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에이펙 본사의 최상층, 무거운 정적이 감도는 회장실.권 회장은 비서실장이 내민 보고서를 훑으며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입을 열었다.“그래서, 매일같이 별채를 들락거린다?”“본부장님께서 윤해인 씨의 주변을 자주 맴도시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딱히 데이트라고 부를 만한 정황은 없어서 굳이 보고드리지 않았는데…….”비서실장이 조심스럽게 뒷말을 이었다.“어제 퇴근길에, 자택 앞에서 두 분이 차를 타고 다시 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주택가 초입으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차가 잠시 멈췄을 때, 윤해인 씨가 먼저 키스를 시도하는 듯한 행동이 있었습니다만.”“……있었습니다만?”“본부장님께서 고개를 돌려 피하셨습니다.”그 말에 서늘했던 권 회장의 입가에 짙은 비웃음이 번졌다.“그럼 그렇지. 누구 아들인데.”권 회장은 서류를 책상 위로 툭 던지며 만족스러운 듯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윤해인에게 목을 매는 줄 알았더니, 역시나 제 아들은 선을 넘지 않고 있었다. 그저 가벼운 불장난에 불과하다는 확신이 섰다.“하지만 먼저 입술을 들이밀다니, 그 발칙한 행동은 몹시 거슬리는군. 윤해인 쪽은 어떤가? 그 주변에 다른 남자는 없고?”“이그니스 마케팅팀에 한태준이라는 팀장이 있습니다. 회사 내에서는 오히려 본부장님보다 그쪽과 붙어 있는 시간이 더 많습니다. 점심시간도 그렇고, 사적으로 편의점도 꽤 자주 동행하는 것으로 보입니다.”“하하.”권 회장의 입에서 기가 찬다는 듯 건조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역시 천한 핏줄은 못 속인다니까.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 딱 제 어미를 쏙 빼닮았어. 앞에서는 순진한 척하면서 뒤로는 사내새끼들한테 꼬리나 치고 다니는 꼴이.”한때 제 안방을 차지했던 김명희의 천박함을 떠올린 권 회장의 눈빛이 경멸로 물들었다. 그는 깍지 낀 손으로 턱을 괸 채 차갑게 중얼거렸다.“차라리 도윤이가 그 기집애의 실체를 빨리 아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어.”“실체 말씀이십니까?”“어미를 닮았으면 사내 품에서 구르는 것쯤이야
이그니스의 사제 목걸이 줄에 매달린 사원증이 더는 낯설지 않게 느껴지기까지, 딱 한 달이 걸렸다.그 4주의 시간 동안 많은 것이 변했다.해인은 더 이상 첫 출근 날처럼 로비에서 길을 잃거나 긴장으로 어깨를 굳히지 않았다. 팀원들의 농담에 자연스럽게 웃음을 섞어 대답할 줄 알게 되었고, 점심시간이면 태준이나 동료들과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기다리며 소소한 일상을 나누는 평범한 직장인이 되어 있었다.어린 시절 도윤과 헤어진 이후로 처음 맞이하는 온전한 일상이었다.아니, 어쩌면 홀로 어른이 된 이후 처음으로 누려보는 평온일지도 몰랐다. 그녀의 세상은 비로소 눈부시게 제 궤도를 찾아가고 있었다...퇴근길, 권 회장 저택의 높은 담벼락 아래를 걷던 해인의 곁으로 익숙한 검은 세단 한 대가 속도를 늦추며 다가왔다.발걸음을 멈춘 해인이 차창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매끄럽게 창문이 내려가며 핸들을 쥔 도윤의 얼굴이 드러났다.“어? 오빠.”피곤함이 묻어 있던 해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오빠도 지금 들어오는 길이야?”“응. 너도 이제 퇴근이야?”도윤이 핸들에 팔을 기댄 채 옅은 미소를 지으며 해인을 응시했다.“피곤하지 않으면, 바로 들어가지 말고 드라이브나 잠깐 할까 해서.”“드라이브? 좋아!”슬쩍 주변을 둘러보긴 했지만, 해인은 반가운 기색을 숨기지 않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조수석에 올라탔다.별채 안의 눈들을 피해 도망치듯 올라탄 차 안은 적막했지만, 에어컨의 시원한 공기와 도윤의 은은한 향취가 섞여 묘한 안도감을 주었다.차가 부드럽게 방향을 틀어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한적한 도로로 접어들 즈음, 기분이 좋아진 해인이 먼저 조용히 입을 열었다.“차 민영 씨는 여전해? 그 가드도 말이야.”해인의 물음에 도윤이 핸들을 꺾으며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응, 진짜 천년의 사랑인가 봐. 여전히 유난이야. 요즘 누구 때문에 더블 데이트 못한 거 빼면 아무 문제 없지.”“누구 때문에?”“누구겠어. 일하느라 주말에도 얼굴 보기 힘든 우리 신입 사원님
