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손이 떨어져 나간 허공을, 해림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강유헌의 다급한 뒷모습은 짙은 연기 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가 떠난 자리에는 매섭게 타오르는 붉은 화마와, 고막을 찢어대는 폭발음만이 남았다. 버려졌다. 5년을 남편으로 맹신했던 남자에게, 가장 절박한 생사의 갈림길에서 철저하게 버림받았다."하, 하아……."
매캐한 연기가 폐부를 깊숙이 찌르자, 그제야 멈춰 있던 숨이 쿨럭이며 터져 나왔다. 배신감에 젖어 슬퍼하거나 절망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피부를 직접 핥아대는 듯한 뜨거운 열기가 해림의 생존 본능을 강제로 일깨웠다.무너진 잔해에 깔린 다리에서 뼈가 바스러지는 듯한 끔찍한 통증이 밀려왔다.
여기서 죽을 수는 없다. 이대로 강유헌과 민채령의 비극적인 사랑을 장식하는 불쌍한 희생양 따위로 남을 수는 없었다.해림은 이를 악물었다. 불길은 이미 복도 양쪽을 완전히 틀어막았고, 메인 방화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강유헌이 달아났던 중앙 계단 쪽도 불기둥이 솟구쳤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 밀폐된 지옥에서 질식하기만을 기다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도해림이었다.그녀의 머릿속에 과거 자신이 직접 검토하고 추가를 지시했던 연구소의 도면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3층 C구역. 배기창과 연결된 외부 유지보수용 비상 통로.'일반 동선에는 없는, 오직 외벽 관리자들만이 사용하는 숨겨진 해치였다.
지금 위치에서 불과 십여 미터 떨어진 장비실 벽면 뒤에 그 통로가 있었다.해림은 불길 사이로 바닥에 뒹구는 굵은 철제 파이프 조각을 움켜쥐었다.
그것을 지렛대 삼아 자신의 다리를 짓누르는 잔해 틈새로 깊숙이 밀어 넣었다. "으윽……!" 온 체중을 실어 파이프를 강하게 내리눌렀다. 끼기긱, 소름 끼치는 쇳소리와 함께 무거운 철골이 들린 찰나, 해림은 살점이 찢겨 나가는 다리를 미친 듯이 빼냈다.자유로워진 몸으로 바닥을 기기 시작했다.
유독 가스가 짙게 깔린 복도 바닥에 바짝 엎드린 채, 찢어진 소매로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천장에서 불붙은 단열재가 뚝뚝 떨어져 어깨와 등에 화상을 입혔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고 비상 통로가 있는 장비실을 향해 필사적으로 기어갔다.마침내 구석에 위장된 철문 앞에 다다랐다.
전원이 나가 먹통인 키패드 대신, 해림은 파이프를 고쳐 쥐고 잠금장치의 구조를 떠올렸다. 파이프 끝을 문틈에 쑤셔 넣고 온 체중을 실어 매달렸다. 화상 입은 손바닥에서 피가 배어 나와 쇠기둥을 적셨다. 미끄러지는 손을 옷자락으로 칭칭 감아 매고 다시 힘을 줬다.깡, 콰앙-!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굳게 잠겨 있던 유지보수용 해치가 바깥쪽으로 튕기듯 열렸다.훅-!
순식간에 안쪽의 뜨거운 공기가 바깥으로 빠져나가며, 동시에 서늘하고 매서운 밤공기가 해림의 얼굴을 강타했다. 산소였다. 해림은 열린 해치 밖으로 몸을 던지듯 굴렀다. 연구소 건물 외벽을 타고 이어진 좁은 비상 철제 계단이 나타났다. 다리에 힘이 풀린 그녀는 계단을 제대로 걷지 못하고 바닥을 뒹굴며 무조건 아래로 추락하듯 굴러떨어졌다.차가운 흙바닥. 연구소 뒤편의 후미진 공터였다.
"하아, 하아……." 폐부 깊숙이 찬 공기를 밀어 넣으며 해림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살았다. 강유헌이 자신을 불길 속에 버렸음에도, 오직 스스로의 의지와 기억만으로 이 지옥에서 탈출했다. 연구소 건물 위쪽에서는 여전히 무서운 기세로 시뻘건 불길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당장 누군가에게 구조신호를 보내야 했다.
