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어머니야. 오늘 아침에 운전해서 나가셨다가, 트럭이랑 사고가 났대. 지금 병원에 계시고... 그래서... L시에 같이 못 갈 것 같아.”재석의 말에 정은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L시에는 언제든 갈 수 있어. 지금은 어머님 먼저 챙기는 게 우선이죠. 얼른 병원 가봐요.”“이거, 너 가져가. 내 마음 조금 담은 거야. 가족분들, 친척분들께 전해줘.”“응, 알겠어요.”정은은 주저 없이 받아들였다.재석은 그녀의 이마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새해 복 많이 받아, 정은아.”그리고 짧은 인사를 끝으로,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삐 걸음을 옮겼다.그 사이, 소진헌과 이미숙은 먼저 개찰구를 지나고 있었는데, 뒤따라오던 재석이 보이지 않자 돌아보며 물었다.“어라? 조 교수는? 곧 기차 출발하는데?”정은은 간단히 설명했다.“어머님이 교통사고가 나셔서요. 병원으로 가셨대요.”소진헌은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에구... 명절날 이런 일이... 그래도 조 교수, 옆에 있어드리는 게 맞지. 그게 자식 도리야.”“네, 우리도 어서 가요.”정은은 마지막으로 한 번 뒤를 돌아봤다.재석의 모습은 이미 인파 속에 사라진 뒤였다.‘그래도... 다행이다. 크게 다치시진 않았다고 했으니.’“가요.”정은은 소진헌의 팔짱을 끼며 걸음을 옮겼다.소진헌은 양손 가득 짐을 들며 중얼거렸다.“이건 뭐... 선물 가게 하나 차릴 기세네.”정은은 웃으며 손에 든 보자기를 살폈다.자연산 전복, 비싼 과일, 인삼 세트...‘진짜 이 사람, 마음씀씀이 하나는 알아줘야 해.’...점심쯤, 기차는 정시에 L시에 도착했다.세 사람은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고, 짧게 짐을 정리하며 쉬었다.오후 5시.소진헌이 직접 운전대를 잡고, 정은과 이미숙을 태우고 큰형 소진우가 있는 집으로 향했다.소진헌 일가가 아직 소진우 집 문턱도 넘기 전에, 안에서부터 웃음소리가 퍼져 나왔다.그중에서도 유독 큰 목소리... 주덕순의 쏘아붙이는 웃음이었다.“하하하. 내가 뭐랬
이미숙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심정훈은 잔잔하게 웃으며 말했다.“이 잔은 미숙 작가에게 바치려네. 산속에 있을 때, 자네가 쓴 새 책을 다 읽었어. 정말... 울림이 컸어.”‘이 사람은 내가 젊은 시절부터 마음에 두었던 여자야.’‘잊은 적도 없고, 놓아본 적도 없어.’‘그래서일까, 여전히... 멋진 사람이네.’이미숙은 말없이 와인잔을 들어 올렸다.살짝 몸을 숙여 심정훈의 잔과 맞닿자, 고급 유리끼리 부딪치는 맑은소리가 울렸다.“고마워요.”이미숙은 담백하게 말했다.“내년에 나오는 새 책도... 기대할게.”말을 마친 심정훈은 잔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어머머, 천천히 마셔요. 가족끼리 밥 먹는데 뭘 그렇게 벌컥벌컥.”봉수진이 놀라며 말렸지만,심정훈은 손을 살짝 흔들며 웃었다.“괜찮아요. 오늘은 그냥... 기분이 좋아서요.”그리고 다시 잔을 채우며 말했다.“이 잔은 장모님, 장인어른께.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항상 웃는 일만 가득해지시길 바랍니다.”“에이... 말도 참 곱게 하네.”봉수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술이 약한 그녀 대신 이춘재가 잔을 받아 대신 들었다.그리고 마지막 한 잔.심정훈은 잔을 들고 아들에게 시선을 맞췄다.“마지막은... 현빈이 너에게. 올해 정말 고생 많았다.”‘내가 회사를 내려놓고 산으로 들어간 그 시간 동안...’‘모든 걸 짊어진 건 너였지. 미안하고, 고맙다.’현빈은 묵묵히 잔을 들어, 아버지의 잔과 가볍게 부딪혔다.“뭐 한 마디 없냐?”심정훈이 웃으며 말했다.“무슨 말이요?”“새해 덕담 같은 거라도.”현빈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그럼... 평안하게, 오래오래 사세요.”“하하하하!”심정훈은 웃음을 터뜨렸다.“산에 있을 때 눈사태 많이 맞았거든. 실용적인 덕담 고맙다.”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다시 들었다.“그럼 나도 한마디 하자. 현빈아, 너도... 마음먹은 대로 다 되길 바란다.”그 마지막 말을 하며, 심정훈의 시선이 아주 잠깐 정은을 스쳐 지
