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난 그 진씨 가문의 자식보다 훨씬 낫지.’수민은 자신감 넘치며 허세를 떨고 있는 동건을 바라보더니 눈빛이 좀 이상했다.“정말 나와 합작하고 싶어?”“물론이지. 그 눈빛은 또 뭐야? 누굴 무시하는 거야?”수민은 동건을 위아래로 여러 번 훑어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고씨 가문은 J시의 8대 호족 중 하나로, 진씨 가문보다 훨씬 훌륭했다.‘방금 여자가 자신의 뺨을 때려도 반격하지 않았어. 정서가 안정되고 나름 매너가 있는 셈이지. 비록 바람둥이인 데다가 스캔들도 많지만, 난 진짜 연애하고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게다가... 바람둥이라면 나도 마찬가지야! 잘됐네! 서로 간섭할 필요가 없어! 클럽에서 부딪치면 같이 놀 수 있을지도 몰라.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남자가 깔끔하게 여자와 헤어진다는 거지.’‘좀 찌질하긴 하지만 이렇게 보면 절대로 집적대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아. 앞으로 우리 갈라져도 나한테 매달릴까 하는 걱정을 할 필요가 전혀 없어.’수민은 보면 볼수록 두 사람 아주 잘 맞다고 생각했고, 생각하면 할수록 동건이 마음에 들었다.“그래, 그럼 우리 들어가서 이야기할까?”동건은 가볍게 흥얼거렸다.“흥, 내가 두려워할 것 같아?”수민은 흐뭇하게 웃었다.“뭐해? 얼른 들어가지 않고.” 그녀는 동건의 넥타이를 잡아당겼다.“아!” 동건은 비틀거렸다.‘이 여자는 왜 툭하면 손을 쓰는 거야? 조금도 부드럽지가 않아.’...손자가 없어진 일로 서영숙은 이틀 동안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딱 그 이틀뿐이었다.서연희를 챙겨줄 필요가 없고, 심지어 앞으로 다시는 그녀를 볼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서영숙은 마음속으로 무척 기뻤다.그녀는 다시 예전처럼 모임에 나가며 한가로운 나날을 보냈다.이날, 다른 집안의 부인이 티파티를 준비했다.품질이 아주 좋은 차와 정교하고 맛있는 과자가 탁자에 놓여 있었다. 서영숙은 샤넬이 새로 출시한 기성복을 입은 채로 부드럽고 편안한 가죽 소파에 앉아 음악을 즐기면서 다른 부인들과 잡담을 나누었다.
“경비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빨리 이 사람들 좀 막아...”사람들이 몰려오자, 이순정은 즉시 목소리를 높여 소리쳤다.“서영숙 지금 어딨어? 나 지금 서영숙을 찾고 있으니까 당장 나오라고 해!”이순정과 아들 서철봉은 이틀전에 J시에 도착했다. 그들은 먼저 병원에 있는 연희를 보러 간 다음 병실에서 밤을 보냈다.이순정이 말했다.“호텔? 공짜로 호텔에서 지낼 수 있는 거야 뭐야? 이 병실은 크고 넓으니까 딱이네. 문제는 돈을 쓸 필요가 없잖아!”“하지만 침대가 하나밖에 없잖아, 엄마랑 철봉이는...”“에이, 우리 두 사람 같이 자면 되지.”점심을 다 먹은 철봉은 이를 쑤시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평소에 나도 줄곧 엄마랑 같이 잤단 말이야. 에어컨 한 대만 켜면 되니까 돈을 엄청 절약할 수 있어.”설득할 수가 없자, 이순정과 철봉은 병실에서 묵었다.병원 규정에 따르면, VIP 병실에는 간호 침대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환자의 가족은 확실히 이곳에서 지낼 수 있었다. 그래서 병원 쪽에서도 뭐라 하지 않았다.어차피 돈은 도겸 쪽에서 내는 것이니, 연희는 원하는 대로 병원에 누워있을 수 있었다. 그럼 가족이 여기서 지내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이순정은 병원에서 이틀 보냈다. 이미 소독수 냄새에 습관이 되었지만, 도겸 쪽의 사람이 찾아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심지어 가정부조차 오지 않았다.“허, 숨어 있으면 될 줄 알아? 절대로 그렇게 할 순 없지!”“엄마, 그럼 어떻게 하면 되는데?” 철봉은 주먹을 휘두르며 기대를 하고 있었다.“우리를 만나러 오지 않는 이상, 우리가 직접 찾아가면 되잖아!”그렇게 아침에 연희는 SNS를 통해 서영숙이 모임에 나갔다는 것을 알았다. 배경은 모 호텔의 룸이었는데, 전에 서영숙이 그녀를 데리고 한 번 간 적이 있었다.연희는 즉시 호텔 주소를 이순정에게 알려주었다.모자 두 사람은 1초도 지체하지 않고 바로 달려왔다.서영숙은 원래 먼 곳에 서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자신의 이름을 듣자,
