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들은 가업을 이어받았고, 둘째 아들은 스타 변호사이며, 막내아들은 학술 연구에 전념했다.“당신 오늘 오후에 재석이 보러 갔을 때 무슨 일 있었어?”강서원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아주 수상해요.”“뭐가 수상한데?”“내가 오늘 재석을 찾아갔을 때, 뜻밖에도 도시락 2인분을 달라고 말한 거 있죠! 하나가 아닌 두 개라니?!”소기봉은 영문을 몰랐다.“2인분이 뭐가 어때서?”“내 생각에, 재석에게 여자친구가 생긴 것 같아요.’그렇지 않고서야 도시락 2인분을 달라고 말할 리가 없었다.소기봉은 또 무슨 폭발적인 뉴스라도 있는 줄 알았다.“도시락 하나 더 달라고 한 걸 가지고 뭘 그렇게 놀라는 거야? 만약 두 끼 먹고 싶어서 그런 거라면? 아니면 친구에게 가져다줄 수도 있지 뭐. 당신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마.”말하면서 소기봉은 차 한 잔을 따랐다. 냄새를 맡고 음미하는 여유로운 모습은 초조한 강서원과 정 반대였다.“재석이 성격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매일 실험만 아니면 데이터를 연구했으니 평소에 돌아와서 밥 한 끼 먹는 것조차 어려운 아이야. 그런데 연애할 시간이 어딨겠어?”“게다가, 재석도 이제 나이가 됐으니, 정말 여자친구를 사귀었다면 그건 좋은 일이 아닌가? 당신은 전에 매일 재석이에게 어느 집안 딸을 소개해 주겠다고 하지 않았어? 이제 마침내 당신의 뜻대로 되었으니, 또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 거야!”‘아이도 다 컸으니 언젠간 알아서 연애를 하겠지. 설마 평생 재석이를 간섭할 건가? 게다가 간섭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잖아.’강서원도 그 도리를 잘 알고 있었다.그런데 아들이 어디서 튀어나왔는지도 모르는 여자와 사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녀는 마음이 복잡했다.“먼저 자러 갈게요!”“어? 계속 빙빙 돌아다니지 않을 거야?”“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죠.”‘내일 재석이 세낸 집에 찾아가 봐야지.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똑똑히 확인할 거라고!’...9월의 날은 아주 일찍 밝았다.정은은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커튼을
강서원은 이 말을 듣자마자 저도 모르게 투덜댔다.“이 건물은 어쩜 이렇게도 더러운 거니? 도처에 쓰레기가 널려 있고, 냄새도 나고. 이것의 사람들은 너무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아. 청소하는 사람도 없는 거야? 그리고 이 벽은 새까맣게 변했잖아. 이 난간도 전부 먼지고. 아마 닦은 적이 없을 거야...”정은은 시간을 보았는데, 더 이상 꾸물대면 늦을 것이다. 강서원이 멀쩡한 것을 보자, 그녀가 계속 투덜대는 것을 듣기 귀찮아서 정은은 그냥 가버렸다.강서원은 정은의 뒷모습을 보며 멍하니 있다가 참지 못하고 입을 삐죽거렸다.그런 무시당하는 느낌이 더욱 강렬해졌다.그녀는 고개를 들었는데, 아직 몇 층이나 남았다. 게다가 모두 이런 계단이었다.강서원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이를 악물었고, 하이힐을 신은 채 계속 올라갔다.다만 입으로 계속 투덜댔다.“멀쩡한 별장을 놔두고 굳이 이런 낡아빠진 아파트에서 지내려 하다니... 고집이 어쩜 이렇게도 센 건지.”간신히 7층에 도착한 강서원은 비상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재석은 집에 없었다.‘이 시간이라면 아마도 실험실에 있겠지.’한 바퀴 둘러본 다음, 강서원은 거실이 깨끗하게 정리되었고, 여자의 생활용품도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녀는 심지어 바닥까지 검사했지만 긴 머리카락 하나조차 발견하지 못했다.강서원은 사색에 잠겼다.‘내가 너무 예민했나?’그날 가져온 도시락통을 가져가려고 강서원은 주방을 향했다.그러나 이 순간, 그녀는 멈칫하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식탁 위에는 도시락통 하나밖에 없었던 것이다.‘하나밖에 없어! 다른 하나는 어디에 있지? 다른 사람한테 준 게 분명해. 정말 수상하네!’강서원도 오래 있지 않았다. 실마리를 발견한 다음, 그녀는 곧장 본가로 돌아갔다.“거 봐요! 역시 내 말이 맞았다니깐요!”소기봉은 눈썹을 치켜세웠다.“당신한테 잡힌 거야?”“잡히긴 뭘 잡혀요? 재석이 바람피우는 것도 아니고!”“그게 아닌데 왜 그렇게 투덜대는 거야?”강서원은 자신의 생각에 잠겨 그의
