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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Author: 백은영
순빈은 원래부터 서 귀비와 가까운 사이였다. 말하자면 그녀는 서 귀비의 손에 쥐여진 예리한 칼날 같은 존재이자 그녀의 눈치를 보고 살아가는 충직한 도구였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들 중에는 전생에 그녀와 피를 말리며 다투었던 익숙한 얼굴들도 섞여 있었다. 모두가 기억 저편에 박혀 있는 과거의 그림자들 같았다. 바로 그때 한껏 뽐내는 목소리가 궁문을 가르며 울려 퍼졌다.

“그만하거라. 운 귀인은 본래 겁이 많다 들었다. 자칫 놀라기라도 한다면 전하께서 괜히 본궁이 운 귀인을 괴롭혔다 나무라지 않겠느냐?”

그 목소리에 모두가 긴장하며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귀비마마를 뵙습니다.”

서 귀비는 붉은 모란이 수놓인 금사 치마에 백여우 모피를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그녀가 걸어올 때마다 향기로운 옥연향이 퍼졌고 그 짙고 중후한 향은 권세 있는 여인만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었다. 운 귀인 앞에 선 그녀는 여유로운 몸짓으로 주위의 비빈들을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순빈 말도 틀린 건 아니지. 본궁도 입궁한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첫날밤을 보낸 다음 날 바로 책봉된 사람은 귀인이 처음이다. 부디 그 복을 소중히 여기길.”

그 말에 담긴 뜻은 너무도 분명했다. 서 귀비가 질투하는 건 단순한 품계가 아니었다. 그 여인이 집착하는 것은 전하의 진심, 단지 그 하나뿐이었다. 그녀는 전하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며 누구보다 그의 곁을 오래 지킨 사람이었다.

온소운을 귀인으로 책봉한 것은 어제 발생한 일에 대한 입막음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 충격은 서 귀비가 수년간 규빈 곁에서 쌓아온 정을 무너뜨릴 만한 일이었다. 어젯밤 전하가 품은 여인이 자신이 아니라 운 귀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녀는 하룻밤 내내 이불에 파묻혀 울었다.

서 귀비의 시선이 천천히 운 귀인의 얼굴을 훑었다. 원래는 얼굴에 검은 흉터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눈앞의 얼굴은 눈부실 만큼 고왔고 투명한 눈동자는 보는 이의 숨을 멎게 할 만큼 맑았다.

“꽃들도 다 시샘할 정도로 예쁘구나.”

그 말에 운 귀인은 천천히 고개를 들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과찬이십니다, 마마. 마마께서는 궁중의 청란과도 같으니 저 같은 꽃은 감히 고개를 들 수 없지요.”

서 귀비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한껏 쏘아붙이려던 말은 이미 그녀의 혀끝에서 녹아버렸다.

“말 하나는 참 잘하는구나.”

그때였다. 또 다른 인물이 등장하며 상황을 다시 한번 흔들어 놓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 늦었네요.”

순백색의 소박한 옷차림을 한 온하연이 조심스럽게 등장했다. 모두가 화려한 색채로 채워진 자리에서 그녀만이 유독 눈에 띄는 흰색 옷차림을 하고 온 것이다. 남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선언하고 싶어 안달 난 것이 눈에 보였다. 그러자 사람들의 이목이 그녀를 향해 서늘하게 쏟아졌다.

하지만 온하연은 정작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높이 치켜들고 당당히 걸어왔다. 전생의 온소운 역시 중전을 알현하는 날 수수한 차림으로 등장했다가 전하의 눈에 들었었다. 온하연은 아마 그것을 본받은 듯했다. 남들보다 청아하고 수수해야 한다는 생각 하나로 해당화를 수놓은 백색 치마를 골랐다.

그 모습에 혜 상재가 비웃으며 위 귀인에게 중얼거렸다.

“저 애도 보통은 아니군요.”

위 귀인은 말없이 손수건만 매만졌다. 운 귀인은 그런 온하연을 바라보며 속으로 비웃었다. 하얀 옷 하나에 거는 저 헛된 기대가 참으로 어리석어 보였다. 그 속내가 뻔히 보이는 허영과 허세가 안쓰러울 정도였다.

그러던 중, 지금까지 말이 없던 현비가 슬며시 입을 열었다.

“이리 청초하고 기품 있는 여성이라니… 전하께서는 참 복도 많으십니다. 매년 새로 드시는 분마다 하나같이 눈부시기만 하니까요.”

현비의 말에 서 귀비의 눈빛이 단숨에 어두워졌다. 본디 그녀는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도 쉽게 동요하는 성정을 지녔다. 그러자 곁에 있던 하녀가 조용히 그녀에게 속삭였다.

