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부와 앉아서 언니의 마음과 불만을 이야기하는 게 더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겠어?”“봐봐, 바로 이 태도야.” 이미윤은 가볍게 혀를 찼다. “모든 문제가 네 앞에 있으면 간단해지기라도 한 듯처럼 말하네. 마치 세상에 너만 똑똑하고, 너만 해결책을 생각해낼 수 있는 것처럼!”“내가 우리 남편한테 직접 말할 수 있었으면, 이렇게 널 찾아왔겠어?!” 이미윤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낮게 외쳤다.이미숙은 단호하게 말했다. “두 사람은 부부야. 부부끼리는 서로 대화하고, 의견을 조율해야 하는 거 아니야?”“하, 그런데 그이는 날 아내로 여기지도 않잖아!” 이미윤은 이를 악물며 말했고, 그 분노가 그대로 전해졌다.이미숙은 잠시 침묵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언니 요구는 들어줄 수 없어.”“뭐라고?!” “설마 너, 아직도 우리 그이를 잊지 못한 거야?!”이미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첫째, 언니의 요구는 타당하지 않으니 내가 왜 들어줘야 하지? 둘째, 우리 셋은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랐어.”“네 말대로 하라는 건, 앞으로 형부와 말 한 마디도 하지 말라는 거잖아? 그냥 남처럼 지내라고?”“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그리고 난 언니와 이런 약속을 할 의무가 없어. 마찬가지로, 언니는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할 권리도 없고.”“그런 넌 아직도 우리 그이를 잊지 못했다는 소리잖아!”이미숙은 더는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할 생각조차 없는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과 대화하면 그저 힘이 들 뿐이었다.이미숙은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그러자 이미윤이 뒤에서 낮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넌 안 무섭냐? 내가 너랑 우리 그이의 과거를 네 남편한테 말할 수도 있는데. 그 사람이 그걸 알고도 지금처럼 널 대할 것 같아?”이미숙은 돌아서며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확실하게 보여주고 싶었다.“그래, 말해. 난 전혀 상관없어.”“너... 너 안 무서워?”“무서울 이유가 없지. 그이는 이미 다 알
이미윤은 온몸이 굳어져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했다. 그리고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너... 너...”‘설마 기억난 거야? 그 끔찍한 납치 사건을?! 그렇다면... 그 이후의 일도 기억해버린 걸까?’ 이미윤은 감히 그런 상상을 할 수도 없었다.하지만 이미숙은 그녀의 눈에 스친 공포와 당황스러움을 단번에 꿰뚫어 보고는 씁쓸하게 웃었다.“그래서... 넌 정말 일부러 소리를 내고, 일부러 범인들을 유인해서 일부러 날 다시 잡혀가게 만든 거야?”...그날, 두 사람은 함께 쇼핑을 나섰다가 납치를 당했다.그리고 손발이 묶인 채 도시 외곽의 한 버려진 공장으로 끌려갔다. 납치범들은 원래 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저 즉흥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듯했다. 목적은 명확했고 이미숙과 이미윤을 성추행하려 했다.그 사람들 중 몇 명이 이미윤에게 손을 대려 하자, 이미숙은 그녀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신분을 말했다.가방 속에서 블랙카드와 현금, 주민등록증까지 꺼내 범인들에게 큰소리쳤다.“얘는 겉보기엔 번듯해 보여도 그냥 내 시중이야. 내가 쓰다 버린 옷을 걸치고, 나 대신 쇼핑백이나 들어주는 애라고요!”“그러니 왜 그런 사람한테 손대려는 거죠? 차라리 우리 집에 몸값을 요구해요! 5천만? 아니면 2억? 얼마든지 불러보라고요!”이미숙은 턱을 당당히 치켜들고 범인들을 바라보았다. 한눈에 봐도 부자 집안에서 자란 도도한 아가씨였다.납치범들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버렸다.이미숙은 속으로 안도했다. 하지만 그녀는 구석에서 초췌한 모습으로 웅크리고 있던 이미윤의 눈빛을 보지 못했다.수치심과 분노로 일그러진 그 서늘한 눈빛을.‘시중? 그래, 네 눈에 난 그저 시중였던 거구나. 하하...’납치범들이 계획을 세우는 동안, 이미숙은 손에 쥐고 있던 유리 조각으로 묶인 밧줄을 잘랐다.그리고 한밤중, 그 사람들이 잠든 틈을 타 자신을 먼저 풀어낸 후, 이미윤을 깨워 그녀의 손발도 풀어주었다.두 사람은 어둠을 틈타 도망쳤다.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납치범들이 이를 눈
