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일은 정은을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민지는 얼른 환영의 인사를 건넸다.“환영해요!”“나 한 가지 부탁이 더 있어...”정은은 바로 대답했다.“재운이를 말하는 거예요?”진일은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어떻게 알았어?!”정은은 담담하게 말했다.“선배가 꼭 고발할 결심하게 된 이유, 나도 잘 알고 있어요. 만약 서지예가 재윤의 이름을 빼지 않았다면, 선배는 아마도 계속 참았을 거예요. 갑자기 감정이 터지지도, 송 교수를 고발할 결심도 하지 않았을 테고요.”진일은 눈을 드리웠다.“재윤이 그 녀석은, 정말 쉽지가 않아. 우리와 같은 시골 출신 애들은 다 힘들어. 나야 이미 송 교수의 도구가 되어버렸지만, 적어도 그 녀석만큼은 나와 같은 길을 걷게 하고 싶지 않았어.”“정작 본인은 새로운 교수님을 구하지 못했으면서도, 날 걱정해서 여기저기 교수님들에게 메일을 수십 통이나 보냈어. 내가 졸업할 수 있게, 연구를 이어갈 있게 말이야...”진일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이 부탁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는 거 알아. 하지만 혹시 재운도 오 교수님 밑으로 들어가게 할 수 있을까?”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걱정 마요. 오기 전에 이미 교수님께서 말씀드렸고, 재운도 함께 교수님의 연구실로 들어오게 했어요. 재운은 오 교수님을 우상으로 여기고 있지 않아요? 앞으로는 그 우상의 제자가 될 거예요.”진일은 자신이 오미선의 학생으로 되었단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 더 기뻐하며 외쳤다.“대박! 저 바보는 꿈에서라도 웃으며 깨어나겠는데?!”“하지만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게 있어요. 선배가 직접 재운에게 전해 주고요. 재운은 아직 실력이 부족해서 무한 연구실에 들어올 순 없어요. 하지만 노력한다면, 언젠가 자격을 갖추고 다시 들어올 기회가 생길 거예요.”진일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알아. 그리고 재운이도 이해할 거야. 절대 불평하지 않을 거라고.”“그럼 됐어요.”정은은 손을 내밀었다.“앞으로 잘 부탁해요. 함께 연구하고, 학문을 쌓고, 꿈
서준은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말했다.“너희 남자들이라니? 난 그런 사람 아니야. 나를 같은 사람으로 생각하지 마.”“쳇, 왜 그런 말이 있잖아. 까마귀는 다 똑같이 까맣다고!”서준은 단호하게 말했다.“어쨌든 난 그 사람과 달라.”민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믿어.”“못 믿겠으면 시험해보든가!”민지는 멍하니 서 있었고, 서준은 이미 등을 돌려 걸어가고 있었다.그제야 정신이 든 민지는 눈을 깜빡이며 중얼거렸다.“어떻게 시험해보라는 거야?”...경혜와 진호는 비록 퇴학을 면했지만 교수님을 잃은 데다 다른 교수님들도 두 사람을 받아주길 꺼려 했다. 결국 학교 측이 마지못해 그들을 위해 조치를 취했다.더 이상 학업이나 연구에 대한 기대는 접어야 했다.조용히 지내다가 겨우 졸업장이라도 받으면 다행인 상황이었다.이와 별개로, 학교 측은 대회 주최 측에 직접 연락해 사건의 전말을 알렸고, 결국 수여되었던 최우수상을 정은 팀에게 돌려주었다.또한, 공식 홈페이지에 관련 성명을 발표하며 수상 명단을 수정했다.한바탕 소동이 일면서, 뿌리를 뽑아낸 김에 묻혀 있던 흙까지 함께 드러난 셈이었다....대한이 다가오면서, 설 연휴도 성큼 다가왔다.진일은 며칠 동안 실험실에 틀어박힌 뒤, 재운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다.하정남은 몇 번이고 전화를 걸어 독촉했다.[우리 착한 딸, 언제 집에 올 거야? 설도 코앞인데, 나랑 네 엄마는 벌써 짐 싸서 휴가 갈 준비를 다 했지 뭐야. 넌 우리 집 장녀야! 설마 섣달 그믐날까지 끌 생각은 아니겠지? 네 삼촌, 큰아버지들은 대놓고 뭐라 못 해도, 날 붙잡고 잔소리할 게 뻔해. 그러니까 네 불쌍한 아빠 좀 생각해줘라!]“알았어요! 내일 갈게요!”하정남은 기뻐서 제자리에서 빙글 돌았다.[좋아, 내일 우빈이 공항에 마중 나갈 거야!]“싫어요. 문신까지 해서 완전 조폭 같잖아요. 그냥 택시 타고 갈 거예요.”[알았어, 알았어. 네가 하자는 대로 할게.]그렇게 해서, 다음 날 민지는 집으로 돌아갔다.민지가
