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은편 교수님은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재석이 다시 묻자,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소, 소정은 학생은... 어제 휴가를 냈어요.]“며칠 휴가를 냈죠? 이유는 말했나요?”[그저 볼일 있다고만 했고, 구체적인 이유는 말하지 않았어요. 정은에게 별일 없을 것 같아서 이번에도 많이 물어보지 않았어요.][평소에 실험실에 있거나 논문을 썼잖아요. 어차피 전공 과목도 성적이 좋은 데다가 전에도 몇 번 휴가를 낸 적이 있고요...][무슨 일 생긴 건가요?]교수님이 조심스럽게 떠보았다.재석은 한동안 침묵했다.“다른 특별한 상황은 없나요? 남진일 학생은 어디에 있는 거죠?”[3학년의 남진일 학생을 말씀하시는 거예요?]“네.”[전 그 학생을 책임지지 않아서 자세한 상황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조 교수님이 원하신다면, 제가 대신 좀 알아볼 수 있어요.]“네, 부탁할게요, 고마워요.”[아니에요.]5분 후, 교수님이 전화를 했다.[조 교수님, 남진일 학생에게 확실히 좀 특수한 일이 생겼어요.]“무슨 일이죠?”[개학 후 지금까지 학교에 오지 않았어요. 담당 교수님이 연락해도 전화를 받지 않았고요. 참, 제가 깜박했네요.]“뭔데요?”[정은이 휴가 낸 날, 민지와 서준 학생도 와서 휴가를 냈어요.]“남진일의 집 주소를 알아낼 수 있을까요?”[그 교수님의 말을 들어보니, 남긴 주소가 완전하지 않고, 단지 Y시 사람이라는 것밖에 모른다고 했어요.]‘Y시... 바로 이거야!’통화를 마치고 재석은 다시 대학원 학장에게 전화를 걸었다.상대방은 이미 잠들었고, 전화를 받은 후 그 교수님 못지않게 놀랐다.[남진일이 남긴 주소를 알려달라고요?!]“맞아요.”[하지만 이 시간에 교수님들은 다 퇴근했으니 내일 다시...]“내일은 안 돼요, 지금 바로 알아내야 해요.”[이건...]상대방은 좀 난처했다.재석은 담담하게 말했다.“학장님은 사람을 배치하기만 하면 돼요. 만약 총장님이 묻는다면 사실대로 말씀드리시고, 뒤에는 제가 설명할게요.”[그래요
이와 동시, 재석의 핸드폰도 울리기 시작했다.학장이었는데, 진일의 구체적인 주소를 알아냈다는 것이다.두 사람은 동시에 전화를 끊고 동시에 상대방을 바라보았다.“알아냈어요!”재석은 계속 말했다.“방금 알아봤는데, Y시로 가는 가장 빠른 항공편은 오늘 새벽 1시예요. 고속열차는 내일 아침에 떠나는 것밖에 없고요.”“그럼 비행기를 타야죠! Y시 쪽에 내가 미리 사람을 배치하여 마을로 가는 차를 대기시킬게요. 그러나 남진일이 있는 하백 마을은 차가 들어갈 수 없으니, 도착한 후에 다른 교통방식으로 바꿀 수밖에 없어요.”“좋아요.”두 사람은 간단히 정리하고 바로 공항으로 향했다.사실 챙길 것도 없었다. 재석은 작은 여행가방을 멨고, 현빈은 더욱 간편하게 핸드폰 하나, 충전기 하나 그리고 몸에 지니고 있던 지갑을 챙겼다. 그 지갑에는 몇 장의 은행카드가 있었다.그걸로 충분했다.새벽 3시, 비행기가 Y시 공항에 착륙했다.현빈이 배치한 사람은 이미 차 열쇠를 들고 공항 밖에서 기다렸는데, 현빈은 열쇠를 받은 뒤 재석과 함께 차에 올라탔다.두 구간의 고속도로와 약 20킬로미터의 산길을 거친 후, 두 사람은 새벽 5시 40분에 대동리에 도착했다.이때 날이 아직 밝지 않았다.가로등은 이미 꺼졌다.조용한 마을에는 아직 불이 켜져 있는 집이 거의 없었다.재석은 조수석에 앉아 가방에서 빵 두 개를 꺼냈다. 하나는 자신에게, 다른 하나는 현빈에게 건네주었다.“배 좀 채워요.”현빈은 간단하게 맛보았다.“정말 맛없네요. 왜 이렇게 딱딱한 거죠?”비록 그렇게 말했지만 현빈은 결국 그 빵을 다 먹었다.바로 이때, 재석의 핸드폰에서 톡 제시음이 울렸다. 그는 바로 확인했다.“정은이에요!”현빈은 얼른 다가왔다.“뭐래요?”“지금 민지, 서준과 함께 진일의 집에 있다고 했어요. 핸드폰 신호가 아주 안 좋다네요...”“진일의 집에 문제가 생겼고, 어제 두 사람이 찾아와 하마터면 충돌이 일어날 뻔했다니. 오늘 또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도움이 필요하다네요..
