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에서 무승부가 나오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처음 두 판을 포함하면 두 사람은 정말 비긴 셈이었다.재석이 먼저 말했다.“심 대표 실력이 대단하네요.”“칭찬은 무슨, 그건 교수님 자신을 칭찬하는 것과 같잖아요. 이런 사람일 줄은 몰랐네요.”말을 마치고 현빈은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으로 향했다.재석은 어이가 없었다.봉수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드디어 끝냈군, 빨리 가서 밥 먹어. 음식 다 식겠다! 정은아, 재석아...”“네! 가요!”이춘재는 제자리에 서서 멍하니 현빈의 뒷모습을 쳐다보더니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현빈이 너무 잘난 척하는 거 아니야? 평소에 나랑 전혀 바둑을 두지 않았는데, 오늘은 그렇게 했을 뿐만 아니라, 평소와 달리 독하게 바둑을 두다니. 재석과 무슨 깊은 원한이 있는 것처럼 말이야.’이춘재는 생각하면 할수록 이상하다고 생각했다.“아이고! 당신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애들 다 식탁에 앉았는데, 당신이 오지 않으면 애들도 젓가락을 움직이지 않잖아요!”봉수진은 소리를 높여 재촉했다.“빨리요!”“아.”저녁을 먹고 재석은 또 어르신들과 잠시 얘기를 나눴다.시간이 다 되자, 재석은 일어나 작별을 고했다.정은도 따라서 일어섰다.“그럼 나도 선배님과 같이 갈게요.”재석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가는 길이니까 데려다 줄게.”이춘재와 봉수진은 두 사람을 문 앞까지 배웅했다.현빈은 입을 삐죽거렸다. ‘두 사람 다 운전하고 왔는데, 가는 길에 데려다 주는 거라고? 웃기네!’봉수진은 고개를 돌리다가 마침 현빈의 눈에 비친 조롱과 적의를 발견했다. 그녀는 제자리에 잠시 멍하니 있었다.“현빈아...”“네? 할머니, 말씀하세요.”“너... 재석이에게 무슨 편견이라도 있는 거 아니야?”비록 봉수진은 바둑을 구경하지 않았지만, 점심 때 현빈이 재석에게 떠나라고 권하는 암시는 너무 분명했다.봉수진은 그게 무슨 뜻인지 똑똑히 알고 있었다.“편견이 있을 리가요.” 현빈은 죽어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그런데 왜 다
송영한은 문득 무언가가 떠올랐다.“작년 국내 연구진이 에 게재한 논문 수 좀 확인해 봐.”부총장은 곧바로 노트북을 열었다.5분 뒤.“작년에 국내 연구진이 해당 저널에 발표한 논문은 총... 6편입니다.”그리고 정은 팀은 그 중 2편을 게재했다.지난해 국내 전체 논문 중 3분의 1이 그들 손에서 나온 셈이었다.“어쩐지...”송영한은 작게 중얼거렸다.잠시 억눌러 뒀던 부총장의 생각이 다시 튀어나왔다.“총장님, 올해 ‘국제 산학연 협력 포럼’은 혹시...”송영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이미 늦었어...”부총장은 결국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국제 산학연 협력 포럼’이 6월 4일에 개막하는데, 이제 열흘도 남지 않았다. 이 시점에서 담당자를 교체하는 건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다.“내년에 소정은 팀을 보냅시다.”송영한은 쓴웃음을 지었다.“지난번에 교무처 통해서 포스터 붙이고, 공식 홈페이지에도 안내글 올려서 홍보까지 해줬는데... 그 애들이 언제 고맙다는 말이라도 한 적 있었나?”부총장은 코를 긁적이며 약간 난처해했다.“에헴! 그건... 그냥 호의를 베풀고 싶어서 그랬죠. 아이들이 받아줄 생각은 하지도 않았는데...”송영한은 가볍게 웃었다.“그 아이들은 성질이 있을 뿐만 아니라 끈기까지 있어. 학교 측은 전에 비록 그들의 싸움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이건 아이들을 무시한 것과 다름없어.”“당초 소방 점검 그 일이 터질 때, 우리가 적극적으로 간섭해 처리했다면, 송지혜를 방임했다고 그 아이들의 미움을 사지도 않았겠지. 그럼 소정은 팀과의 관계도 많이 좋아졌을 거야. 하지만...”그때 학교 측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존심 때문에 이 일을 무시하며 넘어갔다.그러나 송영한은 말머리를 돌렸다.“이번 ‘국제 산학연 협력 포럼’에서 반드시 지는 건 아니야. 그래도 그동안 그렇게 많은 준비를 했잖아.”부총장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랬으면 좋겠네요. 이길 수 있다면 제일 좋죠.”...순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가장
