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내 아이의 유치원 앞을 서성이는 전남편: Chapter 1 - Chapter 10

30 Chapters

제1화: 5년 만의 놀이터

대한민국 사모펀드 업계의 거물, 태원인베스트먼트의 42층 대표이사실. 통유리 너머로 서울 강남 테헤란로의 삭막한 빌딩 숲이 아득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 화려한 마천루의 정점에서 차태혁은 지난 5년 동안 단 하루도 다리를 뻗고 편히 잠들지 못했다.수천억 원대의 투자를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결정하는 냉혹한 승부사였지만, 그의 가슴속 한구석은 언제나 칼바람이 불어닥치고 있었다. 그의 손끝은 낡은 가죽 다이어리 속 빛바랜 사진 한 장을 더듬을 때마다 가련하게 떨리곤 했다."대표님, 드디어 찾았습니다."비서실장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내민 태블릿 PC 화면 위로 경기도 한적한 신도시의 주택가 골목길이 떠올랐다. 빛바랜 페인트칠이 정겨운 작은 아파트 단지, 그리고 그 앞의 소박한 모래 놀이터. 푸른 등나무 덩굴이 그늘을 드리운 초록색 나무 벤치 위에, 단정한 베이지색 린넨 셔츠를 입고 긴 머리를 자연스럽게 묶어 올린 여자가 앉아 있었다.윤서진.5년 전 이혼한 아내였다.태혁은 화면을 다시 당겼다. 주소가 바뀌었다는 보고나 닮은 사람을 봤다는 연락은 여러 번 받았다. 이번에는 서진이 틀림없었다. 귀 뒤로 머리를 넘기면서도 펜은 놓지 않는 버릇까지 그대로였다.태혁은 의자에 걸쳐둔 수트 재킷을 거칠게 낚아채며 집무실 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오늘 남은 일정 전부 취소해. 당장 차 대기시켜."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얼굴을 보고서야 태혁은 휴대폰을 움켜쥐었다. 먼저 연락해야 했다. 그러나 5년 전 끊긴 번호에 무슨 말을 보내겠다는 건지, 입력창조차 열지 못했다."사람들은 따라오지 마. 나 혼자 갈 거야."비서실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혁은 사진 속 벤치를 다시 확대했다. 이번에는 옛 주소나 누군가의 목격담이 아니었다. 오늘 찍힌 사진 속에 서진이 있었다. 만나면 할 말을 그렇게 준비했는데, 정작 입안에는 이름 두 글자밖에 남지 않았다.***서울 도심을 벗어나 외곽 순환 고속도로를 거칠게 내달린 지 1시간 20분. 태혁은 188cm의 위압적인 체구로 소박한 동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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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미끄럼틀 위의 붕어빵

"엄마! 이따 저녁에 약속한 치킨 너겟 다섯 개 구워줘야 해! 케첩도 듬뿍 찍어 먹을 거야!"노란색 플라스틱 미끄럼틀 위에서 쏜살같이 미끄러져 내려온 작은 꼬마가 모래 먼지를 일으키며 벤치를 향해 전력 질주해 왔다. 땀에 흠뻑 젖은 앞머리를 찰랑거리며 서진의 품으로 사정없이 파고드는 아이. 순간 차태혁의 시선이 아이의 작은 얼굴에 가닿았다.그 찰나, 태혁의 머릿속에서 거대한 폭탄이 터져 나간 것처럼 모든 사고 회로가 하얗게 증발해 버렸다.'……어?'눈썹도,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코를 찡긋하는 버릇도 낯익었다. 태혁은 서재에 둔 옛 앨범을 떠올렸다. 어머니가 억지로 단추를 끝까지 채워놓자 카메라를 노려보던 어린 자기 얼굴이었다.아이도 지금 비슷한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닮은 아이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려는데, 시선은 자꾸 서진에게로 돌아갔다. 그녀는 아이의 등을 쓸어주면서도 태혁에게 말을 붙이지 않았다."우리 하람이, 땀 흘린 것 좀 봐. 그렇게 뛰어다니면 옷이 다 젖잖아. 땀부터 닦자."서진은 태혁 따위는 시야에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 익숙하고 능숙한 손길로 에코백에서 공룡 그림이 그려진 손수건을 꺼냈다. 아이의 이마와 귓바퀴, 목덜미를 꼼꼼하게 닦아주는 서진의 입가에는 지난 5년 동안 태혁이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다정하고 포근한 미소가 피어나 있었다. 함께 살던 때, 태혁이 야근에 지쳐 소파에 널브러져 있을 때 따뜻한 손길로 이마를 쓸어주던 그 다정함 그대로였다.서진이 꺾인 빨대가 달린 유기농 보리차 팩을 건네자, 하람이라는 이름의 아이는 꿀꺽꿀꺽 목을 축이더니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이의 시선이 새카만 수트와 번쩍이는 은색 시계를 차례로 훑었다. 시선이 얼굴까지 올라왔는데도 태혁은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하람이는 작은 손가락으로 태혁을 가리키며 서진의 옷자락을 콕콕 찔렀다."엄마, 저 키 큰 아저씨는 누구야? 왜 남의 동네 놀이터에서 마네킹처럼 굳어서 서 있어?""……신경 쓰지 마, 하람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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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생각할 시간 끝났는데요?

