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9화

Author: 백은영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온하연은 결국 이를 악물며 고개를 숙였다.

“빈첩, 지금 곧 가겠습니다.”

한 걸음 내딛기 전 그녀는 곁에 앉은 온소운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억울함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곁에서 그 광경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현비가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운 귀인과 연 답응은 자매지요? 한 분은 절세가인이고 또 다른 한 분은 청순하니 전하께서 어느 쪽을 더 아끼실지 고민이 많을 것 같습니다.”

온소운은 고요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현비는 전생에서도 화를 부르는데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역시나 그녀가 던진 말에 서 귀비의 얼굴이 단번에 싸늘해졌고 순빈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러다 자매가 함께 후궁을 어지럽히는 일이 생기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요. 혹 후궁 전체를 노리고 계신 겁니까?”

온소운의 얼굴빛이 한순간에 싸늘해졌다.

“순빈마마,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자매가 함께 입궁하는 것이 후궁을 어지럽히는 일이라면 앞으로는 법을 개정해야겠군요. 한 가문에 한 여인만 입궁 시키는 게 어떻습니까? 그래야만 반역의 누명을 피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때 소 답응이 순빈을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순빈마마와 현비마마도 같은 집안인 걸로 압니다. 설마 제씨 집안에서 그런 뜻을 품으셨다는 말씀이십니까?”

“너…!”

순빈은 그 자리에서 치를 떨었지만 소 답응은 오히려 천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때마침 태화전에서 전갈이 도착했고 중전은 단호하게 말을 가로막았다.

“그만들 하거라. 같은 후궁끼리 어찌 그리 상처 주는 말만 골라 하는 것이냐? 전하께서는 오늘 정무가 바쁘셔서 오시지 못한다고 하신다. 본궁도 피곤하니 모두 물러가거라.”

중전이 퇴장하자 비빈들은 차례로 일어서며 궁궐 밖으로 나섰다. 서 귀비의 자태는 눈부셨지만 기세도 만만치 않았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입을 열었다.

“운 귀인, 순빈에게 맞서다니 예를 잊으신 것이냐? 규율을 다시 익히는 게 좋을 듯 하니 여훈과 여칙을 서른 번 써서 내일 아침 연희궁으로 보내거라.”

온소운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빈첩, 명 받들겠습니다.”

서 귀비가 사라지자 소 답응이 재빨리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

“언니…”

온소운은 그녀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아까 제 편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소 답응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당연히 해야 할 말이었어요.”

온소운이 목단원에 돌아오자 운비는 속이 상한 듯 울분을 터뜨렸다.

“왜 귀비마마는 우리 귀인마마만 괴롭히는 겁니까?”

운양은 주위를 둘러보며 빠르게 그녀를 제지했다.

“입 조심해, 운비.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 법이야. 그런 말 함부로 했다간 목이 날아갈 수도 있다고.”

운비는 얼른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온소운은 조용히 웃으며 붓을 들었다.

“됐어, 불평은 그만들하고. 운양아, 먹 좀 갈아주거라.”

서 귀비가 그녀를 가만히 둘 리 없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이야말로 강규빈을 낚아챌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밤이 깊어갈 무렵, 어서재는 아직도 등불이 꺼지지 않았다. 강규빈은 하루 종일 쌓인 정무를 보느라 피곤에 지쳐 있었다. 그때 노 내관이 두 개의 찻상이 담긴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전하, 중전마마와 귀비마마께서 보내신 대추차와 생강차입니다.”

강규빈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계속해서 눈앞의 주서를 검토했다. 잠시 후, 그는 붓을 내려놓더니 노 내관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어느 것이 서 귀비가 보내신 것이냐?”

“이 생강차입니다만… 이미 식었습니다. 연희궁에 아직 따뜻한 차가 있으니 제가 가서...”

강규빈은 노 내관의 말을 자르며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필요 없다. 조양궁으로 오라 하거라.”

“예, 전하!”

그 시각, 서 귀비는 이미 조양궁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하께서 노여움을 푸셨나 봐요. 다시 마마를 찾으시는 걸 보니.”