말을 마친 조기봉은 옆에 앉은 강서원의 팔을 살짝 건드리며 말했다.“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강서원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조용히 말했다.“처음 인사드리는 자리인데, 예의는 갖춰야지. 우리 집안이 그런 기본도 없는 줄 오해하시면 안 되잖아. 잠시 후에 집사한테 창고 열쇠 받아서, 괜찮은 선물 몇 개 챙겨가라.”“네, 고마워요. 어머니.”재석은 정중하게 인사했다.그날 밤, 집에 돌아간 재석은 제일 먼저 정은에게 전화를 걸었다.“정은아, 우리 집에서 다 괜찮다고 했어. 너랑 나랑 같이 L시에 가는 거.”전화기 너머, 들뜬 그의 목소리에 정은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설날 한 번 같이 가는 게 뭐 그렇게 좋아?]“그게 말이지. 우리 둘이 만난 이후로 첫 명절이잖아. 첫 설날, 처음으로 같이 보내는 해다.”정은은 그제야 잠시 멈칫했다.‘그러고 보니... 우리가 알고 지낸 시간은 길었는데...’‘명절을 함께 보낸 적은 없었네.’“올해는... 가능하네.”재석이 잔잔하게 말했다.그때, 전화기 너머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누구야, 정은이?]소진헌의 목소리였다.정은은 자연스럽게 재석이 한 말들을 전했고, 아빠의 의견도 함께 묻기로 했다.전화기를 스피커폰으로 바꿨다.낮고 안정된 재석의 목소리가 집 안에 울렸다.“아버님, 저희 부모님 모두 찬성해 주셨어요. 혹시 아버님과 어머님께서도 괜찮으신지 여쭤보고 싶어서요.”소진헌은 잠시 조용하더니, 금세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뭐야, 우리랑 같이 가겠다는 건데 우리가 거절할 이유가 어딨어? 정은이 엄마도 엄청나게 좋아할 거다. 두 팔 벌려 환영이지.]“감사합니다, 아버님.”재석이 낮고 진심 담긴 목소리로 답했다.[가족끼리 무슨 감사는. 우린 내일 정은이 외할아버지 댁에서 가족 모임하고 하루 자면, 모레 아침에 바로 내려갈 거야. 시간 맞춰서 같이 가자.]“네, 그렇게 하겠습니다.”‘올해 설날은 정말 특별하겠네. 정은이 곁에서, 가족들과 함께...’‘처음으로 같은 시간을 보
지언이 집에 들어섰을 때, 마침 저녁상이 차려지고 있었다.아직 아무도 식탁에 앉지 않은 상태였다.“어라... 오셨어요?”지훈이는 슬리퍼를 끌며 익살스러운 말투로 장난치듯 현관으로 다가왔다.“오늘은 외박할 줄 알았는데요? 이렇게 일찍 들어오실 줄 몰랐습니다.”지언은 말없이 눈만 들어 지훈을 힐끗 봤다.“난 너처럼 밤새 돌아다니고, 이 여자 저 여자 전전하며 방황하진 않아.”“야야, 그건 좀... 나 그냥 호텔에서 잔 거야! 뭘 그렇게 크게 부풀려. 변호사 상대로 허위 사실 유포? 명예훼손으로 고소 각이야.”지언은 말없이 신발을 갈아 신고 지훈을 스쳐 지나 거실로 향했다.지훈은 능청스럽게 따라붙으며 물었다.“근데, 어땠어?”“뭐가.”“헤헤... 아이 엄마랑은 좀 진전이 있었어?”“진전이라는 게?”“마음에 불을 지르고 왔냐고요. 심쿵 한 방 날렸냐고.”“한가하다 진짜.”“에이, 형 반응 보니까... 불은커녕 라이터도 꺼내지 못했구먼?”“어머니! 큰아들 작전 실패했어요! 손자와 손녀 데려오는데 실패했답니다!”지훈은 일부러 식탁 쪽으로 크게 떠들며 엄살을 부렸다.그 말에 2층에서 바로 강서원이 내려왔다.“지언이 왔니?”“네, 어머니. 아버지.”“그래, 변리아 씨랑은 잘 얘기했니? 아이들 관련해서는 뭐라던? 우리 쪽 성으로 변경하는 건 동의했어?”강서원은 요즘 재석과 정은의 일엔 관심도 없고, 온 신경이 손주 손녀에게 쏠려 있었다.조기봉 역시 묵묵히 지언을 바라봤다. 그 눈빛엔 은근한 기대가 담겨 있었다.‘갑자기 할아버지 된 기분,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기분이 너무 좋아.’‘쌍둥이라니, 이건 그냥 로또 아닌가?’요즘 조기봉은 모임만 나가면 등 펴고 어깨 활짝 하며 목에 힘주고 다닌다. 그리고 모임만 나가면 손주 자랑에 자신감 폭발.“우리 집 첫 손주는요, 쌍둥이입니다. 남매 쌍둥이!”그렇게 온 가족의 시선이 지언에게만 집중되고 있었다.지원은 가볍게 헛기침하며 입을 열었다.“일단 얘기는 잘 마쳤어요.”“
