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를 들어 정은을 본 순간, 아무 표정도 없는 얼굴에 순식간에 웃음기가 감돌았다.어르신에게 신발을 사야 하니 디자인만 보아서는 안 되며 편안함도 고려해야 한다.그렇다고 편안함만 따지고 디자인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정은은 서점에서 이춘재를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지팡이를 짚은 노인은 양복 조끼를 입고 있었고, 머리를 깔끔하게 빗어 마치 신사와 같은 기질을 내비쳤다.옷차림에도 신경을 많이 썼으니 신발도 잘 골라야 했기에 시간이 좀 더 걸렸다.흔한 구두 재질은 그 몇 가지밖에 없었기에 정은은 가장 편한 두 가지 재질을 선택했고, 이어서 점원에게 이 두 가지 재질로 만든 신발을 모두 골라내라고 했다.그사이 재석은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곧 정은은 두 켤레를 골랐다.“이 두 켤레가 다 괜찮은 것 같아요. 심 대표님이 하나 골라요.”현빈은 직접 카드를 꺼냈다.“뭘 골라? 두 켤레 다 포장하면 되지. 네가 골랐으니 할아버지는 틀림없이 엄청 좋아하실 거야.”정은은 믿지 않았다.“에이, 설마요.”“나중에 시간 나면 우리 할아버지 뵈러 가지 않을래? 그럼 두 분이 널 얼마나 좋아하시는지를 알 수 있을 거야.”“나도 그러고 싶어요. 두 분 다 아주 친절해 보이시거든요...”현빈의 눈빛이 갑자기 부드러워졌다.점원이 포장할 때, 현빈은 정은에게 차 한잔 따라줬다. 물이 좀 식은 것을 발견하고 또 다른 점원에게 물을 끓이라고 했다.그리고 나서야 정은에게 건네주었다.“차 좀 마셔, 따끈따끈해.”“고마워요.” 정은은 잔을 받았지만 시선은 여전히 진열대에 떨어졌다.그녀는 소진헌에게 한 켤레 골라주고 싶었다.현빈은 정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더 마실래?”정은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고마워요.”그는 일어나더니 정은의 손에 있는 빈 잔을 가져왔다.그리고 이 장면은 마침 안으로 들어온 이미윤에게 발각되었다.그녀는 눈썹을 치켜세웠지만 그리 놀라지 않았다.이미윤은 현빈이 바람둥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분수가 있어, 여자를 갖고
다 먹은 뒤, 이미윤은 계산하러 갔다.두 사람 모두 얼마 먹지 않아서 음식은 아직 많이 남았다.이쪽의 두 어머니는 수심이 가득했지만, 그쪽의 현빈과 재석은 각기 수확을 얻었다.하나는 양복을, 하나는 구두를 샀기에 모두 기분이 좋았다.현빈이 말했다.“앞에 밀크티 가게 있는데, 뭐 마실래?”재석도 같은 시간에 입을 열었다.“그 케이크 가게가 엄청 유명한데...”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말했고, 서로를 힐끗 보더니 적의를 드러냈다.“정은아, 우리 같이 밀크티 사러 갈래?”“들어가서 한번 볼래?”두 남자는 모두 그녀를 간절히 바라보고 있었다.‘뭐야, 왜 또 이래!’“그냥 각자 사러 가세요. 난 화장실에 가고 싶으니까요.”현빈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그리고 재석을 바라보며 물었다.“교수님은 밀크티를 마시고 싶지 않으시겠죠?”“만약 심 대표님이 사는 거라면 한 잔 마셔도 괜찮을 것 같아요.”“그래요.” 현빈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은근히 이를 갈고 있었다.“그리고 보답으로 내가 심 대표님에게 케이크를 사줄게요.”이 말을 듣자, 현빈은 더욱 화가 났다.두 사람은 각자 줄을 섰다.정은이 화장실에서 나올 때, 현빈은 양손에 밀크티 한 잔씩 들고 있었고, 탁자 위에 한 잔 남아 혼자 들 수 없었다.그는 종업원에게 포장해 달라고 부탁하려 했다.정은이 먼저 입을 열었다.“내가 들게요.”두 사람은 말하면서 케이크 가게로 갔다.“서원아? 서원아?!”“응? 뭐라고?”“뭘 그렇게 넋 놓고 보는 거야? 불러도 대답을 안 하다니.” 이미윤은 그녀의 시선을 따라 바라보았는데 케이크 가게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강서원은 손을 흔들었다.“아무것도 아니야.”말은 그렇게 했지만 안색은 매우 좋지 않았다.‘그 여자아이, 뜻밖에도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니. 심지어 웃고 떠들며 함께 밀크티까지 마시면서 쇼핑을 하고 있어! 그건 커플끼리 하는 일 아니야?!’비록 그 남자의 뒷모습만 밖에 보지 못했지만, 옷차림과 기질만 보아도 조건이 나쁘지 않다
