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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Author: 밤풀잎
유하린이 다가갔다.

“잠깐만.”

앞서 걷던 진연호가 고개를 돌렸다.

“후회돼?”

“4년 동안 잠자리를 해 줬으면 뭐라도 줘야지.”

유하린은 진연호처럼 태연하게 말하려 했지만, 그 침착함까지 흉내 내는 건 쉽지 않았다.

4년의 기억이 바늘처럼 촘촘하게 심장을 찌르자 유하린은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오재량 교수님이 우리 외할머니 수술하게 해 줘.”

진연호가 고요히 유하린을 응시했다.

“이혼으로 그걸 바꾸겠다고?”

“응. 교수님이 수술에 동의하는 걸 확인해야 이혼할 거야.”

“유하린, 우리 아버지가 교수님한테 절대 연락 안 할 거라고 확신하고, 그걸로 이혼 안 하려고 협박하는 거야?”

“내가 너랑 결혼한 뒤로 아버지랑 원수처럼 지내는 거 알잖아.”

“알아. 그러니 할머님께 전화해서 부탁드려. 할머님은 당신 엄청나게 예뻐하시니까 거절 안 하실 거잖아.”

유하린은 감정 없이 한 글자 한 글자 아주 또렷하게 말했다.

예전처럼 진연호에게 매달려 부드럽게 응석 부리던 말투는 사라지고 없었다.

진연호는 잠시 유하린을 바라보다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연결되자 진연호 할머니인 김송란의 목소리가 부드럽고 자애롭게 흘러나왔다.

[연호야, 웬일로 갑자기 전화를 했어? 나는 네 할아버지랑 서씨 집안의 꼬마랑 블록 놀이하고 있어.]

[애들은 정말 귀여워. 너랑 하린이는 언제쯤 아이를 가질 거니?]

김송란은 세 마디를 넘기지 못하고 아이 이야기로 돌아갔지만, 유하린과 진연호는 이런 상황이 아주 익숙했다.

예전의 유하린은 은근히 기대에 찬 눈으로 진연호를 바라보곤 했고, 남자는 담담하게 급할 것 없다고 답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들어도 못 들은 척하며 진연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이는 순리대로 하면 언젠가 생기겠죠.”

진연호는 담담하게 말했다.

“오늘 전화드린 건 다른 일 때문이에요. 하린이 외할머니께서 편찮으셔서 오재량 교수님께 수술을 부탁드려야 하는데 거절하셨어요.”

[그 일은 내가 말해 볼게. 오늘 저녁에 하린이랑 같이 와서 밥 먹어라.]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김송란의 말투는 이미 엄숙했다.

[너랑 하린이가 이혼한다고 들었는데, 사실은 아니지? 내가 말해 두지만, 적어도 지금은 안 돼. 그 많은 사람이 너를 지켜보고 있는데 괜히 일 만들지 마라.]

김송란의 말에 유하린은 가슴이 철렁했다.

‘지금 할머님이 진연호와 이혼하려는 걸 알면 오 교수님과의 다리를 놓아 주실까? 우리 외할머니는 어떻게 하지?’

수술은 3개월 뒤에야 할 수 있었다.

“알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랑 하린이 잘 지내고 있어요.”

진연호는 두 사람의 상황을 숨겼다.

곧 전화를 끊은 진연호는 유하린을 보았다.

“할머니가 이혼 얘기를 알고 계셔. 유하린, 넌 이 수단까지 다 계산해 둔 거야?”

유하린의 속눈썹이 떨리더니 곧 눈을 들어 진연호를 보았다.

소식을 흘린 게 유하린이라고 오해하면서도 진연호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래서 서두르지도 늦추지도 않았다.

오늘 이혼하든 내일 이혼하든 상관없다는 듯, 언제든 응해 주겠다는 듯했다.

진연호는 손목시계를 훑어보더니 차 쪽을 보았다.

아무래도 여기서 유하린과 더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을 것이었다.

“네 뜻대로 해. 수술이 확정될 때까지 기다리던가.”

긴 침묵 끝에 유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진연호는 잠시 유하린을 바라보았다.

“저녁 6시에 어디로 데리러 갈까?”

“연습실.”

유하린은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려 떠났다.

택시가 향한 곳은 연습실이 아니라 작은 개인 병원이었다.

유하린은 의사에게 모근이 붙은 머리카락 두 뭉치를 건넸다.

하나는 진연호의 침실에서 가져온 것이고, 하나는 송이안이 충격을 받아 바닥에서 뒹굴 때 떨어진 것이었다.

진씨 집안의 파워는 꽤 셌기에 진연호의 외도를 폭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것은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길이었으니까.

하지만 손에 증거를 하나쯤 쥐고 있으면 필요할 때 협박용으로는 쓸 수 있었다.

“5일에서 일주일 뒤에 연락을 드릴게요.”

사인을 마치고 유하린은 곧장 병원을 떠났다.

하지만 유하린은 몰랐다.

유하린이 떠난 뒤 의사는 정상적으로 검사를 보내지 않고 두 샘플을 응시하다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유하린 씨가 방금 유전자 검사할 샘플 두 개를 가져왔어요. 네.”

유하린은 강나윤의 집에도 들렀다.

진연호의 집에서 빼낸 짐은 전부 강나윤의 집에 두었기 때문이었다.

강나윤은 진연호의 입에 오르내리던 유하린의 못된 친구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정식 대회에서 만난 사이였다.

12살에 유하린은 국제 지능형 로봇 대회에 참가해 ‘HO’라는 이름으로 1등을 했고, 강나윤은 2등이었다.

