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카페 ‘블루밍’의 공사 현장은 그야말로 거대한 아수라장이었다.
혜연은 방진 마스크를 눌러쓴 채,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벽면을 매서운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한때는 화려한 조명과 웃음소리가 가득했을 이 공간은, 이제 막 뜯어낸 콘크리트 가루와 녹슨 철근의 비릿한 냄새,
그리고 오래된 습기가 만들어낸 퀴퀴한 곰팡이 향으로 가득 차 있었다.
혜연이 밤을 새워 설계한 디자인은 완벽한 직선과 차가운 미니멀리즘의 정수였다.
하지만 그 차가운 완벽함은 현장의 거친 먼지 속에 갇혀 좀처럼 숨을 쉬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손에 든 도면을 거칠게 말아 쥐었다.
현장 소장의 무성의한 마감 처리가 눈에 가시처럼 박혔고,
무엇보다 이 공간에 스며들어야 할 '향기'라는 불확실한 요소가 그녀의 통제 본능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때, 공사장 입구의 가림막이 들리며 둔탁한 발소리가 들렸다.
상수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먼지 구덩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깨끗한 린넨 셔츠 차림이었지만,
손에 든 작은 샘플 병들을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 심장을 다루듯 품에 안고 있었다.
갓 태어난 새끼 고양이를 보호하는 사람처럼 조심스러운 그 걸음걸이를 보며, 혜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저 유약한 태도.
소영의 곁에서 8년 동안이나 그림자처럼 지내며 키워왔을 그 지독한 수동성이 이 거친 현장에서도 고스란히 묻어났다.
혜연에게 상수는 여전히 스스로의 의지라고는 거세당한 채, 타인의 취향에 기생하는 무능한 존재일 뿐이었다.
“늦었네요. 현장 시간은 도면의 선 하나만큼이나 정확해야 한다는 걸 모릅니까?”
혜연의 날 선 목소리가 공사장 천장에 부딪혀 날카롭게 공명했다.
상수가 멈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마스크 위로 드러난 그의 눈동자는 혜연의 복잡한 도면만큼이나 읽기 힘든 감정들로 일렁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이 공간의 습도와 자재 냄새를 이겨낼 적절한 향의 베이스를 찾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변명은 됐어요. 작가님, 착각하지 마세요. 이 공간은 내 정교한 계산 위에 서 있는 건축물이에요.
작가님의 그 나약하고 감상적인 향기가 비집고 들어올 틈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다고요.
여기 환풍구 설계를 다시 보세요.
제가 설계한 기류 흐름과 작가님의 정체 모를 향기가 부딪히면,
이 카페는 우아한 향기가 아니라 사람들의 코를 찌르는 불쾌한 악취로 가득 찰 겁니다. 내 설계를 망치지 마세요.”
혜연은 도면을 팽개치듯 가설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상수는 그 도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는 수많은 선과 기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듯 보였으나,
사실 그의 시선은 도면을 짚고 있는 혜연의 하얗게 질린 손끝에 머물러 있었다.
혜연은 그 시선을 느끼고는 수치심에 팔짱을 끼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럼, 도면대로 해보죠. 제 향기는 혜연 씨가 설계한 그 완벽한 기류에 맞게... 다시 '조정'하겠습니다.”
상수는 나직하게, 그러나 묘하게 힘이 실린 목소리로 덧붙였다. 혜연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조정? 설계? 조향사가 그런 거창한 단어를 쓰나요? 조향은 그냥 감각에 의존하는 거 아닌가요?
5년 전처럼, 아니 소영이와 만나던 8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그냥 소영이가 좋아할 것 같은 향기를 적당히 골라오는 것뿐이면서.
당신한테 그런 주체적인 계산 같은 게 있긴 해요?”
상수의 표정이 순간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것은 상처받은 이의 표정이라기보다, 무언가 소중하게 간직해온 진실이 한순간에 난도질당했을 때의 허무함에 가까웠다.
상수의 눈빛이 텅 빈 채로 흔들렸지만, 그는 이번에도 반박하지 않았다.
그는 대신 가방에서 아주 낡은 시향지 뭉치를 꺼냈다.
혜연이 예상했던 은은한 꽃향기나 달콤한 바닐라 향이 아니었다.
