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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복수의 이름으로

last update Veröffentlichungsdatum: 14.03.2026 16:53:18

서울 도심은 빗물이 아직 마르지 않았다.

하늘은 낮게 깔렸고, 회색 건물들이 그 아래 눌린 듯 무겁게 늘어져 있었다.

그녀는 그 사이를 걸었다.

머리를 묶은 채, 검은 트렌치코트를 입은 여자의 걸음. 수진이었다.

아니, 이제 사람들은 그녀를 ‘린자오밍’이라 부르게 될 것이다.

그녀의 눈빛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았다.

그저 목표만을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암호화된 채팅창을 열었다.

‘SPIDR SYSTEM – Secure.’

화면에 짧은 메시지가 깜박였다.

[대상 #01 : 조강식]

배신구 직속 1급 보안보좌관

장소: 청담 클럽 「ARK」

시간: 오늘 밤 22:40

수진은 휴대폰을 닫았다.

“조강식….”

그 이름을 중얼거릴 때마다, 가슴 어딘가가 미세하게 뒤틀렸다.

그는 언니의 작전에 참여했던 인물이었다.

작전 실패 당시 현장 보고를 조작한 자.

“언니의 죽음을 서류로 죽인 사람.”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버스 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

거기엔 김수진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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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여친은 린자오밍!   175. 선 위에서 시작된 균열

    다음 날 아침, 해남의 공기는 밤새 내린 비의 흔적을 품고 있었다. 지붕 끝에 걸린 물방울들이 아침 햇빛을 받아 잠시 반짝였고, 그 빛은 오래 잠들었던 마을의 골목을 천천히 깨웠다. 그러나 강혁에게 그 아침은 어제와 오늘의 경계가 흐려진 채로 다가왔다. 그는 평소보다 훨씬 일찍 깨어 난창 너머의 하늘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은 잔잔했고, 바다는 어제보다 조용했지만, 그의 머릿속에서는 더 많은 소리가 겹치고 흘렀다.여진의 마지막 표정, 깊게 젖은 수진의 눈빛, 그리고 말하지 못한 비밀이 서로 엉켜 마치 조용한 폭풍처럼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조금씩 커져나가고 있었다. 그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 쥐며 천천히 숨을 골랐다. 마음을 정리하고 싶었지만, 정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어떤 감정들은 정리하는 순간이 오기 전까지 그저 흘러가게 놔두어야 했다. 그는 그걸 알고 있었다.그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항구 쪽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이른 아침부터 움직이는 상인들의 목소리가 가볍게 들렸고, 간밤에 젖어 있던 물건들을 말리기 위해 늘어놓는 모습이 평온한 하루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평온함이 오히려 불길하게 느껴질 만큼, 강혁의 내면은 깊이 흔들리고 있었다.그가 항구에 가까워질 무렵, 한 남자가 서 있는 게 보였다. 국정원에서 파견된 감시 요원 중 하나였다. 그 남자는 강혁을 보자마자 짧게 인사했고, 강혁도 별다른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둘 사이에 흐르는 공기는 공식적이고, 차갑고, 딱 필요한 만큼만 열려 있었다.“어제는… 좀 정신 없던 것 같습니다.”요원이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강혁은 눈을 좁히며 그를 바라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요원은 한숨을 들이쉬며 덧붙였다.“여진 씨의 일… 팀도 여러모로 복잡해졌습니다. 내부 보고도 그렇고…”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혁은 시선을 돌려 바다를 바라봤다. 바다의 색은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그저 묘하게 침잠한 색이었다.“그런