재석이 물었다.“어떻게 마을에 가려고요?”현빈이 대답했다.“이미 삼륜차 하나 찾아오라고 했어요. 마을에 들어가려면, 삼륜차밖에 탈 수 없거든요.”“얼마나 기다려야 하죠?”현빈은 손목 시계를 보았다.“아마도 30분 더 걸릴 거예요.”“좋아요.”...정은이 문자를 보낸 다음, 진일은 재촉을 하며 입을 열었다.“가자, 이미 차를 찾았는데, 마을 어귀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대.”유말태는 원래 동의하려 하지 않았다.그러나 오늘 아침 날이 밝기도 전에 갑자기 변덕을 부렸던 것이다. 큰 돈을 들여 대동리에 가서 두 사람을 데리고 오라는 부탁이었다. 그것도 즉시 출발하여 되도록 빨리 도착해야 했다.빈손으로 가는 것보다, 정은 그들을 데리고 가면 돈을 더 벌 수 있었다.“늦었으니까 빨리 가...”그러나 정은과 민지는 두 손을 주머니에 넣더니 제자리에 서 있었고, 출발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왜 그래?”정은이 대답했다. “저희는 가지 않을 거예요.”민지도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진일은 다급해졌다.“어젯밤에 약속했잖아?!”민지는 눈을 깜박였다.“저희가 언제요? 그건 선배와 아저씨의 결정이지, 저희는 동의하지 않았는데.”“내 말 좀 들어봐, 여기는 정말 위험해서 너희들 남으면 안 돼! 서지강과 서지준 그 두 사람은 완전히 미친놈이야! 이따 무슨 일 저지를지 모르니 너희들...”정은은 그의 말을 끊었다.“선배.”“어?”“우리 친구 아니었어요?”진일은 말을 하지 않았다.정은은 계속 물었다.“대답해요.”“친구이기 때문에, 너희들을 우리 집안 일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은 거야. 너희들 위험에 빠질 수도 있어!”재운은 아직도 깨어나지 않았으니 진일은 이런 일 더 생기게 하고 싶지 않았다.바닥에 널린 선혈, 재운의 부모님이 무릎을 꿇고 서씨 두 형제에게 용서를 빌던 장면, 지금 생각해도 진일은 가슴이 떨렸다.심지어 자다가도 눈물이 날 정도로 죄책감을 느꼈다.진일은 친구가 자신 때문에 다치는 것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 진일이 더 이상 막지 않았다.그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면서 눈물이 핑 돌았지만, 오히려 엄청난 감동을 받았다.정은은 방 앞까지 걸어가더니 갑자기 멈칫했다.민지도 따라서 멈추었다.“왜 그래요?”정은은 옆의 침실 문을 가리켰다.민지는 바로 알아차리며 살며시 문을 열었다.‘뭐야! 임서준 이 자식, 아직도 쿨쿨 자고 있다니.’심지어 일어나는 척조차 하기 싫었다.“정말 대단하네, 임서준.”정은이 말했다.“선배는 아마 서준이 정말 화장실에 간 줄 알았을 거야.”“어쩐지...”화장실에 가는 건 거짓말이었고, 이불 속에 들어가 계속 자는 것이 사실이었다.“그럼...”민지는 갑자기 멈칫했다.“그럼 우리만 손해를 본 게 아니에요? 일어나서 옷을 입고 문 앞까지 따라갔잖아요?”정은은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지.”...수탉이 울부짖자, 날이 밝았다.그러나 안개는 아직 걷히지 않았다.정문을 여니, 넓은 땅과 먼 곳의 산들이 눈에 들어왔다.민지가 말했다.“Y시는 또 산의 도시라고도 하잖아요. 정말 맞는 말이네요!”차를 타고 오면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산이었다.하늘에 붉은 색이 나타난 것을 보며 진일이 말했다.“오늘 햇빛이 나타날 거야.”민지가 감탄했다. “정말이죠?!”‘드디어 날씨가 따뜻해지는 거구나, 흑흑...’이때 남봉수와 진영매도 일어났다.마을의 한의사가 진영매는 계속 침대에 누워서는 안 되며 적당히 걸어야 한다고 말했다.그래서 매일 아침, 남봉수는 그녀를 부축하여 문밖으로 가서 두 바퀴 거닐었다.부부는 정은 세 사람이 뜻밖에도 가지 않은 것을 보고 즉시 당황해졌다.“유 씨가 동의하지 않은 거야?! 여보, 빨리 가서 이 씨 찾아요, 옆집 아주머니의 손자를 찾아도 되고요...”민지가 대답했다.“아주머니, 당황하지 마세요. 저희가 가고 싶지 않은 거예요.”진영매는 놀라서 말을 더듬었다.“너, 너희들도 참! 왜, 왜 말을 안 들어?! 얼른 가야 해. 여기 있으면 안 돼... 진