대신 수업을 하러 온 교수님은 낯선 얼굴이었다.40,50대에 머리가 반쯤 벗겨졌고, 강의도 그저 자료를 따라 읽었다.질문도, 유머도 없으며 ‘외모’조차 갖추지 못하자, 아래의 학생들은 흥미를 잃게 되었다.“조 교수님은?” 민지는 작은 소리로 서준에게 물었다.서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네가 모르면 나 더 모르지.”“널 믿은 내가 바보지.”“나 방금 정은 누나에게 문자 보냈는데...”“언니가 뭐래?!”“아직 답장 안 했어.”정은은 자연히 답장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 그녀와 오미선은 M시로 향하는 비행기에 있었기 때문이다.오후 2시, 비행기가 공항에 착륙했다.두 사람을 마중하러 온 차에 올라탄 뒤, 50분 후에 그녀들은 호텔에 도착했다.차에서 내리자마자 호텔 밖의 팻말에는 커다란 글씨가 적혀 있었다.[제13회 학제 간 융합연구 포럼]한쪽에는 체크인을 안내하는 VIP 통로까지 있었다.그렇다, 정은은 오미선과 함께 M시에 와서 융합연구 포럼에 참가했던 것이다.민지와 서준에게 알리지 않았던 이유는 미처 말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아침에 정은은 깨어나자마자 오미선의 전화 한 통에 공항으로 급히 불려갔고, 오미선은 심지어 그녀에게 짐을 챙기라고 당부했다. 정은은 도착한 후에야 두 사람이 어디로 가는지를 알게 되었다.이어 탑승, 이륙, 착지 후 또 쉬지 않고 차에 올라 호텔로 갔다.정은은 가는 길 내내 자신을 잘 돌봐야 할 뿐만 아니라 시시각각 오미선을 챙겨야 했다.오미선은 지난달에 며칠 동안 병원에 입원했는데, 몸이 그리 좋지 않았다.융합연구 포럼이었기에, 이번에 온 사람들은 생물학의 거물들뿐만 아니라 기타 관련 연구 분야의 선배들까지 있었다.정은이 여기에 나타날 수 있었던 것도 다 오미선의 덕을 본 것이었다.두 사람은 프론트 데스크에서 체크인을 마치고 위층으로 올라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우연히 두 지인을 만났다.“교수님, 정은아! 교수님도 여기에 오신 거예요? 언제 오셨어요?” 재석은 입가에 웃음을 머금
재석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네 주민등록증이 필요해, 개인 정보를 등록해야 하거든.”“앗! 네...”수아는 즉시 가방에서 뒤적였다.뒤에 줄을 선 사람들은 짜증이 나기 시작했지만, 예의상 콧방귀를 뀌었을 뿐, 지나친 말은 하지 않았다.수아는 어렵게 주민등록증을 찾아 프론트 데스크에게 건네주었다.옆에 있던 재석은 이미 룸카드를 받고 엘리베이터를 눌렀다.수아를 기다릴 기미가 전혀 없었다.수아는 룸카드를 들고 바로 쫓아갔다.“교수님... 잠깐만요!”두 사람은 함께 7층으로 올라갔고, 또 각자의 카드로 방에 들어갔다.수아는 눈알을 굴리더니, 재석이 문을 닫기 전에 웃으며 입을 열었다.“교수님, 이따가 같이 저녁 먹으러 갈까요?”재석은 손목 시계를 바라보았다.“난 영상 회의로 보고할 게 좀 있어서. 너 혼자 먹어.”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문을 닫았다.그러나 문이 다시 열릴 줄이야. 수아는 마음이 두근거렸는데, 재석이 생각을 바꾼 줄 알았다.“교수님...”“수아야, 이번 포럼은 국내에서 일년에 한 번 열리는 융합연구 포럼이야. 어렵게 얻은 기회를 소중히 여기고, 많이 보고 많이 배우며 수확을 얻길 바랄게.”“네.”수아는 억지로 웃었다.이번에 재석과 함께 회의에 참석할 사람은 원래 손태민이었다.그러나 출발하기 이틀 전, 태민은 갑자기 재석을 찾아가더니, 집에 급한 일이 생겨 돌아가서 처리해야 한다며 이 기회를 수아에게 양보했다.수아는 그제야 재석과 동행할 수 있었다.재석은 태민에게 정말 일이 있는 건지, 아니면 그게 거짓말인 건지 몰랐다. 그러나 수아가 정말 공부하러 오고 싶은 건지, 아니면 다른 것을 위해서인지 은근히 알고 있었기에, 처음부터 재석은 모든 것을 일깨워주었고, 심지어 신신당부까지 했다.나머지도 수아가 알아서 할 수밖에 없었다....오미선은 금방 퇴원한 데다가 또 비행기와 차를 타느라 지쳐, 호텔에서 보낸 음식을 간단히 먹은 후 바로 잠이 들었다.앞으로 이틀 동안 회의 일정이 있으니 오미선은 반드시