상수가 내민 시향지에서 흘러나온 것은 갓 베어낸 축축한 흙의 냄새, 차갑게 식은 새벽의 금속성 공기,
그리고 아주 미세하게 타오르는 듯한 연기의 향이었다.
“이거… 한번 맡아보시겠습니까?”
상수가 시향지를 내밀었다.
혜연은 본능적으로 거부하려 했으나, 바람을 타고 날아온 그 낯선 향기가 폐부 깊숙이 박혔다.
순간, 혜연은 사고가 정지되는 기분을 느꼈다.
이것은 소영이 그토록 사랑하던 화사한 플로럴 계열이 아니었다.
이 공간의 퀴퀴한 먼지와 시멘트 냄새를 억지로 덮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거친 냄새들과 기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새로운 공간의 기억을 창조해내려는 듯한 차갑고도 정교한 향기였다.
“이건… 왜 이런 향을 만든 거죠? 전혀 대중적이지 않잖아요.”
“혜연 씨의 디자인이 너무 차가워서요.”
상수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그는 혜연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사람이 아니라, 공간이요.
혜연 씨가 설계한 이 완벽한 직선의 공간이, 마치 갈 곳을 잃고 홀로 서 있는 사람처럼 너무나 차갑게 식어 있어서요.
저는 그 차가움을 온기로 가리려는 게 아닙니다.
그 차가움이 외로움이 되지 않도록, 오히려 그 본질을 완성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혜연 씨의 디자인을 망치려는 게 아니라, 혜연 씨조차 외면했던 그 공간의 슬픔을 향기로 채우고 싶었습니다.”
혜연은 입을 뗄 수 없었다.
상수에게서 기대했던 건 소영의 그림자를 쫓는 찌질한 미련이나 무능함이었는데,
그는 지금 혜연이 가장 자부하던 '완벽한 디자인'의 이면—그 고독한 본질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혜연이 공들여 쌓아온 사회적 지위와 명예가 자신이라는 존재 때문에 난도질당하고 있었다.상수는 자신이 혜연의 곁에 머무는 한, 이 폭풍은 멈추지 않을 것임을 뼈저리게 깨달았다.사랑하기에 곁에 있고 싶었지만, 지금 그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의 '부재'였다.상수는 결심한 듯 차에 올라타 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혜연 씨... 나예요."안도와 피로가 뒤섞인, 그러나 끝내 울음을 참으려 애써 담담한 척하는 혜연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상수 씨... 나, 방금 팀장님 만났어요. 울산 지사로 가야 할지도 몰라요. 아니면 회사를 쉬거나...내가 공들여온 시간들이 다 가짜가 된 것 같아요.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비웃는 것 같아서... 너무 무서워요."상수는 눈을 감았다.수화기를 쥔 손이 하얗게 질리도록 힘을 주었다.당장이라도 달려가 그녀를 품에 안고 "당신 잘못이 아니야"라고 소리치고 싶었다.하지만 그가 달려가는 행위 자체가 또 다른 가십의 불씨가 될 것임을 상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혜연 씨, 진정해요. 박혜연이라는 사람이 쌓아온 10년은 그깟 글 몇 줄로 무너지는 거 아니에요.내가 알아요. 당신이 얼마나 치열하게 도면을 그리고, 현장을 지켰는지...내가 다 봤잖아요. 당신은 잘못한 게 없어요. 그러니까 너무 자책하지 말아요. 제발..."상수의 나직한 위로에 혜연은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그의 목소리 하나에 곤두섰던 신경이 잠시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며칠이 지났다.누군가에게는 계절의 변화를 감지할 만큼 무미건조한 시간이었겠지만, 혜연에게 그 시간은 1분 1초가 살점을 에이는 고난의 행군이었다.'박 과장'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10년의 성실함은 익명의 글 몇 줄에 신기루처럼 흩어졌다.