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끝내자마자, 동건은 그 젊은 남자를 바닥에 넘어뜨리고 그대로 올라탔다.동건의 주먹은 멈추지 않았고, 감정은 이미 터질 대로 터져 있었다.수민은 강하게 밀쳐져 땅에 나동그라졌다.“아...!”몸을 일으키려던 찰나, 발목에서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삐었어...!’그녀는 움직일 수 없었다.“고동건! 미쳤어? 그만해! 경찰 부를 거야!!”그 말에, 동건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순간 굳은 남자의 어깨.하지만, 그다음 동건의 주먹은 더 세게 내려갔다.“멈춰!!”수민은 비명을 질렀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다행히 회사 건물 경비들이 다급히 뛰어나왔다.두 사람이 힘을 합쳐 동건을 가까스로 떼어냈다.숨을 거칠게 몰아쉬던 동건은, 경비들의 손을 뿌리치고 벌떡 일어났다.그리고 자신의 옷깃을 정리하며, 피범벅이 된 젊은 남자를 내려다봤다.“이번 일은 네가 배워야 할 교훈이야. 생긴 거 하나 믿고 아무 여자한테나 들이대지 마. 세상엔 네가 감당 못 할 사람도 있는 거야.” 그는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말에 날을 세웠다.“참고로, 조수민은 내 여자야. 또 건드렸다간 다친다. 아니, 다친 걸로 안 끝날 수도 있지.”경비 둘은 이게 진짜 고동건이라는 걸 똑똑히 실감했다.화려하고 잘생긴 겉모습 뒤에 숨겨진, 무서울 정도로 날 선 본성.지금까지는 ‘헌신’이 약한 척했던 게 아니라, 그저 원해서 했을 뿐이라는 걸. 동건은 조용히 수민에게 다가가, 말없이 부축하려 했다.하지만 수민은 그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고동건, 너 진짜... 제정신이야?”“타.”“됐어! 손대지 마! 네가 뭔데 남을 때려?! 네 뭐라고!”“입 닫아.”동거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져 있었지만, 그 안엔 무서운 침착함이 있었다. “넌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할 자격이 없어. 넌 날 너무 쉽게 생각해.”수민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차 문 열어. 내리고 싶어. 그리고... 우린 이제 끝이야!”“폭력적인 사람하고는 같이 못 지내. 넌 더 이상, 나한테 아무것
그 한마디에, 세 사람이 둘러앉은 테이블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주변의 시끄러운 음악, 웃음소리, 잔 부딪히는 소리가... 마치 음소거 된 것처럼 사라졌다.도겸의 머릿속엔 오직 하나의 문장만 맴돌았다.‘정은이... 남자 친구 생겼어.’‘남자 친구... 생겼어.’‘남자... 친구...’‘안 돼!! 그럴 리 없어. 그럴 리가...’선우는 속으로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X 됐다... 이거, 완전 끝장이다.’도겸은 그대로 동건의 옷깃을 거칠게 움켜잡았다.두 눈엔 핏발이 섰고, 목소리는 거의 짖듯이 갈라졌다.“방금 그 말... 다시 해봐.”동건은 팔을 털어내듯 도겸의 손을 뿌리쳤다.이어서 천천히 옷깃을 정리하며, 낮고 단단하게 말했다.“몇 번을 말해도 똑같아. 사실은 사실이니까.”“개소리하지 마!!”“도겸아, 인제 그만 좀 해. 언젠가 들을 얘기였잖아. 제발 쇼 좀 하지 말라고. 누구 감정을 잡으려고 그러냐?” “너희 헤어진 지 얼마나 됐더라? 설마, 소정은이 널 기다리기라도 해야 하는 거야? 한평생 혼자 살아야 만족할 거냐고!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나... 진짜 어이없네.” 그 말 끝에, 동건은 차 키를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리고 코웃음을 한 번 남긴 뒤, 그대로 문을 밀고 나가버렸다.쿵!문이 닫히는 소리에 맞춰, 도겸의 몸이 휘청거렸다.도겸은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그리고 가슴 어딘가가 세게 부딪힌 것처럼 아프고, 손끝과 발끝이 차가워졌다.그는 아무 말 없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도... 도겸이 형...”선우가 조심스럽게 불렀다.눈앞에 앉은 도겸은 사냥감을 잃은 맹수처럼, 발톱도, 송곳니도 빠진 채 상처투성이의 잔해만 남은 모습이었다.눈은 허공을 향했고, 입술은 바짝 말라붙어 있었다.몸은 축 늘어졌고, 기운이라곤 손톱만큼도 남지 않아 보였다.선우는 안 되겠다 싶어 주변 사람들을 재빨리 내보내고, 음악도 껐다.그리고 마지막으로 문을 닫았다.이제 이 방엔, 정적만이 가득했다.숨소리조차 조심스러운 정적.얼
