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899화

Author: 십일
바둑에서 무승부가 나오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처음 두 판을 포함하면 두 사람은 정말 비긴 셈이었다.

재석이 먼저 말했다.

“심 대표 실력이 대단하네요.”

“칭찬은 무슨, 그건 교수님 자신을 칭찬하는 것과 같잖아요. 이런 사람일 줄은 몰랐네요.”

말을 마치고 현빈은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으로 향했다.

재석은 어이가 없었다.

봉수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끝냈군, 빨리 가서 밥 먹어. 음식 다 식겠다! 정은아, 재석아...”

“네! 가요!”

이춘재는 제자리에 서서 멍하니 현빈의 뒷모습을 쳐다보더니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현빈이 너무 잘난 척하는 거 아니야? 평소에 나랑 전혀 바둑을 두지 않았는데, 오늘은 그렇게 했을 뿐만 아니라, 평소와 달리 독하게 바둑을 두다니. 재석과 무슨 깊은 원한이 있는 것처럼 말이야.’

이춘재는 생각하면 할수록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아이고! 당신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애들 다 식탁에 앉았는데, 당신이 오지 않으면 애들도 젓가락을 움직이지 않잖아요!”

봉수진은 소리를 높여 재촉했다.

“빨리요!”

“아.”

저녁을 먹고 재석은 또 어르신들과 잠시 얘기를 나눴다.

시간이 다 되자, 재석은 일어나 작별을 고했다.

정은도 따라서 일어섰다.

“그럼 나도 선배님과 같이 갈게요.”

재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는 길이니까 데려다 줄게.”

이춘재와 봉수진은 두 사람을 문 앞까지 배웅했다.

현빈은 입을 삐죽거렸다.

‘두 사람 다 운전하고 왔는데, 가는 길에 데려다 주는 거라고? 웃기네!’

봉수진은 고개를 돌리다가 마침 현빈의 눈에 비친 조롱과 적의를 발견했다. 그녀는 제자리에 잠시 멍하니 있었다.

“현빈아...”

“네? 할머니, 말씀하세요.”

“너... 재석이에게 무슨 편견이라도 있는 거 아니야?”

비록 봉수진은 바둑을 구경하지 않았지만, 점심 때 현빈이 재석에게 떠나라고 권하는 암시는 너무 분명했다.

봉수진은 그게 무슨 뜻인지 똑똑히 알고 있었다.

“편견이 있을 리가요.”

현빈은 죽어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ocked Chapter

Related chapters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00화

    송영한은 문득 무언가가 떠올랐다.“작년 국내 연구진이 에 게재한 논문 수 좀 확인해 봐.”부총장은 곧바로 노트북을 열었다.5분 뒤.“작년에 국내 연구진이 해당 저널에 발표한 논문은 총... 6편입니다.”그리고 정은 팀은 그 중 2편을 게재했다.지난해 국내 전체 논문 중 3분의 1이 그들 손에서 나온 셈이었다.“어쩐지...”송영한은 작게 중얼거렸다.잠시 억눌러 뒀던 부총장의 생각이 다시 튀어나왔다.“총장님, 올해 ‘국제 산학연 협력 포럼’은 혹시...”송영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이미 늦었어...”부총장은 결국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국제 산학연 협력 포럼’이 6월 4일에 개막하는데, 이제 열흘도 남지 않았다. 이 시점에서 담당자를 교체하는 건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다.“내년에 소정은 팀을 보냅시다.”송영한은 쓴웃음을 지었다.“지난번에 교무처 통해서 포스터 붙이고, 공식 홈페이지에도 안내글 올려서 홍보까지 해줬는데... 그 애들이 언제 고맙다는 말이라도 한 적 있었나?”부총장은 코를 긁적이며 약간 난처해했다.“에헴! 그건... 그냥 호의를 베풀고 싶어서 그랬죠. 아이들이 받아줄 생각은 하지도 않았는데...”송영한은 가볍게 웃었다.“그 아이들은 성질이 있을 뿐만 아니라 끈기까지 있어. 학교 측은 전에 비록 그들의 싸움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이건 아이들을 무시한 것과 다름없어.”“당초 소방 점검 그 일이 터질 때, 우리가 적극적으로 간섭해 처리했다면, 송지혜를 방임했다고 그 아이들의 미움을 사지도 않았겠지. 그럼 소정은 팀과의 관계도 많이 좋아졌을 거야. 하지만...”그때 학교 측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존심 때문에 이 일을 무시하며 넘어갔다.그러나 송영한은 말머리를 돌렸다.“이번 ‘국제 산학연 협력 포럼’에서 반드시 지는 건 아니야. 그래도 그동안 그렇게 많은 준비를 했잖아.”부총장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랬으면 좋겠네요. 이길 수 있다면 제일 좋죠.”...순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가장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01화