이미숙은 귀가 윙윙거렸고, 머리는 새하얘졌다.곧이어 눈앞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더니 이미숙은 누군가의 어깨에 짊어진 채로 끌려갔다.떠나기 전, 이미숙은 동굴 입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두 눈이 마주쳤고, 그녀는 이미윤의 눈에서 당혹감과 두려움, 그리고 눈물을 보았다.그때 그녀는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믿음을 택했다.입술을 움직였지만, 상대방이 제대로 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도망쳐. 경찰에 신고해.”동시에 납치범들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하나밖에 못잡아서 어쩌지? 도망친 아이가 경찰에 신고라도 하면 우리 끝장 아니야?”“멀리 못 갔을 거야. 분명 근처 어딘가에 숨어 있을 텐데. 다시 한번 찾아볼까?”“안 돼. 도망치는 동안 신고했을 수도 있어. 그렇다면 우리 당장 장소를 옮겨야 해. 시간 끌 순 없어.”“다행히도 돈값 하는 애를 잡았으니 됐지. 시중 하나쯤은 뭐, 신경 쓸 필요 없잖아.”“그러게, 그럴 필요 없겠네.”하지만 우두머리는 쉽게 속아넘어갈 사람이 아니었다.남자는 이미숙을 바닥에 내던진 다름 그녀의 머리채를 거칠게 움켜쥐었다.“그 아인 어디 있어?”이미숙은 악을 쓰며 소리쳤다.“그 천한 것은 혼자 도망친 것도 모자라 내 다이아몬드 목걸이랑 팔찌까지 훔쳐 갔어요! 내가 돌아가기만 하면 아빠한테 당장 해고시키라고 할 거예요! 아니, 그냥 죽여버릴 거예요!”그녀의 격분한 외침에 납치범들은 폭소를 터뜨렸다.“돌아간다고?”그렇다, 이제 이미숙에게 돌아갈 곳 따위가 있을까?‘시중이 돈을 훔쳐 도망친 거라면, 경찰에 신고할 리 없겠지.'그들은 안심하고 다음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이미숙을 다시 원래 있던 창고로 데려가지 않고, 화물차를 이용해 몇 번을 이동한 뒤 배에 태웠다.도망칠까 봐 그녀에게 약까지 먹였다.약기운에 이미숙은 손발에 힘이 풀렸고 온몸에 힘이 빠졌다.정신도 몽롱해 하루 대부분을 잔 채로 보냈다.지금이 몇 월 며칠인지, 여기가 어딘지조차 알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는 포기하
이미윤은 소리를 질렀다. “사기꾼! 넌 처음부터 거짓말로 모두를 속였어!”이미숙이 대답했다. “난 확실히 기억을 잃었었어. 하지만 최근에야 떠올랐어.”일부 기억은 여전히 흐릿했기에, 그녀는 일부러 떠보는 수밖에 없었다.그런데 예상치 못한 대답을 들을 줄이야.“너... 너 대체 뭘 하려는 거야?”“그러니까, 내가 방금 한 말들... 다 인정하는 거네?”이미윤은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무슨 소리야... 난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방금 전에 당장이라도 덤벼들 듯 화를 내던 이미윤이 이제 와선 도망치듯 외면하는 모습을 보며, 이미숙은 개의치 않고 가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방금 언니가 말했잖아? 난 어릴 때부터 사랑을 독차지했고, 언니는 마치 미운 오리 새끼 같았다고. 부모님은 날 아끼고, 정훈 오빠도 날 좋아하고. 그 이유가 뭔지 알아?”이미숙이‘정훈 오빠도 날 좋아하고’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윤의 눈빛이 흔들렸다. 당혹감과 분노가 뒤섞인 기색이었다.“먼저 부모님부터 말해볼까? 난 친딸이고, 넌 입양된 아이니까. 하지만 그 전제 아래서도 부모님은 너를 소홀히 한 적 없었어.”“항상 널 부족함 없이 키웠고, 내가 가진 건 너에게도 똑같이 줬어. 오히려 웬만한 친자식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자랐을걸?”“하지만 인간은 원래 만족을 모르는 법이야. 많이 가져도 더 갖고 싶고, 남들보다 덜하면 억울한 법이지.”이미윤이 소리쳤다.“네가 뭘 안다고 그래?! 그래, 부모님은 날 차별하지 않았어. 하지만 널 더 사랑했잖아!”“부모님이 자식을 공평하게 사랑한다고 해도, 본능적으로 더 애착이 가는 쪽이 있는 건 당연한 일이야. 그걸 탓할 순 없지.”이미숙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그럼 네가 대답해 봐. 만약 너에게 아들이랑 입양한 아이가 있다고 쳐. 너 정말 두 아이를 똑같이 대할 자신 있어?”이미윤은 말문이 막혔다.“넌 스스로도 하지 못하는 일로 부모님에게 요구했던 거야.”사람은 자신의 주제를 모르고, 무엇을 해야 하고, 어디까지
