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제2화

작가: 고성하
퇴근 시간이 다가오자 강선우는 정장 외투를 팔에 걸치고 사무실에서 나왔다.

심하온이 막 몸을 일으키려 할 때, 그가 말했다.

“오늘 저녁에 약속이 있어서 너 먼저 집에 가.”

약속? 그녀는 전혀 들은 적이 없는데?

이 남자를 올려다보자 여전히 깊고 매혹적인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전 같았으면 강선우가 뭐라고 하든 그녀는 일절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알겠어요.”

심하온이 덤덤하게 말했다.

“술 적당히 마셔요.”

강선우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알았어요. 우리 하온이 말 잘 들어야지.”

심하온은 차를 한 대 불러서 강선우를 미행했다.

줄곧 따라가고 보니 이곳은 어느덧 공항이었다.

인파가 붐비는 공항에서도 그녀는 한눈에 강선우를 알아봤다.

검은색 수제 양복을 차려입으니 더욱 귀족적이고 늠름한 기운이 차 넘쳤다. 훤칠한 외모는 인파들 속에서 단연 눈에 띄었다.

이어서 긴 머리의 여자가 강선우의 품에 안겼고 이 남자 또한 거절하지 않고 그 여자를 꼭 끌어안았다.

오히려 이 둘이야말로 선남선녀 커플 같았다.

포옹을 나눈 후, 여자는 발꿈치를 세워 그에게 키스하려 했다. 강선우가 살짝 피하면서 뭐라고 말했지만 여자는 끈질기게 매달렸고 끝내 강선우의 입술에 키스했다.

두 사람이 딥키스하는 광경에 심하온은 토가 나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더 충격적인 것은 그 여자가 바로 강선우의 양동생, 강다인이라는 사실이었다.

강다인은 세 살에 부모를 여의었다. 그녀의 집안과 강씨 가문이 오랜 친분을 맺고 있어서 강씨 가문에서 그녀를 입양했다.

그녀와 강선우는 어릴 때부터 남매로 함께 커왔다. 심하온이 강선우와 금방 사귀었을 때, 이 남자는 강다인을 선뜻 소개해줬고 또한 강다인도 그녀를 다정하게 ‘새언니’라고 불러줬다.

3년 전, 강다인은 해외로 떠났다.

설마 소위 ‘남매’라는 두 인간이 뒤에서는 이런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도 모자라 혼인신고까지 했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 교통사고의 범인이 바로 강다인?

...

더욱 놀라운 것은 강선우가 강다인을 집으로 데려왔다는 점이다.

그는 태연한 표정으로 심하온에게 말했다.

“하온아, 다인이 돌아왔어. 당분간 우리 집에서 지낼 거야.”

심하온은 주먹을 꽉 쥐어서 손톱이 살을 파고 들어갈 기세였다.

그녀는 아직도 기억한다. 강선우가 처음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와 품에 안고 했던 말을...

“하온아, 여긴 앞으로 우리 집이야. 오직 우리 둘만을 위한 집.”

그때 그녀는 이곳이 강선우와 자신만의 영원한 ‘집’이 되리라 생각했었다. 그래서 이 집을 위해 무수히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집 안 구석구석에 그녀의 정성이 깃들었으며 가구까지도 일일이 심혈을 기울여 고른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강선우가 친히 다른 여자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하온 씨, 안녕하세요.”

강다인은 그녀에게 미소를 지었지만 눈빛에는 미세한 조롱과 도발의 기운이 담겨 있었다.

5년 전에는 ‘언니’라고 부르더니 이제는 말끝마다 ‘하온 씨’라고 부르는 그녀.

강선우는 눈빛으로 강다인을 경고하는 듯했지만 그보다도 무기력함과 애정 어린 느낌이 더 강했다.

강선우 이 인간은 심하온의 자존심을 무참하게 짓밟고 있었다.