    대신 수업을 하러 온 교수님은 낯선 얼굴이었다.40,50대에 머리가 반쯤 벗겨졌고, 강의도 그저 자료를 따라 읽었다.질문도, 유머도 없으며 ‘외모’조차 갖추지 못하자, 아래의 학생들은 흥미를 잃게 되었다.“조 교수님은?” 민지는 작은 소리로 서준에게 물었다.서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네가 모르면 나 더 모르지.”“널 믿은 내가 바보지.”“나 방금 정은 누나에게 문자 보냈는데...”“언니가 뭐래?!”“아직 답장 안 했어.”정은은 자연히 답장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 그녀와 오미선은 M시로 향하는 비행기에 있었기 때문이다.오후 2시, 비행기가 공항에 착륙했다.두 사람을 마중하러 온 차에 올라탄 뒤, 50분 후에 그녀들은 호텔에 도착했다.차에서 내리자마자 호텔 밖의 팻말에는 커다란 글씨가 적혀 있었다.[제13회 학제 간 융합연구 포럼]한쪽에는 체크인을 안내하는 VIP 통로까지 있었다.그렇다, 정은은 오미선과 함께 M시에 와서 융합연구 포럼에 참가했던 것이다.민지와 서준에게 알리지 않았던 이유는 미처 말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아침에 정은은 깨어나자마자 오미선의 전화 한 통에 공항으로 급히 불려갔고, 오미선은 심지어 그녀에게 짐을 챙기라고 당부했다. 정은은 도착한 후에야 두 사람이 어디로 가는지를 알게 되었다.이어 탑승, 이륙, 착지 후 또 쉬지 않고 차에 올라 호텔로 갔다.정은은 가는 길 내내 자신을 잘 돌봐야 할 뿐만 아니라 시시각각 오미선을 챙겨야 했다.오미선은 지난달에 며칠 동안 병원에 입원했는데, 몸이 그리 좋지 않았다.융합연구 포럼이었기에, 이번에 온 사람들은 생물학의 거물들뿐만 아니라 기타 관련 연구 분야의 선배들까지 있었다.정은이 여기에 나타날 수 있었던 것도 다 오미선의 덕을 본 것이었다.두 사람은 프론트 데스크에서 체크인을 마치고 위층으로 올라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우연히 두 지인을 만났다.“교수님, 정은아! 교수님도 여기에 오신 거예요? 언제 오셨어요?” 재석은 입가에 웃음을 머금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02화

    재석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네 주민등록증이 필요해, 개인 정보를 등록해야 하거든.”“앗! 네...”수아는 즉시 가방에서 뒤적였다.뒤에 줄을 선 사람들은 짜증이 나기 시작했지만, 예의상 콧방귀를 뀌었을 뿐, 지나친 말은 하지 않았다.수아는 어렵게 주민등록증을 찾아 프론트 데스크에게 건네주었다.옆에 있던 재석은 이미 룸카드를 받고 엘리베이터를 눌렀다.수아를 기다릴 기미가 전혀 없었다.수아는 룸카드를 들고 바로 쫓아갔다.“교수님... 잠깐만요!”두 사람은 함께 7층으로 올라갔고, 또 각자의 카드로 방에 들어갔다.수아는 눈알을 굴리더니, 재석이 문을 닫기 전에 웃으며 입을 열었다.“교수님, 이따가 같이 저녁 먹으러 갈까요?”재석은 손목 시계를 바라보았다.“난 영상 회의로 보고할 게 좀 있어서. 너 혼자 먹어.”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문을 닫았다.그러나 문이 다시 열릴 줄이야. 수아는 마음이 두근거렸는데, 재석이 생각을 바꾼 줄 알았다.“교수님...”“수아야, 이번 포럼은 국내에서 일년에 한 번 열리는 융합연구 포럼이야. 어렵게 얻은 기회를 소중히 여기고, 많이 보고 많이 배우며 수확을 얻길 바랄게.”“네.”수아는 억지로 웃었다.이번에 재석과 함께 회의에 참석할 사람은 원래 손태민이었다.그러나 출발하기 이틀 전, 태민은 갑자기 재석을 찾아가더니, 집에 급한 일이 생겨 돌아가서 처리해야 한다며 이 기회를 수아에게 양보했다.수아는 그제야 재석과 동행할 수 있었다.재석은 태민에게 정말 일이 있는 건지, 아니면 그게 거짓말인 건지 몰랐다. 그러나 수아가 정말 공부하러 오고 싶은 건지, 아니면 다른 것을 위해서인지 은근히 알고 있었기에, 처음부터 재석은 모든 것을 일깨워주었고, 심지어 신신당부까지 했다.나머지도 수아가 알아서 할 수밖에 없었다....오미선은 금방 퇴원한 데다가 또 비행기와 차를 타느라 지쳐, 호텔에서 보낸 음식을 간단히 먹은 후 바로 잠이 들었다.앞으로 이틀 동안 회의 일정이 있으니 오미선은 반드시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03화