사무실의 공기는 정체되어 있었고, 그녀의 등 뒤로 꽂히는 시선들은 이제 무관심을 가장한 예리한 칼날이 되어 혜연의 일상을 도려내고 있었다.혜연은 모니터 화면 속 도면의 선 하나를 긋는 것조차 버거웠다.누군가 내 모니터를 훔쳐보며 '불륜녀가 그린 도면'이라 비웃지는 않을까,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조차 가시 돋친 수군거림으로 들려 혜연은 자꾸만 어깨를 움츠렸다."박 과장, 잠깐 회의실로 오지."평소라면 "박 과장님, 커피 한잔할까요?"라며 너스레를 떨었을 김진우 팀장이었다.팀 내 분위기 메이커를 자처하며 코믹한 모습만 보여주던 그였지만, 오늘따라 그의 목소리는 물기 하나 없이 메말라 있었다.혜연은 떨리는 손으로 마우스를 놓았다."왜 그래? 팀장이 왜 저래?"옆자리 민지의 걱정스러운 속삭임에도 혜연은 대답하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민지의 눈동자에 어린 연민조차 지금의 혜연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무게였다.회의실의 육중한 문이 닫히자 숨 막히는 정적이 내려앉았다.공기청정기가 돌아가는 소리만이 기계적으로 울릴 뿐, 사람의 온기는 느껴지지 않았다.김 팀장은 창밖의 무채색 도심을 응시하고 있었다.담배를 피울 수도 없는 금연 빌딩의 폐쇄성이 그의 답답함을 부
"너... 정말 아니야? 네가 쓴 게 아니라고?""나 아니야! 정신 차려, 강상수! 네가 사랑하는 여자를 망치고 있는 게 누군지 똑똑히 보라고!"소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카페 문을 향해 걸어갔다.그러다 문득 멈춰 서서 상수를 돌아보았다.그녀의 마지막 일갈은 태양보다 더 뜨겁게 상수의 정수리를 내리쳤다."오빠야말로 잘 생각해. 지금 혜연이가 힘든 게 누구 때문인지. 나? 아니. 강상수, 바로 너야.오빠가 등장하기 전에 박혜연의 삶은 아주 평화로웠어. 파도 하나 없는 잔잔함뿐이었다고.그런 애가 왜 지금 폭풍우 속에서 휘청거릴까? 잘 생각해 봐. 그 애를 지옥으로 밀어 넣은 진짜 악마가 누군지."딸랑거리는 문소리와 함께 소영이 사라졌다.상수는 홀로 남겨진 테이블 위에서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소영이 남기고 간 말은 상수의 머릿속에서 거대한 해일이 되어 몰아쳤다.그는 조향사로서 늘 향기의 '발원지(Note)'를 찾는 훈련을 해왔다.어떤 향료가 전체의 균형을 깨트리는지, 어떤 불순물이 순수한 에센스를 변질시키는지 찾아내는 것이 그의 업이었다.하지만 지금, 혜연을 뒤덮은 이 악취 나는 비극의 발원지가 다름 아닌 자신이라는 사실이 비수처럼 꽂혔다.상수는 자신의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았다.사실 그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블루밍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서서히 생겨난 혜연에 대한 마음을 깨달았을 때, 그는 미친 듯이 도망쳤었다.혜연을 향한 자신의 사랑이 발각되는 순간,그
통유리창을 투과해 들어오는 정오의 빛은 피부를 따갑게 찌를 정도로 예리했다.점심시간의 막바지, 카페 안은 직장인들의 고조된 수다와 에스프레소 머신의 신경질적인 스팀 소리가 뒤섞여 소란스러웠으나,구석진 창가 자리만큼은 진공 상태에 놓인 듯 서늘한 정적이 감돌았다.테이블 위에는 한 모금도 줄지 않은 채 식어버린 아메리카노 두 잔이 놓여 있었다.컵 표면에 맺힌 물방울이 눈물처럼 흘러내려 하얀 테이블 위에 볼품없는 웅덩이를 만들었다.상수는 맞은편에 앉은 소영을 무겁게 응시했다.지난 토요일, 예식장에서 포식자처럼 군림하며 하객들의 시선을 지배하던 그녀는 이제 세련된 오피스룩을 입은 차가운 도시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조향사인 상수의 예민한 후각에 소영이 뿌린 진한 머스크 향수가 공격적으로 치고 들어왔다.그것은 누군가를 유혹하기 위한 잔향이 아니었다.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상대의 영역을 강압적으로 침범하려는 '무기'의 냄새였다.