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예정이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나도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그럼 마음도 덜 아프지. 그런데 진짜 친할머니 맞대요.”‘거의 우리 할머니에 버금가는 수준이라니까.’하예정은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감기 걸린 정한이를 데려와서 우빈이한테 옮겨놓으려고 했어요. 우빈이가 아프면 우리 언니도 시름 놓고 출근하지 못할 테니까요! 분명 휴가 내고 우빈이 돌보려고 할 거예요. 출근한 지 이틀 만에 자꾸 휴가 내면 언니는 직장에서 잘릴 거예요.”주씨 집안 사람들은 하예진이 출근하는 걸 막기 위해 별의별 짓을 다 했다.하예진이 직업을 찾았으니 이젠 이혼만 하면 된다. 하예정은 언니가 하루빨리 이혼하고 지옥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예정 씨, 언니분 시어머니는 왜 언니가 출근하는 걸 반대해요?”성소현이 물었다.하예정은 빗자루를 들고 안으로 들어가다가 주우빈이 나오자 허리 숙여 아이를 안아 올렸다.“그 인간쓰레기 같은 형님이 두 아이를 도시 학교에 보내고 싶은데 우리 언니가 마침 학교 근처에 살아서 그 집을 노리고 있어요. 머저리 형부더러 그 집을 본인 명의로 바꾸라고 하잖아요. 그렇게 되면 두 아이가 좀 더 좋은 중학교에 다닐 수 있거든요. 그런데 형님이란 인간은 직장에 출퇴근해야 해서 아이 뒷바라지를 못 해요. 그래서 우리 언니더러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주고 밥도 해주고 숙제도 가르쳐주라고 하잖아요 글쎄! 물론 언니가 거절했어요.”“언니는 겨우 직장을 찾아서 인제 매일 출근해요. 그 집 사람들 우리 언니를 부려먹기 위해 이런 비겁한 수법을 생각한 거예요. 부모가 돼서 왜 그렇게 딸만 편애하는지 모르겠어요. 형부도 마찬가지예요. 제 누나만 챙기려 하잖아요. 전에는 다들 우리 언니한테 잘해줘서 시집 잘 갔다고 생각했어요. 결혼한 뒤에도 나름 괜찮았어요. 문제는 우빈이 낳고 나서부터죠. 그 집 사람들 아이가 생기니 슬슬 본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어요. 우리 언니가 집에서 아무 일도 안 하고 종일 애만 본다고 잔소리를 했어요. 돈은 엄청 쓰면서 벌 생각은 없다고
“언니, 언니 이젠 일자리도 찾았으니까 주형인한테 이혼 얘기 꺼내도 돼.”하예정은 언니가 하루빨리 이혼하길 바랐다. 심효진과 성소현도 맞장구를 쳤다.“빨리 이혼해서 빨리 벗어나야죠.”하예진은 아들의 귀여운 얼굴을 내려다보며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저녁에 형인 씨가 퇴근하면 이혼하자고 얘기할 거야.”그녀는 이미 주형인이 외도한 증거를 갖고 있었다. 그의 외도 증거를 손에 넣었을 때 그녀는 바로 까발리지 않았다. 아직 일자리도 없고 안정된 수입이 없는 탓에 아들의 양육권을 가져오기 힘들었기 때문이다.곧 새해도 되고 해서 원래는 첫 월급을 받은 후에 이혼 얘기를 꺼낼 계획이었지만 오늘 시어머니의 행동을 보니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그녀에게 매정하게 군다면 몇 번이고 참겠지만 주우빈에게 상처를 준다면 그녀는 절대 참지 않을 것이다!이틀 전 시어머니와 주서인이 왔을 때 하예진은 주서인이 동생에게 정한이 독감에 걸려 아직 낫지 않았다고 얘기하는 걸 들었다. 시아버지는 정한이 주우빈에게 옮겨놓을까 봐 주서인에게 정한을 데리고 오지 말라고 했다.그런데 하예진이 출근한 후 시어머니는 아직 낫지 않은 정한을 데려왔다. 일부러 주우빈에게 독감을 옮겨 그녀가 마음 편히 출근하지 못 하게 한 다음 회사에서 잘리길 바란 것이었다. 사람이 어찌 이런 독한 마음을 품을 수가 있는지...‘내가 출근하지 않으면 주서인의 애를 봐줄 것 같아? 꿈 깨!’“예진 언니.”성소현은 살이 통통하게 오른 하예진을 볼 때마다 자꾸만 예전에도 알던 사이처럼 익숙하게 느껴졌다. 그 익숙함에 성소현은 하예진과 가까이 지내고 싶었다.‘이상하단 말이야. 전생에 이 두 하씨네 자매랑 자매였나?’성소현은 자기 생각대로 움직이는 성격이었다. 하씨네 자매와 가까이 지내고 싶은 그녀가 진심으로 말했다.“예진 언니, 이혼할 때 소송해야 한다면 나한테 얘기해요. 가장 좋은 변호사를 찾아서 도와줄게요. 언니가 쟁취해야 하는 건 그 사람들한테 빼앗기지 말고 끝까지 쟁취해요. 그리고 우빈이 양육권도 꼭 가
