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일 어머니의 상태는 확실히 좋지 않았지만, 입맛이 없고 물조차 마실 수 없는 정도는 아니었다.설날 전후에 일이 좀 생겨서 이렇게 된 것이었다.진일 집안의 조상은 줄곧 농사를 지었는데, 5년전, 진일의 아버지가 공사장에서 뜻밖에 부상을 입고 절름발이가 되었기에, 외지에 나갈 수 없었다. 그래서 남봉수는 아예 마을에 남아 밭을 심었고 또 뒤의 산을 개간하여 과수를 심었다.처음 몇 년은 아직 초보라서 남봉수는 나무를 너무 많이 심지 못했다.뒤에 점점 경험을 쌓자, 그도 해마다 재배 면적을 넓혔다.재작년에는 더욱 대풍년을 맞이했고, 시세가 좋아서 적지 않은 돈을 벌었다.그때 마을 사람들이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또한 진일네는 평소에 같은 마을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지 않아, 모두들 질투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그러나 뜻밖에도 작년에 날씨가 좋지 않아 수확이 절반으로 줄었을 뿐만 아니라, 과일의 질도 좋지 않았다.계속된 폭우로 많은 과수의 뿌리가 물에 잠겨 전부 썩어서 적지 않은 손해를 보았다.다행히 진일은 지예를 대신해서 논문을 냈기에 송지혜에게서 돈을 받았고, 걱분에 집안의 급한 불을 끌 수 있었다.그 후 진일은 몰래 밖의 실험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돈을 꽤 많이 모았다. 그는 이 돈을 이자까지 붙여 송지혜에게 돌려주었다.뿐만 아니라 집에 돈을 좀 남겨두면서, 남봉수에게 좀 좋은 과일모종을 사게 했다.그렇게 작년에 심은 앵두나무가 올해 열매를 맺었다.남봉수의 세심한 보살핌으로, 앵두 열매는 크고 달았으며, 올해 초 수입국의 앵두 재배원은 대면적의 해충으로 앵두 가격이 보편적으로 올랐다.남봉수는 이 기회를 틈타 외지의 한 딜러와 수매계약을 맺었는데, 상대방은 모든 앵두를 도급맡았을 뿐만 아니라, 내년의 앵두까지 직접 예약했다.남봉수는 기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섣달 그믐날 때, 온 가족은 기쁨에 넘쳐 마침내 살림이 좋아졌다며 미래에 희망을 품었다.그러나 이튿날 바로 사고가 날 줄이야...“오빠! 물 좀 마셔요, 제가 말할게요!”
그러나 꾹 참은 진일 부자는 평화 대신 더욱 심해지는 모욕을 맞이했다.서씨 형제는 분풀이를 위해 한밤중에 진일 집에 몰래 들어가, 우리에 있는 닭을 훔쳤고 문을 지키는 개까지 죽였다.그리고 또 돈으로 사람을 찾아 진일 집 벽에 똥을 뿌렸다.정월 대보름날에는 더욱 한 무리의 사람들을 데리고 거들먹거리며 진일 집에 쳐들어와 그의 부모님을 두들겨 팼다.그래서 진일 어머니의 병세가 악화되어 음식을 넘기기조차 어려웠고, 도시에 가서 진찰을 받을 수도 없었다.서씨 집안은 또 마을 사람들을 협박하며, 집에 차가 있는 사람들이 전부 진일을 돕지 못하게 했다.그리고 진일의 핸드폰도 실랑이 때문에 고의로 짓밟혀 망가졌다.충돌이 발생한 날, 재운도 진일 집에 있었는데, 밀치락달치락하다가 머리를 다쳐 당시 피를 줄줄 흘렸다.서씨 형제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진일은 구급차를 부르려다가 서지강에 의해 팔이 꺾여 땅에 엎드린 채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결국 재운의 부모님이 소식을 듣고 달려와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서야 서씨 형제의 용서를 받아 아들을 데리고 떠날 수 있었다.그날 저녁, 재운은 마을 병원에 호송되었는데, 의사는 치료할 수 없다며 밤새 시내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옮겨졌다.재운은 아직도 깨어나지 못했다.이현이 말했다.“그 사람들은 무덤을 옮기려는 게 아니라, 우리 집 돈을 벌 수 있는 앵두나무가 탐났던 거예요. 그래서 산을 강점하려는 거라고요!”민지는 이 말을 듣고 화가 나서 온몸을 떨었다.“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파렴치한 사람이 있지? 이, 이거 강도와 다름이 없잖아?”민지는 진일을 바라보았다.“처음에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건 그렇다 쳐요, 왜 맞았는데도 가만히 있는 거예요? 재운이는 그렇게 심하게 다쳤잖아요?!”진일은 쓴웃음을 지었다.“오빠 경찰에 신고했어요! 경찰도 왔지만 소용없었어요...”바로 이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진일은 문을 열자, 입을 떼며 말했다.“아버지.”문이 열리자, 몸을 구부리고 양쪽 귀밑머리가 희끗