바깥의 소란을 듣고, 룸에서 모임을 즐기고 있던 사모님들은 전부 나와서 구경을 했다.한 여자가 서영숙의 머리채를 꽉 붙잡으며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어머! 이게 무슨 일이래?!’사모님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재빨리 눈빛을 교환했다.이순정은 사람들이 모여서 구경하는 것을 보고 더욱 신이 났다.“다들 좀 보세요. 이 여자의 아들이 내 딸을 가지고 놀았어요. 내 딸을 임신시켰는데, 책임을 지고 싶지 않다며 바로 차버린 거예요! 내가 귀하게 키운 딸의 인생을 망쳐 놓고 뜻밖에도 우리를 피하고 다니다니! 지금 우리에게 돈이 없다고 무시하는 거야?”이순정은 말하면서 소매를 걷어붙였다.“다들 빨리 핸드폰으로 영상을 찍어서 인터넷에 올려요. 강씨 가문이 얼마나 더러운지, 서영숙은 또 얼마나 악독한지를. 그리고 그 찌질한 아들은 책임감도 없는 남자일 뿐이에요!”철봉은 호텔 직원을 막으면서 자기 어머니의 말에 따라 핸드폰을 꺼내 서영숙을 찍기 시작했다.동시에 욕설을 퍼부었다.“정말 싸네요! 강씨 가문은 사람도 아니에요. 우리 누나를 임신시켰으면서 되려 책임을 지려 하지 않다니! 우리가 가만히 있을 줄 알았어요? 그럴 리가 없죠!”서영숙은 그제야 반응하더니 황급히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또 자신을 잡아당기고 있는 이순정을 피해야 했기에 무척 낭패했다.“찍지 마! 네 딸이 일부러 임신한 건데, 내 아들이랑 무슨 상관이야? 난 그 아이에게 충분히 잘해 주었어. 스스로 이상한 짓을 꾸미다 아이가 없어진 거라고! 계속 이렇게 억지를 부린다면, 나, 난 바로 경찰에 신고할 거야!”이순정은 이 말을 듣고 두려워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허리를 짚으며 냉소를 지었다.“신고해. 마침 나도 경찰에게 물어보고 싶군. 도대체 누가 옳고 그른지 한번 보자고! 난 시골 사람이라서 자존심 따위를 버릴 수 있는데, 재벌 집 사모님인 당신은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네.”서영숙은 멈칫했다.이 말은 그녀의 마음을 찌른 셈이었다.“경고하는데, 오늘 이 일을 제대로 해결하지 않
[너 지금 어디야? 내가 그동안 전화를 그렇게 했는데 왜 하나도 받지 않은 거야?! 이제 네 친엄마까지 무시하는 거야?]서영숙은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호통을 쳤다.도겸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출장 때문에 바빠서 전화 받을 시간이 없었어요.”[지금 당장 돌아와! 당장! 돌아오지 않으면 앞으로 날 어머니라고 부르지도 마!]서영숙이 엄숙하게 말하자, 도겸도 더 이상 묻지 않고 바로 본가로 달려갔다.현관에 도착하자마자 꽃병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도겸은 멈칫하더니 집으로 들어갔다.“어머니, 저 왔어요.”서영숙은 그의 목소리를 듣고 바로 뛰쳐나왔다. 그리고 도겸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넌 왜 그렇게 사람 보는 눈도 없는 거야?! 서연희 그 천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여자의 가족들도 얼마나 건방지게 구는지. 특히 서연희의 엄마는 그야말로 무지막지한 촌놈과 다름없어!”“야비하고 천박해서 생각하기만 해도 징그럽다고! 난 서연희가 악독하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그런데 넌 기어코 그 여자를 원하다니. 심지어 임신까지 시켰어! 이제 그 여자가 유산했는데, 모든 죄를 우리에게...”“잠깐만요.” 도겸은 서영숙의 말을 끊었다.“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서연희가 유산을 했다고요?”“그래, 너 몰랐어?!”설령 서영숙이 자신의 아들이 나쁜 놈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이 순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도겸도 은근히 놀랐다. 그러나 그는 곧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그 아이는 원래 이 세상에 오지 말았어야 했어. 없어진 것도 다행이지.’서영숙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오늘 서연희의 엄마가 모임이 열린 호텔에 찾아가서 한바탕 소란을 피웠는데, 지금 아마 온 J시에 퍼졌을 거야. 만약 네 아버지에게 이 일이 알려지면...”강구염의 그 차가운 얼굴을 떠올리자, 서영숙은 참지 못하고 몸서리를 쳤다.부부로 30여 년을 함께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남편이 두려웠다.“어차피 난 더 이상 서연희와 관련된 사람들을 보고 싶지 않아. 네가 저지른