주우빈은 엄마 품에서 바로 단잠에 빠졌다.하예진은 아들이 잠든 틈에 아들을 여동생에게 맡겼다. 동생네 부부가 주우빈을 챙기려고 가정부까지 구했다는 걸 안 하예진은 그들에게 고맙기 그지없었다.아직 그녀가 완전히 일어서지 못했기에 두 사람의 은혜를 마음속에 간직했다가 나중에 일어서면 제대로 보답할 생각이었다.하예진은 곧장 출근하러 갔다.유일한 절친의 전화를 받은 성소현은 하예정과 심효진에게 인사한 후 부랴부랴 가버렸다.“효진아, 먼저 가게에서 우빈이 봐줘. 숙희 아주머니랑 침구 용품 좀 사고 올게.”하예정은 숙희 아주머니가 쓸 침대, 서랍, 침구 용품을 사야 한다는 걸 잊지 않았다.“알았어.”심효진이 흔쾌히 알겠다고 했다. 지금부터 학생들이 수업이 끝나기 전까지는 아주 한가한 시간이라 그녀는 늘 소설이나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숙희 아주머니가 말했다.“예정 씨 혼자 가서 사도 돼요. 이따가 우빈이 깨어나면 봐줄 사람이 있어야 하잖아요.”주우빈에게 그런 할머니가 있다는 걸 안 숙희 아주머니는 너무도 마음이 아팠다. 성소현의 말대로 이렇게나 귀여운 아이를 어찌 미워할 수 있냐는 말이다. 그녀가 속으로 생각했다.‘예진 씨가 아들을 낳았는데도 시댁에서 우빈이한테 이러는데 만약 딸이었으면 어땠겠어. 그래도 예진 씨가 이혼하겠다고 마음먹어서 다행이야. 저런 시댁이라면 진작 이혼했어야 해.’숙희 아주머니가 남아서 주우빈을 돌보겠다고 하자 하예정은 혼자 차를 운전하여 숙희 아주머니가 쓸 침대와 서랍을 사러 갔다. 그렇게 온 오후 돌아다니고 나서야 모든 일을 마쳤다.해 질 무렵 가게로 돌아와 바쁜 시간을 보낸 후 퇴근한 언니가 주우빈을 데리러 왔고 심효진도 집으로 돌아갔다. 하예정과 숙희 아주머니 둘이서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30분 후, 전태윤이 가게로 왔다.“오늘은 야근 안 해요?”차분한 발걸음으로 걸어오는 남편의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에 하예정은 마음이 설렜다. 그의 비주얼은 뭐 말할 것도 없었고 남성적인 매력이 흘러넘쳤다.“급한 일만 마무리하고
그런데 아쉽게도 그의 친구들도 하나같이 경험이 없었다. 그렇다고 할머니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할머니가 아시면 얼마나 웃으시겠는가 말이다.얼마 전에 할머니 앞에서 절대 와이프에게 목을 매지 않겠다고 장담했던 것만 생각하면 전태윤은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런데 굳이 목을 매지 않아도 하예정은 이미 그의 아내다.“걱정해줘서 고마워요. 몸 상하지 않게 쉬면서 할게요.”하예정은 민첩하고 교묘한 두 손으로 자동차를 만들고 있었다.“태윤 씨, 먼저 아주머니랑 집에 가 있어요. 갈 때 봄이랑 얘네들 데려가는 거 잊지 말고요.”전태윤이 눈살을 찌푸렸다.“싫어, 안 데려가.”“그럼 아주머니한테 맡겨요. 지금 가게도 바쁜 타임이 아니라서 두 사람 여기 있어 봤자 도와줄 것도 없어요. 차라리 집에 가서 아주머니한테 방 정리나 하라고 하세요.”“나랑 있는 게 그렇게 싫어?”하예정은 그를 힐끗 올려다보더니 이내 하던 일을 계속하며 피식 웃었다.“태윤 씨 참 예민한 사람 같아요. 솔직하게 말해서 싫은 건 아니에요. 그럼 말해봐요, 여기 남아서 뭘 도와줄 수 있는지?”전태윤은 얼굴만 찌푸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공예품을 만들 줄도 모르고 물건을 팔아주려고 해도 표정이 너무 심각하여 학생들이 놀랄 게 뻔했다.현실 앞에서 전태윤은 자신이 아무 도움도 줄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할머니는 왜 하필 이렇게 뭐든지 다 잘하는 와이프를 찾아준 거야? 내가 나설 기회가 없잖아!’전태윤은 속으로 할머니를 탓했다. 만약 할머니가 그의 생각을 들었더라면 이렇게 얘기했을 것이다.“어차피 예정이랑 반년 계약을 했으니 계약이 만료되면 이혼할 거잖아.”전태윤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못 하자 숙희 아주머니가 나서서 말했다.“예정 씨, 저 갈아입을 옷만 몇 벌 가져와서 정리할 것도 없어요. 그러니까 그리 급하게 안 가도 돼요.”그들 모두 집에 갈 생각이 없자 하예정도 더는 뭐라 하지 않았다.두 사람 사이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숙희 아주머
사실을 확인받은 하예정은 성소현 대신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대표님한테 아내가 있다니... 소현 씨 포기해야겠어요.’그녀는 성소현이 하루빨리 전씨 가문의 도련님에 대한 마음을 접고 그녀만의 행복을 찾길 바랐다.“도련님이 결혼했는데 왜 아무 소식도 전해진 게 없는 거죠?”성소현마저도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게 이상했다.“자기 와이프를 지키려고 그러겠지. 우리 대표님 잘생긴 데다가 젊고 돈도 많아. 대표님을 본 젊은 여자라면 저도 모르게 마음이 끌릴걸? 공개적으로 고백한 여자가 성소현 씨밖에 없다고 해서 대표님을 좋아하는 여자가 적다는 건 아니야. 