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당시 전유림은 교통사고를 당했지만 부상은 그리 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입원까지 거부했으나 형들이 강제로 병원에 눌러 앉혔다.그때 진소아의 과장이 그녀에게 전유림이 전씨 가문의 도련님이니 특별히 신경 써서 대하라고 귀띔해 주었다.하지만 의사로서 진소아는 모든 환자를 평등하게 대했기에 상대가 재벌 가문의 아들이라고 해서 특별 대우를 하지는 않았다.다만 과장님의 친절한 조언은 마음에 새겨 두었을 뿐이다.사실 전유림은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다.다만 임도준이 그의 정체를 모르고 가족에게 기대어 사는 무능한 인물로만 생각하며 진소아도 속은 줄 알았던 것이다.이정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럼 도준 부모님은 아라 씨 쪽을 더 좋아하시겠네?”“글쎄요. 그건 선배의 일이지 제가 알 바 아니에요. 선배 부모님이 누구를 좋아하든 저와는 아무 상관 없어요.”진소아는 임도준과 부부로 살고 싶지 않았다.“응. 신경 쓸 필요 없어. 도준은 한편으로는 너를 좋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아라 씨와 함께 부모님을 모시고 바닷가에 다녀왔다며?”“선배 어장 속에 물고기가 몇 마리가 있든 저와는 아무 상관 없어요.”진소아가 이정자의 귀에 입을 대고 소곤거렸다.“선배가 어느 날 만취해서 아라 씨가 선배를 집에 데려다주고 그대로 함께 밤을 보냈대요. 둘이 같은 침대에서 함께 잤다고 하면서 아라 씨가 그 사진을 찍어서 저한테 보내기도 했어요. 그러니까 저와 선배는 절대 가능성이 없어요.”이정자가 깜짝 놀라며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그럼 두 사람... 이미 그런 사이가 된 거야?”“그건 아니에요. 아라 씨 말로는 그날 밤 선배가 너무 취해서 아라 씨를 저로 착각했지만 끝까지 가지는 못하고 선배가 그대로 잠들어 버렸대요. 하지만 같은 침대에서 밤을 함께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어요. 아라 씨는 그 일로 선배에게 책임을 묻겠다고도 했고요.”진소아가 더욱 낮은 목소리로 이어갔다.“저는 선배가 남자로 보이지 않아서 그런 일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아요. 그런데 작은아버지께서는 줄곧
“그럼 난? 나 혼자 있어야 해? 나도 몇 년 동안이나 못 가봤어. 가을 나들이도 못 가고”진국림이 참다못해 말을 꺼냈다.진국림 부부는 매일 진료소만 지키느라 오랫동안 여행을 떠나지 못했다.가끔 문을 닫고 잠시 나가 볼까 싶으면 아직 멀리 가기도 전에 환자가 전화를 걸어와 진료를 부탁했고 그 바람에 몇 년째 제대로 여행 한 번 못 가보았다.그나마 설날 연휴에 시내 근처로 차를 몰고 돌아다니는 게 전부인데 또 연휴라 관광지에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어디든 인산인해라 풍경은커녕 사람 머리만 보여서 여행의 즐거움은 온데간데없고 오히려 녹초만 되고 말았다.그 후로 진국림 부부는 차라리 집에서 티비를 볼지언정 연휴에 나가서 고생하고 싶지 않았다.이정자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진료소나 지키고 있어. 다음번에는 내가 진료소를 지키고 당신이 나가서 좀 쉬다 오라고. 번갈아 가면서 마음도 좀 풀자.”진국림이 고개를 흔들었다.“안 돼. 나는 당신과 함께 갈 거야. 우리 부부가 오랫동안 마음 편히 쉰 적이 없단 말이야. 소아야, 너희가 나들이 갈 때면 작은아버지한테도 꼭 알려 줘. 난 하루 문을 닫을 거야. 휴대폰도 진동으로 돌려놓을 테니까 그날은 환자 전화는 일절 안 받을 거다. 병원에 가든지 임씨 진료소로 가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해. 나도 좀 쉬어야지.”사실 진국림은 전씨 가문의 어른들과 가까이서 지내며 과연 소문처럼 생각이 열리고 좋은 분들인지 직접 보고 싶었다.조카의 행복과 직결된 문제가 아닌가.“소아야, 듣자니 도준의 부모님이 오셨다며? 알고 있었어?”이정자가 갑자기 물었다. 그녀는 임영훈 부부를 기억하고 있었다.그들이 이곳에 왔을 때 마치 며느릿감을 살펴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다.이정자는 임도준을 얕보는 게 아니라 그의 원가족을 좋아하지 않을 뿐이었다.진소아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들었어요. 어젯밤에 오셨다면서요? 선배는 부모님이 오신 줄 몰랐다가 집에 돌아가서야 알게 됐대요. 선배 어머니는 혈당이 높으셔서 일정 기간마다 시내에 나와
