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버는 속으로 수없이 갈팡질팡 흔들렸다.그 와중에도 하린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조용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올리버는 더 이상 하린의 눈을 똑바로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내가 조금만 더 용기를 냈더라면...’‘하린이 이렇게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지 않았을 거야.‘진작 언니를 만나고, 진작 행복해졌을 텐데... 결국 다 내 탓이야.’이런 생각이 가슴을 짓누르자, 올리버는 차마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만약... 이것이 하린의 선택이라면,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묵묵히 지지하는 것뿐이었다.“그럼, 이거 받을게. 고마워. 그리고 내가... 미안해.”언제부턴가, 올리버의 눈가엔 눈물이 가득 차 있었다. 떨어지지 않게 고개를 숙이고, 연거푸 코끝을 훌쩍였다.“하린, 앞으로 가는 길이 늘 순탄하길 바랄게. 행복하게 살아야 해.”하린은 고요한 미소로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올리버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마지막으로, 안아봐도 돼?”“응.”올리버는 숨을 고르고, 천천히 두 팔을 내밀어 하린을 꼭 껴안았다. 가슴속에 뜨겁고도 쓸쓸한 감정이 한꺼번에 차올랐지만, 오래 붙잡지 않았다.곧 그는 조심스레 팔을 풀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그럼, 나 갈게. 푹 쉬어.”“응.”브로치를 꼭 움켜쥔 올리버는 그대로 달려 나가 버렸다....그 뒤로 이틀 동안, 올리버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전해산 교수가 전한 말에 따르면, 어느 깊은 밤, 올리버가 조용히 짐을 싸서 하린 옆 작은 방을 비우고, 예전처럼 무너져 가는 새 건물로 돌아가 버렸다고 했다.하린은 그런 변화를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그녀는 하루 중 대부분을 언니 리아와 함께 보내며, 놓쳤던 시간을 메우려는 듯, 끊임없이 곁을 맴돌았다.리아도 마찬가지였다.‘우리 하린이, 어쩜 이렇게 어린애 같지?’‘자꾸만 달라붙고, 투정도 부리고... 그래도 난 이런 하린이가 좋아.’리아 역시 마음 깊이 아쉬웠던 세월을 되찾으려는 듯, 동생
“아쉽게도, 그 사실을 깨닫기엔 너무 늦었지. 그래도 지금이라도 다시 만회할 기회가 남아 있어서 다행이야.”재석이 낮게 중얼거렸다.지언은 미간을 찌푸렸다.“그게 전부 네 잘못은 아니잖아. 정은 씨가 너랑 헤어진 게, 어머니 때문만은 아니겠지...”“그래도, 그게 정은이한테는 분명한 이유가 됐어. 전부는 아니더라도, 한 부분은 맞아.”재석의 눈빛은 결연했고, 그 눈빛을 본 순간 지언은 더 이상 재석을 말릴 수 없음을 깨달았다.아니, 굳이 말릴 마음도 없었다.‘나 역시 그랬으니까.’강서원이 리아를 곤란하게 만들려 했을 때, 지언의 첫 반응은 경고였다.그다음으로는 리아를 달래며 앞으로는 절대 어머니와 마주치게 두지 않겠다는 약속.재석이 내린 결심은, 결국 자신이 이미 택했던 길과 다르지 않았다.“네 말이 맞아.”지언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어머니가 여기까지 온 건 어머니 스스로 내린 선택의 결과야. 우리는 각자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충분히 했지.”그는 이어서 고개를 끄덕였다.“지금은 나랑 너 둘 다 호주에 있으니까, 결국 집에 자주 가는 사람은 지훈이더라. 다행히 아직 여자친구는 없으니까 그나마 버티는 거지.”“근데도 꽤 힘든 모양이야. 며칠 전에도 카톡 와서 언제 귀국하냐고 묻더라. 집안 분위기 못 견디겠다고.”한때는 집에 발길이 가장 뜸했던 게 조지훈이었다.하지만 강서원이 병을 얻은 뒤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지훈은 거의 매번 어머니의 부름에 불려 가야 했고, 이제는 그간 형제들에게 진 빚을 톡톡히 치르는 중이었다.재석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갔다.“지훈 형이 부모님 곁에 좀 더 있어 드리는 게 나쁜 건 아니니까.”지언도 덩달아 웃으며 받아쳤다.“나도 같은 생각이야.”형제는 말없이 묘한 합의를 보았다.한편, 국내에 있는 지훈은 시원한 사무실에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서류를 정리하다가, 별안간 연달아 세 번이나 재채기했다.“엥? 누가 내 이야기 하나?”그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다시 업무에