“사실 네가 살아 있을 수도 있고, 불구가 되었을 수도 있고, 깊은 산속으로 팔려갔을 수도 있고, 거지가 되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이렇게 잘 살고 있을 줄은 정말 몰랐어.”“이미숙, 넌 왜 항상 운이 좋은 거야? 납치당했는데도 멀쩡히 돌아왔고, 돌아와도 모두들 널 예전처럼 대해 주잖아.”이미숙은 담담하게 말했다.“정말 부러워하는구나?”이미윤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 부러워. 하지만 그것보다 난 네가 더 미워!”갑자기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고, 곧이어 정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이미숙은 그녀를 힐끗 바라보더니 안으로 걸어가며 말했다.“정은아, 나 여기 있어.”“할머니께서 엄마 어디 갔냐고 찾고 계세요.”“아까 물건 좀 정리하고 있었어. 이제 갈게.”이미윤은 그대로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눈송이가 그녀의 어깨 위로 떨어져 머리카락 사이로 스며들었고, 차가운 기운이 머리부터 심장 깊숙이 스며들었다.심정훈과 현빈 부자가 서재에서 나왔을 때, 거실에는 이미숙만 남아 있었다.이미윤은 언제 떠났는지도 모른다.심정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아버지, 저 담배 한 대 피우고 올게요.”현빈은 그렇게 말하고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심정훈은 이미숙을 바라보며 다가가 그녀 앞에 멈춰 섰다.가까워질수록 심장이 요동쳤다.“새해 복 많이 받아, 미숙아.”“네, 고마워요.”이미숙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한쪽은 깊은 수렁 같았고, 다른 한쪽은 잔잔한 호수 같았다.“아빠랑 얘기 끝났어요?”“응.”심정훈은 고개를 끄덕였다.“이제 돌아가려고.”“그래요.”이미숙은 주방을 향해 소리쳤다.“여보, 잠깐만 와 봐. 우리 같이 형부 배웅하자.”그 한마디는 마치 화살처럼 심정훈의 가슴을 찔렀다.심정훈은 시선을 드리우며 눈빛 속의 아픔과 쓸쓸함을 감췄다.“그래! 바로 갈게!”소진헌은 부리나케 주방에서 나왔다.손에는 물기가 남아 있었고, 급하게 닦으며 말했다.“두유 만들고 있어. 금방 될
“당신 어떻게 감히 그런 일을 할 수가 있어?”남자는 핏줄이 불끈 솟아오르며 이를 악문 채 한 글자 한 글자 쥐어짜듯 내뱉었다.이미윤은 시선을 피하더니 이내 질문을 했다.“여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심정훈은 냉소를 지으며 차갑게 이미윤을 쏘아붙였다.“여보? 떳떳했다면 따귀를 맞고도 날 그렇게 불렀을까? 욕부터 퍼붓는 게 정상 아니야?”이미윤의 표정은 순간 굳어졌다. 싸늘한 기운이 등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졌다.“나... 나는 그저 당신이 술에 취해서 그랬다고 생각했을 뿐인데...”“나 오늘 술 한 방울도 안 마셨어.”이미윤은 힘겹게 침을 삼키며 억울한 기색을 띠었다.“대체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화를 내는 거예요? 나는...”말을 잇던 이미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세월이 지나도 고운 눈매와 정교한 이목구비는 여전했다. 성숙한 분위기 속에 풍겨 나오는 그윽한 매력은 변함없었다.“나도 귀하게 자란 사람이에요. 그런데 당신이 이렇게 함부로 손을 대면 내 체면은 뭐가 돼요?”이미윤은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며 고개를 숙였다. 마치 속상한 아내가 남편에게 토라지듯이.서운함, 애교, 그리고 은근한 유혹이 담겨 있었다.하지만 심정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차갑게 굳은 얼굴로 이미윤을 위아래로 훑었다.그 시선에는 조롱이 서려 있었다.“이렇게 뻔뻔하게 거짓말할 줄은 몰랐네. 아니, 감히 이런 배짱까지 키웠을 줄이야?”심정훈은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귀한 몸이라고? 방금 이원에서 당신이 한 말과 좀 다르던데?”‘나와 이미숙이 하는 말을 들었어.’이미윤은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리고 눈빛이 흔들렸다. 당혹, 두려움, 그리고 절망.“여보, 내 말 좀 들어봐요. 나... 나 일부러 미숙이랑 싸운 게 아니에요. 당신 혹시 서재 발코니에 서서 뭐라도 본 거예요?”“하, 이미윤. 아직도 거짓말이 통할 거라고 생각해?”심정훈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난 발코니에서 본 게 아니야. 정원에 나가 바람을