말하면서 서지강은 계약서와 비슷한 물건을 꺼내 남봉수 앞에 던졌다.“이렇게 오래 끌었으니 아저씨도 잘 생각했을 거야. 쓸데없는 말 하지 마. 오늘 내가 이렇게 펜까지 다 가져왔잖아, 아저씨는 직접 여기에 사인만 하면 돼! 그럼 돈이 바로 입금될 거야.”남봉수는 표정이 좋지 않았다.“지강아, 나도 여전히 그 말이야, 난 이 계약서에 사인을 하지 않을 거야. 그것은 우리 집의 산이고, 지금 앵두나무까지 심었으니 절대로 팔 수 없어.”“아저씨, 내가 지금 아직도 이렇게 아저씨라고 부르는 것도 다 같은 마을 주민이라서 그래. 우리 아버지와 나름 친분이 있잖아. 우리도 일을 벌이고 싶지 않아. 이웃이니 그래도 서로의 체면을 봐줘야 하지!”펑-서지준은 몽둥이를 휘두르며 탁자를 두드렸다.“형, 절름발이한테 왜 쓸데없는 말만 하는 거야? 오늘 본때를 보여주지 않으면 절대로 사인을 하지 않을 거야!”“지준아, 입 닥쳐! 왜 이렇게 버릇이 없는 거야? 아무리 그래도 아저씨는 어른이니까 존중을 해야지.”“존중하긴 개뿔! 우리 말을 조금도 들으려 하지 않잖아, 제대로 맞아야 얌전해질 거야!”“조급해하지 말고 아저씨에게 기회를 줘.”서지강은 동생을 설득하더니 웃으며 옆에 있는 진일을 바라보았다.“아저씨가 사인하려 하지 않는 이상, 아들인 네가 대신 서명해. 지준아...”서지준은 바로 알아차리더니 진일의 멱살을 잡고 또 강제로 펜을 손에 쥐어 줬다.“넌 명문대에 다니고 있으니 얻어맞기 전에 빨리 사인해! 그래야 모두들한테 다 좋으니까.”서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서지준의 손을 뿌리쳤고, 또 진일을 끌고 뒤로 물러섰다.“입이 없는 거예요? 왜 손을 쓰는 거죠?!”서지준의 음흉한 눈빛은 서준에게 떨어졌다.“넌 또 어디서 온 자식이야? 어제 네가 튀어나오면서 내 일을 망쳤는데, 오늘 또 이러는 거야? 넌 죽는 게 두렵지도 않나 봐?”서준은 냉소를 지었다.“왜요? 내 목숨을 원하는 거예요? 그럴 엄두는 있고요?”“흥, 이 세상에 내가 하지 못할 일은 없어!”
“그 두 여자, 이 안에 있는 거네!”서지강은 남봉수의 어깨를 잡고 힘껏 그를 뿌리친 다음, 발을 들어 방문을 걷어찼다.그러나 방안은 너무 조용했고, 아무도 없었다.‘그럼 이 절름발이는 왜 날 말린 거지?’서지강은 마음이 덜컹 내려앉더니 자꾸만 이상하다고 느꼈다.이렇게 생각한 그는 즉시 몸을 돌려 남봉수의 멱살을 잡았다.“말해, 지금 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야?!”바로 그때, 문밖에서 갑자기 서지준의 비명이 들려왔다.“형! 살려줘!”서지강은 안색이 약간 변하며 남봉수를 버리고 밖으로 뛰쳐나갔다.다음 순간, 서지준은 시멘트 바닥에 주저앉았고, 오른쪽 다리에 구부러진 낫이 꽂혀 있었다.칼은 절반도 채 들어가지 않았지만, 이미 그의 허벅지를 뚫을 정도였다.“지준아...” 서지강은 돌진하여 몇 번이나 손을 뻗으려 했지만, 그 낫 때문에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선혈이 서지준의 두꺼운 청바지를 타고 흘러내렸고. 짙은 남색 옷감은 새까맣게 변했다.“지준아, 너 괜찮아?! 지금 바로 차 불러서 병원에 데려다 줄게!”“아니야...” 서지준은 서지강의 팔을 잡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얼굴은 통증으로 일그러졌다. 그는 분노에 찬 눈빛으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서준과 집 뒤에 숨어 있는 정은, 민지 그리고 이현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형, 난 아직 버틸 수 있어! 병원에 가기 전에 복수를 할 거야!”“그리고 그 두 여자, 방금 핸드폰으로 뭘 찍고 있었어. 절대로 인터넷에 올리게 해서는 안 돼!”서지강은 이 말을 듣고 잠시 멈칫했다.“그래, 그럼 먼저 상처부터 처리하자. 피가 너무 많이 나잖아.”말이 끝나자 서지강은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했다.“용남이 형, 지준이가 좀 다쳤는데, 사람 몇 명 좀 빌려줘요...”서준은 상황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 즉시 정은을 데리고 가려고 했다.진일도 얼른 부모님을 불렀다.그러나 서지강은 또 어떻게 그들을 쉽게 보낼 수 있겠는가?그는 목을 돌리더니 손가락으로 으드득 소리
서준은 즉시 정은을 바라보았고, 정은은 그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서준은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잡혔다.진일은 계속 반항하려 했지만, 서준은 그의 손을 잡더니 그렇게 하지 말라는 눈짓을 보냈다.진일은 이해하지 못했다.서준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제 말 들어요, 안심해요.”곧 남봉수도 잡혔다.이현은 진영매를 안은 채 구석에 웅크리며 몸을 벌벌 떨었다.민지도 손이 꺾인 채 흙벽에 눌렸다.서지강은 냉소를 하며 정은에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꺼내.”