“선배님.”“이제야 돌아오는 거야?”정은이 대답했다.“도서관에서 잠깐 자료 좀 찾았어요.”말하는 사이, 두 사람은 이미 7층까지 올라갔다.“참, 도시락통은 이미 깨끗이 씻었는데, 잠깐만 기다려요...”정은은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간 다음 얼른 도시락통을 들고 나왔다.재석은 받으면서 갑자기 입을 열어 물었다.“요즘 오미선 교수님과 함께 과제를 하고 있는 거야?”“네. 하지만 진도가...”“전에 교수님과 이 일로 토론한 적이 있어. 사실 이 과제의 접점부터 문제가 있거든. 그러나 너도 교수님의 성격을 잘 알고 있을 거야. 마지막까지 확실하게 검증하지 않으면 교수님은 절대로 뒤돌아보시지 않을 거야.”정은도 이를 발견했고, 오미선에게도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오미선은 지금 충분한 데이터가 없으니 이대로 연구 방향을 바꾸면 지난 2년간의 노력이 헛수고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이번 주 토요일에 시간 있어? 같이 밥 먹으면서 상의하는 건 어때? 교수님을 어떻게 말려야 할지.”“토요일이요?” 정은은 입술을 깨물었다.“미안해요, 이미 약속이 있어서요.”재석은 멈칫했지만 이내 대답했다.“괜찮아, 그럼 시간 나면 다시 나에게 연락해.”“좋아요.”...토요일, 정은과 민지는 서준의 집에 찾아갔다.[미리 경비 아저씨에게 말했으니까 들어올 때 직접 방 번호를 말하면 돼요.]서준이 톡을 보냈다.정은은 고개를 들어 눈앞의 빌딩을 바라보았다.민지는 혀를 차며 말했다.“와, 서준이는 정말 돈이 많네요.”이 집은 세낸 것이 아니라 직접 산 것인데, 심지어 서준의 명의로 된 것이었다.방금 경비실에 찾아갔을 때, 두 사람 모두 이를 보았다.“들어와요. 일회용 슬리퍼로 갈아신으면 돼요.”서준의 집은 12층에 있었다. 민지와 정은이 문에 들어서자 감응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그는 문을 열며 담담하게 말했다.“뭐 마실래?”민지는 바로 눈을 깜박였다.“콜라 있어?”“응. 칼로리 있는 거 없는 거?”“당연히 칼로리가 있는 거 마셔야지. 제로 칼
“드디어 끝났네요!” 민지는 노트북을 덮으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그녀의 곁에는 빈 깡통 한 무더기가 있었다.서준이 입을 열었다.“가요, 내가 밥 살게요.”정은과 민지는 거절하지 않았다.세 사람은 앞으로 같이 일해야 했기에 서로에게 밥을 사주는 기회가 많았다.레스토랑 안,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고, 우아한 피아노 소리가 천천히 들려왔다.“세 분 예약하셨나요?”“어제 예약했어요.”서준은 핸드폰을 꺼내 예약한 정보를 보여주었다.곧 종업원은 세 사람을 데리고 자리로 갔다.정은이 전에 온 적이 있었기에 그리 낯설지 않았다. 이 레스토랑은 같은 레벨의 레스토랑에서 평가가 가장 좋지만 그 가격도 무척 비쌌다.민지는 자리에 앉은 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이야, 다르긴 정말 다르구나...”말하면서 핸드폰을 꺼내 주위를 찰칵찰칵 찍기도 했다.두 사람의 눈빛에 민지는 어색하게 웃었다.“우리 아빠한테 보여주려고요. 아직 이렇게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을 본 적이 없으시거든요...”말을 마치고 또 사진에 전념했다.민지를 바라보는 서준의 눈빛은 저도 모르게 동정이 묻어났고 이내 부드러워졌다.‘민지의 집안형편이 그렇게 좋지 않다니...’그러나 서준은 또 자신이 오해할까 봐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네 아버지는 뭐 하시는 분이시지?”민지는 멈칫했다.이 표정을 본 서준과 정은은 그녀가 말하기 뻘쭘한 줄 알았다.“만약 불편하다면 말하지 않아도 돼.”“어... 우리 엄마는 가정주부야. 우리 아빠도 그냥 평소에 건물 출입자를 관리하는 경비원이시고. 내 고향은 시골인 데다가 바다와 인접해 있기 때문에, 두 분은 한가하실 때 함께 바다로 나가서 물고기를 잡으시곤 했어. 기회가 되면 방금 건져낸 새우와 물고기를 먹으러 우리 집에 와! 아주 싱싱하고 맛있어!”시골에 살고, 부모님은 직장이 없으며, 아빠는 가끔 대문을 지키는 경비원으로 일하면서 두 사람 가끔 바다로 나가 물고기를 잡는다는 민지의 말을 듣고 정은과 서준
