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깊은 밤이 지나갔다.다음 날 아침, 레아닐 아파트.하예진은 아들의 책가방을 챙겨 들고 방문 앞으로 걸어가면서 재촉했다.“우빈아, 좀 빨리 움직여. 늦었어.”우빈이는 어물어물하다가 방에서 자신의 신발을 들고나와서 소파 위에 앉아 천천히 신발을 신었다.그리고 입을 열었다. “엄마, 나 오늘 유치원 안 가면 안 돼?”유치원에 다니기 전에 우빈이는 유치원에 다니는 것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다.유치원에 지원하러 갔을 때도 녀석은 유치원에서 놀다가 엄마가 데려가려고 하자 집에 가기 싫어서 울기도 했다.한동안 유치원에 다니던 우빈은 집에서 노는 게 더 재미있다고 생각했다.엄마가 그를 데리고 다니지 못하면 이모 회사로 갈 수도 있고, 안 되면 이모부 사무실에 가거나 이모 집에 가도 된다.유치원에 가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다고 생각했다.가장 중요한 것은 유치원에 다니면서 녀석은 매일 일찍 일어나야 했기에 예전처럼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지 못했다.엄마는 출근해야 하므로 일찍 유치원에 가야 했고 우빈이는 매일 유치원에서 가장 먼저 유치원에 도착하는 어린이로 되였다.“아프지도 않은데 왜 유치원에 가기 싫어?”하예진은 문을 열면서 고개를 돌려 아들에게 물었다.우빈이가 대답하기도 전에 하예진은 또 입을 열었다.“준호보다 더 잘하고 싶다며. 준호는 너처럼 며칠동안 유치원에 다니다가 또 다니고 싶지 않다는 말을 안 하거든.”우빈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예진은 다시 몸을 돌려 걸어가 아들의 맞은편에 앉았다.그녀는 아들의 신발 신는 것을 돕지 않았다. 녀석이 직접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스스로 하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아들, 엄마에게 말해봐. 왜 유치원에 가기 싫어? 유치원에서 친구들이 널 괴롭혔어? 선생님은 너에게 잘해주고?”우빈이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친구들 모두 좋아요. 저를 괴롭히지도 않아요. 저도 남을 괴롭히지도 않는걸요. 저는 무술을 배워본 사람인데 어떻게 남을 괴롭히겠어요. 선생님도 저한테 잘해줘요.”우빈의 무술 실력은
하예진은 아들을 다시 안으며 한결 부드러워진 어조로 말했다.“요즘 엄마가 너무 바빠서 우빈이와 놀아주지도 못하고 소홀히 대했어. 이틀만 유치원에 다니고 주말이 되면 엄마랑 바닷가로 놀러 갈래?”“이모도 가요?”“이모와 이모부랑 그리고 사촌 이모도 다 같이 가자.”우빈은 엄청나게 기뻐하면서 말했다.“좋아요! 미안해요, 엄마. 다시는 유치원에 가지 않겠다는 말 안 할게요.”하예진은 아들을 풀어주면서 웃으며 말을 이었다.“우빈이가 엄마 이해해줘서 엄마 너무 기뻐. 우빈이는 잘못을 저지르고 바로 고치는 착한 아이니까. 엄마는 우빈이가 너무 좋아.”그러더니 하예진은 아들의 작은 얼굴에 뽀뽀했다.녀석도 엄마에게 뽀뽀해 주었다.“엄마, 우리 유치원에 가요.”우빈이는 엄마 손을 잡고 집 문 앞으로 걸어갔다.그리고 엄마에게 또 말을 건넸다.“엄마, 제 가방은 제가 들게요.”하예진은 가방을 건네주었고 우빈이는 스스로 가방을 메고 엄마와 함께 집을 나섰다.집 문을 나선 우빈이는 옆에 서서 엄마가 문을 잠그기를 기다렸다.하예진은 문을 꼭 잠그고 돌아서서 아들의 손을 잡으려는데 한 남자가 멀지 않은 곳에 서서 하예진 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그 남자는 바로 어젯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술에 취한 남자였다.취객은 어젯밤보다 많이 깨어 있는 것 같았지만 사람을 바라보는 눈빛은 여전히 섬뜩했다.그 남자는 하예진을 노려보았고 하예진은 바로 아들을 안고 자리를 떠나려는데 그 남자가 갑자기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여기서 사셨군요.”하예진은 순간 공포에 휩싸였다.그녀는 못 들은 척하고 아들을 안아 들어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고 같은 층에 사는 아주머니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장을 보려는 모습을 보더니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모, 아까 그 남자 봤어요? 우리 층에 살았었나요? 그전에는 보지 못한 것 같은데.”하예진은 사이가 가까운 이웃집 아주머니와 인사를 나누면서 물었다.아주머니가 대답했다.“술 냄새 나는 그 남자요? 맨 위층에 사는 남
