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윤은 하예정을 안고 함께 꿈나라로 빠지려 했다. 그런데 두 눈을 감자마자 문득 뭔가 떠오른 전태윤은 하예정을 살며시 밀어내고 일어나 앉더니 침대 머리맡에 놓인 하예정의 휴대 전화를 잡았다.그가 카카오 스토리에 올렸으니 지인들이 알게 되어 퍼져나가는 건 시간문제다. 전태윤은 사진이 퍼져나가는 게 두렵지 않았다. 왜냐하면 조금만 손을 쓰면 하예정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하예정이 이렇게나 빨리 기자들에게 둘러싸이는 걸 원치 않았다.하지만 하예정이 올린 건 성소현이 볼 가능성이 크다. 하예정과 성소현이 꽤 가깝게 지내고 있으니 분명 서로 연락처를 주고받았을 것이다.성기현이 다른 사람에게서 그가 올린 사진을 보고 성소현이 하예정이 올린 걸 본다면 대충 비교해봐도 하예정이 그의 아내라는 걸 성소현은 알게 된다. 아직 그와 하예정의 관계를 성소현이 당분간은 알게 해서는 안 된다.하예정과 이경혜의 유전자 검사 결과는 이틀 뒤에 나온다고 한다. 결과가 어떻든 하예정과 성소현이 합이 척척 잘 맞는다는 건 사실이다. 만약 성소현이 그의 정체를 밝힌다면 결과가 어떨지 전태윤은 상상만 해도 두려웠다.그가 하예정의 휴대 전화를 들고 카카오 스토리에 들어가려 했지만 비밀번호가 걸려있었다.“비번.”전태윤이 눈살을 찌푸렸다. 조금 전 하예정이 휴대 전화를 만질 때 힐끗 보긴 했었다.‘비번이 뭐더라?’잠깐 생각하던 전태윤이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하지만 첫 번째도 틀렸고 두 번째도 연달아 틀렸다.전태윤은 손가락의 움직임을 멈추고 침착하려 애를 썼다. 그러면서 하예정이 비밀번호를 입력할 때 어느 숫자 버튼을 눌렀었는지 곰곰이 돌이켜보았다.몇 분의 침묵이 흐른 후, 전태윤은 다시 한번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이번에 드디어 비밀번호를 풀었다.전태윤의 입꼬리가 귀에 걸리다 못해 수천억짜리 계약을 체결한 것보다 더 기뻐하는 것 같았다.그는 재빨리 하예정의 카카오톡 연락처를 뒤져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성소현의 연락처가 있었는데 다행히 본명으로 저장하여 쉽게 찾을 수 있었
“참 다정하단 말이야.”하예정은 옷을 챙긴 후 바로 침대에서 내려오지 않고 한 손에는 옷을, 다른 한 손에는 휴대 전화를 들고 평소처럼 카카오 스토리를 열었다. 밤새 받은 문자는 없었지만 좋아요 개수가 몇 개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사적인 공간을 지키려고 친한 지인들에게만 그녀의 카카오 스토리를 볼 수 있게 설정해놓았고 사업상의 파트너들은 볼 수가 없었다. 하여 평소 소소한 일상을 올려도 보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어젯밤 업로드한 사진에 가장 먼저 좋아요를 누른 사람은 전태윤이었다. 하예정은 순간 멈칫했다.‘우리가 연락처를 서로 추가할 때 내 스토리를 볼 수 있게 설정했었나?’아무래도 연락처를 추가할 때 그가 보지 못하게 설정하는 걸 까먹었나 보다. 혼인신고 한 후 그녀가 만든 공예품과 베란다의 꽃을 올린 것 외에 다른 걸 올린 적이 없어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전태윤의 욕을 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그때 전태윤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깼어?”운동복 차림인 걸 보니 조깅하고 온 듯싶었다.“이 추운 날에도 아침 일찍 일어나 조깅하네요.”“이미 습관 됐어.”전태윤은 방문을 닫고 다가오더니 침대 옆에 앉아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배 아직도 아파?”“안 아파요.”하예정은 옷과 휴대 전화를 챙기고 침대에서 일어났다.“아직 옷 갈아 안 입죠? 나 먼저 화장실 쓸게요.”“그래, 너 먼저 써. 난 아침 준비할게.”하예정이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할 수 있겠어요?”전태윤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의 표정 변화를 느낀 하예정이 황급히 말했다.“이상한 생각 하지 말아요. 내 말은 태윤 씨가 한 아침을 먹을 수 있겠냐는 거예요.”전태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앞으로 다가가더니 헝클어진 그녀의 머리를 정리해주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네가 직접 시험해봐야 알지.”그녀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대화가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아 하예정은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전씨 그룹에 출근한 후
