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은 7시 30분에 삼륜차에 올라탔다.그러나 현빈이 뜻밖에도 토를 하기 시작했다.재석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현빈은 생수로 양치질을 하더니 이렇게 말했다.“이거 멀미 아니에요.”“그 빵에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해요.”재석이 대답했다. “아.”“나 하나도 안 어지러워요.”“멀미했다고 말한 적 없는데.”‘그런데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잖아!’재석은 억울했지만 또 정말 웃고 싶었다.기사는 이 상황을 보고 말했다.“멀미를 하면 창문 열어서 찬바람 좀 쐬면 돼.”“멀미 아니라고요!”기사는 헤헤 웃으며 말했다.“젊은이, 이게 뭐라고 발뺌을 하는 건데. 시내 사람들이 멀미했으면 했지, 왜 인정하려 하지 않는 거야?”재석은 눈썹을 치켜세웠다.“전에 다른 도시 사람들을 태우신 적 있는 거예요?”“그럼! 엊그저께 젊은이가 몇 명이 찾아왔는데, 그 남자 아이의 반응이 지금 이 젊은이와 똑같아. 멀미 때문에 어지러워 죽겠는데도, 하나도 안 어지럽다고 고집을 부리잖아, 헤헤...”현빈도 뭔가를 알아차리며 똑바로 앉았다.“여자아이 둘, 남자아이 하나, 하백 마을의 남씨 집안에 찾아간 거죠?”“어? 아는 사이구나!”두 사람은 눈을 마주쳤다.재석과 현빈은 이 기회를 틈타 그에게 남씨 집안의 상황을 알아보았고, 말하는 사이, 서씨 형제에 대해 언급했다.기사는 순간 말투가 변하더니 모르는 척하기 시작했다.현빈은 지갑을 꺼냈다. 안에 은행카드가 가득했지만, 현금은 한 장도 없었다.괴로워할 때, 5만 원짜리 지폐 한 뭉치가 눈 앞에 나타났다. 그 손을 따라 위로 바라보니, 재석은 기사에게 전해주라며 눈짓했다.현빈은 재석의 가방을 훑어보며 묵묵히 돈을 받았다.‘다음에 나도 가방을 메겠어! 챙길 수 있는 거 다 챙겨야지!’현빈은 먼저 자신의 담배에 불을 붙인 다음, 기사에게 건네주었다.“자, 형님.”이 호칭에 재석은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현빈을 바라보았다.현빈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뭘 그렇게 놀라는 거예요?”재석은 확
현빈이 말했다.“이따가 마을 입구에서 내려줘요.”“어? 남씨 집안에 안 갈 거야?”...민지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체구가 우람한 두 사내를 바라보았다.“그래서, 심 대표님은 사람을 찾으러 가신 거예요?”현빈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조 교수님은?’민지는 눈을 깜박거리며 의혹을 느꼈다.그러나 그녀도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바로 그때, 방금 따귀를 두 대 맞은 깡패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너희들 도대체 뭐야? 눈치 있다면 빨리 우리 풀어줘!”민지가 말했다.“풀어줘? 꿈을 꾸는 거야 지금? 아니면 뺨을 몇 대 더 맞고 싶어?”서준은 바로 손을 들었다.그 깡패는 놀라서 목덜미를 움츠렸다. ‘이, 이 두 사람 대체 뭐야?! 왜 툭하면 손을 쓰는 거지!’“내... 내 뒤에 사람이 있는데, 너희들 감히 나를 건드리면, 우, 우리 형님이 제대로 복수를 할 거야!”민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알았어.”그리고 다시 서준을 향해 눈을 깜박였다. 두 사람은 함께 앞으로 걸어가더니 동시에 손을 들었다.짝, 찰싹, 짝짝짝.깡패는 맞아서 멍해졌고, 입가에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너, 너희들...”민지는 웃으며 말했다. “그 형님이 바로 올 거라면서? 궁금해서 시험해 봤어.”“나도 궁금해서.”‘이 사람들 정말 정신 나간 거 아니야!’“우리 형님은 용남이 형이야. 너희들 이제 끝났어! 끝났다고!”민지는 놀라서 말했다.“누구? 용남이 형?”깡패는 즉시 가슴을 폈다.“맞아! 무섭지? 흥, 이미 늦었어!”민지는 고개를 돌려 서준을 보았다.“쮼, 이 사람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거 아니야?”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응, 그런 것 같아.”그러다 또 한마디 덧붙였다.“그래봤자 결국 잡혀갈 텐데.”이때 쓰러져 일어나지 못한 서지강도 점차 정신을 차렸다. 그는 이를 악물고 일어나 비틀거리며 똑바로 섰다.“용남이 형님은 너희들 가만 두지 않을 거야!”말하면서 핸드폰을 흔들더니 의기양양하게 사람들을 바라보았다.“나는 이미 형님