그러자 그 아주머니는 하예진의 앞을 가로막아 남자 취객이 하예정을 보지 못하게 했고 이야기하는 척하면서 하예진에게 물었다.“애 아빠는 곧 돌아오는 거죠?”하예진도 말을 이었다.“곧 도착해요.”주형인은 조금만 더 입원하다가 퇴원할 수 있었다.확실히 곧 돌아올 것이다. 물론 하예진이 사는 곳으로 돌아오는 것은 아니지만.그녀는 주형인과 이미 이혼한 지 1년이 되어갔다.아주머니는 또 우빈이를 보며 물었다.“아빠 보고 싶어?”우빈이는 솔직하게 대답했다.“보고 싶어요. 우리 엄마가 저를 데리고 주말에 아빠 보러 갔는걸요.”아주머니가 웃으며 말했다.“주말에 아빠를 보러 갔구나.”우빈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주머니는 일부러 취객에게 하예진의 집에 남자가 있다는 걸 알게 하려고 말을 내뱉었다. 하예진의 남편이 출장 갔다가 곧 돌아오니 하예진을 건드리지 말라는 의미였다.술 취한 남자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1층에 도착했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그 아주머니는 얼른 하예진 모자를 끌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그 술 취한 남자는 가만히 서 있었고 하예진이 그의 곁을 지나갈 때 그는 나지막이 말했다.“제가 당신을 밤새 찾았거든요. 당신 이혼했다는 사실을 저도 알고 있어요.”하예진의 안색은 바로 어두워졌다.남자 취객은 일찍부터 그녀에게 눈독을 들였던 것이다.어젯밤 노씨 가문의 경호원이 하예진을 위층으로 데려다주었을 때 취객을 의식한 하예진은 자신이 사는 층에서 내리지 않고 몇 층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하지만 남자 취객이 그녀가 어느 층에 사는지 알고 싶어 밤새 찾으러 다닐 줄은 몰랐다.그리고 그녀가 이혼한 여자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하예진은 엘리베이터에서 나오자마자 아들을 안아 들고 빠른 걸음으로 아파트 밖으로 나갔다.사실 레아일 아파트는 아주 안전한 아파트였다. 이곳에 사는 주민들은 도둑맞거나 위험한 일을 당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이 술 취한 남자도 실연당하기 전에는 아마 정상적인 남자였을 것이다.그 남자는 지금 하예진에게 아
하예진은 한참을 침묵하더니 그제야 입을 열었다.“우빈이 이모부께서 우빈에게 별장을 하나 사주셨거든. 그것도 엄청나게 크고 아름다운 별장으로. 우빈이 이모가 사는 그런 별장을 사주셨어. 하지만 엄마가 계속 받아들이지 않았어.”“엄마가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건 돈 많이 벌어서 우리 우빈이를 공부도 시키고 좋은 생활도 마련해 주기 위해서야. 그리고 우빈이 이모의 든든한 후원자로 되고 싶었거든.”“엄마는 네 이모부의 별장을 받아들이면 네 이모에게 누를 끼치게 될 것 같아.”“사람들이 우리가 네 이모 덕에 사돈의 돈을 받아서 쓴다고 말하는 게 너무 싫어. 엄마가 돈을 많이 벌면 언젠가는 엄마의 능력으로 그런 별장에서 살 수 있을 거라 믿었거든.”“동명 아저씨와 정남 아저씨도 모두 그 부근에 별장이 있대. 우리가 이모의 별장을 받아들여 이사하게 된다면 지금보다 훨씬 안전할 거야. 엄마도 고민이야. 그 집을 받아들일지 말지.”“방금 만난 술에 취한 아저씨 일을 네 이모에게 알린다면 분명 우리 때문에 엄청나게 걱정하실걸. 하지만 말하지 않는다면, 또 앞으로 사고라고 나게 되면 네 이모가 깜짝 놀라게 될지도 몰라.”“네 이모가 금방 임신해서 너무 놀라면 안 되는데.”하예진은 무척 갈등했다.그 술 취한 남자는 지금 그녀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하예진은 아들이 걱정 되었고 자신 때문에 힘들어하는 여동생이 많이 놀랄까 봐 더 걱정했다.우빈은 겨우 3살 어린 아이였다. 녀석은 엄마의 걱정을 덜어드릴 수 없었다.“저는 이모와 함께 살고 싶어요. 동명 아저씨랑 정남 아저씨랑 함께 살아도 돼요.”아들이 대답한 말을 듣자 하예진은 결국 피식 웃고 말았다. 3살짜리 아이가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아들이 아무리 똑똑해도 겨우 세 살인데 엄마를 도와 이런 문제들을 분석할 수 없었다.유치원에 도착하자 하예진이 차를 세웠다.우빈이는 스스로 안전벨트를 풀고 그의 작은 가방을 메고 스스로 문을
전태윤은 따뜻한 물 한 잔을 따라오더니 하예진에게 건네며 입을 열었다.“처형, 저희가 결혼식을 앞당겨 치를 예정이에요. 하늘 리조트에 있는 별장 저랑 예정이가 처형을 위한 마음이라고 생각하고 받아주세요.”하예진이 있는 곳이 바로 하예정의 친정집이니 결혼식 치를 때가 되면 하예정은 언니 집으로부터 출발하게 될 것이다.하예진은 물잔을 건네받고 웃으며 말했다.“제부, 저도 마침 이 일 말하려고 찾으러 온 거예요.”그 말을 들은 전태윤은 기뻐하며 곧바로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가 서랍 속에 있던 열쇠 뭉치를 꺼내왔다.그리고 그 열쇠 뭉치를 하예진에게 가져다주며 말했다.“처형이 허락하면 언제든지 별장 열쇠를 가져다주려고 열쇠는 항상 제가 간직하고 있었어요.”하예진은 따뜻한 물 한 모금 마시고 열쇠뭉치를 보았다. 물의 따뜻함이 마음마저 따뜻하게 해주는 것 같다.하예정과 전태윤은 하예진을 지극정성으로 대해줬다. 전태윤은 부잣집 도련님이었지만 한 번도 하예정을 싫어한 적 없을 뿐만 아니라 처형인 하예진마저 더없이 존경했다.하예정은 말할 것도 없다.그녀는 스스로 돈을 벌 수 있을 때부터 언니에게 효도하기 시작했다.