전태윤의 다정함에 녹아내린 하예정과 달리 성소현은 아직 침대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아침부터 충격을 받았다.전태윤이 하예정의 휴대 전화로 설정을 바꾼 탓에 성소현은 하예정이 올린 사진은 보지 못했지만 새언니가 전태윤이 올린 사진을 그녀에게 보여주었다.성소현이 눈을 뜨자마자 새언니가 노크하고 들어오더니 아무 말 없이 사진 한 장을 클릭하여 보여주었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성소현은 새언니의 뜻을 알아차릴 리가 없었다.성소현이 새언니에게 물었다.“언니, 대체 누구길래 아침부터 솔로인 나한테 보여주면서 충격을 주는 건데요?”새언니는 입을 꾹 다문 채 그녀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사실 그녀는 성소현이 진정한 사랑을 쫓길 바랐다. 그녀의 눈에 전태윤과 성소현이 참 어울렸지만 아쉽게도 전태윤은 성소현에게 관심이 없었다.성소현도 마음을 접으려고 노력했지만 몇 년이 지나도 포기하지 못하자 결국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대시한 것이었다. 그런데 전태윤이 갑자기 자신이 유부남이라고 폭탄선언을 했다.새언니는 전태윤이 성소현에게 충격을 주어 마음을 접게 하려고 일부러 그러는 줄 알았지만 오늘 아침 남편의 친구가 보낸 사진을 본 순간 사실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 사진은 다름 아닌 전태윤이 카카오 스토리에 올린 사진이었다.전태윤이 아무런 멘트 없이 사진 한 장만 올렸지만 다들 결혼을 발표했다는 걸 알아챘다.성기현은 그 사진을 아내에게 보내 성소현에게 보여주라고 했다. 그러면 전태윤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접을지도 모르니까.성기현의 아내는 남편에게 아침부터 이런 충격을 주면 성소현의 기분이 온 하루 좋지 않을 거라면서 걱정했었다. 하지만 성기현은 성소현이 언젠가는 알게 된다고 했다. 어쨌거나 관성의 상류 사회 사람들이 다 알게 되면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 없으니 말이다.그들은 성소현의 가족으로서 다른 사람이 얘기하기 전에 먼저 성소현에게 보여주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괜히 보여주지 않았다가 숨겼다고 오해를 받으면 안 되었다.“언니, 왜 그렇게 봐요? 내가 올린 것도 아닌
새언니는 그런 그녀가 마음 아파 꽉 안아주며 위로를 건넸다.“아가씨, 전태윤 씨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으니 더는 미련 갖지 말고 마음 접어요. 이 세상에 좋은 남자가 전태윤 씨 한 명밖에 없는 것도 아니고. 포기하면 훨씬 더 좋은 남자가 많다는 걸 알게 될 거예요. 아가씨는 참 좋은 사람이에요. 전태윤 씨가 아가씨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자신을 부정하지 말아요. 언니 말대로 전태윤 씨를 잊어요. 나랑 기현 씨가 아가씨한테 어울리는 좋은 남자 소개해줄게요. 앞으로 전태윤 씨보다 더 행복하게 살게 해줄게요. 전태윤 씨는 너무 차가워서 그 사람과 결혼해도 행복하지 않을 수 있어요. 생각해봐요. 어떤 여자가 그런 얼음같이 차가운 남자랑 맨날 함께 있으려 하겠어요?”성소현은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찌나 꽉 깨물었는지 피라도 날까 걱정되어 새언니가 남편을 호되게 욕했다.“기현 씨는 정말 나쁜 사람이에요. 아침부터 날 빌런으로 만들잖아요! 아가씨, 속상하면 그냥 울어요. 울면 한결 나아질 거예요. 내가 남도 아니고 내 앞에서 울어요, 그냥. 아니면 나랑 쇼핑하러 갈래요? 아가씨 사고 싶은 거 다 사요. 쇼핑도 싫으면 친구랑 놀러 갈래요?”성소현은 눈을 비비며 꽉 깨문 아랫입술을 풀었다. 애써 웃음을 짓는 모습이 우는 것보다 더 안쓰러웠다. 성소현이 말했다.“나 괜찮아요, 언니. 사실 진작 알고 있었어요. 태윤 씨가 결혼반지를 낀 걸 본 그날 바로 알았어요. 언니 말이 옳아요. 이 세상에 좋은 남자가 얼마나 많은데 한 남자한테만 목을 맬 순 없죠. 이젠 다른 여자의 남편이니 그만 포기할래요. 드디어 마음을 접을 수 있게 되어서 차라리 잘됐네요.”전태윤이 결혼반지를 낀 걸 본 그날 오빠를 찾아가 한바탕 울었었다. 이제 더는 울고 싶지 않았고 울어도 소용이 없었다.눈물을 흘려서 전태윤이 싱글이 된다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질 정도로 울 수 있었다.“아가씨, 정말 울고 싶지 않아요? 한바탕 울고 나면 한결 나아질 텐데.”성소현은
