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너 엄마하고 왜 싸웠어? 아빠 말로는 엄마가 밤새 우셨다던데. 집에 안 간 지도 일주일이나 됐다며? 이제 가서 좀 달래 드리지 그래?""달래라고? 그럼 나는 누가 달래 주는데? 엄마가 내 여자친구한테 모진 말을 그렇게 했는데 그걸 다 참아야 해?"전화기 너머 서현석은 잠시 말이 없었다."그래도 엄마잖아. 원영 씨는 네가 좀 달래 보면 안 되겠어?""달래? 어떻게 달래? 형은 전에 집에 데려왔던 형수 될 사람 달래서 다시 데려왔어?"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서현석도 이번에는 문정은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심한 말을 했을 거라고 짐작했다."그때는 나도 사정이 있었어."서현석의 여자친구는 서씨 집안과 집안 형편이 맞지 않았고 차이가 컸다.그때 문정은이 모진 말을 해도 서현석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다 자신을 위한 말이라고만 여겼다.나중에 서씨 집안 둘째 딸 서현주가 데려온 상대도 문정은이 온갖 트집을 잡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헤어지고 말았다.서현석과 서현주는 문정은이 이런 일에만 유독 까다로운 줄 알았다.문정은은 그 뒤로도 서현주에게 자신은 겪어 볼 만큼 겪어 본 사람이라 상대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한눈에 알아본다고 했다.5~6년을 만난 사람과 헤어진 서현주는 한참이나 괴로워했다.하지만 다 문정은이 좋은 뜻에서 한 거라고 여겼다.다만 그 뒤로는 마음의 문을 닫고 더는 누굴 만나려 하지 않았다.이제는 서은석까지 똑같은 문제를 겪게 될 줄은 몰랐다.서현석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내 전 여자친구는 벌써 엄마가 돼서 지금 아주 행복하게 살아. 원영 씨 일은 나도 들었어. 이번에는 엄마가 좀 지나치셨지만 그래도 다 너 잘되라고 그러신 거야."서은석이 차분하게 말했다."아무리 나를 위해서라도 다른 사람을 모욕해도 되는 건 아니잖아. 원영이는 내가 죽기 살기로 쫓아다녀서 겨우 만나게 된 사람이야.""형, 엄마가 잘못했다는 걸 인정하지 않으면 나도 집에 안 들어가."서현석이 간곡하게 타일렀다."지금까지 엄마가 자기 잘못
박희수는 이런 일에 말을 얹고 싶지 않았다.이제 손녀에 손자까지 다 생겼으니 더 바랄 게 없었다.그러다 허설아가 연우의 장난감을 쥔 채 멍하니 있는 걸 보니 몇 마디 해 두어야 할 것 같았다.나중에 자신이 없으면 권씨 집안의 사교 활동은 허설아가 맡아야 했다.박희수는 연우를 품에 안고 차근차근 설명했다."아버님과 서씨 집안 할머니가 친남매 사이라 윗세대끼리 가깝게 지냈어.""나와 지헌이 아버지 대에 와서는 왕래가 많지 않았어. 은석이와 지헌이 사이가 친하지 않았으면 아버님 돌아가신 뒤로는 아마 끊겼을 거야."박희수는 참을성 있게 두 집안의 관계를 하나하나 짚어 주었다."정은이는 성격이 별나. 친정이 예전엔 자본가 집안이었는데 풍비박산이 나고 나서 은석이 아버지한테 시집갔거든. 그때 은석이 아버지는 재혼이었고 정은이는 어렸는데 자존심도 세고 콧대도 높았지.""그래도 달리 선택지가 없었고 시집간 뒤로 오랜 세월이 흘렀지. 나중에 문씨 집안 어르신이 쥐고 있던 세력은 전부 은석이한테 넘어갔어."허설아가 물었다."그게 은석 씨 형제들 결혼을 막는 것과 무슨 관계예요?""누가 알아? 그 집 맏아들이 벌써 서른둘인데 아직도 혼자잖아. 정은이가 아무 상관 없다고 하면 누가 믿겠어?"박희수는 은근히 못마땅한 표정이었다."자식들이 집에 데려오는 상대마다 욕을 안 한 적이 없어. 전에는 우리 서진이를 시집보내 달라더라. 기가 막히는 소리 아니니?"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권서진과 서씨 집안 자식들은 피가 섞인 친척이었다.그런 말을 아무 생각 없이 꺼내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 게 문정은이었다."전에 나한테 원영이는 어떤 사람이냐고 묻길래 사람이 달라졌나 했지."그런데 문정은은 이야기를 다 듣더니 박희수에게 권지헌이 왜 송원영을 마다했느냐며 비아냥거렸다.박희수는 그 말투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그래도 아무 말 하지 않고 겉으로는 예의를 지키며 좋게 넘겼다.박희수가 허설아를 달랬다."너도 마음에 담아두지 마. 어차피 앞으로는 어울릴