해림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흙바닥을 짚으며 도로 쪽을 향해 기어갔다. "도와…… 콜록." 목구멍이 화기로 망가져 제대로 된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한계를 넘은 몸이 점점 마비되어 갔다. 시야가 흐려지고, 눈꺼풀이 납덩이처럼 무거워졌다. 도로가 보이는 비탈길까지 기어 올라갔을 때였다.저 멀리, 불길이 닿지 않는 어두운 나무 그림자 아래에 매끄러운 검은 차량 한 대가 정차해 있는 것이 보였다.
사고를 목격하고 달려온 구급차도, 소방차도 아니었다. 엔진 소리조차 죽인 채 어둠 속에 완벽하게 동화되어 있던 세단. 그리고 그 차량에서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일제히 문을 열고 내렸다.그들은 헤매거나 놀라지 않았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남자들이 바닥에 쓰러진 해림을 발견하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선두에 선 남자가 해림의 상태를 살피며 귓가에 꽂힌 무전기에 대고 짧게 보고했다. "생존자 발견. 다발성 외상과 화상 확인했습니다. 즉시 이동하겠습니다."검은 정장, 일사불란한 행동 방식, 무전기.
평범한 구급대가 아니었다. 왜 이런 시간에, 이렇게 외진 곳에 정체 모를 저 차가 서 있었던 걸까. 해림이 무어라 입을 떼려 했지만, 남자가 그녀의 시야를 가리는 순간 아득한 어둠이 의식을 완전히 집어삼켰다.삑, 삑, 삑.
규칙적인 기계음이 해림의 청각을 가장 먼저 두드렸다. 코끝을 찌르는 알코올 냄새. 눈을 뜨자, 새하얀 천장이 시야에 가득 찼다.일반적인 응급실의 소음이나 병동의 부산스러움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지나치게 고요하고 완벽하게 통제된 공간. 고급스러운 마감재와 널찍한 내부 공간은 이곳이 철저한 보안을 유지하는 VIP 전용 병실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해림의 몸에는 꼼꼼하게 붕대가 감겨 있었고, 팔에는 수액과 진통제가 투여되는 주삿바늘이 꽂혀 있었다.숨을 쉬기 위해 고개를 살짝 돌렸을 때, 병실 벽면에 벽걸이형 TV가 음소거 된 채 뉴스를 송출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해림의 시선이 화면 아래를 지나가는 붉은색 속보 자막에 멎었다.[속보] 에이온모빌리티 제1연구소 대형 화재 발생.
[속보] 화재 현장서 시신 1구 수습… DNA 감식 결과 에이온 대표 부인으로 확인.앵커의 심각한 표정 위로, 흑백으로 처리된 해림 자신의 증명사진이 떠올랐다.
그 사진 아래, 너무나 선명하고 낯선 글자가 박혀 있었다.`故 도해림`
자신은 분명 여기 살아 있었다.
숨을 쉬고, 맥박이 뛰고 있었다. 그런데 화재 현장에서 수습된 시신은 DNA 검사까지 거쳐 완벽하게 '도해림'이 되어 있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화마에 휩쓸린 그 시신은 누구이며, 왜 그게 자신으로 둔갑해 버린 것일까. 그 기막힌 모순 앞에서, 해림은 쩍쩍 갈라진 마른입을 천천히 달싹였다."……내가 죽었네."