이 사람이 바로 서지강이 말한 ‘용남이 형님’이었다.그가 온 것을 보고, 전에 쓰러진 깡패들도 덩달아 일어서더니 마용남의 뒤로 달려갔고, 고자질을 하기 시작했다...“형님! 바로 이 사람들입니다! 지강과 지준을 다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저희들까지 때렸습니다!”“이 사람들을 단단히 혼내셔야 합니다!”“맞습니다! 저희를 때렸지만, 그것은 형님의 체면을 짓밟는 것입니다... 용남이 형, 절대로 넘어가실 수 없습니다!”“이 원수를 갚지 않으면, 우리 ‘마빡이'들은 또 어떡하겠습니까?”마용남은 이 말을 듣고 안색이 매우 좋지 않았다.서지강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마치 정은 그들이 제대로 얻어맞고, 자신도 제대로 분풀이 할 수 있다고 느꼈다.그러나 다음 순간, 펑.눈을 맞은 서지강은 완전히 멍해졌다.피투성이가 된 서지준도 피하지 못했고, 서지강을 때리던 주먹은 다시 손바닥으로 변하더니 깔끔하게 그의 얼굴에 떨어졌다.“형, 형님?!”두 사람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왜, 왜 그러십니까?”“멍청이들!” 마용남은 때리고 난 뒤, 이어서 다른 몇 명의 깡패들을 바라보더니 주먹질과 발길질을 날렸다.“멍청이들!”“자기 주제도 모르고 감히 우리 정배 형님 앞에서 건방지게 굴다니!”욕을 마치자, 마용남은 대머리를 바라보며 알랑거리며 웃었다.“정말 죄송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습니다. 다 이 못난 것들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대머리를 한 구정배는 이 말을 듣고, 차갑게 웃었다.“우리 용남이 정말 많이 컸네. 밖에서 이렇게 많은 수하들을 거두었다니, 또 뭐? 마빡이란 조직을 세웠다고? 이제 스스로 맏이가 되려는 거야?”“좋네, 젊은이들에게 생각이 있는 것은 좋은 일이야! 과감하게 싸워야 잘 될 수 있지. 모두들 앞으로 용남이게 잘 좀 배워...”마용남은 안색이 크게 변하더니 얼른 허리를 굽혀 사죄했다.“아닙니다, 형님, 오해하셨습니다! 저는 이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제 수하이고, 제 수하이면 다 형님의
“괜찮은 사람들이야.” 현빈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됐습니다.”그 경호원들은 구정배가 현빈에게 빌려준 사람이었다.서지강과 서지준은 눈을 마주쳤고, 두 형제의 안색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두 사람이 몰래 도망가려고 할 때, 구정배의 사람들은 일찍이 알아차렸는지, 즉시 사람을 붙잡아 현빈 앞으로 데려갔다.“심 대표님은 어떻게 해결하고 싶으신 거죠?”현빈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네 사람이니 당연히 네 마음대로 해야지.”구정배는 두 사람을 훑어보더니 말투가 갑자기 차가워졌다.“그럼... 두 사람 각각 팔 하나 부러뜨려.”“형님!”“살려주세요!”“저희는 이분이 형님과 아는 사이란 것을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저희는 이미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저희가 멍청해서 그런 것이니 제발 저와 제 동생을 살려주세요, 제발!”두 사람은 바로 절을 했다.구정배는 마음이 약해지지 않고 부하들에게 손짓했다.바로 이때, 재석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이런 일은 돌아가서 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사람 패고 죽이는 일은 남의 집 앞에서 하지 말아야죠.”모두들 그제야 자신이 아직 진일네 집 앞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구정배가 고개를 끄덕이자, 바로 누군가가 서씨 형제를 끌고 갔다.서지강과 서지준은 미처 한숨도 돌리지 못했다. 이번에 끌려가면, 두 사람은 틀림없이 끝장날 것이다.서지강은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잠깐만요! 저... 저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그래, 경찰에 신고해야지!’“이 사람들이 저희 형제 둘을 때렸어요. 저희 몸의 상처가 바로 증거예요! 지준아 얼른 경찰서에 전화해!”구정배는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그제야 서지강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은근히 웃으며 마용남에게 말했다.“생각이 좀 있는 아이네. 하지만 그리 똑똑한 편은 아니야.”마용남은 무척 난처해졌다.서지준은 이미 경찰에 신고했다.“맞아요, 하백 마을 남진일의 집 앞이에요.”구정배는 웃으며 현빈을 바라보았다.“심 대표님, 보시다시피, 제가 처리하고 싶지 않는
