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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Author: 밤풀잎
무용 순서를 전부 몇 번 훑고 나서 6시가 가까워지자 서택연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도착했어요.]

유하린은 탈의실로 가서 옷을 갈아입고 엘리베이터로 1층에 내려왔다.

연습실의 어린 무용수들이 커다란 원형 기둥 뒤에 숨어서 수줍은 얼굴로 입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키가 크고 몸이 늘씬한 진연호가 입구에 조용히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넓은 어깨에 좁은 허리, 정장 바지에 감싸인 긴 다리는 꽤나 매끈해 보였다.

담담하게 내리깐 시선과 느슨하지만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까지 고귀한 기품이 저절로 배어 나왔다.

예술센터의 아가씨들은 대부분 콧대가 높아서 보통 남자는 눈에 차지도 않았는데, 이번에는 잔뜩 들떠 있었다.

“너무 잘 생겼어. 그런데 누굴 기다리는 거지? 아무도 안 데려가면 내가 갈 거야.”

“나도 가고 싶은데 저 뒷모습 왠지 유하린 씨 남편 같지 않아?”

“됐어. 진짜 저렇게 잘생긴 남편이 있으면 어떻게 뒷모습 사진 한 장만 올리고 말겠어? 인터넷에서 퍼온 사진이 분명해.”

유하린은 문득 진연호가 직접 나와서 자신을 기다리는 건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는 기껏해야 차 안에서 기다렸었다.

사실 이런 사소한 일에 대해서 한 번도 원망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진연호가 데리러 오기만 하면, 매번 신이 나서 차에 올라 남자를 껴안고 매달렸었다.

유하린은 그 소리를 무시하고 진연호 곁으로 걸어갔다.

“진짜 유하린이잖아. 말도 안 돼.”

풍만하고 늘씬한 그 뒷모습이 유하린이라는 것을 다들 한눈에 알아보았다.

4년 전 유하린이 처음 예술센터에 왔을 때, 환하고 매혹적인 그 얼굴에 홀려 셀 수 없이 많은 남자 무용수가 몰래 연습실로 유하린을 보러 왔다.

그때의 유하린은 한여름 태양처럼 눈 부시고 뜨거웠다.

하지만 유하린은 결혼했다는 한마디를 툭 던졌고, 그걸로 모든 애매한 관심들을 끊어 버렸다.

다들 이런 절세미인이 젊은 나이에 시집을 갔으니 결혼 생활이 더없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다.

나중에야 서서히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남편은 한 번도 춤을 보러 온 적이 없었고 먼저 전화를 걸어온 적도 없었다는 것을.

게다가 회식에서 취했을 때조차 데리러 온 것은 친구였다.

그랬기에 돈 때문에 못생기고 키 작은 늙은 남자와 결혼했을 거라고 짐작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때 아이 하나가 나비를 쫓아 통로에서 나왔고 진지하게 집중한 모습이었다.

송지윤이 미소 띤 얼굴로 뒤를 따랐고,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진연호 곁으로 걸어갔다.

“벌써 도착했네.”

뒤에서 구경하던 무리가 순식간에 터졌다.

“유부남이잖아. 유하린 지금 뭐 하는 거야? 결혼했다면서 저렇게 들이대...”

“쯧, 결혼 생활이 불행한 여자는 너무 굶주렸다니까.”

“저쪽도 몰랐겠지. 본처가 애를 데리고 나올 줄은. 완전 아수라장이네. 싸우는 거 아니야?”

유하린은 송지윤이 예술관 안에서 걸어 나오는 모습을 봤다. 보아하니 총괄 디렉터가 재빨리 움직인 모양이었다.

이제는 뭐가 어떻게 됐든 간에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은 여기를 떠날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진연호가 직접 사람을 데리러 온 게 송지윤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자, 마음은 뭔가에 묶인 듯 답답하게 조여 왔다.

단전에서 둔한 통증이 한 번씩 느껴질 때마다 말을 꺼내는 것조차 껄끄러웠다.

“나는 택시 타고 본가로 갈게.”

곧 진연호는 유하린을 보았다.

차갑고 흰 피부가 운동으로 분홍빛을 띠고 있어서 평소보다 더 곱고 사랑스러웠다.

다른 점이 있다면 진연호를 바라보는 눈에 늘 담긴 애정은 사라지고 호수처럼 평온해졌다는 것이었다.

잠시 뒤 진연호의 얇은 입술이 열리더니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확실해?”

“응, 확실해.”

유하린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예전에는 다른 여자가 진연호에게 조금이라도 가까이 오기만 하면, 유하린은 참지 못하고 소유권을 선언했다.

어차피 지금은 이혼할 사이였기에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앞으로 각자 갈 길을 갈 텐데 어떤 여자와 붙어 있든 무슨 상관인가?

“확실하면 됐어.”

진연호는 속눈썹을 내리깔고 아무 파문 없는 얼굴로 몸을 돌려 떠났다.

유하린은 그 자리에 서서 휴대폰으로 택시를 불렀다.

사실 진씨 저택에 가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오재량의 일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기에 박서라를 위해서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유하린이 진씨 저택에 도착했을 때, 김송란의 곁에서 훈계를 듣고 있었다.

“나이도 적지 않고, 결혼도 4년이나 됐는데 아직 후계자 하나 없는 게 말이 되니?”

“하린이랑 계속 소식이 없으면, 네 작은아버지네 애들이 분명 큰소리를 낼 거다.”

진씨 집안은 형제도 많고 방계 친척들도 많아서 진연호와 같은 항렬만 수십 명이었다.

