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어이쿠, 우리가 타이밍을 아주 우주급으로 기가 막히게 맞췄네?"
작업모를 삐딱하게 쓴 한준우가 들고 있던 대형 방수포를 스르륵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옆에 서 있던 백민석은 황급히 제 두 눈을 양손으로 가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나, 난 아무것도 못 봤다! 차 대표, 서진 씨, 계속하던 거 마저 하세요! 우린 밖에서 달이나 보고 있을 테니까!"
"야, 이 빌어먹을 훈수 주범 새끼들아!"
태혁의 입에서 벼락같은 포효가 터져 나왔다. 하필 또 입술이 닿기 직전에 끼어든 두 친구를 향해 태혁이 바닥에 놓인 묵직한 몽키스패너를 집어 들었다. 사색이 된 준우와 민석이 비명을 지르며 복도 바깥으로 전력 질주해 도망쳤다.
서진은 붉어진 뺨을 감싸 쥐며 푸하하, 참았던 폭소를 터뜨렸다. 어색하고 긴장되었던 공기가 순식간에 유쾌한 웃음으로 가득 찼다.
***
새벽 2시 30분.
"컷! 차태혁 대표님, 너무 긴장하셨습니다! 어깨 힘 좀 빼시고요!"방송 교양 프로그램 《세상에 이런 가족이》의 촬영팀이 302호에 들어왔다. 어린이 미술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은 하람이의 가족을 소개하는 촬영이었다. 부모와 제작진은 미리 촬영할 공간과 아이에게 하지 않을 질문을 정해두었다.촬영 전에 서진은 아이가 싫다고 하면 중단하기로 제작진과 약속했다. 창밖 동 위치와 유치원 명찰은 화면에서 가리기로 했다. 하람이는 집 그림을 보여주는 순서를 직접 골랐다. 어른들이 먼저 대답을 가르치려 하자 서진은 아이가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태혁은 42층 대표이사실에서나 입을 법한 최고급 맞춤 쓰리피스 정장을 빳빳하게 차려입고 소파에 각 잡고 앉아 있었다. 월가와 여의도를 주름잡던 사모펀드 황태자의 위압적인 포스를 뽐내려던 찰나였다."아빠, 지금 뭐 해? 회사 놀이 해?"등 뒤에서 네 살배기 하람이가 혀를 끌끌 차며 걸어 나왔다. 하람이의 양손에는 분홍색 수면바지와 노란 꽃무늬 앞치마가 들려 있었다."그림 제목이 《우리 아빠와 콩알 동생》인데 왜 멋있는 척 옷을 입어? 방송에 거짓말하면 경찰 아저씨가 잡아가!""하, 하람아…… 그래도 전 국민이 보는 지상파 방송인데 아빠가 대표다운 품격을 좀…….""그림에서는 앞치마 입었잖아! 엄마 발 씻겨줄 때처럼 입어야지. 얼른 갈아입어!"촬영 감독이 카메라 뒤에서 웃음을 참느라 고개를 숙였다. 태혁은 수트 단추를 만지작거렸다. 소파 한편에서 차를 마시던 서진도 눈썹을 치켜올리며 쐐기를 박았다."차태혁 씨, 상 준다니까 신나서 자랑질하려던 거 아니었나요? 하람이 말 들어요.""……알겠습니다, 사모님."결국 태혁은 수억 원짜리 정장을 벗어 던지고, 아이가 골라준 옷에 앞치마를 두르고
서진은 현관에서 서류 봉투를 다시 열었다. 파리 출장과 검진 일정에 밀려 미뤄졌던 혼인신고였다. 결혼식은 이미 했지만 서류는 두 사람이 함께 보고 내기로 했다.태혁이 신분증을 건네다가 손을 거뒀다."나도 직접 내야지.""그럼요. 심부름시키는 거 아니잖아요."서진이 웃으며 봉투를 닫았다. 하람이는 옆에서 나비넥타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사진 찍는 날이라고 해서 스스로 고른 차림이었다."구청에 선생님 있어?""일하시는 분들이 있지.""그러면 나도 인사해야 돼?""만나면 인사하면 돼. 오늘 하람이가 시험 보러 가는 건 아니고."아이는 안심한 듯 넥타이에서 손을 뗐다. 태혁은 아이 운동화의 뒤축을 펴주고 제 신발을 신었다. 문을 나서기 전 서진이 가스를 확인하는 동안 그는 오늘 유치원 인계 시간에 늦지 않을지 시계를 봤다.구청 민원실에는 벌써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태혁은 번호표를 뽑고 서진과 나란히 앉았다. 하람이는 빈 의자 하나를 차지하고 봉투를 무릎에 올렸다."아빠는 이거 왜 자꾸 봐?""잘 썼는지 보려고.""이름도 틀려?""틀리면 안 되니까."서진이 옆에서 웃었다. 태혁은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다가 종이 위 이름으로 시선을 옮겼다. 처음에도 같은 두 이름을 썼다. 이름만 같다고 그때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었다."이번에도 아이들은 내 성을 따르는 걸로 확인했어요."서진이 첨부한 협의서를 짚었다. 처음 혼인 때 정했던 방향을 이번에도 유지하기로 둘이 의논해둔 일이었다."응. 하람이랑 동생 이름도 같이 생각하면 되겠네."태혁은 협의서의 자기 서명을 다시 봤다. 그때에는 서명한 뒤 어머니에게 어떻게 설명할지만 걱정했다. 오늘은 더 이상 그 칸 바깥에 있는 사람의 허락부터 구하지 않았다.