수아는 문을 나서자마자 재석의 뒷모습을 보았고, 기쁨을 억누를 수 없었다.그래서 즉시 입을 열어 재석을 불렀다.뜻밖에도 재석과 함께 고개를 돌린 사람은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정은일 줄이야.“정은이도 있었구나.” 수아는 싱겁게 웃으며 재석의 다른 한쪽에 멈춰 섰다.정은은 상대방의 냉담한 태도를 알아차리고, 그저 담담하게 웃으며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수아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재석을 바라보았다.“교수님, 내려가서 식사하시게요?”“음.”“저도 가려던 참이었는데!”말이 끝나자, 현장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재석은 수아를 초대하지 않았고, 인사치레조차 하지 않았다.이때의 침묵은 거절과 다름없었다.수아는 마치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재석이 대답하지 않는 것을 보고 다시 한 번 말했다.“교수님, 우리 같이 먹으러 갈까요?”“미안, 나 약속 있어서.”말이 끝나자 엘리베이터 두 대가 동시에 열렸다.수아는 뻣뻣하게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그리고 재석은 정은을 데리고 왼쪽의 다른 한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금속문이 천천히 닫히면서, 수아의 질투로 일그러진 얼굴을 조금씩 가렸다.“풉...”정은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재석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왜 그래?”“선배님, 너무 티가 나잖아요.”“에헴...” 남자는 가볍게 기침하여 어색함을 숨겼다.1층에는 식당이 아주 많았는데, 정은은 그중 한 가게를 골랐다.“SNS에서 이 가게가 제일 맛있다고 해서요. 중식도 그렇게 잘 한데요. 같이 먹지 않을래요? 내가 살게요.”주최측은 하루 세 끼 모두 책임졌지만, 오직 한식당의 뷔페만 무료였다.다른 중식당과 양식은 모두 스스로 돈을 내야 했다.“응, 네가 결정하면 돼. 하지만, 이건 내가 살게.”두 사람은 종업원을 따라 창가에 앉았다.시간이 아직 일러서인지, 손님이 많지 않아 주위가 아늑했다.정은은 간판 요리 몇 가지를 주문한 후, 재석에게 메뉴를 건네주었다.“선배님도 음식 시키죠?”재석은 받은 뒤 입을 열었다.“그럼 차슈 하나,
내성적이고, 조용하고, 온화하고, 청순했다.재석은 자기도 모르게 그 모습에 빠졌다.“선배님? 선배님?!” 정은이 재석을 불렀다.재석은 그제야 정신을 번쩍 차렸다.“미안, 방금 뭐라고 했어?”“풉!” 정은은 참지 못하고 웃었다.재석은 더욱 멍해졌다.“내 얼굴에 뭐가 묻었냐고 물었어요. 왜 날 계속 쳐다보는 거예요?”재석은 잠시 멈칫하더니 정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뭐 묻긴 했지.”“네?” 이번에는 정은이 멍해졌다. “뭔데요?”“미모.”몇 초 끝의 고요함 뒤.“하하하하... 선배님도 이런 농담할 줄 아는 거예요?”“에헴!”‘농담이 아니라 사실인데.’재석은 마음속으로 묵묵히 말했다.두 사람은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이렇게 적게 입었으니 춥지 않아?”“아니요, 숄 있잖아요.”“이 작은 천을 말하는 거야?”“그럼요! 바람을 막기엔 충분해요!”“음. 추우면 말해. 내가 외투 걸쳐줄게.”“네.”정은은 동산 타워 앞에 가더니, 전의 관광객들이 사진 찍었던 곳에 서서 고개를 돌려 재석을 보았다.재석은 바로 물었다.“사진 찍어줘?”정은은 눈빛이 반짝거리더니 고개를 세게 끄덕였다.관광지에서 사진을 찍는 것을 싫어하는 여자애는 없을 것이다. 물론 정은도 예외가 아니었다.재석은 핸드폰을 꺼냈다.“준비됐어?”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셋, 둘, 하나!”사진 속의 소녀는 가드레일 앞에 서 있었다. 멀리는 눈부시게 빛나는 남산 타워였고, 바람이 소녀 귓가의 긴 머리를 불었다. 정은은 한 손으로 머리를 정리하며, 다른 한 손은 숄을 꼭 감고 있었다. 화면이 고정되는 순간, 카메라를 보지 않았단 것을 깨달은 정은은 미소를 머금으며 재석을 바라보았다.재석은 부동한 각도에서 초점을 바꿔가며 연속 몇 장이나 찍었다.정은이 다가오자, 재석은 자신의 핸드폰을 건네주었다.“봐봐, 잘 찍혔는지.”정은은 원래 아무런 희망도 품지 않았다.‘남자들의 사진 찍는 기술은 정말...’그러나 사진을 보자마자 정은은 깜짝 놀랐다.“선배님,