이때 정은은 다른 진열대에 놓인 케이크에 매료되어, 두 남자가 기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재석은 계산을 마치고 고개를 돌리자, 정은이 한 케이크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5층으로 된 케이크에 한층마다 정교한 피규어를 놓았다.“예뻐?”“네.” 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너무 정교하게 잘 만들었어요.”그리고 2층을 가리키며 말했다.“선배님, 이 안경 쓰고 눈살을 찌푸리는 피규어 말이에요, 선배님과 닮지 않았나요?”재석은 한동안 자세히 보더니 진지하게 말했다.“아니. 내가 언제 자주 눈살을 찌푸렸지?”“눈살을 찌푸렸지만, 선배 자신이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을 수도 있잖아요? 예를 들면 지금이요.”재석은 멍하니 있다가 문득 장난치다 들킨 어린아이처럼 궁핍하고 마음이 찔렸다.“하하...”정은은 웃음을 터뜨렸다.“선배님 정말 귀엽네요.”세 사람이 케이크 가게를 막 나서자, 재석의 핸드폰이 울렸다.“네, 어머니.”[재석아, 집에 한번 돌아와.]강서원의 목소리는 심각하고 엄숙했다.“무슨 일이세요?”[돌아와서 얘기하자.]“네.”통화를 마치자, 재석은 집에 무슨 일 생겼을까 봐 걱정했다.“미안, 집에 일이 좀 있어서 먼저 갈게.”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려 했고, 마침 현빈도 누군가의 전화를 받았다.“네, 알겠어요.”전화를 끊자, 현빈은 재석을 바라보았다.“공교롭게도 저희 집에도 일이 좀 생겼네요. 하지만 그전에 전 먼저 정은을 집에 데려다줄 테니, 교수님은 얼른 일 보러 가세요.”정은은 얼른 손을 흔들었다.“아니에요, 두 분 다 얼른 가서 일 봐요!”재석은 무슨 말을 하려다 말았다.정은은 재빨리 말했다.“정말 그럴 필요 없어요. 어차피 걸어서 10분이면 도착할 텐데, 아무도 데려다줄 필요가 없단 말이에요.”말이 끝나자 정은은 다시 고개를 돌려 현빈을 보았다.“심 대표님도 빨리 가요. 중요한 일 그르치면 안 되잖아요.”현빈과 재석은 눈을 마주치며 누구도 지려 하지 않았다.결국 정은의 재촉으로
“어머니!” 재석은 강서원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이미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잘 알고 있었다.“제가 이미 말씀드렸잖아요. 지금은 이런 것들을 고려할 마음이 없다고.”강서원은 꾹 참더니 잠시 후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너 여자친구 생겼지?”재석은 멈칫하다가 머릿속은 저도 모르게 정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는 결국 고개를 저었다.“아니요.”강서원은 믿지 않았다.“그럼 네 손에 들고 있는 그 양복은 어떻게 된 거야? 너 혼자 사러 갔어?”재석은 고개를 숙이고 손에 든 쇼핑백을 바라보며 되물었다.“이게 양복인 줄은 또 어떻게 아셨어요?”강서원은 가슴이 찔렸다.“그 로고가 얼마나 선명한데. 그 집은 양복만 만들었으니 또 뭐 다른 게 있겠어? 이제 내 질문에 대답할 수 있겠니?”재석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친구와 함께 골랐어요.”“친구? 남자야 여자야? 어떤 친구인데?” 강서원은 계속해서 물었다.“어머니, 오늘 단지 이런 걸 물어보기 위해서 저를 부르신 건가요?” 재석은 눈살을 찌푸렸다. “다른 일 없으면 저 먼저 실험실로 돌아갈게요.”강서원은 한참 동안 재석을 살펴보았지만, 그는 표정관리를 완벽하게 하여 조금의 허점도 드러내지 않았다.강서원이 또 무슨 말을 하려 할 때, 조기봉은 갑자기 찻잔을 내려놓았다.“당신도 이제 그만 좀 해. 재석이가 얼마나 바쁜 사람인데, 그래도 당신의 전화 한 통 때문에 바로 달려왔잖아. 그런데 또 뭐가 불만인 거야?”강서원도 너무 몰아붙이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렇다고 그 얄미운 계집애가 계속 뻔뻔하게 우리 재석이 곁에 남게 할 수는 없잖아? 정말 안달이 나네!’...심씨 가문에서.이미윤 역시 아들을 집으로 불렀는데, 강서원에 비해 그녀는 그렇게 당황하지 않았다.완곡하게 떠볼 필요 없이 이미윤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너 요즘 만나는 애 바꿨어?”‘여자친구’가 아닌 아무런 호칭도 없는 ‘만나는 애’였다.현빈은 눈썹을 치켜세웠다.“왜 갑자기 제 사생활에 관심