만약 진실을 몰랐다면 어리석게 ‘새언니’의 신분으로 강다인을 반겨줬겠지. 그랬다면 두 사람에게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꼴이 됐을까?

“오빠, 하온 씨 나 환영하지 않는 것 같아요.”

강다인은 무고한 표정으로 강선우를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알아요, 내가 두 사람 방해한 거겠죠. 그냥 호텔에 가는 게 낫겠어요. 혼자 있어도 괜찮아요...”

강선우는 즉시 미간을 찌푸리며 심하온을 바라보았다. 막 입을 열려던 찰나, 심하온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요.”

강선우는 하려던 말이 목구멍에 걸렸다.

심하온이 태연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다인 씨 있고 싶은 만큼 있어요.”

말을 마친 그녀는 자신의 침실로 돌아갔다.

강다인은 여전히 그녀를 적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심하온은 이제 이 집이든 강선우든 더 이상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강다인은 이 점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설령 정말 적으로 간주한다 해도 그것은 그 교통사고 때문이겠지. 한편 심하온은 그녀가 알아채도록 티를 내지 않았다.

강다인은 기분이 썩 내키지 않았다. 심하온이 강선우에게 한바탕 난리를 피울 거라 여겼는데 이렇게 침착하게 대응할 줄이야?

‘괜찮아. 네가 선우 오빠 짝퉁 와이프란 걸 알게 돼도 계속 침착할 수 있겠어?’

강선우 역시 마음이 찝찝했다. 그는 아예 심하온을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하온아, 정말 괜찮은 거 맞아?”

그는 심하온이 자신에게 화를 내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조금은 언짢아할 것으로 여겼다. 한때 약속했었으니까. 그녀의 허락 없이 함부로 다른 사람을 집에 데려오지 않겠다고.

“그럼요.”

심하온은 등을 돌린 채 무심한 표정으로 답했다.

“역시 우리 하온이 제일 착해.”

강선우가 뒤에서 껴안자 따뜻한 숨결이 심하온의 몸을 경직시켰지만 그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하온아, 다인이는 내 동생이자 네 동생이야. 게다가 나 요즘 강운의 심씨 가문과 협력을 앞두고 있는데 다인이가 마침 그 집안과 사이가 가까워...”

“뭐라고요?”

심하온이 그의 말을 끊었다.

“다인 씨랑 강운의 심씨 가문이요?”

“응. 다인이 외국에 있을 때 심씨 가문 사람들과 인연을 맺었고, 그 집안 어르신도 다인이 엄청 좋아하셔.”

심하온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강선우는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계속 설명했다.

“너도 알다시피 강운의 심씨 가문은 4대 명문가 중 하나잖아. 다인이가 있으면 이번 협력이 훨씬 편리해질 거야.”

“잘됐네요.”

심하온이 웃었다.

“그럼 대표님 소원 성취하시길 바랄게요.”

이 작품을 무료로 읽으실 수 있습니다
QR 코드를 스캔하여 앱을 다운로드하세요
댓글 (1)
goodnovel comment avatar
이호정
2025. 12. 12. AM. 02:24
댓글 더 보기