“난 아가씨 이런 점이 가장 좋아요. 어떤 사람은 상대가 결혼했든 말든 마음에 들면 사랑이라고 떠들어대면서 남의 결혼 생활을 파탄 내버리잖아요. 난 그런 사람이 가장 싫어요.”새언니의 이 말은 진심이었다. 성소현의 됨됨이가 바른 덕에 시댁 식구들처럼 그녀를 예뻐했다. 만약 진상이었더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언니, 나 괜찮으니까 가서 더 자요. 오빠한테도 내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요. 나 성소현이 결혼 못 하는 것도 아닌데 뭐가 걱정이에요.”“알았어요. 그럼 이만 방으로 돌아갈게요. 아가씨도 더 잘 거예요?”“아니요. 이따가 예정 씨한테 가려고요. 아 참, 어제 우리 집 파티셰가 만든 디저트를 먹어봤는데 맛있더라고요. 아직 더 있어요? 있으면 예정 씨랑 효진 씨한테 가져다주려고요. 두 사람 다 디저트를 좋아하거든요.”그녀의 새언니도 디저트를 참 좋아한다.원래는 파티셰 없이 요리사가 다 만들었었지만 새언니가 시집온 후 오빠가 직접 새언니를 위해 파티셰를 모셔왔다. 그 덕에 매일 여러 가지 맛있는 디저트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새언니가 웃으며 말했다.“나도 먹어보니까 맛있더라고요. 오늘 파티셰님한테 몇 가지 해달라고 했는데 내려가서 봐봐요. 아마 다 만들었을 거예요. 예정 씨한테 많이 가져다줘요. 입맛에 맞으면 매일 가져다줘도 돼요.”하예정이 남편의 사촌 여동생일 가능성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새언니는 하예정을 만나기도 전에 벌써 그녀에게 호감이 생겼다.“분명 좋아할 거예요.”하예정과 심효진 얘기에 성소현은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새어 나왔다. 누가 절친 아니랄까 봐 두 사람은 먹는 것도 좋아했고 성격도 비슷했다.화제가 자연스럽게 바뀌었고 성소현도 전태윤의 결혼을 잊은 듯했다. 새언니는 그제야 마음 놓고 방으로 돌아갔다.성기현은 방에서 아내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소현이는 괜찮아요?”“아무래도 가장 먼저 알아서 그런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씩씩하더라고요. 하지만 아침부터 또 그 소식을 들었으니 기분이 좋지 않겠죠. 앞으로
성기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래. 아쉬움이 남아야 인생이지.’...하예정은 언니의 월세방으로 가서 숙희 아주머니와 주우빈을 픽업한 후 전태윤과 함께 가게로 갔다.그녀는 전태윤의 차를 타지 않았지만 전태윤이 기어코 뒤에서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부려 하는 수 없이 따라오게 내버려 두었다.엄마가 곁에 있으니 주우빈의 상태도 한결 나아졌고 숙희 아주머니와도 재미있게 놀았다. 하예진은 그제야 마음 놓고 회사로 출근했다. 아직 수습 기간이 채 끝나지 않아 계속 휴가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가게에 도착하자마자 전태윤이 하예정에게 말했다.“다이아몬드 반지.”하예정이 말했다.“알았어요. 지금 바로 낄게요. 앞으로는 절대 빼지 않고 왼손에 계속 끼고 있을게요.”그녀는 카운터 앞으로 다가가 키로 카운터 서랍을 열었다. 값비싼 다이아몬드 반지가 서랍의 구석에 처박혀있었다.그 광경을 본 전태윤의 낯빛이 확 어두워졌다.‘저렇게 아무렇게나 둔다고?’하예정은 다이아몬드 반지를 꺼내 다시 약손가락에 꼈다. 어젯밤에 잠시 낀 금반지는 오늘 집에서 나오기 전에 뺐다.“봤죠?”하예정이 일부러 손을 펼쳐 보이고 나서야 전태윤이 흐뭇하게 웃었다.“얼른 출근해요. 이러다 늦겠어요.”전태윤은 어이가 없었다.‘맨날 내쫓기만 해! 그렇게 나랑 같이 있기 싫어?’“우빈아.”안에서 나오던 심효진이 주우빈을 보자마자 활짝 웃으며 다가오더니 주우빈을 번쩍 안아 들고는 전태윤에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인사를 대신했다.원래는 아내에게 입맞춤한 후 출근할 계획이었지만 심효진이 나타난 바람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전태윤도 고개를 끄덕이며 심효진에게 인사했다. 그러고는 이미 곁을 떠난 여자를 그윽하게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그런데 몇 걸음 가지도 않고 다시 고개를 돌려 하예정을 쳐다보았다.심효진은 하예정이 손에 낀 다이아몬드 반지를 발견했다. 하예정이 마침 손을 내밀며 심효진에게 반지를 자랑하던 참이라 전태윤을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그 모습에 전태윤은 기분이 확 다운되었