젊었을 때 사고를 안 쳐본 재벌 2세가 어디 있을까?그러나 놀아도 되지만 절대로 여자에게 빠질 수는 없었다.이미윤도 말을 직설적으로 하기가 불편했고, 일어나지 않은 일을 걱정하는 건 더욱 말이 안 됐기 때문에, 그녀는 은근히 일깨워줄 수밖에 없었다.“남녀 방면의 일은 너도 좀 주의해. 경험이 풍부하다고 해서 여자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마. 그러나 제대로 다칠지도 몰라.”현빈은 영문을 몰랐다.“어머니,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은 거죠?”이미윤은 더 이상 언급하고 싶지 않아 화제를 돌렸다.“며칠 전에 내가 닥터 성에게 연락했는데, 네 할머니의 눈과 몸이 많이 호전되었다고 하더라. 시간 좀 잡아줘. 나도 어르신들 만나고 싶으니까.”닥터 성은 심씨 가문이 투자한 병원의 유명한 안과 과장이며 봉수진을 다년간 치료해온 주치의이기도 했다.이미윤은 미리 병원에 인사를 한 적이 있는데, 봉수진의 몸이 호전되면 즉시 전화로 자신에게 통지하라 했다.“전에 네 할머니가 몸이 안 좋으셔서 자극을 받으면 안 된다며 당분간 만나지 말라고 했잖아. 지금 의사도 상태가 많이 좋아지셨다고 했으니 날 막을 이유가 또 뭐가 있어?”이미윤은 현빈을 보면서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벌써 알아차린 것 같다.현빈은 말이 막혔지만 그래도 완곡하게 주의를 주었다.“할머니는 호전되셨지만 정신상태는 여전히 매우 안 좋지 않아요. 일단 자극을 받으시면 쉽게 악화될 수 있으니 될수록 방해를 하지 않는 게...”“자신의 딸을 만나는 것일 뿐, 무슨 자극을 받을 수 있겠어?”현빈은 이미 조심스럽게 표현을 했지만, 이미윤은 여전히 노발대발했다.“나는 네 할머니의 딸, 유일한 딸이라고! 수십 년이나 지났는데, 두 분은 왜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시는 거지?!”“어머니...”“내가 보기에, 네 할머니는 눈이 멀었을 뿐만 아니라 마음도 멀었어! 그동안 누가 곁에서 두 분 챙겨줬는데? 또 누가 두 분을 위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병원을 찾아줬는데? 그런데 그 결과는?!”이미윤은 이를 갈며
잠든 추억이 다시 깨어났다.조각난 기억이 스치자, 이미윤은 절망적이고 눈물을 머금은 두 눈을 떠올렸고, 그것은 여러 차례 자신의 꿈에 나타났다.그녀는 목이 쉬었다.“이미숙이 납치된 것은 우리 가문을 겨냥한 나쁜 사람들 때문인데,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 거지? 내가 이미숙과 같이 외출해서?” “그 여자가 실종된 것을 다 내 탓으로 돌리는 것이 공평하다고 생각해? 진작에 이럴 줄 알았다면, 난 차라리 내가 납치를 당했으면 좋겠어. 그럼 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지금 날 엄청 그리워하시겠지?”이미윤은 마치 어떤 추억에 잠긴 듯 멍을 때리며 눈물만 뚝뚝 흘렸다. 심지어 자신을 원망하기까지 했다.현빈은 자신의 어머니가 이렇게 우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봉수진이 최근 에 푹 빠진 것을 떠올리며, 그는 이미윤에게 말했다.“할머니는 최근 이라는 추리 소설을 엄청 좋아하셔요. 작가의 사인, 특히 인사말이라도 받을 수 있다면 엄청 기뻐하실 거예요.”이미윤의 표정이 다시 밝아지자, 현빈은 무언가를 떠올리며 다시 주의를 주었다.“할머니의 성격을 잘 알고 계시잖아요. 천천히 다가가는 것이 좋을 거예요. 사인 받은 책을 구하신 다음, 먼저 저에게 통지하세요. 그때 가서 제가 다 안배할 테니까...”그렇지 않으면 이미윤은 일을 망칠 수도 있었다.“그래, 알았어.” ‘그냥 책 하나일 뿐이잖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건 문제도 아니지.’현빈은 희망을 잔뜩 품은 이미윤을 보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할 말은 다 했으니 남은 건 시간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이때 비서의 전화가 걸려왔다. 처리해야 할 긴급서류가 있다고 해서 현빈은 회사로 달려갔다.이미윤은 집사를 찾아와 신신당부했다.“작가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요. 어차피 책 제목을 이미 알고 있을 거 아니에요. 최근에 새로 나온 추리 소설이니, 얼마를 쓰든, 무슨 방법을 쓰든 꼭 구해야 해요!”“방금 도련님께서는 작가님의 인사말을 받는 게 더 좋을 거라고 하셨는