재석은 고개를 숙이고 정은의 핸드폰을 힐끗 바라보았다. 가벼운 탄식 속에 어쩔 수 없는 기색이 서렸다.“취소해. 내가 데려다줄게.”[내가 데려다줄게...]정은의 마음이 살짝 흔들렸다. 그녀의 눈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네.”차 안에는 따뜻한 바람이 불어와, 순간 차가운 공기를 밀어냈다.재석은 정은의 새빨개진 손가락을 힐끗 바라보았다.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눈사람이라도 만들었어?”‘명탐정 코난이야 뭐야?’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재석은 더 묻지 않고 말했다.“보온병에 대추차 있어. 수납함에 일회용 컵도 있으니까 한잔 마셔.”보온병은 컵홀더에 옆에 놓여 있었다.정은이 뚜껑을 열자, 따뜻한 김이 피어오르며 달콤한 향이 퍼졌다.표면에는 몇 알의 구기자가 떠 있었지만, 조금만 더 향을 맡아 보면 달콤한 향기 속에서도 대추와 생강 특유의 알싸한 향이 느껴졌다.정은은 대추차도 끓일 줄 알고, 생강탕도 만들 줄 알았다.예전엔 도겸을 위해 자주 끓였지만, 정작 그녀 자신은 생강의 맛을 좋아하지 않았다.“차 안에서 마시면 쏟을 수도 있으니까 좀 이따 마실게요.”말을 하며 정은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뚜껑을 다시 닫았다.재석은 피식 웃었다.“설탕 좀 넣었으니까 그렇게 안 매워.”“아니, 맵다고 한 적 없는데... 그냥 좀 있다가 마시려고요!”“굳이 그렇게 강조하지 않았다면 믿었을지도.”“어린애야?”“아니거든요!”재석은 웃음기가 가득한 눈으로 정은을 바라보았다.“생강 싫어해?”“네.”“생강은 적게 넣었고, 대신 설탕을 아주 많이 넣었어. 안 매워.”정은은 의심스럽게 재석을 바라보았다.“진짜죠?”“맛만 봐봐.”“그래요...”그의 말에 정은은 결국 일회용 컵을 꺼내 조심스레 반 컵 정도 따랐다.재석은 그녀가 혹시라도 많이 따를까 봐 걱정했는데, 신중하게 따르는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정은은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달콤하기는 했지만, 역시나 생강의 알싸한 맛을 감출 순 없었다.‘속았어.’그렇지만, 컵
정은은 뒤를 돌아보았다.재석이 언제 왔는지, 얼마동안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지금 눈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그 시선이 정은 발밑의 부서진 눈 조각들을 스치고 지나가자, 재석의 눈가에 담긴 웃음기가 더욱 깊어졌다.“또 눈놀이하고 있었어?”“네.”“눈사람 만들려고?”“실패했어요.”“내가 가르쳐 줄게.”말을 마치며 재석은 소매를 걷어붙였다.정은의 눈이 반짝였다. “눈사람 만들 줄 알아요?!”“원리를 알면 어려울 거 없어.”“원리까지 있어요?” 정은이 호기심을 보였다. “무슨 원리인데요?”이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재석은 손에 눈을 움켜쥐고 단단하게 뭉쳤다.“일단 이렇게 작은 눈덩이를 만들어야 해. 처음엔 외부의 힘으로 굴려야 하는데, 점점 커지면서 눈덩이가 지면을 누르는 압력이 증가하잖아? 그러면 눈덩이와 지면 사이의 눈이 살짝 녹아 물기가 생길 거야. 이 물기가 눈덩이와 땅 사이에 붙어 있다가...”“눈덩이가 굴러가면서 접촉면이 바뀌면, 압력이 줄어들면서 다시 얼어붙어 눈이 되고, 자연스럽게 눈덩이에 붙게 되는 거지. 이 과정이 반복되면 눈덩이는 점점 더 커질 거야.”정은은 이상한 눈빛을 던졌다.“왜 그런 눈빛으로 보는 건데?”“선배님, 이론만 설명해서는 소용없을 것 같은데요?”“그럼?”“한번 직접 굴려 봐요. 그러면 믿을게요.”“문제없어. 잘 봐.”5분 후.정은은 억지로 입술을 깨물고 있었지만, 웃음 참기가 너무 힘들었다.재석은 손에 쥔 부서진 눈덩이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분명히 예전에는 성공했는데... 왜 이러지?”정은이 눈을 깜빡였다. “예전에요? 언제요?”재석은 잠시 진지하게 생각했다. “음... 아마도 내가 열 살일 때? 아니면 열한 살일 때인가?”정은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웃고 싶지 않았지만, 안 웃을 수도 없었다.결국 그녀는 꾹 참고 있던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하하하하!”재석은 할 말을 잃었다.잘난 척 좀 해보려다, 오히려 제대로 당했던