“소아 씨, 저 먼저 갈게요. 내일 다시 봐요.”전유림이 잠시 진소아에게 시선을 머물렀다가 웃으며 손을 흔들어 작별 인사를 건넸다.그러고는 전기자전거를 타고 자리를 떠났다.진소아는 진료소 입구에 서서 그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바라보았다.그의 모습이 아주 멀어진 뒤에야 그제야 안으로 들어갔다.진국림 부부는 조카가 돌아온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전유림과 대화하는 중에 끼어들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진료대 위에는 두 바구니의 싱싱한 과일이 놓여 있었는데 잎사귀까지 달려 있을 정도로 갓 딴 것임이 분명했다.“왔어. 유림 씨가 과일 두 바구니를 가져왔는데 집에서 직접 재배한 제철 과일이라며 아침에 막 땄다고 하더구나. 유림 씨 할머니께서 너한테 갖다주라고 하셨대. 정말 신선해. 자가에서 먹는 거라 농약을 거의 쓰지 않아서 안심하고 먹어도 된다고 하더라.”이 계절 제철 과일이라면 감과 유자가 대표적이었다.대부분 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과일들이었다.이정자가 작은 칼로 유자 하나를 따서 껍질을 깨끗이 벗겼다.그리고 조각조각 떼어 남편에게 한 조각, 진소아에게 한 조각 건네며 말했다.“갓 딴 유자 맛 좀 보렴. 시중에서 파는 것보다 나은지 한번 먹어봐. 감은 아직 덜 익었으니까 며칠 두었다가 숙성된 다음에 먹는 게 좋겠다.”이 두 가지 말고도 다른 과일들이 함께 들어 있었는데, 그중에는 수입산 과일도 눈에 띄었다. 굳이 묻지 않아도 전씨 할머니께서 따로 챙겨 넣으신 게 분명했다.유자를 맛본 진국림이 말했다.“확실히 훨씬 맛있구나. 달고 시원하고.”이정자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진소아가 말을 이었다.“정말 고맙네요. 이렇게 많이 보내 주셔서. 우리 집은 앞으로 보름 동안 과일 살 일이 없겠어요.”이정자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다 먹으면 유림 씨가 또 가져오겠지.”소문에 의하면 서원 리조트 기슭에는 과일나무가 많고 울긋불긋한 꽃밭도 끝없이 펼쳐져 있다고 했다. 그곳의 풍경은 유달리 아름다워 마치 아름다운 그림 한 폭
진소아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꺼냈다.“누구나 다 그래요. 손자가 많으면 손녀를 원하고 손녀가 많으면 손자를 원하는 법이죠. 늘 모든 걸 뜻대로 되길 바라는 거죠.”그러나 세상일이 어찌 그렇게 뜻대로만 흘러가겠는가.살아가면서 뜻을 이루는 일은 열에 하나도 채 되지 않는 법이다.전유림이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넘겼다.“맞아요. 지금은 큰형이 딸을 낳아서 할머니께서 증손녀를 품에 안으셨기에 좀 나아지셨지, 예전에는 남의 집 딸만 봐도 데려오고 싶어 하셨어요.”그중에서도 가장 탐내던 아이는 예준성의 외동딸 예지연이었다.예준성도 딸이 하나뿐인데 전씨 할머니께서 예진 리조트로 갈 때마다 예지연을 안고 와서 키우고 싶어 하셨다.그 바람에 예씨 할머니께서는 마치 도둑을 경계하듯 전씨 할머니를 막아야 했다.하지만 예씨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로는 전씨 할머니께서 오랫동안 그곳에 가시지 않으셨다.참, 인생이란 아는 사람들을 하나둘 떠나보내는 길인가 보다.전씨 할머니도 나이가 많으시니 언젠가 모두의 곁을 떠나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전유림은 마음이 무거워졌다.