옆에는 까불고 있는 신진호가 주전자를 들고 있었고, 그의 뒤에는 큰 가방을 든 탁재운이 있었다.정은은 시선을 뗐다.그녀는 경혜와 별로 친하지 않았다.“정은 언니!” 민지가 멀리서 달려오며 그녀를 향해 손짓했다.민지는 큰 여행용 가방을 메고 있었는데, 불룩해서 보기만 해도 무거웠다.선크림, 모기약, 모자, 물... 물론 빼놓을 수 없는 간식도 있었다.“엄청 많이 준비했으니까 이따가 같이 먹어요.”“그래.”“어? 서준이는요? 아직 안 왔어요?”지각할까 봐 민지는 종종걸음으로 달려왔고, 겨우 5분 앞당겨 도착했다.그녀보다 일찍 도착한 서준은 어이가 없었다.“내가 너보다 더 늦을 것 같아? 그게 말이 돼?”민지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나보다 2분 일찍 도착한 게 뭐가 대단하다고? 난 다시 잠들었을 뿐이야. 그런데... 두 사람 가방은 왜 다 그렇게 작지?”정은은 말할 것도 없고, 서준조차도 작은 여행가방 하나만 메고 있었다. 그것도 안이 텅 빈 것 같아 전혀 무게가 없어 보였다.“이번에 갈 그 식물기지는 시설 같은 게 잘 갖춰져 있다고 해서 필수품만 챙겨왔어.”정은이 설명했다.서준도 마찬가지였다.‘그래서 나만 큰 가방을 멘 거야? 거의 간식만 담은 가방을?’8시, 교수님은 인원수를 체크했고, 모두 도착한 것을 확인한 후, 일일이 줄을 서서 버스에 올랐다. 이번 목적지는 교외에 위치한 식물기지로서 약 100킬로미터였고, 운전만 해도 3시간이 걸렸다.차에서, 민지는 정은과 함께 앉았고 서준은 뒤쪽에 있었다.도중에 반산길을 지나야 하는데 신호가 좋지 않아 핸드폰을 놀지 못했다. 그래서 서준은 아예 킨들을 꺼내 논문을 보았다.민지는 성격이 좋아서 다른 사람들과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남들과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정은은 별다른 일이 없어 턱을 짚은 채 길가의 풍경을 감상했다.이른 아침, 들쑥날쑥한 산봉우리가 하나둘씩 이어져 있었고, 겨울은 날이 매우 늦게 밝아서, 출발한지 한참 되어서야 날이 밝아졌
서준은 말문이 막혔다.정은이 말했다.“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희귀 식물을 한번 찾아보자.”만점 받기 싫은 사람이 또 어딨겠는가?“그래요! 사실 100점이든 80점이든 상관없어요. 난 언니와 쮼과 함께 놀러 가고 싶거든요.”세 사람은 잠시 휴식을 취하고 다시 출발했다.희귀식물은 고정된 리스트가 없어, 주관 문제에 해당하며 공인된 흔하지 않은 식물이면 된다.그러나 이번에는 그렇게 순조롭지 못했다.어둠의 장막이 내리자, 민지는 피곤해서 숨을 헐떡였다.“우리... 거의 십여 개의 구역을 돌아다니지 않았어? 희귀식물의 잎조차 보지 못했잖아. 대체 언제까지 찾아야 하지? 나 너무 배고파, 밥 먹고 싶어...”최근 서준은 민지를 끌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달리기를 했다. 칼로리를 많이 소모해서인지 아니면 기타 어떤 이유 때문인지 민지는 자신이 툭하면 배가 고프다는 것을 발견했다.지금 두 다리가 나른해져서 정말 걸을 수가 없었다.정은도 힘들었다.그러나 앞의 두 작은 구역만 더 탐색하면, 이 큰 구역을 끝낼 수 있었기에, 내일이면 여기에 오지 않아도 됐다. 그리고 시간도 충분했다.“우리 좀만 더 버티자.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A구역의 마지막 두 구역을 다 탐색할 수 있을 거야. 자, 승리가 바로 코앞에 있어.”“두 개밖에 안 남았어요?”“응.”“그럼 저 쉬지 않을래요. 같이 가요! 이제 딱 마지막 한걸음밖에 안 남았으니, 이때 포기하면 저 정말 후회할지도 몰라요. 얼른 가요!”말하면서 민지는 일어나려고 했다.“급하지 않아.”정은은 얼른 민지를 붙잡았다.“2분만 더 쉬자. 그리고 물 마시고 음식 좀 더 챙겨 먹어.”“네!” 민지는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릴 뻔했다.“정은 언니밖에 없는 것 같아요.”말하면서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정은과 서준은 그런 민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그러나 잠시 앉아 있다가, 민지는 수상함을 발견했다.“점점 더워지는 것 같지 않아요?”정은이 사방을 둘러보더니 확실히 이상함을 감지했다.여기의 식물은 작황이 보
