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봉은 고개를 돌려 아내를 바라봤다.강서원은 순간 멈칫했다.“나한테? 무슨 걸 물어본다는 거니?”재석은 더 이상 돌려 말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오늘, 보안실에 들렀어요. 8월 4일, 정원 쪽 CCTV 영상 확인하러요.”‘8월 4일’이라는 날짜까지만 해도 강서원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정원’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그녀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재석은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기억나시죠, 어머니?”강서원의 시선이 순간 흔들렸다.“너... 그걸...”“어머니, 아마 이렇게 생각하셨겠죠?‘벌써 두 달 전이면, CCTV 영상은 덮어쓰였을 텐데?’‘설마 저 애가 블러핑하는 건가?’강서원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설마, 진짜 봤다는 거야?’“맞아요. 대부분의 영상은 일정 주기 후 삭제되지만, 어머니, 저 누구 아들인지 아시잖아요. 제가 아니어도, 전문가 한 명만 붙이면 삭제된 파일 복구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에요.”“조재석, 지금 너... 나한테 따지고 있는 거니?”“네. 맞아요. 지금, 아주 분명히 따지고 있어요.”재석의 목소리는 한 단어, 한 단어 무게 있게 가슴을 눌러왔다.“전 어머니랑 아버지가 정은이 받아들였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제가 착각했더라고요. 아니, 애초에 좀 더 일찍 눈치채야 했어요.”‘정은은 예의 바르고, 어른들 앞에서 말 한마디 행동 하나 신중한 사람이야.’‘그런 정은이 갑자기 이유도 없이 자리를 떠나고...’‘그 후로 우리 집에 오길 꺼린다는 건... 분명히 뭔가 있었단 뜻이었지.’“사프란, 맞죠?”강서원의 표정이 굳었다.“감사하게도 우리 집 CCTV는 영상만 찍는 게 아니라, 음성도 다 녹음되거든요.”“어머니... 정말 이해가 안 돼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실 수가 있어요? 드라마를 너무 보신 거 아니에요? 드라마보다 더한 상상력을 현실에 갖다 쓰시다니...”“정은이가 임신 안 한 거, 맞아요. 근데 만약 했다면요? 그게 우리 둘의
조기봉의 생일잔치는 끝까지 화기애애하게 마무리되었다.손님들이 하나둘 자리를 떠나고, 그제야 진짜 주인공인 조기봉도 한숨 돌릴 수 있었다.“현우야, 현민아, 이리 와봐. 할아버지가 너희에게 줄 게 있어.”현우는 눈을 반짝이며 누구보다 빠르게 달려왔다.“뭔데요, 할아버지?”현민도 조용히 따라오며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봤다.조기봉은 미리 준비해 뒀던 고급스러운 선물 상자를 꺼냈다.“자, 하나씩. 원래는 식사 중에 주려고 했는데 아까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말이지.”“이게 뭐예요?”현우는 상자를 흔들어보다가, 묵직한 무게에 살짝 놀랐다.“생각보다 무거운데요?”현민은 이미 포장을 열고 있었다.“와! 황금 목걸이다! 그리고 이건... 음... 엄마, 이건 뭐예요?”리아가 조용히 상자를 받아 들고 확인했다.순간,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비취네요. 색이... 꽤 고급스러워 보여요.” ‘최상급 비취의 색감인가?’조기봉은 고개를 끄덕였다.“두 개 다 같은 원석에서 깎아낸 평안 부적이야. 우리 현우랑 현민이, 늘 평안하고 원하는 일 다 잘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준비했지.”리아는 특별한 반응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아이들도 거리낌 없이 기쁘게 선물을 받아들었다.‘비취가 아무리 귀해도, 손주한테 줄 선물인데.’‘괜히 거절하면 그게 더 우습지.’리아는 이미 오늘 이 자리에 왔고, 공식적인 자리에서 두 아이의 존재가 조씨 가문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모습을 조용히 받아들였다.‘인정했으면, 인정한 거다. 이런 건 받는 게 맞지.’아이들은 식사 후 새로 조성된 야외 놀이터로 뛰어나갔고, 해가 완전히 저물도록 놀았다.“엄마아아아! 조금만 더 놀면 안 돼요? 응? 30분만! 아, 아니면 20분만!”현우는 땀에 젖은 이마를 닦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졸랐다.리아는 팔짱을 낀 채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그 말, 30분 전에 똑같이 했던 거 기억나?”현우는 순간 움찔했다.‘들켰다...’“그럼... 10분만? 진짜 딱 10분만!”리아는 아이의 애
