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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Author: 백은영
온소운은 지금 다시 떠올려보면 그때의 선택이 얼마나 우스웠는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게 뭐가 어때서? 여성의 진정한 무기는 바로 미모가 아니었던가?

온 대감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이윽고 둘째 딸을 바라보았다.

“소운아, 너는 무엇을 원하느냐?”

지금 그는 온소운의 의견을 존중하려는 듯 질문을 던지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언제나 온하연 쪽에 더 기울어져 있었다. 하연이는 그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맹씨 마님의 딸이었기에 온태안은 항상 그녀를 더 편애했다.

온소운은 눈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저는 단약을 택하겠습니다.”

그 순간, 온 대감과 맹씨 마님의 얼굴에는 흐뭇한 빛이 떠올랐다. 이해심 많고 철든 둘째 딸이라는 인상을 더 깊이 새겨주는 선택이었다.

온소운의 대답에 하연이의 입가에는 얄미운 웃음이 번졌다. 화려한 미모 따위는 아무 쓸모도 없었다. 이번 생에는 자신이 왕의 아이를 낳고 이 나라의 주인이 되어 온소운을 짓밟을 것이다.

각자 선택한 약을 먹고 자리를 뜨려던 찰나, 뒤에서 온하연의 친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단약을 드셨으니 분명 더 아름다워지실 거예요. 어쩌면 첫날밤, 제일 먼저 조양궁에 불려가게 될지도 모르죠. 그러니 그 기회를 잘 잡으셔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하연이의 눈빛에는 조롱과 탐욕이 얼비쳤다. 소운은 그 말을 듣고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고요히 웃으며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그래, 반드시 잘 잡을게.”

그날 밤, 온하연은 맹씨 마님의 손에 이끌려 방으로 돌아갔다.

“정신이 있는 것이냐? 원래는 네가 단약을 받아 미모로 승부를 보자고 하지 않았느냐? 그 외모에 내가 전수한 수단까지 사용한다면 왕을 사로잡는 것은 일도 아닐 텐데 어찌하여 너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영약을 고른 것이냐? 이 어미가 이미 알아본 것이 있다. 전하는 자식이 없는 게 아니라 남자구실을 못한다더구나. 잠자리를 같이 하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아이를 낳겠다는 것이냐?”

온하연은 순간 전생의 끔찍한 기억이 번져올라 몸을 움츠렸다. 그녀의 결말은 지독했고 그 기억만으로도 치가 떨렸다. 그러니 이번 생에는 다시 그 길을 걷지 않으리라. 영약은 그녀의 인생을 바꿔 줄지도 모르는 약이었다.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는 그녀의 눈동자에 야망이 떠올랐다.

“어머니, 걱정 마세요. 전하께서는 분명 자식을 가질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입궁하면 반드시 그 기회를 잡아낼 거예요. 자식을 낳고 또 낳아 다른 여인들을 밟고 올라설 겁니다.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 어머니께서 정 1품 작호를 받을 수 있게 해드릴게요.”

그 영광은 원래부터 자신의 것이었다. 이번 생에 냉궁에 갇혀 미쳐가야 할 사람은 바로 온소운이 될 것이다.

며칠간 온 가는 입궁 준비로 들썩거렸다. 하녀며 유모며 모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온소운과 온하연 역시 매일 단장을 반복했다. 온소운은 단약을 복용한 지 하루 만에 그 효과를 온몸으로 체감했다. 피부는 눈처럼 고와지고 살결은 투명한 옥처럼 빛났으며 눈동자에는 맑은 물기가 맺혔다. 그녀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은 그녀에게 쏠렸고 모두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만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바라본 온하연은 이를 갈았다. 전생에 그녀는 단약을 복용했기에 예뻐졌지만 그녀의 외모는 언니만큼 좋지 못했다. 지금의 소운은 예쁜 수준을 넘은 압독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온하연의 질투는 오래가지 않았다. 이 여자가 아무리 아름다워 봤자 결국 승리를 거머쥘 사람은 바로 자신이 될 테니까.

입궁 일이 정해지고 성지와 함께 두 자매의 칙서가 내려왔다. 온 가의 사람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성지를 받았다. 두 사람은 각각 운 상재와 연 답응이라는 작호를 받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은 전생과 하나도 어긋나지 않았다.