아니나 다를까.앞장선 경찰은 재석을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저희는 이 두 사람을 먼저 데려가겠습니다.”“그래요. 그리고 두 사람의 소변 검사까지 해보는 게 좋을 거예요.”“안심하세요, 저희도 다 압니다.”서씨 형제는 안색이 돌변했고, 그제야 큰일났다는 것을 깨달았다.경찰차는 급하게 떠났다.현빈은 은근히 비웃었다.“경찰들이 이렇게 빨리 출동하는 거 처음인데.”재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민지는 사람들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그제야 알아차렸다.‘교수님도 도움 청하시느라 지각하셨구나.’현빈은 조폭을, 재석은 경찰을 불렀다.‘이렇게 되면, 서씨 형제들도 더 이상 방법이 없겠지.’...저녁 무렵, 진일네는 마치 설을 보내는 것처럼 떠들썩했다.남봉수는 오후부터 바삐 돌아치기 시작했다. 닭과 오리를 잡고, 물고기를 손질했다.집안의 모든 재료를 전부 맛있는 음식으로 만들어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은 모양이었다.심지어 오랫동안 소중히 간직해둔 술까지 열었다.이것은 원래 이현이 결혼할 때 꺼내 마시려고 했던 술이었다.사람들은 저마다 나서서 남봉수를 말렸지만, 그는 전혀 듣지 않았다.오후부터 주방에 들어갔고, 해가 저물어갈 때에야 주방에서 나와 웃으며 사람들을 불렀다.“다들 와서 앉게, 음식 다 됐거든!”사람들은 식탁 앞에 앉았다.설을 쇨 때에야 쓸 수 있는 큰 식탁에는, 생선이며 고기들이 가득했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보지 못한 요리들이 놓여 있었다.민지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그녀는 이미 주방에서 전해오는 향기를 맡았는데, 그 맵고 향기로운 냄새가 줄곧 콧구멍을 파고들었다.남봉수가 말했다.“현지의 특색 요리를 좀 만들었어. 고추를 많이 넣지 않았으니 그렇게 맵지 않을 거야. 너희들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네...”가장 먼저 고개를 끄덕인 사람은 역시 민지였다.“맛있어요! 정말 너무 맛있어요!”민지는 음식이 아주 매울 줄 알았다.전에 매운 요리를 먹어본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남봉수가 만든 음식은 입에 들어가자마
재석도 흠칫 놀란 듯 했다.눈빛이 교착된 사이, 정은은 갑자기 환한 미소를 지었다.이 미소에 당황한 재석은 시선을 떼지 못했고, 원래 평온하던 마음조차 저도 모르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에헴!” 현빈은 갑자기 기침을 심하게 했다.정은과 재석은 동시에 정신을 차리더니 시선을 돌렸다.‘흥! 나 몰래 시선을 교환하다니.’민지는 걱정돼서 현빈에게 물었다.“심 대표님, 왜 그러세요?”서준은 미처 민지를 막지 못했다. 식탁 아래서 그녀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좀 매워서.”“네? 이게 매워요? 난 왜 하나도 안 매운 거 같죠? 그럼 빨리 물 좀 마셔요.”“음.”‘정말 다정한 아이군!’민지가 물었다. “쮼, 너 방금 왜 내 옷을 잡은 거야? 무슨 일 있어?”서준은 말문이 막혔다.“아니야. 그럴 리가.”‘네 마음대로 해라.’...다 먹고 남봉수는 치우고 설거지하며 주방 청소하느라 바빴다.민지는 거실 의자에 앉았는데, 발 옆에 숯을 담은 대야 두 개가 있었다.그녀가 춥다는 것을 알고 이현이 특별히 민지를 위해 불을 지핀 다음 가져왔다.“민지 언니, 이거 먼저 써요, 이따가 제가 다시 숯 좀 넣을게요.”“응, 고마워 이현아, 너 너무 착하다!”이현은 부끄러워하며 침실로 달려갔다.민지는 따뜻한 숯탄 덕분에 더 이상 춥지 않았다.주방 벽에는 남봉수의 바쁘게 움직이는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는 피곤하지도 않은 듯 이리저리 왔다갔다했고, 민지는 그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좀 멍해졌다.‘남자들도 주방에서 바쁘게 움직일 수 있구나, 처음 봐. 남자들이 주방에 들어서면 안 된다는 것도 다 뻥이었어.’더욱 놀라운 것은 진영매와 진일 남매의 반응이었다.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았고, 마치 이미 이런 장면에 습관된 것 같았다.서준은 갑자기 입을 열었다.“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민지는 턱을 짚었다.“나도 앞으로 밥 잘 하는 남편 찾을 거야! 그럼 난 손을 쓸 필요도 없고, 바깥에 나갈 필요도 없이 매일 맛있는