  • 내 여친은 린자오밍!   174. 배신의 자리까지 남은 거리

    해남 바닷가의 밤공기는 장마철 특유의 눅진한 습기를 머금고 있었다. 낮부터 이어지던 비는 이제 힘이 빠진 듯 잔잔하게 떨어지고 있었고, 그 적막 속에서 강혁은 천천히 항구를 걸었다. 여진의 죽음은 마을에 큰 소란을 일으켰지만, 시간이 조금 흐르자 사람들은 그 사건을 말로만 소화하고, 일상으로 되돌아가는 척하면서 각자의 삶을 가려진 천막처럼 다시 펼쳐 들었다. 그러나 강혁에게만큼은 그날 이후 하루도 온전히 흘러간 적이 없었다. 그는 여진의 마지막 표정이 떠오를 때마다, 그녀가 자신에게 남긴 묵직한 감정과 목숨을 걸 정도의 애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마치 자기 손으로 만든 균열이 바다처럼 끝없이 번져 나가는 기분이었다.바람이 약하게 불어와 젖은 셔츠의 구석을 건드렸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말아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했는데, 그 안에 남아 있는 습기가 마치 여진이 마지막 순간 손끝으로 붙잡았던 절박함처럼 느껴져 잠시 동안 숨을 들이쉬는 것조차 어려웠다. 그러다 문득, 불 꺼진 골목 끝에서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빛이 눈에 들어왔다. 수진의 꽃집 ‘린꽃방’이었다. 문은 닫혀 있었고, 내부의 작은 스탠드등 하나만 켜져 있었지만, 그곳에서 새어 나오는 빛은 강혁을 향해 오래전부터 손짓하고 있었던 것처럼 아련하고 조용했다.그는 잠시 걸음을 멈춘 채 그 빛을 바라보았다. 수진이 이 시간까지 가게에 있을 리는 없었다. 평소대로라면 이미 숙소로 돌아가 깊은 수면에 잠겨 있을 테고, 혹은 책상에 몸을 웅크린 채 자매의 옛 사진을 들여다보며 또 한 번 조용히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왜 그 빛이 오늘따라 그렇게 낯설고, 동시에 그리운 걸까. 그는 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을 마음속에 가득 채운 채, 아주 천천히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가게 앞에 다다랐을 때,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리해놓은 화병들, 말린 라벤더 다발, 수진이 좋아하는 작은 머그컵. 그러나 그 모

  • 내 여친은 린자오밍!   173. 언니가 남긴 그림자의 첫 장면

    강혁의 작업실은 해남에서도 가장 바다와 가까운 언덕 끝에 있었다. 낮에는 바람이 몰아치고, 밤에는 어둠이 바다를 넘어 방 안으로 스며들 만큼 외진 곳이었지만, 그 고요함 덕에 그는 이곳에서만큼은 과거의 잔상들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 밤, 그 고요함은 더 이상 쉬어가는 공간이 아니라, 잃어버린 조각을 마주할 준비를 하는 침묵의 방처럼 느껴지고 있었다.문을 열자 약한 조명이 천장 가장자리에서 부드럽게 깜빡였고, 오래된 모니터와 자료 서버의 팬 소리가 낮게 울렸다. 수진은 방 한가운데 놓인 테이블 앞에서 잠시 멈춰섰다. 손안에 있는 작은 저장 장치가 지금까지보다 더 무거워진 것처럼 느껴졌다.강혁은 작업용 노트북과 데이터 변환기를 꺼내며 조용히 말했다.“전원 자체는 오래됐지만, 저장된 파일이 손상되지 않았을 가능성은 있어.그때 언니가 전송했던 기록이 일부라도 살아 있다면…이 장치 안에 있을 거야.”수진은 숨을 내쉬었다.그 숨은 바깥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섞여 방 안으로 천천히 퍼졌다.“선생님, 혹시… 보기 전에 말해 줄 수 있어요?”그녀는 시선을 내리지도, 올리지도 않은 애매한 곳에 두며 말했다.“만약 이 안에… 언니의 목소리가 남아 있다면,그걸 들었을 때 제가 어떤 얼굴을 하게 될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강혁은 그녀의 말에 대답하기 전에, 그녀가 얼마나 오랫동안 이런 감정을 혼자 견뎌왔는지 먼저 떠올렸다.그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하지만 최소한, 그녀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 하나만큼은 보여줄 수 있었다.“네가 어떤 얼굴을 하든… 난 옆에 있을게.”그는 짧게 말했지만 그 안에 더 많은 문장을 삼키고 있었다.“그리고 네가 들을 준비가 되었을 때 시작하자.”수진은 아주 작은 고개 끄덕임으로 답했다.그 움직임 하나만으로도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긴장에 묶여 있는지 느껴질 만큼,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강혁은 저장 장치를 변환기에 연결했다.기계가 작게 웅~하는 소리를 내며 빛을 흘렸고