비록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고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오리라는 걸 알면서도 정작 할머니를 잃을 생각을 하면 그는 두려움을 떨칠 수 없었다.“유림 씨네 집에서는 딸이 가장 소중한가 보네요.”“그렇죠. 할머니는 증손녀 하나를 얻으셨는데, 아직 둘, 셋을 더 바라세요. 우리 모두가 증손녀를 안겨 드리길 기대하고 계시거든요.”다만 지금은 전태윤 부부 외에는 다른 형수님들에게서 딸이 태어나지 않았다.전하연 하나만 있어도 그나마 다행이었다.전유림도 딸을 좋아하긴 했지만 전씨 할머니처럼 간절히 바라지는 않았다.아마 언젠가 자신에게 아들이 두셋 생기면 그때는 할머니 못지않게 딸을 갈망하게 될지도 모른다.그러나 전태윤은 그렇게 많은 아이를 원하지 않았고 하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어차피 사촌 형제들도 저마다 아이를 낳을 것이기에 그의 아이도 외롭지 않을 것이었다.사촌들끼리도 친형제나 다름없으니까.전유림은
임도준이 목소리를 높였다.“좋은 가풍이란 다 만들어 내는 거야. 그 사람들이 일부러 포장해 놓은 이미지일 뿐이지. 그 집 며느리들을 한번 봐. 누가 평범한 사람이던? 죄다 명문가 딸에 여성 사업가들이잖아. 결국 비슷한 집안끼리 어울리는 거야. 한때 신데렐라가 되어서 소문났던 전씨 가문의 큰 사모님조차 알고 보면 재벌 가문의 후손이야. 그러니까 순진하게 생각하지 마. 남의 말에 휘둘리지 말고. 그건 전씨 가문이 자기 집안 남자들을 위해 만들어 낸 좋은 이미지일 뿐이야. 진짜 신데렐라가 되길 바라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야.”진소아가 평온하게 대꾸했다.“그 이미지가 진짜든 일부러 만든 거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가요? 아까도 말했는데 저와 유림 씨는 그저 이웃, 그냥 보통 친구 사이예요. 선배가 생각하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고요. 그러니까 자꾸 유림 씨를 들먹이지 마세요.”진소아는 좋은 집안에 억지로 올라서려는 생각이 없었기에 전유림이 무슨 신분이든 신경 쓰지 않았다.그가 재벌 가문의 도련님이든, 평범한 직장인이든, 그저 위아래층 이웃이자 말이 통하는 보통 친구일 뿐이었다.진소아는 친구를 사귈 때 집안 배경이 아닌 인격만 볼 뿐이었다.“선배, 유림 씨의 신분은 저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저도 그분에게 아무런 마음도 없고요. 그러니까 유림 씨가 어떻든 신경 쓰지 않고 또 그분은 저를 속인 적도 없어요.”임도준이 말문이 막혔다.진소아가 처음부터 전유림의 진짜 정체를 알고 있었지만 자신에게는 알려 주지 않았다.임도준이 전유림을 빌붙어 먹는 무능한 사람으로 여기도록 내버려둔 것이다.하지만 생각해 보면 임도준 본인도 진소아에게 전유림의 배경에 관해 물어본 적은 없었다.만약 전유림의 약점을 찾으려는 마음이 없었다면 그에 대해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결국 자신이 적을 얕본 탓이었다.“선배, 저는 이제 집에 가야 해요. 부모님 잘 모시고 편안하게 휴가 보내세요.”진소아는 전화를 끊고는 다시 전기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진씨 진료소에
전화를 끊은 임도준의 안색이 순간 어두워졌다.그는 힘없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멍하니 창밖의 어둑한 풍경을 응시했다.알고 보니 전유림은 이 도시 최고 부자 전씨 가문의 도련님이었다.그가 몇째이든 전씨 가문의 아들로서 임도준이 평생을 바쳐도 따라잡을 수 없는 경지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전유림의 타고난 복이었다. 그것도 이 도시에서 가장 큰 부를 가진 집안에.그래서 전유림이 민심 아파트에 집을 사겠다고 마음먹자마자 바로 전액 지불하고 한 채를 사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그와 동시에 전유림에게서 은은하게 풍겨 나오는 고귀함의 실체를 떠올리며 임도준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마음속으로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전유림의 외적 조건은 자신보다 압도적으로 뛰어났다.