하예진은 임신하고 아이를 낳아 가정주부가 된 뒤 남편의 인색함에 수입이 아예 끊기고 말았다. 그때 그녀는 동생이 은밀히 가져다준 돈에 의지하며 힘겹게 견뎌냈다.동생이 없었다면 하예진은 그 몇 년을 버텨내기 힘들었을 것이다.“제부, 그 별장 제가 받아줄게요. 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어요. 가지는 게 아니라 제가 사는 거로 해요. 가격을 싸게 하더라도 공짜는 안 돼요. 그래야 제가 이사한 뒤에도 마음 편히 지낼 수 있죠.”전태윤은 하예진의 말을 듣자, 말문이 막혀 침묵을 지켰다.그는 하예진이 드디어 생각을 바꾼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다.다른 사람이라면 별장 하나를 돈 필요 없이 공짜로 준다면 엄청나게 기뻐할 텐데 하예진은 달랐다.그녀는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들을 데리고 셋방을 쓰더라도 그의 부부가 주는 집은 받지 않겠다고 견지하여 전태윤
하예진도 전태윤이 한 번에 승낙할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겠어요. 집에 가서 예정이랑 한번 얘기 나누세요. 그럼 전 레스토랑 가볼게요. 제부도 일 보고 계세요.”“처형 벌써 가시려고요?”하예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 제부는 일도 바쁘고 시간도 빡빡할 텐데 저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시면 제가 미안하죠. ”하예진의 임신 때문에 전태윤은 약속했던 신혼여행을 취소했다. 하지만 한 달 결혼 휴가는 취소하지 않았고 그 한 달 동안 하예진과 함께 관성 이곳저곳을 돌아보기로 결정했다. 관성은 워낙 컸기에 아직 돌아보지 못한 곳이 아주 많았다. 최근 전태윤은 결혼 휴가를 내려고 며칠 동안 야근을 하며 중요한 일들을 미리 처리하는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처형, 제가 엘리베이터까지 모셔다드릴게요.”전태윤은 하예진을 더는 붙잡지 않았고 그녀와 함께 회장실을 나와 엘리베이터 입구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 뒤에야 사무실로 돌아갔다.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온 하예진은 마침 회사로 돌아온 소정남을 만났다. “예진 누님.”소정남은 하예진을 보자마자 웃으며 다가와서 물었다.“누님 언제 오신 거예요? 벌써 가시려고요? 좀 더 계시지. 도움이 필요할 때 말씀만 해주시면 제가 꼭 해결해 드리겠습니다.”하예진이 웃음 어린 얼굴로 대답했다.“좀 일이 있어서 태윤 씨 찾으러 온 거예요. 큰일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태윤 씨 일하느라 바쁠 텐데 저도 이만 레스토랑 가보아야 할 거 같아요. 다음에 만나면 음식 대접할게요.”“좋아요. 누님 요리 솜씨가 예전보다 훨씬 나아졌던걸요. 얼마나 맛있던지 어제 누님 레스토랑에서 식사 마치고 돌아온 뒤에도 여운이 남아요.”하예진은 소정남의 칭찬에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소정남은 말솜씨가 대단해서 모든 사람과 웃음꽃 피우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제 요리가 그렇게 마음에 드시면 시간 될 때 오세요. 제가 직접 요리해 드릴게요.”“네, 꼭
“사장님 안심하고 다녀오세요. 저희가 있잖아요.”지금 이 시각에는 가게에 손님이 많지 않았고 이제 10시가 넘으면 아침 식사하러 오는 사람이 없으니 한가했다. 하지만 손님이 많을 때는 엄청 분주했다.물론 점원들은 영업이 잘되길 바란다. 영업이 잘되면 모두 안정한 수입을 얻을 수 있고 실직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 원래 노동명의 가게를 빌려 하루 토스트를 열었기에 하루 토스트는 노 씨 그룹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노동명이 막 하예진에게 고백했을 때 노 사모님이 두 사람을 격렬하게 반대하셨다. 하예진은 그때 노동명을 피하려고 가게를 이사할 생각까지 했었다. 다행히 마지막에 그녀는 태연하게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예진이 직접 차를 몰고 노 씨 그룹으로 향했다. 워낙 가까웠던지라 몇 분 만에 도착했다.노 씨 그룹 보위과 사람들이 하예진을 보고 얼른 회사 문을 열었다. 그리고 웃으며 하예진이 차를 몰고 회사로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하예진이 들어간 것을 확인한 경비원은 회사 문을 닫은 뒤 자리로 돌아와 동료에게 말했다. “내가 입사할 때 예진 씨도 갓 입사했네.”“그때 예진 씨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자넨 아마 모를 거야. 지금은 아주 예쁘지만, 예전에는 통통해서 보기 흉했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살투성이였어.”“예진 씨는 원래 회사 면접에서 떨어졌어. 