성소현은 자신이 잘못 본 거라고 생각했다.전태윤은 이동할 때 보통 롤스로이스를 타고 다녔고 경호원들이 탄 검은 차가 몇 대 따라다니곤 했다. 그리고 전태윤이 이곳에 나타날 리도 없었다.그의 가족 중에 관성 중학교에 다니는 애가 없어 성소현은 더는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하예정의 서점 문 앞에 도착한 성소현이 차를 세우자마자 마침 하예정이 주우빈을 안고 나왔다.“예정 씨, 내가 올 줄 알았어요?”성소현이 차에서 내리며 웃었다.“우빈이까지 안고 날 마중하러 나왔네요?”“그게 아니라 우빈이랑 슈퍼 좀 다녀오려고요.”성소현이 가까이 다가와 주우빈을 안으려 하자 주우빈은 고개를 홱 돌려 하예정의 목을 끌어안으며 말했다.“이모가 안아줘요.”그러자 하예정이 그녀에게 설명했다.“우빈이 점점 좋아지고는 있지만 평소 같이 지냈던 우리랑만 붙어있으려고 해요.”“주씨 가문 인간들 정말 쓰레기만도 못한 인간들이에요!”귀여운 주우빈을 안을 수 없었던 성소현은 화를 주체 못 하고 주씨 가문 사람들을 한바탕 욕했다.“예정 씨 언니랑 그 남자는 이혼했어요?”“네, 어제 이혼했어요. 재산도 나눠 가졌고 인테리어 비용도 전부 돌려받았어요.”주우빈과 함께 슈퍼로 가려 했던 하예정은 성소현이 오자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왜 이렇게 일찍 왔어요? 혹시 유전자 검사 결과 나왔어요?”이경혜 없이 성소현 혼자 온 걸 보고 아무래도 두 사람이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다고 짐작했다.“검사 결과 아직 안 나왔어요. 내일 점심에 엄마가 가지러 가기로 했어요. 오늘은 내가 기분이 안 좋아서 얘기나 좀 하려고 온 거예요. 예진 씨랑 효진 씨랑 얘기 나누면 기분이 좋아지거든요. 엄마도 함께 오고 싶어 하셨는데 내가 오지 말라고 했어요. 그래야 내게 제대로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전태윤을 수년간 짝사랑한 성소현에게 짧은 시간 내에 그에 대한 마음을 접으라고 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녀는 마음이 찢어지듯이 아팠지만 가족들이 걱정할까 봐 가족들 앞에서는 눈물을 보일 수가 없었다.그
성소현이 차를 한잔 마시고는 힘겹게 입을 뗐다.“예정 씨, 대표님이 정말 결혼했어요.”하예정이 두 눈을 깜빡였다.“지난번에 대표님이 결혼반지를 낀 걸 봤다고 하지 않았어요?”‘그런데 왜 또 결혼 얘기를 하는 거지?’성소현이 머뭇거리다가 말했다.“결혼반지를 낀 걸 보긴 했지만 내가 마음을 접게 하려고 일부러 결혼반지를 낀 거라고 요행을 바랐거든요.”심효진이 물었다.“그럼 지금은 확신해요? 전 대표님이 정말 결혼했어요?”성소현이 고개를 끄덕였다.“대표님이 카카오 스토리에 결혼 사실을 밝혔어요. 이 일은 이미 관성의 상류 사회에서 엄청 들끓고 있거든요. 수많은 사람들이 대표님의 아내분이 누군지 궁금해하고 있어요. 지금 전씨 그룹과 전씨 저택 앞에 기자들이 쫙 깔려있어요. 내가 오기 전까지 아무런 기사도 나지 않은 걸 보면 아직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나 봐요.”하예정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언론에서 그 사람의 결혼에 대해 그렇게 관심이 많아요?”심효진과 성소현이 동시에 쳐다보자 하예정이 쑥스럽게 웃었다.“우리랑 아예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라서 지금까지 별 관심이 없었거든요. 평생 만날 일도 없을 텐데 굳이 뭐 하러 신경 써요, 안 그래요? 그 사람을 신경 쓸 시간에 공예품이나 더 만들어서 돈이나 더 벌겠어요. 그 사람을 알게 된 것도 효진이한테서 들은 거예요. 효진이가 하도 그 사람 얘기를 많이 해서 알게 됐거든요.”그러자 성소현이 말했다.“대표님은 관성의 최고 재벌 집 도련님이자 전씨 그룹의 주인이에요. 신분도 귀하고 얼굴도 아주 잘생겼어요. 지금까지 연애한다는 소리도 못 들었는데 갑자기 결혼 발표를 하니까 다들 이 난리인 거죠. 기자들은 대체 뉘 집 딸이길래 대표님의 아내가 됐는지 엄청 궁금해해요. 기자들뿐만 아니라 나도 궁금해요. 그런데 아쉽게도 우리 오빠도 알아내지 못하더라고요. 전씨 가문의 사모님이 대체 누구일지...”성소현은 찻잔에 차를 한잔 더 따르고 목을 축인 후 계속하여 말을 이었다.“가장 불쌍한 건 나예요. 진
