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현우는 의자를 밀치고 일어나 지아의 앞으로 다가왔다.“너 지금 진이건 믿고 이러는 거지? 투자사 대표가 네 말 몇 마디 들어주니까 뭐라도 된 것 같아? 내가 네 남편이고 이 회사 대표라는 사실을 잊었어?”지아는 물러서지 않았다.“이건 대표님은 업무 자료를 확인하신 겁니다. 제 사생활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상관이 없어?”현우가 비웃으며 책상 위의 서류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네가 도원에 가서 나한테 불리한 소리 한마디만 해 봐. 그날로 회사에서 네 자리 없어지는 줄 알아. 네가 아무리 울면서 억울하다고 떠들어도 사람들은 남편 몰래 다른 남자 만나다 들킨 여자가 변명한다고 생각할 테니까.”그는 인계 확인서를 지아 쪽으로 밀어 놓았다.“서명하고 오늘 도원에 가서 네가 만든 자료나 설명해. 서라는 아직 숫자를 다 외우지 못했으니까 네가 마무리해 주면 되잖아.”지아는 서류를 내려다보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담당자에서는 제외하셨으면서 자료 설명은 제가 하라는 겁니까?”“그럼 네가 만든 자료를 설명하는 것까지 못 하겠다는 거야? 도원에서 질문하면 네가 답하고, 실적은 새 담당자인 서라 씨 이름으로 올리면 되는 거지. 그게 그렇게 억울해?”현우는 지아가 대꾸하지 않자 비아냥거리는 웃음을 흘렸다.“억울하면 울어 봐. 네가 우는 얼굴 보고 누가 편들어 주는지 나도 궁금하니까.”지아는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 만큼 주먹을 움켜쥐었다.현우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순간 그가 무슨 말을 할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예민하고 질투가 심해서 회사 일을 망쳤다고, 이제는 남편에게까지 피해자 행세를 한다고 떠들 것이 뻔했다.그녀는 손바닥에 박힌 손톱을 천천히 떼어 내며 입을 열었다.“원본과 수정 이력을 보존한 상태로 인계하겠습니다. 다만 확인서의 책임 조항은 수정해 주세요. 그전에는 서명하지 않겠습니다.”현우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끝까지 말대꾸를 하겠다는 거네.”그가 손바닥으로 책상을 거칠게 내리치자 지아의 어깨가 반사적으로 움찔했
백림유통 전략기획팀의 아침 회의가 시작되기 전, 한지아의 책상 위에는 낯선 서류 봉투 하나가 놓여 있었다.봉투 안에는 투자 프로젝트 담당자 변경 통보서와 업무 인계 확인서가 들어 있었다. 담당자란에는 민서라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마지막 장에는 지아가 모든 자료를 이상 없이 인계했으며, 이후 발생하는 오류에 대해서도 원작성자로서 책임을 진다는 문구가 명시되어 있었다.지아는 마지막 문장을 다시 읽었다. 자신에게서 업무 권한을 빼앗으면서도 그에 따른 책임만은 그대로 남겨 두겠다는 뜻이었다.“사모님, 벌써 출근하셨네요.”민서라가 따뜻한 차가 담긴 종이컵을 들고 다가왔다. 평소 임신 때문에 몸이 무겁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던 서라는 오늘따라 유난히 밝은 얼굴이었다.“대표님이 이번 투자 건을 저한테 맡겨 주셨어요. 솔직히 부담스럽긴 하지만, 사모님이 워낙 자료를 잘 만들어 놓으셔서 조금만 공부하면 될 것 같아요.”서라는 지아의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발견하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어머, 아직 서명 안 하셨어요? 대표님께서 오늘 오전까지 꼭 받아 오라고 하셨는데.”지아는 인계 확인서를 내려놓고 서라를 바라보았다.“이 문구는 수정해야겠어요. 제가 담당하지 않는 기간에 발생한 자료 수정이나 대외 제출 오류까지 책임질 수는 없으니까요.”서라는 난처한 듯 입술을 깨물더니 주변 직원들에게도 들릴 만큼 목소리를 높였다.“사모님, 저 때문에 화나신 건 알겠는데 업무 인계까지 거부하시면 어떡해요? 저는 대표님이 시키신 일을 하는 것뿐인데, 이렇게 나오시면 정말 곤란해요.”근처에 있던 직원 두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지아는 그들의 시선을 의식하면서도 서라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인계를 거부한 적 없어요. 책임 범위를 명확하게 하자는 거예요. 자료 원본과 수정 이력은 그대로 넘길 테니 확인서 문구부터 고쳐 오세요.”서라의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제가 아직 업무를 잘 몰라서 그런 거예요. 사모님처럼 능력이 좋으면 좋겠지만, 저는 이제 막 배우는 중이잖아요.