리아도 자연스럽게 받아 말했다.“아직은 생각 없어요. 나중에요.”짧고 명확했다.이후엔 다시 조용히 식사에 집중했다.단호하고 간결하게, 군더더기 없는 대답.더 이상의 질문이 필요 없을 정도로 깔끔했다.지언은 양손을 들어 올리며 어깨를 으쓱였다.말 그대로,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이지만 어딘가 흐뭇한 기색도 감춰지지 않았다.오히려 무슨 대단한 결정을 존중해주는 듯한 태도였다.정작 당황한 건 조기봉과 강서원 부부였다.조기봉은 슬그머니 아들에게 눈짓을 보냈다.‘야... 너 리아 씨랑 그렇게 된 거냐?’하지만 지언은 대꾸도 하지 않고, 그저 리아의 그릇에 음식을 덜어주며 말했다.“이거, 내가 제일 아끼는 요리사분이 만든 거야. 특히 이 메뉴는 잘해. 한 번 먹어봐.”조기봉은 속이 간질간질했다. 결국 견디다 못해 타이밍을 봐서 지언을 따로 불러냈다.“야, 너희 도대체 무슨 사이야? 둘이 사귀는 거 맞지?”“네. 아까 다 들으셨잖아요. 왜 자꾸 확인하세요?”“언제부터였는데? 내가 왜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었지?”지언이 짧게 쳐다봤다.“아버지... 그렇게 궁금해하니까 진짜 너무 티 나요. 소문내고 싶어서 안달 난 것 같다고요.”“아니, 이게 무슨 소문이야! 내가 너 걱정돼서, 순전히 부정 없는 부성애로 묻는 거잖아. 부모의 진심이 안 느껴져?”“느껴지면 제가 뭐... 감사 인사라도 해야 하나요?”“그럼. 나한테 감동 받았으면, 최소한 ‘감사합니다’ 정도는 해야지!”“한 달 됐어요.”“허어이! 역시 내 아들! 결단력 보소! 한 달 만에 애 엄마 마음 얻고, 애들까지 다 품다니! 이야, 드디어 한 건 제대로 했구먼!”조기봉은 감격스러운 듯 아들의 어깨를 두드렸다.지언은 말없이 눈을 굴렸다.“그리고 아버지, 앞으로 ‘애 엄마’라고 하지 말고, 계속 예전처럼 ‘리아 씨’라고 부르세요.”이미 자리에 돌아갔던 지언이 뒤늦게 다시 고개를 들이밀며 말했다.“알았어, 알았어!”조기봉은 눈을 찡긋하며 웃었다.“얼마나 사귀었다고 벌써 감싸네,
정은은 얼마든지 이유를 댈 수 있었다.연구실에 일이 많아서, 세미나가 있어서, 학교 일정이 꼬여서...그 어떤 핑계도 그럴듯했고, 재석 역시 그런 말엔 굳이 의심하거나 따지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정은은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정은은 재석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더 정확히는, 거짓말을 해야만 관계가 유지되는 상황을 원치 않았다.거짓으로 거절하는 사이가 되긴... 싫었다.그보단 솔직히 말하고 싶었다.돌려 말하지도, 숨기지도 않고.있는 그대로, 감정 그대로.가고 싶지 않다는 그 이유 하나면 충분했다.굳이 다른 설명이 필요하다면.“교수님. 우리, 그냥 연애 자체만으로 충분하지 않아요?”정은의 말에, 재석은 잠시 말을 잃었다.정은이 고개를 살짝 숙였을 때, 재석은 조용히 물었다.“그 ‘그냥’이라는 건... 어떤 의미야?”정은이 시선을 다시 들었다.“그냥... 지금 우리가 함께 있는 이 순간을 감사하며 즐기자는 뜻이에요. 가족이니, 주변 사람이니... 그런 것들까지 굳이 엮지 말고요.”재석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하지만 우리, 이미 서로 부모님도 다 만났잖아. 가족들께 인사도 드렸고.”정은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다 만났죠.”그래서 정은이 확실히 알게 됐다. 사람과 사람이 맞는다는 것과, 가족 간의 거리감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걸.정은은 말없이 시선을 피했다.재석은 잠시 생각하더니 조심스레 물었다.“우리 집 쪽이... 불편했어?”“엄마야? 아버지?”정은은 대답하지 않았다.하지만 그 침묵이 오히려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조율할 수 있지만...’‘가족과의 관계는... 그만큼 간단하지 않잖아.’정은은 다시 눈을 들었다.“우리가 함께하는 데에, 다른 사람은 개입하지 않았으면 해요.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럴 수 있어요?”재석은 그 눈빛을 바라보았다.기대와, 동시에 단호함이 함께 담긴 시선.“응.”잠시 후, 재석이 고개를 끄덕