“서점에 갈 거면 전부 가지고 가서 효진이랑 같이 먹자. 우리의 입맛이 서로 비슷하거든. 지금 효진은 나보다 더 잘 먹어. 배가 벌써 나왔으니까 아기가 영양분을 많이 필요로 하지. 하루에 몇 끼 더 먹는다니까.”도아영이 물었다.“그럼 살 많이 쪘어요? 우리 회사에서 임신하신 직원들을 보면 금방 살이 불어나시던데. 정말 많이 찌더라고요. 임신 초기엔 입덧으로 아무것도 못 먹다가 입덧이 끝나면 폭풍 흡입한다던데. 음식 조절 못 해서 살이 확 찐대요. 태아가 크면 엄마도 같이 살이 찐다고 하던데.”하예정이 급히 물었다.“나도 살쪄 보여?”하예정도 많이 먹는 편이었다.“아직 배가 많이 나오진 않으셔서 약간 통통해 보일 뿐이에요. 살쪘다고는 못하겠는데요.”하예정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행히 일하고 있어서... 집에서 쉬었으면 진짜 돼지처럼 뚱뚱해졌을 거야.”하예정은 임신 중에도 일을 고집했다. 단순히 사업이 바쁜 것뿐만 아니라 집에서 먹고 자기만을 반복하다 보면 정말 돼지가 될 것 같아서였다. 그녀는 건강하고 무술 기본기까지 있어 일반 여성보다 상태가 좋은 편이라 8개월까지 일하다가 휴가를 계획하려고 했다.아이 낳고 나면 바로 운동 시작해서 원래 체중으로 돌아가야 한다.전태윤이 어떤 모습이 되든 영원히 사랑할 거라고 말했지만 하예정은 스스로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남자의 말은 가끔 듣기만 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아야 하는 법이다.과거 주형인도 하예진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하예진이 몸매 관리를 못 하자 바람까지 피웠다.“임신이 병도 아니고. 무거운 일만 안 하면 큰 문제 없어요. 우리 회사 여직원들도 대부분 8개월까지 일하시더라고요. 제가 아는 일 중독자 한 분은 9개월 넘게 일하다가 휴가를 내자마자 일주일 만에 아들 낳았대요. 아들이 석 달 되자마자 바로 출근했고요. 육아휴직을 반년까지 줬는데도 안 받더군요.”하예정이 말을 이었다.“안 받는 게 아니라 생활하기 위해서일 거야. 너무 오래 쉬면 자리를 뺏
“잠도 안 오고 심심해서 근처에서 좀 돌아다녔어요. 회사 주변에 마트가 많아서 뭐든 쉽게 살 수 있더라고요.”도아영이 하예정을 부축하려 하자 하예정이 웃으며 말했다.“괜찮아. 아직 임신 후기처럼 불편한 건 아니니까.”스스로 앉은 하예정의 옆에 도아영이 자리를 잡았다.“과일이랑 간식 좀 샀는데 제가 먼저 맛보고 괜찮은 것만 골랐어요.”도아영이 사 온 봉지들을 풀어놓으며 말했다.하예정은 물컵을 내려놓고 과일을 살펴보았다.“난 편식 안 해.”도아영도 웃으며 덧붙였다.“저도 크게 편식하는 편은 아니에요. 물론 맛있는 건 더 좋아하지만요.”“다 그래. 맛있는 게 있으면 당연히 그걸 먹는 거지. 없으면 그냥 먹을 수 있는 것을 먹고.”가난한 시절을 겪은 하예정은 비록 지금은 전씨 가문의 큰며느리가 되었어도 여전히 검소한 습관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과자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이 집 간식 괜찮더라. 소현 언니랑 가끔 사 먹곤 했어.”하지만 대부분은 집에서 만든 간식을 가져왔다. 전씨 가문의 요리사가 만든 간식이 훨씬 예쁘고 맛있었다.“더 돌아다닐 생각 있어?”하예정이 물었다. 낮잠에서 깨면 도아영을 데리고 구경시켜주기로 약속했었다.“쇼핑은 안 가도 될 것 같아요. 언니의 복 터진 그 서점만 가볼게요. 소씨 가문의 며느리님도 소개해주세요. 이렇게 중요한 분을 꼭 만나 봐야죠.”하예정은 폭 소리쳤다.“복 터진 서점이라니.”“맞잖아요. 그 서점에서 사업을 시작하시고 전 대표님을 만나셨으니 복 터진 서점이 아니에요?”하예정은 반박할 수 없었다.“효진은 성격이 직설적이고 외향적이라서 사귀기 쉬울 거야. 친구 사귀는 것도 좋아하고.”“언니가 낮잠 자는 동안 알아봤는데 다들 친절하다고 그러더라고요. 소현 언니만 눈이 너무 높아서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은 쳐다도 안 보신다던데.”성소현은 친구를 가릴 정도로 까다로웠다.관성의 재벌가 아가씨들은 대부분과 성소현과 사이가 좋지 않았기에 하예정과 심효진을 알기 전에는 단 한 명의 친구 문가희
이소라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사모님은 아직 젊으시니 회복도 빠르실 거예요. 몸매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제가 돌본 부자 사모님 중에도 산후조리 끝나자마자 운동 열심히 하셔서 금방 날씬한 몸매로 돌아오신 분들이 많으셨어요.”그녀는 여운별이 유산이었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유산 후 조리하는 동안은 몸매가 변할 정도가 아니었고 살이 찔 리도 없었다.하루 세 번씩 영양 만점 보양식이 들어오지만 여운별은 대부분 한두 입만 맛보고 치우게 하거나 이소라에게 주곤 했다.여운별은 안심한 표정이었다.“적게 먹을래요. 조리가 끝나고 뚱뚱보가 되는 건 싫으니까. 그런데 유산 후 조리하는 기간은 보통 며칠이나 해야 하죠? 침대에만 누워있으니 지루해서 죽겠어요.”여운별이 모습을 안 보이면 하예정이 그녀를 잊어버릴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다시 접근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텐데...’사실 여운별은 하예정 일행과 어울리고 싶지 않았다.