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한때 세상을 놀라게 할 천재였던 그녀는 사고로 기억과 판단력을 잃었다. 남편은 그런 아내를 수치라 여겼고, 내연녀는 그녀의 침실과 이름까지 빼앗았다. 사람들 앞에서 조롱당해도 아내는 웃었다. 남편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었으니까. 그러나 남편이 건넨 서류에 서명한 날, 그녀는 집과 재산을 잃고 정신병원에 갇혔다. 살려 달라는 마지막 부탁마저 외면당한 밤, 끊어졌던 기억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자신이 누구였는지, 누구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는지. 그리고 자신을 버린 남자가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했는지도. 이제 남편은 아내를 되찾기 위해 미쳐 가지만, 그녀는 더 이상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그가 무릎 꿇고 울부짖는 순간에도 그녀의 눈빛은 차가웠다. 한때 전부였던 사랑은 끔찍한 악몽이 되었으므로.
View More서하린이 결혼기념일을 위해 준비한 선물 상자에는 남편이 좋아하던 흰색 리본 대신 붉은 피가 묻어 있었다.
오후에 깨진 유리그릇에 손바닥을 베인 데 이어, 밤에는 떨어지는 선물을 붙잡으려다 유리 조각을 밟고 식탁 모서리에 이마까지 부딪혔다.
그럼에도 하린은 자신의 상처보다 상자 안에 들어 있는 손목시계가 망가지지 않았는지 먼저 확인했고, 피 묻은 손으로 시계를 닦다가 가정부에게 몇 번이나 움직이지 말라는 부탁을 들어야 했다.
오늘만큼은 남편에게 사랑받고 싶었다. 사고 이후 처음으로 아무것도 망치지 않은 결혼기념일을 만들어 주고 싶었으며, 남편이 자신을 바라보며 예전처럼 웃는 모습을 한 번만 더 보고 싶었다.
그날 아침, 세명바이오 대표 강이준의 아내 서하린은 현관 앞에서 남편의 넥타이를 고쳐 매 주고 있었다.
손가락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아 매듭을 두 번이나 풀었다가 다시 묶어야 했지만, 하린은 끝내 반듯한 모양을 만들어 냈다. 남편의 셔츠 깃을 정리한 뒤 한 걸음 물러서서 확인하는 동안 그녀의 얼굴에는 오랜만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이준 씨, 오늘 저녁에는 꼭 일찍 와요. 제가 좋아하는 거 많이 준비할게요."
이준은 휴대전화 화면을 확인하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좋아하는 걸 준비해야지. 네가 좋아하는 걸 왜 준비해?"
하린은 그제야 말을 잘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이준 씨가 좋아하는 거요. 제가 말을 잘못했어요."
남편은 대답 대신 시계를 확인했고, 하린은 그가 현관문을 열기 전에 조심스럽게 소매를 붙잡았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기억하죠?"
"알아."
"정말요?"
이준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서하린, 같은 말 두 번 하게 하지 마. 나 아침부터 피곤해."
하린은 손을 놓으며 작게 사과했다. 결혼기념일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뻤지만, 그 기쁨을 더 표현했다가는 남편의 기분을 상하게 할 것 같아 입술을 다물었다.
"낮에는 전화하지 마. 중요한 회의가 있으니까."
"네. 안 할게요."
"여덟 시쯤 들어올 테니까 괜히 사람 귀찮게 하지 말고."
그 말이 끝나자 하린은 다시 웃었다.
"기다릴게요."
이준이 나간 뒤에도 하린은 한동안 현관에 서 있었다. 남편이 여덟 시에 돌아온다는 말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휴대전화에 알람을 맞췄고, 식탁 옆에 붙여 둔 메모지에도 같은 내용을 적었다.
*금요일. 결혼기념일.*
*이준 씨가 좋아하는 음식.*
*꽃은 흰색.*
*저녁 여덟 시.*
*실수하지 말기.*
마지막 문장은 다른 글씨보다 진했다. 하린이 며칠 전부터 같은 자리에 반복해서 덧쓴 탓에 종이에는 볼펜 자국이 깊게 패여 있었다.
사고 전에는 이런 메모가 필요하지 않았다.
복잡한 실험 결과를 수백 개씩 비교하고 작은 오차를 찾아내던 연구자였던 하린은 한 번 읽은 논문의 수식도 머릿속에서 다시 구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고 이후에는 방금 들은 약속을 잊어버리거나, 물건을 가지러 방에 들어갔다가 무엇을 찾으려 했는지 생각나지 않아 한참을 서 있는 일이 생겼다.
남편은 처음에는 그런 하린을 안아 주었다. 괜찮다고, 자신이 곁에 있으니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 주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위로는 점점 짧아졌고, 하린이 같은 질문을 반복할 때마다 이준의 표정에는 지친 기색이 드러났다.
"네가 예전 같았으면 내가 이런 것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었겠지."