“마마, 저분이 바로 연 답응입니다.”

온하연은 긴장 반 설렘 반으로 조심스레 앞으로 다가왔다.

“답응 온하연, 귀비마마께 문안드리옵니다.”

그러나 서 귀비의 눈빛은 서리처럼 차가웠다. 그녀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온하연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서 귀비는 전하 곁에 수많은 여인이 머무는 것은 용납할 수 있어도 독점하거나 그의 마음을 차지하려 드는 자만은 결코 용서치 않았다. 그리고 온하연은 지금 당당하게 그런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중이었다. 감히 그녀의 영역을 침범하려 한다는 것을 정작 온하연 본인만 모르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저 아이가 나타남으로 하여 서 귀비의 시선은 온전히 자신에게서 벗어났으니 말이다.

이때, 봉의궁의 춘의 나인이 문을 열고 나왔다.

“마마님들, 중전마마께서 이미 기상하셨습니다. 부디 정전으로 들어가 배례해 주시기 바랍니다.”

서 귀비는 날카로운 시선을 거두며 치맛자락을 정돈한 채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녀의 뒤를 따르는 비빈들의 행렬은 일사불란했다.

정전의 높은 곳에는 이미 단정히 앉아 있는 중전이 있었다. 전생의 그녀는 인자하고 단아한 여인이었다. 한때 그녀는 온소운을 감싸주었던 유일한 존재였기에 그녀는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지금까지 가슴에 새기고 있었다. 서 귀비는 몸을 대충 기울이며 인사하더니 스스로 자리를 찾아 중전의 왼편에 털썩 앉아 버렸다.

중전은 그녀를 곁눈질로 한 번 스윽 쳐다볼 뿐 시종일관 냉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서 귀비는 전하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있는 반면 자신은 가문의 의중에 따라 억지로 입궁해 중전의 자리에 올랐던 것이다. 애당초 그녀와 비교할 수조차 없었고 서 귀비의 떨떠름한 태도에도 중전은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온소운은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속 깊이 연민을 느꼈다. 그것도 잠시 다른 이들을 따라 무릎을 꿇으며 이마를 바닥에 붙여야 했다.

“빈첩, 중전마마를 뵙습니다.”

중전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다들 일어나거라.”

궁에 먼저 들어온 이들은 자리에 앉고 이제 막 입궁한 다섯 명의 신인은 차례로 무릎 꿇고 큰 예를 올렸다.

“오늘 이렇게 생기 가득한 얼굴들을 보니 본궁도 참 기쁘구나. 부디 모두가 마음을 합하여 전하를 정성껏 섬기고 왕실에 자손을 퍼뜨리는 복된 인연이 되기를 바란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때 중전의 시선이 온소운에게 머물렀다. 그녀의 얼굴을 본 순간, 중전은 마음속으로 경탄했다. 이래서 전하가 조양궁에서 서 귀비를 밀어내면서까지 그녀를 받아들였던 것인가? 바로 그때, 서 귀비가 무심한 듯 입을 열었다.

“연 답응.”

“들어보니 답응의 글씨가 제법이라던데... 본궁이 경문을 베껴야 하니 그대가 대신 써보는 건 어떻소?”

온하연은 잠시 얼어붙었으나 감히 거절할 순 없었다.

“예. 알겠습니다.”

그때, 순빈이 짐짓 거들며 말했다.

“그럼 멍하니 있을 게 아니라 어서 귀비마마의 처소로 가서 경문을 써야지요.”

온하연은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지금 가버리면 전하를 뵐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자신이 준비한 모든 게 무의미해질 터였다.

“허나, 빈첩은 아직…”

그때, 혜 상재가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

“왜 그러십니까? 혹시 귀비마마의 명을 거절하겠다는 건가요?”

“아니, 그게 아니라…”

온하연은 서 귀비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그녀는 옆에 앉은 온소운을 향해 애처롭게 속삭였다.

“언니, 오늘은 제가 처음으로 전하에게 인사를 드릴 수 있는 날입니다. 조금만 도와줄 수 없겠습니까?”

하지만 온소운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런 부탁을 들어줄 이유도, 그렇다고 해서 그런 짐을 대신 짊어질 뜻도 없었다. 이 권력의 소용돌이 속에서 경솔한 연민을 품었다가는 처참한 결말만 맞이하게 될 것이다.

바로 그때, 중전이 입을 열려던 찰나 서 귀비가 먼저 나섰다.

“보아하니, 연 답응은 제법 자신감이 있는 모양이군. 감히 본궁을 무시할 생각까지 하다니.”

그 말에 정전 안의 공기가 잠시 싸늘하게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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