현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주 간단했다.아들을 해결한 이상, 이제 그 아버지를 해결해야 했다.그리고 두 사람의 아버지는 서지강 서지준보다 더 상대하기 어려울 것이다.현빈은 진일에게 일찍 계획을 세우라고 일깨워주고 있었다.“현재 서씨 집안에게 있어, 가장 까다로운 문제는 바로 서지강과 서지준을 감옥에서 건져내는 거야.”“그래서 당분간 복수를 할 수 없을 거고. 그러나 서달우가 모든 방법을 다 써도 자신의 아들들을 구할 수 없다면, 너희 집안을 이용해 분풀이를 할지도 몰라.”진일은 마음이 무거워졌다.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고개를 들어 천천히 입을 열었다.“서지강과 서지준이 이미 끌려간 이상, 서씨 집안도 뿌리째 뽑히지 않을까요?”재석은 잠시 침묵하더니 사실대로 말했다.“그건 힘들 거야. 현재 우리가 경찰에게 넘겨준 증거로 볼 때, 서씨 형제들을 감옥에 보내는 것은 충분하지만, 서달우를 넘어뜨릴 수 있을지는... 아직 잘 몰라.”만약 서씨 집안 사람들이 신중하고, 부자간의 일을 아주 분명하게 처리했다면?만약 서달우가 이 날을 위해 진작부터 준비를 했었다면?만약...아무튼 너무 많은 가능성이 있었다.재석조차도 장담할 수 없었다.진일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원래 오늘 이기면 이 문제를 철저히 해결하고 다시 원래대로 조용하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다.그러나 현실은 그가 상상했던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현빈이 말했다.“문제를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 서씨 집안이 아무리 대단해도 나가면 아무것도 아니잖아.”“서달우의 복수를 피하려면, 어려운 편도 아니야.”진일은 눈살을 찌푸렸다.“그게 무슨 뜻이죠?”“이사를 가는 거야.”서씨 집안이 마을에서 날뛰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또한 그것뿐이었다.진일네 가족이 시내로 이사가면, 서달우은 아무리 대단해도 그들을 어떻게 할 수 없었다.반대로 계속 마을에서 지내면, 서달우는 진일을 상대할 방법이 얼마든지 있었다.사람 죽일 정도는 아니지만, 상습적인 괴롭힘과 욕설도 시간이 길어지
그러나 진일은 서씨 집안이 언제 어떤 식으로 복수를 할지 몰랐다. 그는 자신의 가족이 위험에 빠지는 걸 볼 수 없었다.진일은 고민에 빠졌다.현빈은 더 이상 설득하지 않았다.모든 사람에게는 다 자신의 운명이 있었다. 그는 지금 진일의 결정을 존중하면 됐고, 너무 많은 간섭을 할 필요가 없었다.이날 밤, 진일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정은, 서준과 민지 세 사람은 재석, 현빈과 함께 마을의 호텔에서 밤을 보냈다.조건은 아주 보통이지만, 그들은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일행 모두 마음속으로 진일이 어떻게 선택할지 더 걱정했기 때문이다.“아직 안 자고 뭐해?” 정은은 홀에 앉아 창밖의 어두운 밤을 보았다. 그렇게 생각에 잠기다, 남자의 목소리에 생각이 끊겨 문득 정신을 차렸다.“선배.” 그 사람이 누군지 확인한 다음, 정은은 웃으며 인사했다.“선배님도 안 잤잖아요?”“잠이 안 와서.”“진일 선배 때문에요?”“너도?”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재석은 정은에게 물었다.“너 방금 거의 말을 하지 않았는데, 무슨 걱정이라도 있어?”정은은 순간 침묵했다.그녀가 대답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때, 정은은 묵묵히 입을 열었다.“나는 이게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남자는 멍해졌다. “뭐가?”“우리가 진일 선배를 위해 해결책을 생각할 때, 모두 서씨 집안의 복수를 어떻게 피할지에 고려했잖아요.”“그런데 그걸 왜 피해야 하는 거죠?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진일 선배인가요? 서씨 집안이 과수원을 빼앗으려고 폭행을 저질렀는데, 오히려 피해자가 피해야 하다니. 이건 너무 아이러니하지 않은가요?”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서씨 집안이지, 남씨 집안이 아니었다, 그럼 왜 그들이 도망가야 하는 것일까?정은은 현빈의 생각이 틀렸다고 느꼈다.그러나 현재 서씨 집안의 복수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사하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인 것 같았다.하지만 이 결정은 아무리 봐도 답답했다.‘너무 억울하잖아!’재석이 대답했다.“적당히 피하는 건 도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
