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선우민아를 바라보며 전씨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웃었다.“그럼요. 마침 잘됐네요. 그럼 예진 리조트를 한 바퀴 둘러볼까요.”그러고는 곁에 있던 예씨 할머니에게 말했다.“내가 민아 씨랑 잠깐 바깥바람 좀 쐬고 올게요.”예씨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민아 씨를 잘 부탁드릴게요.”선우민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전씨 할머니를 부축하려 하자 할머니가 손사래를 쳤다.“괜찮아요. 나이가 들긴 했어도 걷는 데까지 사람 손을 빌릴 정도는 아니에요. 아직 여기저기 다닐 힘은 남아 있답니다.”그래도 선우민아는 조심스럽게 할머니의 팔을 받쳐주었고 전씨 할머니는 그 배려가 마음에 든 듯했다.할머니께서 점찍어 두신 손주며느리는 신분이나 위치보다 인품을 우선으로 삼았다.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애초에 눈여겨보지도 않았을 것이다.두 사람은 함께 본채를 나섰다.선우민아가 뒤에 서 있던 경호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여기에서 기다려 주세요. 따라오지 않으셔도 돼요.”네 명의 경호원은 공손하게 머리를 숙이고는 전씨 할머니와 선우민아가 나란히 걸어가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이제 봄이 와서 꽃이 한창이에요. 예진 리조트는 이맘때 풍경이 참 좋아요.”전씨 할머니는 선우민아와 함께 예진 리조트를 거닐었다.선우민아가 주변을 둘러보고 고개를 끄덕였다.“네, 참 좋네요.”그러나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을 만큼은 아니라고 여겼다.아마도 선우씨 가문의 저택 역시 정원 꾸밈이 워낙 훌륭해서 자연스레 기준이 높아진 탓일 것이다.선우민아가 말을 꺼냈다.“창빈 씨에게 들었어요. 창빈 씨 어머니랑 여러 작은 어머니들도 함께 예진 리조트에 와 계신다고요.”시어머니가 며느리들을 데리고 함께 여행을 나와 열흘이나 보름씩 집을 비운다는 건 그만큼 사이가 좋다는 뜻이었다.“네. 집에만 있자니 다들 답답하다고 하더라고요. 저를 바람이나 쐬게 해 주겠다면서 다 같이 따라나섰어요. 지금은 밖에 나가 구경하고 있는데 저녁쯤이면 돌아올 거예요. 민아 씨, 오늘 저녁 여기서 식사하고
전씨 할머니가 웃으며 대답했다.“몇 번 만난 적은 있어요. 다만 그때마다 제가 있던 위치도 달랐고 모습도 조금씩 바꿨죠. 민아 씨가 워낙 바쁘게 지내시니 저를 기억하지 못하셔도 이상해할 것도 없죠.”겉으로 마주친 건 그 정도였지만 전씨 할머니는 선우민아를 훨씬 더 오래 지켜봐 왔다. 선우민아가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할머니는 얼마나 그녀를 살펴보았는지 모른다.손자에게 어울릴 사람을 고르는 일이니 알아보고 확인하는 과정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자기 손자가 과연 선우민아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지도 냉정하게 따져봐야 했다.선우민아는 잠시 말을 잃었다.자신에게 이 할머니가 낯설게 느껴졌던 것도 이제는 이해가 갔다.예씨 할머니는 예지연을 도우미에게 넘기며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 오빠들과 놀게 하라고 했다.아이들은 워낙 가만있지를 못해 집 안에 오래 두는 법이 없었다.배부르게 먹고 푹 자고 나면 곧장 밖으로 뛰어나가 해 질 때까지 놀아댔고 억지로 붙잡아 두면 금방 집을 뒤집어 놓곤 했다.아이 하나만 있어도 집이 난장판이 되는데 여럿이면 말할 것도 없었다.집사는 차를 올려두었고 선우민아의 경호원들은 준비해 온 선물들을 차탁 위에 내려놓았다.선우민아가 예씨 할머니를 향해 말했다.“할머니, 오늘은 제가 예고도 없이 찾아와서 죄송해요.”예씨 할머니가 웃으며 받았다.“괜찮아요. 앞으로도 오고 싶을 때 언제든지 오세요. 예진 리조트는 늘 민아 씨를 환영하니까. 다만 다음에는 이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제 마음이에요.”선우민아가 겸손하게 답했다.두 분 할머니를 마주하고 있으니 선우민아는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두 어른에게서 풍기는 분위기가 유난히 자애로웠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두 할머니가 젊은 시절 얼마나 이름을 날렸는지, 또 지금도 A시와 관성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선우민아는 잘 알고 있었다.할머니들은 나이가 들었어도 여전히 영향력이 크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존재였다.서로 인사말을 몇 마디 나눈 뒤 선우민아는 바