“오늘 물류센터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회사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제가 투자사 현장 점검 중 부적절한 행동을 했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어요.”이건의 얼굴이 굳었다.“그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대표님도 알고 계셨어요?”“네.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있습니다.”수화기 너머에서 지아가 짧게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그런데 대표님…….”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이건은 등을 곧게 세웠다.“무슨 일입니까?”“백 대표님이 저를 이번 투자 프로젝트에서 제외하겠다고 하셨어요.”이건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그 이유가 무엇입니까?”“회사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이유래요. 제가 김 차장님과 부적절한 관계라는 소문이 돌고 있으니 투자사 앞에 나설 자격이 없다고…….”지아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이건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그는 자신이 지금 얼마나 화가 나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목소리는 오히려 차분해졌다.“한 과장님, 우선 제가 확인한 사실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김 차장님이 한 과장님의 팔을 잡은 것은 지게차가 지나가는 상황에서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도원 측에서도 현장 기록을 확인했습니다.”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그걸…… 확인하셨어요?”“네. 현장에 저도 있었습니다.”이건은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바라보았다.“그리고 그 사실과 별개로, 회사에서 어떤 인사 조치를 하든 정당한 절차가 필요합니다. 한 과장님이 맡은 업무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것도 투자 검토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사안입니다.”지아가 잠시 침묵했다.“대표님, 사실 제가 연락드린 건 그 때문이에요.”“말씀하세요.”“백 대표님이 제가 작성한 자료를 전부 민서라 씨에게 넘기라고 하셨어요. 오늘 안으로요.”이건의 손이 멈췄다.“원본 파일까지 말입니까?”“네. 투자사에 제출할 자료와 앞으로 수정할 파일까지 모두 넘기라고 했습니다.”이건은 의자 등받이에서 몸을 일으켰다.“한 과장님, 그 지시를 받은 내용이 문서로 남아 있습니까?”“네.
도원 본사로 돌아온 이건은 곧바로 현장 점검에 참석했던 직원들을 회의실로 불렀다.비서는 물류센터 동선 기록과 촬영 시각을 정리한 자료를 화면에 띄웠다.“대표님, 사진이 촬영된 시각은 오전 열한 시 십팔 분입니다. 당시 지게차가 안전 통로를 지나갔고, 김도윤 차장이 한지아 과장님을 안전선 안쪽으로 이동시킨 상황이었습니다.”이건은 화면을 확인했다.현장 점검 기록과 출입 동선이 일치했다.“사진을 촬영한 사람은 확인됐습니까?”“아직입니다. 백림유통 측에서 내부 조사 중이라고 합니다.”“게시글을 처음 올린 계정은요?”“익명 게시판이라 외부에서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다만 백림유통 측에 원본 게시 기록을 보존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이건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도원에서 확인한 사실관계를 문서로 정리하세요. 추측이나 개인적인 평가는 제외하고, 현장 상황과 안전 조치만 기록하십시오.”“네.”“그리고 이 자료는 백림유통의 공식 요청이 오면 제공하세요. 한 과장님이나 김 차장님에게 불리한 인사 조치가 검토된다면, 그 근거가 무엇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회의실 문이 열리고 다른 직원이 들어왔다.“대표님, 백림유통에서 추가 자료가 도착했습니다.”이건은 직원이 건넨 태블릿을 받아 들었다.익명 게시판에 올라온 사진과 댓글을 시간순으로 정리한 자료였다. 처음에는 지아와 도윤이 함께 걸어가는 사진이 올라왔고, 잠시 뒤 안전 통로에서 도윤이 지아의 팔을 잡는 장면이 추가되어 있었다.이건은 사진을 확대했다.촬영 각도가 묘했다.안전 통로의 경고등과 지게차가 지나가는 방향은 화면에서 잘려 있었고, 두 사람의 상반신만 강조되어 있었다.누군가 의도적으로 상황을 왜곡하려 했다는 의심이 들었다.그는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게시글이 올라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달린 댓글들이 있었다.'대표님 사모님이라면서 저렇게 행동해도 되는 건가요?''민서라 씨는 밤늦게까지 일하는데 한 과장님은 회사에서 연애하시나 보네요.'이건의 시선이 두