  • 내 여친은 린자오밍!   172. 지워지지 않는 조각

    “언니… 내가 왔어. 이제… 끝까지 갈게.”밤이 바다 위에서 길게 흔들렸고,해상 중계소는 오랫동안 닫혀 있던 시간을두 사람 앞에서 조용히 열어젖히고 있었다.해상 중계소를 나와 바닷가로 다시 걸어 내려오는 동안, 두 사람의 발걸음은 더 깊어진 어둠 위로 길게 새겨졌다. 밤공기의 차가움은 한층 선명해져 피부를 타고 올라왔지만, 수진은 그 차가움보다 손안에 쥔 작은 저장 장치의 온기를 더 또렷하게 느끼고 있었다. 금속은 차가웠지만, 그 안에 담겨 있을 언니의 흔적 때문에 그녀의 손바닥이 조심스레 뜨거워지는 듯한 묘한 감정이 스며들고 있었다.강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대신 그의 시선은 바다로 이어지는 길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고, 조용히 그녀의 보폭에 맞추어 속도를 조절하고 있었다. 그의 침묵은 불편한 정적이 아니라, 수진이 마음속에서 아무 방해 없이 오래 묵힌 감정을 꺼낼 수 있도록 지켜주는 빈 자리 같은 것이었다.중계소에서 내려오는 경사로 끝에 작은 벤치 하나가 있었다. 오래전에 해안 순찰대가 잠시 쉬어가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아무도 찾지 않는 고요한 자리. 그 위로 가로등 하나가 희미한 황색빛을 흘리고 있었고, 그 빛이 파도와 섞이며 작은 떨림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수진은 그 벤치에 천천히 앉았다.강혁도 그녀 옆에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그리고 잠시. 둘의 호흡만이 파도와 함께 조용히 흘렀다.수진은 손안의 저장 장치를 손바닥 위에서 천천히 굴렸다.매끄러운 금속 결을 따라 움직이는 그녀의 손끝이 아주 조심스러웠다.그 조심스러움은 마치, 잃어버린 사람의 편지를 뜯기 전, 숨을 고르는 사람의 감정과 닮아 있었다.“여기엔…”그녀가 낮고 차분하게 말했다.“…언니가 마지막으로 본 것, 마지막으로 들은 것, 마지막으로 남기려 했던 게 모두 들어 있을 수 있어요.”그 말에 강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리고 여진도 그걸 알아냈을 가능성이 있어.”수진의 손이 아주 미세하게 멈췄다.여진이라는 이름이 이 밤의 조용