노란 머리가 야구 방망이를 들고 집 맞은편에서 턱을 치켜들고는 날뛰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귀 먹었어?! 사람 말 못 알아듣는 거야?! 빨리 나오라고...”참을 수 없었던 민지는 바로 핸드폰을 들고 밖으로 돌진했다.정은과 서준은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고,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갈 수밖에 없었다.“뭐 하려는 거예요?” 민지는 문 앞에 서서 팔짱을 끼며 노란 머리 사내와 눈을 마주쳤다.서지강은 눈썹을 치켜세웠다.“이야, 어디서 이런 돼지가 찾아왔지? 왜? 진씨 집안을 위해 나서려는 거야?”‘돼지’라는 두 글자를 들은 민지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쪽은 살이 찌지 않아서 좋겠어요! 대나무처럼 마른 게! 영양실조인 거예요? 설마 마약하는 거 아니죠!”서지강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이때, 흰 머리 사나이가 튀어나왔다.“저 여편네 좀 봐! 주둥아리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감?! 사는 게 이제 지겨운갑제!”민지는 사투리를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게 좋은 말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노란 머리와 흰 머리는 이목구비가 비슷했고, 몸매도 그리 차이가 나지 않았다.민지는 사실 꾹 참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원숭이처럼 말랐고, 다크서클에 입술 색깔이 진해서 보기 엄청 싫었다.눈 흰자위도 혼탁하며 광대뼈가 튀어나와 지금 흉악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사람에게 주는 느낌이 싸했다.“절름발이는? 눈치가 있다면 빨리 계약서에 사인을 해. 그렇지 않으면...”노란 머리는 냉소를 지으며 은근히 협박을 했다.“그렇지 않으면요? 억지로 사인하게 하려고요?!”노란 머리는 음흉하게 민지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려 흰 머리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이 뚱뚱한 여편네는 정말 겁이 없는 것 같은데?”흰 머리는 손에 든 막대기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그래, 내가...”“그러기만 해봐요!” 민지는 고개를 들더니 피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가슴을 쫙 폈다.“법도 모르는 거예요? 손을 대면 바로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경찰?” 노란 머리는 마치 엄청
“뭐? 네 후배라고? 그럼 J시에서 왔겠구나? 어쩐지 표준어를 쓰더라니. 지금 너 같은 거지를 위해 나서는 거야? 쯧쯧쯧, 정말 믿을 수가 없구나...”서지강은 미간을 찌푸렸다.“지준아,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얼른 공격해!”“알았어, 형!”이때 남봉수도 절뚝거리며 안에서 나왔는데, 손에 식칼을 들고 있었다.“이 아이들 건드리지 마!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 다 죽여버릴 거야!” 남봉수는 분노에 얼굴이 빨개졌고, 목에 핏줄까지 불끈 솟아 마치 궁지에 몰린 야수와 같았다.그들처럼 가진 게 없는 사람이 또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참고 반항하지 않던 얌전한 사람이 갑자기 식칼을 들고 나오더니, 서씨 형제와 함께 죽을 기세를 보였다.두 형제는 깜짝 놀랐다.정신을 차리며 눈을 마주친 순간, 두 사람은 서로의 눈빛에서 두려움을 보아냈다.서지강이 말했다.“오, 오늘 일단 가만두겠어. 내일 난 계약서를 들고 다시 올 거야. 그때 가서 넌 사인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 돼!”말을 마치자, 그는 서지준을 데리고 고개를 돌려 가버렸다.‘미친, 이 절름발이 정말 정신이 나갔구나!’두 사람이 떠난 후.쿵-땡-남봉수가 든 식칼과 진일이 든 삽은 앞뒤로 시멘트 바닥에 떨어져 맑은 소리를 냈다.남봉수는 두 다리가 나른해졌고, 진일은 얼른 가서 그를 부축했다.옆에 서 있던 서준은 진일의 이마에 땀이 맺힌 것을 발견했다. 지금 땀이 목을 따라 옷깃으로 떨어져 옷을 적셨다....그날 저녁, 정은 일행은 진일의 집에서 밤을 보냈다.남봉수는 음식을 다 차려 놓은 다음, 세 사람을 자리에 앉혔다.밥은 즉석에서 쪄낸 것이고, 음식도 즉석에서 볶은 것이었다.고기며 채소며 국까지.“너희들 먹어, 사양하지 말고!”“고마워요, 아저씨.”민지는 정말 배가 고팠는데, 단숨에 밥 두 그릇을 해치웠다.서준도 의외로 많이 먹었다.정은은 남봉수와 진일이 고기를 거의 먹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사람들이 아직 밥을 먹고 있을 때, 남봉수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아내에게 밥을