만 4세. 태혁은 레스토랑에서 헤어졌던 늦봄과, 그해 여름 이혼신고를 마친 날을 차례로 떠올렸다. 서진이 두 번이나 확인했던 질문도 생각났다. 정말 이대로 끝낼 거냐고. 그는 서진이 끝내 돌아올 거라고 믿고 서류에 서명했다.하람이는 그 뒤에 태어났을 나이였다. 날짜가 머릿속에서 맞물리자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러나 자신이 짐작한 것을 아이 앞에서 사실처럼 말할 수는 없었다. 언제 알았는지, 누구와 병원에 갔는지, 묻고 싶은 것이 한꺼번에 목까지 올라왔다.서진은 아이의 땀부터 닦아주고 있었다. 태혁은 그 손에 자신이 한 번도 건네지 못한 손수건과 물병을 떠올렸다.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는 동안 자신은 없었다."서진아…… 내 아이야? 설마…… 우리 아이인 거야?"태혁의 목소리가 찢어질 듯 처절하게 갈라졌다. 감당할 수 없는 죄책감과 경악,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벅찬 감정이 뒤엉켜 그의 눈시울을 붉게 물들였다. 그러나 서진의 태도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견고한 철벽 그 자체였다.그녀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벤치 위에 놓인 태블릿과 외주 디자인 서류 가방을 챙겨 어깨에 메며, 흙 묻은 아이의 옷자락을 털어주었다."여기서 그 얘기 하지 마요. 하람이는 내가 키운 내 아들이에요. 닮았다는 말 한마디로 당신 자리가 생기는 건 아니고요.""나한테는 왜…… 아니, 미안해. 따지려는 게 아니야. 내가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 이렇게 늦을 줄은……."태혁이 참지 못하고 제 가슴을 쥐어뜯으며 절규하듯 다가서자, 서진이 마침내 피식, 차가운 실소를 흘렸다. 그 냉소는 태혁이 5년 동안 지어왔던 그 어떤 오만한 미소보다도 잔인하게 그의 심장을 사정없이 후벼 팠다."이제 와서 지키긴 뭘 지켜요?"서진의 나직하지만 서슬 퍼런 목소리가 놀이터의 적막을 날카롭게 갈랐다."5년 전, 그 고급 레스토랑에서 최고급 와인잔 빙빙 돌리며 거만하게 턱 괴고 뭐라고 하셨더라? '서진아, 우리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시간을 좀 갖자. 넌 내게 너무 집착해.' 그렇게 폼 잡고 먼저 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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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주범들의 멱살을 잡다