다른 여자들은 그럴 용기가 없는 거지. 대표님은 사랑하는 아내의 신분과 얼굴이 공개되면 아내한테 성가신 일이 자꾸 생기고 방심한 틈에 누군가 아내를 다치게 할까 봐 걱정돼서 그래.”“다른 사람은 몰라도 소현 씨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사람들이 소현 씨에 대한 오해가 너무 커요. 전씨 가문 도련님이 소현 씨를 좋아하지 않는 건 두 사람의 인연이 아니라는 거겠죠.”하예정이 한숨을 내쉬었다.“소현 씨가 하루빨리 상처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네요. 이 세상에 좋은 남자는 많으니까 굳이 도련님한테만 목을 맬 필요는 없잖아요.”전태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아 참, 태윤 씨 드디어 대표님의 얼굴을 봤네요. 어때요? 잘생겼어요? 얼굴은 늙었던가요?”전태윤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왜 자꾸만 날 늙은 남자로 생각하는 거지? 인제 고작 30살인데. 남자 30살은 아직 엄청 젊다고!’“잘생겼어, 늙지도 않았고. 아무튼 엄청 매력 있어. 내가 만약 여자였다면 나도 우리 대표님을 좋아했을 거야.”하예정이 히죽 웃었다.“태윤 씨랑 비하면 어때요?”전태윤이 잠깐 멈칫하다가 말했다.“음... 내가 조금 더 잘생긴 것 같은데.”하예정이 웃음을 터뜨렸다.“지금 자뻑하는 거 아니죠? 전씨 가문의 도련님을 뵌 적이 없어서 누가 더 나은지 판단할 수가 없네요.”숙희 아주머니는 구석에서 입을 막고 웃음을 참느라 배가
평소 밀린 주문을 해결하느라 늘 늦은 밤이 돼서야 가게 문을 닫았다. 하예정이 그를 보며 말했다.“태윤 씨 아직 그 정도로 영향력이 크진 않아요.”전태윤이 입을 꾹 다물었다.“언니가 오늘 저녁에 주형인한테 이혼 얘기를 꺼내겠다던데... 조금 걱정돼요.”“그럼 나랑 같이 보러 갈래?”하예정이 시간을 확인했다.“이 시간이면 아직 주형인이 집에 들어오지 않았을 거예요. 평소 늘 한밤중에 들어온대요.”두 자매가 어리석은 탓도 조금은 있었다. 주형인이 사장으로 승진한 후 일도 바쁘고 술자리도 많아 한밤중에 집에 들어오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내연녀와 함께 있었던 것이었다.“처형을 믿어. 처형이 알아서 잘할 거야.”전태윤은 그녀에게 이런 위로밖에 건넬 게 없었다. 하예정이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왠지 자꾸만 순탄치 않을 거란 예감이 들어요. 주씨 가문 사람들이 얼마나 뻔뻔한데요. 그 사람들 언니를 회사에 나가지 못 하게 하려고 우빈이를 일부러 아프게 할 생각까지 했다니까요.”그녀는 김은희가 한 짓을 전태윤에게 곧이곧대로 얘기했다. 그러자 전태윤의 낯빛이 말이 아니게 어두워졌다.“우빈이는 괜찮아?”“아직은 감염됐는지 안 됐는지 몰라요. 언니가 그러는데 정한이가 걸린 게 독감이라서 다른 애들한테 쉽게 전염된대요. 우빈이 평소 건강하고 면역력도 높아서 아무 일도 없길 바라야죠.”“처형에게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우리한테 전화하라고 해. 그리고 이혼할 때 쟁취할 건 끝까지 쟁취하고. 특히 우빈이 양육권은 반드시 가져와야 해. 우빈이를 그런 사람들한테 맡겼다간 어떤 학대를 당할지 몰라.”주형인에게 애인이 생긴 데다가 일도 바빠서 아이를 돌볼 시간이라곤 있을 리가 없다. 하여 주우빈을 무조건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맡길 게 뻔했다.주형인의 부모는 맨날 주서인의 아이만 돌봐서 편애가 심했다. 주우빈이 그런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지낸다면 보살핌이라곤 전혀 받지 못할 것이다.하예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 사람들 모두 언니에게 같은 말을 했었다.“
전태윤과 하예정이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때 전태윤이 물었다.“언니 집에 가볼래?”하예정이 휴대전화로 시간을 확인했다.“주형인이 아직 안 들어왔을 거예요.”그녀가 잠깐 머뭇거리다가 계속 말을 이었다.“언니 일은 언니가 알아서 해결하게 놔두는 게 좋겠어요. 내 도움이 필요할 때 언니가 말만 꺼내면 최선을 다해 도와줄 거예요.”전태윤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휴대전화로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러더니 몇 분 후 갑자기 그녀에게 말했다.“너 기분도 안 좋아 보이는데 오늘은 그만 문 닫는 게 어때? 나랑 바람이나 쐬러 가자.”하예정이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말했다.