“네.”하린의 눈가가 금세 젖어 들었다. 단 한 순간도 망설이지 않았다.그제야 리아의 긴장이 풀렸다.“하린아, 일어났어? 건물 뒤꼍에 동백꽃이 활짝 피었더라, 내가...”올리버가 들뜬 목소리로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지만, 눈앞에 리아를 본 순간, 발걸음이 덜컥 멈췄다. 조금 전까지의 환한 미소가 순식간에 굳어버렸다.그의 머릿속에 지워지지 않는 좋지 않은 기억들이 물밀듯 스쳐 갔다.“돌아... 오셨네요.”목소리마저 갈라져 나왔다.리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웃는 얼굴로 올리버 쪽으로 다가갔다.“왜 그래? 말투 보니까, 마치 내가 반갑지 않은 것 같은데?”올리버는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그럴 리가요... 하린아, 내가 아침밥 가져올게!”끝까지 말하지도 못한 채, 그는 토끼보다 빠르게 도망치듯 뛰쳐나갔다.리아가 고개를 돌리자, 하린은 이미 침대에서 내려와 세수하고 있었다. 조금 전의 일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하린이가 세수를 마칠 즈음, 아침이 도착했다.문을 열자, 트레이를 들고 서 있는 건 올리버가 아니라, 하린 곁을 지키던 경호원이었다.“올리버는요? 아침 가지러 간 거 아니었어요?”“올리버가 저한테 맡겼습니다. 저더러 가져가라고 하더군요.”“그래요, 두고 가세요.”리아는 방 안에 들어와 하린과 함께 아침을 먹었다.식사가 끝나자,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동백꽃이 핀 언덕으로 향했다.멀찍이 높은 곳에 서 있던 올리버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 중얼거렸다.“분명 내가 제일 먼저 발견한 건데... 하린이랑 같이 보려고 했는데...”‘한발 늦었어. 결국 또 기회는 놓쳤네.’그의 눈빛에는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아침 식탁에는 지언과 재석, 두 형제가 마주 앉아 있었다.“정은 씨는? 왜 같이 안 먹어?”지언이 슬쩍 물었다.“정은이 바빠. 이 시간이면 벌써 일 시작했지.”재석이 태연하게 답했다.“정은 씨는 일하고, 넌? 상처 다 나으면 여기 계속 있을 이유
리아는 그때 그렇게 생각했다.‘조지언... 그냥 이렇게 버리기엔 아깝지.’“그럴 바엔 지언 씨 기분 좀 맞춰주고, 살짝 애교 좀 부려주면 되겠어.” 정은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이 말, 조 대표님이 직접 들으면 기뻐서 당장 날아오르겠어.’“에이, 자꾸 저한테만 묻지 말고요. 정은 씨랑 조 교수님은 어때요?”정은은 솔직하게 답했다.“저희는 다시 만나기로 했어요.”“저도 그럴 줄 알았다니까요!”리아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조 교수님, 이번에 온 거 보나 마나 작정하고 준비해 온 거잖아요. 전진욱 교수님한테 미리 들었어요.”“조 교수님이 전부터 밤낮없이 실험실에서 일만 했다고요. 하던 일 다 정리해 놓고 맥스 군도로 올 궁리였던 거죠.”정은의 손이 잠깐 멈췄다. 칼끝이 도마에 멈칫 박히며, 순간 놀란 기색이 스쳤다.리아는 신나게 말을 이어갔다.“앞으로 3년짜리 과제까지 싹 다 계획 세워 놓고, 연구원들 진로까지 알뜰히 챙겨 놨대요. 이게 무슨 뜻이겠어요?”정은은 고개를 들어 조심스럽게 물었다.“무슨 뜻인데요?”리아가 확신 가득한 표정으로 단언했다.“조 교수님, 여기에서 오래 버틸 각오로 온 거잖아요.”...밥상이 차려졌다.정은과 재석은 이미 조금 전에 식사했기에 젓가락질만 성의껏 거드는 정도였다. 사실상 손님을 위해 식탁을 지킨 셈이었다.반면 지언과 리아는 달랐다. 젓가락을 집자마자 고개도 안 들고 먹기 시작했다. 대화 따위는 뒷전이었고, 오직 먹는 데에만 집중했다. 마치 며칠 굶은 사람들 같았다.걸신들린 것 같다는 말은 과장된 표현이지만, 그렇다고 점잖게 ‘음식을 즐겼다’라고 하기엔 또 너무 잘 먹었다. 뭐...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아주 잘 먹는다는 표현이 맞았다.“맛있어요! 더 먹자! 정은 씨, 밥도 좀 더 줘요!”리아는 개의치 않고 쾌활하게 외쳤다.지언은 주변을 슬쩍 훑어본 뒤 조심스레 물었다.“저기... 정은 씨, 밥 더 있어요? 한 그릇 더 먹고 싶어서...”결국 두 사람이 젓가락을 내려놓았을 땐, 상 위