정은은 사진을 올린 다음 바로 핸드폰을 가방에 넣었다.그래서 남들이 어떤 댓글을 달았는지 전혀 몰랐다.시간도 늦었기에 두 사람은 호텔로 돌아갔다.뜻밖에도 호텔 로비에서 다시 수아를 만날 줄이야...“교수님, 정은아.”그녀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특히 두 사람이 나란히 대문으로 들어와 웃으며 말하는 것을 보니, 수아는 속이 답답했다남자는 우아하고, 여자는 아름다우며, 조화롭고 애틋한 분위기가 두 사람 사이를 맴돌았다.두 사람 커플이 아니라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재석은 수아를 보자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정은은 고개조차 끄덕이지 않고 가볍게 웃기만 했다.그리고... 두 사람은 수아와 어깨를 스치며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수아는 짜증이 났다.‘내가 로비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앉아 있었는데, 힘겹게 교수님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는데, 우연히 만난 척하면서 교수님과 말할 기회를 만들려고 했는데.’뜻밖에도 이런 장면일 줄은 몰랐다.수아는 갑자기 자신이 우습다고 느꼈다.‘다 소정은 때문이야!’수아는 두 사람이 떠나는 방향을 보며 은근히 주먹을 쥐었다.이번에 융합연구 포럼에 참가할 수 있었던 것은 수아가 어렵게 쟁취했기 때문이다.태민이 스스로 물러나게 하기 위해, 수아는 꾹 참고 그와 함께 며칠간 여행을 갔다. 그동안 수아는 웃는 얼굴로 태민을 대했고, 심지어 태도도 무척 부드러웠다.‘그 바보는 뜻밖에도 미친듯이 감동을 했지. 임시로 백화점에 달려가 다이아몬드 반지까지 사서 그날 밤 나에게 청혼했고.’수아는 원래 거절하려 했지만, 이번 융합연구 포럼을 참가하기 위해 먼저 얼버무리며 승낙한 뒤, 태민이 두 사람의 미래에 대해 얘기할 때, 자신의 욕심을 드러냈다.“태민 씨 작년에 이미 한 번 참가했잖아요, 정말 좋겠다. 난 아직 가 본 적이 없는데.”태민은 수아가 단지 감탄하고 있는 줄 알았다.“서두를 필요 없어. 앞으로 기회가 있을 거야.”수아는 입술을 깨물었다.“기회가 있어도 내 차례가 못 돼요. 태민 씨, 미진 언니 모두
‘나만 짝사랑한 게 아니었어. 나만 스트레스와 열등감을 느끼는 것도 아니었어.’‘수아도 나와 마찬가지였어! 이건 수아가 날 사랑하고 있다는 거잖아!’한 사람을 사랑해야만 늘 열등감을 느낄 수 있고, 상대방과 어울릴 수 있도록 더 강한 자신을 만들려 할 것이다.“좋아.”태민은 갑자기 수아의 손을 잡더니 정중하게 약속했다.“수아야, 네가 원하는 거라면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와줄게.”수아는 이 일이 이렇게 쉬울 줄 몰랐다.J시로 돌아온 이튿날, 재석은 수아에게 전화를 걸었고, M시 융합연구 포럼에 참가할 준비를 하라고 통지했다.수아는 태민이 재석에게 어떻게 말했는지, 또 어떻게 그녀가 조미진을 넘어 성공적으로 이 기회를 얻게 됐는지 몰랐다. 어차피 그녀도 이런 일에 흥미가 없었으니까.‘앞으로 3일, 마침내 교수님과 함께 지낼 기회가 생겼어!’원래 수아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어차피 실험실에서 그녀는 재석과 함께 감정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그러니 굳이 재석을 따라 이곳에 올 필요도 없었다.그러나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 반년 동안 재석은 의도적으로 수아를 멀리했던 것이다.한 무리의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재석은 수아를 포함한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했다.그러나 두 사람이 따로 남게 된다면, 재석은 자꾸 그런 자리를 피하려 했고, 항상 수아와 같은 곳에 있는 것을 거절할 이유와 구실이 있었다.수아는 당황했다.그녀는 마음속으로 불안해졌다.‘이러다가 교수님은 나와 점점 멀어질 거야. 더 이상 쟁취하지 않으면 아마도 기회가 없을 거라고.’그래서, 이번에 수아는 반드시 와야 했다.수아는 재석과 정은이 떠나는 방향을 보면서 주먹을 은근히 움켜쥐었다.어떤 결심을 한 것처럼 눈빛에 결단이 번쩍였다....이튿날, 융합연구 포럼이 정식으로 시작되었다.장소는 바로 호텔 옆의 회의실이었다.아침 8시, 초대 손님들이 속속 입장했다.9시, 포럼이 마침내 시작되었다.사회자가 단상에 올라 간단한 환영 인사를 전한 뒤, 본격적인 주제 강연 순서로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