하예정의 행복한 삶과 주변인들의 부유한 생활은 여운별의 가슴을 더욱 쓰라리게 했다.특히 여운초! 그 눈먼 여자에 대한 증오는 더욱 깊어만 갔다.과거의 비참했던 삶과는 달리 지금의 여운초는 전이진과의 결혼으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전이진이 바로 여운별이 한때 마음에 두었던 남자였다.이소라가 설명했다.“형편이 좋으신 분들은 산후조리처럼 한 달 정도 쉬시고 직장인들은 보통 일주일 후에 일상으로 돌아가세요. 사모님은 여유도 있으시고 젊으시니 한 달 정도 푹 쉬시는 게 좋겠네요.”이소라는 여운별이 용태호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그저 나이 많은 남편을 둔 젊은 아내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이 넓은 저택에는 여운별과 두 명의 경호원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이소라는 용태호를 본 적도 없었고 그가 중년의 용씨 성을 가진 남자라는 정보조차 여운별의 입에서 나온 것이 전부였다.여운별은 국물을 천천히 마시다가 말했다.“벌써 괜찮은 것 같아요. 한 달은 너무 길어요. 다른 사람들은 일주일 후에 일상
특히 하예정에 대한 증오는 더욱 깊어만 갔다.여운별은 온갖 불행의 근원이 하예정 때문이라고 믿었다.여씨 가문의 몰락과 여운초의 집권까지 전부 하예정이 참견했기 때문이다.‘차라리 내가 초능력이라도 있었으면 시원하게 복수했을 텐데...'여운별은 이를 악물었다. 지금의 하예정은 전씨 가문에서 국보급 대우를 받으며 행복한 임신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반면 여운별은? 첫 아이를 가졌지만 사랑하는 남자의 자식도 아닐뿐더러 용태호의 강요로 지워야 했다.‘같은 인간인데 왜 이리도 운명이 다른 거야?'방 안의 난방이 답답한지 여운별은 창가로 걸어갔다.문을 열려는 순간...“사모님, 창문 열지 마세요! 유산 후 찬 바람을 쐬면 안 돼요.”문을 열고 들어온 산후 조리사 이소라가 허둥지둥 말렸다.“밖에 햇빛이 아주 강해서 안 추워요. 관성의 겨울은 춥지 않거든요. 다른 곳처럼 눈이 펑펑 오는 것도 아니고. 에어컨을 끌까요? 에어컨을 틀어놓으니 숨 막혀 죽겠어요. 창문마저 닫아두니 공기까지 막혀서 정말 답답하네요.”여운별은 결국 창문을 열어젖혔다.추워도 며칠이면 금세 지나갈 것이다. 한파가 지나면 기온이 회복되어 낮에는 17, 18도까지 오르고 있었기에 정말 춥지 않았다.거리에는 반팔 입은 사람들도 보였다. 한마디로 봄, 여름, 가을, 겨울옷을 입은 사람들이 모두 공존하는 관성의 거리는 사계절이 한꺼번에 펼쳐진 듯했다.여운별을 돌보는 산후 조리사 이소라는 용태호가 특별히 데려온 사람으로 15일만 근무하면 월급을 받고 떠나는 조건이었다.그녀는 여운별의 장기적인 건강을 고려해 가지고 온 보신탕을 침대 옆 탁자에 내려놓고는 여운별의 곁으로 다가가 타일렀다.“사모님은 아직 젊으셔서 모르시겠지만 유산 후에도 산후조리처럼 조심히 대해야 해요. 침대에서 푹 쉬시고 좋은 음식 드시며 찬 바람을 쐬지 않는 게 정말 중요하거든요. 지금은 별일 없다고 생각하시겠지만 나이가 들면 문제가 생길 거예요.”여운별은 별로 개의치 않으며 말했다.“외국 여자들은 산후조리도 안 하면서
도아영은 전이혁이 보낸 메시지를 한참 바라보다가 답장을 보냈다.[아직 확정된 건 없어요. 왜요? 밥이라도 대접해 주실 건가요? 아니면 제가 돌아가는 게 아쉬워요?”전이혁이 회답했다.[음식 대접하고 싶어서요. 아영 씨랑 다시 한번 이야기를 나누고 싶거든요.]도아영은 물었다.[무슨 이야기를요?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요? 아니면 이혁 씨가 이미 그녀를 선택하셨다는 걸 확정하신 건가요? 만약 정말 여자친구가 생겼다면 저에게 그분을 소개해 주세요. 그렇게만 된다면 저는 이혁 씨의 세계에서 영원히 사라져 줄게요.]그녀는 노력해보기도 전에 희망이 없다면 포기할 생각이었다.전씨 가문과 같은 좋은 집안은 흔치 않았지만 전이혁이 그녀를 좋아하지 않고 결혼할 마음이 없다면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다.전이혁은 몇 분 동안 답장이 없다가 이렇게 보내왔다.[제가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하지만 아직 공식적인 연인 관계는 아니라서 아영 씨에게 소개할 수는 없어요. 우리 사이의 문제는 이따가 만나서 천천히 이야기해요. 오늘 저녁에 시간 되시나요?][없어요.][그럼 언제 시간 되세요? 제가 음식 대접하고 싶은데.]도아영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제가 관성에 온 건 이혁 씨에게 확실한 답을 듣기 위해서였어요. 이제 대충 알 것 같으니 이틀 후면 돌아갈 거예요.]이미 여기까지 왔는데 도아영은 며칠 동안 관성에서 휴가를 즐기기로 했다.해주시로 돌아가면 다시 바쁜 업무에 파묻히면서 쉴 틈도 없을 것이 분명했다.[돌아가기 전에 식사 한번 하죠.]부부는 못 되더라도 원수지간이 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둘 사이에 원수 사이로 지낼만한 일도 없지 않은가.전이혁은 이미 그녀에게 모든 걸 말해 주었다. 그가 왜 그녀에게 접근했는지, 왜 그렇게 잘해줬는지에 대한 진짜 이유를 말이다.그리고 도아영이 훌륭한 사람이지만 그의 취향이 아니라는 점도 알려주었다.두어 달밖에 알지 못한 사이, 설령 마음이 움직였다 한들 깊은 정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지 않는가.전이혁이 도아영을