어둡고 고요한 차 안.도윤은 시동이 꺼진 캄캄한 운전석에 앉아, 건너편 고깃집의 통유리창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그렇게 숨죽인 채 밖에서 대기한 지 벌써 두 시간째였다.‘대체 여기까지 왜 쫓아온 거야.’핸들에 이마를 기댄 채, 자조적인 헛웃음을 흘렸다.[먼저 가, 오빠]라는 차가운 말을 들었을 때, 얌전히 차를 돌렸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차마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회식 장소로 향하는 일행의 뒤를 천천히 쫓아 기어코 이 어두운 골목에 닻을 내리고 말았다.‘술도 약한 녀석인데 회식 자리에서 취하기라도 하면 곤란하잖아.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밖에서 기다리는 건 당연한 일이야. 그게 보호자로서의 오빠든…… 애인이든 간에.’그 비겁하고도 절박한 합리화로 버티며 창밖을 보던 도윤의 눈매가 일순간 사납게 일그러졌다.통유리창 너머의 왁자지껄한 테이블.그 틈에 어느새 낯익은 인영이 껴들어 해인의 곁에 찰싹 붙어 있는 꼴이 보였기 때문이다.강서우였다.‘쟤가 어떻게 저기 있는 거지?’어이없는 의문도 잠시, 이내 서우가 이그니스의 브랜드 모델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그런데 아무리 모델이라지만, 무슨 회식까지 끼어. 자기가 무슨 상관이라고.’어처구니가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얄팍한 핑계만으로도 그녀의 세계에 너무나 쉽게 녹아드는 서우의 저 뻔뻔함이 미치도록 부러웠고 질투가 났다.‘나도 아까 같이 참석해도 되냐고 물어라도 볼 걸 그랬나…….’하지만 이내 쓰린 속을 달래며 다시금 이성적인 계산을 굴려 스스로를 다독였다.‘그래, 차라리 강서우가 끼어 있는 게 나아. 녀석이 저렇게 버티고 있으면, 적어도 그 팀장 새끼가 해인이한테 수작 부릴 틈은 없을 테니까.’방패막이로는 제격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그 안도는 오래가지 못했다.‘……그러다 강서우 저 미친놈이 개수작이라도 부리면?’동생이라는 가면을 쓰고 호시탐탐 해인의 주위를 맴돌던 영악한 눈빛이 떠오르자 다시 피가 식었다.‘아니야. 해인이도 분명하게 선을 그었었고, 그동
시끌벅적한 고깃집 안.신입사원 환영회 겸 회식의 열기가 무르익어갈 즈음이었다.해인의 맞은편에 앉아 고기를 굽던 태준이 다정하게 해인의 앞접시에 잘 익은 고기를 놓아주었다.“해인 씨, 첫날이라 긴장해서 점심도 제대로 못 먹었죠? 많이 먹어요.”“아, 감사합니다. 팀장님.”해인이 어색하게 웃으며 잔을 들려던 찰나였다.“어? 여기 자리 있네.”불쑥, 익숙하고도 나른한 목소리가 해인의 정수리 위로 떨어졌다.놀란 해인이 고개를 들기도 전에, 길고 늘씬한 팔이 뻗어와 해인의 손에 들려 있던 소주잔을 쏙 빼앗아 갔다.“우리 누나 술 약한데. 첫날부터 너무 달리게 하시는 거 아닙니까, 팀장님?”강서우였다.화려한 가죽 재킷을 걸친 모델의 등장에 왁자지껄하던 회식 자리가 일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서, 서우 씨가 여긴 어쩐 일로…….”태준이 당황하며 묻자, 서우는 아주 자연스럽게 해인의 옆 빈 의자를 당겨 앉으며 빙긋 웃었다.“아까 회의실에서 보셨잖아요. 우리 누나 취직했는데, 동생이 고기 한 점은 사 줘야죠.”“……누나?”태준의 눈이 커졌다.서우는 제 손에 든 소주잔을 단숨에 털어 넣으며 넉살 좋게 덧붙였다.“아, 놀라셨구나. 피는 안 섞였는데, 저한테는 우리 엄마보다 더 잘해주는 찐 누나거든요. 