정은이 멍해 있는 사이, 재석이 한 걸음 다가섰다. 늘 부드럽고 점잖던 그가, 이 순간만큼은 전에 없던 강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 이런 눈빛도 있었나?’정은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는 순간, 재석은 어느새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정은이도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재석이 자신보다 훨씬 크다는 걸. 그리고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면, 자신이 마치 남자의 품 안에 갇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도.재석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이제 좀 알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그때 네가 학업이 먼저라고 했을 때, 난 받아들였어.”“그런데 장은혁한텐 기회를 줬지. 정은아...”그가 고개를 더 숙이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선에 닿았다. 순간, 정은의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너, 나한테 너무 불공평해.”그 마지막 한 마디는 묘하게 서글픈 기운이 섞여 있었다.정은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재석은 그녀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알아, 내가 지금 어떤 입장인지. 묻고 따질 자격도 없고, 네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네 자유라는 것도 알아.”“이 말 꺼냈다가, 우리 사이가 끝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근데... 계속 참다 보니까 알겠더라.”‘난... 그렇게까지 쿨한 사람이 아니었어.’“그래서 이제 참지 않기로 했어.”‘어떻게 되든, 그건 네가 정해.’그렇게 말한 재석은 고개를 숙인 채 멈췄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용한 밤공기 속에서, 정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이제, 제가 말해도 될까요?”“응...”“재석 씨.”정은은 처음으로 재석을 그렇게 불렀다.“고개 들어요. 나 좀 봐요.”재석의 어깨가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그는 이미, 거절당할 각오까지 끝냈다.그런데 눈이 마주친 순간, 정은의 두 눈 속에서 재석이 본 건... 눈물이 아닌, 웃음이었다.억지로 짓는
“헤어졌다고요?”정은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몰랐어?!”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욱은 눈을 반짝이며 의자째로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본격적인 ‘TMI’를 털어놓기 시작했다.“M시 출장 갔다 오고 며칠 안 돼서, 재석이가 바로 짐 싸서 수아를 내보냈다니까?”정은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재석과 수아 사이에 어떤 감정선이 있었는지, 그동안 몇 번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퍼즐처럼 빠르게 떠올랐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 속엔 미묘한 기류가 스쳤다.“아마 진짜 많이 좋아했나 봐. 그러니까 정리할 때도 그만큼 아프고, 오래 걸리는 거겠지. 조금만 시간 지나면, 태민이도 정리될 거야.”진욱은 이어서 말했다.“네.”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그 이후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남의 연애는, 들을 수는 있어도 깊게 얘기하지 말아야 해. 괜히 나서 봤자... 괜히 끼어든 꼴만 되니까.’...해가 지고, 붉은 노을이 건물 유리에 비치기 시작할 무렵. 정은은 마침내 작업을 끝냈다.