평소에 동건은 낮에 자고, 오후엔 퇴근하는 수민을 데리러 가고, 밤엔 둘이 집에서... 정신 놓고 놀고...그러다 지치면 그대로 뻗어서 정오까지 다시 꿀잠.‘어, 생각해 보니 나름 바쁘긴 했네.’동건은 속으로 조용히 인정했다.“그... 요즘 일이 좀 많아서.”선우는 입꼬리를 씰룩였다.‘웃기시네, 그 말을 누가 믿냐?’그는 몇 번이나 봤다.백화점에서 수민의 옆에서 강아지처럼 따라다니는 동건을.쇼핑백 들고, 카드 결제하고, 눈빛으로 ‘내 여친 최고’ 보내는 거.‘동건 형... 그거야말로 풀타임 업무지.’선우는 마음속으로는 불만이 있었지만, 겉으로는 아무 말 없이 동건의 말을 받아들였다.술 몇 잔 들이켜고, 셋은 자연스럽게 포커판에 앉았다.도겸은 앉자마자 연속 3판 승.동건은 입에 담배를 물고, 나른한 표정으로 말했다.“야, 도겸이 요즘 손 좀 타네?”도겸은 담담하게 받았다.“뭐, 이 정도면 충분하지. 너희 정도는 이겨줘야지.”“그야 뭐, 현빈이가 없으니 이겨도 재미가 없지! 하하...”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도겸의 얼굴에서 웃음이 싹 사라졌다.‘어... 씨, 동건이 형, 왜 하필 지금 그 이름을 꺼내냐...’선우의 눈이 순간 오싹해졌다.도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현빈이가 있어도 내가 이겨.” 동건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그건 모를 일이지. 우리 넷이 칠 때, 현빈이 승률이 제일 높았잖아.” 도겸이 바로 반박했다.“그렇다고 내가 꼭 진 것도 아니잖아. 아, 꼴찌는 항상 너였지?”동건의 미소가 서서히 굳어졌다.‘좋게 넘어가려 했는데, 시비 거네?’“도겸아, 너 열받았다고 해서 괜히 우리한테 화풀이 하지 마. 진짜 화나면, 가서 본인한테 따지든가.”도겸은 씩 웃으며 받았다.“화가 난 사람이 나라고? 아닐걸? 마음속에 쌓인 게 있어서 괜히 트집부터 잡는 사람은 따로 있을걸?” “지금... 누굴 보고 트집이라는 거야?”동건이 차갑게 말했다.“누구긴, 너지.” 도겸은 태연하게 말했다.“아니 근데, 웃기지 않
“야, 씨X, 조수민?! 여보세요? 여보세요?!”동건의 욕이 터지기도 전에,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하, 이 느낌은 뭐냐? 방귀 나올 것 같아서 힘 딱 줬는데...’‘결국 못 뀌고 다시 들어간 느낌이야.’동건은 그대로 운전대에 주먹을 꽂았다.쿵!물론, 핸들은 멀쩡했고, 아픈 건 오히려 그의 손목.“X발!!”‘진짜, 이렇게 눈치 없는 여자는 처음 봐.’‘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봐줬는데!!’“오케이, 네 맘대로 해라. 야근하고 싶다 이거지? 좋아, 나도 네 감정에 더는 맞춰줄 생각 없다.”분노로 숨을 헐떡이던 그는, 바로 시동을 걸고 엑셀을 꾹 밟았다.중간에 전화가 걸려 왔다.전선우였다.[형, 드디어 전화를 받아주시네요! 여자 친구랑 알콩달콩하느라, 우리는 다 잊은 거예요?]동건의 미간이 확 좁혀졌다.“용건만 말해. 말 많은 건 여전하네.”[어우, 누가 형 심기를 건드렸나 봐요? 왜 이렇게 예민해요? 여친이랑 싸웠어요?]동건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어라, 진짜네요? 내가 딱 맞혔죠?]“별일 없으면 끊는다.”[아이, 알았어요. 장난 좀 친 것뿐이에요. 그나저나, 오늘 밤 ‘제로타임’ 3022호 룸. 사람들 다 모였고 분위기도 슬슬 올라오고 있어요. 형 올래요, 말래요?]동건은 살짝 눈썹을 추켜세우며 물었다.“누가 잡은 판인데?”[내가...]“20분 안에 간다.”...제로타임, 3022호 룸.문이 벌컥 열리더니, 동건이 무표정한 얼굴로 들어섰다.“어, 동건 형 왔어요! 안쪽으로 자리 좀 만들어줘요.”“형, 여기 앉아요! 술 한 잔 따라야죠!”선우는 원래 친구들이랑 포커를 치고 있었지만, 동건이 오자마자 카드를 내려놓고 자리를 옮겼다.“형, 근데 오늘 상태 좀 안 좋네요?”동건은 코웃음을 흘리며 말했다.“대체 어떤 눈으로 보고 그런 소릴 하는 거냐?” “양쪽 다요. 딱 보면 알죠. 눈빛이 분노로 가득해요.”“그럼 그냥 파버려. 봐도 틀리는 눈은 가질 필요도 없다.”“와!! 형, 오늘 왜 이렇게 날 서