곁에 있던 하녀 백월이 웃으며 말했다. 그때, 문이 열리더니 강규빈의 기품 어린 그림자가 천천히 실내로 걸어 들어왔다.

“신첩, 전하께 문안드립니다.”

서 귀비는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 무릎을 꿇었다. 강규빈은 그녀 앞으로 걸음을 옮기며 손을 내밀었다.

“밤이 깊어 바람이 차다. 굳이 밖에서 기다릴 필요가 없었을 텐데.”

그의 손에 이끌려 내전으로 들어서며 서 귀비는 수줍은 듯 미소를 지었다.

“전하께서 오신다면 아무리 추운 밤이라도 신첩은 기꺼이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하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을 스쳐 어느새 저 멀리에 있는 욕탕 쪽으로 옮겨졌다. 희미한 수증기 속, 어젯밤 그의 품에 미끄러지듯 떨어지던 여인의 따스한 체온과 향이 아직도 지워지지 않았다. 물속에서 팔을 뻗어 안겨오던 그 하얗고 유연한 손길이 불현듯 뇌리를 스치자 규빈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 순간, 서 귀비는 뒤에서부터 은근히 그를 감싸안으며 탐스러운 손끝으로 그의 가슴 위를 느릿하게 훑더니 씻기 위하여 욕탕으로 향했다.

“운 귀인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전하의 질문에 곁에 따르던 노 내관이 다소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귀비마마께서 운 귀인을 벌하셨다 들었습니다. 경솔하게 윗사람께 맞섰다 하더군요.”

“감히 윗사람께 맞서?”

강규빈은 눈썹을 살짝 치켜세우며 물었다.

“그렇게 겁 많고 유순한 애가?”

그러자 노 내관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듣자 하니 순빈께서 온씨 자매를 두고 후궁을 어지럽힐 요녀라며 모함했다 합니다. 그래서 귀인마마께서는 이에 반박하셨다 하더군요.”

촛불 너머로 전하의 눈빛은 한층 서늘해졌다. 그는 낮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재미있군.”

그 말에 노 내관은 더는 입을 열 수 없었다.

서 귀비가 욕탕에서 다시 나왔을 때는 이미 전하가 자취를 감춘 뒤였다. 내관은 차가운 말투로 그녀에게 규빈의 말을 전했다.

“전하께서는 귀비마마더러 다시 연희궁으로 돌아가시라 명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서 귀비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하얘졌다.

“전하는? 방금까지만 해도...”

그녀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내관이 고개를 숙이며 말을 끊었다.

“마마, 전하의 행차는 함부로 묻는 것이 아닙니다. 삼가시지요.”

그 시각, 목단원의 밤은 유난히 고요했다. 용비가 좀처럼 외부인을 받지 않는 까닭에 장악궁은 매일 밤마다 정적에 잠기곤 했다.

달빛이 아름답게 피어나는 걸 본 온소운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운양아, 목욕 준비를 해줘.”

운양이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그녀는 다시 고개를 돌려 운양을 바라보았다.

“굳이 방 안에서 씻을 거 없다. 우리 목단원 뒤에도 온천이 있다지? 거기로 가자꾸나.”

그녀는 천천히 웃으며 덧붙였다.

“술도 갖다 주렴. 좋은 향이 감도는 걸로.”

그 무렵, 강규빈은 어둠을 가르며 목단원에 도착했다. 때마침 하늘에서는 조용히 첫눈이 흩날리고 있었고 노 내관은 조심스레 우산을 받쳐 주었다.

전하가 문 앞에 당도한 것을 발견한 운양과 궁인들은 허겁지겁 달려 나와 절을 올렸다. 강규빈은 우뚝 서서 날카로운 눈빛으로 안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너희 마마는 어디에 있느냐?”

운양은 조심스레 엎드려 대답했다.

“귀인마마께서는 지금 온천에 계십니다. 곧 모시고 오겠습니다.”

그러자 강규빈은 냉정히 내려다보며 한 마디를 던졌다.

“아니다. 짐이 직접 가겠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노 내관은 속으로 생각했다.

‘오늘 밤은 목단원에 머무시겠군.’

