멀리 시집간 고모가 갑자기 친정집 식구들을 뵈러 집에 오지 않았다면 중병에 걸린 여운초는 병원에 실려 가지도 못한 채 10년 전에 이미 친엄마 곁으로 돌아갔을 것이다.여태웅 부부가 전이진이 여운초를 책임졌으면 좋겠다고 하는 말까지 낱낱이 녹음되었다.전이진은 그녀를 바라보며 아무 말 없었다.여운초는 두 손을 꼭 잡고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친아빠의 죽음이 그들과 연관 있을 거라고 줄곧 의심하긴 했지만 증거가 없으니 의심에서 그쳤다.이제 두 귀로 직접 여태웅 부부의 대화를 듣자 머리가 백지장이 되고 손발이 서서히 차가워졌다.추미자는 대체 왜 제 남편의 친형과 짜고 들어 남편을 죽음으로 몰아간 걸까? 설마 두 사람이 진작 서로 사랑하고 있었던 걸까?그렇다면 이혼하면 될 것이지...“이젠 어떻게 할 생각이야?”전이진이 대뜸 질문을 건넸다.그녀의 창백한 얼굴에 전이진은 안쓰러워하며 온수 한 잔 따라주었다.여운초는 물을 한 모금에 다 마셨다.“이진아, 이 녹음 펜만으로 그 사람들 유죄판결 내릴 수 있을까?”전이진이 대답했다.“좀 힘들어. 분명 홧김에 한 말이라고 변명할 거야. 네가 무슨 의도로 녹음했는지 의심할 거고. 다만 증거가 더 있으면 이 녹음 펜도 아주 큰 역할을 할 수 있어. 그 사람들 유죄판결도 내릴 수 있지. 너 또 다른 증거는 있어?”여운초가 머리를 내저었다.친아빠가 죽을 때 그녀는 고작 두 살이라 아무것도 모를 때였다.여태껏 커오면서 엄마와 여동생에게 모진 괴롭힘을 당한 것 외에 제일 이해되지 않는 건 다름 아닌 엄마였다. 친엄마라는 자가 왜 딸을 예뻐하지 않고 안아준 적도 없으며 따뜻한 말 한마디 없었던 걸까?그 뒤론 여운초도 마음이 무뎌져 더는 친엄마의 사랑을 애원하지 않았다.열심히 공부하고 스스로 능력이 있을 때 이 집을 떠나리라 마음먹었다
전이진은 그녀의 눈을 한참 쳐다보다가 말했다.“우리 형수님 말이 맞아. 증거를 찾으려면 눈부터 고쳐야 해. 이 녹음 펜은 일단 내가 보관할게. 그 사람들 손에 들어가면 네 목숨도 위험해질 테니까.”“고마워, 전이진.”여운초도 녹음 펜을 다시 가져갈 생각은 없었다.전이진의 말처럼 가져갔다가 제대로 보관하지 못하면 목숨이 날아갈지도 모른다.“그들이 만약 계속 날 이용해서 네 동생 구해주려고 한다면 내가 그 꼼수에 넘어가 주는 건 어때?”여운초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꼼수에 넘어간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너희 새아빠가 널 내게 맡기고 싶어 하잖아. 다들 내가 절대 동의하지 않을 거로 생각하며 조건을 내걸겠지. 그걸 빌미로 네 동생을 구하는 거고. 거참 야무진 생각이긴 하지만 다들 잘못 짚었어.”전이진이 호락호락하게 통제될 사람이 아니지. 그는 무려 전씨 일가의 도련님이니까!여태웅 부부도 확실히 안달이 났나 보다. 감히 이런 꼼수까지 부리다니.두 사람이 여운별에 대한 사랑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내가 책임질게. 우리 결혼하자, 운초야.”여운초는 어안이 벙벙해졌다.“너 혼자 증거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우리가 결혼하면 내가 사위 신분으로 너희 집에 마음껏 드나들 수 있고 널 위해 증거도 찾아줄 수 있어. 조만간 두 사람을 법의 심판대에 올려놓고 우리 장인어른을 위해 이 한을 풀어드려야지.”아내는 친형의 여자가 됐고 딸은 또 친형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으니 하늘에 계실 장인어른이 억울해서 두 눈이나 감으셨을까? 오밤중에 찾아와 여태웅에게 복수하고도 남을 것을!사위로서 장인어른의 원한을 풀어주는 건 마땅한 일이다. 여운초는 말을 잇지 못했다.그녀는 미처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그 시각.하예진의 토스트 가게는 보통 오전 10시 좌우에 마감하고 깨끗이 청소한 후 문을 닫는다.가게에 손님들이 다 빠진 후 그녀와 두 직원이 뒷정리하기 시작했다.하예진이 한창 바삐 돌아칠 때 찰거머리 같은 전남편이 또다시 찾아왔다.여전히 옆에