진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렇게 마음이 있는 거면, 왜 정은이한테 솔직하게 말 안 해?”“겁나는 거지, 재석아? 말 꺼냈다가 거절이라도 당하면... 그땐 친구로도 남을 수 없을까 봐, 무서운 거잖아.”진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재석을 똑바로 바라봤다.“그건 너답지 않아. 내가 아는 재석이는, 망설이지 않고 결정하는 사람이었어. 결과가 불확실하다고 물러서는 사람 아니었잖아.”“정은이가 ‘지금은 연애 생각 없다’고 했지? 중요한 건 ‘지금은’이라는 거야. 사람 마음은 바뀌는 거고, 그때 거절했다고 지금도 똑같을 거란 보장은 없어. 알겠냐?”재석은 말없이 진욱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말이 생각보다 깊게 박혔다. ‘지금도 똑같을까? 아니, 혹시... 지금은 조금 다를 수도 있는 걸까...’진욱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야,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너 계속 질질 끌면, 정은이 뺏긴다. 그리고 뺏기고 나서 울어봤자, 소용없을 거야.”“우리 정은이 인기 많은 거 너도 알잖아. 예전에도 정은이 두고 싸운 애들 있었잖아. 그리고 오늘 그 남자 봤지? 얼굴 잘생겼지, 젊지, 에너지 넘치지, 옷차림 보니까 집도 잘 사는 거 같던데?”재석은 이런 말을 아주 듣기 싫었다.“닥쳐.”진욱도 더 이상 말하기 싫었다. “칫. 드디어 위기감이 좀 드나?”‘그래, 긴장 좀 해라. 맨날 냉정한 척만 하지 말고... 이번엔 너도 좀 불안해져 봐야지.’...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집에 바래다준 뒤, 약을 가정부에게 전달하며, 복용 방법까지 하나하나 직접 설명했다. 봉수진은 저녁까지 먹고 가라며 붙잡았지만, 정은은 이미 서준, 민지와의 약속이 있었다.“외할머니, 며칠 안에 다시 올게요. 오늘은 친구들이랑 약속이 있어서요.”“그래그래, 알았어. 젊을 땐 많이 만나고 다녀야지.”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고, 곧 차에 올랐다.약속 장소인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땐, 서준과 민지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테이블 위에
은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게요... 나야 뭐, 그랬으면 좋겠지만...”하지만 정은의 태도는 그리 확신을 줄 만큼의 호감은 아니었다.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분명히 좋아한다는 표시도 없는 애매한 선이 보이는 듯했다.‘그래서 더 미치겠어. 기대도 못 하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이러니까 계속 마음이 붕 떠 있잖아...’그렇게 속으로 앓고 있었지만, 정은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봉수진의 약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었다.VIP 약국답게, 일 처리는 정말 빨랐다. 정성스럽게 달인 약이 곧바로 팩 단위로 나뉘어 밀봉되었고, 음용 방법까지 깔끔하게 안내되었다.냉장 보관 후, 따뜻한 물에 데워 마시면 된다는 안내였는데, 이 정도면 환자도 거부감 없이 약을 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약을 다 받은 후, 약 한 시간쯤 지나 두 사람은 병원을 나섰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은의 전화가 울렸다.“여보세요? 외할머니? 네, 약 다 받아놨어요.”“병원에서 달여줬어요. 네, 거기 계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은 정은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은혁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오늘 고마웠어요. 외할머니 모시러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아, 어... 그래요! 잘 가요!”은혁은 여자의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심지어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한참을 그렇게 바라본 후에야 아쉬움 가득한 시선을 거두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고, 화면엔 ‘황기' 두 글자가 떴다.“여보세요?”[야 이놈아! 도시락 던져놓고 도망가듯 나가버리면 어떡해?! 말도 못 붙였잖아! 뭐가 그렇게 급해? 뭐가 외할아버지보다 중요한 거냐고?!]“죄송해요... 헤헤.”황기는 순간 당황했다. ‘얘 지금 뭐야? 미쳤어? 웃음은 왜 이렇게 정직하게 새어 나오는 건데...?’...