서진은 하람의 손을 잡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놀이터 너머 아파트 단지 입구로 사라졌다. 모래 먼지가 흩날리는 벤치 앞, 맞춤 수트 바지에 선명하게 찍힌 작은 발자국을 내려다보며 차태혁은 멍하니 자리에 주저앉았다. 가슴 한가운데가 거대한 포탄을 맞은 것처럼 뻥 뚫려 나간 기분이었다.모래밭에는 하람이가 떨어뜨린 머리핀이 남아 있었다. 태혁은 노란 공룡 모양 핀을 주워 손수건에 쌌다. 돌려줄 핑계가 생겼다고 생각했다가, 그런 생각부터 하는 자신에게 질렸다. 물건 하나를 쥐었다고 다시 찾아가도 되는 것은 아니었다.휴대폰을 꺼내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이의 이름을 말하려다 한 번 멈췄다. 이번에도 제 조급함을 먼저 해결하자고 누군가의 사생활을 뒤질 참이었다."……대표님, 서진 씨는 만나셨습니까?""사람 붙여서 더 알아보지는 마. 오늘 찾은 경위도 나한테만 보고하고.""추가 확인은 중단하겠습니다.""내 가족관계증명서를 직접 확인할 방법부터 보내줘. 그리고 한준우랑 백민석, 아직 회사에 있어?"태혁의 목소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벌한 기운에 비서실장이 숨을 거칠게 들이켰다."한 이사님과 백 이사님은 지금 본사 42층 임원 라운지에서 다음 주 투자 설명회 자료를 검토 중이십니다만…….""둘한테 기다려달라고 해. 내가 가서 할 말이 있어."***차 안에서 본인 인증 절차를 열었다가 닫았다. 운전 중에 볼 일이 아니었다.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지만, 다음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아이가 펴 보이던 네 손가락만 떠올랐다.끼이익—! 태원인베스트먼트 지하 주차장을 찢을 듯한 마찰음과 함께 태혁의 벤틀리가 거칠게 멈춰 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42층으로 올라간 태혁은 망설임 없이 임원 라운지의 육중한 문을 쾅 차며 열어젖혔다.안에는 아무것도 모른 채 여유롭게 각자의 잔을 기울이던 두 친구가 앉아 있었다."어이쿠, 차 대표님! 신도시 시찰은 잘 다녀오셨…… 컥!"고급 싱글몰트 위스키 잔을 흔들며 여유를 부리던 한준우의 멱살이 순식간에 태혁의 커다란 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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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지우지 않은 이름

태혁은 인쇄가 끝난 종이를 한참 뒤에야 집어 들었다. 윤하람. 화면으로 볼 때는 떨려서 읽지 못했던 이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아이는 조금 전에도 분명 윤하람이라고 말했다.서진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거짓말은 태혁 자신이 하고 있었다. 성이 다르니 아닐 수도 있다고, 닮은 것뿐일 수도 있다고. 인정하고 나면 지난 5년을 어디서부터 감당해야 할지 몰라서였다.처음 혼인신고를 하던 날에도 서진의 성을 적은 종이가 있었다."아이가 생기면 내 성을 쓰게 하고 싶어요."결혼식 날짜를 또 미뤄달라는 집안의 요구를 전한 직후였다. 서진은 식을 서두르자고 하지 않았다. 대신 혼인신고서와 자녀의 성을 정하는 협의서를 나란히 놓았다."나중에 어른들이 싫어하시면……."태혁이 말을 흐리자 서진이 펜을 내려놓았다."지금 당신한테 물었어요. 어른들 말고."그는 서진의 이름 옆에 제 이름을 적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작은 반지를 맞췄고, 서진은 종이봉투를 무릎에 올려두고 자꾸 들여다봤다. 그날만큼은 둘이 무엇이든 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어머니가 식사 자리에서 서진을 깎아내리면 태혁은 집에 돌아와서야 미안하다고 했다. 회사 일정에 밀린 약속은 다음 주로 옮겼다. 서진이 다음 주도 기다렸으므로,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여겼다.레스토랑에서 생각할 시간을 갖자고 말했을 때도 그랬다. 먼저 미안하다고 해주기를 바랐다. 태혁이 바라던 사과를 서진이 왜 해야 하는지는 생각하지 않았다.그 뒤로 서진은 두 번, 이혼에 관해 이야기하자고 했다. 첫 번째에는 회의가 있다는 답을 보냈고, 두 번째에는 그렇게까지 할 일이냐고 되물었다. 결국 서류를 마주했을 때도 서진이 마음을 돌릴 거라고 믿었다. 절차가 끝날 때까지 태혁이 먼저 붙잡은 적은 없었다.이혼이 끝난 뒤에는 연락이 끊겼다. 친구들에게 제 사정을 말할 때조차 아내가 떠났다는 말 대신, 서진이 갑자기 사라졌다고 했다. 그 편이 자신이 덜 비겁해 보였다.태혁은 서류를 접으려다 멈췄다. 종이가 아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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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유치원 앞의 수상한 거구