“딱히 가고 싶은 곳이 없어요.”언니의 결혼 얘기만 꺼내면 하예정은 기분이 확 다운되었다.두 자매는 오랜 시간 서로 의지하면서 살아왔다. 언니가 결혼하면 행복하게 살 줄 알았는데 현실은 그야말로 잔혹하기 그지없었다.이제 언니의 결혼 생활도 곧 끝나가고 그녀와 전태윤도 힘들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니 앞으로 어떤 결과가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팔자가 사나운 사람은 행복할 자격도 없단 말인가?“가고 싶으면 가자. 나머지는 나한테 맡기고.”평소 하예정을 보는 그의 눈빛이 항상 차가웠기에 눈빛으로 그의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눈빛에는 그녀에 대한 걱정이 담겨있었다.그 순간 마음이 따뜻해진 하예정은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 그럼 지금 문 닫을게요. 나가서 바람이나 쐬자고요.”그때 카운터 밑에 앉아있는 봄이를 본 하예정이 다정하게 물었다.“아주머니랑 봄이, 얘네들은 어떡해요? 먼저 집에 데려다줄까요?”그러자 전태윤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왜요?”“차 키 줘.”하예정이 차 키를 꺼내며 물었다.“아주머니 운전할 줄 알아요?”“알아.”일하는 사람을 뽑을 때 요구 조건 중 하나가 운전면허가 있는 사람이었다. 어쨌거나 그들이 사는 곳이 시끌벅적한 시 중심과 꽤 거리가 있으니 말이다. 만약 운전할 줄 모른다면 한번 외출하기 어렵다.전태윤은 차
그녀의 말에 전태윤이 눈살을 찌푸리며 뭐라 하려는데 하예정이 가로챘다.“나랑 효진이 다른 거로라도 소현 씨한테 갚을 거예요. 절대 공짜로 받지 않아요.”성소현이 물건을 이곳에 가져다 놓으니 그녀와 심효진도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받지 않으면 성소현이 화를 낼지도 모르니 일단 받는 수밖에 없었다.물건을 정리하던 두 사람은 성소현이 가져온 물건의 값어치가 어느 정도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 아무래도 나중에 무슨 수를 써서든 성소현에게 돌려줘야겠다.“공짜로 받는지 안 받는지, 그 문제가 아니야. 가뜩이나 크지 않은 가게에 책장이랑 진열대도 가득한데 성소현 씨는 계속 물건을 잔뜩 가져오잖아. 너한테 팔라고 준 것도 아니고, 괜히 자리만 차지해.”사실 전태윤은 기분이 매우 언짢았다. 아직 그가 아내의 가게에 자리를 잡기도 전에 성소현이 먼저 차지했으니 말이다. 맨날 그의 아내를 독차지하려는 성소현은 김진우보다도 더 괘씸했다. 왜냐하면 성소현은 여자니까. 그렇다고 해서 하예정에게 이런 얘기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자기야, 난 자기가 성소현 씨랑 가깝게 지내는 게 싫어. 나 질투 나니까 그 여자랑 당장 연락 끊어.”만약 그가 이런 얘기를 한다면 하예정은 아마 괴물을 보듯 그를 볼 것이고 어쩌면 얻어맞을지도 모른다.“집이 널찍하니까... 아니면 먼저 집에 가져갈래요?”전태윤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성소현이 산 물건을 그녀의 가게에 가져다 놓은 것도 언짢은데 집에까지 들여다 놓는다고?“그만 가자.”고작 이런 일로 하예정과 얼굴을 붉히고 싶지 않았던 전태윤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하예정은 생각이 별로 없어서 부부 싸움을 할 때도 화를 내는 건 전태윤이었다. 전에도 이 같은 경험이 있어 교훈으로 삼았다.그녀는 화가 나면 쇼핑하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것 말고는 여전히 헤벌쭉 웃으며 할 일을 했다. 그런데 오히려 화가 나서 별장으로 돌아간 건 전태윤이었다. 다행히 할머니가 타일렀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았을 것이다.“알았어요.”하예정
“서점에 갈 거면 전부 가지고 가서 효진이랑 같이 먹자. 우리의 입맛이 서로 비슷하거든. 지금 효진은 나보다 더 잘 먹어. 배가 벌써 나왔으니까 아기가 영양분을 많이 필요로 하지. 하루에 몇 끼 더 먹는다니까.”도아영이 물었다.“그럼 살 많이 쪘어요? 우리 회사에서 임신하신 직원들을 보면 금방 살이 불어나시던데. 정말 많이 찌더라고요. 임신 초기엔 입덧으로 아무것도 못 먹다가 입덧이 끝나면 폭풍 흡입한다던데. 음식 조절 못 해서 살이 확 찐대요. 태아가 크면 엄마도 같이 살이 찐다고 하던데.”하예정이 급히 물었다.“나도 살쪄 보여?”하예정도 많이 먹는 편이었다.“아직 배가 많이 나오진 않으셔서 약간 통통해 보일 뿐이에요. 살쪘다고는 못하겠는데요.”하예정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행히 일하고 있어서... 