정은은 뒤로 물러섰다.“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요.”“핸드폰 꺼내라고. 말 반복하게 하지 마!”정은은 차갑게 웃었다.“방금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내가 인터넷에 올리지 않고 가만히 영상만 찍었을 것 같아요?”“미친년! 이미 인터넷에 올린 거야?!”“맞아요.”서지강은 갑자기 웃으며 말했다.“괜찮아, 올려도 상관없어. 영상일 뿐인데, 누구를 협박할 수 있겠어?”그는 건방지게 정은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쯧, 너 남진일 동창이야? J시에서 왔어? 여자친구야?”정은은 서지강의 느끼하고 옹졸한 눈빛에 속이 울렁였다.민지는 이 말을 듣자마자 자신이 어떻게 됐든 상관하지 않았고, 행여나 정은이 괴롭힘을 당할까 봐 두려웠다.“미친 자식! 저리 꺼져!”“킥...” 서지강은 고개를 돌려 냉소를 지었다.“네 처지를 보고 말하지 그래? 입도 참 싸네.”“아니면... 내가 이 여자한테 반해서 질투를 하는 거야? 야, 나도 안목이 까다로워서 암퇘지 같은 널 좋아할 리 없거든.”민지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녀는 마을 어귀로 통하는 길을 바라보며 초조해 죽을 지경이었다.‘왜 아직도 안 오는 거야?’이때 정은은 이미 남자에 의해 처마 밑으로 밀려났고, 몇 걸음 더 물러나면 벽에 닿게 된다.“너도 참, 이렇게 예쁘게 생겼는데 왜 남진일 같은 빈털터리에게 반한 거니? 너에게 옷을 사주고, 가방을 사주고, 널 데리고 쇼핑하고 밥 먹을 돈이 없잖아?”“너희 여자들은 너무 단순해, 저
재석이 손을 떼자, 서지강은 종이처럼 땅에 떨어졌다.그는 앞으로 걸어가더니 쪼그리고 앉아 있는 서지준의 다리를 바라보았다.“죽을 정도는 아니네.”말을 마치자, 재석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무심코’ 서지준의 상처를 발로 밟았다. 칼날은 더욱 안으로 파고들어갔다.“아...”서지준이 비명을 질렀다.멈췄던 피가 다시 밖으로 솟구쳤다.서지강이 부른 사람들은 이때 이미 현빈이 데려온 경호원들에게 제압되었다.“다들 가만히 있어!”서지준이 물었다.“너희들 누구야?! 감히 용남이 형을 건드리다니? 죽고 싶은 거지?!”그러나 아무도 그를 상대하지 않았다.자유를 되찾은 민지는 방금 자신을 붙잡은 깡패 앞으로 달려가더니 뺨을 한 대 내리쳤다.“죽고 싶어? 너 정말 남자야? 왜 내 얼굴을 이렇게 만든 건데!”그 깡패는 말문이 막혔다.‘그럼 왜 내 얼굴을 때려!’서준은 얼른 다가와 말렸다.“됐어, 네 손만 아플 거야.”“그래! 조 교수님과 심 대표님이 제때에 도착하셔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난 거기에 서서 얼마나 많은 먼지를 먹었을지도 몰라!”서준은 생각하다 그 깡패에게 따귀를 한 대 갈겼다.민지보다 훨씬 더 힘을 주어 소리도 무척 컸다.‘응?’민지는 어리둥절해졌다.물론 그 깡패도 멍해졌다.“넌 손대지 마, 내가 도와줄게.”“쮼, 너 나에게 정말 잘해 주는 것 같아.”“그걸 이제야 알았어?”“사실 전부터 발견했지만, 오늘은 유난히 멋졌던 거야!”“아.”‘꽤 안목이 있네.’서준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재석과 현빈은 서지강을 처리한 다음, 동시에 정은을 향해 걸어가면서 또 동시에 입을 열었다.“괜찮아?”“다친 데는 없어?”정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괜찮아요. 이렇게 찾아와서 다행이에요.”그렇다, 정은은 두 사람이 찾아온 것에 대해 그리 놀라지 않았다.아침에 문자를 보낸지 얼마 안 됐을 때, 정은은 재석과 현빈의 답장을 받았기 때문이다.두 사람은 이미 밤새 비행기를 타고 대동리에 도착했으며, 곧 마을로 들어갈 준비를 했다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
진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렇게 마음이 있는 거면, 왜 정은이한테 솔직하게 말 안 해?”“겁나는 거지, 재석아? 말 꺼냈다가 거절이라도 당하면... 그땐 친구로도 남을 수 없을까 봐, 무서운 거잖아.”진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재석을 똑바로 바라봤다.“그건 너답지 않아. 내가 아는 재석이는, 망설이지 않고 결정하는 사람이었어. 결과가 불확실하다고 물러서는 사람 아니었잖아.”“정은이가 ‘지금은 연애 생각 없다’고 했지? 중요한 건 ‘지금은’이라는 거야. 사람 마음은 바뀌는 거고, 그때 거절했다고 지금도 똑같을 거란 보장은 없어. 알겠냐?”