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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신부 이름으로 수술

Author: 루니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15 06:05:59

환자명, 한세아.

이연희는 팔찌를 읽는 순간 병원 분수대 옆 돌의자에 주저앉았다. 석 달 전 제 손목에 채워졌던 흰 띠였다. 안쪽에는 세강병원 로고와 입원 날짜, 여덟 자리 번호가 찍혀 있었다. 그런데 이름도 생년월일도 제 것이 아니었다. 한세아는 연희와 동갑이지만 생일은 달랐다. 고등학교 때 서로 생일 케이크에 촛불을 꽂아 주던 날까지 기억하는데, 병원은 둘을 같은 사람으로 취급했다. 세아는 연희 생일이면 꼭 첫 조각을 가져갔다. “넌 좋은 거 좀 양보해도 되잖아.” 어릴 땐 그 말이 장난인 줄 알았다.

물줄기가 뺨에 튀었다. 연희는 얼른 팔찌를 투명 봉투에 다시 넣었다. 조금 전 창구 직원은 연희 얼굴을 알아보고도 수술 기록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팔찌를 몰래 건넸다. 누군가 지워 버린 이름 대신 남겨 둔 증거라는 생각이 들자 봉투를 쥔 손바닥에 땀이 찼다. 병원 정문에서 휠체어를 탄 임신부가 보호자의 손을 잡고 나왔다. 연희는 자신도 그 문을 아기와 함께 걸어 나오리라 믿었던 날을 떠올렸다. 잠깐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면 그 여자를 붙잡고 울었을지도 몰랐다.

연희는 도율에게 팔찌 사진을 보내면서 원본은 건드리지 않겠다고 적었다. 곧 전화가 왔다.

“지금 계신 자리에서 팔찌를 더 만지지 마세요. 봉투째 가져오십시오. 어디서 누구에게 받았는지 기억나는 순서대로 적어 두시고요.”

“제 배를 가른 병원이 절 세아로 적어 놨어요. 그럼 걔가 수술받은 거예요? 내 애는 어디로 간 건데요?”

“기록이 그렇게 되어 있다는 사실과 실제로 누가 수술받았는지는 다릅니다. 그 차이를 잡아야 합니다.”

연희는 통화를 끊고 버스정류장으로 가지 않았다. 오히려 병원 맞은편 카페 창가에 앉아 수술 당일 카드 결제 문자를 열었다. 그 날짜에 연희 이름으로 결제된 비용은 분명히 있었다. 팔찌에는 세아의 이름과 다른 생년월일이 박혀 있었다. 돈을 낸 사람과 수술실에 들어간 사람과 서류상의 환자가 서로 달랐다. 이걸 단순 실수라고 부르려면 적어도 세 군데가 한꺼번에 틀려야 했다.

연희는 팔찌의 환자번호가 보이지 않도록 사진을 잘라 세아에게 보냈다.

‘야. 나 수술한 날, 왜 환자가 너야?’

세아는 기다렸다는 듯 전화했다. 수화기 너머로 드레스숍의 음악과 여자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이고, 우리 연희 탐정 됐네? 병원이 이름 잘못 썼겠지. 이젠 남의 팔찌까지 주워서 집착이야?”

“내 손목에 붙어 있던 거야.”

“그럼 병원에 따져. 내가 접수창구 직원이야? 별것도 아닌 걸로 또 지랄이네.”

연희는 주먹을 풀었다. 세아는 수술실 앞에서 연희 대신 서명한 여자였다. 그 사실을 제 입으로 인정하고도, 이제는 접수 실수를 비웃는 척했다.

“네 이름으로 수술받으면 네 애가 없어지는 거야? 내 애까지 네 거 돼?”

“아, 진짜 피곤하다. 그놈의 애, 애. 산 사람 결혼 좀 하겠다는데 죽은 애 얘기를 왜 자꾸 들먹여?”

“한세아. 네가 대신 사인한 이유, 이번엔 이름까지 빌려준 이유. 둘 다 법정에서도 그렇게 말해.”

세아의 웃음이 뚝 멎었다. 잠시 뒤 그녀는 일부러 다정한 목소리를 냈다.

“연희야, 나 너 걱정해서 그래. 약은 꼬박꼬박 먹어. 또 사람들 앞에서 쓰러지면 신랑 오빠가 얼마나 난처하겠어.”

통화가 끊겼다. 연희는 세아가 ‘실수’라고 했던 말을 메모했다. 그 순간 무겸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그만 좀 건드려. 네가 갖고 있는 그 팔찌도 병원에서 확인된 착오야.’

연희는 입술을 물었다. 팔찌를 찾았다는 사실을 세아에게만 알렸는데, 무겸은 벌써 알고 있었다. 연희가 전화를 걸자 그는 이번에도 바로 받았다.

“최무겸. 누가 팔찌 얘기했어?”

“세아가 놀랐더라. 네가 병원까지 가서 소란을 피웠다며.”

“병원에 수술 기록이 없다길래 확인했어. 네가 시킨 일이야?”

“연희야. 환자번호 41082673, 그건 단순히 잘못 붙은 거야. 더 파 봐야 서로 피곤해.”

연희는 숨을 멈췄다. 세아에게 보낸 사진에서는 환자번호를 잘라 냈다. 도율에게만 보낸 원본 사진에는 여덟 자리가 모두 보였다.

“잠깐. 너 방금 번호 뭐라고 했어?”

“쓸데없는 말꼬리 잡지 마.”

“네가 아는 번호면 착오가 아니잖아. 나는 그 숫자 너한테 보여 준 적 없어.”

무겸은 웃으며 말을 돌렸다.

“다정하게 말해 줄 때 그만하자. 널 위해서야.”

“내 애 지우고도 그 말이 나와? 이번엔 누굴 위해서 내 이름을 지웠는데?”

연희가 묻자 전화가 끊겼다. 그녀는 통화 녹음 파일을 저장했다. 화면에 표시된 통화 종료 시각까지 캡처하고, 무겸이 입에 올린 여덟 자리를 수첩에 적었다. 지운 것은 자신의 아이인데, 숫자만큼은 한 글자도 틀리지 않는 남자였다.

도율의 사무실로 돌아가 팔찌와 결제 내역, 문자 캡처를 나란히 펼쳤다. 도율은 연희가 보는 앞에서 봉투 상태를 촬영하고 증거 보관 표시를 붙였다.

“번호를 먼저 말했다고요?”

“제가 알려 주지도 않은 숫자였어요. 저 인간, 모르고 한 말 아니에요.”

도율은 병원에서 보내온 전산 오류 설명자료를 꺼냈다. 연희 이름을 검색하면 기록이 없다고 해 놓고, 오류 항목에는 비식별 수술번호들이 남아 있었다. 해당 번호로 좁혀 날짜를 다시 대조하던 그의 손이 멎었다. 화면에는 같은 번호가 다른 날짜에도 나타났다.

“연희 씨. 이건 단순히 이름 하나가 바뀐 문제가 아닙니다.”

그가 목록을 연희 쪽으로 돌렸다. 환자번호 41082673 아래 수술 항목이 한 줄, 또 한 줄 이어져 있었다.

같은 환자번호로 등록된 수술은 총 3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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