다 많은 다음, 서준은 일어나서 계산하러 갔다.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세 사람은 뜻밖에도 신진호, 서지예, 심경혜, 탁재민 일행과 부딪쳤다.유독 강서정만 보이지 않았다.그러나 그녀가 오지 않은 것도 정상이었다. 강씨 가문의 아가씨가 어떻게 이런 등급의 레스토랑에 나타나겠는가.“우쭈쭈, 이거 오미선 교수님의 학생들 아니야?!”진호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조롱하는 말투와 눈빛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정은 그들은 진호를 상대하지 않았다.진호는 웃음이 굳어졌지만 계속 입을 열었다.“공교롭게도 여기서 만났네. 그런데 왜 오미선 교수님이 보이지 않는 거지? 이렇게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밥을 사고 싶지 않으신가 봐? 우리는 송지혜 교수님이 모든 비용을 결산해주시는데 말이야. 학교의 중시를 받으니 다르긴 다르구나. 올해 대부분의 연구비용도 우리 과제팀에게 주었잖아. 아이고, 나도 정말 걱정이야. 너희들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 대학원에 합격했는데, 발언권도 없는 교수님을 따라다니면 무슨 성과를 거둘 수 있겠어? 정말 아쉽군!”진호는 쉴 새 없이 나불댔고, 지예와 경혜는 옆에 서서 방관했다. 오직 재민만이 어수룩하게 그를 막으려 했지만 오히려 진호에게 밀려났다.“이 촌놈아, 나한테 달라붙지 마! 저리 좀 꺼져!”재민은 멈칫하더니 자존심이 상한 동시에 열등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계속 말렸다.“다들 동창이니까 이렇게 소란을 피울 필요가 없잖아...”“넌 입 좀 다물어! 여기서 말할 자격이 있긴 한 거야?”“난 왜 말을 할 수 없는 건데? 나한테도 입이 있으니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재민은 결국 참지 못하고 화를 냈다. 하지만 그는 다툼을 진짜 잘 하지 못했다.진호가 말했다.“어쭈! 촌놈 주제에 성깔이 있어가지고. 내가 만만해 보여! 죽고 싶어서 환장을 한 거야?”재민은 고개를 숙이며 남진일의 말을 떠올렸다.“우리처럼 가난한 집구석에서 자란 아이는 원래 불공평한 대우를 받게 돼. 될수록 참아. 네가 강대해지면 공평
진호는 당황하기 시작했다.“뭐, 뭐 하려는 거야?! 이거 초상권 침해야! 고소할 거라고?!”민지가 말했다.“공공장소에서 합리적으로 증거를 수집하고 있는 거니까 어디 한번 고소해 봐. 나는 단지 정의의 화신일 뿐이야.”“너, 너희들...”진호는 화가 나서 말까지 더듬었다.지예는 민지가 정말 찍고 있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신진호, 너 뭐 잘못 먹었어?”진호는 영문을 몰랐다.“모르면 함부로 말하지 마. 우리 각자 계산하기로 해서 이 레스토랑에 온 거잖아. 누가 결산한다는 거야! 야, 들어가는 사람 막지 말고 빨리 네 밥이나 먹어. 다 먹고 학교로 돌아가야 하니까!”진호는 달갑지 않아서 정은 일행을 매섭게 노려보더니 그제야 자리를 비켰다.재민은 움직이지 않았다.‘각자의 비용을 내야 하구나...’“미안, 나, 나 갑자기 일이 좀 생겨서 먼저 돌아갈게. 너희들 천천히 먹어!”말을 마치자 재빨리 밖을 나갔다.진호는 얄밉게 말했다.“촌놈! 돈이 없어서 저러는 게 분명해!”지예가 대답했다.“신경 쓰지 마.”정은 일행이 레스토랑을 나서자, 마침 앞에 택시가 멈춰 섰다.민지와 서준이 먼저 올라탔다.정은은 조수석에 앉으려고 했지만, 갑자기 누군가를 발견했다. 그녀는 생각하다가 여전히 그 사람에게 다가갔다.“탁재민... 맞지?”모퉁이에서 한 훤칠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약간 어색하게 웃었다.“맞, 맞아요.”“학교로 돌아가려고? 마침 우리도 차를 불렀으니 같이 갈 수 있는데.“네? 정말 괜찮은 거예요?” 재민은 깜짝 놀란 듯 안절부절못했다.이곳은 학교와 너무 멀어서 방금 왔을 때 진호가 택시를 잡았고, 비용이 만 원이었다.재민은 원래 버스를 타려고 했지만 이 시간에 그 버스는 이미 운행이 중단되었다.그는 카풀앱에서 차를 불렀는데, 학교에 가면 단지 2천 원밖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줄곧 승객이 없어서 재민은 주문을 취소하려 했고, 고민하고 있을 때 정은이 나타났다.“응. 어차피 우리도 돌아가