“선우씨 아가씨는 어느 손주랑 붙여 볼 생각이에요? 듣자 하니 그쪽은 큰딸이 대표라고 하던데. 언니네 셋째 손주며느리랑은 결이 다르잖아요. 고씨 가문의 그 아가씨는 본인이 원해서 남장하고 맏이 노릇을 한 거고요. 선우씨 가문은 딸이 많고 아들은 적다더니 그래서 큰딸이 가문을 맡은 거겠죠. 그런 사람이면 장손이랑도 잘 맞겠다 싶긴 한데 언니 장손은 이제 곧 아버지가 될 판이잖아요.”전씨 할머니가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여섯째예요. 큰애는 안 돼요. 큰애는 결혼한 지도 오래됐고 나는 예정이도 아주 마음에 들거든요. 장손 며느리를 바꿀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 없어요. 창빈은 태윤의 친동생이에요. 태윤이랑 같은 어머니를 둔 친형제죠. 여러모로 선우민아 씨랑 어울려요. 내가 고른 손주며느리는 전부 친손녀처럼 아껴줄 거예요. 누구도 서운하게 하면 안 되죠.”전씨 할머니는 자기 손주들은 하나같이 훌륭하게 키워냈기에 어느 가문의 아가씨와 짝을 이뤄도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했다.만약 손주들이 뛰어나지 못하다면 애초에 남의 집 귀한 딸을 넘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자기 집 아이가 소중한 만큼 남의 집 아이도 똑같이 소중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예씨 할머니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창빈은 솔직히 기억이 잘 나지 않아요. 언니 손주 중에 이름이 알려진 건 첫째부터 셋째잖아요. 그 아래 동생들은 조용하게 지내는 편이죠.”“조용한 편이죠. 관성 쪽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많아요. 이름을 잘 모르는 사람도 많고요.”전씨 할머니는 손주들이 눈에 띄지 않게 지내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다들 능력까지 갖춘 채 너무 나서기만 하면 장손 전태윤이 부담을 느낄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특히 장손 며느리 하예정이 느낄 부담이 신경 쓰였다.하예정의 친정은 다른 며느리들의 집안과 비교하면 형편이 가장 낮았다.“창빈은 요리를 정말 좋아하거든요. 어릴 때부터 주방을 자주 들락거렸고 지금 하는 일도 외식업이에요. 난 아이들 모두가 스스로 살아가야 하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더 열심히 할게요. 사람들이 우리 두 사람을 떠올리면 정말 잘 어울린다고, 재능도 외모도 딱 맞는 천생연분이라고 말하게요.”이런 달콤한 말을 엮어 내는 데 능숙한 전이혁을 보며 도아영은 굳이 하나하나 받아칠 마음이 없었다.입은 전이혁에게 달렸는데 무슨 수로 막겠는가.도아영은 몇 마디 더 당부한 뒤 집을 나섰다.전이혁은 밖까지 따라 나오며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지만 도아영은 그가 술에 취해 있다는 것을 콕 집어 말했다.“지금 취해 놓고 운전하려고요? 저는 죽고 싶지 않아요.”그 한마디에 전이혁은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도아영이 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 그대로 떠나는 모습을 서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그날 밤은 더는 연락이 없었다.다음날, 전이혁은 오후가 되어서야 눈을 떴다.도아영 퇴근 시간에 맞추어 기다리려고 도씨 그룹으로 갔지만 도아영은 이미 출장을 떠났다는 소식만 받았다.이틀 뒤에 간다고 했으면서 오늘 바로 떠났고 어디로 가는지도 알려 주지 않았다.전이혁은 순간 맥이 풀렸다.그래도 도아영이 출장한 것뿐이지 해성을 떠나 돌아오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그제야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그녀가 없는 동안 전이혁은 할 수 없이 제대로 일하기 시작했다.그리고 멀리 A시 예진 리조트에 머물고 있던 전씨 할머니 일행에게도 심효진이 이미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전씨 할머니는 짐을 챙겨 곧바로 관성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심효진이 아들을 낳았다는 말을 듣자 곧 마음을 바꾸었다. 아이가 한 달이 되면 그때 보러 가겠다며 전씨 할머니는 예진 리조트에 그대로 머물렀다.그녀는 예지연을 안고 놀아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듯 태연하게 시간을 보냈다.그런데 사흘 뒤, 예진 리조트에 뜻밖의 방문객들이 나타났다.