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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Author: 백은영
온소운은 조용히 책상 위의 매화빛 눈썹 분을 들었다. 손끝으로 분을 떠 얼굴 한쪽에 찍듯이 바르자 운비는 깜짝 놀라며 다급히 그녀의 팔을 잡았다.

“아가씨,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온소운은 거울 속의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두 개의 검은 점이 선명히 떠있었다. 그녀는 만족스러운 듯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그 시각, 온소운이 초야를 치른다는 소식을 들은 홍 유모는 그저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아가씨께서 단약을 드셨다면 초야는 아가씨 것이 될 텐데요.”

온하연은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 조양궁에 들어간다면 언니는 돌아오지 못할 거야.”

그녀의 눈빛에는 섬뜩한 기운이 감돌았다.

“언니는 오늘 밤 피투성이가 되도록 매질을 당할 거거든.”

홍 유모는 그 음침한 웃음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봉황문양이 새겨진 궁차에 실린 온소운은 조양궁의 편전으로 옮겨졌다. 그녀가 그곳에 도착하자 유모들이 따라붙어 목욕을 시키고 옷을 갈아입혔다. 그들의 손길은 한없이 부드러웠으나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수상쩍었다. 그중 한 사람이 말을 꺼내기 위해 입을 열려 했으나 곁에 있던 다른 이에게 눈짓으로 제압 당했다.

잠시 후, 온소운이 방 문을 넘으려는 순간 누군가가 그녀의 머리채를 거칠게 잡아챘다.

“아…!”

강한 통증에 시야가 흐려졌고 중심을 잃은 몸은 휘청이더니 돌바닥 위로 쓰러졌다. 그녀는 그대로 누군가의 손에 머리채가 붙잡힌 채 질질 끌려갔다. 고개를 든 그녀의 시야에 화려한 옥장식과 보석으로 치장된 여인이 들어왔다. 눈매는 가늘고 길었으며 붉게 물든 입술 위엔 잔인한 냉기가 어렸다.

서 귀비.

그녀는 진나라 공부의 적녀이자 왕의 첫사랑이었다. 온소운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 그녀가 예상한 대로 오늘 서 귀비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서 귀비는 항상 궁에 들어온 여인들 중 가장 아름다운 이를 첫 초야로 지정했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굽혀 온소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정말이지... 남자들이 빠질 만한 얼굴이긴 하네.”

맑고 흰 피부, 투명한 눈동자, 그 안에 숨겨진 은근한 유혹은 사람을 홀릴 만큼 강렬했다.

“전하는 참 복도 많으셔... 허나 네 팔자는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다.”

말을 마친 그녀는 이내 손짓으로 무언가를 지시했다. 그러자 검은 옷을 입은 내시 하나가 다가와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서 귀비는 그 손에서 까맣게 빛나는 환약 하나를 집어 들더니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이걸 먹으면 온몸에 병이 들어 곧 내쳐질 것이다. 대신 목숨만은 살려주지.”

그녀는 천천히 온소운의 턱을 거칠게 잡아당기며 환약을 밀어 넣으려 했다. 그녀는 온몸이 싸늘해졌다.

전생의 하연이 조양궁에서 살아 돌아오지 못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구나.

온소운은 필사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예상치 못한 그녀의 반항에 서 귀비는 손에서 환약을 떨어뜨렸고 그 환약은 바닥에서 튕겨 연못 속으로 떨어졌다.

“이 망할 것이!”

서 귀비가 악에 받쳐 소리쳤다.

“어서 건져 오거라!”

“그리고 이 계집을 끌고 가거라. 내 친히 교육 좀 시켜야겠다.”

“예!”

그녀의 명이 떨어지자 곧바로 궁녀들이 들이닥쳤고 온소운을 강제로 욕탕 옆으로 끌고 갔다. 그들은 거친 손으로 의복을 벗겨냈고 온소운은 일부러 어깨를 떨며 오열했다.

“안 돼요… 제발… 그만두세요…”

서 귀비는 빙그레 웃으며 유리채찍을 들었다.

“규율을 먼저 배워야지.”

그 순간, 온소운의 얼굴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젖으며 한쪽 뺨에 새겨진 점이 드러났다. 서 귀비는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그 검은 점은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게 할 정도로 크고 진했다. 그 덕분에 그토록 빼어난 미모도 크게 퇴색되어 보였다.