“기다리고 싶지 않으면 그냥 가면 되잖아. 누군 네가 보고 싶은 줄 알아?” 수민은 입을 삐죽거렸다.“이런 태도로 남에게 부탁하는 거야?”동건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참자, 내가 참자. 이 여자는 태권도를 배워서 괜히 화나게 한다면 손해를 보는 건 나 자신일 뿐이야.’“화내지 마.”동건은 바로 미소를 지었다.“급한 일이라고 말했는데, 네가 천천히 나오니까 나도 마음이 좀 급했을 뿐이야.”“용건이나 말해.” 수민은 동건의 차를 힐끗 쳐다보았다.“그 뭐지... 담배 있어?”“왜?”“하나 줘.”동건은 고개를 저으며 차 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수민은 받지 않고 오히려 팔을 안고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그래.” 동건은 고개를 끄덕였다.“내가 협력 상대를 찾은 게 아니라 아주 조상님을 모시고 있구나.”말하면서 고개를 숙이고 수민의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동건은 처음으로 여자에게 담뱃불을 붙여주었다. 그리고 담배를 이렇게 예쁘게 피우는 사람도 처음 봤다.“말해봐, 무슨 일이야?” 수민은 담배연기를 내뱉었다.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자, 점차 그녀의 얼굴을 가렸다.“우리 엄마가 내가 너와 연애하고 있다는 말을 어디서 들었는지, 꼭 널 데리고 집에 오라잖아. 방금 나한테 전화했는데, 널 데리고 가지 않으면 날 집에서 쫓아내겠다고 했어. 그때 우리 서로를 돕고 각자 노는 것은 간섭하지 않기로 약속했잖아, 기억하지?”“응.”수민은 고개를 끄덕였다.“난 이미 너를 도와 네 어머니를 대처했으니, 이제 네가 나를 도와줄 차례야.”“그래.” 수민은 흔쾌히 대답했다.“그냥 부모님을 만나러 가는 거잖아? 뭘 그렇게 두려워하는 거야. 내가 도와줄게.”“정말이야?”동건은 그다지 믿지 않았다.“하지만 아주 작은 요구가 있어.”“이거 봐,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일단 네 요구부터 말해 봐.”“네 차 말이야, 며칠 빌려줘.” 수민은 한 손으로 담배를 피우며 다른 한 손으로 보닛을 두드렸다.탕탕, 엄청 큰 소리가 들려왔다.동건은
“젠장!” 수민은 자신의 어깨에 걸쳐있는 손을 뿌리치며 얼른 똑바로 섰다.‘담배꽁초를 버려서 다행이야.’정은은 한참 후에야 겨우 입을 다물 수 있었다.“그, 수민아. 네 가방...”그녀는 정말 가방을 주러 왔을 뿐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이런 장면을 볼 줄이야?수민은 뜻밖에도 한 남자와 어깨동무를 하며 엄청 친밀해 보였다.‘그런데 이 남자의 뒷모습이 왜 그렇게 낯이 익지?’두 사람이 돌아서는 순간, 정은은 더욱 놀랐다. ‘고동건?! 그래서... 이 사람이 바로 수민이 말한 협력 상대인가?’수민은 앞으로 다가가서 정은의 손에 있는 가방을 받았다.“고마워, 정은아! 한밤중에 나와서 가방을 가져다주다니, 이제 빨리 돌아가. 너무 늦었으니 안전하지 않아. 난 여기서 네가 위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게. 도착하면 베란다에서 손 흔들어. 그럼 나도 안심하고 갈 수 있어.”“응.”정은은 몸을 돌려 집으로 돌아갔다.그녀는 수민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보기엔 만만하고 단순하지만, 실제로는 다 자신의 속셈이 있었다.그래서 정은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친구로서 가끔 침묵을 지키는 것이 바로 가장 큰 존중이었다.수민은 약속한 대로 정말 제자리에 서 있었다. 정은이 베란다에서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것을 보고서야 안심하고 떠났다.“아니... 내 차를 몰고 갔으니 날 태워줘야 하는 거 아니야?!”동건이 쫓아갔다.“방향이 다른데 어떻게 태워주라는 거야?”동건은 말을 하지 않았다.“그냥 택시 타. 돈이 많이 드는 것도 아닌데.”수민은 진심으로 제안했다.말하는 동시에 그녀는 액셀러레이터를 세게 밟았고, 속으로 카운트다운을 센 순간, 차는 화살처럼 쏜살같이 앞으로 달려갔다.남자의 목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조수민, 너 차 다 수리됐잖아?! 왜 내 차를 빌리는 건데?! 좀 살살해, 새로 산 거라서 긁히게 하지 말고. 나도 아깝단 말이야.”그러나 동건이 고통을 참으며 빌려준 차는 다음날 도심에 나타났다. 그는 수민이
이튿날 정은은 아침 일찍 조깅을 하러 나갔다.한가해진 후, 그녀는 다시 조깅하기 시작했다. 매번 조깅을 마치면 온몸에 땀을 흘렸는데, 집에 가서 샤워를 하면 하루 종일 무척 정신이 맑았다.“좋은 아침이에요, 선배님.”“응.”재석은 이미 달리기를 마치고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정은을 보자, 그는 다시 방향을 바꾸었다.“가자, 내가 같이 달려줄게.”“실험실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새 과제는 전 교수가 책임지고 있어서. 난 요즘 그다지 바쁘지 않아.”“그럼 전 교수님도 수고가 많으시네요.”정은이 농담을 했다.“원망을 하고 싶어도 할 건 해야지.”그는 정색했다.만약 진욱이 이 말을 들었다면 아예 미쳐버릴 것이다.