재석은 말없이 진욱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말이 생각보다 깊게 박혔다. ‘지금도 똑같을까? 아니, 혹시... 지금은 조금 다를 수도 있는 걸까...’진욱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야,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너 계속 질질 끌면, 정은이 뺏긴다. 그리고 뺏기고 나서 울어봤자, 소용없을 거야.”“우리 정은이 인기 많은 거 너도 알잖아. 예전에도 정은이 두고 싸운 애들 있었잖아. 그리고 오늘 그 남자 봤지? 얼굴 잘생겼지, 젊지, 에너지 넘치지, 옷차림 보니까 집도 잘 사는 거 같던데?”재석은 이런 말을 아주 듣기 싫었다.“닥쳐.”진욱도 더 이상 말하기 싫었다. “칫. 드디어 위기감이 좀 드나?”‘그래, 긴장 좀 해라. 맨날 냉정한 척만 하지 말고... 이번엔 너도 좀 불안해져 봐야지.’...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집에 바래다준 뒤, 약을 가정부에게 전달하며, 복용 방법까지 하나하나 직접 설명했다. 봉수진은 저녁까지 먹고 가라며 붙잡았지만, 정은은 이미 서준, 민지와의 약속이 있었다.“외할머니, 며칠 안에 다시 올게요. 오늘은 친구들이랑 약속이 있어서요.”“그래그래, 알았어. 젊을 땐 많이 만나고 다녀야지.”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고, 곧 차에 올랐다.약속 장소인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땐, 서준과 민지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테이블 위에
은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게요... 나야 뭐, 그랬으면 좋겠지만...”하지만 정은의 태도는 그리 확신을 줄 만큼의 호감은 아니었다.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분명히 좋아한다는 표시도 없는 애매한 선이 보이는 듯했다.‘그래서 더 미치겠어. 기대도 못 하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이러니까 계속 마음이 붕 떠 있잖아...’그렇게 속으로 앓고 있었지만, 정은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봉수진의 약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었다.VIP 약국답게, 일 처리는 정말 빨랐다. 정성스럽게 달인 약이 곧바로 팩 단위로 나뉘어 밀봉되었고, 음용 방법까지 깔끔하게 안내되었다.냉장 보관 후, 따뜻한 물에 데워 마시면 된다는 안내였는데, 이 정도면 환자도 거부감 없이 약을 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약을 다 받은 후, 약 한 시간쯤 지나 두 사람은 병원을 나섰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은의 전화가 울렸다.“여보세요? 외할머니? 네, 약 다 받아놨어요.”“병원에서 달여줬어요. 네, 거기 계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은 정은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은혁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오늘 고마웠어요. 외할머니 모시러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아, 어... 그래요! 잘 가요!”은혁은 여자의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심지어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한참을 그렇게 바라본 후에야 아쉬움 가득한 시선을 거두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고, 화면엔 ‘황기' 두 글자가 떴다.“여보세요?”[야 이놈아! 도시락 던져놓고 도망가듯 나가버리면 어떡해?! 말도 못 붙였잖아! 뭐가 그렇게 급해? 뭐가 외할아버지보다 중요한 거냐고?!]“죄송해요... 헤헤.”황기는 순간 당황했다. ‘얘 지금 뭐야? 미쳤어? 웃음은 왜 이렇게 정직하게 새어 나오는 건데...?’...