“이게 뭐지? 어째서 이런 걸 궁에 보낸 걸까?”

서 귀비의 질투는 조금 누그러졌고 그녀는 환약을 다시 찾을 마음마저 사라졌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그녀에게 손을 대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녀는 곧바로 채찍을 휘두르며 온소운의 피부를 찢어버렸다.

“아…!”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온소운은 치열하게 이를 악 물었다. 곧 있으면 왕이 이곳으로 올 테니 그전까지 어떻게든 버텨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문밖에서 내관의 급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주상전하 납시오!”

서 귀비는 채찍을 거두었고 온소운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몸을 비틀며 간신히 빠져나오더니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감사합니다. 귀비마마.”

그 말을 마치마자 전하가 방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온소운은 다급한 걸음으로 달려나가 그의 품에 뛰어들었다. 곁에 있던 내관이 말리려 했으나 그녀가 궁인 복장을 하고 있었기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눈물에 젖은 얼굴로 왕을 올려다보며 속삭였다.

“제발… 살려주세요…”

그 순간, 그녀의 발이 미끄러지며 전하와 함께 물속으로 빠져버렸다. 그녀는 물속에서 그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다시 한번 속삭였다.

“죽이지만 말아 주세요…”

따뜻한 물속에서 그녀는 살결을 밀착시키며 그의 품에 안겼다. 왕은 무언가 말하려다 말고 이내 그녀를 품에 안아 올렸다. 온탕 밖, 궁녀들과 내관들의 뒤늦게 달려들어 수습하기 시작했다. 서 귀비는 그 모습을 보고 손에서 피가 날 듯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전하…”

전하는 차마 서 귀비를 노골적으로 책망하지는 못했으나 방금 입궁한 여인의 몸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아무리 너그러워도 쉬이 지나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만 돌아가거라.”

“내일 따로 찾아가겠다.”

“전하…”

서 귀비가 입을 열기도 전에 전하는 차갑게 그녀의 말을 끊어냈다.

“태의를 불러라.”

그의 말이 끝나자 내관 하나가 허둥지둥 문밖으로 달려 나갔다. 전하는 조심스럽게 온소운을 침상 위에 내려놓았다. 전하의 표정은 그리 온화하지 않았고 그녀를 향한 눈길 또한 딱히 다정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온소운은 그 눈빛을 정확히 읽어냈다. 지금 이 분노는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갓 입궁한 여인이, 그것도 전하와 초야를 치러야 할 여인 하나가 이런 참혹한 일을 당했다는 사실이 불쾌했을 뿐이다.

온소운은 전생의 온하연이 살아남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게 되었다. 서 귀비는 아마 왕이 도착하기 전에 이 모든 일을 끝냈을 것이다.

잠시 후 태의가 도착했다. 그는 정중히 인사한 뒤 온소운의 맥을 짚어보고 그녀의 상처를 살폈다. 다행히 깊은 외상은 없었고 폐도 손상되지 않았다.

전하는 조용히 손을 들어 물러가라는 뜻을 보냈다. 그러자 태의는 고개를 숙인 뒤 조용히 물러났다.

침상 위, 온소운은 얌전히 몸을 웅크린 채 이불 끝을 쥐고 있었다. 하늘하늘한 속의가 어깨를 가볍게 덮고 있었지만 하얀 목덜미와 손목의 상처는 여전히 선명했다. 그제야 왕의 시선이 다시 그녀에게로 향했다.

방금 물에 빠졌던 터라 화장이 모두 지워진 얼굴은 단정하고 예뻤다. 새벽녘 복사꽃처럼 은은한 혈색이 뺨을 물들였고 입술은 붉은 석류처럼 생기가 돌았다. 토끼처럼 여려 보이는 얼굴에는 사람을 홀릴 정도로 맑고 깊은 눈동자가 박혀있었다. 유순한 듯싶다가도 어딘가 마음을 휘감아 끌어당기는 기이한 울림이 있었다. 순수함과 요염함이 하나의 얼굴에 겹쳐 있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얼굴을 마음에 새겼다. 진한 화장 뒤에 이렇게 아름다운 얼굴이 숨어 있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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