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태우고 병원을 나서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재석은 약을 수령하고 외래 진료실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정은도 여기서 재석을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선배님, 병원엔 무슨 일로 오셨어요?”재석은 그제야 시선을 거둬들였다. 눈길이 정은에게 닿는 순간,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난...”“날 데려다주러 온 거야.” 그 순간, 전진욱이 배를 감싸 쥐며 천천히 다가왔고, 재석 대신 대답을 건넸다.정은은 진욱을 바라보다가 눈이 살짝 커졌다. “교수님,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하... 뭘 잘못 먹었는지, 아침부터 배탈이 나서... 약도 안 듣고... 이 사람이 막 끌고 오더라니까... 검사라도 받아보라고.”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하셨어요. 괜히 방치하다가 더 심해질 수도 있잖아요. 미리 체크하면 마음도 편하고요.”“어우, 너희 둘 미리 맞췄냐? 말이 어쩜 그렇게 똑같냐?” 진욱이 짐짓 장난스러운 말투로 투덜댔다.정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재석을 바라봤다. “그랬어요?”재석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빛 속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다. ‘저 말투, 저 표정... 나만 아는 게 아닐 텐데...’“정은 씨, 이제 가야죠.” 그때, 은혁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아, 네.” 정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 먼저 갈게요.”그렇게 말한 후, 은혁과 나란히 병원 복도를 걸어 나갔다.재석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두 사람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눈빛 속 감정은 복잡하고도 묘했다. ‘뭔데, 저 둘은 저렇게 자연스러워...’“재석아? 야, 재석아!”진욱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재석은 고개를 돌렸지만, 눈빛 속 싸늘함은 여전했다. 진욱은 그 눈빛에 소름이 돋아 어깨를 움찔거렸다.“너... 왜 그래?”“방금 정은이가 ‘저희’라고 했어.”“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재석을 바라봤다. 몇 초간 멍하던 그는 그제야 이해가 된 듯 말했다. “아... 그 ‘저희’? 그게 뭐 어때서? 같이 왔으니까 ‘저희’지. 그럼
얼마 지나지 않아 황 원장은 처방전을 프린트해서 정은에게 건넸다.“수고 많으셨습니다, 원장님.”정은이 공손히 인사하자 황 원장은 손을 휘저었다.“아이구, 무슨... 이 아가씨는 인사도 참 반듯하게 잘하네요. 말도 예쁘게 하고, 얼굴도 예쁘고. 이런 손녀가 있으면, 어디 내놔도 자랑이겠네요.”봉수진은 바로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럼요. 우리 손녀는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어요.”황 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장난스럽게 물었다.“이렇게 예쁜 아가씨한테 남자 친구가 없을 리 없는데? 그렇죠?”봉수진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없어요! 보통 남자애들은 우리 정은이랑 안 어울려요.”“허허, 그래도 우리 손자 정도면 꽤 괜찮은데...?”황 원장이 살짝 떠보자 봉수진은 손사래를 쳤다.“아이구, 그 얘긴 그만해요. 정은이 아직은 시집 안 보낼 거예요. 지금이 제일 곁에 두기 좋을 때라니까요.”‘아이고, 또 시작이다...’정은은 속으로 헛웃음 치며 처방전을 가방에 쏙 넣고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저, 약 지으러 먼저 다녀올게요!”...진료실 문을 나서는 순간, 정은은 누군가와 부딪혔다.“아, 죄송해요!”고개를 돌려 상대방을 본 순간 정은의 걸음이 멈췄다.“은혁 씨?”은혁은 보온 도시락 통을 들고 서 있었다.“정은 씨! 또 보네요. 우리 진짜 인연인가 봐요? 하하...”“여긴... 병원인데? 누가 입원하셨어요?”정은이 도시락을 보며 물었다.“아, 아니에요. 저 입원실 온 거 아니고요! 외할아버지가 이 병원 의사세요. 오늘 외래 당번이라 저희 어머니가 직접 도시락을 싸주셨는데, 제가 대신 가져다드리러 온 거예요.”“혹시 외할아버지 성함이 황 씨?”“네! 황기 원장님이세요. 한약재 이름에서 따오셨대요, 혹시... 아는 분이세요?”‘어머나, 진짜 인연인가?’정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오늘 저희 외할머니 진료도 황 원장님한테 받은 거예요.”“정말요? 세상에... 진짜 대박. 어쩐지 자꾸 마주치네요.”은혁은 정은 손에 들