다음 날 아침 8시 40분. 햇살이 화사하게 내리쬐는 신도시 햇살반 유치원의 정문 앞. 노란색 통학 버스와 아이들의 손을 잡고 삼삼오오 모여드는 학부모들 사이로, 도저히 동네 풍경과 어우러질 수 없는 기이한 광경 하나가 연출되고 있었다.유치원 담벼락 모퉁이, 벚나무 그늘 뒤편. 한 남자가 검은 선글라스를 낀 채 안절부절못하며 서성이고 있었다. 영국 새빌 로에서 공수한 최고급 다크 네이비 쓰리피스 수트에 에르메스 실크 넥타이를 맨 차태혁이었다.문제는 그가 유치원 화단 너머로 고개만 빼꼼 내민 채, 햇살반 출입구를 도끼눈으로 응시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의 양복 주머니는 새벽부터 비서실을 털어 공수한 온갖 고급 선물들과 최고급 수제 유기농 사탕들로 불룩하게 솟아 있었다."어머, 저 사람 뭐야……?""놀이터에서도 저러고 서성거리던데, 혹시 유괴범 아니야?""키는 엄청 큰데 명품 정장 입고 왜 저래? 얼굴도 멀쩡하게 생겨가지고……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등원길 엄마들의 수군거림이 귓가를 스쳤지만, 태혁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어젯밤 가족관계증명서를 손에 쥔 채 1분도 자지 못했다. 자신이 아빠라는 사실이 가슴 벅차면서도, 지난 5년간 서진과 아이가 겪었을 고통과 빈자리를 생각하면 가슴이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것 같았다.홀로 만삭의 무거운 몸으로 산부인과를 오가고, 아픈 아이를 업고 응급실을 전전했을 서진을 떠올릴 때마다 제 심장을 칼로 후벼 파고 싶었다. 그때, 저 멀리 횡단보도를 건너오는 익숙한 두 개의 인영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늘색 셔츠 원피스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서진, 그리고 병아리 같은 노란색 원복에 모자를 쓴 하람이었다.하람이는 엄마 손을 잡고 깡총깡총 뛰며 신나게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작은 가방을 메고 아장아장 걷는 모습이 심장을 터뜨릴 만큼 사랑스러웠다. '하람아…… 내 아들…….'벅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태혁은 마침내 체면도, 이성도 모두 내던진 채 담벼락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긴 다리로 순식간에 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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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112와 하얀 봉투

"차태혁 씨, 1초 셌습니다. 지금 바로 112 누릅니다."서진의 서늘한 음성이 태혁의 귓전을 날카롭게 찔렀다. 스마트폰 액정 위에서 번쩍이는 세 자리 숫자, 112. 그녀의 엄지손가락이 초록색 통화 버튼을 터치하기 직전, 태혁은 반사적으로 두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월가를 호령하며 수천억 원의 투자 계약을 좌우하던 대한민국 대표 펀드매니저의 모습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굴욕적인 항복 자세였다."누, 누르지 마! 제발 그것만은 누르지 마, 서진아!"태혁의 찢어질 듯 다급한 목소리에 주변 학부모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사색이 된 얼굴로 양손을 허공에 든 채 무릎을 굽힌 재벌 대표의 꼴은 희대의 볼거리였다. 엄마 등 뒤에 숨어 있던 하람이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아이는 앙증맞은 손가락으로 태혁의 이마를 가리키며 카랑카랑하게 외쳤다."엄마! 저 키 큰 아저씨 눈에서 땀나! 무릎 꿇고 손들고 벌서는 거야? 거짓말쟁이라서 혼나는 것처럼?""……식은땀이란다, 꼬마야."태혁은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비명을 억지로 삼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자신의 친아들에게 대낮 유치원 길바닥에서 벌서는 거짓말쟁이 취급을 당할 줄이야. 그러나 지금 태혁에게는 체면 따위를 따질 여유가 전혀 없었다.서진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꿈틀거리는 순간, 태혁은 양복 안주머니로 맹렬하게 손을 찔러 넣었다."서진아, 딱 1분만 들어줘! 이거…… 한 번만 봐 줘!"태혁이 꺼낸 것은 백색 서류 봉투였다. 어젯밤 몇 번이나 꺼내 읽은 가족관계증명서가 들어 있었다. 접힌 자리를 펴느라 봉투 끝이 이미 해져 있었다.태혁은 두 손으로 공손하게 봉투를 받쳐 들고 서진의 눈앞으로 들이밀었다."확인했어. 서류에 내 이름이 있었어. 하람이 아버지로…… 내가 너무 늦게 봤어."태혁의 눈시울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며 굵직한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들의 존재를 확인한 벅찬 감동과, 5년의 잔인한 공백에 대한 처절한 참회가 뒤엉킨 절규였다. 그러나 봉투를 내려다보는 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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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42층 대표님의 지구대 굴욕기