전씨 할머니는 한 손에 꽃다발을 안고 다른 한 손으로 갓 구운 생선을 집어 전이혁에게 건넸다.“이런 작은 생선은 막 구웠을 때 먹는 게 맛있어. 식으면 맛이 없으니 따뜻할 때 먹어.”“고마워요, 할머니.”전이혁은 할머니가 건넨 생선을 받아 주저 없이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는 먹던 중에 핸드폰을 꺼내 전우에게 사진을 한 장 찍어 보냈다.전이혁은 전우와 나이도 비슷하고, 어릴 때부턴 전우와 함께 노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형제 중에서 전우와 가장 친했다. 그러니 그는 자랑하고 싶을 때는 무조건 전우를 찾았다.전이혁의 사진을 보자마자 전우는 가족 단톡방에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할머니, 낚시 가셨어요? 직접 구워 드시기까지 하네요. 많이 잡으셨어요? 저도 먹을래요. 지금 당장 갈게요.”전이혁은 일부러 약 올리듯 답장했다.“이젠 없어. 할머니께서 나 주려고 특별히 남겨둔 거야. 그러니 네 몫은 없어. 그리고 너 진짜 생선 한 조각 먹으러 올 거야? 손해가 클 텐데?”“돈은 언제든 벌 수 있지만 할머니표 생선구이는 언제나 먹을 수 있는 게 아니잖아.”할머니는 워낙 자유로워서 오전엔 리조트에 있다가도 오후에는 어디론가 훌쩍 떠나곤 했었으니, 큰 손자인 전태윤도 못 말릴 정도였다.부모 세대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수십 년간 할머니의 손에서 할머니의 기세에 눌려 살아왔기 때문에 할머니에게 잘 해드리는 것밖에 없을 뿐, 감히 할머니를 간섭할 수 없었다. 그나마 큰 손자인 전태윤이 할머니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인데 그마저도 성공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할머니는 그야말로 나이 든 개구쟁이였다. 할머니는 지금은 리조트에 있지만 다섯째 손자인 전우가 도착할 즈음이면 이미 어디론가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할머니는 웃으며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오늘은 많이 잡지 못했어. 넷째한테 줄 몇 꼬치만 남겨 놓고, 나머지는 다 먹었어. 먹고 싶으면 설 연휴 때 와서 직접 낚시해서 구워 먹어. 그래야 더 맛있지.”전우는 아쉬움으로
잠시 후, 차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아이는 고개만 돌려 살짝 보더니 다시 바비큐를 먹기 시작했다.“할머니, 저 왔어요.”멀리서 전이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이혁은 꽃다발을 안고 차에서 내린 후, 할머니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가는 길에 풍겨오는 바비큐 냄새는 정말 좋았다.“와, 냄새 진짜 좋네요. 이런 날씨에는 바비큐가 최고죠.”관성의 겨울 날씨는 정말 변덕스러웠다. 어제는 몸이 움츠러들 정도로 추워서 할머니들은 밖에 나갈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오늘은 기온이 확 올라와 정오 무렵에는 햇빛까지 쨍쨍하게 비추더니 약간 더운 느낌마저 들었다.관성의 사람들은 겨울에 가끔 이렇게 바비큐를 해 먹긴 하지만 보통은 휴일이 되어야 준비해서 해먹을 여유가 있었다.하지만 할머니는 달랐다. 할머니는 생각만 나면 언제든 자유롭게 바비큐를 즐길 수 있었다.그런 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전이혁은 자신이 나중에 결혼하고 아들이 성장하면 당장 사업을 넘겨주고, 자신은 조기 은퇴해 할머니처럼 여유로운 노후를 즐길 계획이었다. 그것은 신선놀음보다 더 행복한 삶이었다.“넷째 도련님.”양씨 아저씨가 미소를 지으며 전이혁에게 안부를 물었다.전씨 할머니와 함께 수다를 떨고 있던 여러 할머니도 전이혁에게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다.그들은 전씨 할머니가 무려 아홉 명의 손자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무척 부러워했다. 아직 사회에 나오지 않은 막내 두 명을 제외한 다른 일곱 명의 손자는 이미 뛰어나고 유능한 인물들로 소문나 있었다. 게다가 막내 두 명은 비록 사회에 나오지 않았지만, 그들은 성적이 우수했고 앞날도 창창했다. 그뿐만 아니라, 할머니에 대한 효심도 지극했었다.전씨 가문은 자손들이 하나같이 훌륭했고 가업도 재산도 어마어마했으니, 그야말로 할머니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그들은 가끔 함께 수다를 떨며 힘들었던 시절을 회상하곤 했었다. 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그 시절에도 그들보다 훨씬 잘 살았고, 그때부터 이미 가문에서 주름잡는 존재였다. 결국 훌륭한 어른이