그 말을 들은 날부터 하린은 남편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더 자주 하게 되었다. 자신이 사고를 당하지 않았다면 이준도 이렇게 힘들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으며, 언젠가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남편도 다시 행복해질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결혼기념일만큼은 특별해야 했다.
하린은 전날 밤부터 요리법을 찾아 종이에 옮겨 적었다. 버섯 크림수프와 로즈메리 스테이크는 결혼 전 이준이 가장 좋아했던 음식이었고, 그녀는 재료를 손질하는 순서마다 번호를 붙인 뒤 불을 켜야 하는 시간에는 동그라미를 그렸다.
혹시 순서를 잊어버릴까 봐 휴대전화 알람도 여섯 개나 맞췄다.
가정부가 모든 준비를 대신하겠다고 했지만 하린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하고 싶어요. 오늘은 제가 이준 씨한테 저녁을 만들어 주는 날이니까요."
*이준 씨는 내 말을 들었다고 했다.**내 손에서 다시 피가 났다.*마지막 문장을 적은 뒤 하린은 한참 동안 화면을 바라보았다.사진 속 남편과 세린이 어떤 관계인지 아직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남편은 오해라고 했고, 하린은 그 말을 믿고 싶었지만, 자신이 싫다고 말한 사진을 그가 지웠다는 사실만큼은 누구의 설명도 필요하지 않았다.가정부가 병원에서 안내받은 내용을 전하려고 다가왔을 때 하린은 메모장을 닫지 않았다."사모님, 손은 다시 진료를 받아야 한대요. 제가 같이 가겠습니다."하린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침대 아래에 떨어진 선물 상자도 집어 들었다. 오래된 손목시계는 뚜껑이 열린 채 카펫 위에 놓여 있었고, 손편지 한쪽에는 전날 밤 묻은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하린은 시계를 집어 상자에 넣었다.사고 전 남편이 그 시계를 처음 받았을 때, 그는 손목에 직접 채워 달라며 웃었다. 하린은 그때의 얼굴을 떠올리려고 애썼지만, 지금 눈앞에는 자신의 피가 묻은 구두를 내려다보며 얼굴을 찌푸리던 남편의 모습만 선명했다.그녀는 상자 속 편지를 꺼냈다.*우리 오래오래 같이 살아요.*글씨를 여러 번 고쳐 쓴 흔적이 남아 있었다. 사고 이후 긴 문장을 쓰는 일이 어려워졌지만, 하린은 그 한 줄만큼은 틀리지 않으려고 며칠 동안 연습했다.남편에게 그 편지를 보여 주면 기뻐할 줄 알았다.그러나 오늘 아침 이준은 선물을 열어 보지도 않았고, 피가 흐르는 손을 보고도 자신을 안아 주지 않았다.하린은 편지를 찢지 못한 채 다시 상자 안에 넣었다.그때 휴대전화에 비서실 메시지가 도착했다.*사모님, 대표님 요청으로 오늘 오후 두 시 재활 상담 일정 변경을 병원에 문의했습니다. 아직 확정되지 않았으며, 병원 측에서 본인 확인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하린은 메시지를 읽고 병원 번호를 찾았다.남편에게 허락받지 않고 연락하면 화를 낼지도 몰랐다. 그러나 오늘 상담을 놓치면 자신이 겪은 일을 또 혼자서 되짚어야 할 것 같았고, 그동안 남편의 말에 맞춰 자신의 기억
이준은 그 틈에 비서실로 전화를 걸었다."오늘 오후 일정부터 확인해 주세요. 아내 재활 상담 두 시로 잡혀 있죠?"하린은 고개를 들었다.오늘은 정유나와 상담하기로 한 날이었다. 어젯밤 있었던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몇 번이나 메모를 고쳤고, 자신의 기억이 잘못된 것인지 확인받고 싶어 상담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그 일정 변경 요청하세요. 지금 상태로는 상담을 받아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 겁니다."하린은 남편에게 다가가려다 손바닥의 통증 때문에 멈췄다."이준 씨, 저 오늘 가야 해요."이준은 통화 중이라는 듯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막았다."병원 쪽에는 상태가 좋지 않다고 전달하고, 변경이 확정되기 전에 제게 알려 주세요."통화를 마친 남편은 하린을 바라보았다."지금 네 상태를 봐. 손에서 피가 나는데 무슨 상담이야."하린은 가정부가 받쳐 주고 있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피가 나는 손을 치료받아야 한다는 사실과 재활 상담을 받고 싶다는 의사는 서로 모순되지 않았다. 그러나 남편은 부상을 이유로 상담을 막으면서도 정작 상처를 다시 진료받는 일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손은 병원에서 치료받을게요. 유나 선생님도 만나고 싶어요."그녀가 어렵게 말을 마치자 이준은 피곤하다는 듯 미간을 눌렀다."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도 제대로 알고 있어?"하린은 입술을 깨물었다.그녀는 자신이 하는 말을 알고 있었다. 오늘 두 시에 상담이 있다는 것도, 손바닥이 아프다는 것도, 남편이 사진을 지웠다는 것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그런데 남편은 그녀가 말을 할 때마다 그 사실부터 의심했다."저는 알아요."하린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이준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사고 전에는 이렇게 고집부리는 사람이 아니었는데."하린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사고 전 그녀는 연구실에서 복잡한 자료를 검토하고, 다른 사람들이 놓친 작은 오류를 찾아내는 사람이었다.그러나 지금은 남편이 정해 준 약속 시간 하나를