아까 회의실에서 말한 사적인 얘기도 그거였어요.”서우의 능청스러운 거짓말에 해인은 사레가 들려 쿨럭거렸다. 하지만 태준은 그제야 모든 의문이 풀렸다는 듯, 굳어 있던 미간을 풀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아……. 그런 줄도 모르고 저는 아까 두 분 분위기가 심상치 않길래 오해할 뻔했습니다.”“오해요? 에이, 무슨.”서우가 웃음을 터뜨리며 해인의 등을 토닥였다. 다정한 손길이었으나, 해인의 날개뼈 근처에 머무는 손바닥의 온기는 지나치게 느릿하고 집요했다.‘또 왜이래. 여기서 갑자기 급발진 하면 안되는데…….’하지만 해인의 우려와 달리 서우의 행동은 자연스러웠다.맞은편의 직원들과 웃으며 시시콜콜한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고, 새로 출시
임원들의 보고가 이어지는 동안에도 그의 손가락은 규칙적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초조함을 감추기 위한 유일한 움직임이었다.“……그럼 이 건은 본부장님 지시대로 추진하겠습니다.”“수고하셨습니다. 나가보세요.”도윤의 낮고 건조한 음성에 임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집무실을 빠져나갔다.문이 닫히고 넓은 공간에 완벽한 정적이 찾아오자, 도윤은 그제야 빈틈없이 매여 있던 넥타이를 거칠게 끌어내렸다.지난 3시간 동안 이어진 투자사 미팅과 오후 업무 내내, 그의 머릿속은 온통 통제되지 않는 활활 타는 불길로 가득했다.하지만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가는 한이 있어도, 겉으로는 누구보다 냉철하고 완벽하게 그룹의 톱니바퀴를 굴려내야만 했다.‘흠, 지금쯤이면 완전히 말라 죽어가고 있겠지.’도윤은 책상 서랍을 열어, 회의 직전 까맣게 전원을 꺼버렸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바닥에 닿았다.‘너도 나랑 연락 안 되면 얼마나 애타는지 이제 알았겠지?’스스로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질투이자 유치한 투정이었고, 제멋대로 울타리 밖을 나간 해인에게 내리는 작은 벌이었다.연락이 닿지 않는 시간 동안 그녀가 얼마나 사색이 되어 안절부절못했을지, 부재중 전화가 수십 통이나 찍혀 있을지.도윤은 슬쩍 기대하는 눈빛으로 전원 버튼을 길게 눌렀다.화면이 밝아지고 알림이 쏟아졌다. 하지만 상단 바에 찍힌 숫자는 그의 기대를 처참히 무너뜨렸다.[ 부재중 전화 (2) - 윤해인 ]겨우 두 통.도윤의 미간이 좁혀졌다.수십 번은 걸었을 거라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숫자였다. 불쾌한 예감과 함께 메시지 창을 열었다.[ 가방에 넣어두고 꺼내는 걸 깜빡했어. 첫날이라 정신이 없었나 봐. 전화 확인하면 메시지 남겨줘. ] - 오후 1:15“……하.”도윤의 입술 사이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정신이 없어?확인하면 메시지를 남겨달라고?전화를 하라는 것도 아니고?그것은 해인이 새 직장의 활기에 취해 자신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마치 잔소리
선글라스를 완전히 내린 서우의 입술이 비릿하면서도 장난스러운 호선을 그렸다.해인은 숨을 헉 들이켰다.화려한 모델의 껍데기를 쓰고 있지만, 저 얄미운 표정은 영락없이 권회장 집안의 막내 강서우 그 자체였다.“강서우, 네가 왜 여길…….”“쉿.”해인이 당황해서 말을 내뱉으려 하자, 서우가 재빠르게 검지를 제 입술에 가져다 대며 눈으로 경고를 보냈다. 그리고는 몸을 슥 일으켜 세우며, 언제 그랬냐는 듯 완벽한 비즈니스용 미소를 장착했다.“이 스케치, 아주 마음에 듭니다. 그립감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네요.”서우가 디자인팀 전체를 향해 여유롭게 선언했다.“이쪽…… 윤해인 씨라고 했나? 나랑 회의실에서 디테일 좀 맞추죠. 다른 분들은 이 스케치 라인으로 3D 모델링 다시 뽑아두시고.”“네? 아, 서, 서우 씨! 그건 담당 팀장인 저랑…….”태준이 당황하며 나섰지만, 서우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해인의 의자 손잡이를 툭 쳤다.