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태우고 병원을 나서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재석은 약을 수령하고 외래 진료실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정은도 여기서 재석을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선배님, 병원엔 무슨 일로 오셨어요?”재석은 그제야 시선을 거둬들였다. 눈길이 정은에게 닿는 순간,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난...”“날 데려다주러 온 거야.” 그 순간, 전진욱이 배를 감싸 쥐며 천천히 다가왔고, 재석 대신 대답을 건넸다.정은은 진욱을 바라보다가 눈이 살짝 커졌다. “교수님,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하... 뭘 잘못 먹었는지, 아침부터 배탈이 나서... 약도 안 듣고... 이 사람이 막 끌고 오더라니까... 검사라도 받아보라고.”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하셨어요. 괜히 방치하다가 더 심해질 수도 있잖아요. 미리 체크하면 마음도 편하고요.”“어우, 너희 둘 미리 맞췄냐? 말이 어쩜 그렇게 똑같냐?” 진욱이 짐짓 장난스러운 말투로 투덜댔다.정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재석을 바라봤다. “그랬어요?”재석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빛 속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다. ‘저 말투, 저 표정... 나만 아는 게 아닐 텐데...’“정은 씨, 이제 가야죠.” 그때, 은혁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아, 네.” 정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 먼저 갈게요.”그렇게 말한 후, 은혁과 나란히 병원 복도를 걸어 나갔다.재석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두 사람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눈빛 속 감정은 복잡하고도 묘했다. ‘뭔데, 저 둘은 저렇게 자연스러워...’“재석아? 야, 재석아!”진욱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재석은 고개를 돌렸지만, 눈빛 속 싸늘함은 여전했다. 진욱은 그 눈빛에 소름이 돋아 어깨를 움찔거렸다.“너... 왜 그래?”“방금 정은이가 ‘저희’라고 했어.”“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재석을 바라봤다. 몇 초간 멍하던 그는 그제야 이해가 된 듯 말했다. “아... 그 ‘저희’? 그게 뭐 어때서? 같이 왔으니까 ‘저희’지. 그럼
얼마 지나지 않아 황 원장은 처방전을 프린트해서 정은에게 건넸다.“수고 많으셨습니다, 원장님.”정은이 공손히 인사하자 황 원장은 손을 휘저었다.“아이구, 무슨... 이 아가씨는 인사도 참 반듯하게 잘하네요. 말도 예쁘게 하고, 얼굴도 예쁘고. 이런 손녀가 있으면, 어디 내놔도 자랑이겠네요.”봉수진은 바로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럼요. 우리 손녀는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어요.”황 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장난스럽게 물었다.“이렇게 예쁜 아가씨한테 남자 친구가 없을 리 없는데? 그렇죠?”봉수진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없어요! 보통 남자애들은 우리 정은이랑 안 어울려요.”“허허, 그래도 우리 손자 정도면 꽤 괜찮은데...?”황 원장이 살짝 떠보자 봉수진은 손사래를 쳤다.“아이구, 그 얘긴 그만해요. 정은이 아직은 시집 안 보낼 거예요. 지금이 제일 곁에 두기 좋을 때라니까요.”‘아이고, 또 시작이다...’정은은 속으로 헛웃음 치며 처방전을 가방에 쏙 넣고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저, 약 지으러 먼저 다녀올게요!”...진료실 문을 나서는 순간, 정은은 누군가와 부딪혔다.“아, 죄송해요!”고개를 돌려 상대방을 본 순간 정은의 걸음이 멈췄다.“은혁 씨?”은혁은 보온 도시락 통을 들고 서 있었다.“정은 씨! 또 보네요. 우리 진짜 인연인가 봐요? 하하...”“여긴... 병원인데? 누가 입원하셨어요?”정은이 도시락을 보며 물었다.“아, 아니에요. 저 입원실 온 거 아니고요! 외할아버지가 이 병원 의사세요. 오늘 외래 당번이라 저희 어머니가 직접 도시락을 싸주셨는데, 제가 대신 가져다드리러 온 거예요.”“혹시 외할아버지 성함이 황 씨?”“네! 황기 원장님이세요. 한약재 이름에서 따오셨대요, 혹시... 아는 분이세요?”‘어머나, 진짜 인연인가?’정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오늘 저희 외할머니 진료도 황 원장님한테 받은 거예요.”“정말요? 세상에... 진짜 대박. 어쩐지 자꾸 마주치네요.”은혁은 정은 손에 들