그 때문에 임도준은 전유림을 보기만 하면 비아냥거리며 형수한테 붙어먹는 무능한 인간으로 몰아가고 싶었다.그러나 정작 가장 우스운 사람은 자신이었다.전유림이 몰고 다니던 고급 외제 차는 굳이 묻지 않아도 전유림이 직접 산 것이다.그런 사람이 무슨 필요로 형제나 형수에게 붙어먹겠는가.그에게는 이미 재산이 엄청났다.한참 뒤에야 임도준은 정신을 차리고는 곧바로 진소아에게 전화를 걸었다.마침 진소아가 퇴근하여 전기자전거를 타고 병원을 나서는 길이었다.핸드폰이 울리자 진소아는 길가에 잠시 차를 세우고 발신자를 확인했다.또 임도준이었다.그녀는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왜 자꾸 그가 전화하는 거야? 내가 몇 번이나 말했는데... 아라 씨와 함께 부모님을 모시고 바다에 놀러 간 게 아니었어? 무슨 일로 또 전화한 거야?’잠시 망설이다가 진소아는 결국 전화를 받았다.“선배, 무슨 일이세요?”“소아야, 그놈이 너를 속였어! 그놈은 사기꾼이야!”임도준은 급히 전화를 건 이유가 바로 전유림의 잘못을 알리기 위해서였다.전유림이 고자질할 수 있다면 자신도 못 할 것이 없었다.그가 전유림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보다 전유림의 속임수가 진소아에게 더욱 분노를 일으킬
이은화의 비극적인 결말을 누구보다 똑똑히 보아온 이윤미는 그런 운명을 맞이하고 싶지 않았다.아직 젊었고 아직 살아가야 할 날들이 많았다. 무엇보다 죽음을 원하지 않았다.“우리 엄마가 조카들에게 남기신 재산은 제가 알아서 나눠줄게요. 이미 성인이 된 아이들은 각자 직접 관리하도록 하고 아직 미성년인 아이들은 부모님께 맡겨 두었다가 성인이 되면 다시 돌려주면 돼요. 그건 어디까지나 부모의 책임이니... 설마 자기 자식들의 재산을 가로채거나 욕심내지는 않겠죠?”혹여 그런 일이 벌어진다 해도 그건 그들의 문제일 뿐 이윤미가 나설 일은
“감사합니다. 저는 서 있을게요.”전창빈이 주눅 들어서라서가 아니라 지금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선우민아가 아직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이상, 선우씨 가문에서 그의 신분이 바뀌기 전까지는 그녀의 앞에서 신중하게 행동하고 싶었고 자신의 이미지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앉아요. 그렇게 꼿꼿이 서 있으면 창빈 씨랑 이야기할 때마다 머리를 들어야 해서 목이 아파요.”그녀가 그렇게 말하자 전창빈은 즉시 자리를 찾아 똑바로 앉았다.선우민아가 그를 잠깐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자세가 군인 같네요.”어린 초등학생처럼 선
선우민아가 말을 이었다.“민기가 지붕을 뜯겠다고 하면 우리 엄마는 민기에게 사다리를 대 줄 정도로 아껴주세요. 창빈 씨가 상황을 모르니 당신 탓은 아니지만... 돌아가면 엄마에게 잘 말해드려야겠어요.”선우민기 형제는 서로를 바라보았다.‘우리가 사고를 친 건가?’“언니, 이미 왔는데 그냥 언니 사무실에서 놀게 해줘요. 집에서는 아마 답답해서 나온 걸 거예요.”두 동생이 모두 사고를 친 듯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본 선우정아는 마음 아파하며 동생들을 위해 한마디 해주었다.“어린애들이니까 노는 것을 좋아하잖아요.”전창빈도 덧붙였
“누나.”“누나.”정일범 형제들이 차례로 이경혜에게 인사했다.그러나 이경혜는 눈길만 흘깃 주었을 뿐이다.한성근도 그들이 이은화의 아들들이란 것을 눈치채며 유심히 살펴보았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차가운 반응을 받은 정일범 형제들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강성에서 그들의 위치는 애매하기 그지없었다. 이씨 가문의 아들이라 하자니 성이 정씨였고 정씨 집안의 아들이라 하자니 내세울 게 아무것도 없었다.만약 그들 집안에 뭐라도 자랑할 만한 것이 있었다면 애초에 그들의 아버지가 이씨 가문에 데릴사위로 들어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