차가 골목 어귀에 멈추자, 정은이 차에서 내렸다.서준과 민지는 이미 앞의 골목에서 내렸다.정은은 아파트를 향해 걸어갔다.잔잔한 달빛이 떨어지며 밤하늘에 별이 몇 개 걸려 있었다.한여름의 무더위를 띤 바람은 결코 시원하지 않았다.이때 정은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아파트 아래층에서 한 남자가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나무에 비스듬히 기대고 있었다. 그녀를 본 순간, 남자는 바로 똑바로 섰다.곧이어 그는 미소를 지었다.“왜? 내가 여기에 나타나서 많이 놀랐어?”심현빈이 정은의 앞으로 다가왔다.정은은 잠시 멈칫했다.“조금요.”“학교 생활은 적응이 잘 되고?”“네.”“수업은 많지 않아?”이 말은 정은의 정곡을 정확하게 찔렀다.‘수업은 정말 꽉 찼지!’현빈은 어깨를 들썩였다.“네 표정을 보니 이미 답을 알겠네.”“그렇게 티가 나나요?” 정은은 자신의 얼굴을 만졌다.“아니.”“그럼 어떻게 안 거예요?”“내가 눈치가 빨라서.”정은은 어이가 없었다.“밖이 너무 덥네. 하지만 넌 분명히 날 집으로 초대하지 않을 거야. 그럼 우리 시원한 곳에 가서 좀 앉을까?”현빈은 그래도 정은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넌 지금 마음속으로 틀림없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야. 아, 이 남자는 정말 눈치가 빠르고 내 마음을 잘 알고 있어.”정은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음, 내가 또 맞혔구나, 맞지?”...두 사람은 전에 갔던 밀크티 가게에 도착했다.바로 길 건너편에 있는 데다가 에어컨이 있어서 무척 시원했다.다만 현빈은 양복을 입고 있었기에 아무리 봐도 밀크티 가게와 어울리지 않았다.그래서 자꾸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정은이 물었다.“뭐 마실래요? 내가 살게요.”“오레오 밀크티, 노 얼음 그리고 설탕 좀 많이 추가해줘.”“네?”“왜 그렇게 쳐다봐?” 현빈은 자신의 턱을 만졌다.정은은 잠시 침묵하더니 카운터에 가서 주문했다.“오레오 밀크티, 얼음 빼주시고요 설탕 많이 넣어주세요. 아, 똑같은 걸로 두 잔이요.”말이
말을 꺼내자마자 정은은 바로 후회했지만 이미 시간을 되돌릴 수 없었다.현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너.”‘난 너에게 관심이 있지.’정은이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남자는 입가를 실룩거렸다.“못 들은 척하지 마.”“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하나도 안 들리네, 에헴! 이제 그만해요.”현빈은 딴청 피우는 정은을 보며 저도 모르게 웃었다.“그래, 언제까지 피할 수 있나 보자. 언젠간...”“어머.” 정은은 그의 말을 끊었다.“휴지를 안 챙겨왔네요. 휴지 있어요?”“응.”“한 장 줘요, 고마워요.”현빈은 웃으며 정은을 바라보았다.“이제 내 말 들리는 거야?”정은은 말문이 막혔다그리고 그녀의 추측도 맞았는데, 현빈은 확실히 일이 있어서 찾아온 것이었다.다만 밀크티를 다 마신 후에야 그는 본론으로 들어갔다.“성 교수님 쪽에 진행 중인 과제가 있어. 현재 난관에 부딪혀서 이미 두 달 넘게 진도를 나가지 못했거든. 그래서 교수님은 지금 네 생각을 묻고 싶으셔. 이것은 모든 자료야.”말하면서 USB를 하나 건네주었다.정은은 손을 뻗었는데, 현빈은 이대로 손을 놓지 않았기에 두 사람의 손가락이 닿았다.남자의 체온은 그녀보다 훨씬 높았다.정은은 USB를 받은 다음 즉시 손을 거두었다.현빈은 표정이 바뀌지 않았지만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일부러 그런 게 분명해! 이 남자 대체 뭐 하자는 거야!’정은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때 현빈은 주동적으로 휴지 한 장을 건네주었다.“좀 닦아, 그런 눈빛으로 날 보지 말고.”정은은 비록 화가 났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이었다.현빈이 이렇게 말한 이상, 만약 정은이 계속 따진다면 오히려 속이 좁아 보일 것이다.‘길을 가다가 부주의로 남을 부딪치는 것도 흔한 일이잖아. 굳이 심현빈 씨 때문에 이럴 필요가 있을까? 그럼 오히려 내가 심현빈 씨를 특별 취급하고 있다는 게 아니겠어? 진짜 무슨 말을 해도, 무슨 일을 해도 함정인 것 같아!’밀크티 가게를 떠나자, 현빈은 정은을 집으로 바래다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