모든 참가자 중에서 유하린은 나이가 가장 어렸지만 재능은 가장 뛰어났다.

대회가 끝난 뒤 스탠퍼드 교수가 손을 내밀었고, 곧바로 대학에 데려가 공부를 시킬 수 있다고 어필까지 했다.

그러나 유하린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때의 유하린은 집에서 멀리 떨어지고 싶기도 했지만, 진연호에게 더 가까이 있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상을 받고 나서, 유하린은 제일 먼저 그리고 오직 진연호에게만 알리고 싶었다.

하지만 뜻밖의 사고로 자신의 영광을 입에 올릴 수 없게 되었다.

그해 진연호의 어머니는 연구개발 팀을 이끌고 자율주행 프로젝트에 참여해서 직접 시험 주행에 나섰다.

그런데 수없이 검증을 거친 지능형 시스템이 갑자기 고장이 났다. 미친 듯 내달린 차는 결국 부서졌고 사람마저 죽었다.

그때 이후로 유하린은 다시는 진연호 앞에서 지능형 기계와 관련된 어떤 것도 입에 올리지 못했다.

문에 들어서자마자 강나윤이 유하린을 꽉 끌어안았다.

“축하해. 드디어 결혼이라는 무덤에서 나왔네.”

유하린은 다른 한 가지가 궁금해 견딜 수 없었다.

“교수님께 내 얘기 했어?”

강나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국내에 계셔. 팀과 함께 국내 프로젝트에 참여 중인데 국가급이라 자세한 건 말을 못 한다고 하셨어. 근데 네 이름을 듣자마자 엄청 흥분해서 연락처를 주셨어.”

유하린은 조금 들떴다.

“그럼 지금 내 작품을 보내 드려 볼게.”

강나윤이 유하린의 볼을 꼬집었다.

“교수님이 직접 밥 먹자고 하셨어. 만나서 얘기하자고.”

곧 유하린의 두 뺨이 붉어지더니 눈가가 조금 시큰해졌다.

“내가 이제 쓸모가 없어졌을 수도 있는데, 그건 걱정도 안 하신대?”

“쓸모없긴 뭐가 쓸모가 없어.”

강나윤은 혀를 차며 집 안에 빼곡히 쌓인 온갖 모양의 지능형 기계들을 보았다.

“여기 절반 넘게 네가 만든 거야. 그리고 내가 시장 조사도 해 봤는데 국내에 너보다 나은 사람은 없어.”

그 기계들을 보며 유하린은 자신감이 조금 생겼다.

다행히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지난 몇 년 동안 강나윤과 어울려 논다는 핑계로 계속 실력을 갈고 닦아왔다.

“그런데 그 무용인지 뭔지는 계속할 거야?”

강나윤이 고개를 저었다.

“그냥 그만둬. 남자 때문에 잘하지도 못하는 걸 배울 필요 없어.”

“마지막 무대 끝내고 정식으로 그만둘 거야.”

강나윤이 유하린을 바라보다 갑자기 웃었다.

“하린아, 너 정말 그 인간 포기했구나.”

과거 울고불고했던 것도 환하게 웃었던 것도 다 진연호 때문이었다.

이제 드디어 자신을 위해 살려는 것이다.

유하린은 갑자기 울고 싶어졌다.

사랑에 눈뜨던 나이에 유하린은 진연호를 100살까지 좋아하겠다는 다짐을 마당의 목련나무에 새겼다.

그러나 스물넷에 유하린은 더 이상 진연호를 좋아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괜찮아. 76년을 번 셈이야.’

교수님과 만날 시간을 정한 뒤 유하린은 화장을 고치고 문화예술센터로 갔다.

연습을 좀 더 할 생각이었다.

유하린은 주역 무용수라 혼자 연습해야 하는 동작이 많았기에 작은 연습실을 찾았다.

문을 밀고 들어가려고 하는데 총괄 디렉터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 공연 끝나면 유하린 씨는 내보내세요.”

그러자 안무감독이 조금 놀란 듯했다.

“왜 이렇게 갑자기요?”

“송지윤 씨가 돌아왔잖아요. 진짜가 돌아왔는데 대역이 왜 필요해요? 이미 송지윤 씨한테 연락하라고 했어요.”

안무감독이 머뭇거렸다.

“송지윤은 그때 교통사고로 한쪽 발을 못 쓰게 되지 않았어요? 어떻게 춤을 춰요?”

총괄 디렉터가 코웃음을 쳤다.

“그래도 거절을 당해도 우리가 당해야죠! 무용단 투자자가 진 대표님이잖아요. 진 대표님이 누굴 밀어주고 싶으면 그 사람을 밀어주는 거예요.”

큰 연습실로 돌아오니 시끌벅적했고 춤추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유하린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 멍하니 구석으로 가서 다리를 풀었다.

송지윤도 춤을 췄다.

진연호가 그때 유하린에게 춤이 어울린다고 한 것은 송지윤이 춤을 췄기 때문이었다.

진연호가 무용단에 투자했을 때, 유하린은 자신을 위해서인 줄 알고 기뻐 어쩔 줄 몰랐다.

진연호가 이런 투정 아닌 투정을 받아 주는 일은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 오랜 시간을 무용실에서 아침부터 밤까지 땀을 쏟으며 연습했다.

선생님이 다리를 눌러 아파서 눈물을 흘려도 진연호가 잘 어울린다는 말 한마디에 한 번도 포기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마저도 가짜였다.

이혼이라는 말을 속으로 몇 번 되새기던 유하린은, 교수님의 팀에 합류하는 걸 생각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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