“왜?! 대체 왜 그랬어! 미숙이는 당신 동생이잖아!”“동생? 그래요, 이미숙은 이씨 가문의 친딸이잖아요, 늘 나보다 사랑을 많이 받았고요! 당신도 그 여자를 좋아하잖아요. 도대체 왜요?”“그래서 그런 이유로 미숙이를 죽이려 했단 말이야?!”“맞아요! 부러워서 그랬어요! 질투도 나고요!”“이미윤, 당신 미쳤어! 정말 미쳤다고!”“하하하... 그래요, 나 미쳤어요. 20년 전부터 난 이미 미쳤겠죠! 특히 당신이 이미숙과 다정하게 붙어 있을 때마다, 난 달려가서 이미숙의 목을 조르고 싶었으니까요!”“오늘까지도 마찬가지였어요! 당신이 애틋한 눈빛으로 이미숙을 바라볼 때마다, 평생을 함께해도 부족할 것처럼 바라볼 때마다, 내가 얼마나 미쳐가고 있었는지 알아요?!”“심정훈, 당신은 이제 내 남편이에요. 우리가 한 가족이라고요! 20년이 넘었는데도 왜 아직도 이미숙을 못 잊는 거죠? 그 여자는 이미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았어요. 그런데도 당신은 여전히 이미숙을 그리워하고 있잖아요!”“소진헌을 볼 때마다 질투가 나겠죠? 아마도 소 서방이 사라지길 바랐을 거예요, 안 그래요? 소진헌이 당신에게 있어 그런 존재라면, 나에게 있어 이미숙도 마찬가지예요.”“우리는 같은 사람이에요. 가질 수 없어서, 사랑에 미쳐서, 어떻게든 손에 넣으려고 발버둥 치는 불쌍한 인간들이라고요!”심정훈은 차갑게 말했다.“당신 그 말 틀렸어. 내가 소진헌을 아무리 질투해도 절대로 그 사람을 해치진 않을 거야. 왜냐하면... 그 사람이 없다고 해도, 미숙이가 내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니까.”“하하하! 잘 말했어요! 그럼 우리 확실히 다르네요. 나는 이미숙을 없애버리면, 당신은 내 것이 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하하하!”“그러니까 결국 난 틀리지 않았어요. 이미숙이 사라지자, 당신은 나와 결혼했고, 우린 아이까지 낳았잖아요. 20년 넘게 함께 살았고요. 이거면 충분하지 않나요?”심정훈은 온몸이 굳었다.이미윤은 다시 한번 비수 같은 말을 내뱉었다.“만약 내가 냉혹한 킬러라면, 당신
[정은아, 새해 복 많이 받아.]남자의 목소리는 고요한 밤에 흐르는 첼로 선율처럼 낮고 깊었다.주위는 조용했지만, 재석의 목소리만이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정은은 귀가 간질거려 손끝으로 살짝 긁고는 핸드폰을 반대쪽으로 옮겼다.“선배님도 새해 복 많이 받아요.”그때, TV에서 새해맞이 카운트다운이 울려 퍼졌다.“5, 4, 3, 2...”[정은아, 고개 들어봐.]재석은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은은 바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하늘에서 가득 터지는 불꽃을 보았다.수많은 불꽃이 땅으로 쏟아지는 듯한 모습에 정은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어머, 이 많은 불꽃놀이를 어떻게 동시에 터뜨린 거지?”“어? 이거 일반 불꽃이 아니야! 전자 불꽃이잖아!”“뉴스에서는 아직 기술적인 한계가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떻게 벌써 출시된 거죠?”“이미 해결된 거겠지!”“와, 너무 예쁘네! 화약 냄새 하나도 안 나!”“게다가 전자 불꽃놀이는 더 오래 머물고, 손만 뻗으면 닿을 것처럼 가까워 보여...”“앞으로 매년 설날마다 볼 수 있는 거야?”“당연하지! 개발한 기술은 이렇게 써먹야지!”이웃들도 모두 밖으로 나왔는데, 떠들썩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정은도 넋을 잃고 하늘을 올려다봤다.어둠 속에서 터지는 불꽃은 눈앞에서 피어나다 사라졌다.한순간이지만 그 순간은 너무나 찬란했다.아름다운 것은 사라진다 해도 후회할 필요가 없었다.꽃이 피고 지는 것도 다 자연의 법칙이니까.전화기 너머로 재석이 말했다.[정은아, 벌써 세 번째 해가 찾아왔어.]정은은 미소를 지었다.하늘에 터지는 불꽃을 바라보며 그녀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시간 참 빠르네요... 같이 설날을 두 번이나 보냈다니.”[영상통화 할 수 있어?]“네, 할 수 있어요.”곧 영상통화가 들어왔고, 정은이 바로 받았다.화면 속의 재석은 목폴라 니트를 입고 있었다. 조명이 비추자, 옆모습은 부드러운 빛에 감싸여 평소보다 온화해 보였다.그의 뒤로는 끝없이 터지는 불꽃이 있었고, 밤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