정은은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매고 창밖을 슬쩍 바라봤다. 공장은 호텔에서 10km 떨어진 개발지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은혁이 운전대를 잡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 구역은 첨단 기술 산업 클러스터로 지정돼 있어서, 기술 협력 프로젝트도 대부분 그쪽으로 집중되고 있어요.” “정은 씨가 찾는 그 새로운 감온 정확도 소재는 우리랑 CG그룹이 공동 개발한 건데, 지금까지 1세대부터 3세대까지 세 가지 버전이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했고, 중간중간 전문적인 질문도 빠짐없이 던졌다. 은혁이 답할 수 있는 부분은 성의껏 설명했지만, 구체적인 수치나 실험 조건처럼 세세한한 부분은 바로 대답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약 20분 후, 두 사람은 공장에 도착했다. 은혁이 미리 연락해 둔 덕분에, 정문 앞에는 담당자가 나와 있었다.정은은 안내받아 간단히 실험실과 공장을 둘러봤다. 연구 구역과 생산라인은 전혀 겹치지 않게 구획이 나뉘어 있었고, 현장도 전반적으로 정돈된 느낌이었다.정은이 요청한 소재의 1세대와 2세대는 이미 완제품으로 확보되어 있었지만, 3세대는 아직 실험 단계였기에 정식 생산은 되지 않았다. 따라서 실험실에서 직접 합성해야 했다.“시간은 얼마나 걸리죠?” 정은이 은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혁은 옆에 있는 연구원을 바라봤다.“8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내일 오전엔 제품 받아보실 수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관련 비용은 정산대로 처리해 주세요. 최종 결정되면 한 번에 입금할게요.”은혁은 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비용은 무슨 비용... 정은 씨,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요.”정은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럴수록 더 딱딱하게 해야죠. ‘친할수록 돈 문제는 분명하게.’ 이건 기본이에요. 더군다나, 우리 둘은 그냥 ‘친구’일 뿐인데, 은혁 씨가 도와주는 것만 해도 충분히 고마워요.”“게다가 실험실도 예산이 따로 있는 조직이고, 모든 비용
실험실에서 진욱은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르게 재석을 힐끔거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다가갔다. “재석아, 너 오늘 길 가다 돈 주웠냐?”실험대 앞에서 입꼬리를 내릴 줄 모르던 재석의 손이 잠깐 멈췄다. “데이터 정리는 다 됐어? 3차 실험 가능성 평가 보고서는 언제 낼 건데?”“하, 이 사람 분위기 다 깨네.” 진욱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근데 말이야, 오늘 아침에 네가 샌드위치 먹는 거 봤거든.”“그래서?”“정은이가 해준 거지? 다 알아. 너희 둘, 다시 잘 되는 거야? 그것도 아니면, 이제 미련 접은 거야?” 재석은 살짝 고민하다가, 이제는 말해도 되겠다 싶어 입을 열려고 했다.바로 그때, 핸드폰에서 톡 알림이 떴다. 정은이었다.[도착했어요. 샌드위치는 맛있었어요?]재석은 바로 답장했다.[맛있었어.]정은은 곧장 자신의 일정을 재석에게 알려줬다.[지금 호텔 체크인하고, 오후엔 공장 갈 거예요.][응, 알겠어.]1분 정도 지났지만, 그다음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재석은 괜히 허전해졌다.‘예전에도 이렇게 대화했었는데... 왜 지금은 이걸로는 부족하지?’정은과 더 오래 이야기하고 싶었다. 더 많은 말, 더 사적인 얘기, 더 가까운 거리. 그 마음은 마치, 가려운 곳을 손톱 끝으로 슬쩍 긁은 느낌. 절대 시원하지 않았다. 그냥 더 간지러워질 뿐.‘그냥, 정은이한테 세게 할퀴어지고 싶은데...’“누구랑 톡하냐?” 진욱이 슬쩍 핸드폰을 들여다보려 다가왔다.재석은 피할 틈도 없이 화면을 들킨 셈이 됐다. “뭘 감춰. 정은이랑 메시지 주고받는 거잖아. 왜? 뭐가 부끄럽다고.”“됐고.” 재석은 핸드폰을 집어넣고, 실험대에서 내려왔다. “오늘 점심은 내가 쏜다. 뭐 먹고 싶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몇 초 멈췄다. 옆에 있던 미진이랑 태민이 눈을 마주쳤다. “교수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갑자기 점심을요?”재석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먹고 싶은 거 생각나면 전 교수한테 말해.