정은이 멍해 있는 사이, 재석이 한 걸음 다가섰다. 늘 부드럽고 점잖던 그가, 이 순간만큼은 전에 없던 강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 이런 눈빛도 있었나?’정은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는 순간, 재석은 어느새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정은이도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재석이 자신보다 훨씬 크다는 걸. 그리고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면, 자신이 마치 남자의 품 안에 갇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도.재석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이제 좀 알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그때 네가 학업이 먼저라고 했을 때, 난 받아들였어.”“그런데 장은혁한텐 기회를 줬지. 정은아...”그가 고개를 더 숙이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선에 닿았다. 순간, 정은의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너, 나한테 너무 불공평해.”그 마지막 한 마디는 묘하게 서글픈 기운이 섞여 있었다.정은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재석은 그녀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알아, 내가 지금 어떤 입장인지. 묻고 따질 자격도 없고, 네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네 자유라는 것도 알아.”“이 말 꺼냈다가, 우리 사이가 끝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근데... 계속 참다 보니까 알겠더라.”‘난... 그렇게까지 쿨한 사람이 아니었어.’“그래서 이제 참지 않기로 했어.”‘어떻게 되든, 그건 네가 정해.’그렇게 말한 재석은 고개를 숙인 채 멈췄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용한 밤공기 속에서, 정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이제, 제가 말해도 될까요?”“응...”“재석 씨.”정은은 처음으로 재석을 그렇게 불렀다.“고개 들어요. 나 좀 봐요.”재석의 어깨가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그는 이미, 거절당할 각오까지 끝냈다.그런데 눈이 마주친 순간, 정은의 두 눈 속에서 재석이 본 건... 눈물이 아닌, 웃음이었다.억지로 짓는
“헤어졌다고요?”정은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몰랐어?!”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욱은 눈을 반짝이며 의자째로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본격적인 ‘TMI’를 털어놓기 시작했다.“M시 출장 갔다 오고 며칠 안 돼서, 재석이가 바로 짐 싸서 수아를 내보냈다니까?”정은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재석과 수아 사이에 어떤 감정선이 있었는지, 그동안 몇 번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퍼즐처럼 빠르게 떠올랐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 속엔 미묘한 기류가 스쳤다.“아마 진짜 많이 좋아했나 봐. 그러니까 정리할 때도 그만큼 아프고, 오래 걸리는 거겠지. 조금만 시간 지나면, 태민이도 정리될 거야.”진욱은 이어서 말했다.“네.”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그 이후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남의 연애는, 들을 수는 있어도 깊게 얘기하지 말아야 해. 괜히 나서 봤자... 괜히 끼어든 꼴만 되니까.’...해가 지고, 붉은 노을이 건물 유리에 비치기 시작할 무렵. 정은은 마침내 작업을 끝냈다.진욱은 기다렸다는 듯 프로그램을 열고 기능 하나하나를 테스트했다.그리고 30초쯤 흐른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어어!! 복구됐어! 됐다! 돌아왔어! 다시 쓸 수 있어!!”미진도 덩달아 벌떡 일어나 양손을 번쩍 들었다.“살았다, 진짜!! 여태 손으로 데이터 입력한 거 생각하면... 이건 거의 기적이야!”진욱은 시계를 힐끗 보더니, 정은을 향해 말했다.