집에서 쉬었으면 진짜 돼지처럼 뚱뚱해졌을 거야.”하예정은 임신 중에도 일을 고집했다. 단순히 사업이 바쁜 것뿐만 아니라 집에서 먹고 자기만을 반복하다 보면 정말 돼지가 될 것 같아서였다. 그녀는 건강하고 무술 기본기까지 있어 일반 여성보다 상태가 좋은 편이라 8개월까지 일하다가 휴가를 계획하려고 했다.아이 낳고 나면 바로 운동 시작해서 원래 체중으로 돌아가야 한다.전태윤이 어떤 모습이 되든 영원히 사랑할 거라고 말했지만 하예정은 스스로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남자의 말은 가끔 듣기만 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아야 하는 법이다.과거 주형인도 하예진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하예진이 몸매 관리를 못 하자 바람까지 피웠다.“임신이 병도 아니고. 무거운 일만 안 하면 큰 문제 없어요. 우리 회사 여직원들도 대부분 8개월까지 일하시더라고요. 제가 아는 일 중독자 한 분은 9개월 넘게 일하다가 휴가를 내자마자 일주일 만에 아들 낳았대요. 아들이 석 달 되자마자 바로 출근했고요. 육아휴직을 반년까지 줬는데도 안 받더군요.”하예정이 말을 이었다.“안 받는 게 아니라 생활하기 위해서일 거야. 너무 오래 쉬면 자리를 뺏
“잠도 안 오고 심심해서 근처에서 좀 돌아다녔어요. 회사 주변에 마트가 많아서 뭐든 쉽게 살 수 있더라고요.”도아영이 하예정을 부축하려 하자 하예정이 웃으며 말했다.“괜찮아. 아직 임신 후기처럼 불편한 건 아니니까.”스스로 앉은 하예정의 옆에 도아영이 자리를 잡았다.“과일이랑 간식 좀 샀는데 제가 먼저 맛보고 괜찮은 것만 골랐어요.”도아영이 사 온 봉지들을 풀어놓으며 말했다.하예정은 물컵을 내려놓고 과일을 살펴보았다.“난 편식 안 해.”도아영도 웃으며 덧붙였다.“저도 크게 편식하는 편은 아니에요. 물론 맛있는 건 더 좋아하지만요.”“다 그래. 맛있는 게 있으면 당연히 그걸 먹는 거지. 없으면 그냥 먹을 수 있는 것을 먹고.”가난한 시절을 겪은 하예정은 비록 지금은 전씨 가문의 큰며느리가 되었어도 여전히 검소한 습관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과자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이 집 간식 괜찮더라. 소현 언니랑 가끔 사 먹곤 했어.”하지만 대부분은 집에서 만든 간식을 가져왔다. 전씨 가문의 요리사가 만든 간식이 훨씬 예쁘고 맛있었다.“더 돌아다닐 생각 있어?”하예정이 물었다. 낮잠에서 깨면 도아영을 데리고 구경시켜주기로 약속했었다.“쇼핑은 안 가도 될 것 같아요. 언니의 복 터진 그 서점만 가볼게요. 소씨 가문의 며느리님도 소개해주세요. 이렇게 중요한 분을 꼭 만나 봐야죠.”하예정은 폭 소리쳤다.“복 터진 서점이라니.”“맞잖아요. 그 서점에서 사업을 시작하시고 전 대표님을 만나셨으니 복 터진 서점이 아니에요?”하예정은 반박할 수 없었다.“효진은 성격이 직설적이고 외향적이라서 사귀기 쉬울 거야. 친구 사귀는 것도 좋아하고.”“언니가 낮잠 자는 동안 알아봤는데 다들 친절하다고 그러더라고요. 소현 언니만 눈이 너무 높아서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은 쳐다도 안 보신다던데.”성소현은 친구를 가릴 정도로 까다로웠다.관성의 재벌가 아가씨들은 대부분과 성소현과 사이가 좋지 않았기에 하예정과 심효진을 알기 전에는 단 한 명의 친구 문가희
이소라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사모님은 아직 젊으시니 회복도 빠르실 거예요. 몸매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제가 돌본 부자 사모님 중에도 산후조리 끝나자마자 운동 열심히 하셔서 금방 날씬한 몸매로 돌아오신 분들이 많으셨어요.”그녀는 여운별이 유산이었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유산 후 조리하는 동안은 몸매가 변할 정도가 아니었고 살이 찔 리도 없었다.하루 세 번씩 영양 만점 보양식이 들어오지만 여운별은 대부분 한두 입만 맛보고 치우게 하거나 이소라에게 주곤 했다.여운별은 안심한 표정이었다.“적게 먹을래요. 조리가 끝나고 뚱뚱보가 되는 건 싫으니까. 그런데 유산 후 조리하는 기간은 보통 며칠이나 해야 하죠? 침대에만 누워있으니 지루해서 죽겠어요.”여운별이 모습을 안 보이면 하예정이 그녀를 잊어버릴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다시 접근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텐데...’사실 여운별은 하예정 일행과 어울리고 싶지 않았다.하예정의 행복한 삶과 주변인들의 부유한 생활은 여운별의 가슴을 더욱 쓰라리게 했다.특히 여운초! 그 눈먼 여자에 대한 증오는 더욱 깊어만 갔다.