아침 햇살이 창문 틈 사이로 스며들었다. 부드럽게 퍼진 빛이 정은의 잠든 옆얼굴을 은은하게 감쌌다.살랑이는 바람에 커튼 끝자락이 가볍게 흔들렸고, 고요한 침실에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여보세요? 외할아버지?”이춘재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직 자고 있었구나? 그럼 내가 이따가 다시...]“아뇨, 괜찮아요. 이제 깼어요. 요즘 집에서 쉬고 있어서요, 실험실을 좀 멈췄거든요. 왜요, 무슨 일 있으세요?”전화기 너머에서 이춘재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어젯밤에... 내 친구 하나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단다. 병원에서 못 버티고... 그냥 그렇게.]‘헉...’[오늘 아침에 그 집 식구한테 연락이 왔어. 장례 준비도 해야 하고, 남은 가족들도 어찌할 바를 모르니 내게 좀 도와달라고 하더구나. 그 친구는 진짜, 훅 떠났지만 남겨진 식구들은... 참 마음이 아프지.]이춘재는 말을 멈췄고, 한참 후에 덧붙였다.[원래는 오늘 네 외할머니가 병원 가는 날이라 내가 같이 가기로 했는데... 현빈이는 출장이란다. 생각해 보니까 내가 부탁할 사람은 너밖에 없더라.]정은은 웃으며 말했다.“외할아버지, 그게 어떻게 부탁이에요. 당연히 제가 가야죠. 외할머니랑 병원 가는 건 제 몫이에요. 외할아버지는 마음 놓고 다녀오세요.”[그래, 그래. 고맙다, 정은아.]...오전 9시. 정은은 외할머니댁 앞에 도착했다. 봉수진은 이미 외출 준비를 마치고 작은 가방을 손에 든 채 문 앞에 서 있었다.그 옆엔 이춘재가 말없이 함께 서 있었고, 두 사람은 뭔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당신 진짜 왜 그래요? 정은이는 실험실에서도 바쁜 애인데, 이런 일까지 시켜서 되겠어요? 괜히 애 걱정하게 만들고, 또 미안하게 만들고...”봉수진의 잔소리가 이어졌고, 이춘재는 구겨진 어깨로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맞아, 당신 말이 다 맞아. 근데 정은이가 요즘 쉰다길래... 그냥 부탁한 거지 뭐...”“쉰다고 병원까지 같이 가야 해요? 그
수민은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손을 올려 한 대 갈겼다.짝!동건은 피하지 못하고 정통으로 이마를 맞았다.“야! 미쳤어?!”수민은 인상을 팍 구기며 외쳤다.“너 귀신이야 뭐야? 소리도 없이 뒤에서 들이대고... 맞을만 하니까 맞은 거지.”“뭐? 지금 그딴 태도를 보이는 이유가 뭐야? 딴 남자 생각하다가 놀란 거 아냐? 장은혁? 그 잘난 척하는 새끼?”수민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맞아. 잘생겼지, 말도 잘해, 심지어 마술도 하지. 매력 넘치는데?”“푸... 마술? 그건 여자들 꼬시려고 배운 거지. 허세로 가득 찬 새끼야.”“오히려 더 좋지 뭐... 허세라도, 적어도 표현은 하잖아. 넌 뭐 있어?”동건은 이를 악물었다.“그런 애가 뭐가 그렇게 좋다고. 딱 봐도 겉멋만 잔뜩 든 애송이잖아.”“내가 좋으면 된 거지. 근데... 잠깐만. 너,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수민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그냥.”“고동건!!!”“야, 소리 좀 그만 질러. 힘 좀 아끼라고. 이따가 쓸 데가 있을 테니까.” “꺼져.”수민은 문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동건은 한 발도 움직이지 않았다.대신, 그녀를 천천히 바라보다가 작게 웃었다.“너 요즘... 왜 이렇게 자꾸 도망치는데? 솔직히 말해봐. 내가 그리웠지?”“웃기지 마.”“아닌데... 지금도 눈 흔들리는 거 보이거든.”수민은 숨을 고르며 조용히 말했다.잠시 후, 그녀는 동건에게 그대로 안겨 침대 위로 내던져졌다.동건은 셔츠 단추를 풀며 천천히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한다고 했잖아. 내가 농담하는 사람으로 보여?”수민은 몸을 살짝 일으키며, 도발적인 미소를 지었다.“너 하나로 되겠어?”“해보면 알겠지.”밤은 길었고, 봄기운처럼 뜨거웠다.누군가는 그 열기를 마음껏 즐겼고, 누군가는 답답한 숨을 눌러 삼켰다....불 꺼진 침실. 어둠 속,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창문 너머로 달빛만이 희미하게 커튼 틈 사이로 비스듬히 들어왔다.재석은 거실 창 앞에 서 있었다. 등