도윤도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두 사람은 나란히 주차장 옆 카페 방향으로 걸어갔다.이건은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그때 비서가 차량 문을 열었다.“대표님, 출발하실까요?”“잠시만요.”이건은 휴대전화를 꺼냈다.백림유통 현장 점검 결과를 정리한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그는 화면을 확인한 뒤 비서에게 전달했다.“김 차장님과 한 과장님이 작성한 자료는 그대로 투자심의위원회에 올리세요. 오늘 현장에서 확인한 내용도 빠짐없이 반영하고요.”“알겠습니다.”이건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였다.그런데도 카페 쪽으로 걸어가는 두 사람에게서 좀처럼 시선을 거둘 수 없었다.차량에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비서의 휴대전화가 울렸다.비서는 통화를 받더니 표정을 굳혔다.“네. 말씀하십시오.”잠시 상대방의 설명을 듣던 비서가 이건을 돌아보았다.“대표님, 백림유통에서 연락이 왔습니다.”“무슨 일입니까?”“오늘 현장 점검 중 촬영된 사진이 사내 익명 게시판에 올라왔다고 합니다. 한지아 과장님과 김도윤 차장이 함께 있는 사진인데, 두 분의 관계를 의심하는 내용이 붙어 있다고 합니다.”이건의 표정이 굳었다.“무슨 관계를 의심한다는 겁니까?”“두 사람이 업무 외적으로도 가깝다는 내용입니다. 사진이 몇 장 올라왔는데, 일부는 두 분이 나란히 걸어가는 모습이고…….”비서가 말을 멈췄다.이건은 그를 바라보았다.“계속하세요.”“김 차장이 한 과장님의 팔을 잡아 주는 장면도 있습니다. 물류센터 안전 통로에서 촬영된 것으로 보입니다.”이건의 손이 천천히 주먹으로 쥐어졌다.그 장면은 자신도 보았다. 지게차가 지나가는 순간 도윤이 지아를 안전한 곳으로 이끌었을 뿐이었다.그런데 누군가 그 사진을 이용해 두 사람의 관계를 의심하게 만들고 있었다.“게시글을 확인할 수 있습니까?”“백림유통 직원 계정으로만 접근할 수 있어 원문 확인을 요청한 상태입니다. 다만 내부 직원이 캡처한 화면은 전달받았습니다.”비서가 태블릿을 내밀었다.이
점심시간이 가까워지자 물류센터 관리자가 일행을 구내식당으로 안내했다.이건은 원래 점심을 거르고 본사로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도원 실무진이 현장 담당자들과 추가로 확인할 사항이 있어 간단히 식사를 하기로 했다.식당 안은 작업복을 입은 직원들로 붐볐다. 식판이 부딪히는 소리와 사람들의 대화가 뒤섞였고, 창가 쪽 긴 테이블에는 백림유통 직원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이건이 식판을 들고 들어섰을 때 도윤이 지아를 불렀다.“지아야, 여기 앉아. 아까 네가 찾던 자료 메일로 보내 놨어.”도윤은 옆자리에 놓인 서류를 치웠다.지아가 식판을 들고 다가갔다.“벌써 보내셨어요? 점심 먹고 확인하려고 했는데.”“오후에 또 찾을 것 같아서. 그리고 오늘 끝나면 커피 한잔하자. 지난번에 도와준 것도 아직 못 갚았잖아.”“그건 제가 도와드린 것도 아니에요. 차장님이 더 고생하셨죠.”“그럼 서로 고생했으니까 같이 마시면 되겠네.”도윤이 웃으며 의자를 당겼다.이건은 그 모습을 보았다.한 걸음만 더 다가가면 지아를 자신의 옆자리로 부를 수 있었다. 오후 점검 전에 확인할 자료가 있다고 말하면 그녀는 별다른 의심 없이 따라올 것이다.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이건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지아는 식판을 내려놓고 도윤의 옆자리에 앉았다.이건은 아무 말 없이 비서와 함께 맞은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식사를 시작한 뒤에도 두 사람의 대화가 간간이 들려왔다.도윤은 지아에게 재무팀 자료를 설명했고, 지아는 계약 갱신 일정에 관해 의견을 보탰다. 때로는 업무와 관계없는 가벼운 농담도 오갔다.이건은 식판에 놓인 음식을 천천히 먹었다.맞은편에 앉은 비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대표님, 음식이 입에 안 맞으십니까?”“아닙니다.”“평소보다 식사를 적게 하셔서요.”이건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그때 지아의 웃음소리가 들렸다.이건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도윤이 무슨 말을 했는지 지아는 손등으로 입가를 가리며 웃고 있었다.이건은 그 얼굴을 바라보다 물잔을 집어 들었다.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