"잠깐만요! 저 수상한 사람 아닙니다! 유괴범 아니에요!"차태혁은 양손을 번쩍 치켜든 채 기겁하며 소리쳤다. 그가 사색이 되어 쩔쩔맬수록 경찰관들의 눈초리는 더욱 매서워졌다."선생님, 일단 침착하시고 신분증부터 제시해 주시죠. 아침 등원 시간에 유치원 담벼락 뒤에 숨어서 아이들을 훔쳐보고 있다는 신고가 접수됐습니다."베테랑 경위가 무전기를 잡으며 태혁의 앞을 막아섰다. 태혁은 억울함에 목이 메어 양복 안주머니를 뒤져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번쩍이는 금박이 새겨진 명함 한 장과 주민등록증을 떨리는 손으로 건넸다."저 태원인베스트먼트 대표이사 차태혁입니다. 방금 보신 것처럼 그냥 아는 사람…… 아니, 중요한 일로 잠깐 찾아온 것뿐입니다."경찰관이 명함과 주민등록증을 번갈아 확인하더니 눈을 크게 치켜떴다."태원인베스트먼트……? 그 경제 뉴스에 맨날 나오는 그 차태혁 대표 맞습니까?""예, 맞습니다. 제가 미쳤다고 대낮에 남의 동네 유치원에서 애를 유괴하겠습니까?"태혁이 가까스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던 바로 그 찰나였다. 서진의 등 뒤에 서 있던 네 살배기 하람이가 불쑥 튀어나와 경찰관의 바짓가랑이를 덥석 붙잡았다."경찰 아저씨! 저 아저씨가 거짓말해요! 아까 번쩍이는 검은색 플라스틱 카드 주면서 나 유혹하려고 했단 말이에요! 마이쮸도 없으면서 사탕 준다고 꼬셨어요!"태혁은 카드가 든 주머니를 무심코 덮었다. 그 동작마저 수상해 보일 것 같아 손을 내렸다. 경찰관의 시선이 다시 의심으로 물들며 차갑게 굳어졌다."블랙카드로 유혹이라…… 아무리 대표님이라도 아이에게 함부로 접근하시는 건 중대한 위협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어머니, 이분과 어떤 관계이십니까?"경찰관이 서진을 향해 정중히 물었다. 태혁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서진을 애절하게 바라보았다. 제발, 단 한마디라도 좋으니 아는 사람이라고, 전남편이라고 말해 주기를 바랐다.그러나 서진의 입술에서는 티끌만 한 자비도 흘러나오지 않았다."예전에 알던 사람이에요. 지금은 연락하고 싶지 않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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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철벽 디자이너의 비상사태