“지금 이 시간까지 남아서 도와준 우리 정은이, 완전 수고 많았어! 조 교수...”“응...?”갑작스레 이름이 불리자, 재석은 몇 초간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진욱은 능청스럽게 말했다.“아니, 정은이가 이렇게 큰일 해줬는데, 감사 표시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적어도 밥 한 끼는 사야지.”“맞아요, 맞아요. 조 교수님, 이건 진짜 밥으로도 모자라요.” 미진이 곧장 거들었다.재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략 1년 전, 정은은 한동안 재석의 실험실을 빌려 쓴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전진욱, 조미진 등과 인연이 닿았다.처음엔 서로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몇 달이 지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고, 지금은 가볍게 농담도 주고받을 만큼 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진욱은 우연히 정은이 실험 데이터를 처리하는 속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어서 슬쩍 물어봤더니, 정은은 코딩도 할 줄 아는 공대 만능 캐릭터였다. 그녀는 직접 짠 프로그램으로 데이터를 자동 정리하고, 다차원 분류와 정렬까지 가능하다고 했다.“와, 뭐야... 완전 반칙인데?”진욱은 결국 정은에게 부탁해 실험실 맞춤형 프로그램 하나를 따로 제작해달라고 했고, 그 이후, 데이터 정리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맞이했다. 진욱은 쓸 때마다 감탄하며 말했다.“진짜... 정은이 덕분이야. 이게 사람을 살리네.”하지만 어제 그 기특한 프로그램이 갑자기 먹통이 됐다. 손태민이 고쳐보겠다고 덤볐지만, 결과는... 풍비박산이었다. ‘이젠 누가 손댔다간 진짜 박살 나겠어...’ 결국 정은에게 SOS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재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오늘 시간 돼? 안 되면, 며칠 뒤도 괜찮고...]진욱은 훨씬 급했다. 말 그대로 살려달라는 마음이었다.[야, 오늘 안 데려오면... 나 여기서 바로 싸버린다! 진짜라고, 어?!]그는 어제 약 먹고 좀 괜찮아진 줄 알았건만, 밤새 배가 또 난리였다. 오늘 아침부터 실험실 화장실은 진욱의 전용이 되었다. 오전에만 6회 방문.그 말은, 그냥 협박 아니었다. 진짜 실현 가능성이 있었으니 말이다.정은은 상황을 듣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시간 돼요. 지금 바로 갈게요.”[그래. 그럼 내가 정문 앞으로 갈게.]‘굳이 마중까진 필요 없는데...’ 뚝-정은이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10분 뒤, 정은은 학교 정문 앞에서 재석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실험실로 걸어가며 프로그램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
진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렇게 마음이 있는 거면, 왜 정은이한테 솔직하게 말 안 해?”“겁나는 거지, 재석아? 말 꺼냈다가 거절이라도 당하면... 그땐 친구로도 남을 수 없을까 봐, 무서운 거잖아.”진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재석을 똑바로 바라봤다.“그건 너답지 않아. 내가 아는 재석이는, 망설이지 않고 결정하는 사람이었어. 결과가 불확실하다고 물러서는 사람 아니었잖아.”“정은이가 ‘지금은 연애 생각 없다’고 했지? 중요한 건 ‘지금은’이라는 거야. 사람 마음은 바뀌는 거고, 그때 거절했다고 지금도 똑같을 거란 보장은 없어. 알겠냐?”재석은 말없이 진욱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말이 생각보다 깊게 박혔다. ‘지금도 똑같을까? 아니, 혹시... 지금은 조금 다를 수도 있는 걸까...’진욱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야,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너 계속 질질 끌면, 정은이 뺏긴다. 그리고 뺏기고 나서 울어봤자, 소용없을 거야.”