여자아이의 말을 듣고 있던 전씨 할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그 여자아이를 불렀다.“소령이, 이리 와봐.”여자아이는 깡충깡충 뛰어갔다.“어르신, 닭 다리 다 구워졌어요?”여자아이는 전씨 할머니가 자신에게 닭 다리를 주려고 부른 줄 알았다.전씨 할머니는 여자아이를 안아 올리며 웃었다.“아직 다 안 구워졌어. 조금만 기다리면 먹을 수 있을 거야.”“그런데 왜 양씨 아저씨의 자리를 잇고 싶다고 했지?”전씨 할머니가 여자아이를 예뻐한다는 건 리조트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전씨 가문은 몇 대째 아들만 태어났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딸을 가지길 원했었고, 그것이 안 되자 손녀를 기대해 보았지만, 매번 실망으로 마무리되었다.할머니는 이제 증손녀를 기대해 보기로 생각했다. 하지만 할머니가 증손녀를 안을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할머니는 종종 직원들에게 집에 여자아이가 있으면 관성으로 데려와 학교도 보내고 같이 생활하라고 말했었다. 그리고 시간이 되면 리조트에 있는 놀이공원에 놀러 오라고도 했었다. 그것은 할머니가 여자아이들이 리조트에 놀러 오게 되면 손주며느리들이 그 모습을 보고 할머니한테 증손녀를 안겨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양씨 아저씨는 참 멋있는 사람이에요. 많은 사람들을 관리하고 돈도 많이 벌잖아요. 양씨 아저씨가 사는 집도 아주 예뻐요. 저도 양씨 아저씨처럼 되고 싶어요.”그 여자아이는 겨우 세 살밖에 안 됐지만 머리가 총명하고 말도 잘해서 가끔 그 여자아이가 하는 말을 들으면 어른들이 놀랄 정도였다. 게다가 여자아이는 부모도 가르친 적이 없는 말을 스스로 내뱉곤 했었다.우빈이도 가끔 서원 리조트에 올 때마다 리조트에서 내려와 그 여자아이와 함께 신나게 놀곤 했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여자아이가 리조트에 올라와 우빈이와 함께 놀기도 했었다.“아까 양씨 아저씨가 한 말 잘 들었지? 네가 컸을 때는 양씨 아저씨는 이미 은퇴하고 다른 사람이 저 자리에 있을 거야. 그 사람이 은퇴한 다음에야 네 차례가 오게 돼. 그보
할머니는 함께 있는 몇몇 친구들에게 말했다.“날씨가 좀 쌀쌀하네. 우리 따뜻하게 몸도 데울 겸 한 잔씩 할까?”“어르신.”전씨 할머니가 술을 마시자고 하자 양씨 아저씨는 바로 할머니를 제지했다.“어르신 술 마시면 안 됩니다. 큰 도련님께서 아시면 또 어르신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다며 저를 혼내실 거예요.”“양 집사가 말하지 않으면 누가 알겠어?”“태윤이는 점점 자기 할아버지를 닮아가는 것 같아. 온갖 걸 다 간섭하려 들어.”할머니는 손자인 전태윤이 자신을 간섭하려 든다며 투덜거렸다.그러자 함께 있는 몇몇 할머니들이 웃기 시작했다.“큰 도련님께서 어르신 건강이 걱정돼서 그러는 거죠. 저희 나이에는 술도 적게 마시는 게 좋잖아요.”“과일주는 괜찮아. 양 집사, 가서 과일주 두 병 가져와. 바비큐에는 술이 있어야 제맛이지.”양씨 아저씨는 더 이상 아무 반박도 하지 못하고 리조트에 전화해서 과일주 몇 병을 가져오도록 했다.그들이 직접 잡은 생선 외에도 양씨 아저씨는 몇몇 어르신들이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바비큐용 식재료를 다양하게 준비했다. 어르신들 옆에는 아직 유치원에 들어가지 않은 어린아이들도 있었고, 양씨 아저씨는 그들을 위해 과일 주스를 준비해 두었다. 덕분에 그들은 기분 좋은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전씨 할머니는 이렇게 노인과 아이들이 함께 있는 따뜻한 분위기의 생활을 참 좋아했다. 게다가 내년엔 첫 증손주가 태어나니 할머니는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졌다.할머니는 자신이 구운 소시지 한 꼬치를 여자아이에게 건네주고 그 아이의 높게 올려 묶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우리 소령이 갈수록 예뻐지네. 반짝이는 눈 좀 봐. 네 엄마가 너를 ‘소령이’라고 부르는 게 딱 맞아.”그 여자아이는 소시지를 건네받으며 귀엽게 인사했다.“감사합니다, 어르신.”전씨 할머니는 인자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또 뭐 먹고 싶어? 할머니가 구워줄게.”“닭 다리요.”여자아이는 전씨 할머니가 익숙한 듯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전씨 할머니에게 닭 다리를 구워