모두 별다른 이견은 없었다.어디서, 뭘 먹을지는 당연히 민지의 픽이었다.“학교 근처에 진짜 맛있는 고깃집이 있어요! 방학 전에 모모랑 갔다 왔는데, 완전 대박! 고기도 신선하고, 거기만의 특제 소스가 진짜 미쳤어요. 딱 그 불향에...”“됐어 됐어, 묘사 안 해도 돼. 우린 네 미각 믿는다니까.”민지는 잠시 멈칫하더니, 눈이 동그래졌다.“내 혀가 그렇게 신뢰받는 레벨이야?”그리고 곧, 그 혀는 사실로 판명되었다.고깃집은 대학가에서도 잘 눈에 띄지 않는 골목 안에 숨어 있었다.입구도 좁고 허름했지만, 문 열기 전부터 고기 굽는 냄새가 후각을 찔렀다.안에 들어서자 ‘치이익’ 소리와 함께 고기가 구워지며 기름이 튀는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결국 넷이 배불리 먹고 나올 땐 이미 밤이 늦은 시간이었다.어두운 하늘 아래, 더운 바람이 얼굴을 스치며 식당 안의 열기를 털어내는 듯했다.진일은 실험실로 돌아가야 한다며 먼저 일어섰다.“지하철 타고 간다고요? 지금요?”민지가 놀란 표정으로 정은을 바라봤다.말보다 눈빛에 더 많은 질문이 담겨 있었다.정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응, 그 말 맞아.”“진일 선배 그렇게 알뜰해요? 솔직히... 돈 없는 사람은 아니잖아요?”“‘좋은 자원은 중요한 데 써야지.’ 진일 선배가 늘 하는 말이야.”‘완패다. 진짜 나는 그냥 철없고 무계획한 소비자일 뿐... 반성하자, 민지야...’“소정은!”그때 길 건너편, 차창이 스르륵 내려가며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재석이었다.창밖으로 손을 흔들던 그는, 곧 차에서 내려 정은을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정은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민지와 서준을 향해 말했다.“나 먼저 갈게. 너희도 조심히 들어가.”“넵! 정은 언니 잘 가요!”민지는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그렇게 재석이 정은의 어깨를 감싸며 차에 오르고, 차가 골목 저편으로 사라질 때까지 민지는 눈을 떼지 못했다.그리고 문득,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정은 언니랑 조 교수님... 진짜 너무 잘 어울려.
어쩌면 심정훈의 병문안이 조금은 효과가 있었을지도 모른다.혹은, 아들이 왜 그렇게까지 해서 해외로 떠났는지에 대해 조금은 더 편안하게 받아들였을지도.그날 이후, 이미윤은 갑작스럽게 치료에 협조하기 시작했다.애초에 마음의 병이 크긴 했지만, 병원도 좋고, 의료진도 훌륭했기에 일주일 만에 퇴원이 결정됐다.그런데 정작 심정훈은 병문안 온 다음 날 아침, 조용히 한국을 떠났다.퇴원 준비 중, 이미윤은 문득 물었다.“회장님은?”곁에 있던 집사가 눈을 깜빡이며 잠시 말을 멈췄다.“회장님께서는...”그 머뭇거림.딱 봐도 눈치 보이는 말투.뻔하지 않은가.이미윤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심정훈이 다시 이 땅 밟는 건, 내 장례식 때겠네?”집사의 얼굴이 순간 하얘졌다.“사, 사모님... 그런 말씀 마세요...!”하지만 이미윤은 뜻밖에 침착했다.“가라면 가라지. 다 가버려. 그래야 끝이지, 뭐.”‘다 끝나야지. 그래야 나도... 놓을 수 있어.’집사는 더는 아무 말도 못 했다. 그저 고개만 푹 숙였다....9월 중순, 한 해의 두 번째 학기가 다시 시작되었다.신입생들이 등록하러 오고, 복학생들도 하나둘 캠퍼스로 돌아오는 시기.정은은 이미 박사 과정 선발을 확정 지은 3년 차 석사과정을 밟는 대학원생이었다.더 이상 개강식 같은 행사에 끌려갈 필요는 없었다.행정실에 얼굴만 비추면 되는 정도.민지와 서준은 여름 내내 전국을 돌아다니며 신나게 놀다가 실험실에 복귀한 그날, 누가 봐도 제법 보기 좋게 햇볕에 그을려 있었다.민지는 다이어트에 완전히 성공했다. ‘마른’ 수준은 아니었지만, 딱 보기 좋게, 건강하고 균형 잡힌 몸매로 거듭났다.흔한 백옥 피부에 연약한 이미지가 아니라, 활력 있고 자신감 넘치는, 보기 드문 건강미.“정은 언니이이이...! 보고 싶었어요!!”문을 열자마자 튀어 들어온 작은 폭탄.다음 순간, 정은을 와락 끌어안겼다.정은은 순간 놀랐지만, 이내 웃으며 민지를 토닥였다.“나도 보고 싶었어. 둘 다.”새 학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