온천가에 이르자 거기에는 붉은 치마를 살짝 걸친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반쯤 드러난 어깨로 찬란한 등불 아래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은빛 수증기 사이로 살결이 희게 반짝였고 그녀는 머릿결을 손끝에 살며시 감은 채 미소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장난기 어린 여우와 눈부신 요괴처럼 유혹의 끝자락에 선 것 같았다.

강규빈은 어느새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입가에는 미세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 순간, 그녀는 몸을 돌렸고 강규빈과 눈이 마주치자 놀란 듯 짧은 비명을 질렀다.

“아…!”

어깨에 걸쳐 있던 붉은 비단이 허공으로 흩어지며 눈부신 살결이 고스란히 그의 눈앞에 드러났다. 그녀의 몸은 반쯤 물에 잠겨 있었지만 그 모습이 오히려 더 치명적이었다. 강규빈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으려 했지만 그녀를 품에 안기도 전, 온소운이 미끄러지 듯 수면 아래로 떨어졌다.

강규빈은 주저하지 않고 바로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순간 물속에서 한 쌍의 가느다란 손이 그를 감싸안았다. 그의 옷깃을 당기며 반짝이는 물방울 사이에서 여인의 얼굴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내 목표는 전하를 유혹해 후궁의 주인이 되는 것   제100화

    강규빈은 깊은 눈으로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왜, 조양궁으로 가기 싫다 하느냐?”온소운은 침착하게 고개를 숙이고 진심만을 담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또렷하게 말했다.“신첩은 이미 전하의 은혜를 넘치도록 받았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넘보지 않겠습니다. 여인들이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조양궁으로의 이주는 조정의 법도를 어지럽힐 수도 있습니다. 지금 이 시기에 신첩이 그 영광을 탐한다면 전하의 명성이 더럽혀질 수도 있지요. 전하께서는 천하를 호령하시며 사해가 그 위엄을 따릅니다. 신첩은 누구보다도 전하께서 그 위엄을 흐리는 자로 보이기를 원치 않습니다. 신첩은 전하께서 오롯이 찬연한 군주로 남기를 바랍니다.”강규빈은 천천히 미간을 풀더니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번졌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겼다.그러고는 마치 참을 수 없다는 듯 그녀의 투명하고 하얀 뺨을 슬쩍 집어보았다. 갓 껍질을 벗긴 백옥같이 부드러운 그 살결에 장난스러운 손길이 잠시 머물렀다.“조양궁에 들게 했다고 짐의 위엄이 더럽혀지느냐?”온소운은 부끄러움에 입술을 깨물며 속삭였다.“신첩은 정사를 알지 못하니 과장해서 말했을 수도 있지만 이 모든 말은 진심입니다. 신첩은 감히 요망한 여인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강규빈은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 그녀를 품에 안았다.“우리 귀인은 어쩌면 이리도 귀엽게 말을 하는 것이냐? 누가 감히 그런 소리를 한 것이지? 짐이 그 입을 찢어줄 것이다.”온소운은 그의 목에 팔을 감으며 반짝이는 눈으로 물었다.“그럼 전하께서는 신첩이 요녀가 아니라 생각하십니까?”언제나 절제되었던 강규빈은 그 순간만큼은 그녀의 장난을 받아주고 싶어졌다.“당연하지.”그러자 온소운은은 입술을 삐죽이며 애교 섞인 투로 말했다.“그렇다면 전하께서는 신첩이 아름답지 않다고 여기시는 것입니까?”“무슨 소리냐?”“책에서는 요녀들은 모두 눈부시게 아름답다 하였습니다.”강규빈은 웃음을 터뜨리며 대꾸했다.“우리 소운이도 그에 못지않은 절세가인이란 말이지.”