아침 햇살이 창문 틈 사이로 스며들었다. 부드럽게 퍼진 빛이 정은의 잠든 옆얼굴을 은은하게 감쌌다.살랑이는 바람에 커튼 끝자락이 가볍게 흔들렸고, 고요한 침실에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여보세요? 외할아버지?”이춘재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직 자고 있었구나? 그럼 내가 이따가 다시...]“아뇨, 괜찮아요. 이제 깼어요. 요즘 집에서 쉬고 있어서요, 실험실을 좀 멈췄거든요. 왜요, 무슨 일 있으세요?”전화기 너머에서 이춘재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어젯밤에... 내 친구 하나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단다. 병원에서 못 버티고... 그냥 그렇게.]‘헉...’[오늘 아침에 그 집 식구한테 연락이 왔어. 장례 준비도 해야 하고, 남은 가족들도 어찌할 바를 모르니 내게 좀 도와달라고 하더구나. 그 친구는 진짜, 훅 떠났지만 남겨진 식구들은... 참 마음이 아프지.]이춘재는 말을 멈췄고, 한참 후에 덧붙였다.[원래는 오늘 네 외할머니가 병원 가는 날이라 내가 같이 가기로 했는데... 현빈이는 출장이란다. 생각해 보니까 내가 부탁할 사람은 너밖에 없더라.]정은은 웃으며 말했다.“외할아버지, 그게 어떻게 부탁이에요. 당연히 제가 가야죠. 외할머니랑 병원 가는 건 제 몫이에요. 외할아버지는 마음 놓고 다녀오세요.”[그래, 그래. 고맙다, 정은아.]...오전 9시. 정은은 외할머니댁 앞에 도착했다. 봉수진은 이미 외출 준비를 마치고 작은 가방을 손에 든 채 문 앞에 서 있었다.그 옆엔 이춘재가 말없이 함께 서 있었고, 두 사람은 뭔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당신 진짜 왜 그래요? 정은이는 실험실에서도 바쁜 애인데, 이런 일까지 시켜서 되겠어요? 괜히 애 걱정하게 만들고, 또 미안하게 만들고...”봉수진의 잔소리가 이어졌고, 이춘재는 구겨진 어깨로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맞아, 당신 말이 다 맞아. 근데 정은이가 요즘 쉰다길래... 그냥 부탁한 거지 뭐...”“쉰다고 병원까지 같이 가야 해요? 그
수민은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손을 올려 한 대 갈겼다.짝!동건은 피하지 못하고 정통으로 이마를 맞았다.“야! 미쳤어?!”수민은 인상을 팍 구기며 외쳤다.“너 귀신이야 뭐야? 소리도 없이 뒤에서 들이대고... 맞을만 하니까 맞은 거지.”“뭐? 지금 그딴 태도를 보이는 이유가 뭐야? 딴 남자 생각하다가 놀란 거 아냐? 장은혁? 그 잘난 척하는 새끼?”수민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맞아. 잘생겼지, 말도 잘해, 심지어 마술도 하지. 매력 넘치는데?”“푸... 마술? 그건 여자들 꼬시려고 배운 거지. 허세로 가득 찬 새끼야.”“오히려 더 좋지 뭐... 허세라도, 적어도 표현은 하잖아. 넌 뭐 있어?”동건은 이를 악물었다.“그런 애가 뭐가 그렇게 좋다고. 딱 봐도 겉멋만 잔뜩 든 애송이잖아.”“내가 좋으면 된 거지. 근데... 잠깐만. 너,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수민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그냥.”“고동건!!!”“야, 소리 좀 그만 질러. 힘 좀 아끼라고. 이따가 쓸 데가 있을 테니까.” “꺼져.”수민은 문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동건은 한 발도 움직이지 않았다.대신, 그녀를 천천히 바라보다가 작게 웃었다.“너 요즘... 왜 이렇게 자꾸 도망치는데? 솔직히 말해봐. 내가 그리웠지?”“웃기지 마.”“아닌데... 지금도 눈 흔들리는 거 보이거든.”수민은 숨을 고르며 조용히 말했다.잠시 후, 그녀는 동건에게 그대로 안겨 침대 위로 내던져졌다.동건은 셔츠 단추를 풀며 천천히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한다고 했잖아. 내가 농담하는 사람으로 보여?”수민은 몸을 살짝 일으키며, 도발적인 미소를 지었다.“너 하나로 되겠어?”“해보면 알겠지.”밤은 길었고, 봄기운처럼 뜨거웠다.누군가는 그 열기를 마음껏 즐겼고, 누군가는 답답한 숨을 눌러 삼켰다....불 꺼진 침실. 어둠 속,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창문 너머로 달빛만이 희미하게 커튼 틈 사이로 비스듬히 들어왔다.재석은 거실 창 앞에 서 있었다. 등