“아니... 그걸 왜 묻는 거야? 우리 연구실 연간 심사 기준 중 하나야? 설마... 요즘 연구하려면 눈덩이 굴리는 법도 알아야 하는 건가?”“나 지금 진지해! 장난치지 말고.”진욱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눈덩이 굴리는 거? 그거 어릴 적 눈밭에서 놀아본 사람이라면 다 할 줄 알지 않아? 너 못 해?”재석은 말을 하지 않았다“너 진짜 못 하는 거야?”“음...”“그럼 뭘 하고 싶은 건데?”진욱은 팔짱을 끼고 재석을 바라보았다.“밖에 눈이 꽤 쌓였더라.”“그래서?”“나가서 네가 좀 가르쳐 줘.”“뭐?”진욱은 오늘 수도 없이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에이, 설마. 설마?! 저 연구에 미친 사람이, 논문만 보면 다른 일에 신경도 쓰지 않는 사람이 이 대낮에 실험실에서 나가 눈덩이를 굴리겠다고?’“야, 내가 무슨 눈덩이 교수님이야?”재석은 말을 하지 않았다.그가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자, 진욱은 헛웃음을 터뜨렸다.“너 진심이야? 진짜 나가서 눈덩이 굴릴 거야? 여기서 논문 쓰는 게 아니라?”“응. 그러니까 가르쳐 줘.”재석은 한 번 더 강조했다.진욱은 기괴한 눈빛으로 재석을 바라보다 순간 깨달았다.‘아, 정은이가 눈을 많이 보지 못했던 것 같은데. 저번에 눈을 봤을 때 엄청 신났었지?’“좋아.”진욱이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가르쳐 주는 건 어렵지 않은데, 나 실험 두 개나 남았거든? 시간 없어. 미안하지만 난 못 도와줘. 다른 사람한테 부탁해.”“내가 할게.”“진짜?! 진심이지?!”“내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좋아! 역시 우리 조 교수님!”진욱은 눈을 반짝였다.“그런데 말이야, 조건이 하나 더 있어.”“한꺼번에 말해.”“곧 설날이잖아? 난 아직 연차도 못 썼고, 연휴랑 같이 쉴 생각인데, 괜찮지?”“요구가 점점 더 심해지네.”“동의할 거야 말 거야? 조건은 둘 다 필수야. 3초 줄게. 셋, 둘, 하나...”“할게!”“좋아! 가자, 나가서 신나게 놀아보자고!”40분 후.“아니
재석이 눈덩이를 낑낑대며 굴릴 때, 정은은 실험실에서 데이터 기록에 몰두하고 있었다.민지와 서준은 이미 집으로 돌아가고, 그녀 혼자 남았다.평소 민지가 재잘거리는 것에 익숙했기에, 아침에 실험실에 들어섰을 때 정은은 왠지 모르게 허전했다.하지만 실험대 앞에 서서 일을 시작하자 그 허전함도 금세 사라졌다.정은은 혼자 있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도겸이 그녀를 별장에 가두었던 그 몇 년,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으니까.혼자 책을 읽고, 혼자 공부하고, 혼자 밥을 하고, 혼자 먹고, 혼자 기다리는 것에.학문이라는 건 함께할 수도 있지만, 결국 혼자서도 해야 하는 일이었다.그건 정은이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점심이 되자, 정은은 오랫동안 숙이고 있던 목을 주무르며 탕비실로 향했다.아침에 준비해둔 도시락을 전자레인지에 데우고, 밥을 먹으며 휴대폰을 꺼내 SNS를 확인했다.그때, 진욱이 한 시간 전에 올린 글이 눈에 띄었다.[눈덩이 굴리다가 토할 지경이야.]함께 올라온 사진에는 크기가 일정하고 정렬된 세 줄의 눈덩이가 있었다.‘세 줄이라니?! 꽤 충격이야.’정은은 먼저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을 남겼다.[전 교수님 정말 대단해요!]그러자 곧바로 답글이 달렸다.[대단한 건 내가 아니야, 하하하.]몇 분 후, 뭔가 더 말하고 싶었던 듯 다시 문자가 왔다.[그건 정말 대단한 게 아니라, 아주 미친 거지.][그게 무슨 뜻이에요?]그러나 진욱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딱히 깊게 생각하지 않고, 정은은 식사를 마친 후 다시 실험대 앞에 섰다.겨울은 해가 빨리 져서, 정은은 점심시간에 오래 쉬지 않았다.한번 눕기 시작하면 다시 일어나기 힘든 것도 있었고, 무엇보다 일을 빨리 끝내야 일찍 집에 갈 수 있으니까.다행히 실험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는데, 정은은 오후 네 시쯤 택시를 타고 귀가했다.골목에 들어서자, 아래층에서 눈사람을 만드는 두 아이가 보였다.꽤 정성 들인 작품을 만들고 있었다.코는 코, 눈은 눈.빨간 목도