“할머니, 제가 뭐가 똑똑해요, 전 진짜 멍청해요. 할머니야말로 대단하신 분이죠.”전이혁은 할머니께 아부하는 멘트를 던졌다.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아부라고 할 수 없는 게, 할머니는 정말 대단한 인물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전씨 가문 자손들은 이미 충분히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할머니의 손바닥 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할머니는 마치 삼장법사였고 자손들은 손오공 같은 존재로 손오공이 아무리 강해도 삼장법사 앞에선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할머니, 저 진짜 꼼수 같은 거 부리지 않아요.”“그건 네 사정이고. 어떻게 하든 네 마음대로 해. 할머니는 이미 너에게 신붓감을 골라줬고, 대시하든 포기하든 그것 역시 너에게 달린 일이야. 1년이면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줬다고 생각한다.”“하지만 한 가지 경고할게. 지금까지 우리 전씨 가문에는 일편단심인 남자만 있었을 뿐 양다리를 걸치는 남자는 없었어. 네가 전씨 가문의 가풍을 망가뜨리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전이혁은 최대한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알겠어요, 할머니. 저 이제 운전해야 해요. 도착해서 또 이야기 나눠요.”“그래, 운전 조심하고.”할머니는 전이혁에게 안전을 당부하고 전화를 끊었다.전화를 끊은 뒤, 할머니는 곧장 양씨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양 집사, 내 생선은?”할머니는 자신이 잡은 생선을 혹시 다른 사람이 먹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양씨 아저씨는 웃으며 대답했다.“어르신께서 구운 생선은 냄새가 정말 좋아요. 아무도 어르신의 생선을 뺏어 먹으려 하지 않으니 안심하세요.”그들 몇몇 자식들 따라 직원 숙소에서 지내는 할머니들은 전씨 할머니가 좋은 분인 걸 알고 함께 수다도 떨고 낚시도 하지만 전씨 가문의 중심인 전씨 할머니의 권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은 전씨 할머니의 물건을 건드리는 일은 없었다. 혹시나 건드렸다가 이곳에서 일하는 자식들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었으니까.서원 리조트의 모든 직원은 훌륭한 대우와 복지를 받고 있었다. 산기슭에 지어진 숙소는 혼자인
두 사람은 함께 아침을 먹은 후, 방을 나섰다.그러자 집사는 전태윤이 다음에 올 때 묵을 수 있도록 스위트룸을 원래 상태로 정리하기 시작했다.도아영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서 다시 잠을 청했다.전이혁은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고, 할머니가 전화를 받자 물었다.“할머니, 지금 어디 계세요?”“리조트에 있어. 무슨 일이야? 할머니 보고 싶어? 그렇다면 와서 할머니랑 같이 밥 한 끼 먹자.”그러더니 할머니는 한 마디 덧붙였다.“지금 생선이 막 익었어. 냄새 진짜 좋다.”전이혁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아침부터 생선 구워 드세요?”“너한테 말한 거 아니야. 친구들이랑 얘기 중이었어. 아침부터 생선 구우면 안 돼? 그리고 지금 아침도 아니잖아. 아홉 시도 넘었네, 해가 중천에 뜨려고 하고 있어.”“오늘 날씨도 풀렸고, 할머니는 친구들이랑 낚시 갔다가 지금은 잡은 생선 구워 먹고 있어. 소풍하는 느낌이라 꽤 괜찮아.”전이혁은 그 모습이 쉽게 그려졌다. 산 아래에는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고 물 아래에는 물고기와 새우들이 헤엄치고 있었다.