“이혁 도련님을 네 가이드로 삼아서 관성 구경을 시켜줄게. 교외에도 괜찮은 관광지 몇 군데가 있으니 한번 가보는 것도 좋아.”도아영은 고개를 저었다.“이혁 씨는 저랑 말 한마디조차 나누기 싫어하는 것 같은데요. 여행은 기분 좋게 다녀야지 제가 왜 그의 차가운 얼굴에 찰싹 달라붙어야 하죠? 오히려 기분만 망치겠어요. 언니 시간 있으세요? 같이 쇼핑 좀 하고 싶은데. 내일은 서원 리조트에 들러 전씨 할머니를 뵙고 싶어요.”전씨 할머니를 찾아가는 이유는 왜 자신을 선택했는지 따지려는 게 아니라 전씨 가문의 유명한 어르신을 한번 만나보고 싶어서였다.하예정은 웃으며 답했다.“물론이지. 근데 나는 낮잠 자는 게 습관이 되어서 안 자면 오후에 힘이 없어. 푹 쉬지 못하면 두통도 오고 눈도 아파.”“그럼 언니가 낮잠에서 깬 후에 같이 가요.”“그래, 내가 일어나면 우리 서점에도 데려갈게. 효진이가 거기 있을 거야. 내 가장 친한 친구는 효진이와 소현 언니뿐이거든.”하예정은 새로운 동서가 생길 때마다 자신의 두 친구를 소개하곤 했다.“좋아요.”도아영은 갈 데도 없고 할 일도 없는 터라 하예정이 어디로든 데려가 주기만 하면 그냥 따라가기로 했다.“너는 낮잠을 안 자?”“30분 정도는 자요.”“내 사무실이 크진 않아서 별도의 휴게실은 없어. 평소에는 긴 소파를 펴서 침대처럼 쓰고 낮잠에서 깨면 다시 접어서 소파로 써. 우리 둘이 자면 좀 비좁긴 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어때?”도아영은 하예정을 도와 소파를 칩대로 펴주었다.“이런 접이식 소파 침대가 괜찮네요. 언니는 좀 주무세요. 저는 커피 마시면 잠이 안 와서... 지금은 일도 안 하기에 밤에 일찍 자면 돼요.”하예정은 하품하며 말했다.“그럼 난 좀 잘게.”“네.”도아영은 자신이 하예정의 평온한 일상을 방해하고 있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하예정은 전태윤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하고 몇 분간 대화를 나눈 뒤 누웠다. 그녀는 도아영을 전혀 경계하지 않았는지 금방 잠이 들었다.도아영은
“언니, 그때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니가 마음에 들어서 전 대표님이 언니에게 구애하신 건가요?”하예정은 웃으며 대답했다.“나와 태윤 씨는 깜짝 결혼했어. 누가 누구에게 구애하는 그런 것도 없이. 결혼 후에 서로 정을 키워나간 케이스지. 하지만 우리 할머니와 무관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지.”하예정과 전태윤의 깜짝 결혼 이야기를 도아영도 조금 알고 있었다.하예정은 간단히 그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전태윤은 완전히 전씨 할머니의 강요로 하예정과 결혼했던 것이다.더욱 놀라운 것은 전씨 할머니가 이미 일찍이 하예정을 노리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 이유는 더욱 황당했는데 어떤 점쟁이가 하예정과 전태윤이 한평생 부부의 인연이 있다고 점쳤을뿐더러 전태윤이 하예정과 결혼하지 않으면 평생 독신으로 살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것이다.전태윤을 가장 아끼는 전씨 할머니께서 가만히 계실리가 있겠는가! 할머니는 전태윤의 효심을 이용해 온갖 방법으로 결혼을 강요했고 덕분에 지금의 행복한 결혼생활이 가능했다.도아영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그럼 전씨 할머니는 왜 저를 선택하신 걸까요? 확실히 말씀드리지만 저는 전씨 할머니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제 사주를 알아내서 점을 쳐보시고 이혁 씨와 부부의 인연이 있다고 판단하신 건가요?”하예정이 웃으며 대답했다.“그건 전씨 할머니께 직접 여쭤보셔야 할 것 같아. 내가 알기로는 그 점쟁이는 이제 전씨 할머니를 만나주지 않는다고 하셨어. 서로 인연이 끝났다면서. 내 생각에는 점쟁이 때문이 아니라 할머니께서 여행 다니시며 여러 사람의 인품을 파악하시고 손자들에게 맞는 여성이라고 판단하셔야만 손자들에게 추천하시는 것 같아. 할머니는 늘 태윤 씨 형제들을 걱정하고 계시거든. 남들보다 뛰어나게 잘 키웠는데 정작 연애만큼은 어리숙하다고 말이야. 결혼은커녕 연애도 제대로 안 한다고 잔소리하셔. 남들이 자기 자식들에게 알맞은 여성을 소개해달라고 하면 할머니 손자들의 인생 대사도 해결하지 못했는데 남의 일까지 신경 쓸