남편이 피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떠올린 탓이었다. 그녀는 아픈 손을 잠옷 자락으로 감싸 피가 더 떨어지지 않도록 하면서도, 다른 손으로는 휴대전화를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사진은 돌려주세요. 제가 지울지 말지 정할게요."이준은 대답하지 않았다.그의 손가락이 화면을 눌렀고, 확인 창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사진 두 장도 목록에서 없어졌다.하린은 눈앞에서 일어난 일을 이해하는 데 잠시 시간이 걸렸다.남편이 휴대전화를 침대 위에 내려놓자 그녀는 아픈 발을 끌며 다가가 사진첩을 열었다.방금 전까지 두 사람이 보이던 자리를 몇 번이나 훑었지만 화면에는 다른 사진들만 남아 있었고, 하린은 혹시 자신이 잘못된 앨범을 열었을까 봐 손가락을 움직이다가 피 묻은 손으로 화면을 짚고 말았다.붉은 자국이 유리 위에 길게 번졌다.하린은 얼른 소매로 닦으려 했지만 손바닥의 통증 때문에 기기를 놓쳤고, 휴대전화는 침대 아래로 떨어졌다.이준은 그것을 주워 주지 않았다."이제 끝났잖아. 그만해."하린은 남편을 올려다보았다."제가 싫다고 했어요."그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분명했다."지우지 말라고 했잖아요."이준은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외투를 집어 들었다."들었어."하린은 남편이 그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기다렸다. 자신이 너무 아파 보였으니 이제라도 미안하다고 할지 모른다고 생각했고, 적어도 손을 다친 이유가 자신의 잘못만은 아니라고 인정해 주기를 바랐다.그러나 이준은 차갑게 말을 이었다."그런데 네가 싫다고 하는 걸 전부 들어 줄 수는 없어. 네 상태를 생각해야지."그 순간 하린은 자신이 무슨 말을 잘못했는지보다, 남편이 자신의 말을 분명히 알아들었다는 사실 때문에 더 깊이 상처받았다. 사진을 지우지 말라는 부탁은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이준은 아내가 거부했다는 사실을 알고도 자신에게 그 거부를 무시할 권리가 있다고 여겼다.그때 침실 문이 열렸다.가정부가 아침 식사를 알리러 들어왔다가 바닥의 핏자국과 하린의 손을 발견하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런 여자가 지금은 눈앞에 있는 사진을 설명하기 위해 남편의 허락을 기다리고 있었다.하린에게는 그 사진이 단순한 질투의 대상이 아니었다. 사고 전 연구실에서 일할 때 그녀는 관찰한 사실과 추측을 구분해야 한다고 배웠고, 지금도 그 습관만큼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사진 속 손목시계와 흉터, 촛불 세 개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었으며,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는 아직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었다.그런데 이준은 사실을 확인하려는 아내의 태도 자체를 문제 삼았다."네가 보고 있는 건 사진 한 장이지,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가 아니야."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아내에게 가까이 다가왔다."내가 아니라고 하면 아닌 줄 알아야지. 내가 네 남편이잖아."하린은 그 말을 듣고 남편의 손을 바라보았다. 손등에 있는 작은 흉터는 결혼 전 그녀가 약을 발라 주던 상처였고, 그때 이준은 자신이 아프면 가장 먼저 하린에게 오겠다고 웃으며 약속했다.그 손이 지금은 휴대전화 화면을 가리고 있었다."저도 이준 씨 아내잖아요."하린은 힘겹게 말을 이었다."그래서 물어보는 거예요."이준의 얼굴에서 마지막 남은 부드러움이 사라졌다."네가 정말 내 아내라고 생각하면 이런 사진부터 지워야지."그는 사진 두 장을 선택했다.하린은 화면 아래에 삭제 표시가 나타나는 것을 보고 다급히 남편의 소매를 붙잡았다."그건 아직 지우지 마세요."이준은 아내의 손을 내려다보았다.붕대 끝에는 어젯밤 스며든 피가 검붉게 말라 있었고, 손가락은 부기 때문에 제대로 펴지지 않았지만, 그는 그 손을 걱정하기보다 자신의 소매에서 떼어 내려 했다."이런 걸 가지고 있으면 네 상태만 더 나빠져.""제가 받은 사진이에요. 제가 결정할게요."하린은 말을 마치고도 두려워 남편의 표정을 살폈다.사고 이후 자신의 뜻을 분명하게 말할 때마다 이준은 고집을 부린다고 했고, 그녀는 그가 자신에게 실망할까 봐 대부분의 일을 양보해 왔다.하지만 사진만큼은 당장 지우고 싶지 않았다.그 안에는 남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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