“자, 우리 큰 눈덩이 하나 굴리자.”말하면서 재석은 이미 소매를 걷어붙이며 당장이라도 시작할 기세였다.“선배님, 그냥 눈덩이 말고, 우리 눈사람 만들어요! 네?”재석은 순간 멍해졌다.“뭐든 다 할 줄 안다면서요? 눈사람 만드는 게 더 재밌잖아요. 아, 이왕이면 좀 더 크게 만들어야겠다...”정은은 남자의 반응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두 손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조금 전 아이들이 만들던 걸 떠올리며 그대로 따라 하기 시작했다.한참 동안 재석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정은은 고개를 들었다.“선배?”“눈사람을... 만든다고?”“맞아요!”정은의 눈이 반짝였다.“그래.”그는 살짝 한숨을 쉬고는 그대로 쪼그려 앉았다.예상했던 것과는 좀 달랐지만, 그래도 못 할 것도 없었다.그러나 그 결과.정은은 눈앞에 놓인, 어딘가 이상한 두 덩어리의 눈덩이를 바라보았다. 간신히 위아래로 쌓긴 했지만, 둥글지도 네모지지도 않은 데다, 위가 더 크고 아래가 더 작았다.얼굴은커녕 전체적인 형태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이게 대체 뭐지?’억지로라도 무언가라고 해야 한다면 그냥 ‘두 눈덩어리’라고 하는 게 맞을 듯했다.정은은 조심스레 재석을 쳐다보았다.딱히 할 말은 없었다.재석은 민망한 듯 코를 긁적이며 헛기침했다.“그게... 아무래도 오늘따라 컨디션이 좀 안 좋은가 봐.”“괜찮아요...”정은은 재석이 더 민망해할까 봐 그렇게 말했지만, 그는 오히려 더 얼굴을 들 수 없었다.“시간도 늦었고 밖도 많이 춥네. 이제 들어갈까요?”“그래.”한번 허세를 부리다 평생 창피를 당한 셈이었다.두 사람은 나란히 계단을 올라 각자 집으로 들어갔다.거실에 들어서자마자 정은은 2초 정도 침묵했다.그리고 그다음 순간.“푸하하하하하하!”재석에게 미안하지만, 정은은 정말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한편, 재석은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소파에 털썩 앉아 급히 휴대폰을 꺼내 톡을 열었다.그리고 진욱에게 문자를 보냈다.[왜 눈사람 만드는 방법을 안 가르쳐줬어? 뭐든
[할머니께서 정성스럽게 준비하셨으니, 네가 거절하면 실망하실 거야.]정은은 원래 거절하려 했지만, 현빈이 이렇게 말하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오전 11시 30분, 현빈이 차를 몰고 도착했다.정은은 미리 나와 그를 맞았다.“왜 밖에 나왔어? 나 혼자 들어갈 수 있는데.”“못 들어오잖아요.”정은이 같이 출입 인증 구역을 통과하고 나서야, 현빈은 ‘못 들어온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출입 통제가 처음 왔을 때보다 더 엄격해진 것 같은데?”커팅식 날에 방문한 적이 있었기에, 현빈은 그때의 실험실과 비교해 보았다.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다시 설정했어요.”“위에서 보안 강화를 요구한 거야?”“그런 것도 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현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오빠는 바쁘지 않아요? 이렇게 시간 내서 밥까지 챙겨올 시간이 있다니?”“바빠도 와야지. 할머니께서 특별히 맡기신 ‘임무’니까.”“임무요?”두 사람이 생활 구역에 도착할 무렵, 현빈은 보온 가방을 열어 도시락통을 하나씩 꺼냈다.심지어 아직도 따뜻했다.그는 차곡차곡 반찬을 식탁 위에 놓으며, 깨끗한 젓가락과 숟가락도 준비했다.“네가 다 먹을 때까지 옆에서 지켜보는 거.”정은은 식탁을 바라보며 속으로 묵묵히 세어 보았다.반찬만 여섯 가지, 게다가 국까지 있었다. 전부 정은이 좋아하는 음식들이었다.“와, 냄새 정말 좋다...”“할머니께서 요즘 요리책을 보며 연습하셨거든. 몇 년 만에 다시 요리를 하시려니 너무 서투를까 봐 걱정된다나. 연습하실 때 만드신 요리들은 나랑 할아버지가 대신 먹었고.”현빈은 웃으며 말했다.“할아버지도 그러시더라. 우리가 네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고.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매일 할머니께서 만드신 요리를 맛보겠어.”정은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그럴 것까진... 그런데 이건 좀 너무 많은데요.”그녀는 난감한 듯 식탁을 바라보다가 문득 떠올랐다.“오빠, 점심 먹었어요?”현빈은 살짝 멈칫했다.“아직. 너무 늦을까 봐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
