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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개로 지워진 이름 #2

作者: 1727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10 14:36:26

​상수의 기억은 다시 아주 오래전, 낡은 아파트의 거실로 돌아갔다. 

초등학생 상수에게 그림은 유일한 숨구멍이었다. 

캔버스 위에 자유롭게 색을 칠할 때만큼은 아버지가 아닌 '나'로 존재할 수 있었다. 

어느 날, 군인 출신인 아버지가 예고 없이 집에 돌아왔다.

​"상수야, 그림 그리고 있니?"

​아버지는 늘 무표정했다. 그 표정은 상수에게 거대한 장벽이었다. 

상수는 그림을 그리다 말고 어깨를 움츠렸다.

"네!"

"운동은 안 하고?"

​아버지의 말에 다른 의견을 제시 하지 않고 상수는 붓을 놓았다. 

그것은 상수가 생각하는 아버지가 정해준 '올바른 소년'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아, 네. 운동 할게요."

"그래."

​아버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 무미건조한 ‘그래’라는 한마디는 상수에게 절대적인 명령이었다. 

중학생이 되어 진로 상담을 할 때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선택할 때도 상황은 같았다. 

아버지는 묻고, 상수는 ‘네’라고 답한다.

​"너는 뭐 하고 싶으니?"

"…잘 모르겠어요."

"이공계는 어때?"

"네!"

"그게 네 생각이니?"

​상수는 아버지의 눈을 피했다. 

아버지는 상수를 빤히 바라보며 조금 더 깊은 대답을 기다리는 듯했으나, 상수는 그 침묵조차 압박으로 받아들였다.

​"네!"

"그래."

​상수는 자신의 의지가 무엇인지조차 고민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원하는 ‘이공계’라는 틀 안에 자신을 끼워 맞추는 것이 상수에게는 곧 ‘가족의 평화’였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며 ‘네’라고 답하는 순간, 아버지의 굳은 표정이 미세하게 풀리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상수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이었다.

​대학 선택도, 전공도, 결국은 아버지의 ‘그래’ 한마디를 듣기 위한 반복된 연극이었다.

​"어느 대학 갈 거니?"

"…잘 모르겠어요."

"공대는 어때?"

"네, 공대 갈게요."

"그게 네가 원하는 거니?"

"네!"

​상수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게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인지조차 모른 채, 그저 아버지가 원하는 답을 내놓고 안도하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하지만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고 가버렸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아버지는 상수가 더 깊은 고민을 털어놓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사실은 저 미술을 하고 싶어요"라고 말해주길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수는 그 기회를 스스로 걷어찼다. 

아버지는 상수가 고집을 피우길 원했을지도 모르나, 상수는 아버지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자신의 의견을 지우개로 지워버렸다. 

아버지는 그저 무뚝뚝했을 뿐이었고, 상수는 그 무뚝뚝함 속에서 혼자만의 감옥을 짓고 있었다.

이별 직후. 상수는 어두운 방 침대에 홀로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암전된 방 안에서 그는 지난 8년, 그리고 그보다 더 길었던 아버지와의 시간을 복기했다.

​"그동안 나는 나를 잃고 살았어. 난 늘 그렇게 살아왔어.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소영이가 원하는 대로."

​상수는 손을 들어 천장을 향해 뻗어보았다. 허공을 휘젓는 손길이 애처로웠다.

​"소영이가 나쁜 사람은 아니었어. 아버지도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 

하지만 정작 내 삶에 나는 없었어. 그 사실이 이제야 너무 아픈 거야."

​상수는 억눌러왔던 울음을 터뜨렸다. 

아버지를 향해서도, 소영이를 향해서도 아닌, 방치해 두었던 ‘진짜 강상수’를 향한 눈물이었다.

​"이젠 지쳤어. 아니, 이젠… 이젠 나로 살고 싶어."

​하지만 그 결심은 너무 늦은 것이었을까. 

그는 다시 5년 뒤, 혜연이라는 또 다른 변수를 만났다. 

혜연은 소영과는 달랐다. 그녀는 상수에게 맞춰주지 않았다. 

그녀는 상수에게 ‘너의 생각’을 물었다. 

과거의 상수에게는 가장 쉬웠던 ‘네’라는 대답이, 혜연 앞에서는 왜 이렇게 어렵고 버거운 것일까. 

상수는 5년 전 이별 직후 느꼈던 그 해방감과 무력감 사이에서, 다시 한번 자신의 자리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재앙의 시작이었다. 

자신이 잃어버렸던 그 조각들을, 하필이면 소영의 가장 친한 친구인 혜연의 앞에서 찾아야만 하는, 지독하게도 아이러니한 운명. 

상수는 눈을 감았다. 

혜연의 날 선 목소리, 그녀의 직선적인 디자인, 그리고 그녀가 뿜어내던 그 서늘한 긴장감이 다시 떠올랐다. 

상수에게 혜연은 이제 단순히 ‘파트너’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가 지워버렸던, 그러나 지울 수 없었던 자신의 이름표를 다시 확인하게 만드는 거울이었다.

​"나는, 대체 누구로 살아야 하는 거지?"

​어둠 속에서 상수의 나지막한 독백이 공기 중에 흩어졌다. 

지우개로 지워진 자리에는 흉터만이 남았다. 

그 흉터를 혜연이 알아볼까 봐, 상수는 다시 한번 입술을 깨물었다. 

내일 있을 미팅, 그 지독하게 불편한 비즈니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상수는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누군가가 원하는 ‘수동적인 파트너’의 가면을 챙겨 썼다.

이제 정말, 강상수의 진짜 이야기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혜연을 향한, 아니 자기 자신을 향한 지독한 여정이. 내일의 해는 분명 다르게 떠오를 것이었다. 

재앙은 그렇게, 일상이라는 가면을 쓰고 조금씩 혜연과 상수 사이의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그 불편한 긴장감이, 상수가 처음으로 느껴보는 ‘살아있음’의 징후라는 것을, 그는 아직 깨닫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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