더는 이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던 송원영은 화제를 돌렸다."아들은 잘 어때요?""잘 지내요. 요즘 잘 먹고 잘 자고 얌전해서 보채지도 않아요."정확히 말하자면 영리하게 사람을 골라 가며 보챘다.권지헌과 권정우만 괴롭히고 다른 사람한테는 얌전했다.연희가 손을 잡을 때마다 연우는 누나를 보며 까르르 웃었다.박희수는 누나를 좋아해서 그런 거라고 했다.정말 누나를 좋아하는 게 분명했다.연우가 태어난 뒤로 권씨 집안에는 웃음이 훨씬 늘었다.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식구들이 집에 오자마자 요람 앞에 모여들었다.선물도 산더미처럼 쌓였다.허설아는 방에 쌓인 선물을 떠올리기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결국 권지헌에게 시간 날 때 직접 정리하라고 했다.마침 연우 얘기를 하던 그때, 박희수가 영상통화를 걸어 와 자다 깬 아이가 엄마를 찾아 사방을 헤맨다고 했다.허설아가 짐짓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허연우, 할머니 말씀 잘 들어야지. 보채면 안 돼."연우는 입을 삐죽이며 눈물이 그렁그렁해졌지만 끝내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화면 너머로 그 모습을 보는 허설아는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이 녀석은 보통내기가 아니었다.태어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어른의 기분을 알아채고 혼내는 줄 알고 서러운 척 우는 시늉까지 할 줄 알았다.박희수는 역시나 속아 넘어가 연우를 품에 안고 달랬다."그래, 그래. 우리 연우는 계속 착하게 있었는데 엄마가 오해했구나, 그렇지? 엄마 퇴근하면 금방 올 거야. 울지 마, 뚝!"허설아는 기가 막혀 웃음이 났다.연우는 울지도 않았으면서 달래 주자 또 웃음을 터뜨렸다.녀석은 손쉽게 온 집안 식구를 쥐락펴락하며 울다 웃다 하게 만들었다.허설아는 연우가 우유는 잘 먹었는지 묻고 통화를 끊었다.박희수는 아이를 데리고 재우러 갔다.곁에서 연우를 본 송원영은 귀여워서 못 견디겠다는 듯 큰소리를 쳤다."진짜 귀엽네요. 크면 분명 엄청 잘생길 거예요. 이모가 딱 18년만 기다릴게!"허설아가 웃으며 말했다."18년 뒤면 이모 아이도
송원영은 별일 아니라는 듯 담담하게 말했다.얼굴에도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허설아는 그 말을 놓치지 않고 고개를 들어 예쁜 눈으로 송원영을 바라보더니 놀라며 물었다."은석 씨 어머니가요?"기억 속 문정은은 성격이 좋아 보였는데?허설아와 권지헌의 결혼식에도 와서 박희수의 손을 잡고 십여 분이나 허설아를 칭찬했다.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문정은이 며느리를 들이는 줄 알았을 것이다.나중에 박희수가 겉으로만 부드럽지 속은 강하고 성깔도 만만치 않다고 얘기해 주기는 했다.하지만 허설아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성깔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게다가 문정은은 집안 배경도 좋았다.예전에는 지주 집안이었고, 외조부는 그 지역을 주름잡다가 손을 씻은 뒤에도 큰 세력을 쥐고 있었는데, 그 세력 대부분을 지금은 서은석이 잡고 있었다.문정은은 평생 고생이라고는 모르고 산 사람이었다.허설아는 문 앞을 살피다 들어오는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뒤에야 송원영을 끌어당기며 속삭였다."어떻게 된 일이에요?""은석 씨 어머니 얘기요? 나를 찾아와서 듣기 거북한 모진 말을 잔뜩 했어요. 내가 지금 하는 일도 남자한테 잘 보여서 얻은 거라고 하더라고요."허설아는 어이가 없어 입을 다물지 못했다.너무 심한 말이었다.송원영이 핏기 없는 얼굴로 웃었다."그 말에는 별로 화나지 않았어요. 우리 엄마는 그보다 훨씬 더한 말도 했으니까요.""그런데 은석 씨는 나와 자기 어머니가 말다툼하는 걸 보더니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어머니가 악의 없이 한 말이라면서 화내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송원영은 입꼬리를 끌어 올렸지만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그래서 내가 나한테 무례하게 군 거라면 어떡할 거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별일도 아닌 걸로 내가 유난을 떤대요."얘기를 듣던 허설아는 잠시 멍해져서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그래서 헤어졌어요?""헤어졌죠. 은석 씨 어머니가 나를 찾아온 것도 헤어지게 하려던 거잖아요. 그럼 헤어지면 되죠. 은석 씨가 마마보이일 줄은 정말 몰랐어요!"허설아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서은석은 그동안 자신이 너무 많은 걸 놓치고 살았다는 걸 깨달았다."