    수아는 문을 나서자마자 재석의 뒷모습을 보았고, 기쁨을 억누를 수 없었다.그래서 즉시 입을 열어 재석을 불렀다.뜻밖에도 재석과 함께 고개를 돌린 사람은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정은일 줄이야.“정은이도 있었구나.” 수아는 싱겁게 웃으며 재석의 다른 한쪽에 멈춰 섰다.정은은 상대방의 냉담한 태도를 알아차리고, 그저 담담하게 웃으며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수아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재석을 바라보았다.“교수님, 내려가서 식사하시게요?”“음.”“저도 가려던 참이었는데!”말이 끝나자, 현장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재석은 수아를 초대하지 않았고, 인사치레조차 하지 않았다.이때의 침묵은 거절과 다름없었다.수아는 마치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재석이 대답하지 않는 것을 보고 다시 한 번 말했다.“교수님, 우리 같이 먹으러 갈까요?”“미안, 나 약속 있어서.”말이 끝나자 엘리베이터 두 대가 동시에 열렸다.수아는 뻣뻣하게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그리고 재석은 정은을 데리고 왼쪽의 다른 한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금속문이 천천히 닫히면서, 수아의 질투로 일그러진 얼굴을 조금씩 가렸다.“풉...”정은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재석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왜 그래?”“선배님, 너무 티가 나잖아요.”“에헴...” 남자는 가볍게 기침하여 어색함을 숨겼다.1층에는 식당이 아주 많았는데, 정은은 그중 한 가게를 골랐다.“SNS에서 이 가게가 제일 맛있다고 해서요. 중식도 그렇게 잘 한데요. 같이 먹지 않을래요? 내가 살게요.”주최측은 하루 세 끼 모두 책임졌지만, 오직 한식당의 뷔페만 무료였다.다른 중식당과 양식은 모두 스스로 돈을 내야 했다.“응, 네가 결정하면 돼. 하지만, 이건 내가 살게.”두 사람은 종업원을 따라 창가에 앉았다.시간이 아직 일러서인지, 손님이 많지 않아 주위가 아늑했다.정은은 간판 요리 몇 가지를 주문한 후, 재석에게 메뉴를 건네주었다.“선배님도 음식 시키죠?”재석은 받은 뒤 입을 열었다.“그럼 차슈 하나,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04화

    내성적이고, 조용하고, 온화하고, 청순했다.재석은 자기도 모르게 그 모습에 빠졌다.“선배님? 선배님?!” 정은이 재석을 불렀다.재석은 그제야 정신을 번쩍 차렸다.“미안, 방금 뭐라고 했어?”“풉!” 정은은 참지 못하고 웃었다.재석은 더욱 멍해졌다.“내 얼굴에 뭐가 묻었냐고 물었어요. 왜 날 계속 쳐다보는 거예요?”재석은 잠시 멈칫하더니 정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뭐 묻긴 했지.”“네?” 이번에는 정은이 멍해졌다. “뭔데요?”“미모.”몇 초 끝의 고요함 뒤.“하하하하... 선배님도 이런 농담할 줄 아는 거예요?”“에헴!”‘농담이 아니라 사실인데.’재석은 마음속으로 묵묵히 말했다.두 사람은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이렇게 적게 입었으니 춥지 않아?”“아니요, 숄 있잖아요.”“이 작은 천을 말하는 거야?”“그럼요! 바람을 막기엔 충분해요!”“음. 추우면 말해. 내가 외투 걸쳐줄게.”“네.”정은은 동산 타워 앞에 가더니, 전의 관광객들이 사진 찍었던 곳에 서서 고개를 돌려 재석을 보았다.재석은 바로 물었다.“사진 찍어줘?”정은은 눈빛이 반짝거리더니 고개를 세게 끄덕였다.관광지에서 사진을 찍는 것을 싫어하는 여자애는 없을 것이다. 물론 정은도 예외가 아니었다.재석은 핸드폰을 꺼냈다.“준비됐어?”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셋, 둘, 하나!”사진 속의 소녀는 가드레일 앞에 서 있었다. 멀리는 눈부시게 빛나는 남산 타워였고, 바람이 소녀 귓가의 긴 머리를 불었다. 정은은 한 손으로 머리를 정리하며, 다른 한 손은 숄을 꼭 감고 있었다. 화면이 고정되는 순간, 카메라를 보지 않았단 것을 깨달은 정은은 미소를 머금으며 재석을 바라보았다.재석은 부동한 각도에서 초점을 바꿔가며 연속 몇 장이나 찍었다.정은이 다가오자, 재석은 자신의 핸드폰을 건네주었다.“봐봐, 잘 찍혔는지.”정은은 원래 아무런 희망도 품지 않았다.‘남자들의 사진 찍는 기술은 정말...’그러나 사진을 보자마자 정은은 깜짝 놀랐다.“선배님,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05화