  • 내 목표는 전하를 유혹해 후궁의 주인이 되는 것   제99화

    강규빈의 품에 살포시 기대어 앉은 온소운은 눈을 가늘게 뜨고 미소 지으며 속삭였다.“전하께서는 참 다정하십니다. 이렇게까지 저를 아껴주시니. 이 감동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강규빈은 그녀의 뽀얀 옆얼굴을 내려다보며 낮게 웃었다.“너는 짐의 귀한 후궁이다. 짐이 너를 아끼지 않는다면 누구를 아끼겠느냐?”그 말에 온소운은 고개를 들어 조용히 웃으며 천천히 말했다.“그렇다면… 신첩도 평생 전하만을 위해 살겠습니다.”그녀의 말투는 꿀처럼 달콤했고 그 순한 음색은 강규빈의 심장에 잔잔히 번져갔다.그의 시선이 문득 책상 위를 스쳤다. 아직 마르지 않은 먹 향기가 그 위를 감돌고 있었고 한 장의 펼쳐진 화선지가 눈에 띄었다.“방금은 무엇을 그리고 있었느냐?”마치 마음속을 들킨 소녀처럼 온소운은 깜짝 놀라며 부끄러움에 볼을 붉혔다. 그녀는 강규빈의 품에서 살짝 몸을 빼내더니 손을 뻗어 그 그림을 등 뒤로 감추며 수줍게 고개를 저었다.“아무것도 아닙니다.”강규빈은 얄밉게 웃으며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감춰져 있던 화선지가 무방비하게 드러났다. 그는 긴 팔을 뻗어 그 그림을 집어 들었다. 온소운은 당황하여 그림을 뺏으려 했지만 그의 키는 그녀가 따라잡을 수 있는 높이가 아니었다.발끝까지 들어 올려도 닿지 않는 손에 속수무책이 된 그녀는 결국 고개를 떨구며 투정하듯 말했다.“전하, 너무하십니다. 늘 신첩을 놀리시기만 하시니.”강규빈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억누르며 그림에 시선을 돌렸다. 그 화선지 위에는 오늘 오전 자신이 높은 단상에서 온소운에게로 급히 걸어가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왜 이 장면을 그린 것이냐?”온소운은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이윽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진심만이 담겨 있었다.“그 순간은 제 꿈에서만 존재하던 일이었거든요. 전하께서 저를 향해 다가오시던 그 모습이 너무나도 선명해서 잊을 수 없었습니다.”그녀의 말은 담담했으나 그 진심은 강규빈의 굳어 있던 결

  • 내 목표는 전하를 유혹해 후궁의 주인이 되는 것   제98화

    오늘 하루, 후궁에서 일어난 파문만으로도 그의 신경은 이미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 더구나 자신이 명한 조양궁 거처 하사의 일은 어찌 된 일인지 곧장 조정 원로들 귀에 들어가 아첨도 아닌 충언이랍시고 한 사람에게만의 총애는 삼가시라는 말부터 군심을 다잡기 위해서는 서 귀비에게 더 큰 은전을 베풀라는 말까지 줄을 이었다.하루 종일 이어진 정무는 그에게 깊은 피로를 안겼고 그 모든 말들이 전부 타당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문득 서 귀비에 대한 피로와 권태를 자각했다. 아무리 사랑하고 총애하라 해도 이상하게 마음이 가지 않았다.“전하 오늘은 거처를 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조양궁으로 가실 건가요 아니면 중화궁에 홀로 거처하실 건가요?”곁을 따르던 노 내관이 그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조양궁은 후궁과 함께 잠자리를 할 때 찾아가던 곳이고 중화궁은 전하 혼자 묵을 때 찾는 궁이었다.잠시 망설이던 그는 물었다.“완 귀인은 조양궁으로 옮겼는가?”“아직은 아닙니다. 몸이 허약하여 아직 이사하지 않았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그 말에 강규빈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다른 여인들이었다면 아마 아침이 밝자마자 거창하게 이삿짐을 꾸려 떠났을 텐데 어째서 그녀는 이토록 조용한 것일까?“짐이 직접 가보겠다.”“전하, 숙 귀인마마께서 오늘 하루에도 여러 번 기절하셨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혹 가시는 길에 그리로 먼저…”“짐은 의원이 아니다.”단호한 그의 대답에 노 내관은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그렇다면 바로 목단원으로 가시겠습니까?”“허약한 몸이라 하지 않았느냐? 굳이 놀라게 할 필요는 없다. 조용히 다녀올 것이다.”해가 완전히 지기 전, 온소운은 한동안 복잡한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썼다. 이번 생의 중전은 어쩐지 전생의 기억과 달라 그녀의 마음을 조금씩 흔들어놓고 있었기 때문이다.문이 소리 없이 열리더니 강규빈이 모습을 드러냈다. 곧이어 뒤따라온 내관들 또한 그의 손짓에 조용히 물러났다. 조용한 발소리가 다가오자 온소운은 눈꺼풀을 아주 조금만 들었다. 그러고는