진욱은 기다렸다는 듯 프로그램을 열고 기능 하나하나를 테스트했다.그리고 30초쯤 흐른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어어!! 복구됐어! 됐다! 돌아왔어! 다시 쓸 수 있어!!”미진도 덩달아 벌떡 일어나 양손을 번쩍 들었다.“살았다, 진짜!! 여태 손으로 데이터 입력한 거 생각하면... 이건 거의 기적이야!”진욱은 시계를 힐끗 보더니, 정은을 향해 말했다.“지금 이 시간까지 남아서 도와준 우리 정은이, 완전 수고 많았어! 조 교수...”“응...?”갑작스레 이름이 불리자, 재석은 몇 초간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진욱은 능청스럽게 말했다.“아니, 정은이가 이렇게 큰일 해줬는데, 감사 표시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적어도 밥 한 끼는 사야지.”“맞아요, 맞아요. 조 교수님, 이건 진짜 밥으로도 모자라요.” 미진이 곧장 거들었다.재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략 1년 전, 정은은 한동안 재석의 실험실을 빌려 쓴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전진욱, 조미진 등과 인연이 닿았다.처음엔 서로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몇 달이 지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고, 지금은 가볍게 농담도 주고받을 만큼 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진욱은 우연히 정은이 실험 데이터를 처리하는 속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어서 슬쩍 물어봤더니, 정은은 코딩도 할 줄 아는 공대 만능 캐릭터였다. 그녀는 직접 짠 프로그램으로 데이터를 자동 정리하고, 다차원 분류와 정렬까지 가능하다고 했다.“와, 뭐야... 완전 반칙인데?”진욱은 결국 정은에게 부탁해 실험실 맞춤형 프로그램 하나를 따로 제작해달라고 했고, 그 이후, 데이터 정리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맞이했다. 진욱은 쓸 때마다 감탄하며 말했다.“진짜... 정은이 덕분이야. 이게 사람을 살리네.”하지만 어제 그 기특한 프로그램이 갑자기 먹통이 됐다. 손태민이 고쳐보겠다고 덤볐지만, 결과는... 풍비박산이었다. ‘이젠 누가 손댔다간 진짜 박살 나겠어...’ 결국 정은에게 SOS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재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오늘 시간 돼? 안 되면, 며칠 뒤도 괜찮고...]진욱은 훨씬 급했다. 말 그대로 살려달라는 마음이었다.[야, 오늘 안 데려오면... 나 여기서 바로 싸버린다! 진짜라고, 어?!]그는 어제 약 먹고 좀 괜찮아진 줄 알았건만, 밤새 배가 또 난리였다. 오늘 아침부터 실험실 화장실은 진욱의 전용이 되었다. 오전에만 6회 방문.그 말은, 그냥 협박 아니었다. 진짜 실현 가능성이 있었으니 말이다.정은은 상황을 듣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시간 돼요. 지금 바로 갈게요.”[그래. 그럼 내가 정문 앞으로 갈게.]‘굳이 마중까진 필요 없는데...’ 뚝-정은이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10분 뒤, 정은은 학교 정문 앞에서 재석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실험실로 걸어가며 프로그램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
진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렇게 마음이 있는 거면, 왜 정은이한테 솔직하게 말 안 해?”“겁나는 거지, 재석아? 말 꺼냈다가 거절이라도 당하면... 그땐 친구로도 남을 수 없을까 봐, 무서운 거잖아.”진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재석을 똑바로 바라봤다.“그건 너답지 않아. 내가 아는 재석이는, 망설이지 않고 결정하는 사람이었어. 결과가 불확실하다고 물러서는 사람 아니었잖아.”“정은이가 ‘지금은 연애 생각 없다’고 했지? 중요한 건 ‘지금은’이라는 거야. 사람 마음은 바뀌는 거고, 그때 거절했다고 지금도 똑같을 거란 보장은 없어. 알겠냐?”재석은 말없이 진욱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말이 생각보다 깊게 박혔다. ‘지금도 똑같을까? 아니, 혹시... 지금은 조금 다를 수도 있는 걸까...’