    정은은 사진을 올린 다음 바로 핸드폰을 가방에 넣었다.그래서 남들이 어떤 댓글을 달았는지 전혀 몰랐다.시간도 늦었기에 두 사람은 호텔로 돌아갔다.뜻밖에도 호텔 로비에서 다시 수아를 만날 줄이야...“교수님, 정은아.”그녀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특히 두 사람이 나란히 대문으로 들어와 웃으며 말하는 것을 보니, 수아는 속이 답답했다남자는 우아하고, 여자는 아름다우며, 조화롭고 애틋한 분위기가 두 사람 사이를 맴돌았다.두 사람 커플이 아니라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재석은 수아를 보자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정은은 고개조차 끄덕이지 않고 가볍게 웃기만 했다.그리고... 두 사람은 수아와 어깨를 스치며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수아는 짜증이 났다.‘내가 로비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앉아 있었는데, 힘겹게 교수님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는데, 우연히 만난 척하면서 교수님과 말할 기회를 만들려고 했는데.’뜻밖에도 이런 장면일 줄은 몰랐다.수아는 갑자기 자신이 우습다고 느꼈다.‘다 소정은 때문이야!’수아는 두 사람이 떠나는 방향을 보며 은근히 주먹을 쥐었다.이번에 융합연구 포럼에 참가할 수 있었던 것은 수아가 어렵게 쟁취했기 때문이다.태민이 스스로 물러나게 하기 위해, 수아는 꾹 참고 그와 함께 며칠간 여행을 갔다. 그동안 수아는 웃는 얼굴로 태민을 대했고, 심지어 태도도 무척 부드러웠다.‘그 바보는 뜻밖에도 미친듯이 감동을 했지. 임시로 백화점에 달려가 다이아몬드 반지까지 사서 그날 밤 나에게 청혼했고.’수아는 원래 거절하려 했지만, 이번 융합연구 포럼을 참가하기 위해 먼저 얼버무리며 승낙한 뒤, 태민이 두 사람의 미래에 대해 얘기할 때, 자신의 욕심을 드러냈다.“태민 씨 작년에 이미 한 번 참가했잖아요, 정말 좋겠다. 난 아직 가 본 적이 없는데.”태민은 수아가 단지 감탄하고 있는 줄 알았다.“서두를 필요 없어. 앞으로 기회가 있을 거야.”수아는 입술을 깨물었다.“기회가 있어도 내 차례가 못 돼요. 태민 씨, 미진 언니 모두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06화

    ‘나만 짝사랑한 게 아니었어. 나만 스트레스와 열등감을 느끼는 것도 아니었어.’‘수아도 나와 마찬가지였어! 이건 수아가 날 사랑하고 있다는 거잖아!’한 사람을 사랑해야만 늘 열등감을 느낄 수 있고, 상대방과 어울릴 수 있도록 더 강한 자신을 만들려 할 것이다.“좋아.”태민은 갑자기 수아의 손을 잡더니 정중하게 약속했다.“수아야, 네가 원하는 거라면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와줄게.”수아는 이 일이 이렇게 쉬울 줄 몰랐다.J시로 돌아온 이튿날, 재석은 수아에게 전화를 걸었고, M시 융합연구 포럼에 참가할 준비를 하라고 통지했다.수아는 태민이 재석에게 어떻게 말했는지, 또 어떻게 그녀가 조미진을 넘어 성공적으로 이 기회를 얻게 됐는지 몰랐다. 어차피 그녀도 이런 일에 흥미가 없었으니까.‘앞으로 3일, 마침내 교수님과 함께 지낼 기회가 생겼어!’원래 수아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어차피 실험실에서 그녀는 재석과 함께 감정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그러니 굳이 재석을 따라 이곳에 올 필요도 없었다.그러나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 반년 동안 재석은 의도적으로 수아를 멀리했던 것이다.한 무리의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재석은 수아를 포함한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했다.그러나 두 사람이 따로 남게 된다면, 재석은 자꾸 그런 자리를 피하려 했고, 항상 수아와 같은 곳에 있는 것을 거절할 이유와 구실이 있었다.수아는 당황했다.그녀는 마음속으로 불안해졌다.‘이러다가 교수님은 나와 점점 멀어질 거야. 더 이상 쟁취하지 않으면 아마도 기회가 없을 거라고.’그래서, 이번에 수아는 반드시 와야 했다.수아는 재석과 정은이 떠나는 방향을 보면서 주먹을 은근히 움켜쥐었다.어떤 결심을 한 것처럼 눈빛에 결단이 번쩍였다....이튿날, 융합연구 포럼이 정식으로 시작되었다.장소는 바로 호텔 옆의 회의실이었다.아침 8시, 초대 손님들이 속속 입장했다.9시, 포럼이 마침내 시작되었다.사회자가 단상에 올라 간단한 환영 인사를 전한 뒤, 본격적인 주제 강연 순서로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07화