“가죠, 윤해인 씨. 내 시그니처 향수병에 생명을 불어넣어 줄 시간이니까.”능청스러운 서우의 태도에 디자인팀 전체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특히 점심시간 내내 해인의 학력을 은근히 무시했던 박 대리의 입은 떡 벌어져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저 안하무인 인간이, 우리 팀 신입을 콕 집어서 데려간다고?‘수십 개의 시선이 쏟아지는 가운데, 해인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 쭈뼛쭈뼛 서우의 뒤를 따랐다...덜컥.회의실 문이 닫히고 블라인드가 내려지며 바깥의 시선이 완벽하게 차단되었다.밀폐된 공간에 단둘이 남겨지자마자, 서우는 언제 그랬냐는 듯 비즈니스용 미소를 싹 지워버렸다.그는 긴 다리를 뻗으며 소파에 오만하게 주저앉았다. 가끔 해인에게만 보여주는, 특유의 삐딱하고 건방진 얼굴이었다.“여기 너무한데? 무슨 인턴한테 벌써 그런 일을 맡겨. 망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참나.”서우의 입꼬리가 얄밉게 말려 올라갔다. 해인은 문가에 선 채 경계하는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나 생각보다 잘한다고 팀장
칠흑 같은 한강의 물결 위로 서울의 네온사인이 깨진 보석처럼 흩뿌려졌다.기부라는 숭고한 명분은 차갑게 식은 샴페인 기포 속에 녹아 사라지고, 한강의 밤바다 위에는 오직 서로의 계급을 확인하려는 은밀한 탐욕만이 번들거렸다.“표정 좀 풀어. 사람들이 우리 싸운 줄 알겠어.”채영이 도윤의 팔에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며 속삭였다.도윤은 대답 대신 정중하게 웃고 떠드는 사람들 너머, 아직 굳게 닫힌 연회장 입구를 응시했다. 시선은 고정되어 있었으나, 초점은 불안하게 흔들렸다.“곧 올 거야. 당신이 아주 깜짝 놀랄 모습으로.”채영의
정적은 독이었다.의식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순간, 도윤은 제 전신을 감싸고 있는 낯선 감각들에 마비될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팔 안에 가득 들어찬 말랑하고 가녀린 곡선, 콧끝을 집요하게 간질이는 보드라운 머리카락, 그리고 얇은 잠옷 너머로 여과 없이 전해지는 뜨거운 온기.하지만 곧 그것이 무엇인지 자각하자마자 , 도윤의 등골로 서늘한 소름이 돋아 올랐다.‘……!’제 품에서 고른 숨을 내뱉고 있는 건, 세상에서 유일하게 건드려서는 안 될 존재였다.심장이 늑골을 뚫고 나올 듯 요동쳤다. 다행히 해인은 깊은 잠에 빠진 듯 미
“엄마, 나 이 약혼 안 해. 못 하겠어.”찻잔을 매만지던 엄마의 손길이 멈췄다. 하지만 기대했던 걱정이나 당혹감 따위는 없었다. 엄마는 그저 안경 너머로 채영을 차갑게 훑었을 뿐이었다.“권도윤이 에이펙 후계자 자리에서 밀려나기라도 했니?”“그게 아니라…….”담담한 물음에 채영의 입술이 굳었다가 다시 움직였다.“그 인간, 나 사랑 안 해. 아니, 사랑 안 하는 건 상관없는데, 딴 여자가 있다고!”채영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하지만 엄마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그래서?”“그래서라니?”엄마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갑자기. 오빠는 그냥 오빠지.”겨우 내뱉은 목소리에서 의지와 상관없는 떨림이 느껴졌다.아니라고 딱 잘라 말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혀끝이 마비된 듯 굳어버렸다.조금 전 자신을 외면하고 돌아서던 도윤의 넓은 어깨와, 차갑게 식어있던 눈동자가 잔상처럼 스쳐 지나갔다.그건 서운함일까, 아니면 서우가 말한 그 지독한 감정의 편린일까.해인은 제 안의 금기된 상자가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한 번도 남자라는 프레임으로 가둬본 적 없는 도윤이, 서우의 질문 하나에 낯선 열기를 띠며 심장 속으로 침투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