궁에서 파견한 교습 유모들이 도착해 입궁 예법을 가르쳤다. 온소운은 조용히 집중하며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대비로 살아온 시간이 길었던 그녀는 오히려 지금의 신인 예법을 익히는데 더욱 진지했다. 높은 곳에 오래 머물렀던 터라 기초적인 예법은 잊은지 오래였다. 그녀는 지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있었다.

입궁 당일.

여명이 채 밝기도 전에 두 사람은 각자의 가마에 몸을 실었다. 온 대감과 맹씨 부인은 문 앞에서 딸들을 배웅했다. 온하연은 환한 얼굴로 웃으며 약속했다.

“전하께 가장 사랑받는 여인이 되겠습니다.”

그 말에 온소운은 아무 대꾸 없이 조용히 웃었다. 자신이 살아 있는 한 이 궁궐은 절대 온하연의 세상이 되지 못할 것이다.

온소운은 가마 안에서 천천히 발을 들어 밖을 내다보았다. 붉은 담장과 황금빛 지붕이 뿌연 안개 너머로 어슴푸레 시야에 들어왔다. 그곳은 그녀의 과거이자 다시 싸워야 할 미래였다.

가마가 궁문 앞에 다다랐을 때, 몸종인 운양과 운비가 조심스레 그녀들을 부축했다. 내시는 그들을 정문이 아닌 동측에 있는 자그마한 측문으로 인도했다. 반평생을 궁의 정문으로 드나들던 온소운은 이 작고도 숨 막히는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이 어쩐지 어색하고 낯설게 느껴졌다.

반면 그녀의 곁에 서 있던 온하연은 궁궐의 높고 넓은 대문을 올려다보며 욕망 섞인 미소를 머금었다.

‘언젠가 내 아들이 왕위를 잇는다면 나는 당당히 정문으로 걸어들어 갈 수 있겠지.”

온소운은 별말 없이 측문을 넘어 정해진 거처로 들어섰다. 그녀가 배정받은 곳은 장악궁으로 용비가 거처하는 궁이었다. 그중에서도 동쪽 궁실인 목단원이 그녀의 침소였다. 세월이 지난 지금도 장악궁은 그녀의 기억 속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전생에 대비가 된 후 왕은 효심을 다해 장악궁의 동서 별궁과 대청을 연결해 하나의 대전으로 합치고 불상을 청해 모셨다. 그날 이후 장악궁은 아무도 쉽게 지나치지 못하는 신성한 공간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 다시 돌아온 목단원은 낯설 정도로 고요하고 단출했다.

운양은 조용히 주변을 살폈고 어린 운비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채 감탄을 터뜨렸다.

“세상에… 이렇게 화려할 수가!”

온소운은 조용히 웃었다. 장악궁의 본래 주인은 용비였다. 그녀는 원래부터 세간의 일에 나서지 않는 인물이었기에 온소운은 그곳에서 큰 간섭 없이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입궁 첫날에는 궁중 의례에 따라 초야를 앞두고 초상화를 그려 왕에게 올려야 했다. 온소운은 의도적으로 진한 화장을 하여 본래의 얼굴을 감추었다. 그날 밤, 화장을 지우고 거울 앞에 앉자 운비는 감탄을 하며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지금이 훨씬 더 아름다우세요. 화장을 했을 때보다 더 곱습니다. 왜 굳이 그리 진한 화장을 하신 겁니까?”

온소운은 빗을 내려놓더니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초상화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어야 기억에 오래 남지 않겠느냐?”

입궁한 이들은 모두 비슷한 처지였다. 누가 먼저 왕의 눈에 각인되느냐에 따라 그 후의 운명이 갈리는 법이다.

그리고 마침내 초야의 밤이 다가왔다. 예상대로 왕의 선택을 받은 사람은 온소운이었다. 첫날부터 왕의 선택을 받았다는 사실은 곧 후궁 전체의 시기와 질시를 받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녀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왕은 오로지 외모만 보고 온소운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 초상화를 고른 이는 왕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 그림 너머에서 손을 뻗은 자, 그녀 역시 너무도 잘 아는 오래된 인연이었다. 오늘 밤 온소운은 다시 그와 마주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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