    그 눈빛에는 부러움과 존경, 그리고 닮고 싶은 마음까지 담겨 있었다.‘언제 나도 그런 높이에 설 수 있을까? 실력으로 남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남들의 질투를 자아낼 자격.’정은은 한숨을 쉬었다.‘노력이 부족한 거지...’재석은 향후 10년간 자신이 집중할 연구 방향에 대해 발표했다.그는 ‘신개념 양자 얽힘’, ‘자유공간 채널에서의 양자광 간섭’, 그리고 ‘양자광 기반 3차원 영상화 기술’을 핵심 주제로 제시했다.남자는 속도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으며, 목소리가 낮고 듣기 좋았다. 내용도 전문성을 고루 돌보는 동시에 통속적이고 알기 쉬운 표현방식으로 기타 전문분야의 사람들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했다.지금의 재석은 스스로 후광을 띠고 있어, 사람을 탄복하게 하는 강대한 매력을 드러냈다.정은은 무대 아래에 앉아 미리 준비한 공책을 꺼냈다. 그녀는 들으면서 펜으로 필기를 했다.이 강연에 정신을 집중한 게 분명했다.멀지 않은 곳에서, 마찬가지로 무대 아래에 앉아 있는 수아는 무대 위의 양복차림을 한 재석을 보면서, 그가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이미 홀딱 반했다.남자의 그 잘생긴 얼굴을 보며, 수아는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듣지 못했다.지식은 흐르는 물처럼 수아의 왼쪽 귀에서 오른쪽 귀로 새어나갔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수아는 남자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이미 자신이 아직 융합연구 포럼에 참가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렸다.오직 이 순간에만 수아는 거리낌 없이 재석을 바라볼 수 있었고, 그를 생각하며, 자신의 가장 진실한 감정을 드러낼 수 있었다.매 강의가 끝나면, 30분의 질문을 주고받는 시간이 주어진다.또한 포럼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기도 했는데, 왜냐하면 사람들이 항상 다툴 수 있었기 때문이다.예컨대 지금처럼.의문을 제기한 이는 국민대학교에서 생명과학과 물리학의 융합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교수, 도하빈이었다.“말씀처럼 전문성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물리학 같은 전공 중심 학문만 의미 있고, 융합이나 다학제 연구는 쓸모 없다

Latest chapter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66화

    정은은 은혁의 그 아련하고 억울한 표정을 보자, 그냥 말이 안 나왔다. ‘대체 지금 머릿속에 무슨 드라마를 찍고 있는 거지...?’ ‘진짜, 할 말 없네...’오후 세 시 정각. 탑승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승객들이 하나둘 줄을 서고, 정은도 조용히 탑승했다.비행기가 거의 만석이 된 후, 은혁은 이코노미석 안에서 정은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A 열, F 열, 가운데 구역까지 샅샅이 훑었지만, 없었다.잠시 후, 탑승 문이 닫히고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승객 여러분, 곧 출발하겠습니다.”그제야 은혁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기내 앞쪽으로 조심스럽게 올라가 봤다.그리고, 비즈니스석 좌석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있는 정은을 발견했다.“정, 정은... 씨? 이코노미석이 아니었어요...? 나는 그게...”‘뭐지, 상황이 이상한데...?’ ‘내가 이코노미석이라 당연히 정은 씨도 그럴 줄 알았는데...’정은은 슬쩍 웃었다. “누가 그래요? 내가 이코노미석 탄다고?”“지난번에 올 때는... 그때는 분명...”“그때는 비즈니스석이랑 일등석이 매진이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코노미석에 탄 거고, 이번엔 자리가 있어서 그냥 비즈니스로 예약한 거죠.”‘아... 나 지금까지 뭐 한 거지. 혼자 다 짐작하고, 혼자 의미 부여하고, 혼자 낭만 타령하고...’은혁은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었다.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사실 은혁 씨는 나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그냥... 본인이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들을 뿐이죠.”그 말에는 어떤 분노도, 원망도 없었다. 그저 담담히 사실만 전달할 뿐.은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와... 진짜, 뼈 맞았다.’자리에 앉은 은혁은 좌석의 불편함을 바로 체감했다. 다리는 제대로 뻗지도 못하고, 의자도 푹신하지 않고, 무엇보다 공기 중에 떠도는 그 ‘답답한 사람 냄새’가 꽤 거슬렸다.‘내 마음이 아무리 복잡하다지만... 이건 좀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65화