두 사람은 공원을 따라 두 바퀴 돌았는데, 정은은 점점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재석은 이 상황을 보고 입을 열었다.“호흡을 조절하고, 달리는 리듬에 주의를 돌려. 날 따라해 봐. 숨 들이쉬고, 내뱉어.”정은은 따라했는데 정말 효과가 있었다.“많이 좋아졌어요!”“계속 달릴 거야?”“오늘은 충분해요.”“좋아.”모처럼 만난 두 사람은 아침을 먹은 다음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투고된 논문에 답장은 없었어?”정은은 고개를 저었다.“아직이에요.”“그것도 정상이야. 외국의 학과 잡지의 원고 심사 절차는 국내와 달리 아주 복잡해. 권위 있는 잡지라면 시간이 더 오래 걸릴 거고.”논문을 언급하자, 정은도 기세를 몰아 고마움을 표시했다.“선배님, 실험실을 빌려줘서 정말 고마워요. 그렇지 않았다면 난 이 세 편의 논문을 완성하지 못했을 거예요. 임대료를 준다면, 선배님은 절대로 받지 않겠죠? 물론 이렇게 보답하는 것도 너무 촌스러운 것 같아요.”“하지만 아무것도 보답하지 않으면, 또 마음속으로 늘 미안한 느낌이 들어서요. 그래서 이리저리 고민하다가 내린 결정인데, 선배님에게 밥 사주는 건 어때요?”재석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누군가 한턱 내는 건 정말 좋은 일이지.”“그럼 뭐 먹을래요? 내가...” 정은
지금의 정은은 무척 태연했다.금방 헤어졌을 때처럼 걸핏하면 도겸을 떠올리며 쉽게 감정이 흔들리지 않았다.시간은 좋은 약이었다. 아무리 깊은 상처라도 치유할 수 있었으니까.지금의 정은은 벌써 감정을 내려놓았다.그리고 한때 이 남자가 자신에게 준 상처도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희석되어 결국 잊혀졌다.“무슨 일로 찾아온 거죠?” 정은이 물었다.“앉아서 얘기하면 안 돼?”“우리 사이에 무슨 할 말이 더 남은 거죠?”“정은아...”“강 대표님, 내 이름을 부를 수 있지만, 그렇게 다정하게 부르지 마세요. 우린 그렇게 친한 사이가 아니니까.”도겸은 좌절감을 느꼈다.그리고 그는 재석을 바라보았다. 눈치가 조금 있는 사람이라면 이럴 때 자리를 비켜줬을 것이다.그러나 재석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고, 그가 눈짓을 해도 모르는 척했다.도겸이 전에 미친 짓을 너무 많이 했기에 정은은 그와 단둘이 지내고 싶지 않았다.“별일 없으면 우리 먼저 갈게요.” 그녀는 재석을 바라보고 재석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우리? 그럼 난 뭐야?” 도겸은 이를 악물며 눈은 점점 붉어졌다.포악한 기색이 용솟음쳤지만 그는 곧 이런 감정을 억눌렀다.도겸은 말투를 누그러뜨리더니 정은의 두 눈을 주시했다.“내가 온 것은 너에게 그날 너의 '축하'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야.”‘아빠가 된 날 축하한다고? 허...’정은은 눈살을 찌푸리며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너...”“날 용서하지 않는다면, 난 평생 아빠가 되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내 아이의 엄마는 반드시 너여야만 하니까.”정은과 재석은 모두 말문이 막혔다.‘이게 말이야 방귀야?! 진짜 징그러워서 못 들어주겠네!’“그냥 병원에 가보세요.”도겸은 영문을 몰랐다.“머리에 문제가 있는 것 같으니 일찍 치료해야죠.”말을 마치자, 정은은 재석에게 빨리 가자고 눈짓했다.그녀는 1초도 도겸과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빌딩 안에 들어서서야 정은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미안해요, 선배님, 그
아침 일찍, 정은은 알람도 없이 자연스럽게 눈을 떴다. 몸이 먼저 하루를 시작하려는 듯 움직였다. 그녀는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고, 간단히 머리를 정리했다.오늘 오전 수업은 조금 늦게 있어서, 평소와 달리 부엌부터 들렀다. 전날 밤부터 저온 조리기에 찬물로 불려둔 죽이 잘 끓고 있는지 확인하려고 뚜껑을 여는 순간, 뜨겁게 올라오는 김이 정은의 얼굴을 감쌌다. 쌀과 잡곡이 어우러진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정은은 숟가락으로 조심스레 한 입 떠먹어봤다. ‘음... 달지도 않고, 너무 퍼지지도 않았어. 딱 좋아.’ 이어서 전원을 끄고, 불도 내렸다. 그리고 집에 밀가루가 조금 남아 있었기에, 이번엔 자기만의 전병을 해보기로 했다. 정은은 먼저 매콤한 양념장을 만들었다. 양파랑 마늘은 잘게 다지고, 된장에 고추장, 그리고 약간의 물을 넣어 자글자글 볶았다. 거기에 설탕 조금과 굴 소스, 그리고 향신료를 살짝 넣어 풍미를 더했다. 양념장은 따로 식힌 정은이 밀가루 봉지를 꺼냈다. 약 500그램을 큰 그릇에 덜고, 소금을 약간 넣어 섞은 후, 젓가락으로 가운데를 십자로 그어 가르듯 나누었다. 