리아가 바로 물었다.“그래서, 당신이 원하는 게 뭐예요?”지언이도 정확하게 말해줬다.“변리아 씨한테서 아이를 빼앗겠다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나는 아이들의 아버지로서 내가 마땅히 져야 할 책임을 질 생각입니다.”“그리고 아이들이 자라나는 과정에서, 아버지라는 성인 남성 역할이 꼭 필요해요. 그게 건강한 인격 형성과 성격 발달에 큰 영향을 끼치거든요.”“그래서?”“공동 양육을 하고 싶어요. 변리아 씨랑 나, 함께 아이들을 키우자는 뜻이에요.”리아는 눈썹을 살짝 치켜들었다.지언은 급히 덧붙였다.“오해하지 마요. 나는 아이들의 아버지고, 변리아 씨는 어머니예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우리 사이에 뭔가 있다는 의미는 아니고...”리아가 바로 찬성했다.“좋아요.”지언이 오히려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반응이 왜 그래요?”리아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이런 반응이 그렇게 당황스러울 일인가?’지언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난 변리아 씨가 좀 더 신중하게 고민할 줄 알았어요. 솔직히 거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니까.”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말했다.“첫째, 대답이 빠르다고 해서 신중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에요. 생각의 깊이와 넓이는 시간의 길이와 꼭 비례하지 않거든요.”“둘째, 당신 말이 맞아요. 나 혼자서도 아이들 잘 키울 자신 있어요. 하지만 아버지라는 존재의 부재가 아이들에게는 결국 빈자리로 남겠죠. 그게 성장 과정에서 어려움이나 상처가 되지 않을까, 늘 고민했어요.”“사실, 육아 전문가처럼 아이들에게 아버지 역할을 해줄 사람을 찾는 것도 생각했어요. 곁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주고, 삶을 가르쳐줄 수 있는 그런 사람.”“근데... 결국 진짜는 아니니까요. 아무리 역할을 잘해도, 혈연이라는 연결 고리가 없으면 그건 어딘가 비어 있는 거잖아요. 그걸로 아이들을 속이는 게, 차라리 아무도 없다는 현실보다 더 잔인할 수도 있으니까.”‘맞아, 그래서 끝내 그 누구도 곁에 들이지 못했어.’지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리
변리아는 문득 생각했다.‘조지언, 이 사람... 내 인생에 나만큼 재수 없게 엮인 피해자는 없을걸?’그녀가 보기엔, 지언은 아무 이유도 없이, 원하지도 않았던 관계에 휘말렸고, 기억조차 못 하고 있었던 일 때문에 몇 년 뒤 아이 둘을 데리고 나타난 자신으로 인해 결국 약혼식까지 박살 났다.게다가 세상은 ‘진실’보다 ‘그럴듯한 오해’를 더 믿었다.지언은 그렇게 순식간에 ‘파혼당한 남자’에서 ‘무책임한 쓰레기’로 전락했다.‘나라면 절대 가만 안 있었을 거야.’리아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자기였다면 소송이고 뭐고, 세상 끝까지 책임 묻고 복수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지언은 지금 이렇게 태연하게 앉아 있었다.아이들 앞에서조차 평정심을 잃지 않고, 무너지지도 않았다.‘이 사람, 진짜 멘탈 갑이네.’설수환의 말이 라아의 귓가를 스쳤다.“애들 머리 좋은 거 보면, 친부 유전자 맞다니까?”‘진짜 그럴지도 몰라...’라아도 속으로 친구의 말을 인정했다.그때, 알바생이 주문한 음료와 디저트를 들고 와 환하게 인사했다.“귀여운 친구들, 따뜻한 우유랑 디저트 나왔어요! 맛있게 드세요!”“감사합니다, 누나!”현우는 여전히 활발하고 붙임성이 있었다.“감사합니다.”현민은 여전히 조용하고 자기 표현이 명확했다.하나는 따뜻하고, 하나는 차분하다.지언은 둘의 대비되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현민이... 혹시 기분이 안 좋은 걸까요?”리아는 있는 그대로 대답했다.“아니에요. 원래 이런 아이예요.”“그렇구나...”지언은 짧게 대답했지만, 어쩐지 속으론 뭔가 더 알고 싶은 기분이었다.리아는 진한 아메리카노를 들고 한 모금 마셨다.‘으... 역시 나랑은 안 맞아. 라떼 시킬걸.’잔을 내려놓으며 조용히 말했다.“오늘 나 보자고 한 거... 현민이 때문만은 아니죠?”지언은 한순간 망설였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응. 좀 얘기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남자의 시선이 아이들을 향해 잠깐 스쳤다. 말을 고르는 모습이 역력했다.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