“우리 정은이 인기 많은 거 너도 알잖아. 예전에도 정은이 두고 싸운 애들 있었잖아. 그리고 오늘 그 남자 봤지? 얼굴 잘생겼지, 젊지, 에너지 넘치지, 옷차림 보니까 집도 잘 사는 거 같던데?”재석은 이런 말을 아주 듣기 싫었다.“닥쳐.”진욱도 더 이상 말하기 싫었다. “칫. 드디어 위기감이 좀 드나?”‘그래, 긴장 좀 해라. 맨날 냉정한 척만 하지 말고... 이번엔 너도 좀 불안해져 봐야지.’...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집에 바래다준 뒤, 약을 가정부에게 전달하며, 복용 방법까지 하나하나 직접 설명했다. 봉수진은 저녁까지 먹고 가라며 붙잡았지만, 정은은 이미 서준, 민지와의 약속이 있었다.“외할머니, 며칠 안에 다시 올게요. 오늘은 친구들이랑 약속이 있어서요.”“그래그래, 알았어. 젊을 땐 많이 만나고 다녀야지.”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고, 곧 차에 올랐다.약속 장소인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땐, 서준과 민지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테이블 위에
은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게요... 나야 뭐, 그랬으면 좋겠지만...”하지만 정은의 태도는 그리 확신을 줄 만큼의 호감은 아니었다.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분명히 좋아한다는 표시도 없는 애매한 선이 보이는 듯했다.‘그래서 더 미치겠어. 기대도 못 하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이러니까 계속 마음이 붕 떠 있잖아...’그렇게 속으로 앓고 있었지만, 정은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봉수진의 약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었다.VIP 약국답게, 일 처리는 정말 빨랐다. 정성스럽게 달인 약이 곧바로 팩 단위로 나뉘어 밀봉되었고, 음용 방법까지 깔끔하게 안내되었다.냉장 보관 후, 따뜻한 물에 데워 마시면 된다는 안내였는데, 이 정도면 환자도 거부감 없이 약을 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약을 다 받은 후, 약 한 시간쯤 지나 두 사람은 병원을 나섰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은의 전화가 울렸다.“여보세요? 외할머니? 네, 약 다 받아놨어요.”“병원에서 달여줬어요. 네, 거기 계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은 정은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은혁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오늘 고마웠어요. 외할머니 모시러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아, 어... 그래요! 잘 가요!”은혁은 여자의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심지어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한참을 그렇게 바라본 후에야 아쉬움 가득한 시선을 거두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고, 화면엔 ‘황기' 두 글자가 떴다.“여보세요?”[야 이놈아! 도시락 던져놓고 도망가듯 나가버리면 어떡해?! 말도 못 붙였잖아! 뭐가 그렇게 급해? 뭐가 외할아버지보다 중요한 거냐고?!]“죄송해요... 헤헤.”황기는 순간 당황했다. ‘얘 지금 뭐야? 미쳤어? 웃음은 왜 이렇게 정직하게 새어 나오는 건데...?’...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태우고 병원을 나서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재석은 약을 수령하고 외래 진료실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정은도 여기서 재석을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선배님, 병원엔 무슨 일로 오셨어요?”재석은 그제야 시선을 거둬들였다. 눈길이 정은에게 닿는 순간,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난...”“날 데려다주러 온 거야.” 그 순간, 전진욱이 배를 감싸 쥐며 천천히 다가왔고, 재석 대신 대답을 건넸다.