과거의 비참했던 삶과는 달리 지금의 여운초는 전이진과의 결혼으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전이진이 바로 여운별이 한때 마음에 두었던 남자였다.이소라가 설명했다.“형편이 좋으신 분들은 산후조리처럼 한 달 정도 쉬시고 직장인들은 보통 일주일 후에 일상으로 돌아가세요. 사모님은 여유도 있으시고 젊으시니 한 달 정도 푹 쉬시는 게 좋겠네요.”이소라는 여운별이 용태호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그저 나이 많은 남편을 둔 젊은 아내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이 넓은 저택에는 여운별과 두 명의 경호원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이소라는 용태호를 본 적도 없었고 그가 중년의 용씨 성을 가진 남자라는 정보조차 여운별의 입에서 나온 것이 전부였다.여운별은 국물을 천천히 마시다가 말했다.“벌써 괜찮은 것 같아요. 한 달은 너무 길어요. 다른 사람들은 일주일 후에 일상
특히 하예정에 대한 증오는 더욱 깊어만 갔다.여운별은 온갖 불행의 근원이 하예정 때문이라고 믿었다.여씨 가문의 몰락과 여운초의 집권까지 전부 하예정이 참견했기 때문이다.‘차라리 내가 초능력이라도 있었으면 시원하게 복수했을 텐데...'여운별은 이를 악물었다. 지금의 하예정은 전씨 가문에서 국보급 대우를 받으며 행복한 임신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반면 여운별은? 첫 아이를 가졌지만 사랑하는 남자의 자식도 아닐뿐더러 용태호의 강요로 지워야 했다.‘같은 인간인데 왜 이리도 운명이 다른 거야?'방 안의 난방이 답답한지 여운별은 창가로 걸어갔다.문을 열려는 순간...“사모님, 창문 열지 마세요! 유산 후 찬 바람을 쐬면 안 돼요.”문을 열고 들어온 산후 조리사 이소라가 허둥지둥 말렸다.“밖에 햇빛이 아주 강해서 안 추워요. 관성의 겨울은 춥지 않거든요. 다른 곳처럼 눈이 펑펑 오는 것도 아니고. 에어컨을 끌까요? 에어컨을 틀어놓으니 숨 막혀 죽겠어요. 창문마저 닫아두니 공기까지 막혀서 정말 답답하네요.”여운별은 결국 창문을 열어젖혔다.추워도 며칠이면 금세 지나갈 것이다. 한파가 지나면 기온이 회복되어 낮에는 17, 18도까지 오르고 있었기에 정말 춥지 않았다.거리에는 반팔 입은 사람들도 보였다. 한마디로 봄, 여름, 가을, 겨울옷을 입은 사람들이 모두 공존하는 관성의 거리는 사계절이 한꺼번에 펼쳐진 듯했다.여운별을 돌보는 산후 조리사 이소라는 용태호가 특별히 데려온 사람으로 15일만 근무하면 월급을 받고 떠나는 조건이었다.그녀는 여운별의 장기적인 건강을 고려해 가지고 온 보신탕을 침대 옆 탁자에 내려놓고는 여운별의 곁으로 다가가 타일렀다.“사모님은 아직 젊으셔서 모르시겠지만 유산 후에도 산후조리처럼 조심히 대해야 해요. 침대에서 푹 쉬시고 좋은 음식 드시며 찬 바람을 쐬지 않는 게 정말 중요하거든요. 지금은 별일 없다고 생각하시겠지만 나이가 들면 문제가 생길 거예요.”여운별은 별로 개의치 않으며 말했다.“외국 여자들은 산후조리도 안 하면서
도아영은 전이혁이 보낸 메시지를 한참 바라보다가 답장을 보냈다.[아직 확정된 건 없어요. 왜요? 밥이라도 대접해 주실 건가요? 아니면 제가 돌아가는 게 아쉬워요?”전이혁이 회답했다.[음식 대접하고 싶어서요. 아영 씨랑 다시 한번 이야기를 나누고 싶거든요.]도아영은 물었다.[무슨 이야기를요?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요? 아니면 이혁 씨가 이미 그녀를 선택하셨다는 걸 확정하신 건가요? 만약 정말 여자친구가 생겼다면 저에게 그분을 소개해 주세요. 그렇게만 된다면 저는 이혁 씨의 세계에서 영원히 사라져 줄게요.]그녀는 노력해보기도 전에 희망이 없다면 포기할 생각이었다.전씨 가문과 같은 좋은 집안은 흔치 않았지만 전이혁이 그녀를 좋아하지 않고 결혼할 마음이 없다면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다.전이혁은 몇 분 동안 답장이 없다가 이렇게 보내왔다.[제가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하지만 아직 공식적인 연인 관계는 아니라서 아영 씨에게 소개할 수는 없어요. 우리 사이의 문제는 이따가 만나서 천천히 이야기해요. 오늘 저녁에 시간 되시나요?][없어요.][그럼 언제 시간 되세요? 제가 음식 대접하고 싶은데.]도아영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제가 관성에 온 건 이혁 씨에게 확실한 답을 듣기 위해서였어요. 이제 대충 알 것 같으니 이틀 후면 돌아갈 거예요.]이미 여기까지 왔는데 도아영은 며칠 동안 관성에서 휴가를 즐기기로 했다.해주시로 돌아가면 다시 바쁜 업무에 파묻히면서 쉴 틈도 없을 것이 분명했다.[돌아가기 전에 식사 한번 하죠.]부부는 못 되더라도 원수지간이 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둘 사이에 원수 사이로 지낼만한 일도 없지 않은가.전이혁은 이미 그녀에게 모든 걸 말해 주었다. 그가 왜 그녀에게 접근했는지, 왜 그렇게 잘해줬는지에 대한 진짜 이유를 말이다.그리고 도아영이 훌륭한 사람이지만 그의 취향이 아니라는 점도 알려주었다.두어 달밖에 알지 못한 사이, 설령 마음이 움직였다 한들 깊은 정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지 않는가.전이혁이 도아영을