최신 챕터

  • 내 남편의 아내   제1114화

    조금 전 외과 의사가 황동 휘장에 관통된 피 구멍을 굵은 실로 열네 바늘이나 꿰맸다. 마취 기운은 이제 깨끗이 사라졌다. 숨을 쉴 때마다 오른쪽 몸 절반을 녹슨 연마기에 올려놓고 갈아 대는 것 같았다.왼쪽 다리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우스꽝스러울 만큼 두꺼운 흰 깁스를 한 채 차가운 강철 와이어에 매달려 허공 높이 들려 있었다.참으로 포스트모던한 꼴이었다.심하온은 속으로 눈을 굴렸다. 고열과 격통에 생각이 심각하게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예전 금융가에서 그 큰 공매도 꾼들과 파이를 나눠 먹을 때는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았는데, 오늘은 단숨에 1급 장애인 꼴이 됐네. 해외 신탁의 구경꾼들이 보면 심 대표가 물리적으로 조기 폐기됐다며 로마네콩티 두 병은 그 자리에서 따겠어. 안 되지. 이 치료비는 나중에 정윤재에게 무조건 두 배로 청구해야겠다.’“쯧, 심 대표. 그 부러진 다리만 계속 쳐다보지 마. 보고 있으면 그 자리에서 꽃이라도 피어날 것 같아?”옆 병상에서 몹시 느긋한 비웃음이 들렸다.정윤재는 흰 침대 시트 속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영구적으로 내려앉은 왼쪽 어깨의 낮은 곡선은 아무리 봐도 처참했다. 회색 면 티셔츠는 간호사가 가져가 물리적으로 세탁했고, 지금은 체크 무늬 환자복을 입고 있었다.그는 흰 붕대 끝을 이로 꽉 물고 오른손을 거칠게 뒤로 잡아당겨, 흑강 수갑 자국이 가득한 오른쪽 손목에 몹시 난폭하게 매듭을 묶었다. 손목의 살이 뒤집혀 핏방울이 배어 나오는데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정 대표, 그 재수 없는 입 좀 닫으시지? 본인은 정씨 가문으로부터 회초리에 맞아 몸이 두 동강 나기 직전이면서, 내가 꽃을 피우나 마나 신경 쓸 여유가 있나 봐?”심하온은 좋은 표정 하나 내주지 않았다. 입을 열자 막 내린 고열 탓에 목구멍에서 끈적한 피비린내가 올라왔다.“그거랑 같아? 나는 그래도 오른손에 힘은 들어가잖아.”정윤재는 입에 문 붕대를 놓고 도발하듯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지하 감옥에서 묻혀 온 죽음의 기운은

  • 내 남편의 아내   제1113화

    “허도영! 차 바닥의 방폭 차폐기를 부숴 열고 역으로 밀어내!”정윤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오른 주먹으로 옆의 반쯤 무너진 벽을 내리치자 돌조각이 우수수 떨어졌다. 강성 결사대의 반격에 잠시 흩어졌던 눈 속의 폭력성이 다시 미친 듯 응집됐다.“하온아, 상자 꼭 끌어안아!”심하온은 한 손으로 상자를 끌어안고 이 글을 보면 도망치라고 적힌 크라프트지를 입술 사이에 꽉 물었다. 고열이 남긴 어지럼증이 파도처럼 덮쳤다. 오른쪽 어깨의 절단 상처에서 피가 옷감을 따라 한 방울씩 새어 나오는 것마저 느껴졌다.미치도록 아팠다.그런데도 두 눈은 노트북의 깨진 화면에 나타난 레이더 주사선을 뚫어지라 바라봤다.초록색 선은 차단망의 강한 빛 아래 넓은 범위에서 일그러지고 끊어지기 시작했다. 대서양 세인트루시아 해역을 뜻하는 미크론 단위 붉은 점은 전자 폭풍 속에서 점점 희미하게 깜빡였다.[강성 해외 청산망 강제 차단 중...][시스템 프로토콜 물리 손상: 78%... 89%...]“못 막아요...”허도영이 바깥뜰에서 구르듯 뛰어 들어왔다. 손에 쥔 무전기는 고주파 펄스에 맞아 검은 연기를 내뿜었다.“대표님! 상대가 케이맨 제도의 물리 데드록을 쓰고 있습니다! 본토의 브리지 신호가 전부 끊겼습니다!”해외 차단망이 완전히 조여들며 고택 일대를 절대적인 정보 고립지대로 만들기 직전, 마지막 1초였다.완전히 타 버리고 외피마저 변형되기 시작한 강철 암호 상자의 깊숙한 내부에서, 갑자기 마지막으로 기괴하고 날카로운 초고주파 물리 파열음이 터졌다.찌이익!방공경보를 칼날로 직접 찢는 듯 날카로운 소리였다.그리고 이어서, 화면에 막 떠오른 대서양 심해 좌표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흔들렸다. 수만 킬로미터 떨어진 대서양 최심부에서 누군가 알 수 없는 끔찍한 방식으로 물리적 연결을 끊은 탓이었다.심하온과 정윤재가 지켜보는 가운데, 좌표는 레이더망 안에서 소리 없이 순식간에 완전한 암흑으로 변했다.붉은 점이 꺼졌다.본토의 신호 차단 때문이 아니었다. 대서양 쪽의 주제

