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작업실의 정오는 잔인할 정도로 고요했다.
천장의 높은 창틀 사이로 스며든 햇살은 먼지 섞인 공기를 투과하며 상수의 발등 위에 잘게 부서졌다.
그 빛은 따스함이 아니라, 마치 취조실의 차가운 조명처럼 상수의 비루한 현실을 낱낱이 파헤치고 있었다.
공기 중에는 미처 정리하지 못한 베르가모트와 샌들우드의 잔향이 떠다녔으나,
그것은 이제 우아한 향기가 아니라 죽어가는 짐승의 마지막 숨결처럼 비릿하게 느껴졌다.
상수는 벌써 한 시간째, 신호음조차 가지 않는 핸드폰을 손바닥이 하얗게 질리도록 쥐고 있었다.
화면은 꺼져 있었지만, 그 검은 유리 너머로 오전 내내 쏟아졌던 거절의 말들이 환청처럼 맴돌았다.
"강 작가님, 죄송합니다. 본사 지침이라 저희도 어쩔 수가 없네요. 도덕성 리스크가 있는 인물과는
그것은 '걱정마'라는 신호이자, 철저하게 계산된 연기였다.하지만 이내 팀장을 향해 돌아선 민지의 표정은 언제 그랬냐는 듯 서늘하고 건조하게 굳어버렸다.독설을 퍼붓고 화를 내던 평소의 민지가 아니었다.그 이중적인 표정 변화는 더 거대한 반격을 준비하는 노련한 사냥꾼의 묵직한 약속이었다.혜연은 멀어지는 민지의 뒷모습을 보며 참았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고립된 진공 상태의 사무실에서 민지가 남긴 온기는 혜연이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현실이었다.재현을 통해 들려온 혜연의 처참한 상황은 상수의 세계를 단숨에 잿더미로 만들었다.작업실 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던 아름답고 뜨거운 오후의 햇살은 더 이상 예술적 영감을 주는 축복이 아니었다.그것은 혜연의 등을 지지는 지옥의 불길이었고, 그녀의 자존심을 낱낱이 태워버리는 잔인한 고문 기구였다.상수는 작업대 위에 놓인 고가의 유리병들을 움켜쥐었다가 바닥에 내팽개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향기를 탐닉하며 보냈던 고결한 시간들이 모두 위선적인 연극처럼 느껴졌고,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지독한 모멸감이 차올랐다.그는 작업대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혜연을 향한 미안함과 자신을 향한 증오를 토해내고 싶었다.상수는 들끓는 분노를 삼켜내기 위해 거칠게 눈을 감았다.망막 위로 번지는 붉은 잔상들은 혜연이 지금 이 순간 견뎌내고 있을 모욕의 선명한 색채 같았다.조향사로서 향기를 탐닉하며 보냈던 평화로운 시간들이 이제는 구역질 나는 기만처럼 느껴졌다.자신이 고결한 향의 배합을 고민하며 정적의 사치를 누릴 때, 혜연은 비릿한 딱풀 냄새와 동료들의 멸시 섞인 발소리
사무실의 공기는 무거운 정적보다 한층 더 차갑고 예리해졌다.공식적인 인사 발령이나 투명한 징계 위원회는 없었다.하지만 혜연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김진우 팀장이 설계한 형벌은 육체적인 고통이 아니라, '존재의 지우기'라는 가장 잔인한 정신적 고립이라는 것을.서른세살, 10년 차 공간 인테리어 디자이너 박혜연.그녀는 공간의 동선을 짜고, 조명의 조도를 맞추며, 마감재 하나에도 자신만의 철학을 담아내던 부서의 에이스였다.그녀가 손을 댄 공간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이 담긴 예술이 되었다.하지만 지금 그녀의 책상 위에는 정교한 캐드(CAD) 도면이나 질감 넘치는 자재 샘플 대신,싸구려 딱풀과 가위, 그리고 먼지 낀 수백 장의 법인카드 영수증 뭉치가 흉물스럽게 놓여 있었다."박 과장, 바쁜 일 없으면 이것 좀 도와주지? 신입들이 하기엔 좀 꼼꼼함이 필요해서 말이야. 숫자가 하나라도 틀리면 골치 아프니까."김 팀장이 툭 던지고 간 것은 부서 전체의 지출결의서 증빙 작업이었다.10년 전, 사회 초년생 시절 코 끝에 단내가 나도록 하던 단순 노동.혜연은 멍하니 자신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현장의 거친 먼지를 묻히며 거침없이 자재를 고르고 도면을 그리던 그 당당한 손이,이제는 영수증 모서리에 풀칠이나 하며 종이 조각을 맞추고 있었다."팀장님, 저 이번에 들어가는 '아트센터 리모델링' 컨셉 회의... 제가 짠 초안이 있어서 공유드리고 싶습니다. 공간 효율성을 극대화한 동선이라...""박 과장,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돼?"