진일은 머뭇거렸다.“그런데... 그 아저씨 동의하실까요?”“정은이 그들은 우리 집 사람이 아니잖아. 이 일은 서지강과 서지준의 미움을 사지 않을 거야. 돈을 버는 일이니 유 씨도 뭐라 하지 않을 거고.”“네.”정은, 민지와 서준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아주머니, 저희는 갈 생각이 없어요.”“안돼!” 이번에 남종수가 입을 열었다.말을 마치고서야 자신의 목소리가 좀 컸다는 것을 깨닫고 어색하게 다시 앉았다.“꼭 돌아가야 해. 내일 서지강과 서지준이 또 올 거야. 그 두 형제는 미친놈이라서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단 말이지!”정은 그들은 꼭 가야 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날이 밝기도 전에 얼른 출발해야 했다.진일도 따라서 고개를 끄덕였다.“여기는 너무 위험하니까 너희들 빨리 J시로 돌아가. 재운이는 아직 병원에 누워 있어. 난 너희들까지 다치는 거 보고 싶지 않아...”말이 통하지 않자, 정은 그들도 더 이상 뭐라 하지 않았다.이현의 방에서.진일은 꼼꼼하게 청소를 했다.진영매는 궤짝에서 깨끗한 침대 시트와 이불 커버를 가져와 진일에게 바꾸라고 했다.“다 됐어. 얼른 자. 내일 아침 부를게.”정은과 민지는 침대에 누웠다.깊은 밤, 주위는 적막했다.어둠속에서 민지는 이미 몇 번이나 몸을 뒤척였는지 헤아릴 수 없었다.“정은 언니...” 마침내 그녀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응? 왜 그래?”“언니, 안 추워요?”정은은 사실대로 말했다.“조금.”민지는 이미 추워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봄이 다 되어 가는데, 어떻게 이렇게 추울 수가 있죠?”그녀는 심지어 어제 그 작은 호텔이 아주 좋다고 느꼈다.정은은 민지의 손을 잡고 비볐다.“금방 이불 속으로 들어와서 그래. 조금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민지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이렇게 오래 지났는데도 따뜻하지 않잖아요...”정은이 입을 열려고 할 때, 문밖에서 은은하게 말소리가 들렸다.진영매였다.“이현이, 이리와... 이 이불 두 채를 방 안에 있는 언니들에게 줘.”
재석은 원래 정은에게 주려고 했다.그러나 오후에 돌아온 재석은 정은의 집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그는 외투를 옷걸이에 걸어놓은 다음,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벌써 10시가 되었다.‘이제 정은이도 돌아왔겠지?’재석은 자료를 들고 나가서 정은의 집을 향해 걸어갔다.“정은아? 집에 있어? 나야.”하지만 대답이 없었다.재석은 걱정이 되어 핸드폰으로 정은에게 전화하려고 했다.뜻밖에도 정은이 먼저 전화를 했다.“여보세요, 정은아?! 너 집에 있어?! 마침 너에게 줄 자료가 좀 있는데, 문을 두드려도 반응이 없어서.”[선배, 나 집에 없어요. 지금 Y시... 진일...]재석은 핸드폰을 꽉 쥐었다. 정은이 진일을 언급하자, 그는 다시 한 번 물었다.“지금 어디에 있다고?”그러나 통화가 끊겼다 이어졌다 하며 잡음까지 동반해 전혀 들리지 않았다.[상황이... 긴급해요... 내일...]“여보세요? Y시라고? 너 거기 신호가 안 좋은 거니? 여보세요? 정은아?!”재석은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전화가 이미 끊겼다.그는 갑자기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고, 즉시 다시 전화를 걸었다.“고객님이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재석은 전화를 끊고 다시 걸었다.여전히 연결이 되지 않았다.다른 한쪽에서, 이불 속에 있던 정은은 자동으로 끊긴 전화를 보면서 어이가 없었다.“이곳은 왜 신호가 이렇게 나쁜 거지?”“내 핸드폰도 신호가 없어요. 오늘 뭐 좀 찍긴 했는데, 인터넷에 올리려 해도 신호가 안 좋아서...”민지는 엎드려 있었고, 두 손으로 베개를 안으며 머리는 팔꿈치에 기댔다.그녀는 방금 시험해 보았는데, 대문 밖의 공터로 나가면 신호가 좀 좋아졌고, 실내라면 전화를 할 수 있는 것조차 다행이었다.“정은 언니, 내가 밖에서 전화할까요?”“시간도 너무 늦었으니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민지는 나른하게 응답하더니, 너무 졸려서 눈조차 뜰 수 없었다.두 눈이 완전히 감길 무렵, 민지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정은 언니, 방금