"산모님, 긴장 푸시고요. 이제 초음파 탐촉자 들어갑니다."화사한 햇살이 드는 신도시 미래산부인과 제1정밀초음파실. 태혁은 진료 침대 옆에서 서진의 손을 잡았다 놓기를 반복했다. 월가 청문회에서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던 남자의 손바닥은 식은땀으로 흥건했다.태혁은 서진의 작고 부드러운 손을 부서질세라 조심스럽게 감싸 쥔 채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넓은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 곁에서 네 살배기 하람이는 돋보기를 쥐고 까치발을 든 채 모니터를 매의 눈으로 감시하고 있었다."의사 선생님, 우리 콩알이 어디 있어요? 마이쮸처럼 작아요?""후후, 하람이가 직접 볼까? 자, 여기 화면을 보렴."초음파 화면에 흑백의 둥근 자궁 속 풍경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1cm 남짓한 작고 눈부신 하얀 점 하나가 반짝이고 있었다. 의사가 볼륨을 높이자, 정적을 깨고 거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두근두근! 쿵쾅쿵쾅쿵쾅—! 마치 힘찬 기관차가 달리는 것처럼, 우렁차고 경이로운 생명의 박동 소리가 진료실 전체를 가득 메웠다.둘째 콩알이의 씩씩한 심장 소리였다."심장 박동은 분당 150회로 확인되네요. 오늘 확인한 크기와 박동을 기록해두고 다음 진료 때도 경과를 보겠습니다.""……!"태혁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옆에 있는 서진이 손을 내밀자 그제야 잡았다. 손바닥이 조금 떨렸지만 의료진의 설명을 놓치지 않으려고 고개를 들었다."으어엉…… 서진아…… 뛰어…… 우리 콩알이가 살아 숨 쉬고 있어…… 심장이 뛰어……."태혁이 눈물을 닦고도 코를 훌쩍이자 간호사들이 웃음을 참았다. 하람이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아빠의 코에 대주었다.
"내가…… 그렇게 눈치를 봤어?"차태혁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사납게 흔들렸다.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있던 태혁이 뒤로 손을 짚으려다 균형을 잃었다. 쿵 소리와 함께 엉덩방아를 찧었지만 고통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태혁은 머리를 감싸 쥐고 멍하니 서진을 올려다보았다. 뇌 속에서 10만 볼트의 축포가 팡팡 터져 나가는 기분이었다."알면서도 가끔 그래. 눈뜨면 또 없을까 봐.""꿈 아니니까 바닥에서 뒹굴지 말고 얼른 일어나요. 엉덩이 깨질라."서진이 풋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내밀었다. 태혁은 서진의 손을 덥석 잡고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감격의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5년 전 오만하게 ‘생각할 시간을 갖자’던 제 목소리가 문득 떠올랐다.그 말을 되돌릴 수는 없어도, 내일도 이 손을 잡고 눈뜰 수 있었다. 태혁은 젖은 얼굴로 서진을 올려다봤다. 그때, 이불 속에서 눈을 비비고 일어난 하람이가 기가 막히다는 듯 혀를 찼다."아빠 또 울어? 아빠는 어른인데 왜 맨날 울보처럼 엉엉 울어? 콩알이가 보고 배우겠다!""하, 하람아…… 아빠는 너무 기뻐서 그래…… 세상에서 제일 기뻐서…….""흥, 마이쮸나 까줘."어른들이 웃는 동안 하람이는 마이쮸를 다시 내밀었다. 달라는 말부터 들어주었으면 하는 눈치였다. 태혁은 하람이를 품에 안고 뺨에 요란한 뽀뽀를 퍼부었다. 하람이는 간지럽다며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고, 서진은 흐뭇하고 따스한 미소로 두 남자를 바라보았다.***다음 날 오후, 서울 서초동의 대한민국 대표 로펌 대회의실. 태원인베스트먼트 고문 변호사단과 공증 담당 변호사들이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문서의 제목은 [가족 생활 헌장 및 자산 관리 약정