  • 내 목표는 전하를 유혹해 후궁의 주인이 되는 것   제97화

    운비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마마, 이건 전하께서 내리신 은총인데 왜 마다하시는 건가요? 혹시 다른 빈궁들이 시기할까 염려되십니까?”온소운은 침상에 느긋이 기대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강규빈이라는 사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한 치의 틈도 허락지 않는 원칙주의자이며 무엇보다 ‘규범’이라는 두 글자를 중히 여기는 군주였다. 조양궁은 역대 임금의 전용 거처였고 그곳에 빈궁이 머문 전례는 단 한 번도 없었다.하물며 자신은 지금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었다. 그런 때에 대놓고 조양궁에 입주한다면 그 비난의 화살은 곧장 자신에게 꽂힐 것이었다. 전조의 신료들은 물론, 후궁들, 그리고 궁궐 밖의 세상까지 온갖 혀끝의 독이 그녀를 향해 쏟아질 터였다.그리고 그 모든 소문이 결국은 강규빈의 귀에도 닿을 것이다. 하룻밤의 감정이든 한순간의 연민이든 정무의 무게 앞에서 언제든 휘발되는 것이었다.‘사내란 그 순간은 진심이라 해도 언제든 바뀌는 법이니까.’온소운은 조용히 눈을 감으며 입을 열었다.“받아도 되는 은총이 있고 받지 말아야 할 은총이 있는 법이다. 기뻐하는 척만 해도 충분해. 그저 전하께서 기분 좋게 느끼시면 그걸로 된 거야. 하지만 선을 넘는 은총은 감당하기 힘들다.”운비는 영문을 몰라 눈만 깜박였고 운양이 피식 웃으며 그녀의 동그란 뱃살을 톡 건드렸다.“됐어, 마마 말씀이 옳은 거지. 우리야 그냥 시키는 대로 하면 돼.”운비도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씨익 웃었다.“그러고 보면 마마께서는 늘 한발 앞서서 생각하시잖아요.”운양은 온소운의 이불을 여며주며 조심스레 물었다.“그럼 조양궁에 안 가기로 한 이상 전하께는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까요?”온소운은 눈을 절반쯤 감은 채 나른한 음성으로 대답했다.“아까 그 내시가 뭐라 했지? 전하께서 정무가 바빠 오늘은 별도로 면상에서 사은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 않았었나? 그러니 밤에 뵙고 인사드리는 걸로 하자꾸나.”운양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섰다. 그때 명 영감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 내 목표는 전하를 유혹해 후궁의 주인이 되는 것   제96화