창밖은 이미 어둑어둑해지고 방 안은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지언과 재석 형제는 잠시 말없이 앉아 있었지만, 오래 가만히 있질 못하는 건 역시 재석이었다.그는 걸레로 식탁을 닦고, 밥그릇과 젓가락을 가지런히 놓으며 분주하게 움직였다.정은이 음식만 들고 나오면 곧바로 식사가 시작될 것이다.그 모습을 지언이 가만히 바라보다가, 불현듯 낯설게 느꼈다.‘이거... 완전히 남편 기다리며 부엌에서 분주히 챙기는 새댁 아니야?’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겠는가?물리학계에서 이름만 대도 알 만한 조재석 교수가, 늘 학문 앞에 군림하던 그 사람이,지금은 식탁 앞에서 걸레질에 밥상 세팅까지 하고 있다는 사실을.지언은 본능적으로 혀를 찼다.재석이 고개를 돌려 형을 힐끗 보더니, 마치 지언의 생각을 짐작했다는 듯 담담하게 말했다.“형, 어색해? 이거, 형도 곧 하게 될 일이야.”‘조재석, 이게 형 놀리기까지 하네?’지언은 속으로 기가 찼다.‘내가 식탁이랑 냄비 앞을 뱅뱅 돈다고?’‘난 한 대기업의 대표인데, 그것도 카리스마형 알지?’하지만 그 다음 재석의 한 마디가 그대로 비수를 꽂았다.“형, 변리아 선생님한테 밥 한 번 안 해줬어? 애들 분유 타본 적 없어?”지언이도 못 하겠다고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재석은 여전히 담담했다.“그러니까 형, 거기서 거기인데 괜히 나만 놀리지 마. 우리 형제끼리 뭐 하러 상처 주고받아.”그 말에 지언은 고개를 끄덕였다.‘일리 있네. 입 닫는 게 상책이야.’하지만 평화는 채 2분도 못 갔다.지언이 다시 입을 열었다.“근데, 너 정은 씨랑... 다시 시작한 거야?”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재석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바뀌었다. 입꼬리는 저절로 올라가고, 눈매는 활짝 휘어졌다.‘만약 감정이 색깔로 드러난다면, 지금 이 녀석 등 뒤에는 핑크빛 하트가 펑펑 터지고 있겠지.’지언은 그런 동생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응, 맞아.”지언이는 더 할 말이 없었다.‘이건 그냥 자기 애인밖에 모르는 바보 같은 달콤한 남친
일주일 동안 연락이 완전히 끊긴 뒤, 지언은 드디어 리아의 전화를 받았다.벨이 울리자마자 그는 숨을 고르고, 상대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먼저 쏟아냈다.“변리아 씨, 지금 아주 진지하게 말할게요. 나 요즘 당신이 뭘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요.”“왜 연락이 안 됐는지도 모르겠고요. 하지만 하나만은 분명히 알아둬야 해요.”지언의 목소리가 잠시 떨렸다.“난, 당신이 너무 걱정돼요.”그는 이어서 단호히 말했다.“계속 이렇게 숨기고, 얼버무리고, 회피만 한다면... 우리 관계를 다시 생각해야 할 것 같아요.”“믿음 없는 사랑은 오래 못 가니까, 서로 감추기만 하는 연인은 결국 끝까지 못 가요.”이 말은 갑자기 튀어나온 말이 아니었다.며칠을 곱씹고, 수없이 다듬은 뒤, 드디어 입 밖으로 꺼낸 것이었다. 마음속에서는 이미 모든 각오를 해 두었다.‘최악의 경우... 그냥 끝내는 거지.’그는 끝없는 기다림 속에서 조바심만 쌓이고, 의심이 꼬리를 물고, 결국 신뢰마저 사라지는 관계라면 차라리 잘라내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지언은 리아의 수많은 반응을 예상했다. 화를 낼 수도 있고, 침묵할 수도 있고, 심지어는 이별을 말할 수도 있다고.하지만, 리아의 대답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음...]짧게, 자기가 듣고 있다는 표시를 한 뒤.[지언 씨, 호주로 좀 올래요? 와서 나를 데리고 집에 가요. 그리고 겸사겸사 여행도 좀 하고... 우리 실험실의 사랑꾼 보스, 지언 씨의 정 많고 미련 많은 막냇동생도 한 번 보는 게 어때요?]지언이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대답이 이게 다야? 끝? 진짜 이걸로 끝이라고?’리아는 조금도 미안해하지 않고 자기 성격대로 말을 툭 던졌다.[지언 씨, 빨리 대답해요. 안 올 거면 말고요.]“그럼... 갈게요.”결정을 망설이는 건 곧 아내 될 사람을 무시하는 꼴이었다.그렇게, 지언은 결국 호주로 향했다.호주 공항에 발을 내디디자마자, 지언은 수환에게서 다급한 구조 메시지를 받았다.그는 현지 최대 조직폭력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