정은이 멍해 있는 사이, 재석이 한 걸음 다가섰다. 늘 부드럽고 점잖던 그가, 이 순간만큼은 전에 없던 강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 이런 눈빛도 있었나?’정은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는 순간, 재석은 어느새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정은이도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재석이 자신보다 훨씬 크다는 걸. 그리고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면, 자신이 마치 남자의 품 안에 갇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도.재석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이제 좀 알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그때 네가 학업이 먼저라고 했을 때, 난 받아들였어.”“그런데 장은혁한텐 기회를 줬지. 정은아...”그가 고개를 더 숙이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선에 닿았다. 순간, 정은의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너, 나한테 너무 불공평해.”그 마지막 한 마디는 묘하게 서글픈 기운이 섞여 있었다.정은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재석은 그녀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알아, 내가 지금 어떤 입장인지. 묻고 따질 자격도 없고, 네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네 자유라는 것도 알아.”“이 말 꺼냈다가, 우리 사이가 끝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근데... 계속 참다 보니까 알겠더라.”‘난... 그렇게까지 쿨한 사람이 아니었어.’“그래서 이제 참지 않기로 했어.”‘어떻게 되든, 그건 네가 정해.’그렇게 말한 재석은 고개를 숙인 채 멈췄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용한 밤공기 속에서, 정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이제, 제가 말해도 될까요?”“응...”“재석 씨.”정은은 처음으로 재석을 그렇게 불렀다.“고개 들어요. 나 좀 봐요.”재석의 어깨가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그는 이미, 거절당할 각오까지 끝냈다.그런데 눈이 마주친 순간, 정은의 두 눈 속에서 재석이 본 건... 눈물이 아닌, 웃음이었다.억지로 짓는
“헤어졌다고요?”정은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몰랐어?!”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욱은 눈을 반짝이며 의자째로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본격적인 ‘TMI’를 털어놓기 시작했다.“M시 출장 갔다 오고 며칠 안 돼서, 재석이가 바로 짐 싸서 수아를 내보냈다니까?”정은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재석과 수아 사이에 어떤 감정선이 있었는지, 그동안 몇 번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퍼즐처럼 빠르게 떠올랐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 속엔 미묘한 기류가 스쳤다.“아마 진짜 많이 좋아했나 봐. 그러니까 정리할 때도 그만큼 아프고, 오래 걸리는 거겠지. 조금만 시간 지나면, 태민이도 정리될 거야.”진욱은 이어서 말했다.“네.”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그 이후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남의 연애는, 들을 수는 있어도 깊게 얘기하지 말아야 해. 괜히 나서 봤자... 괜히 끼어든 꼴만 되니까.’...해가 지고, 붉은 노을이 건물 유리에 비치기 시작할 무렵. 정은은 마침내 작업을 끝냈다.진욱은 기다렸다는 듯 프로그램을 열고 기능 하나하나를 테스트했다.그리고 30초쯤 흐른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어어!! 복구됐어! 됐다! 돌아왔어! 다시 쓸 수 있어!!”미진도 덩달아 벌떡 일어나 양손을 번쩍 들었다.“살았다, 진짜!! 여태 손으로 데이터 입력한 거 생각하면... 