    홍 유모의 말이 끝나자 온하연은 흐느끼던 소리를 뚝 멈췄다.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그녀의 눈에는 다시 음울한 계산이 번뜩였다.“그래 맞아. 내가 먼저 움직여야 해. 온씨 가문에서 그 계집의 이름을 지우게 만들면 끝이다. 외가라고 해봤자 기댈 곳도 없는 몰락한 집안인데 그걸로 뭘 어쩌겠다는 건지.”그녀는 이를 악물었다.“온씨가문의 영광, 그 더러운 여자가 단 한 치도 건드리지 못하게 할 것이다.”온하연은 숨을 삼키며 머릿속을 휘저었다. 전생의 기억이 그녀의 심장을 또다시 사정없이 쥐어짰다.‘그래… 곧 진소 장군이 조정으로 돌아올 거야.’사치와 체면에 누구보다 집착했던 그 남자. 만약 부친이 먼저 조정 대신들의 지지를 얻어 개선장군으로 금의환향할 때 충분한 환대를 준비해 준다면 그는 반드시 부친을 중용할 것이다.한편, 온소운은 전하의 품에 안긴 채 목단원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정신을 잃은 사이 예소형이 그녀를 세심히 진찰해 보고는 금세 진상을 눈치챘다.“전하, 완 귀인께서는 놀라서 잠시 기절한 것뿐입니다. 지금은 큰 문제 없으니 잠시 혼자 쉬게 하는 게 낫겠습니다.”전하의 눈빛에는 묘한 그늘이 깃들었다. 오늘 하루, 그는 너무도 많은 것들을 보았고 지나쳤으며 또 참아야 했다. 하지만 고작 온소운의 붉어진 눈동자 하나가 그 마음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땀 맺힌 이마를 쓸어내렸다.그는 목단원을 떠나며 하인들에게 간단히 명을 내렸다.“목단원 벽면은 오래되어 위험하니 손보도록 하거라. 완 귀인은 일단 조양궁 편전에 거처하게 해야겠다.”그 말에 노 내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전하, 조양궁은 자고로 임금의 침소입니다. 후궁이 거처하시는 것은 규례에...”그러자 전하는 눈꼬리를 가늘게 치켜 올랐다.“지금, 내 명을 거스르겠다는 것이냐?”얼음장 같은 그 목소리에 노 내관은 땅에 엎드렸다.“제가 경솔했습니다. 지금 즉시 준비토록 하겠습니다.”하지만 전하의 마음은 여전히 편치 않았다. 마차에 앉아 태화전으로 향하는

  • 내 목표는 전하를 유혹해 후궁의 주인이 되는 것   제95화

    온소운이 소란의 중심에서 끌려 나오길 기다리며 온하연은 무겁게 드리운 상운궁 근처를 떠나지 않고 서성이고 있었다. 그녀는 궁중의 미천한 지위로 이 일에 직접 관여할 명분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발길을 돌릴 수 없었다.“마마, 이번 일은 너무 성급하셨습니다. 괜히 귀비마마를 따라나섰다가 마마만 손해를 보게 되었군요.”홍 유모가 초조하게 타일렀다.“게다가 전하께서도 그 완 귀인을 각별히 아끼시잖습니까. 이런 식으로 해봤자 오히려 역풍만 맞을 수 있습니다.”하지만 온하연은 냉소를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 눈빛은 마치 모든 걸 꿰뚫은 자의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아니, 네가 몰라서 그런다. 전하가 진심으로 마음에 둔 여인은 언제나 귀비마마 한 명뿐이다. 그 외에는 다 잠깐의 흥미일 뿐이지. 온소운도 마찬가지고.”“하지만 완 귀인은 단약을 복용한 몸이잖아요. 지금 궁중에서 그녀의 미색과 견줄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전하도 결국은 사내인데 그런 요염한 여인을 가까이 두면서 어찌 마음이 가지 않겠습니까?”온하연은 비웃으며 턱을 들었다.“그래서 네가 보는 눈이 짧다는 것이다. 곧 알게 되겠지. 미색 같은 건 이 궁에서 가장 무의미한 재산이란걸.”그녀는 과거의 상처를 떠올렸다. 그토록 아름다웠던 자신이 얻은 것은 무엇이었나? 전하는 그녀를 한 번도 눈여겨본 적 없었고 귀비는 그녀를 마음껏 유린했다. 그것이야말로, 전하가 단순히 미색에 흔들릴 인물이 아니라는 증거였다.온소운은 다시 되살아나지 못했기에 그 인생을 자신이 가져왔을 뿐이다. 최근 전하의 총애를 얻었다 해도 어차피 실속 없는 것. “미모 따위는 쓸모없어.”그렇게 생각하며 흐뭇하게 웃던 찰나, 홍 유모의 다급한 외침이 그녀의 몽환을 찢었다.“마마. 완 귀인께서 나오셨습니다. 그런데… 기절한 것 같아요.”온하연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혹시 고문이라도 당해서 정신을 잃은 건가? 내가 뭐랬어? 전하가 그 여인을 아끼긴 뭘...”그 뒷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녀의 얼굴은 서서히 핏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