한쪽엔 찬물, 다른 쪽엔 끓는 물을 부어가며 각각 섞어줬다. ‘반죽이 식어도 딱딱해지지 않는 비결. 할머니가 알려준 방식이지.’ 섞은 반죽은 5분 정도 숙성시킨 후, 손으로 부드럽게 치댔다.반죽은 금세 매끈하고 끈적이지 않게 변했다. 15분 정도 덮어두고 반죽을 숙성시키는 사이, 정은은 기름장도 따로 만들어 놓았다. 숙성된 반죽은 전기 팬 크기에 맞게 밀대로 펴고, 표면에 기름장을 바른 후, 피자처럼 8조각으로 칼집을 냈다. 바깥에서 안쪽으로 접어가며 둥글게 뭉친 후, 5분간 더 숙성. 그걸 다시 눌러 납작하게 만들었고, 한 번 더 밀대로 펴줬다. 이제 팬 위에 올릴 차례. 양면이 노릇하게 구워지면, 양념장을 바르고 대파를 송송, 참깨를 솔솔. 정은은 전병을 두 장 부쳐서 작게 잘랐다. 한 끼
재석이 문득 물었다. “내가 왜 웃는지 몰라서 그래?” 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내가 알아야 해요?” “우리 여자 친구랑 관련된 건데, 알아야 하지 않을까?” 남자의 눈을 마주했을 때, 그 안에 담긴 사랑이 넘칠 듯 차오르고 있었다. ‘저 눈은 반칙이야.’ “재석 씨, 우리... 질문 게임할래요?” 재석이 눈썹을 올렸다. “어떻게 하는 건데?” “서로 번갈아 가면서 질문 하나씩 해요. 빠르게 묻고, 빠르게 답하기... 거짓말은 금지...” “좋아, 네가 먼저.” 정은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내가 몇 번째 여자예요?” 시작부터 강수였다. 하지만 재석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첫 번째. 첫사랑.” ‘첫사랑...’ 그 말이 재석의 입에서 흘러나올 때, 낮고 묵직한 울림에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섹시하지만 진심이 느껴지는 톤.이미 예상한 대답이었지만, 막상 재석의 입으로 직접 듣고 나니 조금 놀라기도, 어안이 벙벙하기도 했다. ‘진짜... 한 번도 안 사귀어 봤다고?’ 재석이 질문을 이어갔다. “근데, 왜 그걸 물어본 거야? 그렇게 신경 쓰였어?”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질문이 두 개잖아요.” “그럼 두 번에 나눠서 대답을 들어야겠네.” “좋아요, 우선 ‘왜 물어봤냐’에 대한 대답부터 할게요.” 정은은 살짝 숨을 고르더니, 또박또박 말했다. “그전까진 재석 씨의 연애사에 관해 물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사적인 영역이니까, 굳이 파고들지 않았고요. 하지만 지금... 우리는 연인이니까...”“그런 건, 앞으로 어떻게 관계를 쌓아갈지에 대한 기준이 될 수도 있잖아요.” 재석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우리 여자 친구 차례.” 정은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언제부터 날 좋아했어요?” 재석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몇 초간 고민했다. “왜 망설여요?” 그러자 그가 정은의 말을 따라 하듯 장난스럽게 말
“음... 내가 틀린 말 했어요?”정은이 눈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재석의 이마에 살짝 핏줄이 떠올랐다. 정은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장은혁 씨한테 그렇게 말한 건, 화를 내거나 따지지 않고 먼저 날 걱정부터 했기 때문이에요. 그건 기본적으로 사람 됨됨이가 괜찮다는 뜻이니까요.” “그 뒤로 계속 들이대지 않고 물러난 것도, 자존심 있고 선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거죠...”“그리고 일 방면에서는... 솔직히 소재 분야에선 장은혁 씨가 겪어온 게 많아요. 그런 경험이 아니었으면, Z시 공장장이 그렇게까지 대우 안 해줬을걸요?” ‘하아... 진짜...’ 재석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운전대가 삐걱하고 미세하게 흔들릴 정도로.그러다 결국, 참지 못하고 말했다. “그래서...”하지만 그 말은 정은의 장난기 어린 시선과 정면으로 부딪쳤다.여자의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었으며, 눈빛에는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표정이 서려 있었다. “설마...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야?”정은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객관적으로 평가한 것뿐인데요? 일부러라니요?”“흠흠...” 재석이 괜히 헛기침했다.“그럼, 우리 여자 친구가 보기에... 나랑 장은혁 중에 누가 더 나아? 일로든, 사람 됨됨이로든.”정은은 잠시 멈칫하더니, 웃음을 터뜨렸다.“푸흐하하하하...”웃음이 참을 수 없다는 듯 터져 나왔다. 눈매가 접히고, 어깨가 들썩이고, 결국은 배까지 움켜쥐며 웃기 시작했다.“아 진짜... 그런 걸 물어요? 재석 씨, 그런 거 묻는 사람 아니잖아요! 근데 진짜 묻네요?! 아 너무 웃겨요...”재석은 억울한 듯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봐, 일부러 그런 거 맞네. 스스로 실토한 셈이지?”“푸하하하...”“아직도 웃어?” 재석은 눈을 찌푸리며 다시 그녀를 쳐다봤다.정은은 눈물까지 맺힌 얼굴로 말했다. “웃으면 안 돼요? 웃긴 걸 어떡해요? 아, 우리 남자 친구 진짜 귀엽다니까요...”‘이 사람, 질투하면서도 날 내