부재중 10통 중 9통은 고동건, 그리고 나머지 1통...‘어? 우리 조재석 교수님?’수민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톡 알림도 확인했다.읽지 않은 메시지 42개.대부분은 역시나 고동건.수민은 손가락으로 휙휙 넘기며 대충 읽었다.[야, 또 남자랑 밥 처먹냐?][여사친 모임엔 남자 안 끼운다며?][그 장은혁, 꽃미남 새끼 남자 아니냐?][조수민 너 진짜 표리부동이다?] [답장 안 해?][전화도 안 받아? 10초 준다!][기다려, 오늘 밤에 너 좀 혼나야겠어!!]수민은 손가락으로 한 번에 쭉 밀어내고, 심드렁하게 한 마디만 보냈다.[꺼져!!!]10초도 안 돼서 동건한테서 바로 또 메시지가 왔다.[답장할 줄은 몰랐네...][넌 진짜 사람 마음 찢어놓고 아무렇지 않지?] [아냐, 넌 원래 마음이 없지.][...]수민은 무표정하게 창을 닫았다. ‘이 인간은 진심으로 질린다...’그리고 재석과의 메시지함을 열었다.단 두 줄.[정은이랑 어디서 밥 먹었어?][장은혁도 함께였어?]수민의 눈썹이 절로 올라갔다.‘어라...?’‘우리 조재석 교수님이? 이런 문장을? 이렇게 빠르게? 이렇게 직접적으로?’‘우리 조 교수님... 평소에 ‘응’ 하나 치는 데도 심장 박동 조절하듯 하던 사람이었는데...’게다가 이 두 문장, 보통 사람이 보냈다면 ‘그냥 궁금했나 보다’ 하고 넘겼을 거다.하지만, 그게 ‘조재석’이라는 이름으로 오면 느낌이 전혀 달랐다.‘이거... 약간... 삐쳤다고 읽어야 하나?’수민의 눈이 반짝였다.‘뭐야, 이거 진짜네?’그녀는 살짝 웃으며 미용실에서 찍어둔 사진을 열었다.정은과 은혁이 나란히 앉은 각도, 분위기도 꽤 그럴싸한 장면.‘자, 실험 들어가자.’사진을 톡에 업로드. 손끝으로 부드럽게 터치.전송 완료.바로 이어 핸드폰에 내장된 스톱워치를 켰다.“시... 작!”1초, 2초, 3초... 5초...띵-[지금 어디야?]수민은 피식 웃으며 핸드폰을 내려놨다.‘오케이, 확정. 조재석 교수님
“은혁아, 우리 먼저 가볼게.”은혁이 손을 흔들며 인사하려던 찰나, 정은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은혁 씨, 같이 식사하시죠? 어차피 저도 아직 안 먹었는데요.”“마침 예약도 해뒀으니까 괜찮다면 같이 가요.”“정, 정말요?! 괜찮을까요?”은혁은 말끝이 떨릴 정도로 들뜬 기색이었다.수민은 표정으로 정은에게 물었다. ‘진심이야?’정은은 눈빛으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수민은 한숨 쉬듯 웃으며 말했다.“좋지 뭐... 사람 하나 늘어난다고 달라질 거 없잖아. 같이 가자.”은혁은 기뻐서 입꼬리를 다 못 내렸다. ‘정말 같이 가는 거야...? 나 지금 약간... 꿈꾸는 거 아냐?’...레스토랑에 도착하자 직원이 안내한 자리로 세 사람이 들어갔다. 따로 마련된 룸이라 분위기도 아늑했다.음식이 나오기 전, 은혁이 갑자기 말했다.“기다리는 김에... 작은 마술 하나 보여드릴까요?”수민은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마술도 해? 그러고 보니, 정은이 외할머니 생신 때도 뭐 하나 보여줬었지.”“이번엔 새로 배운 거예요.” 은혁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그럼 해봐, 해봐!” 수민은 벌써 핸드폰을 꺼내 카메라 준비 완료 상태로 들고 있었다.“도구 필요해?” 그녀가 묻자, 은혁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옆 캐비닛에서 종이 티슈 한 팩을 꺼냈다.그중 다섯 장을 쏙쏙 뽑아냈다. 마침 티슈에 프린트된 꽃무늬가 하나하나 다 달랐다.그는 정은을 향해 말했다.“정은 씨, 가장 마음에 드는 거 하나 골라주세요.”정은은 망설이지 않고 무심하게 한 장을 집어 들었다.은혁은 그걸 받아 조심스럽게 반으로 접고 말했다.“잘 봐요.”다시 펴서 말한 뒤, 조용히 티슈를 손안에서 뭉쳤다. 그리고 그 주먹을 천천히 펴자 손안에는 작은 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선물이에요.”은혁은 웃으며 그 꽃을 정은에게 건넸다.“진짜 꽃이에요?”정은은 놀란 듯 꽃을 받았다. 손에 올려놓고 한참을 들여다봤다.‘이거... 어떻게 한 거지?’수민은 슬쩍 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