정은이 멍해 있는 사이, 재석이 한 걸음 다가섰다. 늘 부드럽고 점잖던 그가, 이 순간만큼은 전에 없던 강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 이런 눈빛도 있었나?’정은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는 순간, 재석은 어느새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정은이도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재석이 자신보다 훨씬 크다는 걸. 그리고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면, 자신이 마치 남자의 품 안에 갇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도.재석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이제 좀 알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그때 네가 학업이 먼저라고 했을 때, 난 받아들였어.”“그런데 장은혁한텐 기회를 줬지. 정은아...”그가 고개를 더 숙이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선에 닿았다. 순간, 정은의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너, 나한테 너무 불공평해.”그 마지막 한 마디는 묘하게 서글픈 기운이 섞여 있었다.정은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재석은 그녀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알아, 내가 지금 어떤 입장인지. 묻고 따질 자격도 없고, 네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네 자유라는 것도 알아.”“이 말 꺼냈다가, 우리 사이가 끝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근데... 계속 참다 보니까 알겠더라.”‘난... 그렇게까지 쿨한 사람이 아니었어.’“그래서 이제 참지 않기로 했어.”‘어떻게 되든, 그건 네가 정해.’그렇게 말한 재석은 고개를 숙인 채 멈췄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용한 밤공기 속에서, 정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이제, 제가 말해도 될까요?”“응...”“재석 씨.”정은은 처음으로 재석을 그렇게 불렀다.“고개 들어요. 나 좀 봐요.”재석의 어깨가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그는 이미, 거절당할 각오까지 끝냈다.그런데 눈이 마주친 순간, 정은의 두 눈 속에서 재석이 본 건... 눈물이 아닌, 웃음이었다.억지로 짓는
“헤어졌다고요?”정은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몰랐어?!”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욱은 눈을 반짝이며 의자째로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본격적인 ‘TMI’를 털어놓기 시작했다.“M시 출장 갔다 오고 며칠 안 돼서, 재석이가 바로 짐 싸서 수아를 내보냈다니까?”정은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재석과 수아 사이에 어떤 감정선이 있었는지, 그동안 몇 번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퍼즐처럼 빠르게 떠올랐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 속엔 미묘한 기류가 스쳤다.“아마 진짜 많이 좋아했나 봐. 그러니까 정리할 때도 그만큼 아프고, 오래 걸리는 거겠지. 조금만 시간 지나면, 태민이도 정리될 거야.”진욱은 이어서 말했다.“네.”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그 이후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남의 연애는, 들을 수는 있어도 깊게 얘기하지 말아야 해. 괜히 나서 봤자... 괜히 끼어든 꼴만 되니까.’...해가 지고, 붉은 노을이 건물 유리에 비치기 시작할 무렵. 정은은 마침내 작업을 끝냈다.진욱은 기다렸다는 듯 프로그램을 열고 기능 하나하나를 테스트했다.