    은혁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말문이 막힌 채, 몇 초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진짜... 남자 친구가 있었던 거야?’ ‘아니면... 나 때문에 그렇게 말한 걸까?’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지만, 정은은 이미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고 없었다....그 시각, 정은은 공장 회의실에서 진승구와 협의 중이었다. 조건은 명확했고, 가격도 이견 없이 깔끔하게 정리됐다.공장장인 진승구는 시원시원한 정은의 태도에 감탄했고, 그 자리에서 바로 계약서 인쇄를 지시했다.서류가 출력되자, 두 사람은 조용히 사인했고, 정은은 먼저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좋은 협력 관계 기대하겠습니다.”진승구도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받았다.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정은이 회의실을 나선 후, 문이 다시 벌컥 열렸다.“정은 씨는 어딨어요?” 은혁이었고, 숨이 가빠 보였다.“소... 소정은 씨요?” 진승구는 당황해하며 되물었다.“그래요, 그분. 지금 어딨어요? 아까 계약한다고 했잖아요? 그냥 바로 도장 찍지 말고 좀 더 시간 끌라고 했잖아요. 이틀 정도만 더 붙잡아 두지...”진승구는 식은땀을 흘리며 답했다. “아... 이미 계약 다 끝났는데요...”은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바보야, 바보... 진짜 바보!’속으로 열 번은 외쳤다. ‘이딴 놈한테 뭘 맡기겠다고...! 아버지한테 건의해야겠네. 앞으로 공장 접대비 전액 삭감... 출장자도 식당에서 밥 먹게 하고, 노래방은? 절대 금지!’은혁은 스스로를 다독이는 척했지만, 자꾸만 뇌리를 맴도는 정은의 말 한마디에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남자 친구가 있다... 그게 진짜든 아니든, 어제 그 말은 분명 나를 밀어내기 위한 거였어. 다 망친 거야. 다 그놈의 진승구 때문이야...’진승구도 그런 은혁을 보면서 이해가 안 됐다.‘은혁 도련님... 왜 저래...?’...정은은 과일 봉지를 하나 들고 김대영이 있는 작업실 쪽으로 향했다.“김 기사님, 누가 찾아왔어요!”“예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64화

    정은이 계속 말했다.“이미 결과 나왔어요. 기준에는 전혀 못 미치네요.”김대영은 들숨을 멈췄다. “그렇게 빨리?”‘진짜다... 이 속도면 혼자서 실험실 하나는 돌리겠다니까.’“그럼, 옷부터 갈아입고 올게. 오늘은 절대 민폐 안 끼칠게!”“감사합니다, 선생님.”“에이... 감사하긴! 당연한 거지!” ‘선생님이라니... 아저씨도 아니고, 기사님도 아니고... 선생님이라 불러주다니, 나 오늘 힘난다.’모든 준비를 마친 오전 8시. 연구실 측에서 드디어 3세대 샘플이 도착했다.정은과 김대영은 다시 책상에 마주 앉아 정밀 측정과 테스트를 시작했다. 시간은 어느덧 금방 흘러 점심시간.김대영이 말했다. “가자, 밥 먹으러.”“네.”식당으로 향하는 길, 두 사람은 오후 실험 플랜에 대해 대화를 이어갔다. 바로 그때, 헐레벌떡 뛰어오는 은혁의 머리는 약간 흐트러져 있었다.심지어 셔츠 깃은 구겨져 있었으며, 표정은 평소답지 않게 초조해 보였다.“정... 정은... 씨!”은혁은 숨이 차 헉헉거리며 말했다. “겨우 찾았어요...”정은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아침부터 계속 메시지 보내도 답이 없고, 호텔 방에도 없길래... 무슨 일 생긴 줄 알았어요.”은혁도 정은을 걱정한 그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6시 반에 나왔어요. 어제 은혁 씨 늦게 들어온 것 같길래 아직 잘 거라 생각하고, 일부러 안 깨웠어요.”정은은 솔직히 대답했다.“6시 반...”은혁은 민망한 듯 짧게 웃었다. 그리고 변명처럼 말을 덧붙였다. “나 어제... 일부러 취한 거 아니에요. 원래 술 그렇게 안 마시는데... 공장장이랑 애들이 자꾸 마시자고 해서...”“끝나고 또 노래방까지... 근데 거기, 이상한 데 아니고 진짜 건전한 곳이에요. 나 원래 그런 데 잘 안 가요.”정은은 담담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오해할 일도 없고, 솔직히 말해 저랑은 큰 상관도 없는 얘기예요. 그럼, 김 선생님이랑 밥 먹으러 가볼게요.”“아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63화