“이혁 도련님을 네 가이드로 삼아서 관성 구경을 시켜줄게. 교외에도 괜찮은 관광지 몇 군데가 있으니 한번 가보는 것도 좋아.”도아영은 고개를 저었다.“이혁 씨는 저랑 말 한마디조차 나누기 싫어하는 것 같은데요. 여행은 기분 좋게 다녀야지 제가 왜 그의 차가운 얼굴에 찰싹 달라붙어야 하죠? 오히려 기분만 망치겠어요. 언니 시간 있으세요? 같이 쇼핑 좀 하고 싶은데. 내일은 서원 리조트에 들러 전씨 할머니를 뵙고 싶어요.”전씨 할머니를 찾아가는 이유는 왜 자신을 선택했는지 따지려는 게 아니라 전씨 가문의 유명한 어르신을 한번 만나보고 싶어서였다.하예정은 웃으며 답했다.“물론이지. 근데 나는 낮잠 자는 게 습관이 되어서 안 자면 오후에 힘이 없어. 푹 쉬지 못하면 두통도 오고 눈도 아파.”“그럼 언니가 낮잠에서 깬 후에 같이 가요.”“그래, 내가 일어나면 우리 서점에도 데려갈게. 효진이가 거기 있을 거야. 내 가장 친한 친구는 효진이와 소현 언니뿐이거든.”하예정은 새로운 동서가 생길 때마다 자신의 두 친구를 소개하곤 했다.“좋아요.”도아영은 갈 데도 없고 할 일도 없는 터라 하예정이 어디로든 데려가 주기만 하면 그냥 따라가기로 했다.“너는 낮잠을 안 자?”“30분 정도는 자요.”“내 사무실이 크진 않아서 별도의 휴게실은 없어. 평소에는 긴 소파를 펴서 침대처럼 쓰고 낮잠에서 깨면 다시 접어서 소파로 써. 우리 둘이 자면 좀 비좁긴 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어때?”도아영은 하예정을 도와 소파를 칩대로 펴주었다.“이런 접이식 소파 침대가 괜찮네요. 언니는 좀 주무세요. 저는 커피 마시면 잠이 안 와서... 지금은 일도 안 하기에 밤에 일찍 자면 돼요.”하예정은 하품하며 말했다.“그럼 난 좀 잘게.”“네.”도아영은 자신이 하예정의 평온한 일상을 방해하고 있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하예정은 전태윤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하고 몇 분간 대화를 나눈 뒤 누웠다. 그녀는 도아영을 전혀 경계하지 않았는지 금방 잠이 들었다.도아영은
“언니, 그때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니가 마음에 들어서 전 대표님이 언니에게 구애하신 건가요?”하예정은 웃으며 대답했다.“나와 태윤 씨는 깜짝 결혼했어. 누가 누구에게 구애하는 그런 것도 없이. 결혼 후에 서로 정을 키워나간 케이스지. 하지만 우리 할머니와 무관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지.”하예정과 전태윤의 깜짝 결혼 이야기를 도아영도 조금 알고 있었다.하예정은 간단히 그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전태윤은 완전히 전씨 할머니의 강요로 하예정과 결혼했던 것이다.더욱 놀라운 것은 전씨 할머니가 이미 일찍이 하예정을 노리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 이유는 더욱 황당했는데 어떤 점쟁이가 하예정과 전태윤이 한평생 부부의 인연이 있다고 점쳤을뿐더러 전태윤이 하예정과 결혼하지 않으면 평생 독신으로 살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것이다.전태윤을 가장 아끼는 전씨 할머니께서 가만히 계실리가 있겠는가! 할머니는 전태윤의 효심을 이용해 온갖 방법으로 결혼을 강요했고 덕분에 지금의 행복한 결혼생활이 가능했다.도아영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그럼 전씨 할머니는 왜 저를 선택하신 걸까요? 확실히 말씀드리지만 저는 전씨 할머니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제 사주를 알아내서 점을 쳐보시고 이혁 씨와 부부의 인연이 있다고 판단하신 건가요?”하예정이 웃으며 대답했다.“그건 전씨 할머니께 직접 여쭤보셔야 할 것 같아. 내가 알기로는 그 점쟁이는 이제 전씨 할머니를 만나주지 않는다고 하셨어. 서로 인연이 끝났다면서. 내 생각에는 점쟁이 때문이 아니라 할머니께서 여행 다니시며 여러 사람의 인품을 파악하시고 손자들에게 맞는 여성이라고 판단하셔야만 손자들에게 추천하시는 것 같아. 할머니는 늘 태윤 씨 형제들을 걱정하고 계시거든. 남들보다 뛰어나게 잘 키웠는데 정작 연애만큼은 어리숙하다고 말이야. 결혼은커녕 연애도 제대로 안 한다고 잔소리하셔. 남들이 자기 자식들에게 알맞은 여성을 소개해달라고 하면 할머니 손자들의 인생 대사도 해결하지 못했는데 남의 일까지 신경 쓸