  • 내 여친은 린자오밍!   171. 바다 끝에 고인 시간

    문을 밀어 연 순간, 밤공기는 한층 더 차갑게 그들의 얼굴을 감쌌다. 해안과 바다 사이에 서 있는 오래된 중계소는 바람에 씻겨나간 듯 무채색을 띤 채 굳건하게 서 있었고, 창문 사이로 스며드는 희미한 불빛조차 없었다. 마치 모든 소리를 삼켜버린 빈 껍데기처럼 조용한 그곳에서, 수진은 잠시 숨을 고르며 발끝에 전해지는 무게를 느꼈다. 언니가 마지막으로 발을 디뎠던 장소라는 사실이, 발바닥 너머까지 스며드는 듯한 차가운 울림으로 전달되었다.강혁은 조심스레 손전등을 켰다. 빛이 어둠 속을 길게 베어내듯 뻗어갔고, 오래된 벽과 녹슨 철제 난간, 부서진 모뎀 함들이 그림자처럼 드러났다. 그러나 그 빛이 닿을 때마다 이곳이 한때 누군가의 절박함과 공포, 그리고 마지막 의지가 머물렀던 자리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수진은 천천히 한 걸음씩 안쪽으로 들어섰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닥의 모래가 미세하게 흩어지며 작은 소리를 냈고, 그 소리는 이 공간의 정적 속에서 과도하게 선명하게 들렸다. 그녀는 손끝으로 벽을 짚으며, 여진이 마지막으로 이곳을 방문한 이유를 떠올렸다.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었는지, 아니면 누군가를 확인하러 왔는지. 혹은언니의 죽음에 남아 있는 진실을 찾기 위해서였는지.기지국의 안쪽은 좁은 복도로 이어져 있었고, 벽면에는 아직도 오래된 케이블들이 얽히고설켜 있었다. 때때로 바람이 케이블을 스치면 금속이 부딪히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사람의 손길이 오래전 멎어버린 장소에 남은 마지막 숨결처럼 들렸다. 수진은 그 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기다가 어느 지점에서 멈췄다.그곳에는 문 하나가 있었다. 반쯤 열린 상태로 주저앉은 듯 기울어져 있었고, 손잡이는 떨어져 나간 채로 바닥에 굴러 있었다. 문틈으로 보이는 공간은 더 어둡고, 바람조차 들어오지 않는 듯 고요했다. 그녀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그곳이 바로, 언니 수민이 마지막으로 남긴 기록이 전송된 장소였다.“여기 맞아요.”수진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그안

  • 내 여친은 린자오밍!   170. 바다로 향하는 길

    밤이 깊을수록 바람은 점점 더 차가워졌다. 도시의 불빛이 멀어지고,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길 위의 작은 굴곡을 비출 때마다, 수진의 시선은 그 굴곡 위에 고여 있는 듯한 침묵을 따라 흔들렸다. 강혁은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조금 더 주면서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유를 오래 바라보다가,묻지 않았다. 지금 그녀의 침묵은 단순한 생각의 깊이가 아니라, 다시는 닫히지 않을 문을 열어버린 사람의 조용한 숨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창문 너머로 스치는 공기는 그들의 얼굴을 식히며 바다 냄새를 실어왔다. 바다에 가까워졌다는 건, 수진이 마주해야 하는 진실도 그 만큼 가까워졌다는 뜻이었고, 강혁은 그 사실이 그녀의 어깨에 어떻게 내려앉는지 손끝으로 느껴지는 듯했다. 그녀는 조용히 단말기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화면을 켜지도 않은 채 한동안 그 금속의 표면만 바라보았다. 마치 그 안에 갇혀 있는 시간이 다시 흐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어쩌면 아주 미미한 희망이 남아 있게 될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추우면 말해.”강혁의 목소리는 낮고 짧았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은 쉽사리 감춰지지 않았다.수진은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눈을 감았다.“괜찮아요. 이런 날씨가 오히려… 더 집중하게 해요.”그 말은 진심이었다. 바람이 차가울수록, 손끝이 얼어붙을수록, 그녀는 과거의 흔적을 더 정확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언니가 마지막으로 남긴 기록을 발견했을 때의 그 순간부터 지금 이 바다로 향하는 길까지, 모든 흐름이 그녀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언니의 죽음은 오랫동안 닿지 않는 슬픔이었지만, 오늘 밤 문득, 그 죽음이 다시 그녀 곁으로 걸어오는 것 같았다. 아직 완전히 설명되지 않은 표정으로, 아직 밝혀지지 않은 이유로.“여진은 왜…”말을 잇는 순간, 수진은 스스로도 놀랄 만큼 목소리가 차분해졌다.“그걸 알고 있었는데도, 끝까지 말하지 않았을까요.”강혁은 답하지 않았다.여진의 마음을 생각하면 할수록, 단순한 충성도나 질투의 문제가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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