소영은 화면을 스크롤 할 때마다 자신의 심장 한쪽이 도려져 나가는 환각을 느꼈다.분명 혜연을 무너뜨렸는데, 왜 통쾌함은 느껴지지 않는 걸까.그때, 책상 위에서 진동이 요란하게 울렸다.소영의 신경을 날카롭게 긁으며 도착한 것은 고등학교 동창들의 단체 카톡방 메시지였다.평소에는 대답조차 뜸하던 이들이 마치 축제라도 열린 듯 쉴 새 없이 말들을 쏟아내고 있었다.[야, 너희 그 커뮤니티 글 봤어? 그년 실명만 안 나왔지 완전 걔잖아. 우리는 딱 보면 알지][봤지 봤지. 어머, 세상에... 평소에 그렇게 도도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뒷조사해보니까 집구석도 별거 없더만.][역시 나쁜 짓 하면 벌 받는다니까. 쌤통이다 진짜. 20년 친구 남친을 뺏어? 그것도 8년이나 사귄 사람을?][그러게, 남자를 잘 만나야지 그게 뭐 하는 짓이니? 소영아, 너 괜찮아? 우리가 다 속이 시원하다. 걔 이제 회사도 못 다니겠던데?][아니, 근데 우리 중에 저걸 올린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저런 글이 떡하니 올라갔데?][모르지. 사필귀정이야. 세상이 아무리 썩어빠져도 결국 다 업보로 돌아오는 거야.]액정 너머로 쏟아지는 동조는 소영의 목을 조르는 밧줄 같았다.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자판을 눌렀다.'그러게.'단 세 글자를 적었다가 다시 지웠다.'내 말이, 자업자득이지.'라고 덧붙이려다 손가락이 마비된 듯 멈췄다.친구들의 '쌤통이다'라는 말은 소영이 그토록 바
작업실의 정오는 잔인할 정도로 고요했다.천장의 높은 창틀 사이로 스며든 햇살은 먼지 섞인 공기를 투과하며 상수의 발등 위에 잘게 부서졌다.그 빛은 따스함이 아니라, 마치 취조실의 차가운 조명처럼 상수의 비루한 현실을 낱낱이 파헤치고 있었다.공기 중에는 미처 정리하지 못한 베르가모트와 샌들우드의 잔향이 떠다녔으나,그것은 이제 우아한 향기가 아니라 죽어가는 짐승의 마지막 숨결처럼 비릿하게 느껴졌다.상수는 벌써 한 시간째, 신호음조차 가지 않는 핸드폰을 손바닥이 하얗게 질리도록 쥐고 있었다.화면은 꺼져 있었지만, 그 검은 유리 너머로 오전 내내 쏟아졌던 거절의 말들이 환청처럼 맴돌았다."강 작가님, 죄송합니다. 본사 지침이라 저희도 어쩔 수가 없네요. 도덕성 리스크가 있는 인물과는 협업하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이미 제작된 샘플은 폐기해 주시고, 계약금 반환 건은 법무팀을 통해 연락드리겠습니다."사형 선고보다 정중하고, 칼날보다 예리한 거절.대기업 실직 후 인생의 밑바닥까지 내려갔던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건 조향사로서 보낸 지난 5년의 시간이었다.대기업의 부품으로 살아가던 시절, 그는 자신의 냄새를 잃어버린 무취의 인간이었다.그 무색무취한 삶을 견디지 못해 뛰어든 향기의 세계는 그에게 유일한 구원이었다.남들보다 늦게 시작했다는 열등감을 씻기 위해, 그는 남들이 잠든 새벽에도 수천 개의 향료 병들과 씨름하며 코끝이 마비될 때까지 향을 쫓았다.장미 향료 단 한 방울을 얻기 위해 수천 송이의 꽃잎이 짓눌려야 하듯, 상수의 지난 5년은 스스로의 영혼을 짓이겨