"사망자는 이혼 소송을 제기할 수 없습니다."태성 측 변호사의 무미건조한 대답이 법정 복도의 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로 묵직하게 떨어졌다.해림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방금 전까지 법정 안에서 문제의 유언장 효력을 박살 내고 집행을 정지시키며 끌어올렸던 승리의 감각이, 보이지 않는 법과 제도의 거대한 벽에 부딪혀 막혀버린 기분이었다.해림이 미간을 좁히며 곁을 걷던 변호사를 돌아보았다."불가능하다니요? 내가 이렇게 두 발로 멀쩡히 서서 숨을 쉬고, 당신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도요? 방금 법정 안의 모든 사람들이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똑똑히 목격했을 텐데요.""물리적인 생존 여부와 법적인 소송 당사자 능력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입니다."변호사가 침착하고 냉정하게 현실을 짚었다. "현재 가족관계등록부상 도해림 씨의 기록은 일주일 전 제1연구소 화재 사고로 인해 '사망'으로 폐쇄된 상태입니다. 법원은 철저히 서류와 증거로만 판단합니다.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은 원고가 될 수 없습니다. 이 상태로 이혼 소장을 제출해 봐야 당사자 적격 부존재로 즉각 각하될 겁니다.""그럼 무엇부터 시작해야 합니까?""먼저 법원에 가족관계등록부 정정 신청을 통해 본인의 생존부터 법적으로 인정받아야 합니다.""그 신원 회복 절차에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죠?""상당히 복잡한 사안입니다. 화재 현장에서 발견된 시신이 도해림 씨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할 객관적 검사 자료가 필요하고, 추가적인 재조사 과정이 뒤따라야 합니다. 최소 수 주에서, 꼬이게 되면 몇 달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몇 달.해림의 입술이 굳어졌다. 그 기나긴 시간 동안, 꼼짝없이 강유헌의 법적인 아내로 남아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자신을 맹렬한 불구덩이에 버려두고 다른 여자를 구하러 달려간 남자. 그리고 지나치게 빠른 사
법원 심문기일."신청인은 현재 법적으로 사망 판정을 받은 고인과 동일인이라는 최소한의 신원 증명조차 마치지 못했습니다. 이는 당사자 적격이 없는 신원 미상자의 억지 주장에 불과합니다!"에이온 측 변호사의 날 선 목소리가 법정을 울렸다.강유헌은 변호인단 중앙에 굳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세상이 도해림의 죽음을 확정 지었다는 사실을 앞세워, 에이온 측은 그녀의 당사자 자격부터 완전히 무너뜨리려 하고 있었다.해림은 맞은편에서 그들을 무감하게 응시했다.그녀의 곁에는 차서록이 지원한 태성그룹의 최정예 법무팀이 포진해 있었다.해림 측 변호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신청인의 신원 회복 절차는 별도로 진행 중입니다. 하지만 본 심리의 핵심은 피신청인 측이 집행하려는 유언장 자체가 그 효력을 온전히 인정받을 수 없는 흠결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효력이라니요! 이미 필적 감정까지 완벽하게 마친 문서입니다!"에이온 측의 즉각적인 반발을 예상했다는 듯, 해림이 직접 입을 열었다. 그녀가 단상 쪽을 향해 가볍게 고갯짓을 하자, 대형 스크린에 준비된 영상이 재생되었다.화면 속에는 과거의 도해림이 에이온 법무팀과 변호사 입회하에 서류를 작성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본인 도해림은 향후 제로파트너스 지분 및 에이온 관련 핵심 특허 등, 중대한 권리 변경을 수반하는 모든 문서에 한하여 고유의 인증 규칙을 적용합니다.]영상 속 해림의 건조하고 또렷한 목소리가 법정 안을 채웠다.[단순한 서면 서명뿐만 아니라, 사전에 지정된 별도의 '음성 코드 파일'이 동시에 제출되지 않는 한, 그 어떤 권리 이전이나 유언장도 효력을 갖지 못합니다.]영상이 멈추자 법정은 찬 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해림은 꼿꼿하게 등받이에 기댄 채 강유헌을 직시했다."피신청인 측이 제출한 유언장에는 제 서명만 있을 뿐, 이 필수 인증 규칙이 완전히 누락되어 있습니다. 재판장님, 현재 유언장에 첨부된 음성 코드 파일이 존재합니까?"재판장이 굳은 표정으로 서류를 확인하고 대답했다."