"저 아이가 파리 공예 특별전 총괄 윤서진 디렉터의 아들이자, 이번 어린이 미술 공모전 최종 후보 윤하람 군 맞습니까?"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교문 안쪽을 찍으려 하자 교사가 막아섰다. 하람이는 이미 다른 아이들과 함께 안으로 들어간 뒤였다. 취재를 내세운 사람들 사이에는 앞선 난동에 가담했던 차진우와 별개로 움직이던 본가 친척 차진욱 쪽 인물들이 섞여 있었다.아이의 그림을 재벌가 홍보에 이용한다는 소문으로 두 사람을 흔들려는 움직임이었다. 서진은 교사에게 출입문을 닫아달라고 부탁했다. 태혁은 그녀와 나란히 서서 취재에는 응하지 않겠다고 말했다.태혁은 입고 있던 캐시미어 코트를 활짝 펼쳐 서진과 하람이를 온몸으로 감싸 안았다. 단 1mm의 빛도 아이에게 닿지 않도록 거대한 성벽처럼 앞을 가로막은 태혁의 눈빛이 살벌하게 번뜩였다."카메라 당장 내려. 아이한테 플래시 한 번만 더 터뜨리면 전원 법적 조치 들어간다."태혁의 서늘하고 묵직한 호통에 기자들이 흠칫 뒤로 물러섰다. 그 순간, 신도시 골목 저편에서 요란한 바퀴 소리와 함께 우렁찬 함성이 터져 나왔다."하람이한테서 당장 떨어져요! 우리 신도시 보물 하람이를 어디서 괴롭혀요!"신도시 맘카페 ‘달콤맘’ 어벤져스 회원 30여 명이 유모차 바리케이드를 치며 들이닥쳤다. 엄마들은 스마트폰 카메라를 일제히 켜고 기자들과 방계 잔당들을 에워쌌다."어디서 감히 유치원 앞에 몰려와서 우리 동네 아이를 위협해요? 맘카페 실시간 라이브 방송 켜졌으니까 당장 해산하세요!"동시 접속자 3만 명을 돌파한 라이브 방송의 위력에 당황한 기자들과 파파라치들은 사색이 되어 꽁무니를 뺐다. 차진욱은 신고를 받고 온 경찰에게 현장에서 신원을 확인받았다. 태원 법무팀은 반복된 미행과 촬영 자료를 넘기고 추가 조치를 요청했다. 태혁은 아직 켜져 있는 휴대폰 카메라를 확인하고 교문 쪽은 찍지 말아
"어머니, 무거우시죠. 이리 주세요."태혁이 현관으로 나가 냄비를 받았다. 옥순은 식탁 위 떡볶이를 보고 먼저 딸의 얼굴을 살폈다. 늦은 저녁인데 서진이 몇 입이라도 먹고 있다는 것이 반가우면서도 걱정스러웠다."속은 좀 괜찮아?""이상하게 이건 조금 먹겠네. 아까는 밥 냄새만 나도 싫었는데.""그래. 먹히는 게 있으면 다행이지."옥순은 닭국 냄비를 식탁에 올리려다 딸이 코끝을 찡그리는 것을 봤다. 태혁이 먼저 뚜껑을 닫았다. 서진은 미안한 얼굴로 웃었다."엄마, 내일 데워 먹어도 되지? 지금은 냄새가 조금 그래.""당연하지. 잘 먹으라고 가져온 거지, 혼내려고 가져왔겠니."태혁은 냄비를 작은 통에 나눠 담았다. 옥순이 보관할 것을 가리켜주자 그가 만든 날짜를 적었다. 서진이 먹지 못해 남긴 그릇도 치웠다. 많이 먹였는지보다 억지로 먹지 않아도 되는 식탁이 먼저였다.하람이는 할머니가 가져온 보따리에서 인절미를 찾아냈다. 옥순이 손을 씻고 오라고 하자 곧장 욕실로 갔다. 혼자 다 먹으면 안 된다는 듯, 돌아와서는 제 몫과 엄마 몫을 따로 놓았다."엄마는 나중에 먹어도 돼. 내가 지켜줄게.""그럼 아빠 몫도 좀 남겨줘."태혁이 묻자 아이가 떡을 하나 더 꺼냈다. 크기를 비교하다가 큰 것을 자기 쪽에 두었다. 옥순이 모른 척 웃으며 물컵을 가져왔다.식사를 마친 뒤 서진은 소파에 앉아 잠깐 눈을 감았다. 태혁은 옥순에게 차를 권했다. 옥순이 일정이 적힌 달력을 보다가 손가락으로 수요일을 짚었다."이날은 내가 하람이 데리고 오면 되겠네.""괜찮으시겠어요? 병원 일정 있으시다고 들었는데요.""그건 화요일이야. 수요일은 내가 있을게."태혁은 자기 일정표도 함께 꺼냈다. 회의를 옮길 수 있는 날과 어려운 날을 나눠 보여주었다. 옥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