맞은편 교수님은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재석이 다시 묻자,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소, 소정은 학생은... 어제 휴가를 냈어요.]“며칠 휴가를 냈죠? 이유는 말했나요?”[그저 볼일 있다고만 했고, 구체적인 이유는 말하지 않았어요. 정은에게 별일 없을 것 같아서 이번에도 많이 물어보지 않았어요.][평소에 실험실에 있거나 논문을 썼잖아요. 어차피 전공 과목도 성적이 좋은 데다가 전에도 몇 번 휴가를 낸 적이 있고요...][무슨 일 생긴 건가요?]교수님이 조심스럽게 떠보았다.재석은 한동안 침묵했다.“다른 특별한 상황은 없나요? 남진일 학생은 어디에 있는 거죠?”[3학년의 남진일 학생을 말씀하시는 거예요?]“네.”[전 그 학생을 책임지지 않아서 자세한 상황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조 교수님이 원하신다면, 제가 대신 좀 알아볼 수 있어요.]“네, 부탁할게요, 고마워요.”[아니에요.]5분 후, 교수님이 전화를 했다.[조 교수님, 남진일 학생에게 확실히 좀 특수한 일이 생겼어요.]“무슨 일이죠?”[개학 후 지금까지 학교에 오지 않았어요. 담당 교수님이 연락해도 전화를 받지 않았고요. 참, 제가 깜박했네요.]“뭔데요?”[정은이 휴가 낸 날, 민지와 서준 학생도 와서 휴가를 냈어요.]“남진일의 집 주소를 알아낼 수 있을까요?”[그 교수님의 말을 들어보니, 남긴 주소가 완전하지 않고, 단지 Y시 사람이라는 것밖에 모른다고 했어요.]‘Y시... 바로 이거야!’통화를 마치고 재석은 다시 대학원 학장에게 전화를 걸었다.상대방은 이미 잠들었고, 전화를 받은 후 그 교수님 못지않게 놀랐다.[남진일이 남긴 주소를 알려달라고요?!]“맞아요.”[하지만 이 시간에 교수님들은 다 퇴근했으니 내일 다시...]“내일은 안 돼요, 지금 바로 알아내야 해요.”[이건...]상대방은 좀 난처했다.재석은 담담하게 말했다.“학장님은 사람을 배치하기만 하면 돼요. 만약 총장님이 묻는다면 사실대로 말씀드리시고, 뒤에는 제가 설명할게요.”[그래요
이와 동시, 재석의 핸드폰도 울리기 시작했다.학장이었는데, 진일의 구체적인 주소를 알아냈다는 것이다.두 사람은 동시에 전화를 끊고 동시에 상대방을 바라보았다.“알아냈어요!”재석은 계속 말했다.“방금 알아봤는데, Y시로 가는 가장 빠른 항공편은 오늘 새벽 1시예요. 고속열차는 내일 아침에 떠나는 것밖에 없고요.”“그럼 비행기를 타야죠! Y시 쪽에 내가 미리 사람을 배치하여 마을로 가는 차를 대기시킬게요. 그러나 남진일이 있는 하백 마을은 차가 들어갈 수 없으니, 도착한 후에 다른 교통방식으로 바꿀 수밖에 없어요.”“좋아요.”두 사람은 간단히 정리하고 바로 공항으로 향했다.사실 챙길 것도 없었다. 재석은 작은 여행가방을 멨고, 현빈은 더욱 간편하게 핸드폰 하나, 충전기 하나 그리고 몸에 지니고 있던 지갑을 챙겼다. 그 지갑에는 몇 장의 은행카드가 있었다.그걸로 충분했다.새벽 3시, 비행기가 Y시 공항에 착륙했다.현빈이 배치한 사람은 이미 차 열쇠를 들고 공항 밖에서 기다렸는데, 현빈은 열쇠를 받은 뒤 재석과 함께 차에 올라탔다.두 구간의 고속도로와 약 20킬로미터의 산길을 거친 후, 두 사람은 새벽 5시 40분에 대동리에 도착했다.이때 날이 아직 밝지 않았다.가로등은 이미 꺼졌다.조용한 마을에는 아직 불이 켜져 있는 집이 거의 없었다.재석은 조수석에 앉아 가방에서 빵 두 개를 꺼냈다. 하나는 자신에게, 다른 하나는 현빈에게 건네주었다.“배 좀 채워요.”현빈은 간단하게 맛보았다.“정말 맛없네요. 왜 이렇게 딱딱한 거죠?”비록 그렇게 말했지만 현빈은 결국 그 빵을 다 먹었다.바로 이때, 재석의 핸드폰에서 톡 제시음이 울렸다. 그는 바로 확인했다.“정은이에요!”현빈은 얼른 다가왔다.“뭐래요?”“지금 민지, 서준과 함께 진일의 집에 있다고 했어요. 핸드폰 신호가 아주 안 좋다네요...”“진일의 집에 문제가 생겼고, 어제 두 사람이 찾아와 하마터면 충돌이 일어날 뻔했다니. 오늘 또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도움이 필요하다네요..