    정확히 말하자면, 한 사람에게 연락해야 한다는 걸 잊었다.오후에 재석이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 공장 쪽 진행 상황을 물어보는 짧은 통화였고, 그때 정은은 막 실험에 들어가 바쁜 와중이었다.“일 끝나면 내가 먼저 연락할게요, 알겠죠?”이 말은 바로 마지막에 정은이 한 한마디였다. 그리고... 그 뒤로 연락이 없었다.‘하... 진짜 미쳤어. 그 말 해놓고 까먹었다고? 이런 사람은 또 없을 거야’정은은 민망함에 얼굴을 문지르며 핸드폰을 들었고, 톡을 열자마자 미확인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하나같이 은혁에게 온 것들. [정은 씨, 지금 어디예요?][정은 씨, 밥은 먹었어요?][정은 씨, 같이 식당 갈래요?][...] 친절한 말들이었지만, 그 속엔 정은이 찾는 메시지가 없었다.‘아니지, 지금 연락해야 할 사람은 장은혁이 아니라...’정은은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지만, 몇 자 쓰다가 다시 전부 지웠다. 결국, 손가락이 향한 건... 영상 통화 버튼.띠-잠시 울리던 화면이 바뀌며, 재석의 얼굴이 화면에 떴다.정은이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일 끝났어?]“네.” 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피곤하지 않아?]“괜찮아요. 근데... 미안해요. 공장에서 나오는 길에 바로 연락하려고 했는데, 정신이 없었어요...”[괜찮아, 언제 연락하든 난 항상 여기 있어.]‘이 말, 왜 이렇게 따뜻하지...’ 재석은 가슴속에서 뭉근한 온기가 퍼졌다.그때, 문득 정은의 시선이 멈췄다. “지금 어디예요?”[집.]“집 어디요...? 방? 아니면...”재석은 순간 멈칫했다. 정은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화장실?”화면 속, 지나치게 가까이 잡힌 남자의 얼굴. 말도 안 되게 커진 이마와 눈, 화면에 머리까지 박을 기세였다.‘잠깐만. 이거... 설마...’“설마... 지금 옷 안 입었어요?”정적. 화면 너머의 공기조차 얼어붙는 느낌.재석의 얼굴이 굳었다. [씻으려고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62화

    정은은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매고 창밖을 슬쩍 바라봤다. 공장은 호텔에서 10km 떨어진 개발지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은혁이 운전대를 잡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 구역은 첨단 기술 산업 클러스터로 지정돼 있어서, 기술 협력 프로젝트도 대부분 그쪽으로 집중되고 있어요.” “정은 씨가 찾는 그 새로운 감온 정확도 소재는 우리랑 CG그룹이 공동 개발한 건데, 지금까지 1세대부터 3세대까지 세 가지 버전이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했고, 중간중간 전문적인 질문도 빠짐없이 던졌다. 은혁이 답할 수 있는 부분은 성의껏 설명했지만, 구체적인 수치나 실험 조건처럼 세세한한 부분은 바로 대답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약 20분 후, 두 사람은 공장에 도착했다. 은혁이 미리 연락해 둔 덕분에, 정문 앞에는 담당자가 나와 있었다.정은은 안내받아 간단히 실험실과 공장을 둘러봤다. 연구 구역과 생산라인은 전혀 겹치지 않게 구획이 나뉘어 있었고, 현장도 전반적으로 정돈된 느낌이었다.정은이 요청한 소재의 1세대와 2세대는 이미 완제품으로 확보되어 있었지만, 3세대는 아직 실험 단계였기에 정식 생산은 되지 않았다. 따라서 실험실에서 직접 합성해야 했다.“시간은 얼마나 걸리죠?” 정은이 은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혁은 옆에 있는 연구원을 바라봤다.“8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내일 오전엔 제품 받아보실 수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관련 비용은 정산대로 처리해 주세요. 최종 결정되면 한 번에 입금할게요.”은혁은 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비용은 무슨 비용... 정은 씨,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요.”정은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럴수록 더 딱딱하게 해야죠. ‘친할수록 돈 문제는 분명하게.’ 이건 기본이에요. 더군다나, 우리 둘은 그냥 ‘친구’일 뿐인데, 은혁 씨가 도와주는 것만 해도 충분히 고마워요.”“게다가 실험실도 예산이 따로 있는 조직이고, 모든 비용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61화

    실험실에서 진욱은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르게 재석을 힐끔거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다가갔다. “재석아, 너 오늘 길 가다 돈 주웠냐?”실험대 앞에서 입꼬리를 내릴 줄 모르던 재석의 손이 잠깐 멈췄다. “데이터 정리는 다 됐어? 3차 실험 가능성 평가 보고서는 언제 낼 건데?”“하, 이 사람 분위기 다 깨네.” 진욱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근데 말이야, 오늘 아침에 네가 샌드위치 먹는 거 봤거든.”“그래서?”“정은이가 해준 거지? 다 알아. 너희 둘, 다시 잘 되는 거야? 그것도 아니면, 이제 미련 접은 거야?” 재석은 살짝 고민하다가, 이제는 말해도 되겠다 싶어 입을 열려고 했다.바로 그때, 핸드폰에서 톡 알림이 떴다. 정은이었다.[도착했어요. 샌드위치는 맛있었어요?]재석은 바로 답장했다.[맛있었어.]정은은 곧장 자신의 일정을 재석에게 알려줬다.[지금 호텔 체크인하고, 오후엔 공장 갈 거예요.][응, 알겠어.]1분 정도 지났지만, 그다음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재석은 괜히 허전해졌다.‘예전에도 이렇게 대화했었는데... 왜 지금은 이걸로는 부족하지?’정은과 더 오래 이야기하고 싶었다. 더 많은 말, 더 사적인 얘기, 더 가까운 거리. 그 마음은 마치, 가려운 곳을 손톱 끝으로 슬쩍 긁은 느낌. 절대 시원하지 않았다. 그냥 더 간지러워질 뿐.‘그냥, 정은이한테 세게 할퀴어지고 싶은데...’“누구랑 톡하냐?” 진욱이 슬쩍 핸드폰을 들여다보려 다가왔다.재석은 피할 틈도 없이 화면을 들킨 셈이 됐다. “뭘 감춰. 정은이랑 메시지 주고받는 거잖아. 왜? 뭐가 부끄럽다고.”“됐고.” 재석은 핸드폰을 집어넣고, 실험대에서 내려왔다. “오늘 점심은 내가 쏜다. 뭐 먹고 싶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몇 초 멈췄다. 옆에 있던 미진이랑 태민이 눈을 마주쳤다. “교수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갑자기 점심을요?”재석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먹고 싶은 거 생각나면 전 교수한테 말해.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60화