비행기 이륙 직전, 은혁이 정은에게 제한했다. “정은 씨, 내 마일리지로 좌석 업그레이드해 줄게요.”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은혁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다시 다가와 말했다. “내가 정은 씨 옆자리로 바꿨어요.”비즈니스석에서 이코노미석으로 자리를 바꾸다니, 웬만한 사람이면 거절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은혁 씨,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정은은 단호한 어조였다.‘처음으로 이렇게까지 분명하게 말한 것 같아.’정은은 연애 한 번 안 해본 소녀가 아니었다. 은혁의 눈빛에 담긴 감정이 어떤 건지, 모를 리 없었다.하지만 그동안 굳이 선을 긋지 않은 건, 은혁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며, 오히려 몇 번이고 도와줬기 때문이었다. 이번 Z시 출장도 은혁의 도움 덕에 가능했던 일이었다.게다가 은혁이 고백도 안 했고, 정은이 불편할 정도로 다가온 것도 아니었으니까... 정은도 자신이 먼저 딱 잘라 말하는 게 오히려 예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그때의 정은은 솔로였고, 재석이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자극은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정은은 이미 재석과의 관계를 정리했고, 은혁은 더 적극적으로 다가오고 있으니, 그녀도 이제 더 늦기 전에 확실히 은혁에게 말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래야 서로 상처받지 않을 테니 말이다.은혁은 정은의 말에 잠시 당황한 듯하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난 정은 씨 옆자리에 있는 게 좋아서 그래요.”정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즈니스석 티켓을 사 놓고 누구랑 자리를 바꾸든, 그건 상대방의 자유니까. 굳이 뭐라고 할 필요는 없지.’그 후, 정은은 노트북을 열고 일에 집중했다. 은혁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틈틈이 정은을 흘끗거렸다.그러다 손을 들어 승무원을 불렀다. “저기요. 잠깐만요.”“네,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결국 재석은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정은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열쇠를 건네받아 현관문을 열어주었다.“정은아, 잘 자.”그 한마디.‘정은아’라는 이름이 너무나 자연스럽고도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마치 수천 번은 불러본 것처럼.그 말에 정은은 순간 멍해졌다.‘왜 내 이름을 듣고도 가슴이 이렇게 설레지?’“네, 당신도 잘 쉬어요.”둘은 그렇게 짧은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문 안으로 들어갔다.그날 밤. 정은은 평소와 달랐다. 샤워를 마친 뒤 늘 하던 루틴, 논문 체크나 프로젝트 정리는 손도 대지 않았다.대신,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들고 재석의 SNS를 열었다.‘뭐 하는 거야? 나...’그런데 이상하게, 자꾸만 궁금해졌다. ‘이 사람, 평소에 어떤 거 올리지?’재석은 SNS 설정 따위는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맨 아래까지 내리는 데 몇 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포스트 총수, 대략 서른 몇 개. 그중 90%는 논문, 연구, 산업 동향 공유.‘진짜 성실한 연구자 모드네...’그나마 정은과 관련 있는 건 얼마 전 실험실이 SCI 논문 게재됐을 때 서비대학교 공식 계정에서 축하 포스팅한 걸 공유한 것뿐이었다.[축하합니다.]짧고 건조한 멘트.그 밑엔 전진욱과 조미진이 ‘좋아요’를 눌러뒀다.‘이게 전부야?’