정은은 은혁의 그 아련하고 억울한 표정을 보자, 그냥 말이 안 나왔다. ‘대체 지금 머릿속에 무슨 드라마를 찍고 있는 거지...?’ ‘진짜, 할 말 없네...’오후 세 시 정각. 탑승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승객들이 하나둘 줄을 서고, 정은도 조용히 탑승했다.비행기가 거의 만석이 된 후, 은혁은 이코노미석 안에서 정은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A 열, F 열, 가운데 구역까지 샅샅이 훑었지만, 없었다.잠시 후, 탑승 문이 닫히고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승객 여러분, 곧 출발하겠습니다.”그제야 은혁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기내 앞쪽으로 조심스럽게 올라가 봤다.그리고, 비즈니스석 좌석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있는 정은을 발견했다.“정, 정은... 씨? 이코노미석이 아니었어요...? 나는 그게...”‘뭐지, 상황이 이상한데...?’ ‘내가 이코노미석이라 당연히 정은 씨도 그럴 줄 알았는데...’정은은 슬쩍 웃었다. “누가 그래요? 내가 이코노미석 탄다고?”“지난번에 올 때는... 그때는 분명...”“그때는 비즈니스석이랑 일등석이 매진이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코노미석에 탄 거고, 이번엔 자리가 있어서 그냥 비즈니스로 예약한 거죠.”‘아... 나 지금까지 뭐 한 거지. 혼자 다 짐작하고, 혼자 의미 부여하고, 혼자 낭만 타령하고...’은혁은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었다.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사실 은혁 씨는 나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그냥... 본인이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들을 뿐이죠.”그 말에는 어떤 분노도, 원망도 없었다. 그저 담담히 사실만 전달할 뿐.은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와... 진짜, 뼈 맞았다.’자리에 앉은 은혁은 좌석의 불편함을 바로 체감했다. 다리는 제대로 뻗지도 못하고, 의자도 푹신하지 않고, 무엇보다 공기 중에 떠도는 그 ‘답답한 사람 냄새’가 꽤 거슬렸다.‘내 마음이 아무리 복잡하다지만... 이건 좀
은혁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말문이 막힌 채, 몇 초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진짜... 남자 친구가 있었던 거야?’ ‘아니면... 나 때문에 그렇게 말한 걸까?’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지만, 정은은 이미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고 없었다....그 시각, 정은은 공장 회의실에서 진승구와 협의 중이었다. 조건은 명확했고, 가격도 이견 없이 깔끔하게 정리됐다.공장장인 진승구는 시원시원한 정은의 태도에 감탄했고, 그 자리에서 바로 계약서 인쇄를 지시했다.서류가 출력되자, 두 사람은 조용히 사인했고, 정은은 먼저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좋은 협력 관계 기대하겠습니다.”진승구도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받았다.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정은이 회의실을 나선 후, 문이 다시 벌컥 열렸다.“정은 씨는 어딨어요?” 은혁이었고, 숨이 가빠 보였다.“소... 소정은 씨요?” 진승구는 당황해하며 되물었다.“그래요, 그분. 지금 어딨어요? 아까 계약한다고 했잖아요? 그냥 바로 도장 찍지 말고 좀 더 시간 끌라고 했잖아요. 이틀 정도만 더 붙잡아 두지...”진승구는 식은땀을 흘리며 답했다. “아... 이미 계약 다 끝났는데요...”은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바보야, 바보... 진짜 바보!’속으로 열 번은 외쳤다. ‘이딴 놈한테 뭘 맡기겠다고...! 아버지한테 건의해야겠네. 앞으로 공장 접대비 전액 삭감... 출장자도 식당에서 밥 먹게 하고, 노래방은? 절대 금지!’은혁은 스스로를 다독이는 척했지만, 자꾸만 뇌리를 맴도는 정은의 말 한마디에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남자 친구가 있다... 그게 진짜든 아니든, 어제 그 말은 분명 나를 밀어내기 위한 거였어. 다 망친 거야. 다 그놈의 진승구 때문이야...’진승구도 그런 은혁을 보면서 이해가 안 됐다.‘은혁 도련님... 왜 저래...?’...정은은 과일 봉지를 하나 들고 김대영이 있는 작업실 쪽으로 향했다.“김 기사님, 누가 찾아왔어요!”“예