마침 그때 노 대표님께서 오셨거든, 그래서 대표님이 예진 씨를 직접 채용했어.”그 동료는 후에 입사했기에 하예진의 예전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입사 후 그들의 보스인 노동명에게 연모의 대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전 씨 도련님의 처형 하예진 이었다.하예진은 다이어트를 성공한 뒤 노 씨 그룹에 발길이 뜸해졌다.특히 노동명이 그녀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더는 노 씨 그룹에 나타나지 않았다.새로 온 동료가 호기심에 찬 눈빛으로 물었다.“노 대표님이 그때부터 하예진씨를 좋아했던 거에요?”“그건 아마 아닐 거야. 하지만 대표님은 항상 예진 씨를 잘 대
하예진은 노동명의 사무실에 도착한뒤 노크하고 허가를 받고서야 문을 열고 들어갔다.노동명은 테이블 뒤에 앉아있었고 그의 옆에 휠체어가 놓여 있었다. 그가 밖으로 나가고 싶다면 스스로 상반신으로 몸을 일으켜 휠체어에 앉을 수 있다.평소에 그를 따라다니던 경호원 두 명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 1층에서 대기하고 있는 것 같다.노동명은 공무를 처리하기 위해서 회사로 돌아왔기에 경호원이 더는 그림자처럼 따라다닐 수 없었다.회사에서 도움이 필요할 때 그는 비서를 찾아 도움을 받을 수 있다.익숙한 발걸음 소리에 노동명을 고개를 들고 하예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책상으로 몸을 받치고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가려고 했다.하예진이 얼른 소리를 질러 그를 막았다.“움직이지 말고 앉아있어요. 그러다가 넘어지면 어떡해요.”노동명이 웃으며 대답했다.“알았어, 움직이지 않을게. 다리가 아직 힘을 잘 못 쓰네.”그래도 노동명이 금방 퇴원했을 때보다는 훨씬 나아졌다.“동명 씨 지금 많이 나아졌어요. 계속 열심히 노력하면 새해에는 정상인처럼 걸을 수 있을 거예요.”하예진이 다가와 아침밥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노동명이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설날까지 몇 달밖에 안 남았어.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새해에 정상인처럼 걷기는 무리인 거 같아. 최소 1년은 지나야 완전히 회복할 수 있다고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어. 그게 가장 이른 시간이래.”회복이 좋지 않으면 앞으로 2년은 더 휠체어를 타야 할 것이다.노동명은 현재 서른여섯 살이다. 회복할 시간이 2년 필요하다면 그는 서른 여덟 살이되고 하예진은 서른셋이다. 그때 그녀와 결혼하게 된다고 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그들이 사오십대가 될지라도 하예진과 여생을 약속할 수 있다면 노동명은 기뻐하며 기다릴 것이다. “1년 뒤에 회복해도 대단하죠. 동명 씨는 항상 훌륭한 사람이잖아요.”하예진의 칭찬을 들은 노동명은 웃으며 말했다.“당신 지금 날 우빈 이 취급하네. 어젯밤 돌아간 뒤 얘 깨지
전씨 할머니는 한 손에 꽃다발을 안고 다른 한 손으로 갓 구운 생선을 집어 전이혁에게 건넸다.“이런 작은 생선은 막 구웠을 때 먹는 게 맛있어. 식으면 맛이 없으니 따뜻할 때 먹어.”“고마워요, 할머니.”전이혁은 할머니가 건넨 생선을 받아 주저 없이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는 먹던 중에 핸드폰을 꺼내 전우에게 사진을 한 장 찍어 보냈다.전이혁은 전우와 나이도 비슷하고, 어릴 때부턴 전우와 함께 노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형제 중에서 전우와 가장 친했다. 그러니 그는 자랑하고 싶을 때는 무조건 전우를 찾았다.전이혁의 사진을 보자마자 전우는 가족 단톡방에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할머니, 낚시 가셨어요? 직접 구워 드시기까지 하네요. 많이 잡으셨어요? 저도 먹을래요. 지금 당장 갈게요.”전이혁은 일부러 약 올리듯 답장했다.“이젠 없어. 할머니께서 나 주려고 특별히 남겨둔 거야. 그러니 네 몫은 없어. 그리고 너 진짜 생선 한 조각 먹으러 올 거야? 손해가 클 텐데?”“돈은 언제든 벌 수 있지만 할머니표 생선구이는 언제나 먹을 수 있는 게 아니잖아.”할머니는 워낙 자유로워서 오전엔 리조트에 있다가도 오후에는 어디론가 훌쩍 떠나곤 했었으니, 큰 손자인 전태윤도 못 말릴 정도였다.부모 세대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수십 년간 할머니의 손에서 할머니의 기세에 눌려 살아왔기 때문에 할머니에게 잘 해드리는 것밖에 없을 뿐, 감히 할머니를 간섭할 수 없었다. 그나마 큰 손자인 전태윤이 할머니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인데 그마저도 성공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할머니는 그야말로 나이 든 개구쟁이였다. 할머니는 지금은 리조트에 있지만 다섯째 손자인 전우가 도착할 즈음이면 이미 어디론가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할머니는 웃으며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오늘은 많이 잡지 못했어. 넷째한테 줄 몇 꼬치만 남겨 놓고, 나머지는 다 먹었어. 먹고 싶으면 설 연휴 때 와서 직접 낚시해서 구워 먹어. 그래야 더 맛있지.”전우는 아쉬움으로