  • 내 남편의 아내   제1112화

    심기찬은 숨도 제대로 이어 가지 못한 채 두 눈에는 공포가 가득했다.“네 엄마는 미친 사람이었어. 하씨 가문의 손을 빌려 판을 하나 짠 거야. 가장 핵심적인 원형주 생체 활성화 키는 15년 전에 이미 암초 펀드 최하층의 사략 루트를 통해 대서양 심해로 보내 버렸어! 지금 본토에 남은 이 약은 심해 고도에서 동적 전하로 활성화하지 않으면 3개월 안에 전부 괴사해 독물 한 관으로 변해!”그는 단숨에 말을 끝내더니 마지막 생명력까지 빠져나간 사람처럼 백옥 위패 옆에 완전히 쓰러졌다.‘생체 활성화 키’라는 말을 들은 정윤재가 길게 숨을 내쉬고는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딸깍’ 하고 눌렀다.초여름 햇빛 아래 불꽃은 섬뜩할 만큼 창백했다.“하, 재밌군. 강성의 해외 역외 시세판이 백 년 동안 피가죽을 씻어 냈는데, 막상 결판이 난 지금까지도 이 심해 판의 입장권조차 만져 보지 못했다니.”정윤재가 차갑게 웃으며 라이터를 바닥에 던졌다.딸깍.바로 그 순간, 전원이 완전히 끊기고 내부 황동 톱니바퀴까지 고압 전기불꽃에 절반이나 녹은 강철 암호 상자에서 맑은 금속 튀김 소리가 났다. 밑면에서 황동 인장을 끼우는 깊은 비밀 홈에 마지막 불규칙 전하가 튕겨 나온 탓이었다.심하온의 왼손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매미 날개처럼 얇고 가장자리가 수은 독성과 말라붙은 검은 피에 완전히 젖은 낡은 크라프트지 한 장이 상자의 물리적 틈새에서 소리 없이 역방향으로 밀려 나왔다.종이는 심하게 낡아 있었다. 그해 마지막 청산 때 남은 탄내까지 배어 있었다.심하온은 왼손 검지와 중지로 종잇조각을 집어 뒤집어 봤다. 동공이 바늘 끝만큼 작게 수축했다.종이에는 복잡한 공식이나 코드가 적혀 있지 않았다.임민정이 15년 전 고택 지하 전산실에서 왼손으로 거꾸로 써 내려간, 종이를 찢을 듯 힘이 들어간 한 구절의 피 묻은 문장뿐이었다.[사랑하는 하온아, 이 글을 보면 도망쳐라.]“도망치라고? 어디로?”바닥에 쓰러진 진중석의 몸이 기이하게 경련했다. 초점마저 풀려 가던 두 눈에서