장례식장을 빠져나온 해림은 미리 잡아둔 조용한 호텔 비즈니스 라운지로 향했다.수십 명의 눈앞에서 자신의 생존을 드러내고, 유언장 집행정지와 증거 보존을 요구한 직후였다. 턱끝까지 차올랐던 긴장감과 피로가 몰려왔지만, 해림의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갑고 명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라운지의 묵직한 문이 열리고, 차서록이 들어왔다.두 사람은 앞서 이미 구원이 아닌 거래를 약속한 사이였다. 이제는 그 모호했던 구두 합의를 구체적이고 확실한 형태의 공동대응 계약으로 묶어낼 차례였다.서록은 맞은편에 앉자마자 곧바로 잘 정돈된 서류철 하나를 테이블 위로 밀어주었다."가장 시급했던 법무팀 구성이 끝났습니다. 유언장 집행정지 신청은 이미 들어갔고, 심리에 대비한 보완 자료도 정리하고 있습니다. 증거 보존 신청이 들어간 CCTV와 유품 자료들도 우리 쪽 보안팀이 확실하게 감시하고 있습니다. 강유헌 측에서 함부로 손대지 못할 겁니다."건조하고 철저히 업무적인 말투였다. 해림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내민 계약 초안을 빠르게 훑어 내려갔다.자신이 법적으로 '살아있음'을 우선적으로 증명하기 위한 행정적 절차, 위조 의혹이 제기된 서류들을 무효화할 법적 대응 시나리오, 그리고 당장 움직일 수 없는 해림을 대신할 막대한 자금과 인력 지원까지 완벽하게 짜인 판이었다."필요한 법률과 보안, 자료 추적까지 흠잡을 데 없군요."해림이 서류에서 눈을 떼고 서록을 똑바로 응시했다."하지만 세상에 대가 없는 호의는 없죠. 당신이 원하는 조건부터 명확히 하죠."서록은 빙빙 돌려 말하는 법이 없는 해림의 직설적인 태도가 마음에 든다는 듯,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나에게는 태성그룹 관련 의결권이 필요합니다.""의결권이요?""태성 내부에 곧 치열한 표 대결이 벌어질 겁니다. 에이온모빌리티 쪽에 복잡하게
`故 도해림`TV 화면 아래로 무심히 흘러가는 붉은 자막을 보며, 해림은 리모컨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화면이 까맣게 죽고 병실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병원 침대에 기대앉은 해림의 눈동자는 어둠이 깔린 창밖을 향해 있었지만, 초점은 허공을 떠돌고 있었다.세상에서 완벽하게 지워졌다. 숨을 쉬고, 심장이 뛰고, 이렇게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류상 도해림은 이미 한 줌의 재가 되어버렸다. 화재가 발생한 지 불과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은 사이, 바깥세상은 그녀의 죽음을 너무도 빠르고 철저하게 기정사실로 만들었다. 그 기막힌 사실이 주는 충격은 이미 서늘한 이성 아래로 가라앉은 지 오래였다. 남은 것은 오직 지독한 의문뿐이었다.똑똑.규칙적인 노크 소리와 함께 병실 문이 열렸다. 흐트러짐 없는 회색 정장 차림의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화재 현장 뒤편에서 쓰러진 해림을 수습해 이 완벽히 통제된 VIP 병실로 옮겼던, 그 정체 모를 검은 차량의 무리 중 한 명이었다.그는 해림에게 어떤 위로나 불필요한 질문도 건네지 않았다. 소리조차 내지 않고 다가온 그는 묵직한 서류 봉투 하나를 침대 옆 테이블 위에 조용히 올려놓을 뿐이었다."지시받은 자료입니다. 본인의 사망 처리에 관한 기록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남자는 고개를 가볍게 숙인 뒤, 더 이상의 설명 없이 세 걸음 뒤로 물러나 대기했다.해림은 테이블 위의 서류 봉투로 시선을 옮겼다. 겉면에 아무런 로고도 찍혀 있지 않은 매끄러운 황봉투. 그녀를 이곳으로 데려온 '누군가'가, 지금 해림에게 가장 필요한 정보가 무엇인지 정확히 꿰뚫어 보고 제공한 자료였다. 그들의 정보력과 행동력은 분명 보통의 수준이 아니었지만, 지금 해림에게 중요한 것은 그들의 정체가 아니었다.