잠시 후, 차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아이는 고개만 돌려 살짝 보더니 다시 바비큐를 먹기 시작했다.“할머니, 저 왔어요.”멀리서 전이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이혁은 꽃다발을 안고 차에서 내린 후, 할머니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가는 길에 풍겨오는 바비큐 냄새는 정말 좋았다.“와, 냄새 진짜 좋네요. 이런 날씨에는 바비큐가 최고죠.”관성의 겨울 날씨는 정말 변덕스러웠다. 어제는 몸이 움츠러들 정도로 추워서 할머니들은 밖에 나갈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오늘은 기온이 확 올라와 정오 무렵에는 햇빛까지 쨍쨍하게 비추더니 약간 더운 느낌마저 들었다.관성의 사람들은 겨울에 가끔 이렇게 바비큐를 해 먹긴 하지만 보통은 휴일이 되어야 준비해서 해먹을 여유가 있었다.하지만 할머니는 달랐다. 할머니는 생각만 나면 언제든 자유롭게 바비큐를 즐길 수 있었다.그런 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전이혁은 자신이 나중에 결혼하고 아들이 성장하면 당장 사업을 넘겨주고, 자신은 조기 은퇴해 할머니처럼 여유로운 노후를 즐길 계획이었다. 그것은 신선놀음보다 더 행복한 삶이었다.“넷째 도련님.”양씨 아저씨가 미소를 지으며 전이혁에게 안부를 물었다.전씨 할머니와 함께 수다를 떨고 있던 여러 할머니도 전이혁에게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다.그들은 전씨 할머니가 무려 아홉 명의 손자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무척 부러워했다. 아직 사회에 나오지 않은 막내 두 명을 제외한 다른 일곱 명의 손자는 이미 뛰어나고 유능한 인물들로 소문나 있었다. 게다가 막내 두 명은 비록 사회에 나오지 않았지만, 그들은 성적이 우수했고 앞날도 창창했다. 그뿐만 아니라, 할머니에 대한 효심도 지극했었다.전씨 가문은 자손들이 하나같이 훌륭했고 가업도 재산도 어마어마했으니, 그야말로 할머니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그들은 가끔 함께 수다를 떨며 힘들었던 시절을 회상하곤 했었다. 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그 시절에도 그들보다 훨씬 잘 살았고, 그때부터 이미 가문에서 주름잡는 존재였다. 결국 훌륭한 어른이
여자아이의 말을 듣고 있던 전씨 할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그 여자아이를 불렀다.“소령이, 이리 와봐.”여자아이는 깡충깡충 뛰어갔다.“어르신, 닭 다리 다 구워졌어요?”여자아이는 전씨 할머니가 자신에게 닭 다리를 주려고 부른 줄 알았다.전씨 할머니는 여자아이를 안아 올리며 웃었다.“아직 다 안 구워졌어. 조금만 기다리면 먹을 수 있을 거야.”“그런데 왜 양씨 아저씨의 자리를 잇고 싶다고 했지?”전씨 할머니가 여자아이를 예뻐한다는 건 리조트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전씨 가문은 몇 대째 아들만 태어났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딸을 가지길 원했었고, 그것이 안 되자 손녀를 기대해 보았지만, 매번 실망으로 마무리되었다.할머니는 이제 증손녀를 기대해 보기로 생각했다. 하지만 할머니가 증손녀를 안을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할머니는 종종 직원들에게 집에 여자아이가 있으면 관성으로 데려와 학교도 보내고 같이 생활하라고 말했었다. 그리고 시간이 되면 리조트에 있는 놀이공원에 놀러 오라고도 했었다. 그것은 할머니가 여자아이들이 리조트에 놀러 오게 되면 손주며느리들이 그 모습을 보고 할머니한테 증손녀를 안겨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양씨 아저씨는 참 멋있는 사람이에요. 많은 사람들을 관리하고 돈도 많이 벌잖아요. 양씨 아저씨가 사는 집도 아주 예뻐요. 저도 양씨 아저씨처럼 되고 싶어요.”그 여자아이는 겨우 세 살밖에 안 됐지만 머리가 총명하고 말도 잘해서 가끔 그 여자아이가 하는 말을 들으면 어른들이 놀랄 정도였다. 게다가 여자아이는 부모도 가르친 적이 없는 말을 스스로 내뱉곤 했었다.우빈이도 가끔 서원 리조트에 올 때마다 리조트에서 내려와 그 여자아이와 함께 신나게 놀곤 했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여자아이가 리조트에 올라와 우빈이와 함께 놀기도 했었다.“아까 양씨 아저씨가 한 말 잘 들었지? 네가 컸을 때는 양씨 아저씨는 이미 은퇴하고 다른 사람이 저 자리에 있을 거야. 그 사람이 은퇴한 다음에야 네 차례가 오게 돼. 그보