  • 내 남편의 아내   제1111화

    미크론 단위의 푸른 코드가 초여름 햇살 아래 유령처럼 미친 듯 요동쳤다. 영혼을 떨게 할 만큼 차가운 기계적 감촉이 느껴졌다.시끄럽기 그지없던 심씨 가문 고택의 폐허가 그 순간 기이한 정적에 빠졌다.딸깍, 사락...외곽 인원들은 막 들어 올리던 청 벽돌 몇 장을 놓쳤다. 벽돌이 진흙 물에 세게 떨어지며 흙탕물이 높이 튀었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완전히 쓰러져 있던 강성 캐피탈의 잔여 결사대도 움직임이 일제히 허공에서 멎었다.진중석의 얼굴은 잿빛으로 변했다.마이크로파 블라인드 음의 투과력은 너무도 무시무시했다. 강성 해외펀드의 가장 핵심적인 방공 격리 주파수 대역을 직접 타고 있었다.앞으로 한 걸음 내딛던 정윤재도 멈췄다. 흑강 수갑을 막 풀어 붉은 눌림 자국이 가득한 오른손은 이미 심하온의 텅 빈 오른쪽 소맷자락 앞까지 뻗어 있었다. 손끝에는 조금 전 초과 주파수 대결에서 묻은 그을음이 남아 있었다.하지만 지금, 그의 오른손은 허공에서 완전히 굳었다.툭.입에 비스듬히 물고 있던 담배 끝의 재가 더는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떨리며 구두 등 위에 떨어졌다. 구두 표면에 검은 자국 하나가 남았다.정윤재의 눈에서 세상을 우습게 보던 능글맞은 기색이 1초도 되지 않아 깨끗이 사라졌다. 대신 극도로 위험하고 음울한 빛이 내려앉았다. 그는 심하온에게 더 손을 내밀지 않고 손을 뒤집어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그 안의 차가운 작은 금속 라이터를 신경질적으로 몇 번이고 반복해 만졌다.해외 생화학국 시세판에 깔린 모든 비밀 선이 그 순간, 타 버린 상자 하나로 인해 전면적으로 물리 활성화됐다.‘쯧, 하늘이 정말 살길을 안 주네.’심하온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생각은 또 한없이 엉뚱한 데로 달아났다.‘조용해진 지 3분도 안 됐는데 임민정 여사의 저승사자 부적은 참 끊이지도 않네. 다 끝나면 병원에 가서 접수하기로 했잖아? 정형외과에서 엑스레이 한 장 찍을 틈도 안 주다니. 모성애가 산처럼 머리 위로 떨어지는 수준이군.’“하... 하온아...”바람 빠진

  • 내 남편의 아내   제1110화

    너무도 익숙하고 얄미울 만큼 능글맞은 목소리가 아무 예고 없이 고택의 반쯤 무너진 영벽 뒤에서 들려왔다.심하온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그녀는 조금 쉰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아침 햇살은 이제 강운시 위의 먹구름을 완전히 갈라놓았다. 액체질소 얼음 조각이 잔뜩 붙은 심씨 가문 고택 골목 입구에, 차체 한쪽이 자동화기 탄흔으로 벌집이 되고 왼쪽 문조차 제대로 닫히지 않는 반파된 방탄차가 비스듬히 서 있었다.안쪽에서 누군가 힘으로 차 문을 밀어 열었다.정윤재는 흠집투성이 차 문에 비스듬히 기대 서 있었다. 특별 형사 심문실에서 담배 냄새가 밸 대로 밴 회색 면 티셔츠에는 채찍으로 맞아 말라붙은 피가 곳곳에 남아 있었다. 영구적으로 내려앉은 왼쪽 어깨는 기형적으로 낮은 곡선을 그렸다.그러나 흑강 수갑을 막 풀어낸 오른손은 느긋하게 바지 주머니에 들어가 있었다. 심하온의 엉망인 모습을 본 그는 도발하듯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특별형사 의자에 앉아서도 잃지 않았던 눈 속의 사나운 기운은 초여름 첫 햇살을 만나서야 아주 옅은 미소로 흩어졌다.“윤재 씨, 출소했으면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을 줄도 몰라? 서강 제약 본사 기자회견이 아직 덜 시끄러운가 보지?”심하온은 입으로는 가차 없이 쏘아붙였지만, 멀쩡한 왼손은 자신도 모르게 주머니 가장자리를 더듬었다.“옷은 무슨. 내가 특별형사 구역에 한 번 다녀오면서 정씨 가문의 백 년 봉인 기록까지 쏟아부었어. 하온아, 임민정에게 씌워졌던 15년 전 본토의 모든 죄명은 오늘 아침 여섯 시부로 특수관리국 시스템에서 전부 무죄 처리됐어.”정윤재가 폐허 속의 그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지하 감옥에서 묻혀 온 죽음의 기운이 햇빛에 한 겹씩 증발했다.“이제 너도 평생 처음으로 떳떳하게 햇볕 아래 서서 빛을 쬘 수 있어.”그녀 앞에 선 그가 흑강 수갑에 쓸린 자국으로 가득한 오른손을 뻗었다. 초여름 바람에 거칠게 펄럭이는 텅 빈 오른쪽 정장 소매를 한번 만져 보려는 듯했다.심하온은 피로