하지만 진연호처럼 서른이 되도록 슬하에 후계자가 하나도 없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에, 김송란은 늘 진연호를 재촉했다.

숨을 고르고 들어간 유하린은 웃으면서 김송란을 불렀다.

“하린아, 왜 연호랑 같이 안 왔어?”

말하면서 김송란은 진연호를 보았다.

“데리러 안 갔어? 네 성격은 정말 네 아버지랑 판박이구나. 나중에 너까지...”

여기까지 말하자 김송란은 입을 다물었고, 표정에는 근심이 가득 어려 있었다.

곧 진연호가 입을 열었다.

“식사하세요.”

그제야 김송란은 유하린을 끌고 옆방으로 가서 앉았다.

유하린은 곁눈으로 진연호가 돌아가서 김송란의 곁에 앉는 것을 보았다.

평소라면 분명 진연호 옆에 바싹 달라붙어서 앉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말없이 눈꺼풀을 내리깔고 못 본 척했다.

김송란은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낌새를 알아챘는지 가볍게 헛기침했다.

“뭐하러 내 옆에 앉아. 네 아내 옆으로 가. 내 옆자리는 우리 지유 자리야.”

진연호가 잠시 멈칫하더니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어디 앉든 똑같아요.”

그때 뒷마당에서 놀던 서지유가 뛰어 들어왔다.

“하린 이모!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어요!”

6살짜리 아이가 달려들자 유하린은 얼른 끌어안았다.

그리고 얼굴에는 진심 어린 웃음이 떠올랐다.

“지유야, 이모도 보고 싶었어.”

서씨 집안과 진씨 집안은 대대로 친분이 있었다.

그리고 김송란은 아이를 무척 좋아해서 자주 서지유를 데려다 놀았다.

서지유는 여자아이지만 원숭이같이 나무를 타고 담을 넘길 좋아했다.

그런 개구쟁이인 서지유는 유하린의 어린 시절과 많이 닮았기에 두 사람은 자연스레 가까워졌다.

하지만 진연호는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유하린도 진연호가 귀찮아할까 봐 서지유가 자신에게 매달리는 것을 별로 허락하지 않았다.

이제 거리낄 것이 없어진 유하린은 서지유를 자기 옆에 앉히려고 했다.

그런데 김송란이 서지유를 불렀다.

“지유야, 이리 와서 할머니 옆에 있어 줄래?”

그러고는 진연호를 한 번 더 노려보았다.

그제야 진연호는 일어나서 유하린 옆에 앉았다.

서지유는 진연호처럼 무뚝뚝한 사람을 무서워해서 김송란 쪽으로 달려갔다.

“왕할머니, 있잖아요. 우리 학교에 새 친구가 왔어요. 송이안이라고 하는데 엄청 똑똑해요.”

“선생님도 우리 학교에서 제일 똑똑하다고, 천재라고 칭찬했어요.”

유하린은 송이안이라는 이름에 순간 굳어졌다.

서지유가 다니는 곳은 A시 최고의 국제학교였다.

소수 엘리트 교육을 하는 곳으로, 아이들의 배경이 부유하거나 명예나 지위가 있는 집안이었고 1년 학비만 해도 수억 원이었다.

유하린은 그때 송이안에게 공립초등학교 한 곳을 마련해 주었을 뿐이었다.

근데 진연호가 송이안을 전학시킨 것이다.

이는 진연호가 송이안을 자신의 후계자로 키우려 한다는 뜻이었다.

유하린은 입술을 다물었고 속으로 생각했다.

‘진연호도 이혼을 확실히 정했나 보네. 벌써 아이를 키울 준비를 시작한 걸 보면.’

진씨 집안은 송이안을 무척 좋아할 것이었다.

얌전하고 철들고 타고난 재능이 뛰어나니까.

어차피 결국 이혼할 거라서, 유하린은 더 이상 진연호의 일에 마음을 쓰지 않기로 하고 김송란을 보며 오재량 교수의 일을 물었다.

그러자 김송란이 웃었다.

“걱정하지 마라. 이미 말해 뒀어. 태성이가 출장 다녀오면 오재량이랑 밥 먹으면서 얘기하겠다더라.”

“참, 이 보양탕은 내가 특별히 주방장한테 끓이라고 한 거야. 많이 마시고 몸 좀 챙기렴.”

“고마워요, 할머님.”

곧 유하린은 마음이 조금 놓였다.

그저 박서라 일만 생각하면서, 유하린은 도우미가 떠 준 보양탕을 천천히 마셨다.

“한 식구끼리 고맙긴 뭐가 고마워. 너무 말랐어. 많이 먹어야지.”

김송란은 진연호에게도 한 그릇 떠 주게 하고 일렀다.

“앞으로 하린이 자주 데리고 와서 밥 먹어. 너희 젊은 애들은 늘 밥을 제대로 안 먹어.”

진연호는 담담하게 속눈썹을 내리깐 채 숟가락으로 천천히 탕을 저었다. 나지막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할머니, 저 바빠요. 하린이도 자기 일이 있고...”

그러자 김송란이 갑자기 화를 냈다.

“네가 바쁜 거냐! 아니면 그 송지윤인지 뭔지 하는 애 때문이냐!”

“그때 네가 그 애 때문에 가법으로 채찍 백 대를 맞고 거의 산송장이나 다름없이 됐을 때, 내가 차마 볼 수가 없어서 걔랑 결혼하는 걸 허락했어!”

“그런데 걔는? 바로 돌아서서 다른 남자랑 결혼해 버렸잖니! 네가 걔랑 조금이라도 엮이면 내가 제일 먼저 반대할 거야!”

갑작스레 쏟아지는 정보들에 유하린은 잠시 멍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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