할머니는 함께 있는 몇몇 친구들에게 말했다.“날씨가 좀 쌀쌀하네. 우리 따뜻하게 몸도 데울 겸 한 잔씩 할까?”“어르신.”전씨 할머니가 술을 마시자고 하자 양씨 아저씨는 바로 할머니를 제지했다.“어르신 술 마시면 안 됩니다. 큰 도련님께서 아시면 또 어르신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다며 저를 혼내실 거예요.”“양 집사가 말하지 않으면 누가 알겠어?”“태윤이는 점점 자기 할아버지를 닮아가는 것 같아. 온갖 걸 다 간섭하려 들어.”할머니는 손자인 전태윤이 자신을 간섭하려 든다며 투덜거렸다.그러자 함께 있는 몇몇 할머니들이 웃기 시작했다.“큰 도련님께서 어르신 건강이 걱정돼서 그러는 거죠. 저희 나이에는 술도 적게 마시는 게 좋잖아요.”“과일주는 괜찮아. 양 집사, 가서 과일주 두 병 가져와. 바비큐에는 술이 있어야 제맛이지.”양씨 아저씨는 더 이상 아무 반박도 하지 못하고 리조트에 전화해서 과일주 몇 병을 가져오도록 했다.그들이 직접 잡은 생선 외에도 양씨 아저씨는 몇몇 어르신들이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바비큐용 식재료를 다양하게 준비했다. 어르신들 옆에는 아직 유치원에 들어가지 않은 어린아이들도 있었고, 양씨 아저씨는 그들을 위해 과일 주스를 준비해 두었다. 덕분에 그들은 기분 좋은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전씨 할머니는 이렇게 노인과 아이들이 함께 있는 따뜻한 분위기의 생활을 참 좋아했다. 게다가 내년엔 첫 증손주가 태어나니 할머니는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졌다.할머니는 자신이 구운 소시지 한 꼬치를 여자아이에게 건네주고 그 아이의 높게 올려 묶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우리 소령이 갈수록 예뻐지네. 반짝이는 눈 좀 봐. 네 엄마가 너를 ‘소령이’라고 부르는 게 딱 맞아.”그 여자아이는 소시지를 건네받으며 귀엽게 인사했다.“감사합니다, 어르신.”전씨 할머니는 인자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또 뭐 먹고 싶어? 할머니가 구워줄게.”“닭 다리요.”여자아이는 전씨 할머니가 익숙한 듯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전씨 할머니에게 닭 다리를 구워
“할머니, 제가 뭐가 똑똑해요, 전 진짜 멍청해요. 할머니야말로 대단하신 분이죠.”전이혁은 할머니께 아부하는 멘트를 던졌다.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아부라고 할 수 없는 게, 할머니는 정말 대단한 인물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전씨 가문 자손들은 이미 충분히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할머니의 손바닥 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할머니는 마치 삼장법사였고 자손들은 손오공 같은 존재로 손오공이 아무리 강해도 삼장법사 앞에선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할머니, 저 진짜 꼼수 같은 거 부리지 않아요.”“그건 네 사정이고. 어떻게 하든 네 마음대로 해. 할머니는 이미 너에게 신붓감을 골라줬고, 대시하든 포기하든 그것 역시 너에게 달린 일이야. 1년이면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줬다고 생각한다.”“하지만 한 가지 경고할게. 지금까지 우리 전씨 가문에는 일편단심인 남자만 있었을 뿐 양다리를 걸치는 남자는 없었어. 네가 전씨 가문의 가풍을 망가뜨리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전이혁은 최대한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알겠어요, 할머니. 저 이제 운전해야 해요. 도착해서 또 이야기 나눠요.”“그래, 운전 조심하고.”할머니는 전이혁에게 안전을 당부하고 전화를 끊었다.전화를 끊은 뒤, 할머니는 곧장 양씨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양 집사, 내 생선은?”할머니는 자신이 잡은 생선을 혹시 다른 사람이 먹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양씨 아저씨는 웃으며 대답했다.“어르신께서 구운 생선은 냄새가 정말 좋아요. 아무도 어르신의 생선을 뺏어 먹으려 하지 않으니 안심하세요.”그들 몇몇 자식들 따라 직원 숙소에서 지내는 할머니들은 전씨 할머니가 좋은 분인 걸 알고 함께 수다도 떨고 낚시도 하지만 전씨 가문의 중심인 전씨 할머니의 권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은 전씨 할머니의 물건을 건드리는 일은 없었다. 혹시나 건드렸다가 이곳에서 일하는 자식들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었으니까.서원 리조트의 모든 직원은 훌륭한 대우와 복지를 받고 있었다. 산기슭에 지어진 숙소는 혼자인