진욱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야,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너 계속 질질 끌면, 정은이 뺏긴다. 그리고 뺏기고 나서 울어봤자, 소용없을 거야.”“우리 정은이 인기 많은 거 너도 알잖아. 예전에도 정은이 두고 싸운 애들 있었잖아. 그리고 오늘 그 남자 봤지? 얼굴 잘생겼지, 젊지, 에너지 넘치지, 옷차림 보니까 집도 잘 사는 거 같던데?”재석은 이런 말을 아주 듣기 싫었다.“닥쳐.”진욱도 더 이상 말하기 싫었다. “칫. 드디어 위기감이 좀 드나?”‘그래, 긴장 좀 해라. 맨날 냉정한 척만 하지 말고... 이번엔 너도 좀 불안해져 봐야지.’...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집에 바래다준 뒤, 약을 가정부에게 전달하며, 복용 방법까지 하나하나 직접 설명했다. 봉수진은 저녁까지 먹고 가라며 붙잡았지만, 정은은 이미 서준, 민지와의 약속이 있었다.“외할머니, 며칠 안에 다시 올게요. 오늘은 친구들이랑 약속이 있어서요.”“그래그래, 알았어. 젊을 땐 많이 만나고 다녀야지.”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고, 곧 차에 올랐다.약속 장소인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땐, 서준과 민지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테이블 위에
은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게요... 나야 뭐, 그랬으면 좋겠지만...”하지만 정은의 태도는 그리 확신을 줄 만큼의 호감은 아니었다.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분명히 좋아한다는 표시도 없는 애매한 선이 보이는 듯했다.‘그래서 더 미치겠어. 기대도 못 하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이러니까 계속 마음이 붕 떠 있잖아...’그렇게 속으로 앓고 있었지만, 정은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봉수진의 약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었다.VIP 약국답게, 일 처리는 정말 빨랐다. 정성스럽게 달인 약이 곧바로 팩 단위로 나뉘어 밀봉되었고, 음용 방법까지 깔끔하게 안내되었다.냉장 보관 후, 따뜻한 물에 데워 마시면 된다는 안내였는데, 이 정도면 환자도 거부감 없이 약을 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약을 다 받은 후, 약 한 시간쯤 지나 두 사람은 병원을 나섰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은의 전화가 울렸다.“여보세요? 외할머니? 네, 약 다 받아놨어요.”“병원에서 달여줬어요. 네, 거기 계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은 정은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은혁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오늘 고마웠어요. 외할머니 모시러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아, 어... 그래요! 잘 가요!”은혁은 여자의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심지어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한참을 그렇게 바라본 후에야 아쉬움 가득한 시선을 거두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고, 화면엔 ‘황기' 두 글자가 떴다.“여보세요?”[야 이놈아! 도시락 던져놓고 도망가듯 나가버리면 어떡해?! 말도 못 붙였잖아! 뭐가 그렇게 급해? 뭐가 외할아버지보다 중요한 거냐고?!]“죄송해요... 헤헤.”황기는 순간 당황했다. ‘얘 지금 뭐야? 미쳤어? 웃음은 왜 이렇게 정직하게 새어 나오는 건데...?’...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태우고 병원을 나서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재석은 약을 수령하고 외래 진료실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정은도 여기서 재석을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선배님, 병원엔 무슨 일로 오셨어요?”재석은 그제야 시선을 거둬들였다. 눈길이 정은에게 닿는 순간,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난...”