하여 전이혁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도아영은 어제 하예정과 이야기를 나누며 잘 통하는 부분이 있어 그녀의 회사로 찾아온 것이다.“난 점심에는 보통 커피를 마시지 않아.”두 사람은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도아영은 하예정의 배를 살펴보며 말했다.“지금은 커피나 진한 차는 피하는 게 좋아요. 임신 중에는 조심해야죠.”하예정은 웃으며 답했다.“알아. 커피나 술은 이미 오래전부터 끊었어.”하예정이 오랫동안 커피를 마시지 않았기 때문에 도아영이 직접 커피를 내려야 했던 것이다.“성소현 씨는 오늘 안 오시나요?”도아영이 무심코 물었다.도아영이 온 지 30분이 넘었지만 성소현이 회사에 오지 않는 이유가 궁금했다.“소현 언니는 오늘 채소 시장에 갔어. 저녁이 되어야 돌아올걸.”하예정과 심효진은 둘 다 임신부였다. 그녀들 스스로 자신이 아직 힘이 넘친다고 생각했지만 성소현의 눈에는 둘 다 국보급 보물로 소중히 보호받아야 할 존재였다.“아...”식당에 들어가 두 사람은 각자 음식을 담아 한적한 자리에 앉았다.도아영은 생선과 고기, 그리고 새우가 가득 담긴 요리들을 보며 물었다.“회사 식사는 모두 똑같나요? 등급별로 나누지 않으시는군요.”“응, 등급 같은 건 안 나누어.”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거의 관리직이었기에 등급을 나눌 필요가 없었다.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여기까지 오기에는 너무 멀었지만 하예정은 그들을 위해 삼시 세끼를 제공했고 요리들도 나쁘지 않았다.그녀는 노동자들의 식사에 고기와 국물이 반드시 놓여야 한다고 요구했다. 농장에서 힘든 일을 이겨내려면 고기와 기름진 음식이 없으면 쉽게 배고프기 일쑤였다.하예정은 시골 출신이었다. 열 살 이후로는 마을을 떠났지만 그전까지는 집안일을 많이 도왔기에 농사일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었다.하예정은 도아영을 살펴보며 물었다.“너희 회사 식당은 등급별로 나누어?”도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여러 개의 식당이 있어요. 직급에 따라 다른 식당에서 식사해요. 물론 메뉴도 다르지만 보통 직
“할머니께서는 저의 선택을 존중하신다고 하셨지만 후회하지 말라고 하셨어요.”전이혁은 명해은에게 먼저 국물을 떠드렸고 또 전현민이 들어오는 것을 보더니 다시 국물을 한 그릇 떠드리며 말했다.“저는 후회할 일은 절대 하지 않아요.”비록 이전에는 도아영과 꿈속의 여자 ‘여우' 사이에서 고민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우'와 함께할 때 특별히 행복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는 ‘여우'와의 만남을 간절히 기대했고 만나서 싸운다고 해도 그 순간이 기다려지기만 했다. 이런 기대감은 도아영에게서는 찾을 수 없었다.그가 도아영에게 접근한 건 순전히 전씨 할머니께서 선택해주신 사람이기 때문이다.결국 감정은 억지로 할 수 없는 법, 억지로 따온 열매는 달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명해은이 입을 열었다.“그래. 후회하지나 말고.”명해은은 속으로 중얼거렸다.‘어머님이 널 이렇게 쉽게 놔두실 리가 없지. 넌 아직도 진실을 모르고 있구나!'전이혁은 그가 후회할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전씨 할머니께서는 확신 없는 일은 절대 하지 않으시는 분이었다.명해은이 전씨 할머니를 잘 알고 있다고는 하지만 전현민은 아들로서 명해은보다 그의 어머니를 더 잘 알았다.전현민 부부는 서로를 의미심장한 눈길로 바라보면서 웃었다.그리고는 전이혁과 도아영에 관한 화제를 더 이상 꺼내지 않았다.식사하면서 명해은은 계속 전이혁에게 반찬을 얹어주었다.“엄마, 제가 방금 돌아오자마자 바비큐를 많이 먹어서 배가 불러요. 이렇게 많이는 못 먹겠어요.”자기 그릇에 산처럼 쌓인 반찬을 보며 전이혁이 말했다.“엄마, 아빠께도 좀 드리세요. 안 그러면 또 제가 아빠의 아내 관심을 뺏었다고 투덜대실 거예요.”말이 떨어지자 전현민도 전이혁의 그릇에 반찬을 얹어주셨다.“평일엔 바쁘게 일하느라 제대로 식사도 못 했겠다. 살도 많이 빠졌네. 많이 먹어.”전이혁은 웃으며 말했다.“아빠, 아까는 밥 한 그릇과 나물 한 접시만 주신다고 하셨잖아요.”“그건 화나서 한 말이지,”전이혁도 부모님께 반찬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