하여 전이혁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도아영은 어제 하예정과 이야기를 나누며 잘 통하는 부분이 있어 그녀의 회사로 찾아온 것이다.“난 점심에는 보통 커피를 마시지 않아.”두 사람은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도아영은 하예정의 배를 살펴보며 말했다.“지금은 커피나 진한 차는 피하는 게 좋아요. 임신 중에는 조심해야죠.”하예정은 웃으며 답했다.“알아. 커피나 술은 이미 오래전부터 끊었어.”하예정이 오랫동안 커피를 마시지 않았기 때문에 도아영이 직접 커피를 내려야 했던 것이다.“성소현 씨는 오늘 안 오시나요?”도아영이 무심코 물었다.도아영이 온 지 30분이 넘었지만 성소현이 회사에 오지 않는 이유가 궁금했다.“소현 언니는 오늘 채소 시장에 갔어. 저녁이 되어야 돌아올걸.”하예정과 심효진은 둘 다 임신부였다. 그녀들 스스로 자신이 아직 힘이 넘친다고 생각했지만 성소현의 눈에는 둘 다 국보급 보물로 소중히 보호받아야 할 존재였다.“아...”식당에 들어가 두 사람은 각자 음식을 담아 한적한 자리에 앉았다.도아영은 생선과 고기, 그리고 새우가 가득 담긴 요리들을 보며 물었다.“회사 식사는 모두 똑같나요? 등급별로 나누지 않으시는군요.”“응, 등급 같은 건 안 나누어.”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거의 관리직이었기에 등급을 나눌 필요가 없었다.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여기까지 오기에는 너무 멀었지만 하예정은 그들을 위해 삼시 세끼를 제공했고 요리들도 나쁘지 않았다.그녀는 노동자들의 식사에 고기와 국물이 반드시 놓여야 한다고 요구했다. 농장에서 힘든 일을 이겨내려면 고기와 기름진 음식이 없으면 쉽게 배고프기 일쑤였다.하예정은 시골 출신이었다. 열 살 이후로는 마을을 떠났지만 그전까지는 집안일을 많이 도왔기에 농사일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었다.하예정은 도아영을 살펴보며 물었다.“너희 회사 식당은 등급별로 나누어?”도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여러 개의 식당이 있어요. 직급에 따라 다른 식당에서 식사해요. 물론 메뉴도 다르지만 보통 직
“할머니께서는 저의 선택을 존중하신다고 하셨지만 후회하지 말라고 하셨어요.”전이혁은 명해은에게 먼저 국물을 떠드렸고 또 전현민이 들어오는 것을 보더니 다시 국물을 한 그릇 떠드리며 말했다.“저는 후회할 일은 절대 하지 않아요.”비록 이전에는 도아영과 꿈속의 여자 ‘여우' 사이에서 고민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우'와 함께할 때 특별히 행복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는 ‘여우'와의 만남을 간절히 기대했고 만나서 싸운다고 해도 그 순간이 기다려지기만 했다. 이런 기대감은 도아영에게서는 찾을 수 없었다.그가 도아영에게 접근한 건 순전히 전씨 할머니께서 선택해주신 사람이기 때문이다.결국 감정은 억지로 할 수 없는 법, 억지로 따온 열매는 달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명해은이 입을 열었다.“그래. 후회하지나 말고.”명해은은 속으로 중얼거렸다.‘어머님이 널 이렇게 쉽게 놔두실 리가 없지. 넌 아직도 진실을 모르고 있구나!'전이혁은 그가 후회할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전씨 할머니께서는 확신 없는 일은 절대 하지 않으시는 분이었다.명해은이 전씨 할머니를 잘 알고 있다고는 하지만 전현민은 아들로서 명해은보다 그의 어머니를 더 잘 알았다.전현민 부부는 서로를 의미심장한 눈길로 바라보면서 웃었다.그리고는 전이혁과 도아영에 관한 화제를 더 이상 꺼내지 않았다.식사하면서 명해은은 계속 전이혁에게 반찬을 얹어주었다.“엄마, 제가 방금 돌아오자마자 바비큐를 많이 먹어서 배가 불러요. 이렇게 많이는 못 먹겠어요.”자기 그릇에 산처럼 쌓인 반찬을 보며 전이혁이 말했다.“엄마, 아빠께도 좀 드리세요. 안 그러면 또 제가 아빠의 아내 관심을 뺏었다고 투덜대실 거예요.”말이 떨어지자 전현민도 전이혁의 그릇에 반찬을 얹어주셨다.“평일엔 바쁘게 일하느라 제대로 식사도 못 했겠다. 살도 많이 빠졌네. 많이 먹어.”전이혁은 웃으며 말했다.“아빠, 아까는 밥 한 그릇과 나물 한 접시만 주신다고 하셨잖아요.”“그건 화나서 한 말이지,”전이혁도 부모님께 반찬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