두 사람은 함께 아침을 먹은 후, 방을 나섰다.그러자 집사는 전태윤이 다음에 올 때 묵을 수 있도록 스위트룸을 원래 상태로 정리하기 시작했다.도아영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서 다시 잠을 청했다.전이혁은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고, 할머니가 전화를 받자 물었다.“할머니, 지금 어디 계세요?”“리조트에 있어. 무슨 일이야? 할머니 보고 싶어? 그렇다면 와서 할머니랑 같이 밥 한 끼 먹자.”그러더니 할머니는 한 마디 덧붙였다.“지금 생선이 막 익었어. 냄새 진짜 좋다.”전이혁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아침부터 생선 구워 드세요?”“너한테 말한 거 아니야. 친구들이랑 얘기 중이었어. 아침부터 생선 구우면 안 돼? 그리고 지금 아침도 아니잖아. 아홉 시도 넘었네, 해가 중천에 뜨려고 하고 있어.”“오늘 날씨도 풀렸고, 할머니는 친구들이랑 낚시 갔다가 지금은 잡은 생선 구워 먹고 있어. 소풍하는 느낌이라 꽤 괜찮아.”전이혁은 그 모습이 쉽게 그려졌다. 산 아래에는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고 물 아래에는 물고기와 새우들이 헤엄치고 있었다.할머니는 가끔 몇몇 직원들의 어머니들과 함께 낚시하곤 했었다. 냇가에는 큰 나무 한 그루 있었는데 그 아래에는 돌로 된 테이블이 몇 개 있어 할머니의 한마디면 집사는 바비큐 그릴을 가져와 그들이 직접 구워 먹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할머니가 말하길, 그들은 먹는 것보다는 굽는 과정을 더 즐겼다. 비록 직원이 구워줄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다른 사람이 구워주는 건 맛이 없다며 투덜대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 먹지 못할 때면 남은 건 직원들에게 나눠주기도 했었다.서원 리조트의 직원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할머니는 권위를 내세우며 직원들에게 막 대하지 않고 옆집 할머니처럼 따뜻하게 대해준다는 사실을.“할머니, 생선 더 잡아서 구워주세요. 저 지금 갈게요.”전이혁은 결심한 듯 할머니에게 진실을 털어놓으러 갈 생각이었다.“네가 와서 직접 잡아. 손질까지 하면 할머니가 구워줄게.”그러더니 할머니는 전이혁에게 물었다.“
“여긴 호텔 맞고, 당연히 아영 씨가 묵던 방일 수가 없죠. 어제 아영 씨가 취해서 방에 데려다줬는데 눕자마자 토하더라고요. 침대랑 바닥까지 모두 엉망이 돼서 어쩔 수 없이 다른 방으로 옮겼어요.”전이혁은 다시 자리에 앉더니 도아영에게 말했다.“아영 씨 술 취하면 정말 감당하기 힘들어요. 앞으로 술 좀 줄이는 게 좋을 것 같네요.”도아영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뗐다.“제가 전이혁 씨랑 함께 많이 마신 건 알겠는데 그 뒤로는 기억이 하나도 안 나네요. 그런데 그 술 진짜 맛있었어요. 제가 해주시로 돌아갈 때 한 박스만 챙겨줘요. 기분 안 좋을 때 집에서 한두 잔 마시려고요.”“아영 씨가 그 정도로 술이 부족하진 않을 텐데요?”전이혁은 도아영의 집에 좋은 술이 부족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는 도아영의 말이 전혀 믿기지 않았다.“맞아요. 술이 부족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전이혁 씨가 준 술은 부족하죠.”전이혁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그래요. 아영 씨가 돌아갈 때 한 박스 챙겨줄게요. 그리고 관성 특산물도 좀 챙길 테니 같이 가져가요. 어찌 되었든 먼 길 왔는데 헛걸음하게 하면 안 되니까요.”도아영은 웃으며 대답했다.“맞아요. 헛걸음하게 만들면 안 되죠.”그러더니 그녀는 전이혁의 옆으로 다가가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전이혁 씨, 여기 꿀 있어요? 머리가 아파서 그러는데 저 꿀물 좀 타 주면 안 돼요?”“아까는 참을 만하다면서요?”전이혁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일단 세수 좀 하고요. 그리고 타 줄게요. 아영 씨도 세수해요.”“목욕할 거면 아영 씨 방에 가서 해요. 여긴 우리 형이 자주 묵는 스위트룸인데, 아영 씨니까 형이 허락한 거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형수님이 부탁해도 절대 안 된다고 했을 거예요.”전이혁의 큰형과 형수님은 도아영이 할머니께서 정해준 자신의 신붓감이라는 걸 알고,이미 도아영을 가족이나 다름없이 생각하고 있었다.어젯밤, 전이혁이 그런 말을 했을 때 도아영은 살짝 기분이 상했었다. 하지만