할머니는 가끔 몇몇 직원들의 어머니들과 함께 낚시하곤 했었다. 냇가에는 큰 나무 한 그루 있었는데 그 아래에는 돌로 된 테이블이 몇 개 있어 할머니의 한마디면 집사는 바비큐 그릴을 가져와 그들이 직접 구워 먹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할머니가 말하길, 그들은 먹는 것보다는 굽는 과정을 더 즐겼다. 비록 직원이 구워줄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다른 사람이 구워주는 건 맛이 없다며 투덜대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 먹지 못할 때면 남은 건 직원들에게 나눠주기도 했었다.서원 리조트의 직원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할머니는 권위를 내세우며 직원들에게 막 대하지 않고 옆집 할머니처럼 따뜻하게 대해준다는 사실을.“할머니, 생선 더 잡아서 구워주세요. 저 지금 갈게요.”전이혁은 결심한 듯 할머니에게 진실을 털어놓으러 갈 생각이었다.“네가 와서 직접 잡아. 손질까지 하면 할머니가 구워줄게.”그러더니 할머니는 전이혁에게 물었다.“
“여긴 호텔 맞고, 당연히 아영 씨가 묵던 방일 수가 없죠. 어제 아영 씨가 취해서 방에 데려다줬는데 눕자마자 토하더라고요. 침대랑 바닥까지 모두 엉망이 돼서 어쩔 수 없이 다른 방으로 옮겼어요.”전이혁은 다시 자리에 앉더니 도아영에게 말했다.“아영 씨 술 취하면 정말 감당하기 힘들어요. 앞으로 술 좀 줄이는 게 좋을 것 같네요.”도아영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뗐다.“제가 전이혁 씨랑 함께 많이 마신 건 알겠는데 그 뒤로는 기억이 하나도 안 나네요. 그런데 그 술 진짜 맛있었어요. 제가 해주시로 돌아갈 때 한 박스만 챙겨줘요. 기분 안 좋을 때 집에서 한두 잔 마시려고요.”“아영 씨가 그 정도로 술이 부족하진 않을 텐데요?”전이혁은 도아영의 집에 좋은 술이 부족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는 도아영의 말이 전혀 믿기지 않았다.“맞아요. 술이 부족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전이혁 씨가 준 술은 부족하죠.”전이혁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그래요. 아영 씨가 돌아갈 때 한 박스 챙겨줄게요. 그리고 관성 특산물도 좀 챙길 테니 같이 가져가요. 어찌 되었든 먼 길 왔는데 헛걸음하게 하면 안 되니까요.”도아영은 웃으며 대답했다.“맞아요. 헛걸음하게 만들면 안 되죠.”그러더니 그녀는 전이혁의 옆으로 다가가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전이혁 씨, 여기 꿀 있어요? 머리가 아파서 그러는데 저 꿀물 좀 타 주면 안 돼요?”“아까는 참을 만하다면서요?”전이혁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일단 세수 좀 하고요. 그리고 타 줄게요. 아영 씨도 세수해요.”“목욕할 거면 아영 씨 방에 가서 해요. 여긴 우리 형이 자주 묵는 스위트룸인데, 아영 씨니까 형이 허락한 거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형수님이 부탁해도 절대 안 된다고 했을 거예요.”전이혁의 큰형과 형수님은 도아영이 할머니께서 정해준 자신의 신붓감이라는 걸 알고,이미 도아영을 가족이나 다름없이 생각하고 있었다.어젯밤, 전이혁이 그런 말을 했을 때 도아영은 살짝 기분이 상했었다. 하지만
전이혁은 얼른 도아영을 부축하더니 살짝 귀찮다는 듯이 물었다.“아영 씨, 또 왜 그래요?”“저... 화장실... ”도아영은 눈이 풀린 채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화장실 가고 싶어요?”도아영은 비틀거리며 제대로 걷기도 힘든 상태였고 전이혁의 표정은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 도아영을 혼자 화장실에 가게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남자인 자신이 부축해서 데려가는 것도 난감한 일이었다.도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전이혁은 급히 그녀를 부축하며 다시 한번 물었다.“혼자 괜찮겠어요?”