그리고 30초쯤 흐른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어어!! 복구됐어! 됐다! 돌아왔어! 다시 쓸 수 있어!!”미진도 덩달아 벌떡 일어나 양손을 번쩍 들었다.“살았다, 진짜!! 여태 손으로 데이터 입력한 거 생각하면... 이건 거의 기적이야!”진욱은 시계를 힐끗 보더니, 정은을 향해 말했다.“지금 이 시간까지 남아서 도와준 우리 정은이, 완전 수고 많았어! 조 교수...”“응...?”갑작스레 이름이 불리자, 재석은 몇 초간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진욱은 능청스럽게 말했다.“아니, 정은이가 이렇게 큰일 해줬는데, 감사 표시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적어도 밥 한 끼는 사야지.”“맞아요, 맞아요. 조 교수님, 이건 진짜 밥으로도 모자라요.” 미진이 곧장 거들었다.재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략 1년 전, 정은은 한동안 재석의 실험실을 빌려 쓴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전진욱, 조미진 등과 인연이 닿았다.처음엔 서로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몇 달이 지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고, 지금은 가볍게 농담도 주고받을 만큼 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진욱은 우연히 정은이 실험 데이터를 처리하는 속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어서 슬쩍 물어봤더니, 정은은 코딩도 할 줄 아는 공대 만능 캐릭터였다. 그녀는 직접 짠 프로그램으로 데이터를 자동 정리하고, 다차원 분류와 정렬까지 가능하다고 했다.“와, 뭐야... 완전 반칙인데?”진욱은 결국 정은에게 부탁해 실험실 맞춤형 프로그램 하나를 따로 제작해달라고 했고, 그 이후, 데이터 정리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맞이했다. 진욱은 쓸 때마다 감탄하며 말했다.“진짜... 정은이 덕분이야. 이게 사람을 살리네.”하지만 어제 그 기특한 프로그램이 갑자기 먹통이 됐다. 손태민이 고쳐보겠다고 덤볐지만, 결과는... 풍비박산이었다. ‘이젠 누가 손댔다간 진짜 박살 나겠어...’ 결국 정은에게 SOS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재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오늘 시간 돼? 안 되면, 며칠 뒤도 괜찮고...]진욱은 훨씬 급했다. 말 그대로 살려달라는 마음이었다.[야, 오늘 안 데려오면... 나 여기서 바로 싸버린다! 진짜라고, 어?!]그는 어제 약 먹고 좀 괜찮아진 줄 알았건만, 밤새 배가 또 난리였다. 오늘 아침부터 실험실 화장실은 진욱의 전용이 되었다. 오전에만 6회 방문.그 말은, 그냥 협박 아니었다. 진짜 실현 가능성이 있었으니 말이다.정은은 상황을 듣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시간 돼요. 지금 바로 갈게요.”[그래. 그럼 내가 정문 앞으로 갈게.]‘굳이 마중까진 필요 없는데...’ 뚝-정은이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10분 뒤, 정은은 학교 정문 앞에서 재석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실험실로 걸어가며 프로그램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
진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렇게 마음이 있는 거면, 왜 정은이한테 솔직하게 말 안 해?”“겁나는 거지, 재석아? 말 꺼냈다가 거절이라도 당하면... 그땐 친구로도 남을 수 없을까 봐, 무서운 거잖아.”진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재석을 똑바로 바라봤다.“그건 너답지 않아. 내가 아는 재석이는, 망설이지 않고 결정하는 사람이었어. 결과가 불확실하다고 물러서는 사람 아니었잖아.”“정은이가 ‘지금은 연애 생각 없다’고 했지? 중요한 건 ‘지금은’이라는 거야. 사람 마음은 바뀌는 거고, 그때 거절했다고 지금도 똑같을 거란 보장은 없어. 알겠냐?”재석은 말없이 진욱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말이 생각보다 깊게 박혔다. ‘지금도 똑같을까? 아니, 혹시... 지금은 조금 다를 수도 있는 걸까...’