“날 데려다주러 온 거야.” 그 순간, 전진욱이 배를 감싸 쥐며 천천히 다가왔고, 재석 대신 대답을 건넸다.정은은 진욱을 바라보다가 눈이 살짝 커졌다. “교수님,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하... 뭘 잘못 먹었는지, 아침부터 배탈이 나서... 약도 안 듣고... 이 사람이 막 끌고 오더라니까... 검사라도 받아보라고.”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하셨어요. 괜히 방치하다가 더 심해질 수도 있잖아요. 미리 체크하면 마음도 편하고요.”“어우, 너희 둘 미리 맞췄냐? 말이 어쩜 그렇게 똑같냐?” 진욱이 짐짓 장난스러운 말투로 투덜댔다.정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재석을 바라봤다. “그랬어요?”재석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빛 속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다. ‘저 말투, 저 표정... 나만 아는 게 아닐 텐데...’“정은 씨, 이제 가야죠.” 그때, 은혁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아, 네.” 정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 먼저 갈게요.”그렇게 말한 후, 은혁과 나란히 병원 복도를 걸어 나갔다.재석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두 사람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눈빛 속 감정은 복잡하고도 묘했다. ‘뭔데, 저 둘은 저렇게 자연스러워...’“재석아? 야, 재석아!”진욱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재석은 고개를 돌렸지만, 눈빛 속 싸늘함은 여전했다. 진욱은 그 눈빛에 소름이 돋아 어깨를 움찔거렸다.“너... 왜 그래?”“방금 정은이가 ‘저희’라고 했어.”“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재석을 바라봤다. 몇 초간 멍하던 그는 그제야 이해가 된 듯 말했다. “아... 그 ‘저희’? 그게 뭐 어때서? 같이 왔으니까 ‘저희’지. 그럼
얼마 지나지 않아 황 원장은 처방전을 프린트해서 정은에게 건넸다.“수고 많으셨습니다, 원장님.”정은이 공손히 인사하자 황 원장은 손을 휘저었다.“아이구, 무슨... 이 아가씨는 인사도 참 반듯하게 잘하네요. 말도 예쁘게 하고, 얼굴도 예쁘고. 이런 손녀가 있으면, 어디 내놔도 자랑이겠네요.”봉수진은 바로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럼요. 우리 손녀는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어요.”황 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장난스럽게 물었다.“이렇게 예쁜 아가씨한테 남자 친구가 없을 리 없는데? 그렇죠?”봉수진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없어요! 보통 남자애들은 우리 정은이랑 안 어울려요.”“허허, 그래도 우리 손자 정도면 꽤 괜찮은데...?”황 원장이 살짝 떠보자 봉수진은 손사래를 쳤다.“아이구, 그 얘긴 그만해요. 정은이 아직은 시집 안 보낼 거예요. 지금이 제일 곁에 두기 좋을 때라니까요.”‘아이고, 또 시작이다...’정은은 속으로 헛웃음 치며 처방전을 가방에 쏙 넣고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저, 약 지으러 먼저 다녀올게요!”...진료실 문을 나서는 순간, 정은은 누군가와 부딪혔다.“아, 죄송해요!”고개를 돌려 상대방을 본 순간 정은의 걸음이 멈췄다.“은혁 씨?”은혁은 보온 도시락 통을 들고 서 있었다.“정은 씨! 또 보네요. 우리 진짜 인연인가 봐요? 하하...”“여긴... 병원인데? 누가 입원하셨어요?”정은이 도시락을 보며 물었다.“아, 아니에요. 저 입원실 온 거 아니고요! 외할아버지가 이 병원 의사세요. 오늘 외래 당번이라 저희 어머니가 직접 도시락을 싸주셨는데, 제가 대신 가져다드리러 온 거예요.”“혹시 외할아버지 성함이 황 씨?”“네! 황기 원장님이세요. 한약재 이름에서 따오셨대요, 혹시... 아는 분이세요?”‘어머나, 진짜 인연인가?’정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오늘 저희 외할머니 진료도 황 원장님한테 받은 거예요.”“정말요? 세상에... 진짜 대박. 어쩐지 자꾸 마주치네요.”은혁은 정은 손에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