그렇게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던 순간, 알림이 하나 떴다. 재석이 새로운 글을 올렸다.정은은 무심코 눌러봤다. [r = a(1 - sinθ)]‘...어?’정은의 손가락이 멈췄다. 이 수식, 익숙했다. 너무 익숙해서 순간 심장이 멈칫했다.댓글 첫 줄엔 진욱이 있었다.[극좌표 함수? 밤에 안 자고 뭐 하세요? 조 교수님?]조미진과 손태민은 말없이 ‘좋아요’만 눌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속으로 ‘다음 연구 주제가 광학 쪽인가?’ 생각하며 혼란스러워했다.아무도 몰랐다. 이 수식의 진짜 의미를.‘r = a(1 - sinθ)’, 하트곡선.‘설마 이게, 그거? 진짜 그거... 맞아?’정은은 손끝을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
정은이 멍해 있는 사이, 재석이 한 걸음 다가섰다. 늘 부드럽고 점잖던 그가, 이 순간만큼은 전에 없던 강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 이런 눈빛도 있었나?’정은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는 순간, 재석은 어느새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정은이도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재석이 자신보다 훨씬 크다는 걸. 그리고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면, 자신이 마치 남자의 품 안에 갇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도.재석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이제 좀 알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그때 네가 학업이 먼저라고 했을 때, 난 받아들였어.”“그런데 장은혁한텐 기회를 줬지. 정은아...”그가 고개를 더 숙이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선에 닿았다. 순간, 정은의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너, 나한테 너무 불공평해.”그 마지막 한 마디는 묘하게 서글픈 기운이 섞여 있었다.정은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재석은 그녀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알아, 내가 지금 어떤 입장인지. 묻고 따질 자격도 없고, 네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네 자유라는 것도 알아.”“이 말 꺼냈다가, 우리 사이가 끝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근데... 계속 참다 보니까 알겠더라.”‘난... 그렇게까지 쿨한 사람이 아니었어.’“그래서 이제 참지 않기로 했어.”‘어떻게 되든, 그건 네가 정해.’그렇게 말한 재석은 고개를 숙인 채 멈췄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용한 밤공기 속에서, 정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이제, 제가 말해도 될까요?”“응...”“재석 씨.”정은은 처음으로 재석을 그렇게 불렀다.“고개 들어요. 나 좀 봐요.”재석의 어깨가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그는 이미, 거절당할 각오까지 끝냈다.그런데 눈이 마주친 순간, 정은의 두 눈 속에서 재석이 본 건... 눈물이 아닌, 웃음이었다.억지로 짓는
“헤어졌다고요?”정은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몰랐어?!”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욱은 눈을 반짝이며 의자째로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본격적인 ‘TMI’를 털어놓기 시작했다.“M시 출장 갔다 오고 며칠 안 돼서, 재석이가 바로 짐 싸서 수아를 내보냈다니까?”정은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재석과 수아 사이에 어떤 감정선이 있었는지, 그동안 몇 번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퍼즐처럼 빠르게 떠올랐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 속엔 미묘한 기류가 스쳤다.