도아영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녀는 이미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를 정도로 심하게 취해 있었다.도아영의 상태를 보아하니 전이혁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부축해 화장실로 데려가야 했다. 전이혁은 가면서도 입으로는 끊임없이 투덜거렸다.그는 도아영을 화장실로 들여보내고 도망치듯 밖으로 뛰어나왔다.전이혁은 도아영이 나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10분이 넘도록 나오지 않았고, 노크를 해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결국, 전이혁은 걱정된 마음에 문을 살짝 열어 안을 들여다봤지만 무슨 일인지 도아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어? 어디 간 거야?’전이혁은 의심스러운 마음에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가 보았다. 그 결과, 도아영은 화장실 문 옆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러니 문틈 사이로 도아영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이 여자 진짜!”도아영의 모습을 보자, 전이혁은 앞으로 절대 그녀에게 술을 많이 마시게 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전이혁은 앞으로 자신이 도아영과 함께 밥을 먹게 된다면 그녀에게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자신 말고는 도아영이 다른 누구와 함께 얼마나 마시든, 그건 전이혁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전이혁은 안으로 들어가 도아영을 안고 나온 뒤,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그는 원래 방으로 돌아가 쉴 예정이었지만, 도아영의 상태를 보아하니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결국 그날 저녁,
한편 호텔에서 도아영을 돌보던 전이혁은 전창빈의 메시지를 확인하더니 단독으로 그에게 음성 메시지로 물었다.[너 그 먼 곳까지 가서 가정 요리사를 하려고?]전창빈은 소파에 앉아 답장을 보냈다.[안 될 건 없지? 선우씨 가문의 가정 요리사 자리는 도전적이잖아. 내가 합격할 수 있을지 시험해 보고 싶었어. 다행히도 형 동생이 모든 경쟁자를 물리쳤지 뭐야. 난관을 하나둘씩 돌파했어.]전이혁이 회답했다.[요리사 하나 뽑는 걸 대통령 선거처럼 하는구먼. 얼마나 있을 계획이야? 설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명절에는 안 오려고?]전창빈이 답장했다.[설날에는 아마 못 갈 것 같아. 여기 주인이 날 해고하면 그때나 갈 수는 있겠는지.]전이혁이 피식 웃었다.[네 실력으로는 해고당할 리가 없잖아. 네가 주인을 해고하는 게 더 말이 되겠다. 이해가 안 가. 왜 그 먼 곳까지 가려고 한 거야? 넌 사업도 있는데... 어디서 요리하든 다 마찬가지일 텐데 굳이 몇천 리나 떨어진 곳까지 갈 필요가 있나? 거기 추울 텐데 너 괜찮겠어?]전창빈이 대답했다.[우리 추위를 못 타본 것도 아니고. 형도 할머니에 의해 눈이 수북이 쌓인 산으로 버려지지 않았어? 내 얘긴 그만하고... 형은 어때? 우리 미래의 형수님께 구애하기 시작했어?]‘난 벌써 움직이고 있는데 형이 아직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내가 나중에 민아 씨와 함께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러 갈 때 형은 대체 어쩌려고?’전창빈은 속으로 생각했다.전씨 할머니의 지팡이가 전창빈의 등짝을 때리지 않는다면 해가 서쪽에 뜨는 거나 다름없을 것이다.[말도 마라. 정말 귀찮아. 큰형수님이 오늘 저녁에 우리한테 밥 사주셨어.]전창빈이 웃으며 회답했다.[하하! 괴로웠겠네.][내 말이. 할머니께서 나에게 정해주신 그 여자분이 큰형수님을 찾아가 하소연했더니 큰형수님이 우리 두 사람에게 밥을 사주신 거 있지.][형이 우리 형수님한테 무슨 짓이라도 했어?][아직 너의 형수님이 아니거든!]전이혁은 전창빈의 호칭을 정정했다. 그는 도아영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