정은은 바로 정색하고 ‘남자 친구’에게 물었다.“몇 시에 도착했어요? 솔직히 말해봐요.”재석은 ‘10분 전’이라고 말하려다, 입술이 굳어졌다. 결국 피식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음... 한 시간 전.”“왜 그렇게 일찍 온 거예요? 비행편도 다 보냈잖아요.”“그냥... 널 빨리 보고 싶었어.”두 사람의 시선이 딱 맞닿았다. 정은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근데 난 고작 3일밖에 안 비웠는데요?”재석이 바로 대답했다.“나한텐, 3일이 3년 같았거든.”“재석 씨...” 정은은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진짜... 말 너무 잘하네, 이 사람.’“생각보다 말 잘하네요. 그런 거 잘 못할 줄 알았는데요...”재석은 장난기 없이, 진지하게 말했다. “거짓말 아니고, 그냥 진심을 말한 거야.”정은의 가슴이 너무나 설렜다.‘이렇게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하니까 더 심쿵하잖아.’‘진짜 반칙이다, 조재석.’이런 다정한 장면이, 멀리서 바라보는 은혁의 눈에는 그야말로 심장을 후벼 파는 칼날과 같았다. ‘조재석...? 그 조재석이라고?’‘병원에서 봤을 땐, 서로 어색하기 그지없던 두 사람이었는데...’ ‘분명히 그땐... 전혀 사귀는 것 같지 않았는데...’은혁의 표정이 굳어지고, 입꼬리가 서서히 내려앉았다. ‘설마... 이거 다 연기인 건가? 날 거절하려고, 연극까지 짠 거야?’점점 차오르는 분노에 못 이긴 은혁은 두 사람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정은 씨!”정은은 좀 놀랐다.“네?”재석도 좀 이해가 되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은혁은 정은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굳이 이럴 필요는 없잖아요. 나를 거절하는 건 괜찮아요. 근데 이런 식으로 거짓말까지 하면서, 스스로를 망가뜨릴 필요는 없잖아요.”‘스킨십까지... 괜히 헛소문만 나면 손해 보는 건 여자 쪽이라고...’은혁은 이번엔 재석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정은 씨가 무슨 이유로 이런 유치한 연극에 합을 맞춰주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런 행
정은은 은혁의 그 아련하고 억울한 표정을 보자, 그냥 말이 안 나왔다. ‘대체 지금 머릿속에 무슨 드라마를 찍고 있는 거지...?’ ‘진짜, 할 말 없네...’오후 세 시 정각. 탑승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승객들이 하나둘 줄을 서고, 정은도 조용히 탑승했다.비행기가 거의 만석이 된 후, 은혁은 이코노미석 안에서 정은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A 열, F 열, 가운데 구역까지 샅샅이 훑었지만, 없었다.잠시 후, 탑승 문이 닫히고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승객 여러분, 곧 출발하겠습니다.”그제야 은혁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기내 앞쪽으로 조심스럽게 올라가 봤다.그리고, 비즈니스석 좌석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있는 정은을 발견했다.“정, 정은... 씨? 이코노미석이 아니었어요...? 나는 그게...”‘뭐지, 상황이 이상한데...?’ ‘내가 이코노미석이라 당연히 정은 씨도 그럴 줄 알았는데...’정은은 슬쩍 웃었다. “누가 그래요? 내가 이코노미석 탄다고?”“지난번에 올 때는... 그때는 분명...”“그때는 비즈니스석이랑 일등석이 매진이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코노미석에 탄 거고, 이번엔 자리가 있어서 그냥 비즈니스로 예약한 거죠.”‘아... 나 지금까지 뭐 한 거지. 혼자 다 짐작하고, 혼자 의미 부여하고, 혼자 낭만 타령하고...’은혁은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었다.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사실 은혁 씨는 나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그냥... 본인이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들을 뿐이죠.”그 말에는 어떤 분노도, 원망도 없었다. 그저 담담히 사실만 전달할 뿐.은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와... 진짜, 뼈 맞았다.’자리에 앉은 은혁은 좌석의 불편함을 바로 체감했다. 다리는 제대로 뻗지도 못하고, 의자도 푹신하지 않고, 무엇보다 공기 중에 떠도는 그 ‘답답한 사람 냄새’가 꽤 거슬렸다.‘내 마음이 아무리 복잡하다지만... 이건 좀