“아마 진짜 많이 좋아했나 봐. 그러니까 정리할 때도 그만큼 아프고, 오래 걸리는 거겠지. 조금만 시간 지나면, 태민이도 정리될 거야.”진욱은 이어서 말했다.“네.”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그 이후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남의 연애는, 들을 수는 있어도 깊게 얘기하지 말아야 해. 괜히 나서 봤자... 괜히 끼어든 꼴만 되니까.’...해가 지고, 붉은 노을이 건물 유리에 비치기 시작할 무렵. 정은은 마침내 작업을 끝냈다.진욱은 기다렸다는 듯 프로그램을 열고 기능 하나하나를 테스트했다.그리고 30초쯤 흐른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어어!! 복구됐어! 됐다! 돌아왔어! 다시 쓸 수 있어!!”미진도 덩달아 벌떡 일어나 양손을 번쩍 들었다.“살았다, 진짜!! 여태 손으로 데이터 입력한 거 생각하면... 이건 거의 기적이야!”진욱은 시계를 힐끗 보더니, 정은을 향해 말했다.“지금 이 시간까지 남아서 도와준 우리 정은이, 완전 수고 많았어! 조 교수...”“응...?”갑작스레 이름이 불리자, 재석은 몇 초간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진욱은 능청스럽게 말했다.“아니, 정은이가 이렇게 큰일 해줬는데, 감사 표시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적어도 밥 한 끼는 사야지.”“맞아요, 맞아요. 조 교수님, 이건 진짜 밥으로도 모자라요.” 미진이 곧장 거들었다.재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략 1년 전, 정은은 한동안 재석의 실험실을 빌려 쓴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전진욱, 조미진 등과 인연이 닿았다.처음엔 서로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몇 달이 지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고, 지금은 가볍게 농담도 주고받을 만큼 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진욱은 우연히 정은이 실험 데이터를 처리하는 속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어서 슬쩍 물어봤더니, 정은은 코딩도 할 줄 아는 공대 만능 캐릭터였다. 그녀는 직접 짠 프로그램으로 데이터를 자동 정리하고, 다차원 분류와 정렬까지 가능하다고 했다.“와, 뭐야... 완전 반칙인데?”진욱은 결국 정은에게 부탁해 실험실 맞춤형 프로그램 하나를 따로 제작해달라고 했고, 그 이후, 데이터 정리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맞이했다. 진욱은 쓸 때마다 감탄하며 말했다.“진짜... 정은이 덕분이야. 이게 사람을 살리네.”하지만 어제 그 기특한 프로그램이 갑자기 먹통이 됐다. 손태민이 고쳐보겠다고 덤볐지만, 결과는... 풍비박산이었다. ‘이젠 누가 손댔다간 진짜 박살 나겠어...’ 결국 정은에게 SOS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재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오늘 시간 돼? 안 되면, 며칠 뒤도 괜찮고...]진욱은 훨씬 급했다. 말 그대로 살려달라는 마음이었다.[야, 오늘 안 데려오면... 나 여기서 바로 싸버린다! 진짜라고, 어?!]그는 어제 약 먹고 좀 괜찮아진 줄 알았건만, 밤새 배가 또 난리였다. 오늘 아침부터 실험실 화장실은 진욱의 전용이 되었다. 오전에만 6회 방문.그 말은, 그냥 협박 아니었다. 진짜 실현 가능성이 있었으니 말이다.정은은 상황을 듣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시간 돼요. 지금 바로 갈게요.”[그래. 그럼 내가 정문 앞으로 갈게.]‘굳이 마중까진 필요 없는데...’ 뚝-정은이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10분 뒤, 정은은 학교 정문 앞에서 재석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실험실로 걸어가며 프로그램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