이건 거의 기적이야!”진욱은 시계를 힐끗 보더니, 정은을 향해 말했다.“지금 이 시간까지 남아서 도와준 우리 정은이, 완전 수고 많았어! 조 교수...”“응...?”갑작스레 이름이 불리자, 재석은 몇 초간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진욱은 능청스럽게 말했다.“아니, 정은이가 이렇게 큰일 해줬는데, 감사 표시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적어도 밥 한 끼는 사야지.”“맞아요, 맞아요. 조 교수님, 이건 진짜 밥으로도 모자라요.” 미진이 곧장 거들었다.재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략 1년 전, 정은은 한동안 재석의 실험실을 빌려 쓴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전진욱, 조미진 등과 인연이 닿았다.처음엔 서로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몇 달이 지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고, 지금은 가볍게 농담도 주고받을 만큼 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진욱은 우연히 정은이 실험 데이터를 처리하는 속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어서 슬쩍 물어봤더니, 정은은 코딩도 할 줄 아는 공대 만능 캐릭터였다. 그녀는 직접 짠 프로그램으로 데이터를 자동 정리하고, 다차원 분류와 정렬까지 가능하다고 했다.“와, 뭐야... 완전 반칙인데?”진욱은 결국 정은에게 부탁해 실험실 맞춤형 프로그램 하나를 따로 제작해달라고 했고, 그 이후, 데이터 정리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맞이했다. 진욱은 쓸 때마다 감탄하며 말했다.“진짜... 정은이 덕분이야. 이게 사람을 살리네.”하지만 어제 그 기특한 프로그램이 갑자기 먹통이 됐다. 손태민이 고쳐보겠다고 덤볐지만, 결과는... 풍비박산이었다. ‘이젠 누가 손댔다간 진짜 박살 나겠어...’ 결국 정은에게 SOS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재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오늘 시간 돼? 안 되면, 며칠 뒤도 괜찮고...]진욱은 훨씬 급했다. 말 그대로 살려달라는 마음이었다.[야, 오늘 안 데려오면... 나 여기서 바로 싸버린다! 진짜라고, 어?!]그는 어제 약 먹고 좀 괜찮아진 줄 알았건만, 밤새 배가 또 난리였다. 오늘 아침부터 실험실 화장실은 진욱의 전용이 되었다. 오전에만 6회 방문.그 말은, 그냥 협박 아니었다. 진짜 실현 가능성이 있었으니 말이다.정은은 상황을 듣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시간 돼요. 지금 바로 갈게요.”[그래. 그럼 내가 정문 앞으로 갈게.]‘굳이 마중까진 필요 없는데...’ 뚝-정은이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10분 뒤, 정은은 학교 정문 앞에서 재석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실험실로 걸어가며 프로그램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
진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렇게 마음이 있는 거면, 왜 정은이한테 솔직하게 말 안 해?”“겁나는 거지, 재석아? 말 꺼냈다가 거절이라도 당하면... 그땐 친구로도 남을 수 없을까 봐, 무서운 거잖아.”진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재석을 똑바로 바라봤다.“그건 너답지 않아. 내가 아는 재석이는, 망설이지 않고 결정하는 사람이었어. 결과가 불확실하다고 물러서는 사람 아니었잖아.”“정은이가 ‘지금은 연애 생각 없다’고 했지? 중요한 건 ‘지금은’이라는 거야. 사람 마음은 바뀌는 거고, 그때 거절했다고 지금도 똑같을 거란 보장은 없어. 알겠냐?”재석은 말없이 진욱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말이 생각보다 깊게 박혔다. ‘지금도 똑같을까? 아니, 혹시... 지금은 조금 다를 수도 있는 걸까...’진욱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야,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너 계속 질질 끌면, 정은이 뺏긴다. 그리고 뺏기고 나서 울어봤자, 소용없을 거야.”