내가 왜 사과해요? 내 아내도 아니잖아요. 아버지 아내는 아버지가 달래세요.""너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평소에 오냐오냐했더니 아주 버릇을 망쳐 놨구나! 또 네 엄마한테 뭐라고 했길래 저렇게 화가 난 거야?""별일 아니에요, 끊을게요. 집에는 안 갈 거예요."서은석은 말을 마치자 바로 전화를 끊었다.아버지가 몇 번이나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서은석은 받지 않았다.마음먹고 대꾸하지 않기로 했다.서은석은 차 안에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요즘은 담배를 끊고 지냈지만 지금은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해 숨쉬기조차 힘들었다.담배 한 개비를 다 피우고서야 차를 몰아 집으로 향했다.-며칠 뒤, 허설아가 하이힐을 신고 àl'aube에 들어섰다.직원들은 허설아를 보고 깜짝 놀라면서도 반가워했다.민지강까지 물었다."허 대표님, 푹 쉬셨어요? 좀 더 쉬시지 그러세요?""몸조리도 끝났는데 당연히 출근해야죠."출산 휴가는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허설아는 집에서 겨우 두 달 반밖에 쉬지 않았다.집에 있는 동안에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성격이었다.산후 재활 치료를 몇 차례 받는 동안에도 의사는 회복이 아주 잘되고 있다고 했다.그래서 아예 출근하기로 했다.권지헌은 허설아가 오랜만에 하이힐을 신고 나서자 영 못마땅해했다.하지만 거울 앞에서 한참을 비춰 보며 좋아하는 모습에 흥을 깨고 싶지 않아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배가 들어간 모습을 보지 않았다면 àl'aube 직원들은 허설아가 출산한 지 두 달 남짓 되었다는 걸 믿기 어려웠을 것이다.한여름 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릴 때였다.허설아는 검은색 롱 원피스를 입고 가슴에 àl'aube의 다이아몬드 브로치를 달고 있었는데, 날씬한 몸매에 다이아몬드가 눈부시게 반짝였고 얼굴에는 행복에 겨운 만족감이 배어 있었다.얼마 전 아이를 낳은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송원영이 웃으며 다가와 말했다."왜 왔어요? 휴
서은석은 어떻게 내려왔는지도 모른 채 비틀거리며 산을 내려왔다.서은석이 떠나자 사찰도 불을 끄고 문을 닫았다.산속에는 불빛이 없었지만 돌계단이 산 아래까지 이어져 있어 계단을 따라 쭉 내려가면 그대로 하산할 수 있었다.서은석은 차에 앉아 숨을 골랐다.오늘 다녀온 덕분에 마음에 걸리던 의문과 혼란스러움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당사자라서 오히려 집안에서 벌어진 많은 일의 진실을 무언가에 가려져 놓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문정은에게서 걸려 온 전화 벨소리가 차 안을 가득 채웠다.서은석은 정신을 차리고 휴대폰 화면을 확인한 뒤 전화를 받았다."은석아, 어디 갔어? 멀쩡히 밥 먹다 말고 갑자기 나가 버리면 어떡해? 엄마 친구들이 엄마를 어떻게 생각하겠어?"서은석이 손으로 미간을 꾹꾹 눌렀다.관자놀이에서 누군가 작은 망치로 탁탁 두드리는 듯 지독한 통증이 밀려왔다.다행히 집에서 늘 예쁨받는 막내인지라 전화기 너머로 대꾸하지 않아도 문정은은 화를 내지 않았다.오히려 말머리를 돌려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엄마가 네 여자친구 쫓아냈다고 화났어?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다 농담이었는데 걔가 진심으로 받아들일 줄 누가 알았겠어!"예전 같았으면 문정은이 이렇게 말해도 믿었을 것이다.문정은은 오랜 세월 동안 부족함 없이 오늘은 꽃꽂이, 내일은 요가가 일과인 귀한 부잣집 사모님의 삶을 누려 왔다.세상 일에 크게 부딪칠 일도 없어 세상 물정을 모르고 나이 든 공주님 같았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서은석은 눈을 감았다.문정은이 송원영에게 했다는 말이 떠올랐다."원영아, 너 같은 애가 몸과 청춘을 우리 아들에게 다 쏟아부어도 끝까지 사랑받는다는 보장은 없잖니. 너만 손해야.""네 가족한테도 그렇게 하는데 은석이한테는 오죽하겠니. 정이 없을까 봐 걱정이야.""나중에 네 자식도 너를 그렇게 버리면 어쩌나 몰라. 아이고,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 유전자의 힘이 정말 강하다고 생각하는데 네 유전자는 별로야.""우리 아들은 아마 네 몸매가 좋아서 만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