은혁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말문이 막힌 채, 몇 초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진짜... 남자 친구가 있었던 거야?’ ‘아니면... 나 때문에 그렇게 말한 걸까?’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지만, 정은은 이미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고 없었다....그 시각, 정은은 공장 회의실에서 진승구와 협의 중이었다. 조건은 명확했고, 가격도 이견 없이 깔끔하게 정리됐다.공장장인 진승구는 시원시원한 정은의 태도에 감탄했고, 그 자리에서 바로 계약서 인쇄를 지시했다.서류가 출력되자, 두 사람은 조용히 사인했고, 정은은 먼저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좋은 협력 관계 기대하겠습니다.”진승구도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받았다.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정은이 회의실을 나선 후, 문이 다시 벌컥 열렸다.“정은 씨는 어딨어요?” 은혁이었고, 숨이 가빠 보였다.“소... 소정은 씨요?” 진승구는 당황해하며 되물었다.“그래요, 그분. 지금 어딨어요? 아까 계약한다고 했잖아요? 그냥 바로 도장 찍지 말고 좀 더 시간 끌라고 했잖아요. 이틀 정도만 더 붙잡아 두지...”진승구는 식은땀을 흘리며 답했다. “아... 이미 계약 다 끝났는데요...”은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바보야, 바보... 진짜 바보!’속으로 열 번은 외쳤다. ‘이딴 놈한테 뭘 맡기겠다고...! 아버지한테 건의해야겠네. 앞으로 공장 접대비 전액 삭감... 출장자도 식당에서 밥 먹게 하고, 노래방은? 절대 금지!’은혁은 스스로를 다독이는 척했지만, 자꾸만 뇌리를 맴도는 정은의 말 한마디에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남자 친구가 있다... 그게 진짜든 아니든, 어제 그 말은 분명 나를 밀어내기 위한 거였어. 다 망친 거야. 다 그놈의 진승구 때문이야...’진승구도 그런 은혁을 보면서 이해가 안 됐다.‘은혁 도련님... 왜 저래...?’...정은은 과일 봉지를 하나 들고 김대영이 있는 작업실 쪽으로 향했다.“김 기사님, 누가 찾아왔어요!”“예
정은이 계속 말했다.“이미 결과 나왔어요. 기준에는 전혀 못 미치네요.”김대영은 들숨을 멈췄다. “그렇게 빨리?”‘진짜다... 이 속도면 혼자서 실험실 하나는 돌리겠다니까.’“그럼, 옷부터 갈아입고 올게. 오늘은 절대 민폐 안 끼칠게!”“감사합니다, 선생님.”“에이... 감사하긴! 당연한 거지!” ‘선생님이라니... 아저씨도 아니고, 기사님도 아니고... 선생님이라 불러주다니, 나 오늘 힘난다.’모든 준비를 마친 오전 8시. 연구실 측에서 드디어 3세대 샘플이 도착했다.정은과 김대영은 다시 책상에 마주 앉아 정밀 측정과 테스트를 시작했다. 시간은 어느덧 금방 흘러 점심시간.김대영이 말했다. “가자, 밥 먹으러.”“네.”식당으로 향하는 길, 두 사람은 오후 실험 플랜에 대해 대화를 이어갔다. 바로 그때, 헐레벌떡 뛰어오는 은혁의 머리는 약간 흐트러져 있었다.심지어 셔츠 깃은 구겨져 있었으며, 표정은 평소답지 않게 초조해 보였다.“정... 정은... 씨!”은혁은 숨이 차 헉헉거리며 말했다. “겨우 찾았어요...”정은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아침부터 계속 메시지 보내도 답이 없고, 호텔 방에도 없길래... 무슨 일 생긴 줄 알았어요.”은혁도 정은을 걱정한 그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6시 반에 나왔어요. 어제 은혁 씨 늦게 들어온 것 같길래 아직 잘 거라 생각하고, 일부러 안 깨웠어요.”정은은 솔직히 대답했다.“6시 반...”은혁은 민망한 듯 짧게 웃었다. 그리고 변명처럼 말을 덧붙였다. “나 어제... 일부러 취한 거 아니에요. 원래 술 그렇게 안 마시는데... 공장장이랑 애들이 자꾸 마시자고 해서...”“끝나고 또 노래방까지... 근데 거기, 이상한 데 아니고 진짜 건전한 곳이에요. 나 원래 그런 데 잘 안 가요.”정은은 담담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오해할 일도 없고, 솔직히 말해 저랑은 큰 상관도 없는 얘기예요. 그럼, 김 선생님이랑 밥 먹으러 가볼게요.”“아