정은은 진욱을 바라보다가 눈이 살짝 커졌다. “교수님,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하... 뭘 잘못 먹었는지, 아침부터 배탈이 나서... 약도 안 듣고... 이 사람이 막 끌고 오더라니까... 검사라도 받아보라고.”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하셨어요. 괜히 방치하다가 더 심해질 수도 있잖아요. 미리 체크하면 마음도 편하고요.”“어우, 너희 둘 미리 맞췄냐? 말이 어쩜 그렇게 똑같냐?” 진욱이 짐짓 장난스러운 말투로 투덜댔다.정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재석을 바라봤다. “그랬어요?”재석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빛 속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다. ‘저 말투, 저 표정... 나만 아는 게 아닐 텐데...’“정은 씨, 이제 가야죠.” 그때, 은혁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아, 네.” 정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 먼저 갈게요.”그렇게 말한 후, 은혁과 나란히 병원 복도를 걸어 나갔다.재석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두 사람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눈빛 속 감정은 복잡하고도 묘했다. ‘뭔데, 저 둘은 저렇게 자연스러워...’“재석아? 야, 재석아!”진욱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재석은 고개를 돌렸지만, 눈빛 속 싸늘함은 여전했다. 진욱은 그 눈빛에 소름이 돋아 어깨를 움찔거렸다.“너... 왜 그래?”“방금 정은이가 ‘저희’라고 했어.”“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재석을 바라봤다. 몇 초간 멍하던 그는 그제야 이해가 된 듯 말했다. “아... 그 ‘저희’? 그게 뭐 어때서? 같이 왔으니까 ‘저희’지. 그럼
얼마 지나지 않아 황 원장은 처방전을 프린트해서 정은에게 건넸다.“수고 많으셨습니다, 원장님.”정은이 공손히 인사하자 황 원장은 손을 휘저었다.“아이구, 무슨... 이 아가씨는 인사도 참 반듯하게 잘하네요. 말도 예쁘게 하고, 얼굴도 예쁘고. 이런 손녀가 있으면, 어디 내놔도 자랑이겠네요.”봉수진은 바로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럼요. 우리 손녀는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어요.”황 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장난스럽게 물었다.“이렇게 예쁜 아가씨한테 남자 친구가 없을 리 없는데? 그렇죠?”봉수진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없어요! 보통 남자애들은 우리 정은이랑 안 어울려요.”“허허, 그래도 우리 손자 정도면 꽤 괜찮은데...?”황 원장이 살짝 떠보자 봉수진은 손사래를 쳤다.“아이구, 그 얘긴 그만해요. 정은이 아직은 시집 안 보낼 거예요. 지금이 제일 곁에 두기 좋을 때라니까요.”‘아이고, 또 시작이다...’정은은 속으로 헛웃음 치며 처방전을 가방에 쏙 넣고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저, 약 지으러 먼저 다녀올게요!”...진료실 문을 나서는 순간, 정은은 누군가와 부딪혔다.“아, 죄송해요!”고개를 돌려 상대방을 본 순간 정은의 걸음이 멈췄다.“은혁 씨?”은혁은 보온 도시락 통을 들고 서 있었다.“정은 씨! 또 보네요. 우리 진짜 인연인가 봐요? 하하...”“여긴... 병원인데? 누가 입원하셨어요?”정은이 도시락을 보며 물었다.“아, 아니에요. 저 입원실 온 거 아니고요! 외할아버지가 이 병원 의사세요. 오늘 외래 당번이라 저희 어머니가 직접 도시락을 싸주셨는데, 제가 대신 가져다드리러 온 거예요.”“혹시 외할아버지 성함이 황 씨?”“네! 황기 원장님이세요. 한약재 이름에서 따오셨대요, 혹시... 아는 분이세요?”‘어머나, 진짜 인연인가?’정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오늘 저희 외할머니 진료도 황 원장님한테 받은 거예요.”“정말요? 세상에... 진짜 대박. 어쩐지 자꾸 마주치네요.”은혁은 정은 손에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