부재중 10통 중 9통은 고동건, 그리고 나머지 1통...‘어? 우리 조재석 교수님?’수민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톡 알림도 확인했다.읽지 않은 메시지 42개.대부분은 역시나 고동건.수민은 손가락으로 휙휙 넘기며 대충 읽었다.[야, 또 남자랑 밥 처먹냐?][여사친 모임엔 남자 안 끼운다며?][그 장은혁, 꽃미남 새끼 남자 아니냐?][조수민 너 진짜 표리부동이다?] [답장 안 해?][전화도 안 받아? 10초 준다!][기다려, 오늘 밤에 너 좀 혼나야겠어!!]수민은 손가락으로 한 번에 쭉 밀어내고, 심드렁하게 한 마디만 보냈다.[꺼져!!!]10초도 안 돼서 동건한테서 바로 또 메시지가 왔다.[답장할 줄은 몰랐네...][넌 진짜 사람 마음 찢어놓고 아무렇지 않지?] [아냐, 넌 원래 마음이 없지.][...]수민은 무표정하게 창을 닫았다. ‘이 인간은 진심으로 질린다...’그리고 재석과의 메시지함을 열었다.단 두 줄.[정은이랑 어디서 밥 먹었어?][장은혁도 함께였어?]수민의 눈썹이 절로 올라갔다.‘어라...?’‘우리 조재석 교수님이? 이런 문장을? 이렇게 빠르게? 이렇게 직접적으로?’‘우리 조 교수님... 평소에 ‘응’ 하나 치는 데도 심장 박동 조절하듯 하던 사람이었는데...’게다가 이 두 문장, 보통 사람이 보냈다면 ‘그냥 궁금했나 보다’ 하고 넘겼을 거다.하지만, 그게 ‘조재석’이라는 이름으로 오면 느낌이 전혀 달랐다.‘이거... 약간... 삐쳤다고 읽어야 하나?’수민의 눈이 반짝였다.‘뭐야, 이거 진짜네?’그녀는 살짝 웃으며 미용실에서 찍어둔 사진을 열었다.정은과 은혁이 나란히 앉은 각도, 분위기도 꽤 그럴싸한 장면.‘자, 실험 들어가자.’사진을 톡에 업로드. 손끝으로 부드럽게 터치.전송 완료.바로 이어 핸드폰에 내장된 스톱워치를 켰다.“시... 작!”1초, 2초, 3초... 5초...띵-[지금 어디야?]수민은 피식 웃으며 핸드폰을 내려놨다.‘오케이, 확정. 조재석 교수님
“은혁아, 우리 먼저 가볼게.”은혁이 손을 흔들며 인사하려던 찰나, 정은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은혁 씨, 같이 식사하시죠? 어차피 저도 아직 안 먹었는데요.”“마침 예약도 해뒀으니까 괜찮다면 같이 가요.”“정, 정말요?! 괜찮을까요?”은혁은 말끝이 떨릴 정도로 들뜬 기색이었다.수민은 표정으로 정은에게 물었다. ‘진심이야?’정은은 눈빛으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수민은 한숨 쉬듯 웃으며 말했다.“좋지 뭐... 사람 하나 늘어난다고 달라질 거 없잖아. 같이 가자.”은혁은 기뻐서 입꼬리를 다 못 내렸다. ‘정말 같이 가는 거야...? 나 지금 약간... 꿈꾸는 거 아냐?’...레스토랑에 도착하자 직원이 안내한 자리로 세 사람이 들어갔다. 따로 마련된 룸이라 분위기도 아늑했다.음식이 나오기 전, 은혁이 갑자기 말했다.“기다리는 김에... 작은 마술 하나 보여드릴까요?”수민은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마술도 해? 그러고 보니, 정은이 외할머니 생신 때도 뭐 하나 보여줬었지.”“이번엔 새로 배운 거예요.” 은혁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그럼 해봐, 해봐!” 수민은 벌써 핸드폰을 꺼내 카메라 준비 완료 상태로 들고 있었다.“도구 필요해?” 그녀가 묻자, 은혁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옆 캐비닛에서 종이 티슈 한 팩을 꺼냈다.그중 다섯 장을 쏙쏙 뽑아냈다. 마침 티슈에 프린트된 꽃무늬가 하나하나 다 달랐다.그는 정은을 향해 말했다.“정은 씨, 가장 마음에 드는 거 하나 골라주세요.”정은은 망설이지 않고 무심하게 한 장을 집어 들었다.은혁은 그걸 받아 조심스럽게 반으로 접고 말했다.“잘 봐요.”다시 펴서 말한 뒤, 조용히 티슈를 손안에서 뭉쳤다. 그리고 그 주먹을 천천히 펴자 손안에는 작은 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선물이에요.”은혁은 웃으며 그 꽃을 정은에게 건넸다.“진짜 꽃이에요?”정은은 놀란 듯 꽃을 받았다. 손에 올려놓고 한참을 들여다봤다.‘이거... 어떻게 한 거지?’수민은 슬쩍 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