정확히 말하자면, 한 사람에게 연락해야 한다는 걸 잊었다.오후에 재석이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 공장 쪽 진행 상황을 물어보는 짧은 통화였고, 그때 정은은 막 실험에 들어가 바쁜 와중이었다.“일 끝나면 내가 먼저 연락할게요, 알겠죠?”이 말은 바로 마지막에 정은이 한 한마디였다. 그리고... 그 뒤로 연락이 없었다.‘하... 진짜 미쳤어. 그 말 해놓고 까먹었다고? 이런 사람은 또 없을 거야’정은은 민망함에 얼굴을 문지르며 핸드폰을 들었고, 톡을 열자마자 미확인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하나같이 은혁에게 온 것들. [정은 씨, 지금 어디예요?][정은 씨, 밥은 먹었어요?][정은 씨, 같이 식당 갈래요?][...] 친절한 말들이었지만, 그 속엔 정은이 찾는 메시지가 없었다.‘아니지, 지금 연락해야 할 사람은 장은혁이 아니라...’정은은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지만, 몇 자 쓰다가 다시 전부 지웠다. 결국, 손가락이 향한 건... 영상 통화 버튼.띠-잠시 울리던 화면이 바뀌며, 재석의 얼굴이 화면에 떴다.정은이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일 끝났어?]“네.” 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피곤하지 않아?]“괜찮아요. 근데... 미안해요. 공장에서 나오는 길에 바로 연락하려고 했는데, 정신이 없었어요...”[괜찮아, 언제 연락하든 난 항상 여기 있어.]‘이 말, 왜 이렇게 따뜻하지...’ 재석은 가슴속에서 뭉근한 온기가 퍼졌다.그때, 문득 정은의 시선이 멈췄다. “지금 어디예요?”[집.]“집 어디요...? 방? 아니면...”재석은 순간 멈칫했다. 정은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화장실?”화면 속, 지나치게 가까이 잡힌 남자의 얼굴. 말도 안 되게 커진 이마와 눈, 화면에 머리까지 박을 기세였다.‘잠깐만. 이거... 설마...’“설마... 지금 옷 안 입었어요?”정적. 화면 너머의 공기조차 얼어붙는 느낌.재석의 얼굴이 굳었다. [씻으려고
정은은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매고 창밖을 슬쩍 바라봤다. 공장은 호텔에서 10km 떨어진 개발지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은혁이 운전대를 잡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 구역은 첨단 기술 산업 클러스터로 지정돼 있어서, 기술 협력 프로젝트도 대부분 그쪽으로 집중되고 있어요.” “정은 씨가 찾는 그 새로운 감온 정확도 소재는 우리랑 CG그룹이 공동 개발한 건데, 지금까지 1세대부터 3세대까지 세 가지 버전이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했고, 중간중간 전문적인 질문도 빠짐없이 던졌다. 은혁이 답할 수 있는 부분은 성의껏 설명했지만, 구체적인 수치나 실험 조건처럼 세세한한 부분은 바로 대답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약 20분 후, 두 사람은 공장에 도착했다. 은혁이 미리 연락해 둔 덕분에, 정문 앞에는 담당자가 나와 있었다.정은은 안내받아 간단히 실험실과 공장을 둘러봤다. 연구 구역과 생산라인은 전혀 겹치지 않게 구획이 나뉘어 있었고, 현장도 전반적으로 정돈된 느낌이었다.정은이 요청한 소재의 1세대와 2세대는 이미 완제품으로 확보되어 있었지만, 3세대는 아직 실험 단계였기에 정식 생산은 되지 않았다. 따라서 실험실에서 직접 합성해야 했다.“시간은 얼마나 걸리죠?” 정은이 은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혁은 옆에 있는 연구원을 바라봤다.“8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내일 오전엔 제품 받아보실 수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관련 비용은 정산대로 처리해 주세요. 최종 결정되면 한 번에 입금할게요.”은혁은 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비용은 무슨 비용... 정은 씨,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요.”정은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럴수록 더 딱딱하게 해야죠. ‘친할수록 돈 문제는 분명하게.’ 이건 기본이에요. 더군다나, 우리 둘은 그냥 ‘친구’일 뿐인데, 은혁 씨가 도와주는 것만 해도 충분히 고마워요.”“게다가 실험실도 예산이 따로 있는 조직이고, 모든 비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