진욱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야,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너 계속 질질 끌면, 정은이 뺏긴다. 그리고 뺏기고 나서 울어봤자, 소용없을 거야.”“우리 정은이 인기 많은 거 너도 알잖아. 예전에도 정은이 두고 싸운 애들 있었잖아. 그리고 오늘 그 남자 봤지? 얼굴 잘생겼지, 젊지, 에너지 넘치지, 옷차림 보니까 집도 잘 사는 거 같던데?”재석은 이런 말을 아주 듣기 싫었다.“닥쳐.”진욱도 더 이상 말하기 싫었다. “칫. 드디어 위기감이 좀 드나?”‘그래, 긴장 좀 해라. 맨날 냉정한 척만 하지 말고... 이번엔 너도 좀 불안해져 봐야지.’...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집에 바래다준 뒤, 약을 가정부에게 전달하며, 복용 방법까지 하나하나 직접 설명했다. 봉수진은 저녁까지 먹고 가라며 붙잡았지만, 정은은 이미 서준, 민지와의 약속이 있었다.“외할머니, 며칠 안에 다시 올게요. 오늘은 친구들이랑 약속이 있어서요.”“그래그래, 알았어. 젊을 땐 많이 만나고 다녀야지.”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고, 곧 차에 올랐다.약속 장소인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땐, 서준과 민지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테이블 위에
은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게요... 나야 뭐, 그랬으면 좋겠지만...”하지만 정은의 태도는 그리 확신을 줄 만큼의 호감은 아니었다.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분명히 좋아한다는 표시도 없는 애매한 선이 보이는 듯했다.‘그래서 더 미치겠어. 기대도 못 하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이러니까 계속 마음이 붕 떠 있잖아...’그렇게 속으로 앓고 있었지만, 정은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봉수진의 약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었다.VIP 약국답게, 일 처리는 정말 빨랐다. 정성스럽게 달인 약이 곧바로 팩 단위로 나뉘어 밀봉되었고, 음용 방법까지 깔끔하게 안내되었다.냉장 보관 후, 따뜻한 물에 데워 마시면 된다는 안내였는데, 이 정도면 환자도 거부감 없이 약을 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약을 다 받은 후, 약 한 시간쯤 지나 두 사람은 병원을 나섰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은의 전화가 울렸다.“여보세요? 외할머니? 네, 약 다 받아놨어요.”“병원에서 달여줬어요. 네, 거기 계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은 정은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은혁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오늘 고마웠어요. 외할머니 모시러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아, 어... 그래요! 잘 가요!”은혁은 여자의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심지어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한참을 그렇게 바라본 후에야 아쉬움 가득한 시선을 거두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고, 화면엔 ‘황기' 두 글자가 떴다.“여보세요?”[야 이놈아! 도시락 던져놓고 도망가듯 나가버리면 어떡해?! 말도 못 붙였잖아! 뭐가 그렇게 급해? 뭐가 외할아버지보다 중요한 거냐고?!]“죄송해요... 헤헤.”황기는 순간 당황했다. ‘얘 지금 뭐야? 미쳤어? 웃음은 왜 이렇게 정직하게 새어 나오는 건데...?’...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태우고 병원을 나서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재석은 약을 수령하고 외래 진료실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정은도 여기서 재석을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선배님, 병원엔 무슨 일로 오셨어요?”재석은 그제야 시선을 거둬들였다. 눈길이 정은에게 닿는 순간,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난...”