“우리 정은이 인기 많은 거 너도 알잖아. 예전에도 정은이 두고 싸운 애들 있었잖아. 그리고 오늘 그 남자 봤지? 얼굴 잘생겼지, 젊지, 에너지 넘치지, 옷차림 보니까 집도 잘 사는 거 같던데?”재석은 이런 말을 아주 듣기 싫었다.“닥쳐.”진욱도 더 이상 말하기 싫었다. “칫. 드디어 위기감이 좀 드나?”‘그래, 긴장 좀 해라. 맨날 냉정한 척만 하지 말고... 이번엔 너도 좀 불안해져 봐야지.’...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집에 바래다준 뒤, 약을 가정부에게 전달하며, 복용 방법까지 하나하나 직접 설명했다. 봉수진은 저녁까지 먹고 가라며 붙잡았지만, 정은은 이미 서준, 민지와의 약속이 있었다.“외할머니, 며칠 안에 다시 올게요. 오늘은 친구들이랑 약속이 있어서요.”“그래그래, 알았어. 젊을 땐 많이 만나고 다녀야지.”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고, 곧 차에 올랐다.약속 장소인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땐, 서준과 민지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테이블 위에
은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게요... 나야 뭐, 그랬으면 좋겠지만...”하지만 정은의 태도는 그리 확신을 줄 만큼의 호감은 아니었다.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분명히 좋아한다는 표시도 없는 애매한 선이 보이는 듯했다.‘그래서 더 미치겠어. 기대도 못 하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이러니까 계속 마음이 붕 떠 있잖아...’그렇게 속으로 앓고 있었지만, 정은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봉수진의 약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었다.VIP 약국답게, 일 처리는 정말 빨랐다. 정성스럽게 달인 약이 곧바로 팩 단위로 나뉘어 밀봉되었고, 음용 방법까지 깔끔하게 안내되었다.냉장 보관 후, 따뜻한 물에 데워 마시면 된다는 안내였는데, 이 정도면 환자도 거부감 없이 약을 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약을 다 받은 후, 약 한 시간쯤 지나 두 사람은 병원을 나섰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은의 전화가 울렸다.“여보세요? 외할머니? 네, 약 다 받아놨어요.”“병원에서 달여줬어요. 네, 거기 계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은 정은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은혁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오늘 고마웠어요. 외할머니 모시러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아, 어... 그래요! 잘 가요!”은혁은 여자의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심지어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한참을 그렇게 바라본 후에야 아쉬움 가득한 시선을 거두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고, 화면엔 ‘황기' 두 글자가 떴다.“여보세요?”[야 이놈아! 도시락 던져놓고 도망가듯 나가버리면 어떡해?! 말도 못 붙였잖아! 뭐가 그렇게 급해? 뭐가 외할아버지보다 중요한 거냐고?!]“죄송해요... 헤헤.”황기는 순간 당황했다. ‘얘 지금 뭐야? 미쳤어? 웃음은 왜 이렇게 정직하게 새어 나오는 건데...?’...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태우고 병원을 나서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재석은 약을 수령하고 외래 진료실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정은도 여기서 재석을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선배님, 병원엔 무슨 일로 오셨어요?”재석은 그제야 시선을 거둬들였다. 눈길이 정은에게 닿는 순간,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난...”“날 데려다주러 온 거야.” 