순식간에 사무실의 공기가 낯설게 변했다.익숙했던 복사기 돌아가는 소리, 공기청정기의 웅웅거림, 타 부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마치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멀고 먹먹하게 느껴졌다.혜연은 노트북 화면만 응시했다. 메일함은 여전히 비어 있고, 결재 창에는 확인해야 할 서류가 단 한 건도 없었다.'내가 없어도 이 회사는 아무 문제 없이 돌아가는구나. 10년의 시간이 고작 이 정도 무게였나.'그 자각은 혜연의 자존감을 바닥까지 끌어내렸다.상수의 품 안에서 느꼈던 온기는 이제 이 서늘한 진공 상태의 사무실에서 흔적조차 찾기 힘들었다.혜연은 아무것도 띄워져 있지 않은 하얀 모니터에 비친 자신의 창백한 얼굴을 보았다.그녀의 헌신이 단 한 통의 메일 누락으로 부정당하는 비참함 속에 혜연은 숨 쉬는 법조차 잊은 채 굳어 있었다.회의실 안에서 간간이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가 벽을 타고 전해질 때마다 혜연은 자신의 존재가 서서히 투명해지는 공포를 느꼈다.어제까지만 해도 전우처럼 함께 밤을 지새우던 동료들이, 이제는 벽 너머에서 자신을 도려낸 채 완벽한 세계를 구축하고 있었다.혜연은 마른침을 삼켰다.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지만, 탕비실로 갈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그곳에 가면 또 어떤 비릿한 속삭임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었기에.같은 시각, 상수의 작업실.두 사람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그 공간에 '띠링' 하는 도어락 소리가 울렸다.방문자는 혜연이 아니었다.상수의 어깨를 짓누르는 가장 비릿하고도 통속적인 현실, 건물주였다.
월요일 아침의 공기는 평소보다 날카로웠지만, 혜연은 지난밤 상수의 품 안에서 따뜻했던 기억을 등 뒤에 업고 사무실 문을 열었다.상수가 아침 일찍 집 앞까지 데려다주며 쥐여준 따뜻한 캔커피의 온기가 여전히 손바닥에 남아 있었다.차 안에서 그는 혜연의 차가운 손을 감싸 쥐며 속삭였다."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퇴근 시간에 맞춰 여기 있을게요. 그러니까 겁내지 마요."상수의 그 낮은 목소리는 혜연에게 세상에서 가장 견고한 방패였고, 벼랑 끝에서 붙잡은 유일한 동아줄이었다.혜연은 그 목소리를 부적처럼 되새기며 로비를 통과했다.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느껴지는 수군거림은 여전했다.탕비실 근처에서 혜연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 동료들, 대놓고 위아래를 훑으며 들으라는 듯 혀를 차는 타 부서 직원들의 시선.하지만 혜연은 평소보다 담담하게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소영에게 고개를 숙였던 그 비참한 밤, 혜연은 이미 세상의 모든 매를 맞을 각오를 끝냈기 때문이었다.그녀는 일부러 더 정갈하게 서류를 정리하고, 가방을 걸었다."어머, 박 과장님! 오늘 웬일이야? 얼굴에 막 광이 나네?"익숙하고 명랑한 목소리.김민지 과장이 커피 두 잔을 들고 다가와 혜연의 어깨를 툭 쳤다.민지는 주위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혜연의 책상 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라떼 한 잔을 내려놓았다.그러고는 혜연의 귓가에 입을 바짝 대고 장난스럽게 속삭였다."뭐야, 상수 씨가 주말에 보약이라도 해 먹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