정은이 계속 말했다.“이미 결과 나왔어요. 기준에는 전혀 못 미치네요.”김대영은 들숨을 멈췄다. “그렇게 빨리?”‘진짜다... 이 속도면 혼자서 실험실 하나는 돌리겠다니까.’“그럼, 옷부터 갈아입고 올게. 오늘은 절대 민폐 안 끼칠게!”“감사합니다, 선생님.”“에이... 감사하긴! 당연한 거지!” ‘선생님이라니... 아저씨도 아니고, 기사님도 아니고... 선생님이라 불러주다니, 나 오늘 힘난다.’모든 준비를 마친 오전 8시. 연구실 측에서 드디어 3세대 샘플이 도착했다.정은과 김대영은 다시 책상에 마주 앉아 정밀 측정과 테스트를 시작했다. 시간은 어느덧 금방 흘러 점심시간.김대영이 말했다. “가자, 밥 먹으러.”“네.”식당으로 향하는 길, 두 사람은 오후 실험 플랜에 대해 대화를 이어갔다. 바로 그때, 헐레벌떡 뛰어오는 은혁의 머리는 약간 흐트러져 있었다.심지어 셔츠 깃은 구겨져 있었으며, 표정은 평소답지 않게 초조해 보였다.“정... 정은... 씨!”은혁은 숨이 차 헉헉거리며 말했다. “겨우 찾았어요...”정은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아침부터 계속 메시지 보내도 답이 없고, 호텔 방에도 없길래... 무슨 일 생긴 줄 알았어요.”은혁도 정은을 걱정한 그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6시 반에 나왔어요. 어제 은혁 씨 늦게 들어온 것 같길래 아직 잘 거라 생각하고, 일부러 안 깨웠어요.”정은은 솔직히 대답했다.“6시 반...”은혁은 민망한 듯 짧게 웃었다. 그리고 변명처럼 말을 덧붙였다. “나 어제... 일부러 취한 거 아니에요. 원래 술 그렇게 안 마시는데... 공장장이랑 애들이 자꾸 마시자고 해서...”“끝나고 또 노래방까지... 근데 거기, 이상한 데 아니고 진짜 건전한 곳이에요. 나 원래 그런 데 잘 안 가요.”정은은 담담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오해할 일도 없고, 솔직히 말해 저랑은 큰 상관도 없는 얘기예요. 그럼, 김 선생님이랑 밥 먹으러 가볼게요.”“아
정확히 말하자면, 한 사람에게 연락해야 한다는 걸 잊었다.오후에 재석이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 공장 쪽 진행 상황을 물어보는 짧은 통화였고, 그때 정은은 막 실험에 들어가 바쁜 와중이었다.“일 끝나면 내가 먼저 연락할게요, 알겠죠?”이 말은 바로 마지막에 정은이 한 한마디였다. 그리고... 그 뒤로 연락이 없었다.‘하... 진짜 미쳤어. 그 말 해놓고 까먹었다고? 이런 사람은 또 없을 거야’정은은 민망함에 얼굴을 문지르며 핸드폰을 들었고, 톡을 열자마자 미확인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하나같이 은혁에게 온 것들. [정은 씨, 지금 어디예요?][정은 씨, 밥은 먹었어요?][정은 씨, 같이 식당 갈래요?][...] 친절한 말들이었지만, 그 속엔 정은이 찾는 메시지가 없었다.‘아니지, 지금 연락해야 할 사람은 장은혁이 아니라...’정은은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지만, 몇 자 쓰다가 다시 전부 지웠다. 결국, 손가락이 향한 건... 영상 통화 버튼.띠-잠시 울리던 화면이 바뀌며, 재석의 얼굴이 화면에 떴다.정은이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일 끝났어?]“네.” 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피곤하지 않아?]“괜찮아요. 근데... 미안해요. 공장에서 나오는 길에 바로 연락하려고 했는데, 정신이 없었어요...”[괜찮아, 언제 연락하든 난 항상 여기 있어.]‘이 말, 왜 이렇게 따뜻하지...’ 재석은 가슴속에서 뭉근한 온기가 퍼졌다.그때, 문득 정은의 시선이 멈췄다. “지금 어디예요?”[집.]“집 어디요...? 방? 아니면...”재석은 순간 멈칫했다. 정은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화장실?”화면 속, 지나치게 가까이 잡힌 남자의 얼굴. 말도 안 되게 커진 이마와 눈, 화면에 머리까지 박을 기세였다.‘잠깐만. 이거... 설마...’“설마... 지금 옷 안 입었어요?”정적. 화면 너머의 공기조차 얼어붙는 느낌.재석의 얼굴이 굳었다. [씻으려고