“날 데려다주러 온 거야.” 그 순간, 전진욱이 배를 감싸 쥐며 천천히 다가왔고, 재석 대신 대답을 건넸다.정은은 진욱을 바라보다가 눈이 살짝 커졌다. “교수님,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하... 뭘 잘못 먹었는지, 아침부터 배탈이 나서... 약도 안 듣고... 이 사람이 막 끌고 오더라니까... 검사라도 받아보라고.”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하셨어요. 괜히 방치하다가 더 심해질 수도 있잖아요. 미리 체크하면 마음도 편하고요.”“어우, 너희 둘 미리 맞췄냐? 말이 어쩜 그렇게 똑같냐?” 진욱이 짐짓 장난스러운 말투로 투덜댔다.정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재석을 바라봤다. “그랬어요?”재석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빛 속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다. ‘저 말투, 저 표정... 나만 아는 게 아닐 텐데...’“정은 씨, 이제 가야죠.” 그때, 은혁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아, 네.” 정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 먼저 갈게요.”그렇게 말한 후, 은혁과 나란히 병원 복도를 걸어 나갔다.재석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두 사람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눈빛 속 감정은 복잡하고도 묘했다. ‘뭔데, 저 둘은 저렇게 자연스러워...’“재석아? 야, 재석아!”진욱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재석은 고개를 돌렸지만, 눈빛 속 싸늘함은 여전했다. 진욱은 그 눈빛에 소름이 돋아 어깨를 움찔거렸다.“너... 왜 그래?”“방금 정은이가 ‘저희’라고 했어.”“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재석을 바라봤다. 몇 초간 멍하던 그는 그제야 이해가 된 듯 말했다. “아... 그 ‘저희’? 그게 뭐 어때서? 같이 왔으니까 ‘저희’지. 그럼
얼마 지나지 않아 황 원장은 처방전을 프린트해서 정은에게 건넸다.“수고 많으셨습니다, 원장님.”정은이 공손히 인사하자 황 원장은 손을 휘저었다.“아이구, 무슨... 이 아가씨는 인사도 참 반듯하게 잘하네요. 말도 예쁘게 하고, 얼굴도 예쁘고. 이런 손녀가 있으면, 어디 내놔도 자랑이겠네요.”봉수진은 바로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럼요. 우리 손녀는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어요.”황 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장난스럽게 물었다.“이렇게 예쁜 아가씨한테 남자 친구가 없을 리 없는데? 그렇죠?”봉수진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없어요! 보통 남자애들은 우리 정은이랑 안 어울려요.”“허허, 그래도 우리 손자 정도면 꽤 괜찮은데...?”황 원장이 살짝 떠보자 봉수진은 손사래를 쳤다.“아이구, 그 얘긴 그만해요. 정은이 아직은 시집 안 보낼 거예요. 지금이 제일 곁에 두기 좋을 때라니까요.”‘아이고, 또 시작이다...’정은은 속으로 헛웃음 치며 처방전을 가방에 쏙 넣고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저, 약 지으러 먼저 다녀올게요!”...진료실 문을 나서는 순간, 정은은 누군가와 부딪혔다.“아, 죄송해요!”고개를 돌려 상대방을 본 순간 정은의 걸음이 멈췄다.“은혁 씨?”은혁은 보온 도시락 통을 들고 서 있었다.“정은 씨! 또 보네요. 우리 진짜 인연인가 봐요? 하하...”“여긴... 병원인데? 누가 입원하셨어요?”정은이 도시락을 보며 물었다.“아, 아니에요. 저 입원실 온 거 아니고요! 외할아버지가 이 병원 의사세요. 오늘 외래 당번이라 저희 어머니가 직접 도시락을 싸주셨는데, 제가 대신 가져다드리러 온 거예요.”“혹시 외할아버지 성함이 황 씨?”“네! 황기 원장님이세요. 한약재 이름에서 따오셨대요, 혹시... 아는 분이세요?”‘어머나, 진짜 인연인가?’정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오늘 저희 외할머니 진료도 황 원장님한테 받은 거예요.”“정말요? 세상에... 진짜 대박. 어쩐지 자꾸 마주치네요.”은혁은 정은 손에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