"네, 팀장님. 일정 당겨진 거 확인했습니다. 오늘 자정까지 파주 인쇄소로 직접 들어가겠습니다. 별색 잉크 감리 제가 직접 볼 테니까 라인 비워두세요."전화를 끊은 서진은 차갑게 식어버린 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머릿속이 하얗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국내 굴지의 코스메틱 대기업에서 발주한 프리미엄 스킨케어 라인의 전면 리브랜딩 프로젝트.프리랜서 디자이너 윤서진의 이름을 업계에 확실하게 각인시키고, 하람이와의 안정적인 미래를 보장해 줄 일생일대의 대형 계약이었다. 그런데 클라이언트 측의 갑작스러운 글로벌 론칭 일정 변경으로 최종 패키지 인쇄 감리가 사흘이나 앞당겨진 것이었다. 오늘 밤 파주 공장에 상주하며 패키지 인쇄 감리를 직접 통과시키지 못하면, 수천만 원의 계약금은커녕 막대한 위약금을 물어내야 할 판이었다.그뿐만이 아니었다. 이번 프로젝트가 엎어지면 지난 수개월 동안 밤을 새우며 피땀 흘려 갈아 넣은 모든 디자인 작업들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 터였다. 문제는 일 자체의 난이도나 밤샘 작업이 아니었다."오후 4시……."서진은 노트북 구석의 깜빡이는 디지털시계를 바라보며 마른세수를 했다. 하람이의 유치원 하원 시간은 정확히 오후 4시였다. 파주 인쇄소까지 차량으로 이동하는 시간과 사전 미팅을 감안하면, 늦어도 오후 4시 30분에는 신도시를 출발해야만 했다.만약 인쇄소로 하람이를 데려간다면? 화학 약품 냄새와 굉음이 진동하는 인쇄 공장에 네 살배기 아이를 밤새 방치할 수는 없었다. 가장 예민한 시기의 아이에게 그런 환경을 겪게 하는 것은 엄마로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엄마는 지방에 계시고…… 아빠도 당장 올라오실 수 없는 상황인데.' 서진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휴대폰 연락처를 뒤졌다. 지난 1년간 하람이를 종종 돌봐주시던 동네 베이비시터 이모님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절망적이었다.— 어머, 하람 엄마! 어쩌나, 나 어제 계단에서 발목을 삐끗해서 깁스하고 병원에 입원했어. 당분간 걷지도 못한대.미안해서 어떡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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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수트 입은 노예의 읍소

"차태혁 씨, 지금 제정신이에요?"서진은 어이가 없다는 듯 차가운 헛웃음을 터뜨리며 태혁을 매섭게 쏘아보았다."남의 아들 하원을 당신이 왜 해요? 스토킹도 모자라서 이제는 대낮에 도청까지 하셨네요?""도청이 아니야, 서진아. 지구대 나와서 네가 걱정돼서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어. 네가 고개 숙이고 우는데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어."태혁의 짙은 눈동자가 붉게 물든 채 애원하듯 잘게 떨렸다. 그는 망설임 없이 손목에 차고 있던 수억 원을 호가하는 스위스제 최고급 명품 시계를 풀었다. 그리고 안주머니에서 최고급 악어가죽 지갑, 태원인베스트먼트 법인 인감카드, 벤틀리 자동차 키, 심지어 최신형 스마트폰까지 탈탈 털어 서진의 테이블 위에 와르르 쏟아내 놓았다."이거 전부 다 네가 가지고 있어. 내 신분증, 카드, 차 키, 휴대폰까지 다 맡길게. 내가 조금이라도 허튼짓하면 당장 횡령이든 스토킹이든 경찰에 넘겨도 좋아. 네 손으로 날 감옥에 처넣어도 아무 말 안 해.""지금 내 앞에서 돈자랑이라도 하겠다는 건가요? 이런 거 하나도 안 궁금하니까 다 치우세요.""돈자랑이 아니라 담보야! 내 목숨과 전 재산을 네 손에 쥐여주는 거야. 서진아, 너 오늘 파주 감리 못 가면 수개월 동안 밤새워 고생한 디자인 프로젝트 다 날아가잖아. 위약금 물고 업계에서 소문이라도 이상하게 나면 너 혼자 얼마나 힘들겠어."태혁의 목소리가 찢어질 듯 갈라졌다. 그는 서진이 얼마나 자존심이 강한지, 자신의 디자인 일에 얼마나 긍지를 품고 목숨을 걸고 있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과거 5년 전, 사소한 자존심 싸움 때문에 그녀의 자립심과 열정을 제멋대로 폄하했던 자신이 천벌을 받아 마땅했다."하람이 안전하게 하원시키고, 너 파주에서 돌아올 때까지 집 앞에서 먼지 한 톨 안 묻히고 지키고 있을게. 유치원에서 하람이 모셔와서 집에 안전하게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할게. 털끝 하나 안 건드릴게.""차태혁 씨."서진이 팔짱을 끼며 얼음장처럼 차가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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