상수는 타들어 가는 목소리를 간신히 억누르며 먼저 입을 뗐다."소영아, 어디까지 할 거니? 네가 원하는 게 정말 이런 거야?"소영이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챙'하고 날카롭게 울렸다.그녀가 비스듬히 고개를 까딱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짙은 레드 립스틱이 발린 그녀의 입술이 경멸을 담아 비틀렸다."혜연이가 오빠보고 시키디? 가서 좀 말려달라고, 무섭다고 징징대기라도 한 거야? 그래서 점심시간에 여기까지 쪼르르 달려온 거냐고. 대단한 사랑이네, 정말.""그런 거 아니라는 거 네가
민지는 혜연의 굽은 등 위로 쏟아지는 동료들의 가시 돋친 시선들을 대신 맞고 있었다.탕비실에서 들려오는 낄낄거림, 메신저 알림음이 울릴 때마다 혜연의 쪽을 힐끗거리는 눈길들.민지의 마음은 갈가리 찢어졌다. 10년차 공간 인터리어 전문가로 버텨온 저 여자가,단 한 줄의 익명 글로 인해 평생 쌓아온 커리어마저 '유혹의 결과'로 치부되는 광경을 지켜보는 것은 고문이었다.'혜연아, 제발... 그렇게 숨 막히게 하지 마.'민지는 혜연의 파티션 너머로 비치는 그녀의 옆얼굴을 훔쳐보았다.혜연은 단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심지어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다.그녀는 마치 스스로를 마비시키려는 듯, 차가운 데이터의 바닷속으로 끝없이 잠영하고 있었다.그 처절한 몰두는 열정이 아니라,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점심시간이 되자 직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평소라면 활기찼을 공간이 순식간에 진공 상태처럼 변했다.혜연은 여전히 자리를 지켰다."박혜연. 밥 안 먹어? 점심시간이라고."가지 않고 버티던 민지가 결국 혜연의 의자를 강제로 돌려버렸다.혜연의 눈동자는 초점이 풀린 채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먹고 와, 민지야. 나 정말 입맛이 없어. 이거 오후 회의 전까지 다 봐야 해.""야! 박혜연!! 너 정말 이럴 거야? 죽고 싶어?"민지의 비명이 텅 빈 사무실 천장을 때리고 돌아왔다.민지는 혜연의 어깨를
지하철의 육중한 금속음이 멀어지고, 혜연은 텅 빈 회사 로비 한복판에 섰다.시계는 이미 9시 30분을 넘어서고 있었다.평소라면 인사고과를 걱정하며 사색이 되었을 시간이었지만, 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는 자신의 구두 소리를 들으며 혜연이 느낀 감정은 기묘하게도 '안도'였다.수백 명의 직원이 출근 카드를 찍기 위해 파도처럼 밀려드는 8시 50분의 그 숨 막히는 응시를 피할 수 있었다는 것.엘리베이터 안에서 어깨를 맞댄 채 누군가 등 뒤에서 "저 여자가 그 블라인드 주인공이야?"라고 수군거리는 환청을 듣지 않아도 된다는 것.늦어버린 시각이 오히려 혜연에게는 세상으로부터 허락받은 짧은 유배지처럼 느껴졌다.그녀는 엘리베이터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밤새 울어 퉁퉁 부은 눈가를 가리기 위해 평소보다 서너 배는 더 두껍게 덧바른 파운데이션이 조명 아래서 푸석하게 들떠 있었다.혜연은 마른침을 삼키며 빳빳하게 다려진 재킷 깃을 바로 세웠다.비틀거리는 영혼을 간신히 가둬둔 이 회색 정장은 오늘 그녀가 입을 수 있는 유일한 전투용 갑옷이었다.사무실 문을 여는 순간, 혜연은 마치 물속으로 잠수하는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평소라면 활기찼을 키보드 타건 소리가 그녀의 발소리에 맞춰 아주 미세하게 잦아들었다.그것은 완벽한 정적이 아니었다.오히려 평소보다 더 낮은 데시벨로 속삭이는 소리, 의자를 끄는 소리, 의미 없는 헛기침 소리가 뒤섞인 불쾌한 소음의 숲이었다.파티션 너머로 몇몇 고개가 솟아올랐다가, 혜연과 눈이 마주치기도 전에 약속이라도 한 듯 바닥으로 꺼졌다.&n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