그 순간, 전진욱이 배를 감싸 쥐며 천천히 다가왔고, 재석 대신 대답을 건넸다.정은은 진욱을 바라보다가 눈이 살짝 커졌다. “교수님,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하... 뭘 잘못 먹었는지, 아침부터 배탈이 나서... 약도 안 듣고... 이 사람이 막 끌고 오더라니까... 검사라도 받아보라고.”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하셨어요. 괜히 방치하다가 더 심해질 수도 있잖아요. 미리 체크하면 마음도 편하고요.”“어우, 너희 둘 미리 맞췄냐? 말이 어쩜 그렇게 똑같냐?” 진욱이 짐짓 장난스러운 말투로 투덜댔다.정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재석을 바라봤다. “그랬어요?”재석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빛 속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다. ‘저 말투, 저 표정... 나만 아는 게 아닐 텐데...’“정은 씨, 이제 가야죠.” 그때, 은혁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아, 네.” 정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 먼저 갈게요.”그렇게 말한 후, 은혁과 나란히 병원 복도를 걸어 나갔다.재석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두 사람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눈빛 속 감정은 복잡하고도 묘했다. ‘뭔데, 저 둘은 저렇게 자연스러워...’“재석아? 야, 재석아!”진욱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재석은 고개를 돌렸지만, 눈빛 속 싸늘함은 여전했다. 진욱은 그 눈빛에 소름이 돋아 어깨를 움찔거렸다.“너... 왜 그래?”“방금 정은이가 ‘저희’라고 했어.”“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재석을 바라봤다. 몇 초간 멍하던 그는 그제야 이해가 된 듯 말했다. “아... 그 ‘저희’? 그게 뭐 어때서? 같이 왔으니까 ‘저희’지. 그럼
얼마 지나지 않아 황 원장은 처방전을 프린트해서 정은에게 건넸다.“수고 많으셨습니다, 원장님.”정은이 공손히 인사하자 황 원장은 손을 휘저었다.“아이구, 무슨... 이 아가씨는 인사도 참 반듯하게 잘하네요. 말도 예쁘게 하고, 얼굴도 예쁘고. 이런 손녀가 있으면, 어디 내놔도 자랑이겠네요.”봉수진은 바로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럼요. 우리 손녀는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어요.”황 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장난스럽게 물었다.“이렇게 예쁜 아가씨한테 남자 친구가 없을 리 없는데? 그렇죠?”봉수진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없어요! 보통 남자애들은 우리 정은이랑 안 어울려요.”“허허, 그래도 우리 손자 정도면 꽤 괜찮은데...?”황 원장이 살짝 떠보자 봉수진은 손사래를 쳤다.“아이구, 그 얘긴 그만해요. 정은이 아직은 시집 안 보낼 거예요. 지금이 제일 곁에 두기 좋을 때라니까요.”‘아이고, 또 시작이다...’정은은 속으로 헛웃음 치며 처방전을 가방에 쏙 넣고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저, 약 지으러 먼저 다녀올게요!”...진료실 문을 나서는 순간, 정은은 누군가와 부딪혔다.“아, 죄송해요!”고개를 돌려 상대방을 본 순간 정은의 걸음이 멈췄다.“은혁 씨?”은혁은 보온 도시락 통을 들고 서 있었다.“정은 씨! 또 보네요. 우리 진짜 인연인가 봐요? 하하...”“여긴... 병원인데? 누가 입원하셨어요?”정은이 도시락을 보며 물었다.“아, 아니에요. 저 입원실 온 거 아니고요! 외할아버지가 이 병원 의사세요. 오늘 외래 당번이라 저희 어머니가 직접 도시락을 싸주셨는데, 제가 대신 가져다드리러 온 거예요.”“혹시 외할아버지 성함이 황 씨?”“네! 황기 원장님이세요. 한약재 이름에서 따오셨대요, 혹시... 아는 분이세요?”‘어머나, 진짜 인연인가?’정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오늘 저희 외할머니 진료도 황 원장님한테 받은 거예요.”“정말요? 세상에... 진짜 대박. 어쩐지 자꾸 마주치네요.”은혁은 정은 손에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