정은은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매고 창밖을 슬쩍 바라봤다. 공장은 호텔에서 10km 떨어진 개발지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은혁이 운전대를 잡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 구역은 첨단 기술 산업 클러스터로 지정돼 있어서, 기술 협력 프로젝트도 대부분 그쪽으로 집중되고 있어요.” “정은 씨가 찾는 그 새로운 감온 정확도 소재는 우리랑 CG그룹이 공동 개발한 건데, 지금까지 1세대부터 3세대까지 세 가지 버전이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했고, 중간중간 전문적인 질문도 빠짐없이 던졌다. 은혁이 답할 수 있는 부분은 성의껏 설명했지만, 구체적인 수치나 실험 조건처럼 세세한한 부분은 바로 대답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약 20분 후, 두 사람은 공장에 도착했다. 은혁이 미리 연락해 둔 덕분에, 정문 앞에는 담당자가 나와 있었다.정은은 안내받아 간단히 실험실과 공장을 둘러봤다. 연구 구역과 생산라인은 전혀 겹치지 않게 구획이 나뉘어 있었고, 현장도 전반적으로 정돈된 느낌이었다.정은이 요청한 소재의 1세대와 2세대는 이미 완제품으로 확보되어 있었지만, 3세대는 아직 실험 단계였기에 정식 생산은 되지 않았다. 따라서 실험실에서 직접 합성해야 했다.“시간은 얼마나 걸리죠?” 정은이 은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혁은 옆에 있는 연구원을 바라봤다.“8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내일 오전엔 제품 받아보실 수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관련 비용은 정산대로 처리해 주세요. 최종 결정되면 한 번에 입금할게요.”은혁은 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비용은 무슨 비용... 정은 씨,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요.”정은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럴수록 더 딱딱하게 해야죠. ‘친할수록 돈 문제는 분명하게.’ 이건 기본이에요. 더군다나, 우리 둘은 그냥 ‘친구’일 뿐인데, 은혁 씨가 도와주는 것만 해도 충분히 고마워요.”“게다가 실험실도 예산이 따로 있는 조직이고, 모든 비용
실험실에서 진욱은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르게 재석을 힐끔거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다가갔다. “재석아, 너 오늘 길 가다 돈 주웠냐?”실험대 앞에서 입꼬리를 내릴 줄 모르던 재석의 손이 잠깐 멈췄다. “데이터 정리는 다 됐어? 3차 실험 가능성 평가 보고서는 언제 낼 건데?”“하, 이 사람 분위기 다 깨네.” 진욱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근데 말이야, 오늘 아침에 네가 샌드위치 먹는 거 봤거든.”“그래서?”“정은이가 해준 거지? 다 알아. 너희 둘, 다시 잘 되는 거야? 그것도 아니면, 이제 미련 접은 거야?” 재석은 살짝 고민하다가, 이제는 말해도 되겠다 싶어 입을 열려고 했다.바로 그때, 핸드폰에서 톡 알림이 떴다. 정은이었다.[도착했어요. 샌드위치는 맛있었어요?]재석은 바로 답장했다.[맛있었어.]정은은 곧장 자신의 일정을 재석에게 알려줬다.[지금 호텔 체크인하고, 오후엔 공장 갈 거예요.][응, 알겠어.]1분 정도 지났지만, 그다음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재석은 괜히 허전해졌다.‘예전에도 이렇게 대화했었는데... 왜 지금은 이걸로는 부족하지?’정은과 더 오래 이야기하고 싶었다. 더 많은 말, 더 사적인 얘기, 더 가까운 거리. 그 마음은 마치, 가려운 곳을 손톱 끝으로 슬쩍 긁은 느낌. 절대 시원하지 않았다. 그냥 더 간지러워질 뿐.‘그냥, 정은이한테 세게 할퀴어지고 싶은데...’“누구랑 톡하냐?” 진욱이 슬쩍 핸드폰을 들여다보려 다가왔다.재석은 피할 틈도 없이 화면을 들킨 셈이 됐다. “뭘 감춰. 정은이랑 메시지 주고받는 거잖아. 왜? 뭐가 부끄럽다고.”“됐고.” 재석은 핸드폰을 집어넣고, 실험대에서 내려왔다. “오늘 점심은 내가 쏜다. 뭐 먹고 싶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몇 초 멈췄다. 옆에 있던 미진이랑 태민이 눈을 마주쳤다. “교수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갑자기 점심을요?”재석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먹고 싶은 거 생각나면 전 교수한테 말해.