  • 내 남편의 아내   제1109화

    “하온아... 해외 판은... 되돌렸느냐?”심기찬의 입술에는 방금 인장을 깨물며 묻은 더러운 피가 남아 있었다. 발음이 뭉개진 채 그가 물었다.“되돌렸어요. 하씨 가문의 본토 브리지 자본은 현장에서 증발했고요. 아빠, 그 몇 개 안 남은 이빨이 헛되이 부서진 건 아니에요.”심하온은 왼손으로 바닥을 짚고 하반신을 잔해 속에서 조금씩 빼냈다.미치도록 아팠다. 그런데도 속으로는 또 엉뚱한 생각이 튀어나왔다.‘오른팔 망가진 건 그렇다 쳐도 오늘 왼쪽 다리까지 잘못되면, 강운시 바닥으로 돌아갔을 때 뒤에서 심 반신이라고 부르지 않겠어? 안 돼. 돌아가면 정윤재에게 정진 그룹 산하 최고의 정형외과 의사를 모조리 불러오라고 해야겠다.’부녀가 폐허 속에서 겨우 숨을 고르는 사이, 멀리 골목 입구에서 밤새 울어 대던 사이렌 소리가 마침내 날카롭고 빽빽한 울림을 남기며 완전히 멎었다.척, 척, 척!수십 켤레의 목 높은 군화가 축축하고 잔해로 뒤덮인 청석판을 동시에 밟는 소리였다.심하온이 고개를 들었다. 무너진 수화문과 담장 너머로 본토 최고 특수관리국의 특수 번호판을 단 검은 승용차 두 대가 절대적인 규칙의 특권을 앞세워 고택 바깥뜰을 완전히 봉쇄하고 있었다.차 문이 열리자 흰 장갑을 끼고 무표정한 특수관리국 요원들이 붉은 핵심 관인이 찍힌 실물 압수 명령서를 든 채, 아직도 푸른 연기가 피어오르는 폐허로 공무적으로 밀려들었다.진중석은 젊은 요원 두 명에게 무너진 황동 대불의 엉덩이 아래에서 억지로 끌려 나왔다.불과 30분 전 법당에서 ‘물리적 현장 정리’를 떠들던 강성 캐피탈 집행인은 이제 단정하게 넘겼던 머리가 피와 진흙에 뒤엉켜 닭장처럼 변해 있었다. 고급 맞춤 정장 바지는 액체질소에 얼었다가 잔해에 짓눌렸다. 두 종아리뼈는 이미 가루가 됐을 가능성이 컸다.그런데도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유일하게 움직이는 오른손은 구리 화로에서 타고 시커먼 가장자리만 남은 압류 명령서 조각을 신경질적으로 움켜쥐고 있었다.“안 졌어... 하씨 가문의 허가문

더보기
좋은 소설을 무료로 찾아 읽어보세요
GoodNovel 앱에서 수많은 인기 소설을 무료로 즐기세요! 마음에 드는 작품을 다운로드하고, 언제 어디서나 편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앱에서 작품을 무료로 읽어보세요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