그중에서도 진짜 손님이라 할 만한 사람은 단 한 명, 바로 원림성 A시 선우씨 가문의 큰딸 선우민아였다.예씨 가문 사람들은 이 귀한 손님을 보더니 모두 잠시 말을 잃었다.선우씨 가문과는 지금껏 별다른 교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영 씨에게 괜한 경쟁자들을 붙이고 싶지 않아요. 설령 그 여자들이 아영 씨 털끝도 건드리지 못한다 해도 질투하고 들러붙어 귀찮게 굴 텐데 저는 그런 거 싫어요. 저는 당신 한 사람만의 남자입니다. 평생, 한평생 오직 당신에게만 빠져있을 거예요. 제발 저를 다른 사람에게 떠밀지 마세요.”도아영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그를 부축해 집 안으로 들어가 소파에 앉힌 뒤에야 도아영이 입을 열었다.“그럼 오히려 제가 전이혁 씨에게 경쟁자를 몇 명 만들어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저도 꼭 당신뿐인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시집갈 수 있다는 걸 알려줘야 할 것 같은데.”전이혁이 곧바로 그녀의 손을 잡으며 진지하게 말했다.“아영 씨, 저는 아영 씨를 사랑해요. 영원히. 설령 저에게 경쟁자가 아주 많이 생긴다 해도 저는 두렵지 않아요. 시간이 지날수록 제 진심이 더 잘 드러나는 법이니까. 우리는 가장 잘 맞는 사람이에요.”도아영은 손을 빼냈지만 또 참지 못하고 그의 얼굴을 한 번 꼬집었다.“정말 뻔뻔하시네요.”“형이 저희 동생들에게 아내를 붙잡는 법을 가르쳐 줬거든요. 첫째는 뻔뻔해지는 거, 둘째는 끝까지 버티는 거요. 그 정도는 해야 성공한다고 했어요.”전태윤이 그렇게 말했을 리가 있겠는가.도아영이 말을 이었다.“또 형한테 뒤집어씌우시네요. 전 대표님이랑 예정 언니는 깜짝 결혼했잖아요. 바로 혼인신고부터 했지, 언니를 따르는 과정이 없었잖아요.”“형이랑 형수님도 크게 싸워서 한동안 서로 말조차 섞지 않은 때가 있었어요. 형수님이 이혼 이야기까지 꺼내는 바람에 형이 얼마나 놀랐는데요. 그때 형은 정말 이성을 잃어서 형수님을 집에 붙잡아 두기까지 했거든요. 체면까지 내려놓고 용서해 달라고 매달렸는데 그게 형수님에게 애정 공세를 펼친 거 아닌가요?”그 시기에는 그들 모두가 전태윤을 찾아가 말려 보기도 하며 그가 정신을 차리도록 붙잡고 설득하기도 했다.하예정의 가족들과 친구들 역시 하예정을 찾아가 설득하며 한참을 달랬다.서로 진
“태경 형은 어떻게 집으로 돌아가셨어요?”“전이혁 씨가 모셔다드린 건 아닐 테고요. 다들 운전해야 한다고 했잖아요. 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결국 마셨네요.”도아영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전이혁을 타박했다.“평소에는 주량도 괜찮으면서 오늘은 두 잔밖에 안 마셔 놓고 그렇게 취한 척을 하다니...”전이혁이 히죽 웃으며 변명하듯 말했다.“도수가 센 걸 마셨잖아요. 맛은 괜찮은데 금방 취하더라고요. 뒤끝도 있고. 오는 길에 차에서 잠깐 잤더니 이제야 좀 나아졌어요. 태경 형이 기분이 안 좋아 보이길래 함께 한 잔 마셨어요. 형은요? 많이 취했어요?”“당신보다 훨씬 취했죠. 이제 들어가세요. 저는 이만 가볼게요.”도아영은 그가 정신이 많이 맑아지고 걸음도 더 이상 휘청거리지 않는 모습을 확인한 뒤 돌아가려 했다.“아영 씨.”전이혁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여기까지 온 김에 끝까지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집 앞까지 데려다주셨는데 차라리 집 안으로 들여보내 주세요. 모처럼 저의 집에 오셨는데 물 한 잔도 안 드시고 가시면 너무하잖아요.”그는 곧 한층 힘 빠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완전히 취한 건 아니지만 속이 좀 안 좋아요. 토할 수도 있고 목도 너무 마르고요. 혹시라도 혼자 있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아무도 모를 것 같아요.”도아영이 못마땅한 기색으로 말했다.“물 한 잔도 못 따를 정도로 취한 건 아니잖아요. 혼자서 충분히 할 수 있어요. 애초에 그렇게 술을 마시자고 한 사람이 누구인데요. 저는 여기서 사람 돌볼 시간 없어요. 저는 내일 출근도 해야 해요. 당신처럼 하루 종일 한가하지 않아요.”전이혁의 하루는 대부분 그녀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회사 앞에서 기다리고 그녀가 접대 자리에 나가면 멀찍이 따라붙었다.직접 나서서 방해하지는 않았지만 그럴수록 도아영은 누군가의 시선이 늘 따라붙는 듯한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이 남자는 한번 들러붙으면 쉽게 놓아주지 않는 자였다.“아영 씨.”전이혁은 애처로운 기색으로 그녀를 바라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