    비행기 이륙 직전, 은혁이 정은에게 제한했다. “정은 씨, 내 마일리지로 좌석 업그레이드해 줄게요.”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은혁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다시 다가와 말했다. “내가 정은 씨 옆자리로 바꿨어요.”비즈니스석에서 이코노미석으로 자리를 바꾸다니, 웬만한 사람이면 거절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은혁 씨,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정은은 단호한 어조였다.‘처음으로 이렇게까지 분명하게 말한 것 같아.’정은은 연애 한 번 안 해본 소녀가 아니었다. 은혁의 눈빛에 담긴 감정이 어떤 건지, 모를 리 없었다.하지만 그동안 굳이 선을 긋지 않은 건, 은혁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며, 오히려 몇 번이고 도와줬기 때문이었다. 이번 Z시 출장도 은혁의 도움 덕에 가능했던 일이었다.게다가 은혁이 고백도 안 했고, 정은이 불편할 정도로 다가온 것도 아니었으니까... 정은도 자신이 먼저 딱 잘라 말하는 게 오히려 예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그때의 정은은 솔로였고, 재석이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자극은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정은은 이미 재석과의 관계를 정리했고, 은혁은 더 적극적으로 다가오고 있으니, 그녀도 이제 더 늦기 전에 확실히 은혁에게 말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래야 서로 상처받지 않을 테니 말이다.은혁은 정은의 말에 잠시 당황한 듯하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난 정은 씨 옆자리에 있는 게 좋아서 그래요.”정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즈니스석 티켓을 사 놓고 누구랑 자리를 바꾸든, 그건 상대방의 자유니까. 굳이 뭐라고 할 필요는 없지.’그 후, 정은은 노트북을 열고 일에 집중했다. 은혁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틈틈이 정은을 흘끗거렸다.그러다 손을 들어 승무원을 불렀다. “저기요. 잠깐만요.”“네,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59화

    결국 재석은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정은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열쇠를 건네받아 현관문을 열어주었다.“정은아, 잘 자.”그 한마디.‘정은아’라는 이름이 너무나 자연스럽고도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마치 수천 번은 불러본 것처럼.그 말에 정은은 순간 멍해졌다.‘왜 내 이름을 듣고도 가슴이 이렇게 설레지?’“네, 당신도 잘 쉬어요.”둘은 그렇게 짧은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문 안으로 들어갔다.그날 밤. 정은은 평소와 달랐다. 샤워를 마친 뒤 늘 하던 루틴, 논문 체크나 프로젝트 정리는 손도 대지 않았다.대신,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들고 재석의 SNS를 열었다.‘뭐 하는 거야? 나...’그런데 이상하게, 자꾸만 궁금해졌다. ‘이 사람, 평소에 어떤 거 올리지?’재석은 SNS 설정 따위는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맨 아래까지 내리는 데 몇 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포스트 총수, 대략 서른 몇 개. 그중 90%는 논문, 연구, 산업 동향 공유.‘진짜 성실한 연구자 모드네...’그나마 정은과 관련 있는 건 얼마 전 실험실이 SCI 논문 게재됐을 때 서비대학교 공식 계정에서 축하 포스팅한 걸 공유한 것뿐이었다.[축하합니다.]짧고 건조한 멘트.그 밑엔 전진욱과 조미진이 ‘좋아요’를 눌러뒀다.‘이게 전부야?’그렇게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던 순간, 알림이 하나 떴다. 재석이 새로운 글을 올렸다.정은은 무심코 눌러봤다. [r = a(1 - sinθ)]‘...어?’정은의 손가락이 멈췄다. 이 수식, 익숙했다. 너무 익숙해서 순간 심장이 멈칫했다.댓글 첫 줄엔 진욱이 있었다.[극좌표 함수? 밤에 안 자고 뭐 하세요? 조 교수님?]조미진과 손태민은 말없이 ‘좋아요’만 눌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속으로 ‘다음 연구 주제가 광학 쪽인가?’ 생각하며 혼란스러워했다.아무도 몰랐다. 이 수식의 진짜 의미를.‘r = a(1 - sinθ)’, 하트곡선.‘설마 이게, 그거? 진짜 그거... 맞아?’정은은 손끝을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58화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