전이혁은 얼른 도아영을 부축하더니 살짝 귀찮다는 듯이 물었다.“아영 씨, 또 왜 그래요?”“저... 화장실... ”도아영은 눈이 풀린 채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화장실 가고 싶어요?”도아영은 비틀거리며 제대로 걷기도 힘든 상태였고 전이혁의 표정은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 도아영을 혼자 화장실에 가게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남자인 자신이 부축해서 데려가는 것도 난감한 일이었다.도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전이혁은 급히 그녀를 부축하며 다시 한번 물었다.“혼자 괜찮겠어요?”도아영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녀는 이미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를 정도로 심하게 취해 있었다.도아영의 상태를 보아하니 전이혁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부축해 화장실로 데려가야 했다. 전이혁은 가면서도 입으로는 끊임없이 투덜거렸다.그는 도아영을 화장실로 들여보내고 도망치듯 밖으로 뛰어나왔다.전이혁은 도아영이 나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10분이 넘도록 나오지 않았고, 노크를 해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결국, 전이혁은 걱정된 마음에 문을 살짝 열어 안을 들여다봤지만 무슨 일인지 도아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어? 어디 간 거야?’전이혁은 의심스러운 마음에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가 보았다. 그 결과, 도아영은 화장실 문 옆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러니 문틈 사이로 도아영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이 여자 진짜!”도아영의 모습을 보자, 전이혁은 앞으로 절대 그녀에게 술을 많이 마시게 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전이혁은 앞으로 자신이 도아영과 함께 밥을 먹게 된다면 그녀에게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자신 말고는 도아영이 다른 누구와 함께 얼마나 마시든, 그건 전이혁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전이혁은 안으로 들어가 도아영을 안고 나온 뒤,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그는 원래 방으로 돌아가 쉴 예정이었지만, 도아영의 상태를 보아하니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결국 그날 저녁,
한편 호텔에서 도아영을 돌보던 전이혁은 전창빈의 메시지를 확인하더니 단독으로 그에게 음성 메시지로 물었다.[너 그 먼 곳까지 가서 가정 요리사를 하려고?]전창빈은 소파에 앉아 답장을 보냈다.[안 될 건 없지? 선우씨 가문의 가정 요리사 자리는 도전적이잖아. 내가 합격할 수 있을지 시험해 보고 싶었어. 다행히도 형 동생이 모든 경쟁자를 물리쳤지 뭐야. 난관을 하나둘씩 돌파했어.]전이혁이 회답했다.[요리사 하나 뽑는 걸 대통령 선거처럼 하는구먼. 얼마나 있을 계획이야? 설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명절에는 안 오려고?]전창빈이 답장했다.[설날에는 아마 못 갈 것 같아. 여기 주인이 날 해고하면 그때나 갈 수는 있겠는지.]전이혁이 피식 웃었다.[네 실력으로는 해고당할 리가 없잖아. 네가 주인을 해고하는 게 더 말이 되겠다. 이해가 안 가. 왜 그 먼 곳까지 가려고 한 거야? 넌 사업도 있는데... 어디서 요리하든 다 마찬가지일 텐데 굳이 몇천 리나 떨어진 곳까지 갈 필요가 있나? 거기 추울 텐데 너 괜찮겠어?]전창빈이 대답했다.[우리 추위를 못 타본 것도 아니고. 형도 할머니에 의해 눈이 수북이 쌓인 산으로 버려지지 않았어? 내 얘긴 그만하고... 형은 어때? 우리 미래의 형수님께 구애하기 시작했어?]‘난 벌써 움직이고 있는데 형이 아직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내가 나중에 민아 씨와 함께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러 갈 때 형은 대체 어쩌려고?’전창빈은 속으로 생각했다.전씨 할머니의 지팡이가 전창빈의 등짝을 때리지 않는다면 해가 서쪽에 뜨는 거나 다름없을 것이다.[말도 마라. 정말 귀찮아. 큰형수님이 오늘 저녁에 우리한테 밥 사주셨어.]전창빈이 웃으며 회답했다.[하하! 괴로웠겠네.][내 말이. 할머니께서 나에게 정해주신 그 여자분이 큰형수님을 찾아가 하소연했더니 큰형수님이 우리 두 사람에게 밥을 사주신 거 있지.][형이 우리 형수님한테 무슨 짓이라도 했어?][아직 너의 형수님이 아니거든!]전이혁은 전창빈의 호칭을 정정했다. 그는 도아영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