손이 떨어져 나간 허공을, 해림은 멍하니 바라보았다.강유헌의 다급한 뒷모습은 짙은 연기 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가 떠난 자리에는 매섭게 타오르는 붉은 화마와, 고막을 찢어대는 폭발음만이 남았다.버려졌다.5년을 남편으로 맹신했던 남자에게, 가장 절박한 생사의 갈림길에서 철저하게 버림받았다."하, 하아……."매캐한 연기가 폐부를 깊숙이 찌르자, 그제야 멈춰 있던 숨이 쿨럭이며 터져 나왔다. 배신감에 젖어 슬퍼하거나 절망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피부를 직접 핥아대는 듯한 뜨거운 열기가 해림의 생존 본능을 강제로 일깨웠다.무너진 잔해에 깔린 다리에서 뼈가 바스러지는 듯한 끔찍한 통증이 밀려왔다.여기서 죽을 수는 없다. 이대로 강유헌과 민채령의 비극적인 사랑을 장식하는 불쌍한 희생양 따위로 남을 수는 없었다.해림은 이를 악물었다. 불길은 이미 복도 양쪽을 완전히 틀어막았고, 메인 방화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강유헌이 달아났던 중앙 계단 쪽도 불기둥이 솟구쳤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 밀폐된 지옥에서 질식하기만을 기다렸을 것이다.그러나 그녀는 도해림이었다.그녀의 머릿속에 과거 자신이 직접 검토하고 추가를 지시했던 연구소의 도면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3층 C구역. 배기창과 연결된 외부 유지보수용 비상 통로.'일반 동선에는 없는, 오직 외벽 관리자들만이 사용하는 숨겨진 해치였다. 지금 위치에서 불과 십여 미터 떨어진 장비실 벽면 뒤에 그 통로가 있었다.해림은 불길 사이로 바닥에 뒹구는 굵은 철제 파이프 조각을 움켜쥐었다. 그것을 지렛대 삼아 자신의 다리를 짓누르는 잔해 틈새로 깊숙이 밀어 넣었다."으윽……!"온 체중을 실어 파이프를 강하게
일주일 전.[대표님, 안전 시험 데이터에 심각한 이상이 있습니다.][최종 수치가 원본 자료와 맞지 않습니다. 원본은 방금 백업했습니다.][지금 연구소로 오실 수 있습니까?]에이온모빌리티 핵심 연구원 한지수에게서 온 긴급 메시지였다. 평소 감정 기복이 없던 지수가 늦은 밤 이런 연락을 한 것은 사안이 돌이킬 수 없이 심각하다는 뜻이었다.그 밤, 해림은 즉시 차를 몰아 외곽에 위치한 제1연구소로 향했다.자정 무렵의 연구소는 기괴할 정도로 고요했다. 짙은 어둠이 깔린 복도를 걸어 들어가는 내내 불길한 예감이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해림이 한지수의 연구실이 있는 3층 복도 중앙에 들어선 순간이었다.콰앙-!고막을 갈가리 찢는 굉음과 함께 바닥이 맹렬하게 요동쳤다. 거대한 폭발이 건물 전체를 집어삼키며 진열된 내열 유리창들이 일제히 박살 났다. 해림은 쏟아지는 파편을 피하며 반사적으로 바닥에 몸을 던졌다."콜록, 콜록……!"유독한 흑색 연기가 순식간에 산소를 밀어내며 복도를 빽빽하게 채웠다. 붉은 불길이 뜯겨 나간 벽면을 타고 뱀처럼 기어오르며 천장까지 혀를 날름거렸다. 해림은 매캐한 연기를 연거푸 들이마시며 바닥을 기었다. 눈과 목구멍이 불을 삼킨 것처럼 참을 수 없이 타들어 갔다.귀를 찌르는 화재 경보기가 미친 듯이 울려대고 있었다. 하지만 당연히 작동해야 할 천장의 자동 소화 장치에서는 물 한 방울 떨어지지 않았다. 해림은 기침을 뱉어내며 가장 가까운 비상구 방화문 쪽으로 손을 뻗었다.그러나 굳게 잠긴 방화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우지끈!굉음과 함께 천장을 지탱하던 무거운 철골 구조물이 무너져 내리며 해림의 다리 쪽을 덮쳤다."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