비행기 이륙 직전, 은혁이 정은에게 제한했다. “정은 씨, 내 마일리지로 좌석 업그레이드해 줄게요.”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은혁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다시 다가와 말했다. “내가 정은 씨 옆자리로 바꿨어요.”비즈니스석에서 이코노미석으로 자리를 바꾸다니, 웬만한 사람이면 거절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은혁 씨,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정은은 단호한 어조였다.‘처음으로 이렇게까지 분명하게 말한 것 같아.’정은은 연애 한 번 안 해본 소녀가 아니었다. 은혁의 눈빛에 담긴 감정이 어떤 건지, 모를 리 없었다.하지만 그동안 굳이 선을 긋지 않은 건, 은혁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며, 오히려 몇 번이고 도와줬기 때문이었다. 이번 Z시 출장도 은혁의 도움 덕에 가능했던 일이었다.게다가 은혁이 고백도 안 했고, 정은이 불편할 정도로 다가온 것도 아니었으니까... 정은도 자신이 먼저 딱 잘라 말하는 게 오히려 예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그때의 정은은 솔로였고, 재석이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자극은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정은은 이미 재석과의 관계를 정리했고, 은혁은 더 적극적으로 다가오고 있으니, 그녀도 이제 더 늦기 전에 확실히 은혁에게 말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래야 서로 상처받지 않을 테니 말이다.은혁은 정은의 말에 잠시 당황한 듯하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난 정은 씨 옆자리에 있는 게 좋아서 그래요.”정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즈니스석 티켓을 사 놓고 누구랑 자리를 바꾸든, 그건 상대방의 자유니까. 굳이 뭐라고 할 필요는 없지.’그 후, 정은은 노트북을 열고 일에 집중했다. 은혁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틈틈이 정은을 흘끗거렸다.그러다 손을 들어 승무원을 불렀다. “저기요. 잠깐만요.”“네,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결국 재석은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정은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열쇠를 건네받아 현관문을 열어주었다.“정은아, 잘 자.”그 한마디.‘정은아’라는 이름이 너무나 자연스럽고도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마치 수천 번은 불러본 것처럼.그 말에 정은은 순간 멍해졌다.‘왜 내 이름을 듣고도 가슴이 이렇게 설레지?’“네, 당신도 잘 쉬어요.”둘은 그렇게 짧은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문 안으로 들어갔다.그날 밤. 정은은 평소와 달랐다. 샤워를 마친 뒤 늘 하던 루틴, 논문 체크나 프로젝트 정리는 손도 대지 않았다.대신,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들고 재석의 SNS를 열었다.‘뭐 하는 거야? 나...’그런데 이상하게, 자꾸만 궁금해졌다. ‘이 사람, 평소에 어떤 거 올리지?’재석은 SNS 설정 따위는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맨 아래까지 내리는 데 몇 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포스트 총수, 대략 서른 몇 개. 그중 90%는 논문, 연구, 산업 동향 공유.‘진짜 성실한 연구자 모드네...’그나마 정은과 관련 있는 건 얼마 전 실험실이 SCI 논문 게재됐을 때 서비대학교 공식 계정에서 축하 포스팅한 걸 공유한 것뿐이었다.[축하합니다.]짧고 건조한 멘트.그 밑엔 전진욱과 조미진이 ‘좋아요’를 눌러뒀다.‘이게 전부야?’그렇게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던 순간, 알림이 하나 떴다. 재석이 새로운 글을 올렸다.정은은 무심코 눌러봤다. [r = a(1 - sinθ)]‘...어?’정은의 손가락이 멈췄다. 이 수식, 익숙했다. 너무 익숙해서 순간 심장이 멈칫했다.댓글 첫 줄엔 진욱이 있었다.[극좌표 함수? 밤에 안 자고 뭐 하세요? 조 교수님?]조미진과 손태민은 말없이 ‘좋아요’만 눌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속으로 ‘다음 연구 주제가 광학 쪽인가?’ 생각하며 혼란스러워했다.아무도 몰랐다. 이 수식의 진짜 의미를.‘r = a(1 - sinθ)’, 하트곡선.‘설마 이게, 그거? 진짜 그거... 맞아?’정은은 손끝을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