“진짜 없어 보인다고? 그럼 오늘 우리 집에 가서... 천천히 확인해 보자.”재석이 슬쩍 웃으며 말했다.순간, 정은은 할 말을 잃었다.‘또 시작이다, 또...’‘이 사람 진짜... 말은 잘해.’두 사람이 실험실로 돌아오자, 멀리서부터 미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들려왔다.“찾았다! 찾았어! 세상에! 아멘! 부처님 감사합니다! 정은이 진짜 은인이다! 눈물 난다!”태민도 놀라며 다가왔다.“벌써 찾았어요?!”미진은 흥분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정은이가 데이터 다 정리해 줘서 어디가 문제인지 바로 보이더라고. 그다음은 그냥 퍼즐 맞추기였어. 너는?”“잠깐만요...”태민이 화면을 들여다보더니, 눈빛을 반짝이며 외쳤다.10초 후.“오! 나도 찾았어요!”미진은 쭉 기지개를 켰다.“됐어! 이제 곧 퇴근이다. 어라, 교수님이랑 정은이 돌아왔네?”그녀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정은아, 오늘 진짜 고마워. 너 없었으면 오늘 이 데이터랑 밤새 싸워야 했어.”“에이... 별거 아니에요. 잠깐 도운 거잖아요.”미진은 감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근데 진짜... 이 정도 데이터 분석 실력으로 우리 실험실에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예전에 정은이가 실험실 잠깐 빌릴 때만 해도... 사실 나, 좀 껄끄러웠어.’‘괜히 거리감도 들고, 경계심도 들었어. 근데... 사람이 이렇게 바뀌네.’‘결국, 실력은 말이 필요 없는 거야. 실력이 있으면, 세상이 먼저 문을 열어준다.’그 생각이 미진의 마음에 또렷하게 남았다....거리엔 가로등이 환히 켜졌고, 달빛도 창백하리만치 밝아져 왔다.정은과 재석은 손을 꼭 잡고, 실험동 측문을 나섰다.두 사람은 천천히 걸어 집으로 향했다.“오늘 저녁 챙겨준 것도 고마운데, 기술적인 난제까지 풀어주고, 지금은 또 이렇게 퇴근 동행까지... 우리 여자 친구, 진짜 완벽한 하루네.”‘여자 친구’라는 네 글자가 입에서 나오는 순간, 재석은 마치 구애에 성공한 공작새처럼 어깨를 으쓱했다.‘아, 지금이라도 꽁지깃
세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말문이 막힌다... 이런 식으로 끝나는 건가?’잠시 침묵이 흘렀고, 세영이 조용히 다시 입을 열었다.“마지막 질문 하나만 할게요. 내 이력서를 떨어뜨린 게... 정말 내가 안 맞아서였어요? 아니면, 그때 내가 줬던... 촛대 때문이었어요?” 재석은 차분히 대답했다.“정말로 안 맞아서요.”그러고는 잠시 망설이다가 덧붙였다.“구세영 씨의 전공 방향이 우리 실험실의 다른 구성원이랑 겹쳐요. 나는 새로운 시선, 새로운 방향을 가진 사람을 원해요.”“학력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연구 결과가 덜 나왔더라도... 방향만 맞으면, 실험실이 최적의 결과를 끌어내도록 도울 수 있어요.”“내가 원하는 건 ‘완성된 인재’가 아니라, ‘함께 만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에요.”세영은 그 말을 듣고 순간적으로 멍해졌다.‘이 사람... 진심이구나.’재석의 시선은 흔들림 없이 진지했고, 세영은 알 수 있었다. 이건 핑계도, 변명도 아니었다.‘그래... 적어도 거짓은 없었네.’얼마간의 침묵 끝에, 세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이해했어요.”재석은 고개를 살짝 숙인 뒤, 등을 돌려 걸어갔다.그러나 세영의 목소리가 그를 멈춰 세웠다.“잠깐만. 그때... 그 촛대, 받았다고 했죠? 초 안에 글씨 있는 것도 봤다면서... 그거 보고... 단 한 순간이라도... 잠깐이라도... 나란 사람이 떠오르긴 했어요? 아니면... 마음이 흔들렸던 적... 없어요?”재석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포장 상자에 구세영 씨의 이름이 있었어요. 그래서 구세영 씨가 보낸 거란 건 알았어요. 그뿐이에요.”즉, 자신의 세영의 얼굴도 기억나지 않았다는 뜻.“그리고 내 여자 친구를 제외하고는, 다른 여자한테 내 마음이 흔들린 적은... 없었어요.” 재석은 사실대로 말했다.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아주 떳떳했던 건 아니다. 정은의 말이 없었더라면, 촛불 속에 뭔가 숨겨져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도 못했을 테니까.그러니 잠깐이나마 찔리는 건 어쩔 수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